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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분단 너머의 한반도
‘트럼프 독트린’과 한반도
신현실주의와 신중상주의 사이의 위기와 기회
서재정 徐載晶
일본 국제기독교대학 정치·국제관계학과 교수. 저서 『한미동맹은 영구화하는가』 『한국지성과의 통일대담』(공저) 등이 있음. suh@icu.ac.jp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무위원장은 2018년 6월 12일 싱가포르에서 정상회담을 갖고 △조·미 간 ‘새로운 관계’의 수립 △조선반도의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평화체제’ 구축 △조선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위해 노력할 것을 약속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합중국 대통령과 김정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무위원장의 싱가포르 정상회담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이로써 양국은 적어도 1950년 한국전쟁 시기부터 지속되어온 상호적대관계를 종식할 전기를 마련했다. 지금까지 있었던 두차례의 합의를 한층 발전시킨 것이다. 양국은 1993년 외교부 부부장/국무부 차관보 급에서 무력을 사용하지 않으며 위협도 하지 않을 것을 약속한 공동성명을 발표한 적이 있었고, 2000년 김정일 위원장의 특사인 조명록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이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 및 윌리엄 코언 국방장관과 회담한 후 조미공동코뮤니케에서 “과거의 적대감에서 벗어난 새로운 관계”를 수립하기 위해 노력한다고 발표한 바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합의들은 제대로 이행되지 못했고, 양국관계는 여러가지 우여곡절을 겪었으며 심지어 전쟁을 우려해야 하는 상황을 경험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에 70년 가까이 이어져온 조미(북미) 적대관계를 종식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상호 신뢰관계를 수립하고 평화체제를 구축하겠다고 합의를 이룬 것은 이전의 합의를 이어받아 더욱 발전시킨 것이다. 또한 최고위급에서 이런 합의가 이뤄졌다는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고 하겠다.
과연 이러한 합의는 어떻게 이뤄진 것일까? 임기 초에 북에 대한 ‘최대의 압박’을 강조하고 ‘화염과 분노’나 ‘완전한 파괴’를 운운하던 트럼프 대통령은 왜 갑작스럽게 북과 협상을 하고 합의를 이뤄낸 것일까? 한반도의 비핵화뿐 아니라 평화체제를 약속한 것은 한반도와 일본, 동북아시아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이 글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답을 미국의 국가전략이라는 틀 속에서 찾으려는 시도이다.1 언론에 많이 유포된 담론은 트럼프 대통령이라는 개인에 맞춰져 있고 또 그를 상당히 희화화하고 있기 때문에 싱가포르 정상회담의 이유와 함의를 온전히 파악하지 못할 위험성이 있다. 따라서 이 글은 조미정상회담을 포함한 트럼프 행정부의 일련의 조치들을 미국의 국가안보전략에 비추어 평가하고, 앞으로 있을 동북아시아 안보질서의 변화 가능성도 모색해보려 한다.2
2017년 12월 트럼프 행정부는 「국가안보전략(National Security Strategy) 2017」3을 발표했다. 오바마 행정부의 「국가안보전략 2015」가 국제제도를 중시하고 동맹과의 협력 및 중국과의 파트너십을 강조했던 반면 이후 2년여 만에 발간된 이번 보고서는 매우 다른 전략을 제시하고 있다. 맥매스터(H. R. McMaster) 당시 국가안보보좌관의 지휘 아래 네이디아 섀들로우(Nadia Schadlow)와 쎄스 쎈터(Seth Center)가 주도적으로 작성한 「국가안보전략 2017」은 미국의 힘을 내세워 미국의 이익을 가장 중요하게 지키겠다는 ‘미국우선주의’를 내세운다. 특히 중국과 러시아를 동반자가 아니라 경쟁자 또는 수정주의국가로, 북한은 이란과 같이 미국을 위협하는 국가로 규정하고 있다.4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전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국가안보전략과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일방주의나 ‘선제타격전략’을 명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5 또 트럼프 대통령이 아시아 순방 중 “경제안보 그 자체가 국가안보”라고 한 것과 같이 이 보고서도 미국의 직접적 경제이해를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점들을 전체적으로 보면 트럼프 행정부의 국가전략은 전후 미국의 전통적 국가전략인 ‘현실주의적 국제주의’를 계승하면서도 ‘신중상주의’와 타협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러한 「국가안보전략 2017」은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에 도전과 기회를 동시에 제공한다. 작년부터 이어졌던 조미관계의 긴장국면과 조미 싱가포르 정상회담은 이러한 도전과 기회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트럼프 정부의 국가안보전략
트럼프 행정부의 「국가안보전략 2017」은 레이건 대통령이 1980년대에 추구했던 것처럼 ‘힘을 통한 평화’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현실주의적 접근을 취하고 있다. 국제관계에서는 어느 국가나 국제기구도 신뢰할 수 없으며 오직 자국의 힘만이 생존을 보장해주고 국익을 지켜준다는 현실주의적 인식이 트럼프 행정부 국가안보전략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는 전임 오바마 정권이 군사력을 경시하는 자유주의적 정책을 추진한 결과 미국의 군사력이 러시아나 중국 같은 경쟁국에 대한 전략적 우위를 예전같이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적 인식에 의해 한층 강화됐다. 물론 트럼프 정부가 실질적으로 우려하는 것은 러시아나 중국의 전체적 군사력이 미국을 추월할 것이라는 비현실적인 시나리오라기보다는 이들 경쟁국이 사이버 공간 같은 특정 분야나 지역 군사균형에서 미국의 약점을 파고들 가능성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중국이나 러시아가 아시아나 유럽에서 영향력을 확대할 가능성을 견제하겠다고 천명했다는 점에 비추어볼 때 현실주의 중에서도 시카고대학의 국제정치학자 미어샤이머(J. Mearsheimer) 등이 주장하는 ‘공격적 신현실주의’가 트럼프 정부의 안보인식에 깊은 영향을 준다고 평가할 수 있다.6
그런 면에서 트럼프 정부는 부시 정부가 추진했던 일방주의적 정책이나, 대선 유세기간에 보여주었던 고립주의적 정책을 추진하지는 않을 것임을 시사한다. 즉 「국가안보전략 2017」은 “미국이 주도하지 않을 경우 악의를 가진 행위자들이 그 공백을 채우면 미국에 불이익을 가져다줄 수 있다는 교훈”을 언급한다. 고립주의를 택해 유럽이나 아시아의 지역정세를 주도하지 않는다면 러시아나 중국 같은 지역패권국이 등장해 미국에 불이익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은 심지어 미국의 안보에 위협이 될 수도 있으므로 미국의 국가이익을 위해 각 지역의 국제관계에서 여타 국가들을 주도하겠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럼프 정부의 전략은 세계 도처의 분쟁에 개입하거나, 민주주의 같은 가치를 추구하는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와는 확실하게 차별되는 현실주의적 국제주의 입장이다. 기존 국제기구와 조약체제들 중 미국에 이로운 부분은 적극 이용하되 효용가치가 비용을 초과한다고 판단되는 경우에는 거침없이 탈퇴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고립주의나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와는 차별된다.
또 국익을 위해서 선택적으로 인도-태평양 같은 지역에 개입하더라도 미국의 군사력이나 재정에 주는 부담은 최소화하는 방식을 사용할 것이라는 점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힘을 통한 평화’를 추구하면서도 부시 행정부가 시행했던 예방전쟁 독트린과는 일정하게 선을 긋는 형태이다. 미국의 안보를 위해서라면 선제적으로 공격해서라도 적국의 정권교체를 이루겠다는 예방전쟁 독트린은 이라크 등지에서 이미 많은 부작용을 일으켜 미국에 큰 부담을 안겼다는 평가가 그 기저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뒤에서도 언급하겠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화염과 분노’ 등 강경한 듯 보이는 발언들을 선제공격이나 예방전쟁의 전조로 보는 것은 이러한 전략기조를 이해하지 못한 성급한 평가였다. 또 한편으로는 부담을 최소화하는 국제주의를 추구하는 트럼프 독트린은 동맹을 중시하고 우호적 국가와의 관계를 확대하겠다는 정책으로도 나타난다. 「국가안보전략 2017」은 “기존 동맹에 대한 책무(commitment)를 더욱 강화”할 것이라 하고, 각론으로 들어가서 예를 들어 ‘북핵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도 “동맹국 및 동반자 국가들과 협력”하겠다고 공언한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7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정상회담에 참석했다는 사실도 이러한 정책의 반영이며, 거기서 유럽 동맹국의 국방비 증액을 촉구한 것은 ‘트럼프식 현실주의적 국제주의’를 극적으로 보여주었다고 평가할 만하다.
‘힘을 통한 평화’라는 현실주의를 추구하면서도 고립주의나 일방주의보다는 제한적 국제주의가 미국의 이익에 부합한다는 트럼프식 현실주의적 국제주의는 현실주의자들이 트럼프 정부 내의 신중상주의자들과 타협한 결과로 볼 수도 있다. 이는 경제현실을 반영한 결과이기도 하다. 즉 미국은 군사적으로는 세계 최강·최대를 유지하고 있지만 경제적으로는 적어도 양적으로는 중국에 1위 자리를 진작 빼앗겼다. 질적인 면에서도 IT 등 첨단분야에서 미국이 비교우위를 누리고 있는 부분들이 있지만 산업생산 등 많은 분야에서 중국이 추월했거나 추월하고 있는 상황이다. 중국의 경제성장 속도가 많이 느려졌다고는 해도 여전히 미국을 상회하므로 이러한 추세는 앞으로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세계무역기구(WTO) 등 미국 주도로 구축된 브레턴우즈체제 속에서 중국의 급속한 부상과 미국의 상대적 쇠퇴가 일어나는 경제현실에 트럼프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기로 한 것이 신중상주의로 나타나고 있다. 즉 관세 등 국가가 활동할 수 있는 행정조치들을 최대한 동원하여 미국의 수출을 늘려 미국경제의 부흥을 꾀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중국을 위시해 미국과의 교역에서 흑자를 내고 있는 여러 교역국에 ‘관세폭탄’을 퍼부어 국내 기업을 보호하고 생산과 수출을 장려하겠다는 국가주도적 무역정책이라는 면에서 중상주의적 성격을 띤다. 하지만 국방비 등 국가의 지출은 가능한 한 최소화하는 동시에 국가의 개입도 ‘무역규칙’을 재조정하는 정도로 제한하려 한다는 점에서 과거의 중상주의와는 다른 신중상주의라고 할 만하다. 이러한 신중상주의는 현실주의적 국제주의가 힘을 과도하게 행사하거나 국제 문제에 무분별하게 개입하는 것을 억지하는 힘으로 작용한다.
한편 트럼프 행정부는 무역과 통상을 국가안보전략과 직접 연결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중상주의적 무역정책과 국제주의적 자유무역 사이의 타협이 나타나고 있다. 미국경제에 불리한 외국의 무역관행 및 부정부패와는 전쟁을 벌이겠다고 선언하는 한편 자유시장 원칙 아래 ‘공정하고 호혜적인 무역’을 추구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또 지적소유권 및 전자상거래, 농업, 노동, 환경 등에서 ‘높은 기준’을 충족시키는 무역·투자협정을 추진하겠다면서도, 뜻이 같은 동반자와는 ‘공정하고 호혜적인 경제질서’를 지키기 위해 협력하겠다고 천명했다. 미국의 경제이익을 위해서는 빠리협약(2016) 같은 다자적 기구에서의 탈퇴도 불사하고, 동맹이나 적국을 불문하고 미국에 불리한 무역구조나 경제관행은 수정하겠다면서도, 국가의 전면적인 개입은 배제한 채 자유시장 경쟁과 민간기업의 주도권을 살리겠다는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트럼프 정부의 국가안보전략은 선거유세 중 내세웠던 단순한 고립주의와는 일정하게 거리를 둔다. 트럼프 정부는 미국의 이익에 필요하다면 국제기구나 국제조약을 탈퇴할 수도 있다고 공언했고, 실제로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이나 이란 핵협정(이란에 대한 포괄적공동행동계획, JCPOA)에서 탈퇴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국가안보전략 2017」은 다자주의적 국제기구에 기초한 전후 국제질서가 미국에 이익이 되었음을 인정하고 이를 중시하겠다고 천명하고 있기도 하다. 이는 미국 일국의 국가이익을 전면에 내세울 것을 원하는 중상주의자들이 국가안보전략을 비판하는 이유이기도 하지만, 현실주의적 국제주의자와 타협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7 부시 행정부의 일방주의와는 현격하게 다른 이런 모습은 국제관계에서 다자주의나 일방주의보다는 양자주의적 접근을 선호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8 브레턴우즈체제를 포함한 전후 국제질서의 수혜자라고 할 수 있는 동북아시아의 입장에서 이러한 양면성은 위기인 동시에 기회라 하겠다.
트럼프 정부의 대북정책과 동북아시아
「국가안보전략 2017」이 트럼프식 현실주의자와 신중상주의자가 타협한 결과라는 점은 대중국 정책에서 잘 나타난다. 「국가안보전략 2017」에서 양자는 중국을 국제기구와 세계경제에 참여시켜서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지금까지의 전제가 “틀린 것으로 판명됐다”는 데 입장이 일치했다. 현실주의적 국제주의자는 중국이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미국을 밀어내려고 하”는 수정주의국가라며 안보위협으로 보고 있고, 신중상주의자는 중국이 “미국의 지적재산권을 훔치고” 있을 뿐 아니라 “미국이 기여해 건설한 국제기구를 착취하”는 경제위협이라고 간주한다. 트럼프 행정부의 두 축을 이루는 그룹이 중국을 ‘위협’으로 보는 데 일치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공감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부상에 어떻게 대응할지에 대해서는 합의된 뚜렷한 대안이 없다는 한계도 보인다. 오바마 정부가 시도했던 바와 같이 인도-태평양에 미 군사력을 증강하겠다는 전략이 제시된 것도 아니거니와, 신중상주의자들의 반대 때문에 이런 방향을 추구하기도 쉽지 않다. ‘중국위협론’에 대한 이같은 전략적 합의와 전술적 모호성은 동북아시아에 위기 요인과 기회를 동시에 부과한다.
최근 상원과 하원을 통과한 2019년 국방수권법안도 이러한 양면성을 내포하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이 “역사상 가장 강력한 대중제재”라고 평가한 것과 같이 이 법안에는 중국을 군사적으로 견제하는 조치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9 △미국 해군이 주도하여 하와이 인근에서 진행하는 다국적 해상합동훈련인 림팩(RIMPAC)에 중국의 참가를 금지하고 △대만관계법에 근거하여 대만과의 군사협력을 강화하는 동시에 무기 판매 및 이전도 확대하고 △인도와의 군사협력을 강화, 향상하고 △인도-태평양 지정학 정세 보고서를 작성, 제출하라는 등의 요구를 한 것이다. 하지만 국방수권법안 중 가장 핵심적인 내용인 국방예산은 『월스트리트저널』의 평가를 무색하게 한다. 의회가 2019 회계연도 국방예산으로 통과시킨 액수는 7080억 달러로 전해에 비해 1.7퍼센트 증액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10 즉 중국을 견제한다고 하면서도 돈이 들지 않는 조치나, 동맹국 및 우호적 국가들을 내세우는 정책, 무기판매 등을 주요 수단으로 삼는 데서도 트럼프적 현실주의와 신중상주의의 타협을 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타협은 더 본질적으로는 미국이 세계에서 처한 현실을 정확하게 반영하는 것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다.
한편 「국가안보전략 2017」은 “북한”을 총 17번 언급11하며 ‘북한위협’을 적시했다. 첫째, “미국 본토를 위협할 수 있는 핵무기와 생화학무기”를 개발하여 “핵무기로 미국인 수백만명을 살상할 수 있는 능력을 추구”하기 때문에 미국의 위협이라고 지적했으며, 둘째, 미국의 동맹국들을 위협하는 ‘지역의 위협’이라고 지적했고, 셋째, 핵무기를 확산시킬 수도 있기에 ‘세계의 위협’이라고 적시했다. 그리고 이러한 위협에 대응해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한반도 비핵화(CVID)를 성취하겠다”며 부시 행정부가 목적으로 내세웠던 CVID를 되풀이했다. 하지만 “동맹국 및 동반자 국가들과 협력”해서 이 목적을 달성하겠다며, 일방주의가 아닌 다자주의를 핵심 수단으로 삼겠다고 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또 군사적인 대처방식에서도 부시 행정부와 같은 ‘선제타격’이 아니라 억지와 방어를 강조한 것도 눈에 띄는 부분이다. 즉 “핵, 화학, 방사능, 생물 무기 공격을 방지”해야 하고 “잠재적 위협이 미국에 도달하기 이전에 억지, 교란, 격퇴해야 한다”고 명시한 것이다. 테러리스트에 대해서 그 근원을 공격해 뿌리를 뽑겠다고 한 것과 달리 핵·생화학 무기 대처방식으로는 방지·억지·교란·격퇴를 강조한 것이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미사일 방어, 대량살상무기 탐지·교란, 반확산 능력 향상’을 열거했다. 언론을 통해서는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호전적’ 이미지가 많이 유포되어 있지만, 트럼프 정부의 기본 전략은 방지와 억지 및 격퇴 등 전통적 안보정책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다. 이는 부시 행정부의 ‘선제타격’을 빙자한 예방전쟁전략이 미국에 득보다는 해가 됐다는 국제주의자의 평가와 미국의 지나친 군사적 개입을 경계하는 신중상주의자의 견해가 일치하는 지점인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정부의 ‘최대의 압박과 관여’라는 대북정책은 이러한 전략적 기조 위에 서 있다. 즉 1) 북의 핵미사일 위협은 전통적 억지정책으로 상쇄시킨다. 2) 국제사회의 힘을 동원하여 최대의 압박을 가한다. 3) 1과 2의 기초 위에서 미국이 직접 관여하여 한반도 비핵화를 관철시킨다는 내용으로 구성된 정책이다. 이런 시각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이전 발언들도 재평가되어야 한다. 트럼프 대통령을 ‘호전광’으로 보이게 한 발언들은 사실 억지전략의 충실한 (하지만 세련되지 않은) 집행이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북의 “완전한 파괴”를 공언한 그의 유엔총회 연설에는 중요한 조건절이 있었다. “우리가 미국이나 동맹국을 방어해야 하는 상황이 된다면, 우리는 북한을 완전히 파괴하는 것 말고는 선택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즉 ‘북한이 미국이나 한국 또는 일본을 먼저 공격한다면 철저하게 보복하겠다, 그러니 도발하지 말라’는 경고를 발한 것이다. 전형적인 억지정책 천명이다. 실제로 올 2월 미 국방부가 발간한 「핵태세 검토보고서」(Nuclear Posture Review)에서도 거의 동일한 표현이 사용됐다. “미국이나 동맹국 및 파트너를 상대로 한 북한의 핵공격은 용납할 수 없는 일로, 이같은 일이 벌어질 경우 북한정권을 끝내겠다.” 이 보고서가 밝힌 바와 같이 “미국의 억지전략은 분명”한 것이다.
물론 이러한 억지전략은 핵무기 없는 세상을 지향하는 세계의 조류를 거스르는 것이다.12 그럼에도 불구하고 ‘핵 없는 세상’을 제창하는 동시에 북에 대한 선제 핵공격을 배제하지 않던 오바마 행정부의 이율배반적 전략보다는 대북 위협수준을 낮춘 것이다.13 즉 오바마 행정부는 북이 핵무기를 개발한다는 이유로 대북 선제 핵타격을 배제하지 않았다면, 트럼프 행정부는 이 옵션보다는 보복 핵타격을 중심으로 한 억지전략을 선택했다. 부시 행정부가 시작한 예방전쟁의 위협을 오바마 행정부가 선제 핵타격 가능성으로 강화했던 것을 트럼프 정부가 뒤집어 전통적 억지전략으로 회귀시킨 것이다.14 부시와 오바마 행정부의 공세적 전략이 북의 핵전력 보유를 정당화하고 가속화하는 데 기여했다면, 트럼프 행정부는 북이 비핵화 협상에 나설 수 있는 전략환경을 조성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미국이 전통적인 억지전략으로 돌아간다면 북도 핵무기를 포기하고 이전의 비대칭적 억지전략으로 회귀할 수 있는 조건이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이러한 대북정책은 미국의 세계전략상 동북아의 긴장을 완화해 중동, 특히 이란에 힘을 집중할 가능성을 연다는 측면도 있다. 트럼프 정부가 이란 공동협력합의에서 탈퇴한 것은 이스라엘이나 사우디아라비아의 로비, 트럼프 대통령 후원자 중 대이란 강경론자들의 영향 등도 작용한 결과이겠으나 그것이 대북정책에는 오히려 긍정적으로 작용했을 수 있다. 반면 이러한 대북정책은 중동의 긴장을 격화시킬 잠재성을 내포한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북아시아에서 트럼프 정부의 대북정책이 갖는 긍정적 함의는 주목할 만하다. 싱가포르 합의대로 미국과 북이 ‘새로운 관계’를 맺고 한반도에서 평화체제를 구축한다면 그것은 한반도의 전쟁상태가 형식적으로나 내용적으로나 완전히 종식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그 과정은 여러차례의 굴곡을 겪을 것이고 단기간에 완성되기도 어렵겠지만 한국전쟁의 두 중요 당사자가 최고위급에서 이 길을 가겠다고 세계에 약속한 것은 한국전쟁 발발 이후 가장 큰 충격적 변화이다. 더 구체적으로는 평화협정 체결이 이 과정의 한 부분이 될 것이고 이와 함께 유엔사령부의 해체가 전쟁상태 종식의 구체적 내용으로 현실화한다는 것이다. 유엔사령부가 해체되면 일본에 존재하는 유엔 후방사령부의 해체도 불가결해지며, 이는 미국과 일본, 한국이 유엔사령부를 매개로 일체가 되어 북과 전쟁을 지속하는 구조를 근본적으로 변혁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북일관계에서 한국전쟁의 구조를 헐어내어 근원적인 전환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곧 일본의 한반도 식민지 지배의 역사, 그리고 1894년부터 시작된 일본의 대아시아 전쟁의 역사를 드디어 청산할 수 있는 공간이 열림을 뜻한다. 물론 이 공간을 어떻게 사용할지는 일본과 한국 및 북의 선택으로 남게 될 것이다.
트럼프 정부의 국가안보전략과 ‘혁명적’ 기회
전체적으로 봐서 「국가안보전략 2017」은 미국의 힘을 내세워 미국의 이익을 우선하겠다는 ‘미국우선주의’를 표방한다. 그럼에도 일방주의나 ‘선제타격’을 내세웠던 부시 정부의 네오콘(신보수주의) 입장, 또는 대선기간에 보였던 일국적 중상주의에서 다소 물러나 다자적 국제주의와의 타협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타협이 국가안보전략에서의 전략적 확실성과 전술적 모호성을 낳고 있다고 보인다. 이러한 모호성은 트럼프 대통령 개인의 예측 불능한 성격 때문에 언론에서는 상당히 과장되고 희화된 모습으로 많이 묘사되어왔다.
하지만 모호성의 본질은 트럼프 정부의 국가전략이 보여주는 현실주의적 국제주의·신중상주의의 타협에서 기인하는 것임을 거듭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이러한 타협은 “기존 동맹에 대한 책무를 더욱 강화”할 것이라는 동맹 중시 입장으로도 나타나고 있다. 2019년 국방수권법도 “특히 인도-태평양에서 동맹을 심화하고 확대할 것이며, 어느 동맹국도 당연시하지 않을 것”이라며 이런 입장을 뒷받침한다. 미국이 독자적으로 군사력을 행사하는 데 따르는 재정지출을 가능한 한 제한하려 하는데, 이는 해외 군사활동 비용에 대한 거부감이 강한 신중상주의의 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즉 미국의 비용은 최소화하며 그 비용을 동맹국에 분담시키려는 것이다. 이미 북대서양조약기구에 속한 유럽 동맹국에 대한 국방비 증액 요구에서도 나타난바, 한국이나 일본, 오스트레일리아 등 동맹국 모두가 이러한 압박을 받을 것이다. 더 중대한 구조적 문제는 미국을 중심으로 구축해놓은 세계군사질서를 더욱 강화·확대하겠다는 점이다. 트럼프 정부의 현실주의적 국제주의는 미국이 비교우위를 점하고 있는 세계군사질서를 ‘가성비 최대화’의 원칙 아래 최대한 활용하려 한다. 반면 트럼프 정부가 노정하는 동맹 필요성은 동맹국의 협상력을 높이는 효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미국이 독자적인 군사력 행사를 부담스러워할수록 동맹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며, 그럴수록 동맹의 가치가 높아지기 때문이다. 미국 군사질서 속에서 독립적인 목소리를 낼 가능성이 커진다는 모순 또한 동맹국에 위기와 기회를 동시에 주는 것이다.
위기와 기회 중 어느 측면이 부각될지는 미국 못지않게 동맹국/상대국에도 달려 있다. 트럼프 정부의 전략이 내포한 기회를 인지하지 못한 채 위기만을 확대해석하는 경우에는 미국에 끌려갈 가능성이 커지게 된다. 반면 위기 뒤에 존재하는 기회를 포착하고 이를 극대화할 능력이 있다면 미국의 질서 안에서 새로운 질서를 생성해낼 씨앗을 키울 수도 있는 것이다. 미국 국가전략에 내재한 타협성은 특히 아시아에 여러 가능성을 열어준다. 아시아 각국 정부와 민중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계속 창안하여 이 공간을 활용하면 어젠다를 주도할 수도 있다. 어젠다 주도자로서 미국을 견인하여 한반도와 동북아에서 새로운 평화와 협력의 가능성을 열 수도 있는 것이다.
한국은 이러한 가능성을 적극 추동한 바 있다. 2016~17년 촛불시위로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을 쟁취하고 문재인 대통령을 당선시킨 시민사회의 힘은 남북관계와 북미관계의 전환을 추동해왔다.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을 초래한 직접적 원인은 ‘국정농단’이지만 대북 강경정책으로 한반도 상황을 위태롭게 만들었다는 위기감도 구조적 원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탄핵은 이런 대북정책을 전환하여 한반도 위기국면을 전환시킬 한국 국내적 구조를 만들어낸 것이고, 문재인 대통령은 당선되자마자 ‘촛불정부’를 자임하며 이러한 시민사회의 요구에 부응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8·15 경축사에서 “누구도 대한민국의 동의 없이 군사행동을 결정할 수 없습니다. 정부는 모든 것을 걸고 전쟁만은 막을 것입니다”라며 선제타격 및 예방전쟁론과 선을 그었다. 이어 11월에는 유엔총회에서 평창동계올림픽 휴전결의 채택을 주도하여 올림픽을 전후해 일체의 적대행위를 중단할 것을 촉구했다. 12월에는 평창올림픽·패럴림픽 때까지 한미군사훈련을 연기할 수 있다는 입장을 공개하고 이를 미국정부에 제안하는 등 구체적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문재인정부의 이같은 평화지향적 발언과 행동은 올 1월 초 김정은 위원장이 신년사를 발표하며 동계올림픽에 대표단을 파견하겠다는 전향적 입장을 보일 수 있었던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그리고 그 직후인 1월 4일 문재인 대통령이 트럼프 대통령과의 전화통화에서 한미연합군사훈련을 평창올림픽 이후에 실시한다고 합의함으로써 구체적 행동으로 결실을 맺었다.
판문점선언과 싱가포르 공동성명을 견인한 이 일련의 조치들은 그 출발점이 촛불시위였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대화와 교류, 또 앞으로 진전될 것으로 보이는 비핵화와 조미관계 개선, 한반도 군축 프로세스를 가능하게 하는 주요한 구조적 동력은 바로 한국 시민사회인 것이다. 즉 지금 한반도를 시발점으로 진행 중인 평화프로세스는 트럼프 정부의 국가전략이 내포한 위기와 기회 속에서 한국 시민사회가 위기를 최소화하고 기회를 최대화하는 과정으로도 설명할 수 있다. 촛불시위로 표출된 시민사회의 동력은 지난 6월 지방선거에서 분단위기를 끊임없이 재생산해온 수구우익정당에 패배를 안기고 개혁과 평화를 말하는 정당들에 큰 힘을 실어주었다. 한반도와 동북아시아 평화프로세스를 계속하라는 요구이기도 하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정부구조를 만들어낸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촛불혁명’은 현재진행형이다. 트럼프 정부의 국가전략이 내포한 위기와 기회는 이처럼 ‘전쟁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는 ‘혁명적’ 기회로 전화되었다.
그 성과는 당장 한반도의 삶에서 나타나고 있다. 청와대가 판문점선언 100일을 맞아 “국민의 삶에서 평화가 일상화”됐다고 스스로 평가한 것이 자화자찬만은 아니다.15 북의 핵시험이나 미사일 발사가 전무한 가운데 북의 핵시험장 폐기 등 가시적 조치들이 한반도 전쟁 위기감을 극적으로 낮춘 것이 사실이다. 대남·대북 확성기 방송 중단과 시설 철거가 이뤄지고 군 통신선을 복원하는 성과도 있었다. 남북 군사당국 대화가 재개되어 우발적 충돌의 위험성이 상당히 완화되기도 했다. 한걸음 더 나아가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비무장화 및 비무장지대 내 감시초소 시범철수에 공감대를 이루는 등 군사적 신뢰조치와 군비통제를 확대해나가고 있다. 긴장완화 및 신뢰구축, 서해해상 우발적 충돌방지를 위한 조치들을 협의하고 있다는 사실은 불과 작년까지도 모두가 전쟁위험에 떨었던 것을 상기하면 엄청난 변화라 할 것이다.
이제 문재인정부는 이렇게 만들어진 기회를 어떻게 계속 살려나갈 것인가? 대통령 지지율이 7월까지도 70퍼센트를 상회했던 현상은 남북정상회담의 성공적 개최와 평화프로세스의 출발에 대한 시민사회의 높은 지지를 반영한 것이었다. 그런데 싱가포르 정상회담까지 거침없이 나가는 것 같던 평화프로세스는 최근 주춤하는 듯하고 문재인정부도 이를 적극적으로 밀고 나가는 ‘운전자’로서의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이에 대한 실망감이 반영되어 최근의 지지율 추락으로 나타난 듯하다. 시민은 ‘촛불혁명’의 진전을 바라고 있는 것이다. 종전선언 및 평화협정에 대한 논의와 동시에 평화체제를 건설하기 위한 구체적 조치들이 이제는 하나씩 실행될 필요가 있다. 판문점선언에 포함된 군축조치들이 당장 전면적으로 실행되기는 어렵더라도 최소한 군비확장은 중단해야 한다. 남과 북 사이에 군사적 긴장을 격화할 수 있는 언행은 그만두어야 할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7월 27일 국방부가 발표한 ‘국방개혁2.0’은 평화프로세스에 역행하는 것이다.16 이 ‘개혁안’에 따르면 국방부는 킬체인과 한국형 미사일방어체계, 대량응징보복으로 구성된 삼축체계를 “정상적”으로 추진하기로 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조치들이 부분적인 것이 아니라 전반적 군비확장의 일환이라는 점이다. 국방부는 2019년 국방예산으로 올해보다 8.6퍼센트 늘어난 46조 9000억원을 요구하고 향후 5년간 국방개혁에 필요한 예산을 270조 7000억원으로 추산하는 등 군축이 아니라 군비확장에 나선 듯이 행동하고 있다. 국방부 관계자가 “북한의 위협감소가 없는 상황”이라며 남북정상회담 및 북미정상회담을 포함한 일련의 한반도 안보상황 변화를 부인하는 움직임은 위태롭기까지 하다.17 “국민의 삶에서 평화가 일상화”됐다는 청와대의 공식발표를 전면 부인하는 모양새이기도 하다.
이런 모양새가 나오는 이유는 남북정상과 북미정상이 “평화체제 구축”에 합의했는데도 불구하고 정부 일각이나 사회가 그 의미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싸워서 이기는 군대”를 목적으로 내세워 국방개혁을 추진 중인 대한민국 국방부는 이런 목적이 “평화체제 구축” 합의에 반대된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거나 수용을 거부하는 것이다. 평화체제 구축을 지향한다면 이제는 ‘싸우지 않는 전략환경’을 만들어야 하며, ‘평화를 만드는 군’을 지향하라는 전략명령이 최고위에서 하달되고 국방부는 이를 집행하기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한반도 주민 모두가 이와 관련해 더욱 근원적인 질문들과 진지하게 대면하기 시작해야 한다. 즉 한반도 평화체제 안에서 대한민국 국군의 역할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한반도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데 한미군사동맹이 필요한가? 필요하다면 그 역할은 어떠해야 하는가? 한반도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데 대한민국은 미국을 위시한 주변국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 한국 정부와 시민사회는 70년 가까이 익숙하게 길들여진 전쟁체제를 헐어내고 완전히 새로운 평화체제를 구축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근원적 질문들과 담대히 대면해야 할 시점이 됐다. 그리고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기존 상황보다 한걸음씩 앞서나가는 조치들을 취하며 비가역적인 “화해와 평화번영의 새로운 시대”(판문점선언)를 만들어나가야 할 것이다. 트럼프 정부가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서도 한국이라는 동맹을 필요로 한다는 현실을 직시하며, 한반도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기회의 창을 활짝 열어젖히는 담대함이 요구되는 것이다.
한편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은 필연적으로 일본에 근원적인 질문을 제기한다. 일본은 지난 70여년간 동참해온 전쟁체제에서 이탈할 것인가? 120년 넘게 완전히 종식하지 못한 대아시아 전쟁을 끝낼 것인가? ‘국제제재의 견고한 유지’를 강조하던 아베 정부도 이미 이러한 근원적 질문을 무시할 수 없는 상황에 처했음을 인지했다는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대북 미사일 경계 수준을 하향조정하는 등 여러 미묘한 변화를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눈에 띄는 조치는 외무성 내 아시아대양주국 북동아시아과를 두개로 나누어 1과는 한국, 2과는 북을 담당하게 한 일이다. 북과의 대화 가능성을 여러가지로 모색하는 동시에 장기적으로 북과의 교섭뿐 아니라 외교관계 수립까지 대비한 포석으로 보인다. 하지만 ‘북 위협론’을 이용해 개헌과 ‘보통국가화’를 추진하려던 전략에 대한 근원적 자성은 여전히 부족해 보인다. 일본정부는 지금까지 트럼프 전략의 위기와 기회 중 위기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왔다. 일본 정부와 시민사회는 현 국면이 제기하는 근원적 질문들에 담대히 대응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향후 일본의 선택은 한반도에 또다른 기회와 위기를 가져다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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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일본 『겐다이시소오(現代思想)』 2018년 8월호에 게재된 졸고 「トランプ政權の國家安保戰略と米朝交渉」를 수정·보완한 것이다.↩
- 영국 『파이낸셜타임즈』의 기디언 래크먼도 트럼프 대통령의 외교정책이 나름대로 내적 일관성이 있음을 지적하며 이를 ‘트럼프 독트린’이라고 칭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트럼프 독트린’을 구성하는 핵심적 세계관의 하나인 신현실주의의 중요성을 인지하지 못하고, 트럼프 독트린이 동맹에 부여하는 유용성을 저평가한다는 등의 한계를 보인다. Gideon Rachman, “The Trump Doctrine—coherent, radical and wrong,” The Financial Times 2018.7.16.↩
- https://www.whitehouse.gov/wp-content/uploads/2017/12/NSS-Final-12-18-2017-0905.pdf.↩
- 권력전이 이론같이 권력을 중심으로 구성된 국제질서를 논의하는 국제정치이론가들은 국가를 통상 두 부류로 나눈다. 기존 국제질서를 온존하려는 ‘현상유지국가’와 기존 질서에 도전해 이를 수정하려는 ‘수정주의국가’가 그것이다. 이 이론을 현 국제질서에 적용해 러시아나 중국이 수정주의국가인가를 두고 논의가 활발히 진행 중이다. 「국가안보전략 2017」은 미국의 권력을 중심으로 구성된 국제질서를 수정하려는 위협을 가하고 있는 국가가 러시아와 중국이라는 입장을 취한다. 현상유지국가와 수정주의국가라는 개념을 국제정치이론에 본격적으로 도입한 논문은 다음을 참조. Randall L. Schweller, “Bandwagoning for profit: Bringing the revisionist state back in,” International Security vol. 19, no. 1 (Summer 1994), 86~88면.↩
-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국가안보전략 보고서에서 “선제타격”을 명시했지만 그 표현과 달리 내용은 예방전쟁을 의미했다. 선제타격은 적국의 공격이 임박했다는 증거가 명백한 경우 취할 수 있는 방어적 조치를 의미하여 국제법적으로 용인된다는 것이 다수의견이다. 반면 예방전쟁은 적국이 핵무기 등을 포함해 위협적 군사력을 획득하기 이전에 이를 방지하기 위해 선제적으로 취하는 군사적 행동을 지칭하며 국제법상 불법적 침공으로 간주된다.↩
- John J. Mearsheimer, The Tragedy of Great Power Politics 1st ed., Norton 2001.↩
- 미국은 세계 최강 군사국이자 동시에 세계 최대 무역적자국이다. 트럼프 행정부에서 신현실주의와 신중상주의가 타협을 이룬 것은 이런 구조적 현실을 솔직하게 반영한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뒤에서 지적하는 바와 같이 대북군사전략이 전통적 억지전략으로 회귀한 것도 북의 핵미사일을 군사적으로 제거할 현실적 방안이 없다는 전략적 상황을 솔직하게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트럼프 대통령 본인이 지난 70여년간 미국의 외교안보정책을 지배해온 ‘워싱턴 룰’에서 자유롭기 때문에 이렇게 ‘솔직한’ 전략이 채택됐다고 볼 수 있다. 즉 구조적 측면에서만 보면 트럼프 행정부의 국가전략은 현실에 조응하는 지속 가능한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트럼프 독트린’이라고 부를 수 있다. 반면 이러한 솔직함은 기존 ‘워싱턴 룰’에 역행하는 것이므로 정책집단, 관료, 언론 등으로부터 강력한 도전과 비판을 받고 있다. 또 지난 대선에서의 ‘러시아 커넥션’ 의혹이 국내정치적으로 트럼프 대통령의 발목을 잡고 있고 탄핵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올 11월 중간선거는 그 결과에 따라 ‘트럼프 독트린’이 완전히 집행되기도 전에 무너지는 중요한 분기점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대북정책에 있어서는 중간선거 이후 현재의 외교협상이 결렬되더라도 억지전략 이외에는 현실적인 군사대응책이 없다는 냉정한 평가를 내릴 수 있다. ‘워싱턴 룰’에 대해서는 Andrew Bacevich, Washington Rules: America’s Path to Permanent War, Metropolitan Books 2010. 커밍스도 트럼프 대통령이 “워싱턴 기득권층”(Washington establishment)으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대북협상이 가능하다고 평가한다. Jon Wiener, “In Trump’s Madness, There’s Opportunity in Korea: Bruce Cumings on the reasons for optimism about peace in Korea,” The Nation, 2018.6.14.↩
- 미국 하버드대학의 정치학자 대니엘 앨런도 트럼프 대통령의 외교정책이 ‘순수한 양자주의’라는 일관성을 갖고 있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그녀는 트럼프 외교정책의 형식에 나타나는 일관성만을 강조하지 그 내용에서 나타나는 일관성과 타협성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한계를 보인다. Danielle Allen, “Trump’s foreign policy is perfectly coherent,” The Washington Post, 2018.7.23.↩
- Kate O’Keeffe and Siobhan Hughes, “Congress Passes Defense Bill That’s Tough on China,” The Wall Street Journal, 2018.8.1.↩
- H.R.5515 - John S. McCain National Defense Authorization Act for Fiscal Year 2019 (https://www.congress.gov/bill/115th-congress/house-bill/5515/text).↩
- “North Korea”가 16번,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가 1번.↩
- 2017년 유엔총회에서 122개국의 찬성으로 핵무기금지조약이 채택됐다. 안또니우 구떼흐스 유엔 사무총장도 2018년 8월 히로시마에서 개최된 평화기원식에서 핵보유국들이 냉전 종식 이후에도 핵무기에 사용하는 비용이 인도적 지원에 필요한 액수의 80배가 넘는다고 비판하며 “핵보유국은 핵군축을 이끌 특별한 책임이 있다”고 강조했다. 田井中雅人 「NYでは言いづらくても…長崎で本音發信 國連事務總長」, 『朝日新聞』 2018.8.9.↩
- 오바마 행정부의 대북전략에 대해서는 졸고 「사드와 한반도 군비경쟁의 질적 전환: ‘위협의 균형’을 무너뜨리고 선제공격으로?」, 『창작과비평』 2015년 여름호 참조.↩
- 부시 행정부의 안보전략과 대북정책에 대해서는 졸고 「미국의 군사전략 변화와 한미동맹」, 『창작과비평』 2004년 가을호 참조.↩
- 청와대 「카드뉴스로 보는 판문점 선언 100일, 주요성과」, 2018.8.3(https://www1.president.go.kr/articles/3975).↩
- 정욱식 「‘문재인표’ 국방개혁이 미흡한 이유」, 『프레시안』 2018.7.31.↩
- 정희완 「장군 감축 소극적인 육군·비전투 부대부터 구조조정 시동」, 경향신문 2018.7.27. 이러한 인식은 트럼프 행정부의 상황인식과 비교해도 온도 차이가 느껴진다. 트럼프 대통령이 북의 핵 및 미사일 시험 중단과 미군 유해 등을 들며 상황변화를 강조한 것은 자화자찬이라고 해도 미군 고위층도 변화를 인정하고 있다. 예를 들어 미군 서열 2위인 폴 쎌바 미국 합참차장은 8월 10일 북이 핵과 미사일 시험 동결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개발에 차질을 빚고 있다며 “(동결이)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이 나의 결론”이라고 밝혔다. 한덕민 「미 합참차장 “북 핵·미사일 시험 동결로 ICBM 개발 차질”」, 자유아시아방송 2018.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