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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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희망을 보았노라고, 쓴다

김미월 소설집 『아무도 펼쳐보지 않는 책』

 

 

이소연 李素姸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불우한 자들의 불꽃놀이: 김애란론」이 있음.

sodasu98@hanmail.net

 

 

2031잔잔하다. 더이상 비명도, 가슴을 저미는 통곡도 들리지 않는다. 이 시대의 가장 비참한 장면은 이렇게 조용하게, 일상의 맨얼굴을 한 채로 매일 목격된다. 김미월(金美月)의 『아무도 펼쳐보지 않는 책』(창비 2011)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분명히 우리가 골목길을 들어설 때마다 마주치는, 우리 이웃들의 얼굴을 너무도 닮았다. 스스로를 ‘아무도 펼쳐보지 않는 책’이라 여기고 뒤처지는 것을 당연히 생각하는 청년, 자신의 꿈을 꺾는 현실 앞에서 한마디 항변도 못하고 “내가 무엇을 잘못 했을까”(50면) 하며 자책하는 저 무해한 이들은 이미 아무도 자신의 목소리에 관심을 갖지 않을 것임을 잘 알고 있다. 더이상 극적이지도, 충격적이지도 않은 좌절을 저지대에서 포착하여 소설의 소재로 전경화하는 일은 또 얼마나 어려운 작업일 것인가. 김미월의 소설은 그 낮은 음역대에 귀를 기울이면서, 목소리조차 내기를 꺼려하는 저 만연한 우울증의 징후를 함께 앓고 끈덕지게 이에 맞선다. 우울증이야말로 개인의 삶을 좀먹고 사회적 연대를 파괴하는 무서운 질병이 아닌가. 그런 점에서 김미월은 희망의 마지막 경계선에 머물러 표나지 않는 싸움을 벌이고 있는, 조용한 투사와 같은 작가다.

섣부른 기대는 거두는 것이 좋을 듯하다. 김미월의 새로운 소설들은 깊은 내상을 입고 비틀거리는 청춘들을 결코 위로하지 않는다. 오히려 마지막 남은 것마저 덜어내라면서 처진 어깨를 냉정하게 떠다민다. 그녀의 이야기를 따라서, 헛된 기대를 품게 하는 거짓 약속들을 세밀한 부분까지 모두 솎아버리고 난 뒤에 남은 것이라고는 동전 몇푼에 불과할지 모른다. 소설가가 줄 수 있는 희망이라곤, 지금 당장 여기서 ‘아니’라고 말할 필요는 없는 이유, 그것 하나뿐일지 모른다. 그래도 수중에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할 때보다는 이문이 남는 장사가 아닌가. 슬픔이 우리를 몹시 지치게 할 때, 아주 작은 기다림에 기대어 미래를 유예시키고 있다는 느낌, 그것이 바로 김미월의 소설이 희망을 잠재태로 만들어 잔류시키는 방식이다.

좌절하는 청년층의 세태와 이들을 억압하는 사회의 모순을 꾸준히 형상화해온 작가는 새로운 소설집에서 더욱 섬세한 문제의식을 보여준다. 이를테면 개인이 필요로 하는 최소 공간으로서 ‘방’이라는 구심적인 공간과, 선망의 대상인 동시에 억압의 실체로서 ‘도시’라는 원심적 공간의 위상이 다소 바뀌고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우리는 ‘방 안에 웅크리고 있던 소년’이 점차 생활인이 되어 도로로, 도심의 랜드마크로 진출하는 징후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아무도 펼쳐보지 않는 책」에서는 그 선망의 공간이 ‘테헤란로’라는 이국적인 고유명사로 육화되어 나타난다. 문제는 이처럼 고시원 방이나 반지하방 같은 사적 공간에서 탈출하여 공적 공간으로 들어선 후에도, 과거의 상실-현재의 슬픔으로 이어지는 공식은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는 점이다. 「수취인불명」에서처럼 아무리 마음먹고 이국으로 도망쳐도 뉴욕을 가로지르는 이스트리버의 풍경은 ‘한강’의 기억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미월의 소설은 독아(獨我)적인 공간으로부터 공동체와 유대감을 느낄 수 있는 공적인 영역으로 스스로를 조금씩 개방하는 징후를 보여준다. 따라서 작중인물들이 몸을 일으켜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로, 심지어는 단 몇사람과 눈먼 대화를 나누는 공간으로 이동하는 순간만큼은, 아무리 사소해 보일지라도 그 뒤에 거의 필사적인 작가의 고심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 또 하나, 의미심장한 랜드마크가 등장하는 소설 「프라자 호텔」이야말로 개인의 사적인 상실을 공적인 차원으로 이동시키는 일이 어떻게 희망을 찾는 작업과 관련이 있는지 보여준다.

치유의 조짐은, 이렇게 시작된다. 진정한 애도는 공적 차원의 애도가 개인적인 슬픔을 표상하는 과정과 포개질 때, 비로소 출발하는 법이다. 아마도 우리에게 결핍되어 있는 것은 애도 감각의 공유, 즉 상실의 공통감각을 확인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가장 외향적인 공간인 ‘프라자(광장)’와 가장 내밀한 공간 가운데 하나인 방으로 이루어진 ‘호텔’이 절묘하게 결합된 소설의 제목을 상기해보라. 소설의 작중인물 ‘나’가 침체된 자아의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을 때, 차례차례 그의 눈에 들어온 풍경들 가운데, 전직 대통령의 분향소와 용산참사 피해자 가족들의 시위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으로 보아 넘길 수 없다. 시공간을 함께하는 사람들의 아픔에 공감하는 가운데, 호텔의 방 안은 비로소 과거의 상처와 현실의 불안이 만나는 공간으로 재편성된다. 이렇게 그녀의 이야기는 끈덕지게 심문을 멈추지 않으면서도 어느날 불현듯 다시 씌어질 것임을 암시하면서, 미진한 채 선선히 중단된다. 우리의 슬픔은 이제 막 기록되었으므로.

이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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