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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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조명

 

모든 전쟁은 나쁘다는 것

 

 

김해자 金海慈

시인. 시집 『무화과는 없다』 『축제』 『집에 가자』 『해자네 점집』 등이 있음. haija21@naver.com

 

안재성 安載成

1960년 경기 용인에서 태어났다. 1989년 장편소설 『파업』으로 전태일문학상을 수상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장편소설 『경성 트로이카』 『황금이삭』 『연안행』을 비롯해 박헌영, 이관술, 윤한봉, 이재유, 이태준, 이일재 등 한국 근현대사의 인물을 그린 다수의 평전을 썼다.

 

 

왼쪽부터 안재성, 김해자

왼쪽부터 안재성, 김해자 ⓒ 강민구

 

 

안재성 작가를 오래전부터 ‘글 노동자’라 생각해왔다. 그는 늘 무언가를 집필하고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예술적이라고들 말하는 소설이라기보다, 있는 그대로의 삶과 시대를 복원하는 일에 가까웠다. 스스로 밝혔듯 그는 “불행했던 우리 역사의 숨겨지거나 외면된 진실을 복원하고 비극적으로 숨져간 영혼들을 달래는 글 무당처럼 살”았다.(324면) 대체 어느 영령이 시켜 현대사의 아픈 희생양으로 죽어간 이관술, 박헌영, 이현상 등을 살려내는 데 청춘을 다 바친단 말인가. 만나자마자 생년월일을 물었더니 그의 별자리는 체제가 일궈온 아성을 무너뜨리는 왕따의 대명사 물병자리. ‘시간의 낫’과 정면 대결하는 ‘토성’이자, 낡아서 인간을 얽어매는 족쇄가 되어버린 보수질서를 부수는 ‘천왕성’의 인간이구나. 만약 춤 선생을 했다면, 안재성은 스포트라이트 받으며 춤추는 쌍들을 살짝 밀쳐내고, 구석에서 어눌하게 스텝을 밟고 있는 사람들을 가운데로 데려올 것이다.

 

“『파업』(세계 1989)을 썼을 땐 함께했던 동시대 사람들이 눈에 보였는데, 한 십년 정도 현실운동에서 떨어져 있다보니까, 식민지 시대에 저항했던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거야. 민족을 찾겠다고 하는 사람들은 크게 관심이 없고, 민족주의는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 인류는 모두 같은 사람들인데 뭐. 물론 민족이 중요하지만 그걸 글로 쓰고 싶은 생각까진 없다고. 그런데 계급과 결부된 운동을 하다 죽어간 사람들에 대해선 관심이 가요. 이재유 김삼룡 이현상 등 일제시대 사회주의자들의 활동을 다룬 『경성 트로이카』(사회평론)가 2004년에 나왔지. 그다음에 『이관술 1902-1950』(사회평론 2006) 쓰고, 그때 정치운동을 지배했던 사람들이 누구였나 공부하면서 『박헌영 평전』(실천문학사 2009)을 쓰게 됐고, 또 빨치산 전체운동을 지휘했던 사람을 조명하다보니 『이현상 평전』(실천문학사 2013)을 쓰게 됐어. 박헌영 이현상까지 쓰고 나니까, 이제 이름 없이 죽어간 사람들이 눈에 밟혀. 내가 앞에서 쓴 사람들은 역사에 이름이라도 남겼잖아. 그런데 하급대원들 말이야, 밑에서 일하며 끊임없이 죽어 나갔던 사람들, 엄청난 이야기는 없겠지 하면서도 거기에 관심이 가더라고.”

 

초등학교 5학년 때 중편소설을 쓴 ‘어린 소설가’ 안재성은 고등학교 2학년 때 단편을 완성해 교지에 실었다. 두 소설의 주인공은 거지이거나 억울하게 도망 다니는 가난하고 외로운 사람들. 80년대 노동운동에 뛰어들면서 소설 속 주인공들은 저항하고 투쟁하면서 상황을 적극적으로 개선하려는 사람들로 바뀌었다. 첫 장편이 『파업』인데, 주인공은 파업하다 분신해 죽은 실제 인물 박영진이 모델이다. 한동안 안재성은 시골에 자리를 잡고 포클레인 기사와 복숭아 농사꾼으로 살았다. “세상에서 별로 할 일이 없다 생각”하고 몸만 쓰고 살았다.

 

 

글 무당의 죽음 같은 통과의례

 

“근데 타로카드를 보면 작년이 죽음인데…… 꼭 물리적으로 죽는다는 게 아니라 죽음 같은 통과의례를 거치……” 이렇게 운을 떼자 돌아오는 그의 말. “그래, 나 작년에 죽었다 살았잖아. 류마티스 다발성 근육염이라고, 온몸의 근육이 매를 맞은 것처럼 붓다 못해서 백혈구가 스스로 내 세포를 잡아먹는 희귀병이래. 근육이 너무 아프니까 백혈구가 통증의 원인인 내 세포를 적으로 보고 잡아먹는 거지. 버티다 못해 쓰러져 응급실에 실려 갔어. 차에서 내 다리로 내리지도 못하고…… 의사들이 일주일 안에 결정 난다고 그랬어. 통증이 말도 못해. 병원에 입원해서도 불치병이라고 하니까.” 안재성이 사투를 벌이던 무렵, 좌우의 격돌이 벌어진 한국 현대사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린 그리스도처럼 죽어간 ‘정찬우’라는 영령이 찾아왔다.

무섭게 생긴 갈고리 손이 소매 밑으로 삐죽 나오거나, 여름에도 국방색 군복 속에 없는 팔을 휘날리고 다니는 넝마주이나 다리 저는 엿장수들이 보이곤 하던 60년대 중반쯤, 7살 때 고향 떠나 22년 만에 돌아와 동생 농사일을 거들던 서른 중반의 허여멀건 남자가 있었다 치자. 경찰이 뻔질나게 드나드는 걸로 보아 빨갱이였다고도 하고, 북한 유수 대학을 나온 인텔리라고도 하던 이 남자에게 홀딱 반해버린 여고생이 있었다 치자. 그것도 말 그대로 전북 고창의 유복한 최진사댁 셋째 딸이. 나이 차이도 많은데다 빨갱이로 소문난 총각이니 여자 집에서 난리가 났겠지. 약혼사진 한장 박고 동거에 들어갔는데 애를 낳자마자 5개월 만에 이 남자가 갑자기 죽어버렸으니, 혼인신고도 안 되어 있고 신고를 한다면 빨갱이 자식이 되니까, 출생신고도 안 하고 애를 혼자 키웠다. 그런데 이 남자가 남겨놓은 비장의 카드가 더 있었으니, 꽁꽁 묶어 장롱 속에 넣어놓은 종이뭉치.

 

“혼자 남은 여자가 어느날 몇장 읽어보니까 북에서 내려온 인민군 이야기니 얼마나 무서워. 그땐 귀신보다 더 무서운 게 빨갱이였으니까. 이 최진사댁 셋째 딸은 또 공산주의랑 아무 상관도 없고 남자 하나 좋아서 도망가 살았는데 뭐, 스스로도 빨갱이가 무서웠겠지. 참 남편 유고니 버릴 수는 없고 장롱 속에 꽁꽁 묶어 넣어놓고 이후로 한번도 열어보지 않았겠지. 그때 5개월이던 딸을 통해 나중에 그 수기가 나한테 왔어. 읽어보니 참 재미가 있더라고. 그치만 다른 사람들은 재미없을 거라고 생각했어. 이걸 누가 출판해주겠나 싶어서 그냥 타이프 쳐놓고 있다가, 줄거리나 문장에서 손볼 데가 너무 많다보니 차라리 소설로 바꿔야겠다 해서 초고만 써놓았는데, 마침 쓰려져 병원에 실려 간 거야. 손가락도 못 구부렸어. 머리도 못 감고 칫솔질도 못해.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게 낫겠는데, 죽어야겠는데 수면제를 사 모아야 하나 교통사고를 내야 하나, 별생각을 다 했어. 이 원고를 그래도 출판은 해주고 죽어야 할 텐데…… 근데 마침 사람들이 면회 왔길래 아파도 즐겁게 해줘야 하잖아. 해서 정찬우 이야기를 해주다보니 듣던 친구들이 이거 출판을 하자, 이렇게 된 거지.”

 

 

누가 저 하늘을 막아주었으면

 

이 꽁꽁 묶인 수기 속의 주인공, 당시 평양여고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선생이었던 ‘정찬우’는 1950년 7월 4일 전쟁이 발발한 지 열흘째에 인민군 전선사령관 김책을 만나 영남지방 교육위원으로 남하한다. 하사받은 붉은 비단보 속엔 소련제 또가레프 권총과 탄알이 있었다. 김일성종합대학의 총장 딸과 혼인 약속까지 되어 있었는데, 가고 싶냐, 가겠냐, 물어본 적도 없이 당 중앙이 일방적으로 결정한 일이었다. 1929년 음력 7월 8일생이니 당시 22세였다.

 

“전쟁 일어나는 그날까지 몰랐어. 사전에 선전포고를 했어, 국민투표를 했어? 인민군 자신들도 몰랐다니까. 군인이니 당연히 최전선 삼팔선에 배치되어 있던 거고, 적이 북침했으니 정의의 대반격전을 하라니까 내려온 것뿐이야. 월북 소설가 이태준이 취재해서 쓴 글만 봐도 알 수 있어. ‘영용한 인민군대가 미군의 대대적인 공격을 물리치고 웅진반도와 해주를 반나절 만에 점령했다’ 이렇게 나와. 미군이 그렇게 무능하다고? 황당하지만 이태준은 들은 대로 옮긴 거지. 삼팔선에서 이승만의 도발로 국지전이 있던 건 사실이지만, 전면 남침이 시작되기 전까지 10개월간은 미군의 통제로 국지전조차 거의 없었어.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미군이 총공격을 했고 또 불과 반나절 만에 인민군이 이를 격퇴하고 사흘 만에 서울까지 내려왔다니, 모든 게 거짓 선전이야.”

 

정찬우가 내려와 본 서울은 고요했다. 전승의 자취는 없고 피난민 행렬만이 이어지고 있었다. 인민군이 점령한 서울에서는 붉은 완장을 찬 자위대원들의 우익에 대한 보복이 횡행했다. 대전에 이르자 제트기가 기총소사를 하고, 폭격기가 소이탄을 투하하고 있었다. 화염과 주검이 널린 아수라장이었다. 미군의 공습으로 “폭탄 파편에 맞아 내장이 흘러나”온 여인의 곁에 “갓난아이가 (…) 엄마의 젖꼭지를 매만지고 있”었다.(44면) ‘이것이 해방이란 말인가?’ 회한을 되씹으며 남하할 수밖에 없던 그해 겨울, 정찬우는 유엔군과 인민군 양측이 전력을 총집결한 극악한 마산지구 진동면 전투의 한가운데 있었다.

 

“정찬우는 그곳이 진동인지 어딘지 지명도 몰라. 인민군 사령부에서 12단고지라고 부르니까 그대로 써놨어. 진동고개만 넘으면 바로 마산 시가지야. 낙동강 전선 중에서 부산과 제일 가까운 곳이야. 인천으로 상륙하면 바로 서울이듯이. 이 사람이 바로 이곳에 있었던 거지. 미국이 마산 앞바다에다 함포를 대놓고 거기에다 무지하게 때렸잖아. 진동고개가 지금 가도 험한 산이야. 바다 끝까지 산이 이어져 있어. 거기서 한달 반 동안 싸운 거지. 국군 입장에서도 이쪽만 뚫리면 부산은 한나절 안에 함락되는 상황이야. 그래서 국군과 인민군 지휘부 양쪽에서 총력을 쏟았다고. 하지만 인민군이 무기에서 이길 수가 없지.”

 

1950년 9월 초 남하한 인민군이 적당히 꾸며 총사령부에 올린 보고서가 있었다. 평양사령부는 진주사령부 군관들의 조사만 믿고 대규모 낙동강 도하작전을 감행하기로 결정한다. 중부전선 휘하의 각 사단과 독립연대, 서부전선 산하의 정규군과 의용군 부대와 유격대 출신의 특공대까지 총집결해 낙동강 건너 부산까지 밀고 가는 전략이었다. 인민군은 동부전선에 먼저 맹렬한 공격을 개시하고, 마치 인민군이 낙동강 전선을 포기하고 경북지역으로 전선을 옮긴 것처럼 위장했다. 하지만 이상했다. 모든 무력이 총동원된 대부대의 진군을 모르는 듯 응전하지 않던 유엔군은 인민군 선발대가 도하하자 사격을 개시했다. “현대식 토치카에서 어찌나 세찬 불을 뿜는지 한걸음도 나아갈 수 없”(73면)는데 명령이 떨어졌다. “보위부대 앞으로!” “김일성 장군의 전통을 받들어 앞으로!”(74면) 9월 25일 새벽 네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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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병사들이 우박처럼 쏟아지는 탄환 속을 헤치며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무토막처럼 쓰러져갔다. 화약내와 피비린내가 코를 찌르는 죽음의 장막 속으로 달려가는 병사들은 이미 삶에 대한 희망 따위는 버린 것 같았다. 달리는 숫자보다 쓰러진 숫자가 더 많아도 그들은 계속 달리기만 했다. 자신이 어디 다쳤는지, 옆에서 누가 쓰러져 죽는지 분간할 여유조차 없이, 오로지 총탄이 자신을 비껴가기를 바라며 모든 것을 운에 맡긴 채 허둥지둥 어지러운 발길을 달리는 것처럼 보였다.(74면)

 

주저앉거나 뒤로 도망치는 병사는 뒤에서 독전하는 권총에 맞아 죽을 판이었다. 그때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유엔군의 제트기와 폭격기가 하늘을 뒤덮었고 인민군을 폭격하기 시작했다. 몰살 위기였다. 오죽하면 임화가 “누가 저 하늘을 막아주었으면!”(76면) 하고 시를 썼겠는가. 이때 세기에 없는 기형적 전투명령이 내려졌다. “모든 총구를 하늘로 돌려라!” “일제히 공중사격!” 하늘과 땅의 어처구니없는 대결이었으나 당하고 있는 것보다는 나았다. “불탄을 퍼붓던 제트기와 정찰기들이 하나둘 격추되”기 시작한 것이다.(77면) 부대의 반에 해당하는 목숨을 바친 전투 상황을 보고받던 김책 사령관이 참모장에게 무어라 말하려는 순간, “폭음과 함께 흙덩이들과 갈가리 조각난 살덩이가 솟구쳐 올랐다.”(78면) 잇달아 날아온 포탄에 작전참모가 사라졌다. 미군의 함포가 등장한 것이다. “낙동강 전선은 비행기와 총과 야포가 주인으로, 사람 목숨은 날파리 목숨만도 못하게 사라지는 죽음의 세계였다. 인간이 만들었지만 인간 세상이 아니었다.”(67면) 사령부로부터 전 부대를 평양으로 올려 보내라는 총퇴각명령이 떨어졌다.

 

“한 나라의 군 지휘부라면 세계정세와 피아의 전력을 파악해서, 정보를 제대로 모아서 전쟁을 일으키든가 말든가 해야지, 무조건 공격만 하라니, 얼마나 무능하고 관념적이야 작전 명령이. 그건 남한도 마찬가지였어. 사령부에 앉은 자들과 실제 전선에서 전쟁의 고통을 겪어야 하는 이들은 전혀 다른 세상, 다른 시간을 보낸 거야. 김일성이 죽었어, 이승만이 죽었어? 스탈린과 각료들이 전쟁터에서 죽는 거 봤어? 권력자가 지가 죽을 것 같으면 왜 전쟁을 일으켜? 실제 전투에 참가한 이들은 그들을 대신한 희생양인 거야. 전투에 끌려다니다 죽고 감옥살이 10년, 20년씩 하고. 이 전쟁은 옳고 저 전쟁이 틀린 게 아니라고. 모든 전쟁은 나빠. ‘정의의 국가’ 따위도 없어. 중국은 좋고 미국은 나쁘다? 소위 진보라는 사람들이 그런 헛소리를 하고 그랬다니까. 정의로운 전쟁? 정의로운 국가? 그런 건 인류 역사에 절대 없어.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정찬우는 폭발의 후폭풍이 닥칠 때마다 몽유병 환자처럼 쓰러졌다가 일어나기를 되풀이하며 방향도 없이 이리저리 허둥지둥 어지러운 발길을 옮겼다. 기어코 살아야겠다는 의지도, 절대 죽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도 가질 수 없었다. 생명을 노리는 포탄 파편이 귓전을 쌕쌕 날아가는 사선이었다. (…) 한참이나 정신없이 맴돌다보니 무조건 북쪽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방금 떠나온 구덩이에 마치 겨냥이라도 한 듯 정확히 포탄이 떨어지는 것이었다. 이제는 덮어놓고 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80~81면)

 

 

전쟁, 집단적 정신분열 속에서

 

1951년 초 중국공산당 팔로군 백만 대군이 밀고 내려오는 중이었고, 이현상이 천여명으로 구성된 남부군을 편성, 태백산맥을 따라 남하 중이었다. 그러나 화염에서 살아남은 ‘정찬우 같은 사람들’은 독 안의 쥐요 덫에 걸린 토끼, “어디로 달아나면 살아날 것이라는 희망조차 없이, 단지 가만히 앉아 있으면”(133면) 총포에 맞아 죽거나 배고파 죽거나 얼어 죽을 판이라 도망치는 신세였다. 지척에서 “낮은 비명과 함께 쓰러진 이옥련의 왼쪽 가슴에서 솟구친 선혈은 흰 솜옷을 순식간에 적셔들어갔다.”(136면) 서울에서 자신의 비서로 임명되어 따라온 스무살 아가씨였다. 여학교 다닐 때 지하 남로당 세포활동을 하다가 두번이나 잡혀가 서북청년단의 고문을 받았던 소녀였다. 처절한 생사를 같이했던 그녀는 도망가자고, 어찌됐든 살길이 있을 거라 정찬우에게 애원했었다. 땅이 얼어 묻지도 못하고 “털 점퍼로 피에 젖은 가슴을 덮어주고 목도리로는 손발을 싸주고 수건으로 얼굴을 가려주”고, “시신 위에 나뭇가지를 꺾어 올려놓고” “곁에 있는 소나무 밑동에 ‘이옥련의 묘’라고 손칼로 새”(137면)기는 정도가 산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일 뿐.

 

“최전선의 여성들이 도발적이라고 할까? 애정표현에 매우 적극적이더라고. 적어도 이 수기에 따르면 여러 여성이 정찬우에게 사랑을 고백해. 평화시대의 자유로운 영혼하곤 달라. 생사의 기로에 놓여 있으니까, 본능적으로 남성과 한 몸이 되려는 욕망이 훨씬 강해지는 것 같애. 정찬우 수기의 장점은 거시적 흐름만이 아니라 그런 미시적인 모습들을 생생하게 보여준다는 거야. 내가 제일 많이 참작하는 게 전쟁 수기와 증언들이잖아. 이제 증언할 사람 다 죽었지만. 그런데 이 수기는 아주 세세한 삶의 모습을 보여줘. 사지니까 더 그랬겠지. 스무살 스물두세살 나이에 이대로 죽을지 모르는 생사의 기로에서 나오는 진짜 생명 본능 아니었을까?”

 

미쳐서도 죽었다. “야밤에 마을에 침입해 식량과 가축을 빼앗고, 밥술이나 먹는 사람은 반동분자라고 죽여버리고” 도망쳤다 잡히면 “죽창으로 피 곤죽을 만들어버리는”(151면) 광경을 직접 본 자가 정상일 수 있겠는가. 내가 내 이웃과 동지와 동족을 잡아 죽이는데, 내가 내 세포를 잡아먹는데…… 빨치산 출신 대원들의 포악성을 지적하던 인민군 중좌를 간호원과 간음했다는 이유로 돌로 쳐 죽이며, 이에 분개한 중좌의 연락병이 빨치산 간부를 대검으로 찌른 장면을 목격한 사람이 제정신이겠는가. 전쟁은 피아 모두를 광기와 정신분열로 내몰았다. 1950년 9월 14일 인천상륙 직후 국군과 지역주민들이 인민군 부역자들을 색출해 무참히 학살했다. 이때 죽지 않은 사람은 고기밥이 되었다. “철사로 수십명씩 엮어 산 채로 바다에 밀어넣어 수장”한 것.(246면) 전쟁으로 남한 민간인이 백만명 죽었다면, 그중 삼분의 일은 이승만 군대가 직접 잡아 죽인 거였다. 전쟁 전부터 지리산 일대에서 빨치산으로 활동했던 이들과 전쟁 때 함께 내려온 인민군 출신 패잔병 사이의 갈등도 극에 달했다. 작은 권력자들은 모질게 동료를 잡아 죽이고, 큰 권력자들은 큰 정적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했다.

 

“세르비아 내전이나 보스니아 내전을 보면 그래. 그 사람들이 서구의 지성인데, 더구나 평등과 평화를 가르친다는 사회주의 국가에서 70년 동안이나 이타주의 교육을 받았는데, 근데도 전쟁이 터지니까 정의니 평등이니 사랑이니 민주주의 그딴 게 어딨어? 현대사 공부하면서 한국인이 유달리 잔인한가 했는데 똑같더라고. 유럽의 지성인이라는 사람들도 강간하고 잘라서 죽이고 불태워 죽이고, 이루 상상할 수 없는 잔인한 짓들을 대놓고 하더라고. 그것도 1990년대에. 인간 본성 그 자체가 변하진 않는 거 같아. 사회적인 통제와 체제로 간신히 유지하는데, 그게 흔들려버리고 시스템이 망가지면 정말 짐승보다 훨씬 더 잔악해져. 투쟁과 전쟁은 달라. 부조리를 개선하기 위한 투쟁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지. 언제든 계속 싸워야만 그나마 사회정의를 지킬 수 있어. 하지만 전쟁으로 번지면 안 돼. 전쟁이 일어나면 멀쩡했던 사람들까지 짐승보다 사악한 괴물로 재탄생하더라고. 짐승은 아무리 싸워도 자기 목숨만 건지면 그냥 가버리지만 인간은 무기와 증오심을 가지고 사람을 죽이잖아.”

 

정찬우가 산을 헤매다 만난 은거지 속의 윤성남도 반쯤 미쳐 있었다. 정찬우의 기사로 남하한 그는 투항한 빨치산의 선무방송을 듣자, “귀를 가린 채 고개를 무릎 사이에 처박고 온몸을 부들거”(153면)리며 불안과 조바심에 떨다 발작적으로 튀어나가 죽는다. “백두산 백두산! 두만강 두만강이다. 푸른산 푸른산에서 까마귀 까마귀를 잡았다. 숫놈 일곱, 암놈 다섯 모두 모두 열둘, 열둘이다.”(159면) 전쟁에서 진 자들은 잡아 죽여도 되는 짐승일 뿐이다. 암까마귀 수까마귀 몇놈 죽였을 뿐이다. 겨울산 상여 속에 산송장이나 다름없는 상태로 정찬우는 토벌대에 의해 상여째 들려 야전병원으로 옮겨진다.

 

 

기생충이 아니라 몸뚱이가 되어버렸다

 

정찬우가 전전한 포로수용소와 교도소엔 대리 폭력자들이 득실거린다. 정찬우는 어느새 헌병들과 친해져 다른 포로들이 누리지 못하는 특권을 행사하는 박창섭 같은 사람들 아래 놓인다. 열렬한 충성의 증거로 다른 포로들의 반항적 언행을 고자질하고 폭력을 가하며 매일 생사람을 잡는다. “광목이 드리워진 칸마다 잔인한 연극들이 벌어”졌다. 고문하는 감찰과 애걸복걸하는 포로의 모습이 식민지 시대 일본 경찰서의 풍경과 비슷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고문을 가하는 자들이 대개 북쪽 사투리를 쓴다는 점.”(192면) 공산주의가 싫어서 월남한 북한 출신들만이 아니라, 공산주의에 절대 충성하다 포로가 되자 극우익으로 돌변해 동료를 고문하는 자들 역시 북한 사투리를 썼다.

 

곡괭이 자루가 춤추기 시작했다. 이간수장은 고통을 견디지 못하는 정찬우가 본능적으로 몸을 이리저리 굴려도 용케 허벅지를 찾아서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나도록 곡괭이 자루를 내리쳤다.(266면)

 

“이 새끼 비끄러매!”

숨 가쁘게 명령하는 이간수장의 구미에 맞게 최간수가 날랜 동작으로 정찬우의 두 팔을 뒤로 젖히고는 포승줄로 칭칭 조여 맸다. 피가 통하지 않자 손등이 금방 퉁퉁 부었다. 붉어졌다가 하얘진 얼굴은 새까맣게 되었고 두 팔은 은어처럼 팽팽해지고 얼굴에는 진땀이 빗물처럼 흘러내렸다. 심장은 파열될 듯 아팠다. 견디다 못해 쓰러진 정찬우는 바닥에 뒹굴면서 고함쳤다.(268면)

 

가하는 자도 당하는 자도 분노와 복수심을 주체할 수가 없다. 제비뽑기로 의용군에 끌려왔는데 자원해서 입대한 것처럼 진술서를 쓰게 된 조관병은 작은 권력자의 “옆구리를 차서 똥통에 쓰러뜨린 후 주먹으로 갈겨 안면에 타박상을 입힌”다. “억울해서 견딜 수가 없어 너 죽고 나 죽자는 심정”이 된 것이다.(195~96면) 극좌였다가 극우가 되어 포로수용소 내의 실권을 잡은 기회주의자들은 “기생충이 아니라 바로 몸뚱이가 되어버렸다.”(274면) 105부대장 이봉춘은 국군의 수족이 되어 자신이 한 일을 동료들에게 덮어씌우고 허위자백을 강요한다. 인민군 후퇴 때 유격전 문제로 언쟁하다 “다른 부대장들을 비겁자라고 비난하며 권총을 들고 설치”고, “조금만 수틀려도 아무에게나 반혁명분자니 기회주의자니”(185면) 몰아붙였던 자들이다. 남한의 “반공주의자들 역시 저런 자들을 앞세워 약한 사람을 억압하”는(191면) 우스운 세상이 되어버렸다. 이 모두가 전쟁이 낳은 정신착란이 아닐까. “선과 악의 경계를 오가던 이봉춘도 그랬고 박창섭도 그랬다. 어쩌면 정찬우 자신도 정신분열 상태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절대 진리나 절대 선이 존재하지 않음에도 북 아니면 남을 선택해야 하고, 공산주의 아니면 자본주의를 선택해야 하는 처지가 정신을 분열시켜놓았다”고.(227면)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으로 3년간 수백만명이 살상된 동족 간 전쟁이 멈추었다. 한달 만에 반공포로 2만 7천명이 석방되고, 나머지 포로 십만명이 판문점을 통해 북송되는 상황에서, 민간인이자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남한 사람으로 분류되어 남북 어디로도 방면되지 못한 정찬우는 건빵봉지와 약봉투를 붙이면서 사방 10센티미터의 판자를 밥그릇으로, 포탄피를 국그릇으로 쓰던 교도소를 전전한다. 그러나 잡범들 사이에서도 작은 권력자는 존재했다. 죄수 중에서도 왕초 격인 잡역과 지도라는 자들은 작업뿐만 아니라 배식 같은 생활영역에서도 막강한 권한을 행사했다. 그들에게 아랫도리를 제공하는 댓가로 일은 안 하고 밥은 두세 몫 챙겨먹는 남창들이 있을 정도였다. 댓가로 일은 안 하고 밥은 두세 몫 챙겨먹었다. 폭행과 조롱과 멸시와 모함은 일용하는 양식이었다. 이승엽 박헌영 임화 등이 미국간첩으로 몰려 처형된 후, “이승엽을 아는가?” “김일성이가 니 애비인가?” “스탈린이 느그들 하나님이지?”(256, 258면) 따위의 말로 조롱하며 구타해도 항의할 수도 없는 정찬우 같은 빨갱이는 이들에게 때려죽여도 되는 제물이었다.

 

 

애도하기 위해선 기억해야 한다

 

삽자루와 곡괭이 자루가 부러지도록 맞는 상황에서 정찬우는 “잘살아보겠다는 마음도, 두려운 생각도 가셔버렸다.”(263면) 뒷수정을 채운 상태에서 이와 모기에 뜯기면서 ‘이 지경이 되어서까지 살아야 하나?’ 회의하던 정찬우와 감방동기들은 이제 대놓고 지하세포를 조직한다. 젓가락을 칼처럼 벼려 마룻바닥을 찍으며, 타는 가슴을 모닥불로 맹세하며, 황금 2백근을 숨겨놓고 체포되었다는 황표 등은 ‘이북이나 이남이나 우리를 버렸다’ ‘진짜 조직을 결성해서 투쟁하자’고 결의한다. 작은 권력자 정면원이 면책받기 위해 파놓은 함정인 줄 알면서도 죽음의 구멍으로 자진해서 들어간다. ‘동지구출위원회’ 강령도 만들었다. 그중 제6조는 “전반적 활동이 기술적으로 되지 않으면 단식, 데모, 소란, 탈옥 등 일체의 최후 수단을 다 동원하여 뼈에 사무친 원한을 풀면서 노래하며 죽을 것.”(289면) 적도 알고 내부첩자도 있으며, 대놓고 투쟁하는 기묘한 지하세포조직 5인조가 탄생한다.

 

“수기 읽으면서 재미있었던 또 한가지는 정찬우가 감방 안에서 세포조직 만들잖아. 황금 2백근이 바깥 어딘가에 숨겨져 있다고, 황금 2백근과 아편 20상자, 권총 두자루도 혁명에 바치겠다고 하잖아. 이건 도대체 말도 안 되는 사긴데 다른 사람들도 그냥 동조해. 우리가 그 돈을 찾아서 변호사도 사고, 뭐도 사고 한다고 열성을 모으잖아. 엄청 진지하게 하잖아. 혁명에 대해 공부하고 군사훈련하고, 혁명간부학교 수준의 일과를 진행하잖아. 교도관들이 보거나 말거나 큰소리로 떳떳하게 혁명가를 부르고, 죽여라 니들 맘대로 하라 그러고. 막상 황표가 황금 2백근이 거짓이었다고 실토하는데도 별로 반응이 없잖아. 실망도 안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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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조롱 안의 새들이 오늘 하루 버티기 위해선 뭔가 자신들을 묶어둘 간절하고 처절한 허구가 필요했다. 죽음에 가까운 삶일수록 황당무계하고 허황한 이야기와 위로가 필요하다. 터무니없는 소망과 결단과 미래의 계획들, 허구의 토대 위에서 그들은 몇개월간 진짜로 살아 있었다. 조직이 깨지고서야 고발에 나서면서 동등한 조직원에서 권력자가 된 정면원의 갑질과 폭력이 다시 시작되고 고문과 구타가 이어지지만, “모든 책임은 나에게 돌리시오”(297면)라고 정찬우는 말한다. 그는 정말 죽고 싶었던 것이다. 허구 위에 세워진 것이었지만 동지구출 조직의 강령답게, 진짜 혁명가답고 떳떳하게.

 

“이현상도 온정주의자로 몰려 비판받았다는 거 알아? 오년 동안 산에서 싸우면서, 인민군 빨치산이 후퇴가 안 되니까 어쩔 수 없이 산으로 들어간 거잖아. 그런데도 온정주의라고 비판을 받았다니까. 말이 되냐고. 내가 빨치산 얘기도 써주고 통일운동가 얘기도 써보고 종파 가리지 않고 나름대로 우리나라, 우리 사회를 좀더 좋게 만들어보겠다고 노력한 분들을 유명 무명 가리지 않고 썼어. 이게 내 소임이다 생각했거든. 그런데 하다보니 점점 갈등이 생겨. 내 글이 싸움을 일으킬 수도 있고, 또 증오를 부추길 수도 있겠구나 싶은 거야. 처음엔 거의 일방적으로 사회주의 편이었거든. 『경성 트로이카』 쓸 때만 해도. 근데 자료를 많이 볼수록 꼭 그렇지 않더라고. 인간이란 게 그렇게 최고의 지성을 갖춘 위대한 존재가 될 수는 없어. 이론도 마찬가지야. 사회주의든 자본주의든 큰 사상의 흐름일 뿐이지, 완벽한 주의가 있을 수 없다고. 그런데 그것들이 격돌을 하면은 정말 크나큰 잘못을 범하는구나 싶더라고.”

 

안재성은 “전쟁은 개개인의 이기적인 생존 본능을 극대화시켜 평범하던 보통 사람들을 무서운 괴물로 만든다”고 말한다. “어떤 위대한 명분을 내세우든 상관없이, 오랜 교육과 훈련을 통해 쌓아온 사회적, 개인적 교양과 양심과 인간애를 근원에서 해체시켜버린다”(325면)고.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것은 곧 고난과 약자의 위치로 몰리게 됨을 의미한다. 정찬우는 목숨이 오가는 상황에서도 김일성에게 받은 권총을 한방도 쏘지 않았다. 도리어 자신의 목숨을 걸고 즉결처분 위기에 빠진 사람들을 여럿 구해준다. 정찬우 같은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이런 휴머니스트들이 전쟁 같은 극단적 상황에서 설 자리가 있겠는가. ‘누가 저 하늘을 막아주었으면’ 간구하던 임화의 시는 전사들의 사기를 위축시켰다 비판받고, 여운형 같은 사람은 적과 동지 양쪽에서 다 죽이려 하던 중에 결국 암살당하지 않았던가. “정찬우가 나 같은 병이었는지도 몰라. 엄청나게 맞았잖아, 나도. 광주항쟁 때 국군보안대에 나 혼자 따로 수용돼서 거의 5일을 24시간 내내 두들겨 맞고 기합을 받았어. 그뒤 평생을 지독한 신경통에 시달리다가 작년에 마침내 쓰러진 거거든. 지금은 약을 줄여 나가고 있지만 처음 쓰러졌을 때는 하루에 스테로이드를 스물네알이나 먹으면서 버텼어. 그런데 정찬우 시절에는 무슨 약이 있었겠어. 병명도 모르는 채 죽었겠지.” 지나가듯이 안재성이 읊조린다.

 

윤성남은 언덕바지에 기어오르려고 애쓰는 자세로, 한쪽 다리는 쪼그리고 한쪽 다리는 뻗친 채 죽어 있었다. 총알이 그의 뒤통수와 가슴을 뚫어놓았다. 으깨진 하얀 골이 흩어진 가운데 선지피가 백설을 물들여놓았다. 절반이 떨어져나간 왼쪽 머리에 남은 눈은 부릅뜬 채였으며 한쪽 손은 시든 풀포기를, 다른 손은 가슴을 부여잡고 있었다.(154면)

 

이렇게 『아무도 기억하지 않았다』는 나 같은 사람에게까지 와서, “살아남으면 고향에 돌아가 농사나 지을”(152면) 거라던 윤성남 같은 대다수 하급들의 소망을 떠올리게 한다. 정찬우 심영숙 최금자 이옥련 정세룡 조관병을 생각하며 애도하게 한다. 아픔을 떠나보내기 위해서는 슬픔을 통과해야 하고, 제대로 애도하기 위해서는 기억해야 한다. 그 기억이 아무리 고통스러울지라도. 권력과 승패의 논리 너머에 존재하는 한 존재의 고통을 온전히 받아들일 때, 더 많은 사람들과 맥락을 이해하게 되고 ‘죽일 놈 살릴 놈’의 이분법에서 해방된다. 인간사의 기록은 남아 있는 자들의 몫, 우리가 기억하는 것이 미래인 다음 세대가 이전과 다른 역사를 만들어갈 씨앗이 될 것이다. 고통스러울지라도 기억하고 기록해야만 하는 이유는 이것이 아닐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