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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김정아 金正雅

1966년생. 소설집 『가시』로 작품활동 시작. 2017년 신동엽문학상 수상. padosoridul@gmail.com

 

 

 

너무 쉬운 우리 꿈

 

 

누구나 한번은 히어로가 되고 싶다. TV만 틀면 부지기수로 등장하는 히어로에게 익숙해진 탓일까, 아니면 지구를 위협하는 악당의 귀환으로 히어로가 절실히 필요해졌기 때문일까? 2008년 봄, 양어깨를 콘크리트 거푸집으로 다진 것처럼 당당하고 목소리마저 탕탕한 시민들이 광장으로 속속 모여들었다.

청계천이 시작되는 소라탑 인근에서 촛불이 밝혀지기 시작했다. 하필 대통령의 치적인 청계천이라니 인생이란 새옹의 말처럼 행운과 불행이 엎치락뒤치락하는 것이다. 촛불의 점화자는 청소년들이었다. “잠 좀 자자, 밥 좀 먹자!” 청소년들은 자신들의 요구를 한마디로 정리했다. 정권이 바뀌자 교육부는 야간자율학습과 0교시를 부활시켰다. 새벽밥 먹고 나와 별도 달도 잠든 한밤중에 집으로 돌아가야 했으니 아이들로서는 시키면 시키는 대로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리고 정부가 추진한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은 아이들이 시작해놓은 판에 어른들이 가세할 명분을 던져주었다. 이른 봄, 마른 들판에 불이 번지듯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매일 저녁 촛불을 든 사람들이 소라탑 주위에 빼곡했고 주말이면 청계천변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한달 가까이 계속된 집회에 경찰은 병력을 동원해 해산하겠다는 발표를 내놓고 참가자들을 위협하려 했지만 시민들은 갈수록 겁을 먹기는커녕 ‘칠 테면 한번 쳐보라’는 듯 가슴을 내밀며 앞으로 나아가는 형국이 되어 오히려 경찰의 시름이 깊어갔다. 경찰은 ‘치안’과 ‘준법’을 강조했지만 집회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열렸다. 시민들은 교육정책과 무역정책만 가지고 항의하는 것이 아니었다. 집회 횟수만큼이나 정부의 갖가지 잘못은 쌓여갔고 대통령은 취임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국민 비호감 1위’로 떠오르면서 물러나라는 국민적 저항에 직면했다.

시민들이 모여서 하는 일은 ‘말하기’였다. 말은 정치인만 잘하는 게 아니니까, 말 못해서 죽은 귀신은 없으니까, 잘못된 건 먼저 말로 타이르고 꾸짖어야 하니까,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니까, 사형수에게도 죽기 전에 한마디는 하라고 하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국민이라는 ‘아무개’들은 이렇게 광장에 나와서 외쳐야 존재를 증명할 수 있으니까.

그날도 자유발언이 이어졌다.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말의 잔치였다. 반복되고 순환되는 말들 속에는 숙연한 자기반성도 있고 알 수 없는 대상을 향해 끓어오르는 적개심도 있었으며 대통령에 대한 맹렬한 질타와 무엇보다 이제 그만 청와대로 총진군하자는 선동이 심심치 않게 나왔다. 자유발언이 길어질수록 소라탑 주위가 말의 늪과 진창이 되어갔다. 집회를 진행하는 비상대책위원회는 준비된 프로그램으로 행사를 끝내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대책위 니네가 뭔데? 대책위는 빠져, 빠지라구!”

대책위의 주도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이 많았다. 닉네임이 ‘빛나리’라는 사내도 그런 부류 중 하나였다. 햇볕에 반짝거릴 정도로 머리가 벗어진 사내는 조국의 밝은 미래를 희망한다고 자신의 ‘닉’을 설명했다. 듣고 있던 무리 중 백두가 껄껄대며 웃었다. 세일즈맨 백두는 빛나리를 다음 아고라에서 알게 되었고 광장에서 아고라 무리들과 함께 깃발을 들었다. 빛나리는 사전집회다 부문집회다 광장을 이리저리 돌며 아는 사람들에게 백두를 소개했다. 이 정권은 노골적인 신자유주의 독재정부이며 노동자, 농민, 빈민, 학생이 총진군하는 강고한 투쟁으로 새 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게 빛나리의 주장이었다. 정말이지 백두로서는 살면서 처음 듣는 생경한 말들이었다. 빛나리는 ‘판’을 읽어야 한다고 했다. 병력의 소속과 규모, 어떤 길을 막아서고 어디에 전경차를 주차하고 밥을 먹는지와 시위대의 숫자 그리고 대치선 따위가 그가 읽는 ‘판’이었다. 그 판을 따라다닐 때 백두의 눈은 전에 없이 빛났다. 몇달 후 빛나리가 준비한 연막살충제나 폭죽, 쇠구슬 따위를 배낭에 지고 도로를 뛰어다닌 사람이 백두였다. 백두는 교통범칙금도 기한을 넘기지 않고 납부하는 얌전한 시민이었지만 그것도 아고라라는 신세계에 발을 들여놓기 전의 얘기다. 백두는 날이 갈수록 용납할 수 없는 것과 타협할 생각이 없어졌고 ‘닥치고’ 한길만 가기를 고집했다. 그것이 막다른 골목일지라도 다른 선택은 고려하지 않았다.

공식적인 집회가 끝난 후에도 사람들은 흩어지지 않고 끈질기게 남아 있었다. 오월의 밤은 자정을 넘기면서 바람막이 점퍼가 필요할 정도로 쌀쌀해졌다. 아무나 노숙할 기온은 아니었는데 해산하지 않는 숱한 아무개들이 노숙도 각오하고 요지부동이었다. 그 아무개 속에 유진도 있었다. 처음엔 지역아동센터에서 여럿이 함께 왔는데 지금은 혼자다. 밴드가 해체되고 친한 친구마저 자퇴해버린 학교에 더이상 다니기 어려워진 유진은 자꾸만 촛불이 밝혀지는 광장으로 향하게 되었다.

한 남자가 발언대에 나와서 마이크를 잡더니 광화문을 넘어 청와대로 가자고 선동했다. 악을 쓰며 발언하는 남자의 입에서 침이 연신 사방으로 튀었다. 유진은 한번도 자유발언대에 서본 적이 없었다. 지역아동센터 선생님이 광장에 나올 때마다 유진에게 한번 해보라며 자꾸 눈짓을 주었지만 다들 저렇게 하늘이 내린 재능인 양 잘해내는 걸 보면 유진은 듣는 편이 좋았다. 누군가의 주장에 찬성할 때는 유진도 마이크를 잡아볼까 하는 마음이 들었으나 그게 무대에 오를 만큼 중요한 말인지, 그래서 웅변대회에 나온 저 사람들처럼 환호와 박수를 받을 수 있을지 가늠해보면 그만두게 되었다. 유진은 말보다 노래가 자신있었지만 여기서는 안 될 일이었다. 게다가 유진은 쎄션 없이는 안 되는 백코러스가 아닌가. 밴드가 활동을 중단한 지 반년이 지났다. 일진에 가담한 리드 기타가 정학을 먹으면서 흐지부지되었다. ‘오렌지’라는 그룹 이름에 맞춰 다들 오렌지색으로 머리를 염색했었는데, 이제 끄트머리에 조금 남아 있을 뿐이다.

“우리가 어린애입니까, 여러분? 우리 청소년들은 결코 어린아이가 아닙니다. 밥도 혼자 해 먹을 수 있고, 돈도 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건 오직 선거, 투표뿐입니다, 여러분!”

한 여학생의 발언에 참석자들은 깔깔대고 웃었지만 유진은 진심으로 박수를 쳤다.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지역아동센터 선생님, 아동보호센터와 구청 직원이 하는 걱정이란 결국 혼자 밥을 어떻게 먹느냐는 것이었다. 할머니가 밥을 차려준 게 언제였던가? 할머니의 밥은 술이었다. 그 밥은 같이 먹을 수 있는 게 아니니 유진은 초등학생 때부터 혼자 밥 먹는 데 익숙했다. 혼자 살지 못할 게 뭐람, 밥 먹고 잠자는 건 본능인데 그걸 혼자 하면 위기아동이 되는 건가? 유진은 썰렁한 장례식에 앉아 마음속에서 웅얼거리는 말들을 곱씹었지만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짧은 노래가 벌써 몇번째 반복되었다. 이 노래가 나오면 다들 자리를 털고 일어났는데 그날 밤은 달랐다. 화장실에 다녀오거나 멀리 떨어져 담배 한대씩을 피우고 다시 돌아왔다. 사람들은 예민하게 무엇인가를 기다렸다. 빛나리는 집회가 시작될 때부터 무대 주위를 서성대다가 참석자들의 항의에 가까운 종용으로 대책위가 물러난 후 ‘자연스럽게’ 진행되는 발언대를 통솔해가는 재주가 있었다. 그는 앰프 옆에 서 있다가 발언자들이 마이크를 누구에게 주어야 할지 몰라 쩔쩔맬 때 그걸 받아주고 스피커에서 띠이 하는 하울링이 나오면 얼른 달려가 앰프를 조절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차도로 밀고 나가 청와대로 행진하자는 종류의 행동파 발언이 나오면 녹화장에서 FD가 그러듯 두 손을 높이 들고 박수를 유도했다.

“나가자! 바리케이드를 무너뜨리자!”

한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 질렀다. 사람들은 신호탄이 터지기를 기다리는 트랙 위의 선수, 종이 울리기 직전 링 위의 파이터였다. 이미 들썩이던 사람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비폭력, 비폭력”을 외치며 행동파들의 움직임을 차단하려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 숫자는 그리 많지 않았지만 이제 막 시작되려는 행진의 당위성을 의심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안티고네’도 그랬다. 그녀는 초저녁 집회가 시작될 때는 일민빌딩 주변에서 지인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본격적으로 참여하지 않다가 밤이 깊어지면서 대열로 들어갔고 급기야 가장 선두로 나서게 되었다. 그녀는 ‘나가자’로 대표되는 행동파에 선뜻 합류할 수 없었다. 만약 경찰과 대치해 물리력을 사용해야 한다면 여성과 청소년들은 분명 물러서서 구경꾼이 되어야 할 것이었다. 그녀에게 쇠파이프나 화염병 같은 이른바 ‘물량’은 물대포와 다름없는 적이었다. 혹시 ‘금속(노조)’에서 물량을 준비해 대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아까부터 대책위를 제치고 행진을 선동하고 있는 머리 벗어진 저 사내는 조직대오의 한 사람은 아닌지 안티고네는 의심이 일었다. 어디서 본 듯한데 누구인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 경찰은 이제 해산하지 않으면 연행하겠다는 경고방송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전투경찰이 방패의 모서리를 날카롭게 갈면서 과격파들이 거리로 뛰쳐나오기를 어둠 속에서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봄바람에도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나가자’와 ‘비폭력’의 공방이 이어질수록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던 사람들, 돌아가지 않고 끈질기게 남아 있던 사람들이 사방에서 나타나 무리는 더욱 커졌고 소라광장은 끓어오르는 도가니가 되어갔다.

유진 역시 ‘나가자’와 ‘비폭력’을 두고 어느 편에 설 것인가 갈등을 거듭하고 있었다. 아무리 저 혼자 질문을 해보아도 엄마가 좋으냐, 아빠가 좋으냐처럼 답하기 곤란한 질문이었다. 저 멀리 안티고네가 보였다. 그녀는 아까부터 앉았다 섰다 안절부절 어느 편인지 알 수 없는 모양새였다. 안티고네는 유진이 다니는 지역아동센터 교사의 대학 후배였다. 그들은 촛불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청계천에 나왔다가 우연히 만났다. 청계천에서 여자 셋이서 소풍 나온 사람들처럼 발을 담그고 놀고 있었는데 지역아동센터 교사의 인솔로 청계천을 따라 걷고 있던 유진 일행과 마주친 것이다. 발을 담그고 놀고 있던 사람 중 하나가 안티고네였다. 그들은 대학 졸업 후 처음 만나는 것이었다. 조민정이라는 이름 대신 안티고네라고 불러달라고 해서 교사는 그녀를 따라 안,티,고,네 네 글자를 여러번 반복했지만 집으로 돌아갈 때는 잊어버려 유진에게 묻기도 했다.

급기야 몇몇 사람들이 “가자!”라고 소리를 지르며 광화문대로로 들어서버렸다. 뒤따라서 사람들은 우르르 차도로 몰려나갔다. 지금까지의 공방이 무색할 정도로 일단 시작되자 둑이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안티고네처럼 주저하던 사람들도 마라톤대회에 나온 사람들처럼 앞서가는 이들을 따라 달려나갔다. 이들은 광화문 이순신 동상 앞 대로를 향해 뛰었다. 경찰은 한 덩어리로 기합 소리를 내며 인도를 따라 이동했다. 소라광장에서 뛰어나온 사람들이 이순신 동상 앞에 도착했을 때 청와대로 가는 길은 철벽처럼 막혀 통제되었다. 사람들은 더 나아가지 못했다. 정부종합청사 앞까지 갔다가 되돌아온 사람들이 광화문대로를 점거하고 앉았다. 경찰에 쫓겨 소라광장으로 다시 돌아가게 될까봐 사람들은 기민하게 뭉쳤다. 앰프가 오고 스피커가 설치되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노래가 사거리에 울려 퍼졌다. 소라광장에서는 잘 따라 부르지 않던 사람들이 목소리를 높여 함께 노래를 불렀다. 자리를 잡은 안티고네도 노래를 불렀다. 안티고네가 뛰는 걸 보고 달려나갔던 유진도 무리에 뒤섞였다. 안티고네를 찾아 그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안녕하세요?”

참 어울리지 않는 인사였지만 유진은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얘, 너 아직도 안 갔어?”

“네.”

“허 참, 안 추워? 이거 깔고 앉아.”

안티고네는 배낭에서 깔판을 꺼내주었다. 유진은 얇은 셔츠 한장만 입고 있었다. 안티고네가 보기에 유진은 조금 떨고 있었다. 그나마 셔츠가 긴팔이어서 다행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사람들은 헌법1조 노래를 몇번이고 부르고 또 불렀다. 광화문네거리 상점들은 모두 철시했다. 광화문 일대를 점거하기에는 수적으로 부족했지만 사람들의 의지는 확고해 보였다. 하지만 뻥 뚫린 광화문 사거리 어디에서 전경이 치고 들어올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안티고네가 의심하는 준비된 ‘물량’은 어디에도 없었고 사람들은 맨몸으로 앉아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병력에 대항해야 했다. 헌법1조 노래는 광화문 사거리를 막 점거한 촛불시민들에게 유일한 창이고 방패였다.

종로통부터 하늘이 밝아졌다. 농성자들은 새벽까지 노래와 자유발언을 이어갔다. 발언은 이 판을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로 모아졌다. 날이 밝아지자 경찰의 경고방송은 더 드세졌다.

“시위대, 종로경찰서 경비과장입니다. 광화문 사거리를 점거하고 있는 시위대, 시위대는 즉시 이동하세요. 빨리 해산하고 집으로 돌아가세요. 여러분들 때문에 선량한 시민들이 출근에 막대한 지장을 받고 있습니다. 지금 즉시, 즉시 일어나서 집으로 가세요. 버스, 지하철 다 다니니까, 빨리 집으로 돌아가세요. 이제부터 시위대 모두 연행합니다.”

“나도 지금 출근준비 중이다, 이놈아, 어디서 집에 가라 마라냐!”

경고방송에 겁먹는 사람들은 이제 없었다. 경찰이 잠을 못 자 신경이 날카로운 모양이라며 한마디씩 했다. 새벽까지 몸을 덜덜 떨며 깨어 있던 유진도 날이 밝아오자 꾸벅꾸벅 졸았다. 해산방송을 뒤로하고 사람들이 하나둘 일어나서는 서울광장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시위대는 아침이 되어도 흩어지지 않고 농성을 이어가기로 했다. 평일 낮에도 집회가 이어지는 릴레이 농성이 시작된 것이다.

이른 아침 광화문 사거리에서 서울광장으로 향하는 이들의 모습은 시민군을 연상시켰다. 긴 밤을 지새우고 끝까지 견뎌 흩어지지 않고 남았던 이들은 스스로 승전의 나팔을 불며 성으로 입성하는 전사라고 생각했다. 그날 시민들이 광화문까지 진입해 차도를 점거하고 농성으로 밤을 새운 것은 돌이켜보면 시작에 불과했다. 그 이후 두달 넘게 촛불집회는 계속되었고 그 무리에 가담한 시민들은 이들 숫자의 수천수만배에 이를 것이다.

밤사이 소문은 빠르게 퍼져 서울광장에는 이들을 맞으러 나온 사람들이 많았다. 따뜻한 주먹밥과 냉장고에서 막 꺼낸 듯 시원한 생수병을 핏발 선 눈을 비비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수건, 양말, 칫솔이 필요한지 묻고 다니는 사람들도 있었다. 마치 기성품인 양 생수병과 주먹밥에는 “MB OUT”이라고 인쇄된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

 

유진은 교보문고에서 책을 뒤적이다가 시간이 되면 광장으로 나갔다.

“모술을 여행하는 상상을 해봤니?”

어느날 여행서적 코너에서 서성이고 있던 유진에게 안티고네가 다가가 말했다. 도를 아십니까?처럼 느닷없는 질문을 받은 유진은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를 저었다.

“구약보다 더 오래된 책이 여기서 나왔대.”

“모술…… 거기 가본 적 있으세요?”

“아니 아직. 언젠가 모술에 가게 되면 부르카 쓴 여자들을 싹 다 탈출시키고 싶다. 부르카라니 정말 몹쓸 관습이야!”

“부르카가 뭔데요?”

“전신을 감싸는 보자기 같은 건데, 이걸 씌워 여자들의 일상을 감옥에 가두는 거야. 눈 부위는 망사를 대서 진짜 창살 같아.”

안티고네는 손가락으로 제 눈앞으로 가로세로를 그리며 진저리를 쳤다.

“으, 정말이요?”

그런 알쏭달쏭한 말을 하는 안티고네를 유진은 선망했다.

안티고네의 신념은 여러 결로 직조되어 있었다. 채식 중에서도 꽤 높은 단계인 비건으로, 물어볼 필요도 없이 생태주의자이고 얼마 전부터 양심적 병역거부 단체에서 일하고 있는데 신념의 한가운데 여성주의가 맹렬히 타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안티고네에게 권력은 싸워야 할 궁극의 대상이다. 권력은 국가나 자본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조직도 하나의 권력이다. 그래서 그녀는 빛나리만큼 비상대책위를 경계하고 그들의 지침대로 따르지 않았다.

“그런데요, 뭐 좀 물어봐도 되나요?”

“뭐든지.”

안티고네는 배낭에서 뭔가 주섬주섬 꺼내 유진에게 건넸다. 누르스름하고 딱딱한 빵이다.

“먹어, 이제 나가면 또 언제 먹겠냐.”

“네, 감사합니다. 그런데요, 왜 집회할 때 다 같이 모이면 자꾸 와아아아 하라고 해요? 함성 말이에요.”

“음…… 그건…… 혼자 하면 미친 거고, 같이 해야지. 왜, 웃겨?”

“네, 좀 웃겨요. 근데 참 이상해요. 언니 말씀대로 혼자 하면 약간 맛이 간 거잖아요. 아무리 힘껏 ‘와아아아’ 하고 소리쳐봤자 고함밖에 안 되는데, 그런다고 대통령이 잘못했다고 하지는 않을 거잖아요. 근데 수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함성을 지르고 그 소리가 다시 되돌아올 때면 마치 이과수폭포에서 떨어지는 거대한 바람이 나를 쓸고 지나가는 거 같거든요. 가슴이 단단해지면서 아무것도 무서울 게 없어요, 정말 신기해요.”

“중독될 정도로 짜릿하지.”

“제가 해마루에서 엄청 혼났거든요, 공부방이요. 초딩이 쓸 쿠키 재료를 몽땅 다 써서 혼자서 엄청 집중해가지고 쿠키를 다 만들었어요. 그때도 느낌이 비슷했어요. 어쩐지 좋은 일이 생길 듯 기분이 좋고 뭐든지 막 하고 싶어서 춤이라도 추고 싶은 그런 기분 말이에요. 그러다 뒤지게 혼났죠. 해마루에서 아직도 그거 먹어요, 하하. 엄청 많아요. 나중에 갖다 드릴까요?”

그녀는 유진의 느낌을 알 것 같았다. 가끔씩 자신도 멈추기 힘든 기이한 에너지가 분출될 때가 있는데 그럴 때는 쏟아붓는 방법밖에 없었다.

안티고네와 유진은 교보문고를 빠져나와 서울광장으로 향했다. 6월이 되면서 기온은 밤에도 그다지 내려가지 않았다. 안티고네는 유진이 지난번에도 입고 있던 긴팔 셔츠가 이제는 더워 보였다.

“나한테 반팔티가 많아. 행사할 때마다 사둔 게 꽤 되는데, 몇개 갖다줄까?”

안티고네는 유진에게 슬쩍 얘기했다.

“괜찮아요. 저는 긴팔이 좋거든요.”

유진은 풀어놓은 소매 단추도 다시 여미면서 말했다.

“아, 요즘 패션이니?”

“아니요, 팔에 흉터가 있어서 반팔은 안 입어요.”

두 사람은 더이상 옷 얘기는 하지 않았다.

 

대통령은 집회가 사그라지지 않아 노심초사하고 있었지만 쇠고기 협상에 대해 어떤 재고도 없이 버티는 중이었다. 경찰청장이 ‘일몰 후 집회는 문화제만 허용’한다는 해괴한 정책을 발표해 시민들의 비웃음만 잔뜩 사고 있었다. 어쨌든 시민들은 기록적인 숫자로 모여들었고 주말 촛불문화제에는 연예인이 참가할 정도였다. 사람들의 희한한 꿈들로 광장은 전에 없이 와글거렸다.

안티고네는 빛나리가 누구인지 기억이 났다. 광화문에서 밤을 새우던 날 빛나리가 먼저 선배도 몰라보느냐고 다가왔다. 대학축제 때면 어김없이 나타나 동아리에서 내놓은 물건을 사주던 선배였다. 안티고네도 누구도 학번이나 학과도 모르는 그냥 선배였다.

좀처럼 날지 않는 비둘기도 그 기세에 놀라 하늘 높이 날아갈 정도로 지축을 흔드는 문화제가 정점을 향해 가던 저녁 무렵이었다. 빛나리 무리 중 누군가 사가지고 온 김밥을 둘러앉아 먹고 있었는데 근처에 있던 안티고네와 유진에게도 김밥이 전달되었다. 얼마 전부터 빛나리가 무리들에게 괴상한 이야기를 했다.

“오병이어 알지 다들? 길게 가자면 연료가 필요해. 십원짜리가 많이 모일 거야.”

다들 김밥만 씹을 뿐 말이 없었다. 별로 대답할 가치가 없는 것이었다. 햄과 달걀지단을 김밥에서 빼내고 있던 안티고네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빛나리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듣고 있었다. 이번 ‘촛불’이 쉽게 꺼지지 않을 거라고 장담하는 빛나리는 끝까지 버티기 위해서 ‘연료’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십원짜리를 녹여 동괴를 만들어 데모 비용을 마련하자는 얘기였는데 무리들은 다들 웃어넘겼다.

“자동차가 달리자면 휘발유가 필요한 건 맞죠. 형, 근데 그거 정말 할 수 있어? 불법 아냐? 난 민주시민이에요. 불법은 안 하고 싶어.”

빛나리의 어이없는 제안에 대해 그나마 반응을 보인 건 백두였다.

“너 지금 여기 앉아 있는 건 불법이 아니냐? 해가 졌으니까 집시법 위반에다가 차도 점거로 일반교통방해지, 그리고 국가정책에 반대하는 건 무조건 북한의 사주를 받은 거니까 국가보안법 위반이야. 경찰 경고방송은 매일 귓등으로 듣고 있으니까 공무집행방해. 얘가 지금 뭐 하고 있는지 모르네. 토끼몰이가 시작되기 전에 굴을 파야 한다고.”

“형, 자신 있어요?”

백두가 진지해진 얼굴로 물었다.

“그렇게 겁나면 너도 예비군복 입고 폴리스라인 못 넘어오게 민방위훈련이나 해라. 지금은 김남주 선배의 전술을 실천할 때야. 그 형이 했던 게 전혀 모험주의가 아니거든. 왜 아니냐? 목숨을 거는 거야, 목숨을. 그때나 지금이나 독재는 변한 게 없어요. 엊그제 여학생이 물포에 맞아 죽었다는 얘기가 그냥 소문이 아니야.”

“선배님이 몇학번인데 김남주 시인이 형이에요? 그리고 지금 하자는 게 모험주의가 아니면 뭐예요? 듣기도 참 민망하네.”

빛나리를 주시하고 있던 안티고네가 참다못해 한마디 했다.

“뭐, 노선이 같으면 김구 선생도 형 아니겠냐. 안티 너네 노선이 젤 급진이면서 형한테 그래. 너 같은 애가 나중에 의사도 되고 변호사도 되고 잘되더라구. 사노맹을 봐. 어쨌든 나는 의무복무제 반대하는 거 지지해. 우리도 빨리 모병제로 가야 돼, 허허. 안티는 잘하고 있는 거야, 허허.”

“내가 모병제운동 하는 줄 아세요? 양심적 병역거부는 무기를 반대하는 평화운동이고 국가라 할지라도 개인의 신념을 통제하면 안 된다는 인권운동이에요.”

빛나리는 안티고네를 설득할 자신도 없고 이 일에 끌어들일 생각도 없는 모양이었다. 그는 “안티, 파이팅!” 한마디 던지고는 자리를 빠져나갔다. 그 뒤를 따라 백두도 일어났다.

“저도 같이 가볼게요.”

유진도 슬그머니 따라나섰지만 빛나리가 나중에 더 재미있는 일을 같이 하자고 돌려보내서 김이 새고 말았다.

빛나리는 백두에게 박정희 군부독재가 막바지로 치닫을 때 김남주 시인이 몸담았던 전위운동 얘기를 해주었다. 물론 그는 시인을 만난 적도 시인이 가담했던 그런 전위조직에서 일해본 적도 없었다. 그도 구전으로 전해 들었을 뿐인데 마치 자신과 함께했던 동지라도 되는 양 이야기는 구구절절했다. 이제는 빛나리도 망각하고 있지만 사실 그는 대학에 진학한 적이 없다. 그 시절 대학에는 한두명쯤 그런 ‘의사’ 대학생이 있었고 빛나리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다만 그는 청강생으로 캠퍼스를 들락거리지 않고 데모에 앞장서 85학번들과 동기가 되었다. 빛나리가 들려준 전설적인 시인의 삶은 백두를 물들이기에 충분했다.

백두는 광장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누구보다 진실했다. 집회가 끝나면 쓰레기봉투를 들고 광장을 청소하기까지 하는 그는 촛불을 손에 들고 힘차게 소리를 지르면 살면서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용기가 실핏줄까지 쫙 번지는 것 같았다. 백두는 이익과 무관하게 개인들이 몸과 마음을 다해 매일 모여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일체감으로 인해 누구보다 낙관에 도취되어 있었다. 그는 갈수록 생업은 뒷전으로 하고 매일 광장에 나오는 촛불 ‘폐인’이 되었다. 이제는 ‘덕후’라 부르기도 하거니와 폐인이란 말이 못쓰게 된 인간을 가리키는 건 아니다. 다만 특정한 일에 지나치게 몰입할 뿐. 백두는 밤늦도록 광장에서 ‘일’했지만 아침에는 충실히 영업소로 출근을 했다. 비록 그가 처리하는 업무는 자동차 세일즈와는 거리가 있었지만 말이다. 매일 아고라에 올라오는 속보들을 정리해 빛나리 무리에게 문자로 송부하고 인터넷 까페를 방문해 ‘쥐를 잡자’는 내용의 동영상이나 웹자보 중에서 기발한 것들을 골라 아고라에 올리고, 빛나리 무리에게도 송부해 다음 집회에 더 많은 ‘동력’이 합류할 수 있도록 최대한 홍보하라는 지침을 보내는 것이 그의 업무였다. 엄청난 양의 데이터를 스크린하고 선별하는 작업이어서 저녁이 되어 광장에 나갈 때면 어깨는 단단히 뭉치고 눈가에 다크서클이 내려앉았다. 후줄근한 바지에 구겨진 셔츠가 허리춤에서 비어져 나와 세일즈맨의 단정함은 온데간데없었다. 어떤 주말에는 밤새도록 빛나리와 이 골목 저 골목을 누비다가 새벽녘 보신각 앞에서 신문지를 덮고 잠깐 잠이 든 적이 있었는데 그런 모습은 문자 그대로 ‘폐인’이라 할 만했다. 촛불광장은 백두를 끌어당기는 강한 자석이고 끊임없이 분비되는 도파민이었다. 백두는 그로부터 2년 후 병원 영안실에서 숨어 지내고 있는 재개발 철거민들을 냉동차에 실어 도피시키다가 발각돼 실형을 선고받고 1년 6개월을 꼬박 감옥에서 살았다.

빛나리와 백두는 정말로 그날 대책위 천막에 가서 지폐를 동전으로 바꾸어 왔다. 그 이후에도 여러차례 그렇게 했지만 경찰의 진압이 폭력적으로 변하면서 대책위가 모금함을 돌리는 일도 어려워졌고 동전을 사 모으는 것도 유야무야되었다. 그 동전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아무도 모르지만 몇년 후 십원짜리 7천만개를 녹여서 수십억원 상당의 동괴를 만든 주물기술자들이 잡혔다는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빛나리를 떠올리며 무릎을 치며 감탄했다. 이 한국판 연금술사들은 한국은행법 위반으로 구속되었는데 빛나리는 그중에 없었다.

 

*

 

안티고네와 유진 그리고 빛나리와 백두 무리들도 6월 9일 저녁 서울광장 잔디밭에 앉아 있었다. 지난 며칠 동안 서울광장은 거대한 야시장을 방불케 할 정도로 북적거렸다. 수백개의 시민사회단체가 빼곡히 천막을 치고 정부를 향해 저마다의 주장을 펼쳤다. 손님을 부르는 호객꾼처럼 서명을 해달라는 선전꾼들의 목소리가 높았고 그 앞에는 어김없이 긴 줄이 이어졌다. 음식을 나누어주는 사람도 많았다. 아침 이른 시간 천막마다 따뜻한 주먹밥을 놓고 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걸 먹을 때 사람들은 이상하게 목이 메었다. 3일 동안의 거대한 행사가 끝난 후라 그런지 더욱 조용하고 평화스러웠다. 달마저 환했다면 광장은 터키에서 온 관광엽서처럼 모스크 주변에 모여 앉아 달을 보며 신께 감사하는 평화로운 풍경이었을 것이다. 광장은 이렇게 평화롭지만 통인동이나 체부동처럼 청와대로 들어가는 길목은 인도까지 전경버스를 세워놓고 오도 가도 못하게 막아 안동네 사람들의 부아를 터트렸다. 경찰이 버스를 붙여 세워 차벽을 만드는 기술은 어디 특허로 등록해도 좋을 정도로 바늘 틈도 없는 신의 경지였다.

밤 10시가 넘은 때였다. 세종로에 컨테이너를 싣고 온 대형트럭들이 도착했다. 경찰은 이순신 장군상 앞에 컨테이너를 쌓아 벽을 만들었다. 경찰은 역시 시민을 상대로 전술을 펼치는 자들이었다. ‘차벽’과 싸우느라 지칠 대로 지친 사람들이 ‘컨테이너벽’을 보고는 그야말로 입이 떡 벌어졌다. 분노와 공포가 얼굴을 팽팽하게 잡아당겼다. 어두운 밤 도심을 향해 다가오는 군홧발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2단으로 육중하게 쌓은 컨테이너는 ‘명박산성’이라는 이름이 붙으면서 소식이 빠르게 퍼져나갔다. 그 밤 광화문뿐 아니라 청와대로 들어가는 통의동길과 서대문 등지에 수십개의 컨테이너로 산성이 축성되었다.

6월 10일 촛불대행진의 주 무대는 대한문을 등지고 서울광장과 광화문을 바라보면서 장방형으로 길게 펼쳐졌다. 세종대로에 자리를 차지한 사람들은 발 빠른 축이었다. 사람들이 어디서 그렇게 나타나는지 꾸역꾸역 몰려들었다. 인파는 물밀듯 쓸고 다니다가 둑이 터지듯 위험하게 쏠리기도 했지만 흩어지지 않고 끈질기게 광화문 일대를 뚫고 다녔다. 걷다가 지치면 외곽을 배회하고 관망하며 다리쉼을 하다가는 곳곳에 형성되어 있는 무리에 다시 합류해 ‘와아아아아’ 함성을 질러댔다. 종각에서 미 대사관을 돌아 안국역까지 사람들로 넘쳐났고, 새문안대로 역시 촛불로 점령되었다. 서울역에서 시청으로 이어지는 그 큰 도로에도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사람들이 들어찼다.

사람들은 산성이 성지라도 되는 양 한번씩 다 들렀다. 통곡의 벽 앞에 늘어선 사람들처럼 평화라는 피켓을 든 사람들이 산성을 등지고 서 있었다. 그들은 산성을 만지지도 넘지도 말라며 산성에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경고하고 있었다. 검고 번들거리는 액체인 그리스를 바른 산성은 에일리언의 숙주처럼 역겨웠다. 정부는 산성으로 금단의 벽을 만들고 그것으로 권위를 세워보자는 것이었을까? 권력이 만든 ‘금단’은 언제나 인간의 자유 열망을 흔들어 깨우고 기어이 미치게 한다. 에덴동산의 사과는 하와가 아니라도 누군가 반드시 따 먹고 말았을 것이다. 이순신 동상 아래 일렬로 세워진 명박산성은 분노와 조롱의 대상이 되었고 집회에 참석한 많은 사람들에게 가시적 목표를 제공했다.

공식적인 집회가 막바지에 이르렀다. 주 무대로부터 거대한 바람처럼 「아침이슬」이 울려 퍼졌다. 집회는 너무 이른 시간에 마무리되어버렸고 사람들은 돌아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일이 또 없나 호기심과 흥분으로 술렁거리는 사람들이 명박산성 주위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해는 완전히 져서 산성 아래는 꽤 어두웠다. 산성 너머엔 이순신 장군이 보초를 선 모습만 보이고 조용했다. 안티고네도, 유진도 산성을 돌아보고 있었고 빛나리의 무리도 산성 앞에 진을 치고 서 있었다. 산성을 만지지도 넘지도 말라는 사람들과 한판 붙을 것처럼 분위기가 험악했다.

“검고 번들거리는 저걸 만지면 이름도 모를 몹쓸 병에 걸려 다시는 광장에 못 나올 거 같아요, 형.”

백두가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산성을 올려다보았다.

“대책위가 모래주머니를 준비한다고 했어. 여기 일대를 샅샅이 뒤져봤는데 없네, 참. 오늘 이 동력이면 청와대까지 충분히 밀고 들어갈 수 있거든. 백두, 무슨 방법이 없겠냐?”

빛나리 무리가 산성 아래서 암중모색에 한창일 때 한편에서는 자유발언이 시작되었고 점차 뜨거운 논쟁이 되었다. 산성을 넘자는 사람들과 그런 행동은 평화를 위협한다는 사람들로 의견이 팽팽히 갈렸다. 마치 비보이들의 배틀 같은 공방을 주고받았다. 산성 아래는 폭발 직전의 화산처럼 열기로 활활 타올랐다. 양측 모두 반대편의 주장을 조금도 수용하지 않겠다는 듯 물러서지 않았다. 간혹 대한문 쪽으로 옮겨서 경찰청까지 행진하자는 협상파들이 없지 않았지만 양측 누구에게도 관심을 얻지 못했다.

“넘자! 넘자! 넘자!”

산성 아래 모인 사람들 사이에서 번져가는 구호였다. 유진도 섞여서 ‘넘자 합창’을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은 점점 더 불어났다. 누가 가져왔는지 마이크와 스피커가 설치되었다. 말과 말이 활과 창이 되어 오고 갔는데 싸움이 길어질수록 판은 한쪽으로 기울어지게 마련이었다. 좌중을 헤치고 나선 안티고네가 마이크를 잡았다.

“비폭력과 폭력은 누가 나누는 것입니까? 불의에 저항하기 위해 여기 모인 우리는 모두 정의로운 시민들입니다. 더이상 금기를 내세우고 서로를 비난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기 모인 우리는 모두 정의의 편입니다. 저들이 그어놓은 선을 넘는 것이 오늘밤의 정의입니다.”

좌중에서 휘파람과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것이 분수령이 되었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광장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어, 저기 뭐가 온다!”

제자리에서 점프를 하며 좌우를 살피던 백두가 소리쳤다.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인지 모르겠지만 대한문에서부터 인파가 한줄로 움직였다. 사람들이 머리 위로 흰색 널빤지 같은 것을 옮기고 있었다. 안티고네, 유진, 빛나리 그리고 백두 모두 누가 먼저랄 것이 없이 움직이는 인파 속을 헤치고 들어갔다. 빽빽하게 들어찬 그 안 역시 열기로 후끈 달아 있었다.

“스티로폼이다, 스티로폼!”

사람들은 머리 위로 손을 뻗쳐 스티로폼을 옮겼다. 모세가 바닷물을 가를 때처럼 그 많은 사람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대양을 가르는 거대한 범선의 위용으로 스티로폼은 산성 아래 도착했다. 촛불대행진이 시작되기 전 육중한 트럭들이 광장에 나타나 스티로폼을 부려놓고 갔다고 했다. 명박산성 따위에 지면 안 된다는 슈퍼파워의 선물일까? 얼마 지나지 않아 스티로폼은 명박산성의 높이만큼 쌓였다. 사람들은 거기 올라가 자유발언을 이어갔다. 밤새도록 이후에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토론했지만 누구도 더이상 논쟁을 하지는 않았다.

아침이 되자 깃발을 든 어떤 남자들이 스티로폼을 타고 올라가 컨테이너 위에서 깃발을 마구 흔들어댔다. 경찰의 경고방송이 들려왔다. 골목의 정적을 깨는 이동상인의 스피커처럼 성가신 소리였다.

“저렇게 하려구 밤새도록 그랬나요?”

유진이 허탈한 표정으로 말했다.

“바벨의 탑도 저렇게 완성되지 않았을까…… 시작한 자와 완성하는 자는 다른 법이니까…… 아, 피곤하다. 차가운 계곡물에 풍덩 뛰어들고 싶다.”

안티고네가 맥 빠진 소리로 중얼거렸다. 아침부터 햇볕이 따갑게 내리비쳤다.

 

그로부터 몇주 후 유진이 밧줄을 당기다 팔이 부러지고 말았다. 대통령이 뒷동산에 올라 「아침이슬」을 부르며 잘못을 뉘우쳤다는 이른바 ‘아침이슬 사과’ 이후 경찰의 시위 진압은 더욱 폭력적으로 변했고 무더기로 사람들을 연행해 갔다. 명박산성은 치워졌지만 광화문 일대 대로마다 차벽으로 촘촘히 박아놓고 그 뒤에서 연신 물포를 쏘아댔다.

광장에는 밤새도록 젬베를 두드리는 사람들도 있었고 둥그렇게 모여서 연신 춤을 추면서 시위를 이어가는 이들도 있었지만 청와대로 진입하는 길을 막아놓은 차벽 쪽은 격전지를 방불케 했다. 전경버스에 밧줄을 걸고 당기는 사람들은 쏟아지는 물포를 견디며 밤새도록 온힘을 쏟았다.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물포를 맞으며 밧줄을 당기는 일이 주어진 임무인 양 광장에 나오면 유진은 그런 곳으로 찾아갔다. 아프리카 춤을 추거나 풍물패에 섞여 놀기도 했지만 이제는 지겨웠다. 시간이 지날수록 유진은 초조해졌다. 새벽에 일어나 인터넷방송을 확인하고 아직 시위대가 경찰과 대치하고 있다는 소식을 보면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런 곳으로 가면 어김없이 빛나리와 백두를 만나곤 했다. 다들 노중 생활로 인해 새까맣게 그을리고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해 눈에는 핏발이 섰다. 그들도 초조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애들은 이제 그만 나와도 괜찮아. 어른들이 잘 싸울 테니까, 공부나 열심히 해라.”

그렇게 말하는 빛나리가 야속할 정도로 유진도 이 끝이 무엇인지 보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유진은 그날도 교보문고 앞에서 전경버스에 걸어놓은 밧줄을 당기고 또 당겼다. 비옷을 입어도 아무 소용이 없을 정도로 물줄기가 맹렬하게 쏟아졌다. 줄을 당길 때는 오로지 거기에만 집중하게 된다. 날은 어두워졌고 물줄기는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쏟아지는 가운데 스피커에서 요란하게 들려오는 노랫소리와 전경차 너머에서 웅웅대는 경찰의 경고방송이 뒤섞여 이명처럼 귀를 괴롭히고, 줄을 당기다 지쳐 나가떨어진 사람들과 물줄기 속에서 연신 깃발을 흔들며 구호를 외치는 사람들 사이로 바삐 지나가는 행인들…… 무슨 생각을 할 상황이 아닌 것이다.

유진이 팽팽하게 힘을 주고 당기고 있던 줄이 갑자기 탁 끊어졌다. 그 힘에 나가떨어지면서 손목 위 노뼈가 부러진 것이다. 부러진 흰 뼈가 살을 터트리고 유진이 즐겨 입는 긴팔 셔츠와 비옷을 뚫고 날카롭게 올라왔다. 유진은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었다. 근처에 있던 백두와 빛나리가 달려가고, 대책위가 응급처치 의사를 급히 부르고 구급차가 오고, 젬베를 두들기던 안티고네가 보호자로 뒤늦게 병원에 갔다는 이야기는 나중에 병문안을 온 안티고네에게서 들었다.

광장의 촛불은 유진의 뼈가 채 붙기 전 끝이 났다. 시간이 지날수록 힘든 건 시위대였다. 사방이 차벽으로 막힌 시위대는 모래를 손으로 날라 ‘국민토성’까지 쌓는 등 별의별 짓을 다 해보았지만 정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더욱 견고해지는 대통령의 독선과, 국민을 상대로 전투를 불사하는 경찰 앞에서 많은 시민들은 광장에서 꾸었던 슈퍼파워의 꿈을 접고 침묵의 일상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꿈에서 깨어난 후 현실은 매서웠다. 한의원을 운영하던 빛나리의 아내는 난데없이 건강공단의 조사를 받다 병원 문을 닫아야 했다. 수백만원의 벌금형에 처해진 백두는 형사들을 피해 다니다가 결국 이혼을 하고 전국의 투쟁현장을 찾아다니는 보헤미안이 되었다.

“이 모든 일이 만약 우주의 섭리라면 말이야, 신은 지금 지구를 키질하고 있는 거야. 나는 작은 콩에 불과하지만 마지막까지 올곧은 한알이 되어 끝까지 갈 거야.”

수십만의 사람들이 촛불파도로 일렁이던 날 밤 안티고네가 상기된 목소리로 유진에게 한 말이다. 이들은 머지않은 미래에 다시 광장에서 만나게 되지만 그것은 길고 혹독한 밤을 겪고 난 다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