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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이 계절에 주목할 신간들
김종훈 金鍾勳
문학평론가. 저서로 『한국 근대 서정시의 기원과 형성』 『미래의 서정에게』 『정밀한 시 읽기』 등이 있음.
splive@daum.net
신샛별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절망을 이야기하는 소설의 두가지 행로」 등이 있음.
venus860510@naver.com
최진영 崔眞英
소설가. 장편소설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 『끝나지 않는 노래』 『구의 증명』 『해가 지는 곳으로』, 소설집 『팽이』 등이 있음.
metaphor81@naver.com
김종훈 안녕하세요. 2018년 여름호 문학초점 사회를 맡은 김종훈입니다. 신샛별 평론가와 최진영 소설가가 함께 자리해주셨습니다. 오늘 오전에 남북 정상 간의 역사적인 판문점 회담이 있었죠. 전 국민적인 관심이 모였습니다. 많은 이들이 꿈같다고 여겼던 비핵화와 종전선언 이후 벌어질 일을 상상하겠죠. 오늘 함께 읽은 책과 우리의 대화도 인식의 영역을 확장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신샛별 특별한 날에 반가운 분들과 이야기 나누게 돼 기쁩니다. 남북정상회담을 보면서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하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 새삼 느꼈어요. 오늘 대화를 통해 남과 북은 세계가 놀랄 만한 미래로, 우리는 작품들과 더불어 다양한 해석들의 난장으로 나아가면 좋겠습니다.
최진영 안녕하세요. 저도 아침에 생중계를 보다 나왔는데요, 남북관계를 그린 어떤 영화나 소설에서도 오늘 판문점에서 있었던 한걸음의 넘나듦이 주는 감동을 느껴본 적 없는 것 같아요. 역시 현실은 상상을 초월하는구나 생각했습니다. 또 여태껏 남북의 미래를 비관적으로만 그려온 제 상상력이 무척 협소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오늘 두분과 이야기 나누다보면 혼자 읽으면서는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게 될 테고 다른 상상을 해볼 수도 있겠지요.
강연화 『우중산책』(강)
김종훈 처음으로 다룰 책은 강연화의 소설집 『우중산책』입니다. 제목을 보고 ‘한가로운 산책’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소설’을 예상했습니다. 그래서 표제작부터 읽기 시작했는데 상처와 기억에 관한 소설이었어요. 모두가 가진 공통의 상처, 그것을 되새겨주는 이야기죠. 다른 소설에도 상처를 안고 있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계속 읽다보니 ‘편하게 읽을 수 있겠다’는 기대가 차례로 배반당하더라고요.
신샛별 이 책은 2006년 등단한 작가가 12년 만에 선보인 첫 소설집입니다. ‘문학초점’ 준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면 놓칠 뻔했는데 읽게 돼서 다행이에요. 저는 「어쩔 수 없이」와 「소주」가 특히 인상적이었어요. 입사시험에 거듭 낙방하고 제대로 된 연애 한번 못해본 「어쩔 수 없이」의 청년과 알코올중독으로 어머니에게 불효를 저지른 「소주」의 사내는 자신과 꼭 닮은 누군가를 만납니다. 작가는 도플갱어 모티프를 활용해 그들 내면에 들끓는 자기혐오와 자기연민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아요. 일란성 쌍둥이처럼 보이는 상대방과 어울리면서 주인공은 일시적으로 모종의 동류의식을 느끼는데, 이는 상대방에게 의존하면서 동시에 살의를 느끼는 모순적 감정과 얽혀 있어서 불안정하죠. 이러한 의식은 세상에서 배제되고 격리돼 자폐적인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청년들이 떨쳐지지 않는 자괴감과 자기 파괴의 상상 속에서 얼마나 외로운지, 또 그들이 비슷한 처지에 놓인 타인과의 관계에서 얼마나 불행한지를 가늠하게 해줘요. 이른바 ‘ N포세대’는 인간관계에도 관심을 끊는다는데, 두 소설은 극심한 좌절에 빠져 있는 청년들이 자신을 돌보는 일만 해도 힘에 부친다는 걸 잘 보여줍니다.
최진영 저도 첫 소설집이 늦게 나온 편인데요, 그걸 엮으려고 등단작을 꺼내 읽었을 때의 미묘한 감정이 다시 떠올랐어요. 강연화의 등단작 「카나페」가 맨 마지막에 배치돼 있는데, 다른 작품과 비교해보면 차이가 있어요. 「카나페」가 소설을 써야겠다고 의식하고 쓴 작품 같다면 다른 소설은 마치 자기 이야기를 하듯 자연스럽거든요. 소설과 작가가 더 가깝게 달라붙은 느낌이랄까요. 등단작을 쓴 이후에 자기에게 잘 맞는 화법과 소재를 찾은 것 같아요. 그 온도차가 느껴졌습니다. 작가가 정말 쓰고 싶었던 건 「어쩔 수 없이」 같은 작품 아닐까 싶었어요. 대화가 혼잣말처럼 읽히기도 했고, 엔딩도 인상적이었어요. 있는 그대로의 외로움을 툭 내던지듯 과감하게 끝내면서 독자를 더 외롭게 한달까요. 소설을 읽으면서도, 읽고 나서도 가장 크게 남은 감정은 ‘외롭다’ ‘쓸쓸하다’ ‘그래도 어쩔 수 없지’였어요. 내가 너무 외로울 땐 이 책을 펼쳐보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김종훈 문장이 짧은 것도 특징이에요. 단단한 단문이 외로움의 감정과 대비되어서 더 큰 울림을 주는 것 같아요.
신샛별 단문과 함께 구어체도 특징이죠. 「우중산책」의 남도 사투리는 읽은 후 오랫동안 귓가에 쟁쟁하게 남더라고요. 그런데 이 소설집의 문장들은 거의 환상 속 청자에게 건네는 혼잣말이거나, 내용과 목적을 잃어버린 장광설이에요. 일차적으로는 심각하게 고장 난 인물들의 고독한 내면, 그들의 상처와 고통을 표현하는 것이겠으나, 한편으로는 진정한 소통에 실패한 관계가 부려놓은 잔여물처럼 보이기도 해요. 예컨대 「여기, 중마루」에서 주인공을 포함해 ‘중마루’에 모여 끝없이 자기 이야기를 늘어놓는 사람들은 왜 그렇게 많은 말을 해야 했을까요.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 누군가에게 해야 할 ‘바로 그 말’을 하기 위해 그들은 중마루에 ‘먼저’ 들른 것 같아요. 긴 침묵 뒤의 한마디가 진실하게 들릴 때도 있지만, 장황한 수다 끝에 튀어나온 예사의 한마디가 내면의 감옥에서 이제 막 해방된 진심일 수도 있다는 거죠. 소통의 아이러니가 이 소설집의 일관된 주제라고 본다면, 이런 문체적 특징은 캐릭터 형상화만이 아니라 주제의 차원에도 관여하는 것 같아요. 최진영 소설가 말씀대로 이런 점에서도 「카나페」는 좀 외따로 보여요. 작가가 말의 장식적 측면, 즉 과잉이나 잉여에 관심이 많고 그것을 폭로하는 데 흥미가 있음을 염두에 둔다면 ‘카나페’가 장식이 핵심인 음식이라는 점에 주목이 되기는 하지만요.
김종훈 「카나페」는 등단작임에도 어쩌면 첫 소설집에 실리지 못할 뻔했네요.(웃음) 아이러니의 구도가 굉장히 선명한 게 「카나페」예요. 다른 작품은 아이러니를 이루는 두 축이 마주 보기보다는 어긋나 있어 자그마한 틈이 보입니다. 그 틈에서 여운이나 의미가 생겨나는 것 같아요.
최진영 그래서 다른 작품의 인물이 작가의 분신처럼 느껴진다면, 「카나페」의 인물은 작가와 동떨어진 듯 보여요. 아주 잘 만들어진 인물과 이야기인데, 잘 만들어져서 오히려 친밀감이 줄어드는 것 같아요. 다른 작품의 인물들보다 감정이입이 잘 안 되는 면이 있어요. 중심인물이 남성이어서 그런가 싶었지만 「어쩔 수 없이」나 「소주」의 화자도 남성이고, 그 작품들을 읽으면서는 그들의 정서와 행동에 여지없이 빨려들었거든요.
신샛별 어쩌면 중년의 기혼 여성이 등장하는 표제작 「우중산책」이나 「택시」 같은 소설이 별다른 장치 없이 담담하게 흘러가면서도 깊이를 가지는 것은 그와 관련이 있겠네요. 작가의 연배에서 진솔하게 들려줄 수 있는 여성의 삶에 대한 이야기니까요. 그렇지만 저는 이 두 작품에 아쉬움이 남았어요. 「우중산책」에는 죽은 오빠들을 그리워하며 살아가는 엄마에 대한 딸의 애증과, 그 딸이 결혼 후 전라도 출신의 고졸 여성으로서 시댁에서 당했던 모욕적 상황이 묘사돼요. 딸이 엄마를 용서하고 모녀가 화해에 이르는 여정이 액자 바깥에서 진행된다면, 액자 안에서는 딸이 자신을 포용하지 못하는 남편을 이해하고 아이가 있는 집으로 되돌아가는 길이 펼쳐지죠. 결국 두 과제가 소설 말미에서 한꺼번에 해결되고 “집으로 가는 길이 보였다”(54면)라면서 끝나는데, 이런 플롯에서 문제 해결의 열쇠는 딸의 내적 성숙에 오롯이 달려 있어요. 여성의 삶을 둘러싼 부조리와 모순은 하나도 해소되지 않은 채 불행한 운명의 해결이 여성의 자기극복에 내맡겨지는 셈이죠. 「택시」가 기혼 여성의 일탈 또는 파괴의 욕망을 총알택시를 타려는 충동과 강간을 당하는 환상으로 적절히 그려 보이면서도, 그 욕망의 순간성과 수동성을 손쉽게 인정해버리는 대목도 같은 맥락에서 문제적이에요.
김종훈 기존의 질서가 바뀔 기미나 체제의 변화를 암시하는 작은 행동이라도 있다면 좋았을 텐데 그런 것들이 여전히 전제된 채로 있는 거죠.
신샛별 ‘마음을 바꿔먹으면 어떤 힘든 일도 이겨낼 수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져요. 그렇지만 이런 논평 자체가 소설과 비슷한 상황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한가로운 이야기이겠지요. 자기가 살아가는 세계를 전복하는 상상은 상상만으로도 자기파괴를 각오해야 하는 괴로운 경험일 테니까요. 하지만 소설에서는 얼마든지 더 전개돼도 좋지 않을까요. 때로 과하다 싶을 만큼 앞서나간 상상이 굼뜬 현실의 우리를 아주 조금은 바꾸는 것 같거든요.
김종훈 「택시」에서 주인공이 새벽 한시에 남편이 자는 걸 확인하고 밖으로 나가잖아요. 중요한 것은 이게 일시적인 행동이 아니라는 거죠. 기존의 완고한 체제를 어쩌지는 못하더라도 어쨌든 자기를 살아남게 하는 방편을 지속적으로 찾으려 하는 것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었어요.
최진영 어떤 인물이 소설의 처음과 끝에서 같은 행동을 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겪은 일들이 있기 때문에 그 인물이 변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붉은 립스틱을 꺼내 천천히 바른다. 콤팩트로 양쪽 뺨을 가볍게 두드린다”(「택시」 102면) 같은 장면은 그런 변화를 보여주는 듯해요. 파격적인 변화나 기존 질서의 파괴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선 안에서 조금씩 천천히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방식이 저처럼 소심한 사람에게도 용기를 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웃음) 적극적 변화나 진전이 없더라도, 인물이 처한 상황에서 겪을 것을 제대로 겪고 충돌하는 과정을 진하게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독자는 정서적 진동을 느낄 거예요. 그러면서 받아들이거나 체념하는 부분도 있을 테고, 지금보다 도약하거나 최소한 지금을 부정하는 방향으로 몸을 조금 틀어버릴 수도 있고요. 저는 강연화 소설의 인물들이 어느 정도는 신경증을 겪고 있다고 봐서 혼자 있을 때의 저를 자주 떠올렸어요. 아무도 모르고 오직 나만 알고 있는 나. 혼자 중얼거리고 작은 소리나 불빛에도 예민해지고 과대망상에 빠져 불안해하는 나. 그럴 때의 저는 소설 속 인물과 별로 다르지 않거든요. 그래서 소설에 더 몰입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서유미 『홀딩, 턴』(위즈덤하우스)
김종훈 다음 책으로 넘어가볼까요. 서유미의 장편 『홀딩, 턴』을 이렇게 한줄로 정리해봤어요. ‘섬세한 두 사람 간의 만남과 이별에 대한 고현학(考現學).’ “이별에 대한 소설을 구상했는데 쓰고 보니 사랑 이야기가 되었다”(234면)는 ‘작가의 말’도 이 소설의 느낌을 잘 드러냅니다.
최진영 스윙댄스 동호회에서 만난 남녀가 사랑하게 되고, 결혼하게 되고, 이혼하게 되는 과정을 섬세한 감정선으로 보여주죠.
김종훈 사실 이혼을 한 것은 아니지만, 누가 봐도 이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죠.(웃음)
최진영 저는 누가 봐도 이혼해야 하는 이유가 있어서 이혼하는 게 아니라, 사소한 것들이 부딪치며 어긋나다보니 서로 등을 돌리게 되는 상황이 사실적이라고 생각했어요. 가끔 어르신들이 자기 배우자를 두고 ‘밥 먹는 모습도 보기 싫다’고 하잖아요. 그 이유가 무엇일지 이 소설을 보면 이해가 돼요.
신샛별 일상적인 상황과 공감 가는 장면이 참 많이 등장하죠. 저는 결혼 이전의 사랑과 연애를 다루는 좋은 소설은 참 많이 읽었다 싶은데, 어쩐 일인지 결혼 이후의 사랑, 즉 부부관계를 인간관계의 한 형식으로서 집요하게 다룬 소설은 왜 별로 떠오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잠깐 해봤어요. 우리가 흔히 사적 영역이라고 단정하는 부부관계나 가정은 사실 여러 공적 의제가 교차하고 갈등하는 영역이기도 하잖아요. 결혼이라는 제도를 통과하며 변화하고 생성되는 인간 삶의 한 형식으로서 부부와 가정이 이 소설을 계기로 문학적으로 심도있게 연구되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지게 됐어요.
김종훈 진(영진)과 랄라(지원)가 연결되는 계기를 보면 진이 랄라에게 엠피스리플레이어를 선물했을 때인데, 알고 보니 선곡은 진의 친구가 해준 거였죠. 사실 그밖에는 둘이 호감을 느낄 만한 부분이나 계기가 잘 보이지 않아요.
최진영 음악이 도구가 되었지만, 진이 랄라를 계속 기다리던 장면이 더 주효했던 것 같아요. 기다린다는 말조차 하지 않고 기다리는 모습을 보며 랄라가 무장해제 돼버리잖아요.
김종훈 그게 진의 스타일이기도 하죠. 일관적인 캐릭터예요. 그 모습을 보고 사랑에 빠졌던 랄라가 결국 변하지 않는 진을 보면서 이혼을 결심하게 되죠.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새삼 확인시켜주는 것 같아요. 섬세한 소설임에는 틀림없으나, 읽고 난 뒤 잊고 지냈던 것이 떠오르거나 몰랐던 것을 알게 된다는 느낌은 적었어요. ‘어? 이런 건 다들 안고 사는 건데……’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달까요.(웃음)
신샛별 인물의 감정과 부부에 대한 성찰을 진지하게 따라가게 만드는 소설이기는 해요. 지원의 입장에서 전개되는 상념들을 차분히 좇으면 영진과의 이혼은 불가피한 결정으로 느껴지고요. 그런데 자살충동을 가질 정도로 불안정한 영진의 내면에 대해서는 독자가 짐작할 수 있는 단서가 적어요. 영진의 이혼 결정에 작용한 생각을 유추하기가 어려운 터라 지원의 감정선에 이끌려 이혼을 받아들인 뒤에 영진에게 조금 미안해지더라고요.(웃음) 부부 각각의 내면에서 일어난 고투의 순간, 균열의 징후들을 좀더 균형있게 다뤘다면 독자에게 한층 심오한 의미를 남기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최진영 납득의 순간이라고 한다면, 변기시트 안 올린 사건 때문에 정말 속에 있는 이야기 다 꺼내가면서 싸우는 장면이 나오잖아요. 결혼생활 내내 지원은 영진이 소변 볼 때 변기시트를 올리지 않아서 스트레스를 받아요. 이혼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서로 조심스럽고 서먹해진 상황에서, 영진이 먼저 다녀온 화장실에 들어간 지원이 “변기시트 위에서 점점이 떨어진 소변 방울을 발견”(186면)한 순간 폭발해버리죠. 영진은 “지금 변기시트 같은 게 뭐가 중요하다고 그래”(187면)라고 대꾸해요. 한 사람에겐 아주 중요한 문제가 상대방에겐 전혀 중요하지 않은 거예요. 이 부부가 같이 산다면 이런 일이 계속 벌어질 테고, 서로의 바닥까지 다 보여주는 순간들이 더 잦은 간격으로 오겠죠. 중대한 일이 있어서 이혼했다기보다는 앞으로도 서로를 이해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 때문에 이혼한 것 아닐까요. 이 둘이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는 느낌이 아니라, ‘이렇게 살고 싶진 않다’는 마음이 느껴졌어요. 그러니까 ‘너 때문이야’ ‘나한테 어떻게 그럴 수 있어?’ 같은 대사가 한번도 나오지 않잖아요.
김종훈 그래서인지 지원에게 하는 여러 조언 중 ‘싱글맘’ 친구 승아의 “지원아, 다른 사람들 생각하지 말고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무조건 네가 행복해지는 쪽으로 결정해”(122면)라는 말이 제일 설득력 있었어요. 그렇다면 영진의 입장을 그렇게 공들여서 헤아릴 필요가 없다는 것도 어느 정도 납득 가능하지 않을까요? 어쩔 수 없는 차이 앞에서는 서로 헤아리는 과정이 필요한 게 아니라 함께 사느냐 마느냐 결단이 중요할 수 있으니까요.
최진영 둘 다 비혼 상태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삶을 살 수 있는 캐릭터예요. 사회적 제도를 따라 결혼했다가 이혼을 결심하면서 비로소 자기가 원하는 삶을 찾은 느낌이에요.
신샛별 그렇지만 두 인물이 결혼이라는 다분히 사회적인 관문을 통과했는데도 이혼을 결정하는 과정에서는 사회적 요소들이 거의 고려되지 않는 것 같아요. ‘너만 생각하라’는 주변인들의 조언은 결혼이 본질적으로 나만 생각할 수 없게 하는 제도임을 역설적으로 입증하는 것 같고요. 결혼과 이혼이라는 제도를 떠받치는 타자들의 시선, 성적 욕망, 물질적 조건, 문화적 압력 등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개인들의 합리적 선택으로 이혼을 이야기할 때, 이들이 그 모든 사회적 요소들에 끊임없이 영향받고 휘둘리면서 합리적 선택에 실패할 가능성이 많은 인간이라는 점을 잊게 되는 것 아닌가 싶어요. 결혼이 낭만적 환상이 아닌 만큼, 이혼 역시 다각도의 분석과 접근이 필요한 사건이자 엄연한 현실이잖아요.
김종훈 그럼에도 매번 매상을 늘리기 위해 변화를 시도해야 하는 아동복 지점장이자 다소 낭만적인 지원과 규칙적인 일상이 중요한 현실적인 공무원 영진의 성격 차이를 극명하게 그려냈고, 또 성공적으로 표현해낸 것 같아요. 지원은 계속 지난 기억을 곱씹는 성격이고, 영진은 “뒤를 잘 돌아보지 않는 타입”(100면)이죠.
신샛별 작가가 공들여 썼을 잠언 같은 구절들도 밑줄 그으며 읽었어요. “결혼생활은 그런 공감의 부스러기만으로 유지되지 않았다”(45면)라든가, “부부는 평균이나 수치로 사는 게 아니라 서로를 향한 신뢰와 감정으로 유지되니까”(131면) 같은 문장이 대표적이죠. 인물이 처해 있는 상황과 연관해 삶의 원리를 요약하는 비유를 제시할 때, 이 작가가 빨래를 하거나 차를 마시는 생활 속에서도 머릿속으로는 좋은 문장을 고민하는 모습이 그려지더라고요.
최진영 아름답고 소중한 추억을 “언제든 뜨거운 물을 부은 뒤 우려먹을 수 있는 티백”(99면)에 비유한다거나, 세탁기 돌아가는 걸 보고 “인생의 어떤 순간에는 세탁의 시간을 지나는 것 같”(114면)다고 표현한 장면도 있었죠. 저도 그런 비유들이 좋았습니다.
신샛별 스윙댄스 동호회에서 영진과 지원이 ‘진’과 ‘랄라’라는 가명을 쓰며 처음 만났잖아요. 이 가명이 연애와 결혼 사이의 어떤 문턱을 나타내는 비유 같아요. 가명을 쓰고 낭만적 환상 속에서 서로를 향한 연애감정을 키워왔다면, 결혼 이후로는 본명으로 서로의 민낯을 대면해야 했던 거죠. 게다가 춤은 혼자 추는 게 아니잖아요. 자기 몸도 제대로 통제를 못하는 미숙한 실력의 두 사람이 실수할까봐 걱정하며 상대와 자신의 움직임을 맞추려 조심하는 모습이 연애에 임하는 남녀를 적확하게 표현하는 것 같아요. 만약 영진과 지원이 계속 동호회 활동을 이어나갔다면, 그래서 상대를 살피고 거기에 자신을 맞추는 방법을 잊지 않았다면 둘의 관계가 지금과는 달라졌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해봤어요.(웃음)
김종훈 이상의 「지비(紙碑)」라는 시가 떠오르네요. 각자 다른 쪽 다리가 아파 서로 부축하고자 부부가 되었으나 실상은 누구도 부축할 수 없는 절름발이가 되죠. ‘춤’이 하나의 장치가 되기도 해요. 저는 춤을 춰본 적이 없어요.(웃음) 제 의식을 놓아야 춤을 출 수 있을 것 같은데, 즉 낭만적 세계에 뛰어들기 위해서는 현실을 버려야 하는데, 그에 대한 두려움이 큰 거죠. 소설에는 춤을 추고 있는 상태로서 연애의 시간과 춤을 다 춘 상태로서 결혼의 시간이 이분법적으로 그려진 것 같아요. 춤이 끝나면 맨정신, 현실로 돌아와야 하잖아요. 그런데 그 현실은 춤에서 시작되었으니 어긋날 수밖에 없겠죠.
안보윤 『소년7의 고백』(문학동네)
신샛별 『소년7의 고백』에는 한편 한편 읽어나가기가 버거울 정도로 무게있는 단편들이 빼곡하게 담겨 있어요. 우선 사회적 이슈들을 소설의 소재로 채택한 점이 눈에 띄지요. 단지 신문기사나 책을 통해 소재를 수집한 것이 아니라 작가가 나름대로 심층 취재를 거쳐 현장의 세부 사정을 담아내려 노력했다는 것이 느껴집니다. 예컨대 표제작 「소년7의 고백」에는 임대아파트에 사는 청소년들의 일상과 그들의 고충, 그리고 그들이 사용하는 비속어나 은어가 방대하고 핍진하게 나와요. 또 「불행한 사람들」의 배경이 되는 특권층 초등학생들을 위한 학원의 모습도 그 실감이 남달라요. 이른바 ‘신 계급사회’가 된 세태의 심층에 사회적 이슈들을 매개로 접근해가는 이 소설집은 왜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작품을 써나가고 있는 작가들에게 주목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최진영 이건 저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지만, 왜 이렇게 자꾸 불행을 쳐다보는 걸까요? 왜 독자를 이렇게 힘들게 하는 걸까요?(웃음) 이 소설집 전체를 떠받치는 이야기가 「불행한 사람들」 같아요. 화진이라는 친구가 “고작 그걸 못 견디고 그만둬? 남의 돈 벌어먹기가 쉽니?”라고 하면 “그럼 우린 평생 을이고, 평생 불쌍하고, 평생 불행하겠네”(92면) “근데, 그러지 않는 게 사람 아니니.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게 사람 아니야?”(95면)라고 답하는 장면이 나와요. 이 소설집이 던지는 질문 같다고 생각했어요. 왜 이렇게 불행을 쳐다보냐고 투덜대지만, 사실 불행을 알고 불행에 대해 사유해야 세상이 나아지기도 하잖아요.
김종훈 소설집 전체에서 갈등이 인물과 인물 사이에서 벌어지는 게 아니라 인물과 사회, 인물과 운명 간에 벌어진다는 느낌이었어요. 그러면 당연히 인물이 실패하겠죠. 그리고 우리 모두 우연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필연으로 만들어버리는 소설집 같아요. 사회적 사건이랄 수 있는 지하철 참사, 어린이 학대, 층간소음과 살해, 세월호참사 같은 모든 일이요. 「포스트잇」은 나와 무관한 일인 줄 알았는데 내가 사건의 원인 중 하나였다는 이야기잖아요. 아버지의 폭행을 피해 길거리에 나왔다가 도움을 받지 못하고 죽은 여고생 사건을 다뤄요. 의도치 않게 외면했던 주원이 의도치 않은 방식으로 사회적 지탄을 받습니다. 사건의 현장에 ‘무관심’을 옮겨놓고 심문하는 듯합니다. 고통의 연대라고 해야 할까, 불행의 공동체라고 해야 할까, 그런 것들을 새삼 재확인시켜줍니다.
신샛별 이 소설집의 인물들은 불행의 무한궤도에 공통적으로 갇혀 있는 것 같은데 저마다 다른 논리를 개발하고 믿으면서 버거운 삶을 버티고 있기도 해요. 궤도 바깥으로 탈출해 언젠가는 성공하고 행복해지고 말겠다고 각오하는 인물도 있고, 수동적으로 주어진 운명을 감당하면서 연명하듯 살아가는 인물도 있고, 사람이라면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니 세상이 바뀔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는 인물도 있어요. 고통스러운 삶을 받아들이는 서로 다른 입장들이 부딪치고 갈등하는 지점이 나타나는 소설이 특히 좋았어요. 「불행한 사람들」이 대표적일 텐데 똑같이 열악한 환경에서 경멸당하며 노동했던 ‘주은’과 ‘여자’가 대립할 때, 또 주은이 친구 ‘화진’의 습관이 된 신세 한탄을 듣고 다시는 만나지 말자고 화를 낼 때, 인물들 사이의 긴장이 팽팽해지면서 소설과 여러모로 겹쳐 보이는 이 세계의 임계 지점을 보는 것 같았어요.
김종훈 해설(양윤의)은 모든 것이 “서로의 원인과 결과가 되어 무한히 진행하는 부정적인 무한(악무한)의 세계”(301면)로 이 소설의 성격을 규정해요. ‘불행한 사람들’끼리 일그러진 궤도를 순환하는 것이겠죠. 을의 세계와 그 연대, 달리 이야기하면 ‘악무한의 연대’라고 볼 수도 있겠어요. 이 소설집에는 안 담겨 있지만, 그것이 반복되니까 되레 궁극적으로는 이 세계에서 희망을 보길 바라는 마음 같은 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최진영 저를 가장 강력하게 짓누른 소설은 「여진」이었어요. 우울증, 자살시도를 했던 할머니, 할머니를 보살피는 손자와 손녀, 그 연결고리를 어떻게 해야 하나 싶었어요. 조부모와 부모, 남매들 모두 나쁜 마음이란 없고 서로를 걱정하고 배려할 뿐인데도 비극에 가닿는 거예요. 비극을 이해하기 위해서 ‘도대체 무엇 때문에?’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하고 간절한 심정으로 그 뿌리를 찾아보려 하지만 도리가 없어요. 그래서 더 참담해지는 거죠. 운명과 불행이라고밖에 볼 수 없을 것 같아요.
신샛별 죄 없이 고통받는 인물들이 연쇄적으로 죄책감을 떠안게 되는 부조리한 상황을 보여주면서 「여진」은 그 상황을 초래한 세계의 작동방식 자체를 문제 삼고 있어요. 내가 덜 불행해지기 위해 남을 더 불행하게 만들어야만 하는 세계의 원리를 표적으로 삼는 거죠. 작가는 그들의 고통을 보살피고 위로하는, 정신적으로 성숙하고 건강한 인물을 끝까지 등장시키지 않는데, 그래야 리얼한 설정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인물들의 고통을 해소할 방법이 전무한 결말 앞에서 독자가 느끼는 망연함과 무력감이 이 소설집의 독특한 효과예요. 그 짓눌리는 기분 속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라도 독자는 세계의 변화를 상상하고 실천하는 데 관심을 갖게 될 테니까요.
최진영 “아무튼 내일도 할머니 잘 지켜드려야 해. 엄만 너희만 믿을게”(152~53면)하고 어린 딸인 여진에게 이야기하잖아요. 그리고 마지막에는 “누나를, 잘 살펴봐. 엄만 너만 믿을게”(160~61면)라고 해요. 그 장면에서 소름이 끼쳤어요. 우울증에 걸린 할머니 못지않게 남매도 보호가 필요한 존재들이거든요. 그런데 엄마는 어린 남매에게 할머니를 지키라고 하고, 소설의 끝에서는 가장 어린 아들에게 누나를 지키라고 해요. 너만 믿는다면서. 책임이 자꾸 아래로 내려가는데, 엄마에게 그런 말을 듣는 순간 누나와 동생이 느꼈을 두려움과 죄책감을 생각하면 숨이 막혀요.
신샛별 정신적 결핍을 가진 여성이 아이를 반복적으로 입양하고 파양하면서 삶을 버티는 「이형의 계절」도 비슷한 구조예요. 약자가 자신의 상처를 어떻게든 극복하고 살아가기 위해서 또다른 약자에게 고통을 주는 것. 말하자면 을과 을이 서로를 괴롭히면서 순간적으로나마 갑이 되기 위해 분투하는 어리석고 참혹한 세상이요.
김종훈 ‘너’가 ‘육’이 파양되는 데 어느 정도 기여하잖아요. 들춰내고 싶지 않은, 또는 들춰낼 때까지 몰랐던 자신의 수치심과 대면하게끔 하면서 소설이 시작되고, 또 같은 방식으로 끝나요. 「일그러진 남자」도 마찬가지고요. 여러 불행한 사건이 맞물려 계속 현재에 소환돼요. 이 불편한 ‘대면’이 작가의 의도로도 보여요. 사회적 사건과 독자가 별개가 아니고, 자꾸 대면해야만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 같아요. 그래서 이 소설들은 지금 필요한 용기를 요청해요. 그럼에도 아쉬운 건, 사회적 사건이 좀 편하게 자주 쓰인다는 인상을 받아서예요. 필연성이 없다는 게 아니라 자동화된 듯한 느낌. 저는 그런 사건이 상대적으로 덜 드러난 소설들이 좋았어요.
신샛별 사회적 사건을 환기하면서 소설을 쓰는 경우는 많지만 안보윤의 소설이 특별한 것은 약자들의 고통을 감정을 증폭시키는 재료로 소모하지 않고, 그들의 고통이 양산되는 시스템의 일면, 한국사회의 도덕적 아노미 상태를 포착하기 때문인 것 같아요. 이번 소설집에 아이들의 세계가 유독 자주 등장하는 것도 그와 관련이 있을 거예요. 어른들의 세계에서는 ‘자유, 합리, 평등’ 같은 긍정적 가치들로 포장돼서 도무지 실체를 알 수 없는 도덕적 수준이 아이들의 세계에서는 적나라하게 드러나니까요. 「순환의 법칙」이나 「불행한 사람들」에서 작가는 전혀 다른 도덕기준을 따르는 인물들을 만나게 하고 갈등하는 상황을 만들어요. 그때 두 인물은 서로에게 판사이자 피의자가 되고요. 그러지 않아도 충분히 불행한 인물들을 막다른 길로 몰고 가는 것이지만, 그런 심문이 없이는 이 시스템에 구멍이 나지 않는다는 걸 말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최진영 그런 걸 보면서 용감하다고 생각했어요. 쓰는 입장에서는 ‘불행을 소모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안 들 수가 없거든요. 없는 이야기를 상상해서 쓰는 게 아니라 진짜 일어났던 일을 소재로 쓰는 거니까요. 그 사건으로 상처받은 사람들이 현실에는 분명 존재하고, 내가 쓴 소설이 그들에게 더 큰 상처를 남기면 어쩌나 두렵기도 할 테고요. 행복한 이야기는 피해자가 없고 그래서 좀 성글게 쓰더라도 웃으며 넘길 수 있는데, 불행한 이야기는 그럴 여지가 없어요. 쓰는 사람도 읽는 사람도 힘들고, 진심을 다해 쓰는 만큼 부담감과 책임감이 커져요. 하지만 소설은 현실을 남기는 작업이기도 하잖아요. 다른 이야기를 쓸 수도 있었을 텐데, 모두가 알 만한 불행한 사건을 소설로 쓰겠다고 마음먹기까지는 정말 큰 용기가 필요했을 겁니다.
김현 『입술을 열면』(창비)
김종훈 이제 시집으로 넘어가볼까요. 김현의 『입술을 열면』은 다른 시집보다 두배쯤 두껍습니다. 시인 스스로 ‘디졸브’라고 밝힌 기법 때문에 텍스트의 층위가 두겹이 되어 그런 듯합니다. 이 ‘디졸브’는 첫 시집 『글로리홀』(문학과지성사 2014)에서는 각주 형식으로 처리되었죠. 그 자리에 여러 아이콘을 사용하고 이를 시인이 ‘디졸브’라고 칭합니다. 어쨌건 첫 시에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었다”(「불온서적」)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같은 문장이 마지막 부 첫 시 「빛은 사실이다」에도 나와요. 이 두 구절을 보면 역사 깊은 창비시선의 흐름을 계승하는 것 같기도 해요. 그중에서도 가장 전위적인 시집이겠습니다만.(웃음)
최진영 소설은 ‘타인의 이야기’ ‘만들어낸 이야기’라는 생각이 드는데, 시는 ‘나의 이야기’로 보게 돼요. 그래서 시집을 읽으면 친구가 자기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한 느낌을 받는데, 『입술을 열면』은 동경하고 존경하고 어려워하는 친구, 가까워지고 싶지만 나를 간파할까봐 말조차 걸 수 없는 친구의 한마디 한마디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단어를 하나하나 짚으면서 읽는데 어느 행까지는 ‘알겠어’ ‘무슨 말인지 알겠어’ 하며 따라가다가, 어느 순간 시가 도약해버려요. 그러면 ‘여기서부터는 내가 따라갈 수가 없다’ 싶은 거죠. 분명히 내가 아는 단어들인데, 아는 단어로 만들어진 문장을 이해하기 힘들 때가 있더라고요. ‘어렵다’는 느낌이 아니라 ‘경이롭다’는 느낌이었어요.
신샛별 시들이 무언가 구체적인 상황을 이야기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건축물에 비유하자면 기둥, 지붕, 창문같이 그 일부만 계속해서 보여주는 느낌을 줘요. 저 역시 행 또는 연 사이에서 자주 주춤거리게 되더라고요. 연속적으로 그림 전체를 훑으며 보여주지 않고 단속적인 흐름으로 전개돼요. 그렇지만 짤막한 순간에도 황홀하게 빛나는 대목들은 있어요. “태풍이 온다는 것을 알기에/부부는 한평생/지혜를 향해 간다”(「노부부」) “불을 켤 수 없다/어둠이 만드는 것이 있으므로”(「빛의 뱃살」)처럼 잠언 같은 구절에 표시해두고 재차 곱씹으며 읽는 즐거움이 있었어요. 그렇지만 수많은 비약들을 사뿐하게 지나치며 끝까지 읽는 일이 쉽지는 않았습니다.(웃음)
최진영 「조선마음 11」을 읽다가도 “너는 우리 앞에 시간이 있다고 생각하겠지만/우리 앞에 놓인 것은 시간이 아니다//시간은 끝났다/이제 시간은 시간이다”가 나오는데, 갑자기 이해하기가 힘든 거예요. 그다음에 나오는 “사랑했나 먹고살았나/우리가”에서는 한참 가만히 있었어요. 사랑했나, 먹고살았나, 우리가, 이렇게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니 마음에 쿵, 하는 느낌이 오더라고요. 자꾸 되뇌게 되고요. 줄글이나 소설에 이런 문장이 있으면 그냥 지나갔을 것 같은데, 혼돈 속에서 이 구절을 대하니까 가슴이 벅차더라고요. 아까 말씀드린 경이롭다는 게 이런 마음 같아요.
김종훈 세계의 일부만 보여준다는 느낌이 드는 건, 그 사람이 다른 세계에서 왔거나 조각 난 세계에 있거나 아주 큰 세계를 가졌거나 해서 아닐까요. 김현의 시는 그 모두에 조금씩 해당하는 것 같아요. 인식이 머무는 세계가 거대해서 빙산의 일각씩만 보여주는 거겠죠. 유래가 다른 곳에 있을 그 세계가 이 세계에 오느라 조각 나 있을 수도 있고요. 낭만주의 코드를 분명 갖고 있는데, 현실이 불쑥 침범해요. 대개 낭만주의자들은 목소리가 과잉되는데, 김현의 목소리는 굉장히 정돈되어 있어요. 들끓는 정념들을 하나하나 다스린 다음에 차례차례 내뱉는 듯한 특별함이 있습니다. 이 세계에서 소통하려는 마음이 투영된 것이겠죠. 전위적인 실험의 계보 속에 있는데, 이전의 전위와는 다른 지류에 속한다고 볼 수 있어요. 이전의 실험들이 다양한 화자, 다양한 표기, 고딕체와 이탤릭체가 함께 나오는 산만한 혼종성과 함께했다면, 『입술을 열면』은 단일한 화자잖아요. 그럼에도 갈피를 잡기 힘든 말을 정돈된 목소리로 하는 거죠. 관능적이고 육체적인 것도 특징이에요. 제목부터 ‘입술을 열면’인데, 입술을 열면 말을 할 수도 있고 키스를 할 수도 있죠. 말과 육체가 함께 걸려 있는 듯한 모습이 여기저기서 보입니다.
신샛별 ‘빛’ ‘생명’ ‘인간’ ‘진실’ ‘마음’ 같은 단어를 많이 쓰는데, 지시하는 대상은 모호해요. 말씀하신 것처럼 이 시인은 우리보다 ‘훨씬 큰 세계’를 사는 사람처럼 느껴져요. 그래서인지 정치적이고 현실적인 단어가 등장하는 대목에서는 현실이 시인의 세계에 한참 미달한다는 인상을 줘요. 저 이상적인 단어들이 이상적으로 들리지 않는 어떤 세계, 시인은 그 세계를 미리 내다보고 있는 것 같고요.
최진영 ‘시인의 말’에서 “예술가로서 나는 광기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나 그 광기는 누구도 볼 수 없고 누구도 보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라고 해요. 「죽음과 시간」 디졸브에는 “이것은 그림이다. 누구나 아는 그림은 아니지만, 누구는 알 수 있는 그림이고, 누구도 몰라도 되는 그림이다”라는 구절도 나오고요. 그게 바로 시인이 시를 쓰는 마음 아닐까요. 모두를 이해시키려고 시를 쓰는 게 아니라, 알아보는 사람만이 알아보겠지라는 생각으로 최대한 숨기고 감추는 것. 숨기고 감춘 그것을 누군가는 알아봐주길 바라는 마음. 그런 면에서 제가 이해할 수 없는 시도 있다는 사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였어요. 지금은 모르지만 언젠가는 알고 싶다, 알면 좋겠다는 간절함도 생겼고요.
김종훈 디졸브의 역할을 살펴볼까요. 『글로리홀』에서 번호를 매기며 각주로 쓰이던 형식이 아이콘으로 바뀌었어요. 위계가 옅어지고 무늬가 생겨났지요. 그런데 디졸브가 단일한 역할을 하지는 않아요. 본문이 시적 순간, 디졸브가 서사적 순간, 이렇게 구분되지는 않는다는 거죠. 가끔은 시작 메모 같기도 하고, 후기 같기도 하고, 본문과 겹쳐 있기도 하고요. 세계의 복잡한 측면을 드러내는 이러한 방식이 김현 시의 특징 중 하나겠죠. 어쨌든 시의 의미를 다층적으로 보여주는 역할을 하는데, 이 형식이 어떤 계보를 이루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른 시가 이 방식을 참조하는 순간 김현의 시적 특성에 수렴됨으로써 의미가 사라질 테니까요.
신샛별 시를 쓸 때 시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바깥으로 파생되는 생각을 표현하고 싶은 충동을 이런 독창적 형식을 통해 해결하는 것 같아요. 김현 시인은 산문도 잘 쓰는데, 중간중간 산문을 읽는 기분이 들어 새로웠고요. 보르헤스가 가짜 주석을 통해 허구를 실제처럼 이야기했던 게 떠오르기도 하는 재미있는 시도예요. 아이콘의 모양을 시의 내용과 연관시키려 한 노력도 엿보이던데요.
최진영 분석하거나 이해하려는 욕심을 버리고 다가오는 대로 시를 읽다보니까, 직관적으로 말하는 사람들의 대화 같았어요. 논리를 세워서 자세히 설명하며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전혀 연결되지 않을 듯한 이야기를 직관적으로 툭툭 던지듯 말하는 사람도 있잖아요. 저에게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것들인데 그의 머릿속에서는 다 연관되는 거죠. 그럴 때 저는 ‘좀더 설명해줘’ ‘일단 거기서부터 여기까지만 말해줘’ 부탁하거든요. 『입술을 열면』의 시편들도, 디졸브들도 시인에게 설명해달라고 부탁하면 다 해줄 것 같은 느낌이에요. ‘이게 왜 이 문장과 만나느냐면요……’ 하고요.
김종훈 시적 의미를 만들어내는 전통적인 방법이 동일성 내지는 은유인데, 이 시집에는 그런 게 드물어요. 그래서 전통적인 독법에 익숙한 독자라면 ‘이게 왜 시적이지?’ 하는 의문이 생길 것 같아요. 주체의 힘이 강하게 발휘되는 부분이 없는 대신 맥락과 코드를 형성함으로써 서로가 상호적으로 의미를 형성해요. 편히 읽을 수 없는 구조죠. 다른 코드를 습득한다고 되는 일은 아니고요. 전체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시적인 부분이 사라지지는 않아요. 어쩌면 이 시집의 시적인 것은 조각 나 보이고 불완전한 구조를 가져야 확보될 수 있는 것 같아요.
신샛별 기억에 남는 시편이나 구절을 구체적으로 소개해보면 어떨까요. 저는 앞서 언급한 「노부부」와 「빛의 뱃살」이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애틋하고 다정한 감정을 차분히 스케치하고 있어서 좋았어요. 「노부부」가 오래된 연인의 해변 산책에서 시간을 버텨내는 사랑의 위력과 기적을 읽어낸다면, 「빛의 뱃살」은 가난한 연인의 눈빛과 대화와 일상에서 평화를 발견해요. 두 시를 관통하는 시인의 관찰력이 돋보이더라고요. 사람과 사람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기류를 가시화하고 거기에 자기 식으로 이름을 붙이는 것이 예술가의 고유한 작업 중 하나일 텐데, 이 두편의 시에서 그같은 작업의 성공적 사례를 봤어요. 「빛의 교회」는 독특한 어투를 차용하고 있어서 흥미로워요. “죽겠다고 말로만 떠들지 말고/죽어라//젊고/몹쓸 것들아//(…)//너희는 모두/꽃병에 꽂힌 위선자다”. 이 시를 읽으면 목사가 교회에 신자들을 모아놓고 설교하는 장면이 연상돼요. 신성을 모독하면서 신성함에 대해 사유하는 독특한 형식이랄까요. 발칙해질수록 깊어지는 장르가 시이기도 한데, 이 시가 바로 그런 매력을 품고 있어요.
김종훈 “밤은 어떻게 보리차를 맛있게 하는가” “보리차의 빛깔은 고딕체로 선명해진다/영혼은 어떻게 마음을 떠도는가”(「기화」) 같은 구절도 인상적이었어요. 『글로리홀』에서는 여러 서사를 이름도 낯선 인물들이 이끕니다. 다양한 목소리와 모습에 방점을 둔 건데, 이는 2000년대 중반의 실험적 목소리와 닮아 있어요. 『입술을 열면』에서는 아이와 노인이 많이 등장합니다. 이 또한 2000년대 중반 출현한 시의 특성이긴 하죠. 어쨌건 외국인에서 아이나 노인으로 등장인물이 바뀐 것인데, 친숙해지기는 했으나 친해지기는 더욱 어려워진 것 아닐까 싶어요.(웃음)
최진영 “된다고 이야기해주는 사람이 되어줄래”(「빛은 사실이다」)라는 구절에서 용기를 얻었어요. 이 시집을 떠받들게 된 이유이기도 하고요.
김종훈 저는 맥락상 그 바로 윗줄에 “우리는 졌다”라는 구절이 좋았어요.
신샛별 저는 그 아래에 있는 “사람은 어떻게 근육이 되는가”에 표시를 해뒀어요.(웃음)
김종훈 재밌네요. 같은 부분에서 각기 다른 구절이 마음에 남았다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또 이 시집의 매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합니다.
배수연 『조이와의 키스』(민음사)
김종훈 『조이와의 키스』는 배수연의 첫 시집입니다. 저자 약력에서 그림과 철학을 공부했다는 점을 보고 조금 다른 모습의 시를 기대했어요. 그래서인지 감탄할 수밖에 없는 표현이 눈에 띄었습니다. “우리의 키스는 조이가 매일 쏟았던 홍차의 테두리를 더 진하게, 진하게 그려 줄 것이다”(「조이와의 키스」), “세상에서 가장 가느다란 눈썹을 꺼내 네 발에 시를 적었어”(「오로라 꿈을 꾸는 밤」) 같은 구절을 보면서요. ‘젊은 목소리’라고 생각했어요. 시인으로 환기되는 ‘나’와 거리를 둔 어떤 인물이 이야기를 엮어가는 모습이 요즘 젊은 목소리의 추세 같아요. 배수연은 섬세한 관찰력과 뛰어난 표현으로 그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신샛별 이 시집에는 동화적이라고 부를 만한 상상력이 있어요. 그 상상력이 문장이나 문단 단위에서, 또는 비유적 수준에서만 발휘되지 않는다는 게 특징이에요. 캐릭터와 사건이 있는, 그야말로 서사 장르로서의 동화가 짧은 분량으로나마 완성돼 있다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2부의 「지붕 수집가」 「살아 있는 생강」 「한모금 씨 이야기」가 대표적이죠. 상대적으로 1부에는 개인적 체험이 배후에 깔린 듯한 작품이 많아요. 「오로라 꿈을 꾸는 밤」 「청혼」 「조이와의 여행」 등에서는 누군가를 아끼는 마음이 아름답고 재치있게 표현되어 있어요. 시를 읽을 때면 시인이 가졌을 법한 우울이나 비관에 전염될 때가 더러 있는데, 이 시집에서는 그런 부정적 감정이 감지되지 않아서 이채로웠습니다.
최진영 어릴 때 친구들이랑 이야기를 지어내면서 놀았던 기억이 났어요. 개연성 없이 그냥 떠드는 게 좋아서 이야기를 지어내본 적 있잖아요. 그런 즐거움, 순수함, 귀여움을 시집 곳곳에서 발견했어요. 「트럼펫 트램펄린」 「코스타리카의 팡파레」 같은 시가 그랬죠. 내가 너무 부끄러울 때면 꼭 이불 속에서 「조이의 당근 밭」을 펼쳐보겠다고 다짐했어요. 용감해져야 할 순간에는 「조이와의 여행」을 읽고 용감해지는 주문을 외우자고 생각했고요. 스스로 위축되어서 보잘것없다고 느껴질 때는 일단 「지붕 수집가」를 펼쳐볼 것 같아요. 춥고 가난해도 사랑해서 빛나는 우리를 찬사하고 싶을 때는 「오로라 꿈을 꾸는 밤」을 소리 내서 읽을 거고요. 사는 게 밋밋해서 좀 멋지거나 특별해지고 싶은 순간에는 「휴일」을 읽어볼 생각이에요. 일상의 어떤 순간에, 말하기 애매한 슬픔이나 고난에 빠졌을 때 진통제나 소화제 먹듯 찾아 읽을 수 있는 시를 여러편 만나서 좋았습니다.
김종훈 실제로 동화 같은 인용이 많아요. 동화를 떠올리게 하는 것은 그 아늑함과 따뜻함 때문 같습니다. 어른들이 이야기하는 동화가 아니라 아이들이 이야기하는 동화죠. 어른들의 동화에 자주 등장하는 금기나 경고가 없잖아요. ‘너 이 선을 넘으면 안 된다’ 같은. 이 따뜻한 분위기는 진은영의 시와 비슷해요. 진은영의 시는 동화가 깨지고 난 이후의 현실에 걸쳐 있어서 따뜻하면서도 처연하다면, 배수연은 반대로 괴롭지만 행복한 동화를 그려내요. 이런 방식으로 시를 쓰는 이유를 구체적으로는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습관화된 건 아니면 좋겠어요.
신샛별 현실을 직접 가리켜 보이지는 않지만, 현실을 외면하거나 환상에 매몰돼 있다고 말할 수는 없게 만들어요. 예컨대 「SINKHOLE」은 뉴스의 형식으로 한 마을에서 일어난 재난을 묘사하죠. 시집 전체가 풍기는 어떤 천진함 때문에 마치 아이가 기자 흉내를 내면서 구덩이 속으로 이미 사라진 마을 근처를 둘러보는 것 같은 모습이 그려져요. 사망한 청소년 페드로의 일생이 아이의 목소리로 되짚어지고, 동화적 설정 때문에 망자와의 인터뷰까지 성사되죠. “한국에서 왔다고요? 제 입은 아주 깊은 곳에 내려앉았는데……. 제 말이 들리세요?” 만약 같은 사건을 어른의 목소리로 진지하게 전달했다면 독자가 이렇게까지 괴롭지는 않았을 거예요. 금기나 경고가 없다 해도 어떤 면에서는 현실을 더 냉정하고 잔혹하게 전달하는 이야기로 느껴져요.
최진영 「방주」도 그렇죠. 노아가 우리를 구원한 줄 알았으나 노아는 희망을 삼켜버린 것이고, 우리는 구조된 게 아니라 제거 혹은 격리된 것 아닐까라는 의심. ‘태어나자마자 눈을 감아야 하는 마을이 있다’ 연작도 그렇고요. 어린아이의 시선에서만 포착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묘하고 기이한 세계관과 상상력이 느껴졌어요.
김종훈 “우리는 혹독한 밤의 정수리에 돛을 펼치는 왕국의 주인 책상 위 흰 종이 사막에서 폭죽을 터뜨리다 눈을 잃은 연인”(「닥터 슬럼프」), “엄마, 오늘 우리는 장롱 속에서 별을 낳을 거야 우리가 태어났을 때처럼 두드리면 실로폰 소리가 나는”(「트럼펫 트램펄린」) 등도 따뜻하지만 비극을 안은 구절이고요. “그는 촛대에 올린 불꽃으로 나와 의중을 교환한 뒤, 쪽지를 태우고 심지를 꼭 집어 불을 껐다 내가 손쓰기도 전에, 죄와 재를 섞었다”(「크리스마스 해피밀」)도 마찬가지죠. 그런데 이 ‘죄와 재’의 원인이 흐릿해 보여요. 물리적이건 화학적이건 그 원인이 좀더 뚜렷했으면 했어요. 사실 시집을 다 읽고 나서는 이런 메모를 남겼어요. ‘동화라기에는 금기가 없고, 우화라기에는 할 말이 없다.’ 금기와 할 말은 현실에서 비롯하는 것들인데 현실과 배수연 시의 통로가 많지는 않은 것 같아요. 우화와 동화적 특성이 시적으로 좋을 리는 없겠죠. 의미를 계속 생성하기보다는 하나의 의미로 환원되니까요. 하지만 현실에 할 말이 없어 보이는 것도 시적이 되기는 어렵죠. 현실을 향한 말문을 막은 까닭을 환기하고, 다양한 의미 생성의 가능성을 열어두면 좋겠어요. 「휴일」의 시어를 빌리자면 배수연 시는 ‘몽상’ 속에서 꾸며진 이야기 같아요. 좋은 뜻으로 말씀드린 건데 몽상 속에서 충분히 자유롭고 슬픔과 비극도 마음껏 환기되는 거예요. 그럼에도 이야기라는 울타리가 너무 견고하고 울타리 안에 있는 화자가 조금은 편해 보인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어요.
최진영 고통과 비극은 무겁고 슬픈 단어지만, 그것을 소화하는 방법은 작가마다 다를 것 같아요. 앞서 다룬 『소년7의 고백』과 비교하게 됐는데요, 안보윤 소설가가 현실과 최대한 가까운 곳에서 고통과 비극을 그대로 보고 받아들인다면, 배수연 시인은 그것을 자기만의 상상과 이야기로 재구성해서 충격을 흡수하는 것 같아요. 안보윤 소설가의 방식으로 용기를 얻은 뒤 다음을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테고, 배수연 시인의 방식으로 위로받고 용기를 내는 사람도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저는 배수연 시인이 어떤 시들은 무척 즐거운 마음으로 썼을 것 같고, 그 즐거움이 저에게도 전달되어서 좋았어요. 글을 쓴다는 건 힘들고 어려운 일이기도 하지만,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이 즐거운 일이기도 하잖아요. 누구나 겪을 것 같은 흔한 감정이나 경험도 배수연의 언어를 통과하면 아주 특별하고 고유한, 반짝이는 보석이 되는 것 같아요. 그게 바로 시인의 능력이자 마력 아닐까요.
신샛별 현실과의 대화에서 화자가 느꼈을 감정, 더 나아가 현실에 대한 그의 발언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의견에는 동의해요. 우리와 같은 시공간을 살아가고 있을 시인의 내면을 짐작할 만한 시편들이 거의 없죠. 그렇지만 발화의 방법을 실험하는 시도가 많아서 다음 시집을 기대하게 됐어요. 「그는 참 좋은 토스트였습니다」처럼 추도사의 형태를 비튼 시는 말의 내용과 형식 사이의 고리를 임의로 끊어본 것인데, 그럼으로써 너무 관습적이어서 오히려 아무 울림을 주지 못했던 말의 형식을 반성하게 되죠. 다른 장르의 글을 시로 들여온 황지우의 실험을 떠올리게도 했어요. 이 작업들이 축적되고, 또 한편으로 말의 내용이 좀더 현실과 거리를 좁힌다면 다음 시집은 더 많은 지지와 호평을 받을 것 같아요.
조은 『옆 발자국』(문학과지성사)
김종훈 마지막으로 다룰 시집은 조은의 『옆 발자국』입니다. 앞의 시집들에 비해 중견의 목소리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읽자마자 ‘선명하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초점이 분명한 것이, 눈에 잘 맞는 안경을 쓴 듯한 느낌이랄까요. 시인이 보는 걸 나도 볼 수 있다는 느낌, 시가 지시하는 대상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겠다는 느낌이에요. 그런데 거기에서 끝나지 않죠. 선명하지만 얄팍하지 않은 세계를 보여줘서 호감이었어요. 내 주변 세계를 그리고 있음에도, 시를 읽는 동안 다른 세계로 초대받는 것 같았습니다.
신샛별 시를 읽으면서 시인의 체험이 자연스럽고 선연하게 그려질 때 아주 편안했어요. 보통 체험을 시로 쓸 때는 더 많은 독자들이 쉽게 공감할 수 있도록 보편성을 부여하려는 노력이 덧붙기 마련인데, 조은 시인은 사족 없이 보고 듣고 생각한 그대로를 보여주더라고요. 그래서 오히려 여운이 더 길게 남았습니다. 예컨대 「봄날의 눈사람」 「쿵」 「느끼든, 못 느끼든」 「어떤 만남, 어떤 이별」 「그날 밤 우리가」 같은 시들이요. 또 시집 전체에 일관되게 ‘죽음’이 깔려 있어요. 그런데 시인은 죽음을 초월했다거나 달관한 사람처럼 가르치는 태도가 아니라, 죽음을 자기 일생의 일부로 받아들인 사람의 겸허함을 지닌 것 같아요. 이 시집과 더불어 저는 죽음을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는 일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조금은 떨쳐낸 것 같다고 느꼈어요.
최진영 세 시집 중에서 가장 편하게, 긴장하지 않고 읽은 것 같아요. 여백이 많은 독서를 했어요. 시를 읽으면서 자주 멈추고, 시인이 쓰지 않은 부분을 상상하는 시간을 가졌어요. 말씀하신 것처럼 시집 전체에 드리워진 정서는 체념, 고독, 쓸쓸함, 죽음 같은 거잖아요. 결코 가볍지 않은 감정임에도 그것까지 편하게 수용하게 하는 것 같아요. 『조이와의 키스』는 이 시집에 비해 무겁지 않은 정서나 감정이 담겼는데도 편하게 읽지는 못했거든요. 이런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 자꾸 저에게 묻게 됐어요. 아무래도 체념과 고독, 죽음 같은 정서와 사유가 내겐 더 익숙하고 편한 감정이니까 그런 것 아닐까 생각했고요. 그러면서 ‘이 시집을 너무 빨리 읽었다’는 걸 깨달았어요. 좀더 천천히, 시인의 감정을 충분히 느끼고 시인의 것과 비슷한 듯하지만 결코 같지는 않은 나의 감정도 되짚으며 읽었어야 했는데, 내가 아는 감정이라고 그냥 넘어갔구나 싶은 반성이랄까요.
김종훈 동감입니다. 우리가 오랫동안 읽어왔던 목소리들과 닮아 있잖아요. 그래서 더 편하게 읽히는 것 아닐까 싶어요. 거기다 시가 단문으로 이뤄져 있어요. 감정도 적나라하게 드러나지 않고 간결하게 쓰였죠. 하지만 원숙한 시 가운데서 감정의 상(像), 이유를 드러내지 않고 그 추이를 차근차근 보여주는 방식으로 이끌어나가는 작품은 드물죠. 이 시집은 체험을 은유의 기법으로 풀어내요. 그래서 시가 연결하는 A와 B를 발견하는 즐거움이 있어요. 이걸 시적 깨달음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네요. 「어둠의 질감」은 “한밤에 일어나/유언의 문구를 고르듯/그릇을 집어/차곡차곡 쌓는다”로 시작해요. 설거지를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릇을 차곡차곡 쌓아본 기억이 있잖아요. 그걸 이렇게 시적 순간과 함께 경험하면서 깨달음을 얻는 거죠. 「어떤 만남, 어떤 이별」 「눈물」 「발자국 옆 발자국」 같은 시도 삶의 구체적인 면모를 드러낼 뿐, 말하지 않으면서 깨달음을 주는 미덕이 있어요.
최진영 시집의 첫장을 펼치기 전에 뒤표지에 적힌 글부터 봤어요. “잃어버리면 절대로 돌아오지 않는 것들이 있다./사람을 빈 자루로 만드는 것들이 있다.//그걸 알고 초조해하는 자신을/바라보는 자가 있다.” 한참을 바라보면서 제 경우를 떠올렸어요. 절대로 돌아오지 않는 것, 나를 빈 자루로 만드는 것들을요. 시집에 실린 시를 다 읽은 다음에 다시 뒤표지의 그 문장들을 봤어요. 인정하고 체념하게 되는데, 그 마음에 분란이 별로 없었어요. 「눈보라」를 읽고도 가만히 오래 생각했습니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다시 그 자리로/돌아갈 수 있”지만 “그러나/발자국을 제자리로/되돌릴 수는 없다”는 것, 돌아갈 수는 있지만 한번 떠났었다는 사실을 지울 수는 없죠. 떠나고, 벼랑을 만나고, 다시 돌아가고, 다시 떠나고, 굴처럼 막힌 길을 만나고, 다시 돌아서기를 수백번 반복하는 삶을 생각해봤습니다. 이 반복을 통해 깊은 절망을 담담히 받아들이게 되는 것 같았어요. 내면에는 눈보라가 치는데 겉모습은 아주 고요하고 단단해 보이는 거죠. 그 간극 때문에 시가 더 깊게 느껴졌어요.
신샛별 일상적 상황을 시적 깨달음의 순간으로 바꾸는 능력이 뛰어나요. 우리가 별생각 없이 지나치는 타인의 모습, 외부의 풍경 어느 하나에도 시인은 소홀하지 않더라고요. 예를 들어 「봄날의 눈사람」을 볼까요. “아주 행복해 보이는 여자가/나를 스쳐 지나갔다/걱정 하나 없는 얼굴/꿈꾸는 눈빛으로/잠든 아기를 품에 안고//(…)//만일 내가 아기를 품에 안았다면/한숨 쉬었을 것이다/아기의 미래를/바구니처럼 끌어당겨 보며/시름에 발걸음이 무거웠을 것이다//(…)//내겐 한순간도 없었던/꿈을 꾸는 여자가/봄날의 눈사람처럼 빛났다”. 꿈을 꾸는 것이 무엇을 소유했느냐 못했느냐 또는 어떤 조건이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다만 생명을 대하는 태도나 자세의 문제였다는 것을 젊은 시절이 다 지난 뒤에야 알게 된 화자가 이 시의 주인공이에요. 가지 않았거나 가지 못한 나의 과거를 타인에게서 발견하면서 꿈꾸며 살지 못한 자신의 일생을 회한 어린 어조로 반추하는 이 시가 저는 유독 아프게 읽혔어요. 이 시의 구조, 그러니까 대칭이 되는 두개의 대상을 마주치게 함으로써 시적 깨달음의 순간을 발명해내는 건 다른 좋은 시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나요. 「느끼든, 못 느끼든」에서는 삶을 예찬하는 태도와 삶에 시들한 태도가 평행을 이루면서 나오고요. 「어떤 만남, 어떤 이별」에서는 어머니의 고독을 잘 아는 병원 친구와 어머니의 고독을 외면해온 자식이 어머니의 장례식장에서 대면하죠. 하나의 상황에 관여하는 여러 관점과 입장을 상상하는 데 이 시인은 능숙해요. 다양한 삶과 사람을 오래도록 성실히 관찰해온 결과이기도 하겠죠.
김종훈 관찰뿐만 아니라 행동도 주목할 만해요. 아까 말씀드린 「어둠의 질감」을 읽으면 시인이 실제로 한밤에 일어나 그릇을 정리했을 것 같아요. “발목까지 빠지는 눈길을 되돌아가/허기졌을 배가 눈 위로 끌린/새끼고양이의 길을 발로 다져준다”(「겨울 아침」)라는 구절을 읽고 나면, 정말 시인이 그 길을 다져줬을 것 같고요. 그저 바라보는 게 아니라 실제로 행동하는 모습도 독자에게 울림을 주는 것 같아요. 생각하고 상상하고 느끼는 시들과 견주어 행동하는 모습을 보여주거나 촉구하는 시들은 스테레오타입이 된 감이 없지 않습니다. 거대한 폭력에 저항하는 모습으로 수렴되었죠. 그 일률성이 덜 매력적으로 느껴지기도 하고요. 조은의 시들은 작은 행동들이 그러한 선입견에 균열을 낼 수 있다는 걸 보여줍니다.
최진영 행동의 면에서 「적운」도 인상적이었어요. “여자가 뛰쳐나오자 대문이 어금니를 물었다”라고 시작되는데, 시의 마지막에 여자가 뛰쳐나온 대문 안에서 차곡차곡 쌓이는 소리들이 나열돼요.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슬리퍼 가볍게 끌리는 소리/수돗물 시원하게 쏟아지는 소리/실금 하나 없는/평화의 소리가 들린다”. 문밖에서 듣기에는 평화인 그 안의 어떤 것을 견딜 수 없어서 뛰쳐나온 여자를 오랫동안 그려봤어요. 겹겹이 쌓인 평화의 소리가 무척 무겁고 답답하고 불길하게 느껴졌고요. “밖에서는 이제 문을 열지 못한다”라고 시의 처음에 두번이나 쓰여 있지만, 그렇더라도 뛰쳐나온 여자에게 잘했다고, 이제 그만 돌아서자고 말하고 싶었어요. 초연함과 체념을 거듭하다가 어느 순간 뛰쳐나왔다면, 뛰쳐나온 그 삶을 다시 감당하며 살자고.
신샛별 죽음 외의 다른 선택은 불가능한 그런 극단적 순간을 몇번은 겪어낸 후에야 이런 시를 쓸 수 있을 것 같아요. 사나운 시간 뒤에도 삶이 또 모질게 이어진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아는 사람의 목소리였어요.
최진영 시어로 ‘꽃’이 많이 나와요. 「반 다발」은 정말 공감이 많이 됐는데, 저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있어서 강아지든 고양이든 물고기든 식물이든 아무것도 못 키우면서도 가끔 꽃다발은 사거든요. 꽃은 뿌리가 없고 이미 죽은 거니까. 내가 어떤 식으로 노력해도 살려낼 수 없으니까. 그러니까 살아 있음이나 화사함을 느끼고 싶을 때 화분이 아니라 꽃을 사요. 그래서 “반 다발의/뿌리 없는 꽃들/초연하다”라는 구절에서 오는 정서를 잘 이해할 수 있었어요.
김종훈 “초연하다”라는 게 내가 꽃을 보면서 생긴 감정일 수도 있지만, 꽃을 둘러싼 나와 친구의 대립하는 목소리를 보면서 생긴 감정일 수도 있겠어요. 꾸준히 시를 쓰는 조은 시인의 ‘내 갈 길을 가는 자세’도 초연하게 느껴집니다. 이제 마칠 시간이 되었는데, 세권의 시집이 바탕을 둔 세계의 같은 점과 다른 점을 비교하면서 제가 사는 세계도 조금 확장한 느낌입니다. 긴 시간 고생해주신 두분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신샛별 어딘가 모자라고 편향돼 있던 제 독서가 두분의 말씀 덕분에 균형을 찾고 충만해진 기분입니다. 감사합니다.
최진영 소설이나 시를 읽더라도 혼자서 보고 생각하면 그만이었고 그래서 아쉬울 때도 많았는데요, 오늘 이런 자리에 함께할 수 있어서 무척 좋았습니다. 뜻깊은 자리에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2018. 4. 27. 창비서교빌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