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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박진성 朴鎭星
1978년 충남 연기 출생. 2001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으로 『목숨』 『아라리』가 있음. darkred0604@hanmail.net
익명에서, 익명에게
왜 여기 있니 얼마나 찾았는데
네 목소리만 들리더구나
내 귀로 분명 들었는데
너는 그냥 종이들이구나
숨은 것과 없는 것을 골몰하다가
나는 어느 밤이 되었는데
너는 그걸 과일이라 부르는구나
오래전에 나는 죽었는데
너는 손목을 잡고 싶다는구나
네가 흘리고 간 그림자는 성대만 가졌구나
나는 기차가 되었는데 너는 그걸
아르헨티나라고 말하는구나
좁은 방에서 비명을 지르는데
너는 오빠가 드디어 나타났다고 웃는구나
팔레스타인 여자를 언니로 바꾸는 기술을
네게서 배운다
우리는 나뭇잎에서 떨어지는 푸른 공기였지만
아파트 복도의 새벽 두시였지만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안 보이는 폭력들에 대해서
더 안 보이는 죽음들에 대해서
말해야만 했지
선언문이 되는 순간 목소리를 잃을까봐
너는 두려워했다 사랑하는 방식은 도시의 숲에서 배울 것,
아니다 사랑은 배우는 게 아니다
나무의 목소리를 나무에게 돌려주는 게 사랑이라고
너는 말했지
그렇다면 나는 내 귀를 걸어둘게
바람에 빵집에 거대한 크레인의 공중에
그리고 네가 쓰지 못한 문장들에
떠도는 귀들을 걸어둘게
목소리들의 주인은,
움직임이라고 해둘게
안나와 함께하는 푸줏간 놀이
안나는 성대가 망가질 때까지 노래를 불렀다 우리들의 안나, 벙어리가 되고 싶은 안나, 성대가 없어질 때까지 말렸지, 안나야 기형(畸形)과 무형(無形)은 어떻게 다르지?
안나가 내 뺨을 때렸다
손바닥이 볼에 박혔다
이상해졌잖아, 아니야 없어진 거야
실컷 떠들고 놀았는데 우린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한 거지? 목소리를 찾으려고 안나가, 성대를 찾으려고 내가,
빈집을 찾아 놀았네
안나는 인대가 끊어질 때까지 춤을 췄다 우리들의 안나, 절름발이가 되고 싶은 안나, 관절이 없어질 때까지 말렸지, 안나야 자폭(自爆)과 유희(遊戱)는 어떻게 다르지?
안나가 내 발목을 밟았다
발바닥이 발등으로 들어갔다
이건 학대잖아, 아니야 노는 거야
너의 눈으로 너를 보고 싶어, 안나는 눈알을 바꿔 끼우다 눈알을 떨어뜨렸다 도르르르,
저 눈알들은 가장 지루한 새가 먹을 거야 발랄한 안나, 이제는 무얼 하지, 시무룩한 안나,
피부를 벗고 나의 피부를 벗기고
천장으로 기어가는 안나,
검은 그림자가 나의 살점을 도려내기 시작했다
검은 리듬이 안나의 살점을 내 살점 위에 올려놓았다
안나는 그 도시에서 가장 신선한 육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