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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백수린 白秀麟
1982년 인천 출생. 201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소설집 『폴링 인 폴』 『참담한 빛』 등이 있음. paper_petal@hanmail.net
아직 집에는 가지 않을래요*
“일요일엔 당신이 잔디를 깎는 거지.”
“좋아. 그럼 당신은 맥주와 고기를 사와. 바비큐를 해 먹게.”
정체가 심한 도로 위, 동요 메들리가 흘러나오는 차 안에서 그녀와 남편은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들이 살고 있는 아파트단지 인근의 단독주택들 중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붉은 지붕의 집에서 그들이 사는 삶을 함께 공상하기. 그 집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언제부터인지 대화할 거리가 줄어든 남편에게 그녀가 말을 거는 한가지 방법이었다. 그녀가 그 붉은 지붕의 집을 발견한 것은 그들이 이사하고 얼마 안 있어 첫째 아이를 하원시키기 위해 어린이집을 처음으로 찾아갔던 지난봄이었다. 어린이집에 가기 위해 굳이 동네 한쪽의 고급 주택가를 지나쳐 갈 필요는 없었지만 그녀는 언제나 일부러 돌아가는 길을 택했다. 잘 가꾸어진 정원과 근사한 포치가 있는 이층집들을 구경하며 걷는 것은 둘째 아이를 낳은 이후 집 밖을 나갈 일이 거의 없는 그녀에게 커다란 낙이었기 때문이다.
“엄마, 우리 이사 가?”
뒷좌석에 앉아 동요를 따라 부르던 첫째 아이가 참견했다.
“아니, 나중에.”
운전석 뒤쪽의 카시트에서 쌀과자를 손에 꼭 쥔 채 잠들어 있는 둘째 아이의 얼굴은 평온해 보였다. 그들은 주말을 맞이해 모처럼 동물원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나중에 언제?”
“글쎄, 나중에 언제일까?”
그녀는 운전을 하는 남편을 바라보며 웃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그런 집에 살기 위해서라면 일을 그만두지 않는 게 나았을까? 하지만 그런 생각이 잠깐 들다가도 육아 도우미를 부르는 비용 같은 것들을 생각하면 계속 일하는 것이 경제적으로 큰 이득이 되지 않으며 그저 욕심에 불과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첫째 아이를 낳고 유산을 두번이나 한 끝에 둘째 아이를 가졌기 때문에 남편은 그전부터 그녀가 회사를 그만두길 원했다. 첫째 아이가 초등학교에 가고 나면 일하는 엄마를 둔 아이들은 따돌림을 당한다던데. 아무리 종종거리며 점심시간에 준비물을 사러 다니고, 하루 종일 보고 싶었던 아이를 오분이라도 일찍 보기 위해 환승역에서부터 뛰어봤자 아이와 친정엄마에게는 언제나 죄인일 뿐이라는 선배들의 이야기를 귀에 못이 박이게 들어왔으므로 그녀는 둘째 아이가 생기자마자 퇴사를 결심했다.
“나는야, 춤을 출 거야, 헤이!”
첫째 아이가 카 오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동요를 다시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참, 한나씨한테 안부 전해줘.”
다음 날은 그녀가 아이들을 두고 처음으로 혼자 저녁 외출을 하는 날이었다. 한나가 레스토랑의 개업식 겸 파티를 열고 싶다며 친구들을 초대했기 때문이다. 한나와 그녀는 흔히 말하는 단짝 친구였다. 그녀가 한나와 붙어 다니던 대학 시절, 그들에게는 각기 맡은 확실한 역할이 있었다. 미용실의 잡지나 텔레비전 프로그램 혹은 인터넷 사이트에서 본 유명한 식당과 까페를 찾아내거나 볼만한 영화가 상연되는 극장의 리스트를 만드는 것이 한나의 몫이었다면 한나가 가자고 제안한 여러 장소 중에서 가볼 순서를 정하는 것은 그녀의 역할이었다. 그런 분담은 꼭 까페나 식당, 혹은 영화관을 정하는 문제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같이 먹을 음식의 메뉴부터 나중에는 여행지를 고를 때도 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충실히 이행했고 둘 중 누구도 불만을 갖지 않았다. 한나는 하고 싶은 일이 언제나 너무 많은 사람이었고, 그녀는 누군가 정해준 틀 안에서 무언가를 결정하는 것이 편한 스타일이었으므로 둘은 그들이 이룬 균형에 만족했다. 둘은 새내기 시절 같은 과에서 만나 친구가 된 이후 줄곧 함께였다. 졸업 후 각자 다른 회사에 취직한 뒤에는 횟수가 줄어들긴 했지만 일년에 몇번씩 군산이나 통영 같은 곳으로 여행을 가기도 했다. 그녀가 결혼하고 한나가 파인다이닝 요리를 배우겠다며 이딸리아로 떠나기 전까지. 요리를 배운 후 현지 식당에서 일하며 지냈던 한나가 한국으로 돌아와 레스토랑을 차리는 것은 거의 사년 만의 일이었다. 한나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그녀가 첫 아이를 낳고 막 복직했을 때였고, 그녀는 얼른 첫째 아이를 키워놓고 보러 갈 테니 기다리고 있으라며 한나에게 호언장담을 했다. 둘째 아이를 낳을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때였다.
*
레스토랑은 작지만 운치가 있었다. 그녀가 처음 레스토랑 안에 들어섰을 때, 가장 먼저 느껴진 것은 식당의 온기였다. 그다음엔 향기. 고소하고 달콤한. 조도가 낮은 식당 안은 이미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중에는 그녀가 아는 얼굴도 있었고, 이름만 들어본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모두 한나의 가까운 지인들이었고, 친구의 개업을 축하해주려는 공통의 목표가 있었으므로 그들은 금세 낯선 상대를 향한 경계심을 풀었다. 머메이드 스타일의 원피스를 입고 붉은 립스틱을 바른 한나는 요리사라기보다는 만찬의 호스트처럼 보였다. 그것도 딱히 틀린 표현은 아니었지만. 사람들 틈에 섞여 있던 한나는 그녀를 보며 환히 웃었고, 그녀 쪽으로 다가와 끌어안으며 “와줘서 고마워” 하고 말했다.
“음식이 정말 너무 맛있죠?”
한나의 이전 직장 동료라고 자기를 소개한 여자가 몸을 그녀 쪽으로 기울이며 물었다.
“네, 정말 맛있네요.”
트러플 마요네즈를 곁들인 까르빠치오부터 흰목이버섯을 넣은 딸리올리니 빠스따까지 모든 것은 완벽했다.
“정말 한나씨는 대단한 것 같아요. 계획도 없이 회사를 그만둔다고 했을 때는 사실 다들 걱정이 많았거든요.”
같은 테이블에 앉은 다른 사람이 포도주를 한모금 마시며 말했다. 모처럼 맛있는 음식을 먹다보니 그녀 역시 탐스러운 빛깔의 포도주를 한잔 마시고 싶은 유혹을 느꼈다. 하지만 그녀는 집에 돌아가서 수유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고, 와인잔 대신 물잔을 들었다.
식탁 위의 음식들이 거의 사라질 무렵, 한나가 “난 요리랑 결혼한 거니까, 나가기 전에 카운터 위 상자에 알아서들 내고 가요. 내 축의금 받고 결혼한 사람들은 모른 척 나가면 찝찝할 거야”라고 농담조로 말하자 사람들이 와하하, 웃었다. 한나는 사람들이 기분 나쁘지 않게 진심을 농담처럼 전하는 데 능했고, 한나의 그런 면을 그녀는 좋아했다. 그녀는 미색 커튼이 양옆에 우아한 곡선을 그리며 묶여 있는 커다란 창밖으로 이미 짙게 깔린 어둠을 내다보면서, 충만한 기쁨에 사로잡혔다. 낯선 나라에서 요리를 배워서, 목표했던 것같이 이토록 근사한 자기만의 식당을 연 친구가 자랑스러웠다.
이제 사람들의 대화는 어느새 부동산 쪽으로 흘러갔다. 어느 지역의 땅값이 오를 것이고 어느 지역의 아파트 가격이 하락했다는 그런 내용의 이야기들이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러 아이들을 두고 나온 것은 아닌데. 그녀는 엄마가 외출 준비를 하자 자지러지게 울음을 터뜨리던 둘째 아이를 떠올렸다. 지금쯤이면 남편이 아이를 달래 놀아주고 있겠지만, 그녀는 마치 버림받은 아이처럼 숨을 헐떡이며 울던 아이가 떠올라 죄책감에 고통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먼저 일어난다고 말을 할까 생각하며 어딘가에 있을 한나를 찾으려고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식당의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들어왔다.
깔끔한 세미정장 차림을 한 남자였는데, 군살이 전혀 없어 날렵해 보였다. 남자는 탐스러운 장미 꽃다발을 들고 있었다. 평소에 쉽게 볼 수 없는 연자주색 장미로만 이루어진 다발이었다.
“축하해요.”
남자는 들어오자마자 한나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고 그녀에게 커다란 장미 다발을 안겼다. 이제 장미 다발은 카운터 옆 원목 콘솔 위, 가장 잘 보이는 화병에 꽂혔다. 한나가 남아 있는 음식들을 데워 오고, 그녀의 맞은편에 자리 잡은 남자는 주변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며 유쾌하게 대화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그녀가 한번도 본 적 없고,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남자였다. 스물여섯? 많아봐야 스물여덟?
“아, 저 친구예요. 이 식당의 이름을 지어준 사람은.”
갑자기 한나가 그녀를 가리키며 말해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에게 쏠렸다.
“이 이름의 작품이 대학 다닐 때 저 친구랑 같이 본 영화에도 등장하거든요. 전 우리가 그 영화를 같이 봤던 것도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내가 요리를 배워서 식당을 열겠다고 말했을 때, 희주가 그렇다면 식당 이름은 ‘까페 뮐러’라고 하라고 추천해줬어요.”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것이 불편해 그녀는 어색하게 웃었다. 예전에는 사람들과 있는 것에 이 정도로 서툴지 않았는데, 지난 십여개월간 아이들과만 지내다보니 그녀는 낯선 사람들과 사교하는 데 필요한 모든 규칙을 잃어버린 것만 같았다. 그 순간, 남자가 말했다.
“어쩐지. 무용하셨죠?”
“아뇨, 전혀요.”
“안타깝네요.”
“뭐가요?”
갑자기 내밀한 곳을 함부로 침범당한 것 같은 당혹스러움에 그녀는 본의 아니게 날카로운 말투로 되물었다. 어떤 상처는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사라지지 않고 잠복해 있다가 작은 자극에도 고무공처럼 튀어올랐다.
“아, 무용하셨어도 정말 좋았을 골격을 가지셨거든요.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그가 정말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말해, 이번에는 그녀 쪽에서 미안해졌다.
“네가 이해해, 직업병이야.”
어린 시절 엄마를 따라간 미용실 창가에서 건너편 건물의 발레교습소 풍경을 본 이후부터 그녀는 줄곧 발레리나를 동경해왔으나 부모님이 허락하지 않아 무용을 배워보지조차 못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한나는 어색해진 분위기를 풀기 위해 장난스러운 말투로 말하면서도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죄송해요.”
그녀가 화장실에 갔다 오는데 남자가 그녀의 곁으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기분이 상하신 것 같아 사과드리고 싶었어요.”
“아니에요. 별일도 아닌걸요. 무용을 하시나봐요?”
“네.”
갓 면도한 듯 보이는 남자의 턱선은 매끄러웠고, 구김살 없는 이십대 특유의 자신만만함이 느껴지는 그에게서는 은은한 향수 냄새가 풍겼다. 가까이에서 본 남자는 더 어려 보였다. 그리고 남자는 그녀에게 몇마디 말을 더 했다. 자신만만해 보이던 남자는 그녀와 대화하면서 수줍은 것처럼 눈을 자꾸 내리깔았는데 그럴 때마다 소년 같아 보였다. 그녀는 결국 남자에게 기분이 풀렸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 그가 따라주는 포도주를 받아 마셨다. 남자가 미소를 지었고 포도주 탓에 홍조를 띤 얼굴로 그녀도 남자를 따라 웃었다.
*
매일 아침 그녀의 일과는 똑같이 시작한다. 둘째 아이가 칭얼대기 시작하면 일어나 젖을 물리고 남편을 깨운 후 첫째 아이를 깨워서 등원 준비를 시키는 것. 둘째 아이가 「상어 가족」 노래를 듣는 동안 잽싸게 첫째 아이 옷을 갈아입히고 삶은 계란이나 고구마를 먹이면 둘째 아이는 유아용 플라스틱 미끄럼틀 위로 기어오르거나 텔레비전 장을 두드리며 혼자 사랑스러운 저지레를 피운다. 첫째 아이와 남편을 배웅할 때까지 일은 하나의 의식처럼, 기계적으로 빠르게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녀는 남편과 첫째 아이가 집을 나서고도 한참이 지나 둘째 아이를 낮잠 재우기 위해 젖을 물릴 때에야 비로소 지난밤, 자신이 집이 아니라 까페 뮐러에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단 두잔뿐이었지만 포도주를 마셨기 때문에 간밤에는 모유를 짜서 버렸는데도 조금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아이가 이미 초등학생인 선배에게 술을 마시고서 어쩔 수 없이 젖을 먹인 적이 있으나 아이가 무탈하게 컸다는 문자메시지를 받고 나서야 그녀는 훨씬 안심이 되었다.
‘핸드백 안에 유축기가 있었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겠지?’
그녀는 유축하기 위해 핸드백을 들고 화장실에 들어갔다 나왔을 때, 남자가 따라와 그녀에게 말을 붙였던 순간을 떠올리자, 그녀는 웃음이 났다. 그녀는 잠든 아이를 가만히 눕혔고, 간단하게 점심을 먹은 후 집을 치웠다. 핸드백 안에서 휴대용 유축기를 꺼내다가 남자의 이름을 검색해보았다. 남자는 생각한 것만큼 어렸고 생각보다 더 유명한 현대무용 발레리노였다. 한국 최초의, 최연소, 국내 초연. 둘째 아이가 다시 잠에서 깨어 울음을 터뜨렸다.
“엄마 여기 있어, 여기 있단다.”
그녀는 휴대전화를 놓고 아이에게로 돌아가 땀을 닦아주었다.
첫째 아이를 하원시키기 위해 아기띠로 둘째 아이를 안고 밖으로 나왔다. 봄날의 오후 세시는 온화했고, 모처럼 공기도 맑았다. 벌꿀색의 햇살이 그녀의 손등과 아이의 엉덩이 위로 흘러내리듯 떨어졌다. 아이는 계속 사랑스럽게 무언가를 옹알거렸다. 매일 비슷하게 유지되었던 정갈한 풍경에서 변화를 감지한 것은 붉은 지붕의 집이 있는 골목에 들어섰을 때였다. 트럭들이 서 있었고, 인부들이 근처를 서성이고 있었다. 이사를 가려는 걸까? 트럭들에 반쯤 가려진 붉은 지붕의 집 담장의 한쪽에는 새빨갛고 탐스러워 보이는 덩굴장미들이 만개해 있었다. 그녀는 잠시 멈춰 서서 마당 안을 살폈다. 정말 이사를 나가는 것인지 집은 조금 황량해 보였다. 하지만 인부들이 왔다 갔다 하는 정원의 한쪽, 커다란 밤나무 옆에는 그네가 매어져 있었다. 이런 집에 산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그것은 정말 이상적인 집이었다. 그녀는 늘 그랬듯 언젠가 이런 집을 마련해 아이들과 함께 사는 중년의 인생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그네를 두개 매달면 초등학생이 된 아이들이 마당에서 나란히 그네를 타겠지. 엄마, 바닥을 굴러 하늘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오면 왜 배꼽 위가 간지러워, 하고 깔깔대며 웃을지도 몰랐다. 여름날에는 남편이 말했던 것처럼 숯을 사다가 바비큐를 해도 좋을 거였다. 남편은 주말이면 차고에서 세차를 하고, 그녀는 마당의 수도에 호스를 끼워 장미에 물을 줄 것이었다. 어느날은 한나도 초대해야지. 그녀는 아이를 낳은 이후 친구들을 만나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나마 첫째 아이를 낳고 복직한 이후에는 점심시간을 이용해 시내에서 일하는 친구들을 짧게 본 적이 있지만 저녁에 몇시간씩이나 근사한 분위기의 레스토랑에서 친구와 시간을 보낸 것은 언제가 마지막인지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간밤의 외출로 기분전환을 한 덕인지 그녀는 기분이 무척 좋았다. 깨우지 않기 위해 8킬로에 달하는 아이를 앞에 둘러멘 채 좌변기에 앉아 볼일을 보는 것조차 견딜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기본적으로, 자신이 지금 누릴 수 없는 것에 대해 괴로워하기보다는 인생의 단계, 단계에 걸맞은 역할을 수용하는 것이 성숙한 태도라고 생각하는 편이었다. 그녀는 결혼 전, 한나와 곱씹을 수 있는 추억을 많이 만들어두었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감사하고 행복했다. 이를테면 같이 중앙도서관 지하의 어두컴컴한 미디어실에서 발레 실황 DVD를 보던 기억 같은 것들.
사실 한나와 둘이 처음 친구가 된 데는 그녀의 노력이 조금 더 컸다. 대학교 입학이 확정되고 신입생 오리테이션을 받던 2월의 어느날, 볼이 빨갛고 아직은 촌스러운 고등학교 졸업생들이 둥그렇게 빈 강의실에 둘러앉아 스물한살짜리 선배들을 우러러보며 수강신청 방법과 학회 따위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자기소개를 하던 그날, 그녀는 이미 한나와 친구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한나가 예고 출신으로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발레를 했다는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다. 비록 그만두었다지만, 그녀에게 한나는 처음으로 가까이에서 본 발레리나였다. 고등학교 때 다리를 다치는 바람에 인문계로 전향해 재수하고 대학에 입학해야 했던 한나는 그녀가 상상하던 것과 다르게 발레에 대한 미련도, 발레를 계속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큰 상처도 없었다. “아쉽지. 그치만 후회는 없으니까.” 다쳐서 그만두고도 어떻게 계속 발레 공연을 같이 보러 갈 수 있느냐고 그녀가 언젠가 물어보았을 때 한나는 그렇게 말했다. “사실, 난 발레만 하느라 다른 건 해본 게 없거든. 그래서 이젠 해보고 싶은 걸 다 할 수 있으니 그게 좋아.” 그들은 이십대 초반을 온전히 함께 보냈다. 딱 한번 미팅을 같이하기도 했는데, 미팅에 나온 인근 대학의 남자들은 하나같이 시시했다. 마침 월드컵 기간이라 인근 맥줏집의 커다란 스크린으로 월드컵 경기를 보다가 헤어진 게 전부였지만. 결혼 후 언젠가 예능 프로그램에서 3대 짬뽕집이라고 군산의 어떤 식당이 소개되었을 때, 그녀는 남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하기도 했었다. “여보, 여보, 저기가 내가 한나랑 같이 갔던 곳이야.” 재미있는 시절이었지, 그녀는 어린이집 앞에서 아이가 그녀를 발견하고 뛰어오는 것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제 첫째 아이는 제법 커서 아이가 온몸을 던져 다리를 끌어안자, 그녀의 몸이 뒤로 밀렸다. “아이고, 그러면 엄마 넘어져.” 그녀가 웃음을 터뜨리며 아이의 둥근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집 이사 가는 것 같아.”
그날 밤, 그녀는 아이들을 재운 후 남편에게 말했다.
“그래?”
남편은 맥주를 들이켜며 물었다. 첫째 아이를 가졌을 때 그녀는 남편 혼자만 맥주를 마시는 게 억울해 울거나 화를 내곤 했지만 이젠 남편이 맥주를 사오면 그냥 눈을 흘겨보는 걸로 그쳤다. 그는 그녀가 너그러워진 거라고 생각할까? 하지만 사실은 그런 게 아니었다. 어차피 울고불고 해봤자 바뀌지 않는 일에 에너지를 쏟기에 그녀는 매일 너무 피곤했으므로 프랜차이즈 성형외과의 월급제 의사인 남편이 힘든 수술을 한 날엔 맥주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수용하고 넘어가는 것뿐이었다. 어쨌든 여느 남편들보다는 훨씬 가정적인 사람이니까. 출산 직후엔 그녀가 젖몸살을 앓을까봐 가슴 마사지를 해주기도 하고 그녀의 손목이 시릴까봐 걸레를 대신 짜주던 사람. 남편은 아이들을 재우기 전 첫째 아이의 이를 닦아주었는데, 이를 닦을 때마다 아이는 일부러 그러는 것처럼 말이 유난히 많아졌지만 남편은 그녀가 아침마다 그러듯 이제 그만 좀 말하라고 아이를 다그치는 법이 없었다. 그녀는 남편 앞에 앉아 남편이 안주로 먹는 감자칩을 집어 먹으면서 휴대전화의 잠금 버튼을 풀었다. 아이들과 놀아주고 저녁을 먹이고 목욕을 시키느라 몰랐는데 한나가 전화를 걸었던 흔적이 휴대전화에 남아 있었다. 이미 늦은 시간이라 한나에게는 내일 다시 걸어야지, 생각하면서 그녀는 휴대전화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우리는 못 사겠지? 알아나볼까?”
“알아볼래?”
“아냐, 관둘래.”
“왜?”
“분명 턱도 없이 비쌀 텐데.”
남편이 장난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그럼 슬프니까?”
“그럼 슬프니까.”
그녀가 웃으며 답했다.
그녀가 한나와 통화를 한 것은 일주일도 훨씬 지난 어느 월요일이었다. 그녀는 바로 한나에게 전화를 걸 생각이었으나 막상 다음 날이 되자 아이들과 씨름을 하느라 까맣게 잊어버렸다. 이튿날 아침 첫째 아이는 세탁기 안에 이미 들어가 있는 옷을 입겠다고 떼를 쓰며 자지러지게 울었고, 둘째 아이는 어느 틈엔가 책꽂이의 그림책을 다 꺼내놓거나 현관에 놓인 신발을 빨고 있었다. 그 비슷한 일들이 계속 반복되었기 때문에 그녀는 아이들을 재우고 새로운 부재중 메시지를 볼 때에야 겨우 한나의 존재를 떠올렸고, 그러다보니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가버린 것이다.
그 월요일 오후 첫째 아이를 데리러 가는 길, 그녀가 까페 뮐러에서의 밤을 떠올리지 않았다면 그보다 더 늦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날, 어린이집까지 가는 길엔 붓으로 곧게 그린 듯한 나무들 위로 작은 새들이 분주히 날아다녔다. 주말 동안 비가 온 터라 화창한 늦봄의 대기는 어린 시절 그녀의 엄마가 밥솥으로 갓 쪄낸 카스텔라처럼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우편배달부가 느린 속도로 오토바이를 탄 채 지나가는 골목을 그녀가 아이를 안고 따라 걸으면 간혹 어떤 대문들 안쪽에서는 이미 친숙해진 커다란 개들이 점잖게 짖었다.
그러다 그녀는 다시 붉은 지붕의 집 근처에 다다랐고, 낯선 웅성거림을 들었다. 소리의 정체를 알게 되기까지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중국인 인부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주고받으며 집을 부수고 있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주말 전까지만 해도 집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녀는 며칠 밤 사이의 변화에 놀라, 아이를 안은 채 담장 안을 넘어다보았다. 포클레인이 점령한 집의 대문은 어느새 사라지고 벽의 일부마저 허물어져 있었다. 넋을 놓고 보고 있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공사 현장으로 들어가려는 젊은 중국인 인부였다. 외국인 특유의 어눌한 목소리로 비켜요,라고 말하고 그녀 곁을 스치며 정원 안으로 들어선 그의 키 크고 군살이 전혀 없는 근육질의 뒷모습은 까페 뮐러에서 말을 나눴던 남자를 연상시켰다.
그녀는 한쪽 손으로 침을 흘린 아이 입 주변을 거즈로 닦아주면서 한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쩌면 이렇게 통화가 안 되냐?”
서운해하는 한나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그들은 안부를 주고받았다.
“내 고등학교 후배야.”
그리고 한나는 그 발레리노와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경위를 한동안 이야기했다. 하지만 아이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칭얼대기 시작했기 때문에 그녀는 집중해서 귀를 기울일 수는 없었다. 그녀의 귀에 분명히 들린 것은 “안 그래도 걔가 너한테 미안하다며 같이 놀러 오라고 공연 초대권을 보내줬어” 하는 문장이었다.
“초대권?”
“응. 나는 레스토랑 때문에 못 갈 거 같으니까 너한테 두장 보낼게.”
그리고 한나는 특유의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네가 애 엄마라는 건 말 안 했으니까, 남편이랑은 가지 마. 나, 잘했지?”라고 말하고는 깔깔대며 웃었다.
“뭐야, 그게.”
하지만 기분이 썩 나쁘지는 않았다.
“한나 이모는 참 바보 같지?”
그녀는 웃으며 둘째 아이의 동의를 구하듯이 물었다. 예전에 클럽에 같이 다닐 때처럼. 금요일에서 토요일로 넘어온 새벽, 클럽 인근에서 택시를 잡으며, 봐봐, 저 남자애가 이제 내가 열까지 세기 전에 우리한테 말 걸러 올 거다, 하고 말하며 조그맣게 숫자를 세던 때처럼.
“나 못 가. 애들은 어쩌고.”
“잠깐 맡기고 다녀와. 어떻게 맨날 애만 보냐.”
그녀는 한나가 그녀를 위해 그렇게 말한다는 것을 이해했다. 하지만 아이들을 잘 키우기 위해 일까지 그만둔 이상 아이를 완벽하게 키우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아 자꾸만 조바심 나는 마음을 한나에게 설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안 힘들어?”
“괜찮아.”
집중해 젖을 빠느라 미간을 살짝 찌푸리는 둘째 아이의 옆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볼 때, 둘째 아이를 꼭 껴안고 잠든 첫째 아이의 얼굴을 볼 때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행복하지만, 동생만 예뻐해주지 말라고 떼쓰는 첫째 아이를 잠시 돌보는 사이 화장실의 두루마리 휴지를 전부 풀어놓거나 쓰레기통을 엎어놓고 해맑게 웃는 둘째 아이를 보면 아이들을 그대로 변기에 집어넣고 레버를 내려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기도 한다는 것을 설명할 수 없었으므로 그녀는 그냥 괜찮다고 말했다.
“그래도 한번 가보면 좋을 텐데. 너 무용 좋아했잖아.”
첫째 아이를 찾아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들은 붉은 지붕의 집 앞을 한번 더 지났다.
“엄마, 엄마, 여긴 왜 부수는 거예요?”
첫째 아이가 놀란 눈을 하고 물었다.
“그러게.”
여러명의 인부들 중에서 아까 그 젊은 남자는 유난히 눈에 띄었다. 리드미컬하지만 대담한 움직임으로 벽을 부수는, 싱싱하게 젊고 군살이 전혀 없는 근육질의 남자.
*
“초대권이 생겼는데 다음 주 금요일에 현대무용 보러 갈래?”
그녀가 퇴근한 남편에게 그렇게 물은 것은 저녁을 먹으며 한나가 보내준 남자의 공연 동영상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애들은?”
그는 골프 채널을 보며 물었다. 싱크대에는 저녁때 미처 하지 못한 설거지거리가 여전히 쌓여 있었다.
“당신 어머니께 부탁하면 안 될까?”
“요즘 팔 아프신 거 알잖아.”
“그러면 나 혼자라도 가고 싶어.”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사실은 그곳에 남편과 같이 가고 싶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조금 놀랐다.
“또?”
남편의 말에 악의가 없다는 것은 알았다.
“집을 부수고 있었어.”
그녀는 그의 옆에 가만히 앉아 단조로운 골프장의 풍경을 바라보다가 불쑥 말했다.
“그래?”
집을 부수는 장면을 보았을 때는 뜻밖의 광경에 그저 놀랄 뿐이었는데, 막상 그 문장을 입 밖으로 꺼내자 견딜 수 없이 슬프고 두려운 감정이 밀려왔다.
“집을 부수고 있다니까?”
“또 짓겠지, 뭐.”
“당신은 왜 아무렇지도 않아?”
“뭐가?”
그는 하루 종일 수많은 이들의 복부와 허벅지, 팔뚝에서 지방을 긁어내느라 지쳐 있었다. 그녀가 왜 그렇게까지 그 집에 집착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또 호르몬 탓인가? 순간적으로 피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그녀가 자리에서 말없이 일어났을 때 “그럼 금요일에 갔다 와, 친구랑. 내가 애들 볼게” 하고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결국 공연을 보러 가지 못했다. 공연이 있던 금요일, 남편이 열한시경 전화를 했고 갑작스러운 수술 스케줄이 잡혀서 제때 퇴근하기 어려울 것 같다고 말한 것이다.
“알았어.”
그녀는 전화를 끊고, 둘째 아이를 업은 채 하다 만 설거지를 다시 시작했다. 싱크대를 마른행주로 닦고 고무장갑의 물기를 탁탁 털어 싱크대 위 찬장 손잡이에 걸었다. 전날 정리하지 못한 채 잠이 들어 거실 바닥에는 플라스틱 냄비와 식기, 크레용으로 알 수 없는 형상이 그려진 스케치북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고 유아용 플라스틱 책상 위에는 색색의 클레이가 말라 비틀어져갔다. 집은 놀라울 만큼의 고요 속에 더 놀라울 만큼의 난장을 이루고 있었다.
그녀가 바닥의 물건들을 하나둘 집어 반투명 플라스틱 수납함 안에 넣다가 소파에 앉아 있는데 거실 벽이 눈에 띄었다. 이사 온 지 얼마 안 되었지만 색이 바래 누르스름해진 벽지 위에 똑같이 반복되는 무늬들. 벽지의 한쪽 면에는 아이들의 낙서가 있었다. 마치 그녀가 오래전 그렸던 낙서들처럼. 어린 시절, 그녀는 엄마의 눈을 피해 오빠와 집 안의 방문마다 사인펜으로 낙서를 하곤 했다. 분명히 엄마 몰래 한다고 생각했는데 엄마는—이제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지만—매번 귀신같이 알아채고 오빠와 그녀를 야단쳤다. 하지만 그런 일로 눈물이 쏙 빠지게 혼난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때 엄마는 몇살이었지? 어깨에 닿는 파마머리를 하나로 묶고 빨래를 삶거나 화장실의 타일을 수세미로 닦다가 그녀를 돌아보며 “저리 가서 오빠랑 놀고 있어” 하던 엄마. 엄마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면 한나는 언제나 그녀를 부러워했다. 한나의 엄마는 무용하는 딸의 체중을 관리하기 위해 매일 아침 몸무게를 재고, 저염식 다이어트 도시락을 싸주고, 매일 밤 연습실 앞까지 차로 데리러 왔다. “그런 관심이 정말 지긋지긋했어.” 한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한나는 그녀의 엄마처럼 조금쯤 무심하고, 적당히 다정한 엄마를 원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우리 엄마는 내 미래엔 관심도 없었고 조금의 투자도 하지 않았는걸?” 그녀의 엄마는 매일 그녀의 방을 청소해주었고, 계절마다 제철 채소를 사다가 국을 끓여주었고, 그녀가 조금이라도 아프면 모든 일을 제쳐두고 병원에 데리고 갔지만, 오빠만 학원에 보내주었고, 그녀의 재수를 반대했으며, 첫째 아이를 낳았을 때는 언제 직장을 그만둘 거냐고 물었다.
주말은 언제나 그렇듯이 정신없이 지나갔다.
그리고 다시 월요일, 그녀는 늘 그렇듯 둘째 아이를 안고 첫째 아이를 데리러 갔다. 그녀는 다 허물어져버렸을 붉은 지붕의 집을 보고 싶지 않아 다른 길로 갈 생각이었지만 잠시 딴생각을 하는 사이 다시 그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보았다. 창문이나 외벽 없이 뼈대만 드러나 있는 집을. 집의 곳곳은 철근이 드러나 있었고, 절반 이상 허물어진 담벼락에는 낡고 더러운 천이 매달려 있었으며, 모든 것은 엉망이었다. 하지만 황폐해진 집은 오월의 빛 속에서 군더더기가 생략된 무대처럼 아름다웠다.
휴식시간인지, 사방은 적막에 싸여 있었다. 가림막이 쳐 있지 않은 대문이 있던 자리는 마치 누군가 읽고 펼쳐둔 초대장처럼 활짝 열려 있었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무언가에 이끌린 듯 아이를 안고 정원 안쪽으로 들어갔다. 자세가 불편한지 아이가 칭얼대 그녀는 “쉿—” 하며 아이를 달랬다.
그토록 여러번 집 앞을 지나고 정원을 기웃거렸으나 안으로 들어간 것은 처음이었다. 철근과 벽돌더미, 바닥에 함부로 놓인 공구들로 어지러운 정원에 막상 들어서자 그녀는 두려움을 느꼈다. 무언가를 태웠는지, 공기 중에는 흐릿하지만 매캐한 냄새가 섞여 있다. 하지만 한쪽에, 그네가 옆에 있던 커다란 밤나무와 아직 부수지 않은 뒤편 담벼락의 붉은 덩굴장미는 그대로 있었다.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그곳에는 그 남자도 있었다. 남자는 사물들로 어질러진 정원이 아니라 집의 깊숙한 곳, 예전에는 틀림없이 창문이었을 테지만 이제는 유리창도 없이 그저 뻥 뚫린 사각형에 불과한 틀의 안쪽에서 정원을 향해 서서 홀로 식사를 하고 있었다. 남자가 거기에 있다는 것을 안 그녀는 너무 놀라 소리를 지를 뻔했다. 액자 프레임 같은 사각형 안쪽, 땀에 젖은 민소매 차림으로 얼마 전까지는 창틀이었을 부분을 식탁 삼아 국수를 먹던 남자는 인기척에 고개를 들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들은 잠시 동안 서로 말을 않고 쳐다보고만 있었다. 이마를 가리는 덥수룩한 고수머리 탓인지 앳되게까지 보이는 남자의 눈빛은 폭군처럼 강렬한 것 같았지만, 또 동시에 순진해 보이기도 했다. 그녀는 자신이 도망치고 싶은지 그곳에 조금 더 머물기를 원하는지 몰라 혼란스러웠다.
남자는 어깨를 곧게 펴고 그녀를 향해 정면으로 섰다. 흰색 레오타드 같은 민소매 셔츠를 입고 맹수처럼 벽을 부수던 남자의 단단한 등 근육을 그녀는 기억했다.
“너무 아름다운 골격을 가지셔서 그랬어요. 정말 아름다워요. 그 말을 꼭 해드리고 싶었어요.”
단단한 등 근육을 떠올리는 순간, 한나의 레스토랑 화장실에서 유축을 하고 나왔을 때, 남자가 그렇게 말하고 수줍은 듯 눈을 내리깔았던 장면이 머릿속을 스쳤다. 아이가 원하면 언제고 풀어헤쳐 꺼내놓는 그녀의 젖가슴, 유두가 헐고, 갑자기 팽창했다가 쭈그러든 후 다시 팽창하기를 반복해 살이 트고 처진 그녀의 젖가슴 안쪽 무언가를 마치 꿰뚫어보듯.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그녀는 남자들의 그런 표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기억하고 있었다.
여자는 그의 옷을 벗기기라도 할 것처럼 남자를 맹렬히 쳐다보았다. 창틀 아래로 드러나지 않은 남자의 몸을 상상했다. 그녀는 이토록 더럽고 위험한 곳에서 낯선 남자에게 성적인 충동을 느낀다는 사실에 당혹감과 수치심을 느꼈다. 아이를 낳은 이후, 남편이 손을 뻗어올 때도 무언가를 느낀 적은 없었다. 나체의 집 위로 오후의 햇살이 쏟아졌고 지붕은 불타오르는 듯 이글거렸다.
최초의, 최연소, 국내 초연.
그는 틀림없이 욕망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목숨을 걸어봤겠지? 불현듯 그녀는 자신이 지금껏 누구에게도 떼쓰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일찍 철이 든 척했지만 그녀의 삶은 그저 거대한 체념에 불과했음을.
그녀는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매캐한 냄새 사이로 머리를 어지럽히는 장미향이 섞여들었다. 향기 속에서 그녀는 잊고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까페 뮐러가 등장하는 그 영화를 본 후 극장 근처의 4층짜리 까페에서 오렌지 아이스티를 마셨던 어떤 오후를. 반짝이던 유리컵, 향긋했던 오렌지 조각, 투명하게 찰랑거리던 각얼음. 깊고 맑은 하늘이 펼쳐진 창가의 자리에서 한나는 영화 속의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고 아주 단호하게 말했다. “사랑이 아니지, 그런 게 어떻게 사랑이야.” 그렇다면 사랑은 무엇이지? 그녀는 생각했다. 남자가 다시 고개를 숙인 채 느릿느릿 국수를 먹기 시작하고, 영원처럼 정지한 듯한 풍경 위로 헐벗은 그림자가 침묵 속에 간혹 움직였다. 나는 사랑을 몰라. 그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다.
*
그날 밤, 그가 퇴근해 집에 들어왔을 때 뛰어와 그를 반긴 것은 첫째 아이였다. 거실 한쪽에서 동생에게 그림책을 읽어주고 있던 아이는 잠금장치가 열리는 소리를 듣고 달려가 아빠의 다리에 매달렸다. 아내는 거실에 앉아서 바닥에 어질러진 색색의 블록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나 왔어.”
지난 금요일에 공연을 보러 가지 못하게 한 것이 미안했던 그가 사가지고 온 치킨 냄새에 첫째 아이가 신이 나 팔짝팔짝 뛰면서 거실을 한바퀴 돌았다. 기저귀를 찬 둘째 아이도 “우우우—” 소리를 지르며 식탁 쪽으로 뒤뚱뒤뚱 기어갔다.
“오늘 별일 없었지?”
그가 유아용 의자에 기어오르려는 둘째 아이를 번쩍 안아 의자에 앉히며 물었다.
“응, 똑같지, 뭐.”
아내는 아이들을 식탁 맡에 앉히고 찬장에서 접시와 컵을 꺼냈다. 그가 치킨 박스를 열자 짭조름한 기름 냄새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기분이 좋아진 첫째 아이가 둘째 아이에게 “이건 치킨이고, 이건 치킨 무야” 하고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치킨 맛도 모르면서 둘째 아이가 달라고 떼를 쓰는 사이, 첫째 아이는 아빠가 건네주는 치킨 다리를 집어 한입 크게 베어물었다. 아내는 보채는 아이를 달래기 위해 냉장고에 미리 만들어둔 단호박 퓨레를 꺼내왔다. 아내는 어쩐지 말수가 적은 것 같았는데, 그는 아내가 토라져 그런 걸 거라고 이해했다.
“이제 그 집 완전히 다 부서졌더라.”
그는 주말부터 시무룩해 보였던 아내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말을 꺼냈다. 아이를 낳은 이후 지쳐 집에 돌아와봤자 아내는 별것도 아닌 걸로 짜증을 내거나, 납득할 수 없는 타이밍에 화를 내기 일쑤였지만 그는 아내를 다정히 대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제 곧 더 근사하게 다시 짓는대.”
그가 말하지 않아도 그녀 역시 집이 곧 새로 지어지리라는 것은 알았다.
“응.”
하지만 그 집은 그녀가 알던 집과는 완전히 다를 것이다. 그날 오후에 그녀가 보았던 집과도.
“이젠 상관없어.”
둘째 아이의 입에 퓨레를 떠먹이며 그녀가 말했다. 그렇게 말하자 형언할 수 없는 고통과 기쁨이 동시에 그녀 안에 차올랐다. 그 순간, 그들의 삶의 각도가 미세하게 어긋났지만 남편은 아무것도 알아챌 수 없었으므로 그저 첫째 아이가 내미는 컵을 받아 쥐었다. 한순간이지만 엄마가 자신을 완벽히 잊을 수 있음을 알아버려 한나절 만에 조숙해진 둘째 아이만이 엄마의 평상시와 다른 아름다움이 낯설어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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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은 피나 바우쉬의 「왈츠」(Walzer)에 나오는 메히틸트 그로스만의 대사 “와인 조금만 더. 그리고 담배 한 개비만. 하지만 아직 집에는 가지 않을래요”의 일부를 차용했다. 요헨 슈미트 『피나 바우쉬』, 이준서 옮김, 을유문화사 2005, 15면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