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의 목소리
소통의 가능성을 고민하다
지난호 특집 ‘문학이라는 커먼즈’를 읽으면서 문학작품을 경유한 소통의 가능성에 대해 좀더 깊이있게 고민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황정아는 작품의 의미와 가치를 타인과 공유하고 교환하는 “비평의 협동적 창조 과정”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백지연은 페미니즘으로 작품을 독해하는 경우, 모형화된 이미지로서의 여성적 삶에 잠식되는 것에 대한 경계와 “여성적 삶의 세부적인 결”을 살피려는 노력을 요구한다. 최진석은 한편의 작품을 두고도 끊임없이 새로운 의제를 제시하고 새로운 사건을 탐색하려는 시도가 담론장에 신선한 활기를 불어넣는 동력이 된다고 말한다.
문학작품을 읽는 행위는 나 자신과의, 그리고 타인과의 질 높은 소통을 가능하게 한다. 작품은 공감과 위로의 방식으로 익숙한 것을 다시금 확인시켜주는 동시에, 자각과 발견의 방식으로 낯선 것과 직면시키기 때문이다. 알다가도 모를 듯한 순간은 매력적이다. 알 것 같을 때는 친근하면서도 알 수 없을 때는 호기심을 자극한다. 문학작품은 읽고 말하는 그 순간만큼은 나를, 내 곁에 있는 타인을 작품 자체만큼이나 매력적인 존재로 만들어준다. 그래서 우리는 문학을 읽을 수밖에 없다.
최윤정 chochang1120@naver.com
나는 왜 문학을 먹을까요, 꿀?
문예지를, 『창작과비평』을 식당 같은 것이라고 말해도 될까? 그렇다면 나는 그곳에 예약도 없이 들이닥친 손님이다. 막무가내로 식탁에 앉아 주인장에게 이렇게 주문하는 것이다. “늘 먹던 걸로. 그런데 질리지 않도록 색다르게.” 늘 먹던 것? 색다르게? 주인장은 도무지 알 도리가 없다.
작가는 강 건너 불구경하는 자가 아니라 이미 불 속에 담긴 자다. 설령 강 건너 불구경하더라도 자기가 불타 죽어버리는 사람이다. 때문에 소설의 간난을 나에게 강요하지 않았으므로 정지돈의 「빛은 어디에서나 온다」는 의미심장했으며 의미심장함에도 속살을 절절히 설명하지 않았으므로 맛이 좋았다. 김려령 장편 『일주일』은 더 두고 봐야겠지만, 국회의원, 작가, 이혼남녀, 열애라니. 이런 세속의 요리가 얼마 만인가 싶어 흥미로웠다. 거하게 판 벌이지 말고 이대로 자글자글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평론에서는 세그릇이 나왔다. 김수영 50주기를 맞아 황규관이 작가론을 썼는데, 김수영이 문학사에서 차지하는 무게도 그렇고, 평소 『창비』의 맛을 생각하면 좀더 다채로웠어도 좋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보데왼 왈라번의 글은 조선 후기의 가사문학이 여론을 형성하는 양상을 필자의 안내에 따라 추적하는 재미가 있을 뿐 아니라, 근대성 등의 개념에만 기대어서는 그것으로 묶이지 않는 기미들을 놓칠 수 있음을 다시 확인하게 되어 유익했다. 일레인 쇼월터의 글은 남성이 자행하는 폭력에 맞서 반격하는 흐름을 장르문학의 계보를 따라 짚어준다는 점에서 유효했다. 더이상 가만히는 있지 않겠다는 이 움직임이 앞으로는 어떤 양상으로 터져 나올지 짐작해보게 됐다.
읽어야 하는 개연을 주지 못한다면 송로버섯을 갈아 만든 책이라도 영양은 소용없다. 나는 왜 문학을 먹어야 할까? 피망은 싫고 잼도 없는데. 어떤 요리사는 잼은 안 넣고 피망만 준다. 영양학적으로 완벽하니 매일 ‘로얄캐닌’ 사료만 먹으라 한다면 나는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릴 것이다. 고기도 썰어 넣고 기름도 밀가루도 한움큼 부은 내장파괴 식사. 주인장, 그것이 내 희망이오, 꿀.
김한조
빛은 어둠을 비추고
올해 가장 많이 접한 단어 하나를 꼽으라면 ‘소확행’이 아닐까 싶다.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는 이 말만큼 시대상을 잘 보여주는 단어가 또 있을까. 장은진의 단편소설 「외진 곳」에 등장하는 네모집은 우리 시대의 축소판으로 보인다. 주인공이 다른 세입자에게 휴지를 빌려주고 자전거를 빌려 타는 것, “웃풍은 세도 재수가 좋은 방”이라는 이야기에 기분이 나아지는 것, 인사도 안 하는 다른 세입자와 눈사람을 함께 만드는 것 따위가 ‘소확행’이라는 말을 하자는 게 아니다. 삶은 우리의 생각보다도 더 소소하고 확실한 것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런 것들이야말로 역설적으로 ‘삶’을 생생하게 실감할 수 있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네모집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소확행은 ‘누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찾아내는 것’에 훨씬 가까울 테다. 누리기 위해 찾아내고, 또다시 찾아내기 위해 현재 주어진 것들을 누리(려 애쓰)면서. 화자는 네모집의 안마당에서 종종 불빛이 들어온 창문이 몇개인지 세어본다. 그런데…… 왜 다른 도형도 아닌 네모일까? 이 소설은 알은체조차 않던 5번방 남자가 대화라기에도 부족한 말을 건네며 지나치고, 불 켜진 방이 하나 더 늘어나는 것으로 끝이 난다. 네모집의 이들은 각자 자신 앞에 놓인 소소하고 확실한 길을 따라 걸을 것이다. 언젠가 한 점에서 만나 부딪히는 이들도 있겠지만, 곧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또다시 걸어갈 것이다. 그리고 얼마쯤 지나 그 여정이 외롭게 느껴질 때, 그저 어둠을 비추는 작은 빛만으로도 아주 혼자는 아니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mintvin@naver.com
글쓰기, 인간, 평화, 결국 우리
안재성의 『아무도 기억하지 않았다』를 다룬 ‘작가조명’이 한동안 기억에 남았다. 작가와 소설을 애정 어린 눈으로 살피며 번쩍이는 지점들을 맛깔나게 다시 그려준 김해자 시인의 공이 컸거니와 곱씹어볼 만한 부분이 적지 않았다. 우선은 안재성 작가의 노고. 분신한 노동자 박영진, ‘실패한’ 공산주의자 박헌영과 이현상 등 비극의 시대를 살았던 이들을 소설과 평전으로 형상화한 데 이어, 정찬우라는 한국전쟁과 그 여파의 세월을 불꽃같이 살다 스러져간, 그러나 이제는 누구도 그 존재를 알지 못하게 된 이를 문학으로 되살려놓기까지. 분명 자신 또한 고통스러웠을 저 지난한 글쓰기를 가능케 한 힘은 무엇이었을까. 그다음은 ‘인간성’이라는 것의 한없는 가벼움. “인간 본성 그 자체가 변하진 않는 거 같아. 사회적인 통제와 체제로 간신히 유지하는데, (…) 시스템이 망가지면 정말 짐승보다 훨씬 더 잔악해져”라는 안작가의 말마따나 모든 증오와 전쟁이 나쁘다는 것을 아는 인류는 그럼에도 왜 그것을 피하지 못했는가. 그러나 우리는 또한 안다. “권력과 승패의 논리 너머에 존재하는 한 존재의 고통을 온전히 받아들일 때, 더 많은 사람들과 맥락을 이해하게 되고 ‘죽일 놈 살릴 놈’의 이분법에서 해방된다”(김해자)는 것을. 그것이야말로 저 판문점에서의 역사적 장면 이후 비로소 실마리가 보이기 시작한 이 땅의 평화를 진정 우리 모두의 것으로 만들어내는 첫발이 아닐까.
김태진
페미니즘의 실천에 대하여
특집에 실린 모든 글이 『82년생 김지영』을 크고 작게 경유한 점이 인상적이었다. ‘공공성’ ‘공동성’을 이야기할 때 페미니즘이 빠질 수 없어진 담론지형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그런 면에서 ‘지금 페미니즘 교육을’이라는 제목으로 꾸려진 대화는 시기적으로 반가웠다. 페미니즘 교육이 민주주의를 완성하는 과정이고 공동체적 감수성을 배양하는 데 불가결한 요소라는 언명은 중요한 진단인 듯하다. 페미니즘 운동이 나아가야 할 바를 보여주는 것도 같고, 페미니즘에 대한 악의적인 공격을 방어하는 논리로도 요긴할 것 같다. 다만 대화의 흐름에서 선뜻 동의되지 않는 점도 있었다. 가령 서두에서 “페미니즘을 일반적인 인권교육의 틀에 포함하는 게 맞는지 의문”스럽다면서, “여성과 남성이 동등한 인간이자 시민으로 간주되지 못하는 상황에서의 인권교육”이 자칫하면 젠더권력관계를 희석시킬 수 있다는 주장은 논란의 여지가 있을 텐데 아무 거리낌 없이 대화의 기본 바탕이 되었다. 여성과 남성이 동등한 인간이자 시민으로 간주되기 전에는 인권교육조차 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과연 타당할까? 각자의 이야기만 하느라 이야기가 하나로 뭉치지 않고 겉돈 것도 아쉽다. 그러나 이런 아쉬움은 좌담자의 발화에서 왔다기보다는, 여전히 비민주적이고 가부장적이고 젠더감수성이 극히 낮아 해결책을 모색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 현실에서 온 것이리라. 실제 페미니즘 교육의 대상이 될 아동·청소년의 목소리가 간접적으로도 들어가 있지 않은 점도 서운했다. 참가자에게서 충분히 ‘현장’의 목소리를 기대할 만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아쉬운 것은 지난호 발간 당시 뜨거운 화두였던 페미니즘 교육이나 미투운동에 대한 공감도가 낮아진 지금 현실이다. 각자의 자리에서 여전히 ‘실천’하고 있을 좌담 참석자 네명에게 응원을 보내며, 나도 내 자리에서의 실천을 이어나야겠다고 다시 한번 다짐해본다.
진이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