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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이 계절에 주목할 신간들

 

 

김미정 金美晶

문학평론가. 최근 평론 「움직이는 별자리들: 포스트 대의제의 현장과 문학들」 등이 있음. null8@hanmail.net

 

김수이 金壽伊

문학평론가. 평론집 『풍경 속의 빈 곳』 『서정은 진화한다』 『쓸 수 있거나 쓸 수 없는』 등이 있음. whitesnow1@hanmail.net

 

하성란 河成蘭

소설가. 소설집 『루빈의 술잔』 『옆집 여자』 『푸른수염의 첫번째 아내』 『웨하스』 『여름의 맛』, 장편 『식사의 즐거움』 『삿뽀로 여인숙』 『내 영화의 주인공』 『A』 등이 있음. rifleha@hanmail.net

 

왼쪽부터 김수이 하성란 김미정 Ⓒ 강민구

왼쪽부터 김수이 하성란 김미정 Ⓒ 강민구

 

김수이 하성란 소설가와 2019년 상반기 문학초점을 맡게 된 문학평론가 김수이입니다. 올해 첫 게스트로는 김미정 문학평론가를 모셨습니다. 오늘 미세먼지가 무척 심해서인지 문득 미세먼지가 문학의 어떤 면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웃음) 요즘의 문학들이 지닌 세밀함이 매우 훌륭한데, 그 미세함이 우리가 평상시에 각성하거나 생각하지 못했던 걸 들여다보게 한다는 장점도 있지만, 우리에게 주는 ‘스트레스’도 있는 듯합니다. 물론 부정적인 뜻만은 아니고요. 그런 기미들을 문학이 못 잡아내면 다른 분야는 더 어려우리란 생각을 하면서 이 자리에 왔습니다.

 

하성란 미세먼지 수치가 높은 날이라는 걸 지금 말씀하셔서 알게 되었네요. 어느새 둔감해진 듯도 하고요. 아무래도 오늘 이 자리가 긴장되고 기대된 때문인지도 모르겠어요.

 

김미정 혼자 읽지만 이야기를 함께 주고받는다는 것은 긴장되면서 설레는 일 같아요. 두분과 이야기 나누게 되어 기쁩니다.

 

성석제 『왕은 안녕하시다』(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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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이 성석제 소설로 시작할까요? 두권으로 된 장편인데, 저는 1권하고 2권이 확연히 다른 느낌이었어요. 1권에서는 명민하고 아름다운 어린 왕, 세상 돌아가는 일에 빠삭한 알건달에 파락호인 ‘성형’의 이야기가 정말 재밌어요. 그런데 2권에서는 작가가 역사적인 사실을 많이 의식해서인지 우암 이야기를 상세히 쓰고 상소문도 많이 인용해요. 김만중도 끌어오고요. 장희빈은 많이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권력구조 속에서 희생된 것으로 그리면서 이야기가 많이 벌어져 1권의 매력을 따라오지 못하는 듯합니다.

 

하성란 지금까지 대부분의 역사서가 서인 중심의 시각으로 기술되었잖아요. 어린아이들까지도 장희빈을 그저 몹쓸 여자, 악녀로 여길 정도인데, 그런 시선에서 벗어나 한 시대를 바라본 것이 아닌가 생각했어요. 서인과 남인 사이의 권력 다툼이 큰 배경이 되지만 이 배경을 이끌고 이끌려가는 개인들의 생각과 행동을 단순히 당파성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겠죠. 태생이 남인이지만 서인과도 교류를 마다하지 않는 주인공 성형은 당파를 뛰어넘어 곧은 이들과 우정을 나누는 인물로, 매력적으로 다가왔어요.

 

김미정 형식과 제재만으로도 성석제의 첫 장편인 『왕을 찾아서』(문학동네 2014, 초판 1996)와 이문열의 『황제를 위하여』(민음사 2001, 초판 1982)가 자연스럽게 떠오르는데요, 읽는 재미뿐 아니라 무언가에 대한 순정을 기억하는 세대의 정신사적 밑그림 같은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이 소설은 성석제가 『왕을 찾아서』에서 애도를 마친 왕을 또다른 생생함으로 소생시킨 이야기인 것 같아 반가웠습니다. 사실 『왕을 찾아서』를 읽을 당시 적어도 한국문학사에서 이런 ‘왕’과 그를 숭앙하는 시선이 다시 등장할 수 있을까 생각한 적이 있거든요. 그러니까 사라진 무언가에 대한 순정, 그리고 애도와 웃음이 동시에 펼쳐지는 능란함 같은 것 말이지요.

 

하성란 소설의 구도를 들여다보면서 서장과 종장의 액자식 구성이 꼭 필요했을까 생각해봤어요. 익숙한 구성이기도 하고요. 중고서점에서 구입한 고서 중 발견한 ‘소설’이 이야기의 주를 이루는데, 이 ‘소설’이 흥미로운 것은 그 많은 세월을 지나는 동안 세대를 아우르는 수많은 이들의 필사가 더해지면서 이야기가 풍성해진 때문이겠지요. 그렇다면 이 소설을 다시 쓴 ‘나’의 흔적이 소설 어디어디에 섞여 들어 있는지 의문이 계속 남았어요. 이 소설에서 중요한 것은 지금의 내 목소리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김미정 저는 액자에 해당하는 서장과 종장이 꼭 필요한 장치라고 봤어요. 소설 장르의 역사에 대한 제 고민을 이 소설에 투영해서 읽은 측면도 있겠습니다만, 이 소설이 문(文)과 노벨(novel)의 거리, 혹은 근대 이전의 인간과 근대적 인간에 대한 작가의 고민과 무관치 않으리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왕을 찾아서』 『황제를 위하여』, 그리고 『왕은 안녕하시다』의 공통점이 있다면 액자형식을 취한다는 것, 그리고 액자 안의 이야기를 총괄하는 시선의 서술자가 있다는 것인데요, 이 소실점 같은 서술자는 근대소설적이면서 전근대 소설적인 존재예요. 노량진에서 책을 구해 액자 안의 이야기를 다시 쓰고 있는 『왕은 안녕하시다』의 서술자는 지금은 사라진 존재나 가치에 대해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는 파토스(pathos)를 지닌 지극히 낭만적이고 일인칭적인 존재입니다. 동시에 액자 안의 이야기에서 독자를 안내하고 다시 바깥으로 나오게 하면서 ‘지금까지 이야기는 다 픽션’이라며 객관화시키는 역할도 해요. 이건 노벨(novel)의 서술자로는 설명되지 않잖아요. 그런데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어떤 기점이나 개념을 준거로 해서 문학 이야기를 할 때 경화되는 부분도 있는 것 같아요.

 

김수이 저는 『투명인간』(창비 2014)과 『인간의 힘』(문학과지성사 2003)이 떠올랐어요. 그동안 성석제는 ‘투명인간’들, 즉 이름 없이 사라진 사람들, 공식적인 역사와 의미체계 속에 포함되지 않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남았고 어떻게 살려고 애썼는가를 그리는 데 공을 들였죠. 신념을 위해 목숨도 아끼지 않은 순박한 사람들이 보여준 ‘인간의 힘’을 피력해왔고요. 이 소설에서 저는 성형이라는 인물이 일종의 시점처럼 다가왔어요. 성형은 시점이면서 지금까지 성석제가 창조해온 이름 없는 인물들의 총합이고, 또 이 작품은 작가 성석제가 지닌 문제의식의 결정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성란 역사 바깥의 인물이 역사 속에 뛰어들어 한 구절을 대신 이야기해주는 방식이 역사소설의 모범처럼 되어 있잖아요. 이 소설에서 무명의 한 사람을 살게 하는 힘이 무언지 보여주는 대목이 있어요. 주인공은 임경업 장군과 함께 사라진 아버지가 북벌의 대업을 완수하고 돌아와 그 덕에 결국 자신이 영의정까지 오를 수도 있다는 환상을 품으며 살아요. “그걸 믿을 수 없다면 내가 누구인지, 왜 사는지 설명하기가 곤란해진다”(1권 20면)는 대목도 그래서 저는 흥미롭게 읽었어요. 그렇지 않다면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1권 21면)이라고 말하는데, 결국 이 소설은 그 이야기를 하려는 것일지도 모르겠어요. 다만 인물들에게서 느껴지는 영웅성이랄까, 그런 것 때문에 되레 매력이 감소했는데, 곰곰 생각해보니 어느 시절 누군가가 필사하면서 덧입힌 것이겠지요.

 

김수이 이야기꾼인 작가는 고전소설의 전형적인 인물도 거침없이 영입합니다. 영웅적인 인물들은 매력적일 뿐만 아니라, 힘없는 민중들의 소망과 변화의 의지를 대변하니까요. 이 소설에서 긍정적인 인물들은 탁월한 미모와 인성을 갖고 있어요. 성형도 서자에다 기생방에서 자란 하층민에 가깝지만, 소설의 후반에는 훈련과 선행을 통해 거의 영웅 수준까지 올라가죠. 작가는 근대 역사소설의 구도와 가치관에서 자유로운 방식이 오히려 당시 역사를 잘 드러낼 수 있다고 본 것 같아요.

 

김미정 저도 선생님이 말씀하신 이유 때문에 이 캐릭터들은 필연적으로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웃음) ‘왕은 안녕하시다’라는 제목부터 작가가 인간 군상들과 이 세계를 통해서 하고 싶었던 말이 분명하게 있는 것 같았어요. 저는 이 ‘왕의 안녕’을 ‘왕으로 상징될 가치가 안녕하다’라는 의미보다는 ‘지난 시절의 사라진 어떤 가치에 대한 순정이 안녕하다’는 의미로 읽었는데요, 그렇기에 ‘왕’으로 상징될, 지금 시대에는 사라진 무엇에 대한 순정은 그래도 안녕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이 캐릭터들은 미워할 수 없는 인물들이어야 했다 싶어요.

 

하성란

하성란

하성란 소설을 읽으면서 줄곧 왜 지금 숙종과 그 시대의 이야기를 가져와야 했을까를 곰곰 생각해보게 되었어요. 그러다보니 ‘왕은 안녕하시다’가 아니라 ‘왕만 안녕하시다’로 읽힌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김미정 또 저는 이 ‘왕’이 단순히 복벽주의나 전근대의 가치를 담은 존재만은 아니라는 이야기도 해보고 싶은데요, 그건 성형 같은 인물이 시종일관 미워할 수 없는 파락호의 입장에서 왕의 의미를 보충해줄 뿐 아니라, 등장하는 무수한 존재들의 관계 속에서 왕의 정당성이 입증된다는 의미에서도 그럴 것 같아요. 또 흥미로운 것은 『왕을 찾아서』와 비교해보면 여성 인물들이 그저 소모되지 않는다는 점이었어요. 가부장제하의 여성 이미지를 그대로 승인하지 않고, 그 조건에서 가능할 여성 인물의 캐릭터를 억지스럽지 않게 다양화한 것도 이 소설의 생동감에 기여했다고 생각합니다.

 

김수이 성형의 할머니가 춘향이로 설정되어 있잖아요. 「춘향전」의 인물이 이 소설에서 다시 가공돼 실존인물로 다가오는 게 재밌었어요. 다만 김만중에게 기대를 많이 했는데 생각보다는 짧게 처리됐어요. 물론 김만중이 지닌 생생한 삶의 감각과 저잣거리 사람들에 대한 관심은 잘 그려졌지만요. 성석제가 쓴 역사소설들은 대체로 허구적인 재구성인데, 여기서는 기록된 역사를 많이 의식한 것 같아요.

 

하성란 몇몇 에피소드는 눈으로 보듯 선연하게 드러나는데, 말씀하신 것처럼 역사적인 사건에 이르면 사실을 기술하는 데 치우치는 게 아닌가 싶었어요. 그건 어떻게 할 도리가 없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요. 무협소설처럼 바뀌는 부분이 느닷없으면서도 결국 웃음이 터지고 말아요.

 

김수이 숙종 때 기록을 보면 정치판에서 맨날 싸우는 동안 백성들은 굶어 죽고 노역하다 죽고 병들어 죽어요. 고전소설이 그랬던 것처럼 서민들을 대변하고 가혹한 현실을 돌파하려는 하나의 방법이었을 듯해요.

 

정세랑 『옥상에서 만나요』(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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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성란 오늘 다루는 세 작가 모두 이야기꾼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저마다 개성있는 목소리로 끊임없이 이야기를 풀어내지요. 저는 정세랑의 『보건교사 안은영』(민음사 2015)을 무척 흥미롭게 읽었어요. 『피프티 피플』(창비 2016)도 역시 좋았고요. 이 장편들의 밑거름이 되는 단편들이 『옥상에서 만나요』 곳곳에 드러나 있어서 반가웠습니다. 『피프티 피플』은 화자들이 돌아가면서, 정확하게는 쉰한명의 이야기를 하죠. 한명 한명의 이야기를 붓으로 터치하듯이 점묘법을 차용한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웨딩드레스 44」가 그와 비슷한 형식을 취하고 있어요.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를 모두 읽고 나면 조각난 이미지들이 하나로 직조되면서 작가가 이야기하려는 바를 짐작하게 하지요.

 

김미정 수록된 단편 모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정세랑의 소설을 읽으면, 큰 이야기 틈틈이 포스트잇이 붙어 있는 이미지가 떠올라요. 또 곁가지 같은 이야기도 이물감처럼 느껴지지 않게 거침없이 풀어내는 점도 좋고요. 옷깃 단단히 여미고 긴장해서 읽어야 할 것 같은 무겁거나 민감한 제재도 정세랑이 다룰 때면 과감한 보폭과 스케일로 구사되는데요, 단적으로 「알다시피, 은열」을 보면서는 이 작가에게 스토리를 공학적으로 직조하는 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만 과정을 보여주고 질문을 던지면서 독자들과 함께 추적하게끔 만드는데, 그것도 흡인요소인 것 같습니다. 독자들을 릴렉스하게 만든 뒤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스미게 하는 서사구사능력이 있어요. 또한 생활인 여성, 구체적으로 직장에서 일하고 있는 여성들의 이야기가 관념적이지 않은 것도 좋았고요.

 

하성란 「알다시피, 은열」을 비롯해서 작품 곳곳에 비치듯, 역사를 전공한 사람 특유의 이야기를 만드는 능력이 이 작가를 받쳐주는 힘이지 않을까 추측도 해보았어요. 「알다시피, 은열」은 ‘알다시피’라는 밴드 이야기와 자신이 논문으로 쓰고 있는 해적단의 우두머리인 ‘은열’에 관한 이야기인데, 김미정 평론가 말씀처럼 두 이야기가 멀리 떨어져 붙어 있는 두개의 포스트잇처럼 느껴지지만 아주 자연스럽게 이어지면서 이야기에 몰입하게 돼요. 두 이야기가 부딪히면서 오히려 서로 상승작용하는 느낌이랄까요.

 

김수이 마치 운동의 고수가 힘을 빼고 고난도의 실력을 펼쳐 보이는 것처럼요. 정세랑의 문장은 나는 기교라는 걸 모른다,라고까지 생각할 수 있는 단문들인데도 말씀처럼 잘 읽히면서도 깊이가 있어요. 「보늬」는 우리 시대의 새로운 비극이 되어버린 돌연사를 풀어내는 방식이 참신하고, 「옥상에서 만나요」는 환상적인 장치로 서사를 빚어내는 솜씨가 독특해요. 저는 정세랑 작가가 지닌 삶과 죽음과 사랑에 대한 가치관이 좋았는데요, 「알다시피, 은열」에서 시로가 남겼다는 글이 마음에 남아요. “윤회의 바퀴가 셀 수 없이 거듭 돌아 본래의 육(肉)과 혼(魂)이 먼지만큼도 남지 않을 때까지, 함께 있고 싶은 이들과 함께 있다면 그곳이 극락이다”(80면). 죽음을 아우르는 삶의 가치를 매일의 생활에서 이끌어내는데, 「영원히 77 사이즈」에서도 비슷한 시선이 보여요. “지금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함께 죽어 있고 싶은 사람이 생길 거예요”(164면)라고 말하는 걸 보면서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이 시대의 급작스럽고 무거운 비극을 따뜻하게 어루만지는 탁월한 능력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김미정 「영원히 77 사이즈」는 죽음 이후에야 자유로워지는 한국에서의 여성의 삶을 이야기한다고 볼 수 있는데, 어떤 비장함이나 결연함이나 원한(르상띠망)으로 그걸 표현하는 게 아니고 한번 비틀어서 명랑함으로 풀어내요. 어떻게 보면 맥락을 희석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공감의 저변을 넓히는 의미도 있어요. 「보늬」의 경우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사로운 이야기인데 어떻게든 ‘관계’ 속으로 끌고 와서 연결 짓고 확장시키려는 설정이 잘 전달돼요.

 

김수이 저도 공감해요. 특히 「보늬」에서 마지막이요. “들렸다고 생각한다, 그 순간에./우리들의 그 아픈 네트워크에 하얀 점들이 등록되는 소리가.”(142면) 어떤 관계성을 환기하는데, “21세기에 죽는 사람들은 결국 다 데이터가 될 거란 생각도 했다”(139면)에서 보듯 이건 네트워크상의 관계들이어서 몸으로 부딪치는 현실의 관계와는 다르죠. 곧 다가올 미래에 우리가 살아갈 세상에 대한 고민이 스며 있어요. 「이혼 세일」에는 이혼 사유가 남편의 성폭행으로 암시되는데, 좀더 페미니즘적으로 밀고 나가줬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어요. 「이마와 모래」는 비유와 알레고리의 장점이 분명히 있음에도 좀 도식적이라는 인상도 받았고요.

 

김미정 「이마와 모래」는 말씀하신 인상이 있는 것 같아요. 그래도 언어가 다르지만 연결시키려는 사람들에 대한 발상은 이 소설집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아 흥미로웠습니다. 각기 다른 사람들이지만 어떻게든 되도록 많이 공모시키자, 이런 거요. 「옥상에서 만나요」에서도 개별적으로 홀로 외롭게 살아가는 삶에 대한 뚜렷한 안티테제를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이 소설들 속의 공모의 관계는 계몽적이지 않은 연대를 상상케 하는 기초라고도 생각되고요.

 

하성란 「영원히 77 사이즈」는 죽어서도 어쩔 수 없이 77 사이즈로 남아 있는 죽음보다 더 두려운 현실에 관한 이야기를 재치있게 풀어내요. 속도감 있게 이야기를 읽다가 문득 누름돌처럼 묵중한 것이 가슴을 누르는 듯합니다. 다만 소설집을 다 읽고 나서 소설의 저 아래에 흐르고 있는 작가의 자세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어요. 지금까지 작가의 장점이라고 생각했던 부분들이요. 이를테면 「웨딩드레스 44」에 담기지 못한 45번째의 이야기가 궁금해지는 거랄까요. 「효진」에서 “이야기로만 듣는 베이징은 점묘화 같아. 언젠가 가보게 된다면 달라지겠지”(47면)라는 효진의 대사를, 다음에는 지금까지와는 또다르게 변화된 소설들을 보여주겠다는 작가의 각오로 읽기도 했습니다.

 

김수이 그건 처음에 말씀하신 사유의 문제와 연결된다고 봅니다. 이 소설집이 압축한 우리 사회의 문제는 죽은 채로 살아가는 삶, 혹은 죽어 있는 삶이죠. 「영원히 77 사이즈」에 섬뜩한 대목이 있어요. “사실 죽은 것만큼 효율적인 여행자는 없다. 자지 않아도 씻지 않아도 되니 숙소 비용은 크게 줄었다.”(163면) 이 여행자는 우리 시대의 삶의 여행자죠. 많은 부분 생계와 또다른 무엇을 위해 죽은 상태로 살아가는 우리 자신요. 작가는 이 시대의 삶의 방식과 인간의 존재 방식을 직관적으로 간파하는데, 이걸 좀더 깊은 사유로 밀어붙이지 못한 것은 단편의 특성이자 한계일 수도 있겠어요.

 

우다영 『밤의 징조와 연인들』(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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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정 ‘말로 직조되는 세계란 이런 것이다’를 보여주는 소설집 같았어요. 다소 사변적이라고 여겨질 때도 있긴 했지만 일상의 순간들을 섬세하고 깊이있게 포착하는 장면이 많아서 한 문장 한 문장을 읽고 곱씹는 것이 즐거웠습니다. 특히 처음에 배치된 「밤의 징조와 연인들」이 소설집 전체의 미덕과 특징을 압축적으로 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하성란 ‘밤의 징조와 연인들’이라는 매력적인 제목의 소설을 읽어가면서 작가가 의도한 바겠으나 석이와의 관계가 우유부단하고 다소 지루하게 반복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집을 보러 간 부동산중개사무소에서 예전에 휴양지에서 만난 남자를 만나 그의 이야기를 듣는 부분에서 이 작가의 특장이 발동된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소설이 쓰인 순서대로 「셋」부터 읽기 시작했고 바로 이 작가의 독특한 이야기에 몰입하게 되었어요.

 

김수이 「밤의 징조와 연인들」의 마지막 부분이 시적이고 멋지긴 한데, 결말이 소설이 진행되는 논리와 연결고리, 유기성을 넘어서거든요. “나는 언제든 석이가 내게 돌아올 것을 믿고 있었다. 석이도 내가 갑자기 어둠 저편으로 사라지지 않을 것을 믿고 있었다. 검고 고요한 물속에 서로를 남겨두지 않을 거라고, (…) 우리가 같은 방향으로, 거의 비슷한 속도로 흘러가리라고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125~26면)라고 마무리되는데, 소설의 전체 맥락에서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좀 난감했습니다.

 

김미정 그건 작가의 세계관으로 봐도 되지 않을까요. 주사위를 던지면 나오는 우연의 세계를 그렸지만, 그 우연적 결과에 이르는 과정들은 우연을 예감케 하는 명백한 인과과정이기도 해요. 물론 그때의 인과는 사후적인 인과라고 여기서도 암시하고 있긴 하죠. 그래서 맨 마지막 부분에서 저는 석이가 타인들의 총체, 나에게 스며든 타인들의 총체처럼 읽히기도 했어요. 앞으로 석이와 물리적으로 만날 일이 없다 할지라도 아마도 살아가면서 석이는 ‘나’에게 영향을 미치겠지요. 그런 인식이 뚜렷하게 느껴져서 제게는 마지막 대목도 꽤 정합적으로 다가왔어요.

 

김수이 아무리 사랑해도 현실적인 문제가 아닌 두 존재 사이의 균열 때문에 헤어질 수도 있잖아요. 물론 두 영역이 명확히 분리될 수는 없겠지만요. 이런 존재론적인 맥락에서 나온 결론이라면 이해하겠는데, 소설은 “네가 해 온 게 절대 사랑은 아니라는 거야. 이제 우리가 함께한 모든 순간이 끔찍한 시간으로 훼손됐다는 거야. 무엇 때문에 내가 없는 인생을 살게 됐는지 똑똑히 기억하면서 살아. 네 이기심과 자존심 때문이야”(105면)라고 말해요.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한 두 사람이, 사랑 자체가 안고 있는 균열이 아닌 석이가 실제로 한 행동과 잘못된 사랑의 방식 때문에 이별하게 돼요. 그런데 존재론적인 의미로 마무리하는 게 좀 어색했어요. 굳이 말하자면 이건 물리적인 현실이라기보다는 시적 현실이고 마음의 진실이죠. 작가가 상정하는 두개의 다른 현실, 두개의 다른 존재공간이 평행우주처럼 나란히 있다가 합쳐지는 것은 마음의 영역과 믿음의 영역의 일이에요. 일종의 낭만적 허위이고, 같은 의미에서 낭만적 진실인 거죠.

 

김미정 마음, 기분, 감정 같은 단어가 많이 나오긴 하는데 저는 이걸 심리적으로 읽지는 않은 것 같아요. 오히려 구체적인 존재론의 얘기로 읽었어요. “어떤 마음을 품고 있다면 그 마음을 갖게 된 이유와 경험이 중요했다. 지금의 우리를 형성한 내적이고 외적인 모든 과정을 조밀한 인과의 그물로 엮어 내는 데 긴 시간을 들였다”(37면)는 대목이 있는데, 어떻게 보면 석이는 자신이 선택하지 않았던 계기의 연쇄 속에서 만들어진 존재잖아요. 석이와 나와의 관계도 사실은 그 계기의 조합으로서 맺어진 거고요.

 

하성란 우다영의 소설에서 놀라웠던 점이 사건들의 인과관계가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된 세계 속에서 변형된 채 일어난다는 점이에요. 작가가 「노크」에서 이렇게 얘기해요. “살짝 꼬인 채 연결된 세계에서는 수평이나 수직상에서 절대로 만날 수 없는 먼 곳의 사람과도 만나게 돼.”(160면) 이게 사람을 넘어서 일이나 사건으로도 확대되면서 이야기가 풍성해지는데요, 기괴하고 환상적인 부분들이 느닷없이 끼어든 우연처럼 느껴지면서 섬뜩하고 불안해지지요. 「조커」에서도 우연히 만난 한 여자가 언젠가 개에 물린 자국이 있다고 말하지요. 이 이야기가 처음엔 소설의 흐름과 아무 관계 없는 것처럼 흘러가지만, 개에 물린 다른 사람이 등장하면서 새로운 의혹이 생기고 또다른 사건으로 이어져요. 툭 던져놓는 사건이 끈질기게 이야기의 마지막까지 이어지는데, 솜씨가 노련했어요.

 

김미정 그런데 이 소설집에서 너무 뚜렷하게 그 방법과 재능을 보여줘서 다음 작품을 쓸 때 좀 부담이 생기지 않을까 생각도 들었어요. 카드패를 조합해서 인생에 비유하는 듯한 「조커」의 작법이 다른 소설들에서도 변주되고 있다고 여겨졌는데, 창작하는 이의 세계관이 바뀌지 않는 이상 그걸 계속 신선하게 보여줘야 한다는 과제가 생기는 거죠. 이 조합의 방식이 좀 긴장을 늦추게 되면 「미래의 밤」의 경우가 될 것 같기도 해요. 재미있게 읽은 소설이지만요.

 

김수이 작가는 각 존재가 지닌 자기만의 세계가 어떻게 연결되는가의 문제, 또 그 세계들이 연결되면서 일어나는 사랑이나 파열의 문제를 계속 이야기하고 있어요. 「미래와 밤」에서 기업이 국가를 사버려 국가가 사라지는 상상력은 현실화될 가능성이 있는 시나리오라고 봐요. 나아가 이 소설은 하나의 세계가 사라진다는 것은 하나의 이야기가 사라지는 것이고 이야기의 구성을 가능하게 하는 하나의 근원이 사라지는 거라고 말하는데, 이야기의 상실과 세계의 상실을 맞물려 통찰한 점이 인상적이었어요.

 

하성란 아무래도 첫 소설집이다 보니 정세랑과 우다영의 소설에 대해 비교 아닌 비교를 하게 되는데요, 정세랑의 소설들이 치고 빠지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짓고 있다면 우다영의 소설들은 불시에 턱 밑까지 쑥 들어오는 느낌이랄까요. 서로 다른 방식과 매력으로 두 작가 모두 오래 기억될 ‘첫’인상을 남겼다는 생각입니다.

 

이제니 『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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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정 먼저 고백하자면 시는 여전히 어려운 것 같아요. ‘시를 해석한다, 시를 잘 읽는다’의 차원을 넘어서, 어떤 구체적 ‘사람’을 읽는다는 느낌이어서 조심스럽달까요. 다른 장르의 글보다, 한 작가나 그의 세계관과 직접 대면한다는 부담이 있습니다. 언어적 구조물이라 하더라도 결국은 한 존재와 세계라는, 타자의 존재 자체에 대한 경외심 없이는 읽을 수 없는 작업이라는 생각도 들어서요.

 

김수이 제가 아까 미세먼지 얘기를 한 건 이제니 시집 때문인데, 역설적인 칭찬이에요. 이번 시집은 존재 속에 이미 포함된 죽음과 부재와 상실에 관한 이야기인데, 이 고전적인 주제를 써내는 방식이 매우 섬세해요. 굉장히 아프게 파고들어간 부분이 있어서 읽으면서 후련하기도 하고 고통스럽기도 했고요. 마치 그냥 떠다니는 먼지는 별거 아닌데 초미세먼지가 되어 우리 몸 안에 들어왔을 때 독이 되는 것 같은 그런 쓰라림이요. 존재의 허방 내지는 심연을 이렇게 깊이 포착할 수 있다는 게 놀라워요. 슬프고 고통스럽지만 즐겁게 읽었습니다.

 

하성란 어떤 계기로 최근에 「중국 새」(『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문학과지성사 2014)를 다시 읽게 되면서 제가 왜 이제니의 시를 좋아했는지 다시 확인했어요. “중국 새는 중국에서 오지 않았다고 했다/중국 새는 중국에 간 적이 없다고 했다”라는 대목이 굉장히 좋았어요. 화려하지만 어딘가 조악한 커다란 중국식 화병에 그려져 있는 상상의 새 같은, 날개를 커다랗게 펼친 중국 새의 이미지가 뚜렷하게 부각돼 좋았는데, 이번 시집도 그런 이미지들을 기대하고 읽었다가 조금 낭패를 보았지요.(웃음)

 

김수이 맞아요. 이번 시집은 이미지와 풍경이 눈에 그려지듯 선명하지는 않아요. 주로 자기 내면의 말들이고, 시집 제목처럼 ‘흘려 쓴 것들’이고, 알 수 없는 목소리들이고, 목소리와 목소리들의 불분명한 겹침이니까요. 어지러운 피로함이 충분히 이해돼요.

 

하성란 연작 ‘발화 연습 문장’은 대부분 시가 길어요. 한줄 한줄 따라 읽다보면, ‘시인의 말’에서 시인이 밝힌 “손을 하나 그리고/손을 하나 지우고” 그다음에 “눈을 하나 그리고/눈을 하나 지울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 것들을 아주 섬세하게 다시 이야기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소설 쓰는 입장에서는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쓴 소설을 읽는 듯했달까요. 마지막에는 그것이 흘려 쓴 문장이고, 꾹꾹 눌러쓴 문장이라는 것까지 가까스로 닿을 수 있었습니다.

 

김수이

김수이

김수이 굳이 비교하자면 앞서 얘기한 우다영 소설집이 산문인데 시적으로 끝난다면 이제니 시집은 매우 시적인 이야기를 산문적으로 풀어내요. 장황할 만큼 서술하고 묘사하죠. 피로를 느끼게도 하지만, 시적인 걸 이렇게 정교하고도 모호한 산문의 언어로 풀어낸다는 게 놀라워요. 글을 쓰다보면 어떤 느낌이나 생각이 문장을 쓰는 동안 증발해버릴 때가 있는데, 이제니는 순식간에 지나가버린 것들을 잡아다 되살리는 능력이 있어요.

 

하성란 네, 말씀대로 시를 읽다보면 뭔가 있었지만 없어졌다 다시 불러와 있는, 그런 것들이 반복되면서 어떤 궤적을 그리고 있다는 생각이 막연하게 들었어요.

 

김미정 저도 말씀하신 느낌들을 받았어요. 궤적은 궤적인데 ‘원’이나 ‘타원’ 같은 개념을 상정해 그리는 게 아니에요. 어떤 선들을 그리는데 결국은 원의 형태처럼, 타원의 형태처럼 보이게 하는 거죠. 또 이 작업은 반대로 굉장히 명료하게 놓여 있는 원이나 타원을 흐리게도 해요. 이번 시집에는 다른 예술 텍스트의 작법을 적극적으로 연상케 하는 시편들이 많았어요. 20세기 초에 활동한 독일 작가 호프만스탈(H. Hofmannsthal)의 「찬도스 경의 편지」라는 작품이 있는데요, 그 소설의 이미지 내지는 방법론이 이제니가 집요하게 질문하는 것과 통하는 부분이 있어요. 그 소설의 구절을 빌리자면 ‘말 못하는 사물의 언어’에 대한 집요한 천착 같은 게 이 시집에서 느껴집니다. 비칭과 존칭을 오가는 시들이 환기시키는 바도 그러했고요. 또 들뢰즈(G. Deleuze)가 까르띠에브레송(H. Cartier-Bresson)의 영화 장면을 ‘블록’을 연결시키는 방식에 비유하기도 하는데, 이 시집도 본래적인 의미에 따라서 블록을 조합하는 게 아니고 그 블록을 굉장히 자의적으로 조합하는 방식을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시편이 많았어요. 「처음의 양떼구름」이 대표적인 예일 것 같고요.

 

김수이 「나무는 잠든다」는 “나는 네가 더 이상 그곳에 있지 않다는 걸 안다”로 시작해서 “더 이상 그곳에 있지 않다는 것. 더 이상 그곳에 놓여 있지 않다는 것. 더 이상 그곳에서 말하지 않는다는 것” 등 비슷한 문장들이 반복되는데, 우리가 그냥 스쳐지나가는 짧은 생각이나 느낌을 다시 살아내게 하는 이제니의 미세한 감각이 무척 좋고 또 아팠어요. 너무 짧고 너무 낮고 너무 여린 것들이 우리 여기 이렇게 있었어, 그 연한 것들이 당신의 주변에 있었어,라고 말하며 불현듯 강렬하게 다가오는 순간은 우리 존재를 흔들어놓으니까요.

 

김미정 문학의 스펙트럼이라는 것이 백인백색 천인천색일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일찍 읽었다면 무척 좋아했을 것 같다는 생각도 했어요. 쉽게 해독되지 않거나 해독되지 않은 채 남는 것들에 대한 외경심 같은 것, 그러니까 내게 끝끝내 장악되지 않고 놓여 있는 것에 대한 일종의 대결감 혹은 행복한 열패감도 한편으로는 문학을 탐독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요소라는 생각을 해요. 제 과거의 독서체험과 관련되지만요.

 

김수이 맞아요. 해석될 필요가 없는 것, 애초에 해석될 수 없는 것, 그러나 각자 여린 기미 속에 이걸 도대체 어떻게 해야 되는 거지?라고 한번쯤은 질문해봤을 것들이죠. 시인은 그걸 확정해서 제시하는 게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는 이런 알 수 없는, 모호한, 끝내 해결될 수 없는,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 있는데, 이걸 시로 읽어보자고 하는 것 같아요. 언어로 최대한 얘기하면서 함께 나눠보자는 거죠. 위로처럼 느껴지기도 해요.

 

김미정 저는 이제니 시인이 이 시들을 통해 빨리 어딘가로 이동하려는 걸음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아닌가 생각했어요. 시들 속의 죽음의 이미지도 내가 계속 움직이고 있고, 살아 있고, 어딘가로 나아가려 한다는 걸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잖아요.

 

김수이 한순간도 움직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존재고 삶이잖아요. 한순간도 흔들리지 않을 수 없고 확정될 수 없는 것, 끊임없이 미세하게 균열되고 상실되는 것들을 보여주는 방식이 제겐 슬픔으로 다가왔어요. 가령 「발화 연습 문장: 두번째 밤이 닫히기 전에」에서 “한 사람이 한 사람으로 살아남는 일이 어찌하여 죽음을 무릅쓰는 일이 되어가는지 알 수 없습니다” 같은 통찰은 굉장히 날카로워요. 나란히 놓고 보기는 힘들지만, 앞서 다룬 우다영의 「밤의 징조와 연인들」의 결말이 밋밋하고 무리하게 다가온 것도 이 시집과 좀 관련이 있어요. 어쨌든 소설의 발화와 시의 발화가 많이 다르다는 걸 다시 확인하게 되네요.

 

하성란 시와 소설은 정말 다르다는 것을 이제니의 시를 통해 다시 깨닫게 되었고 시를 이해하려는 과정도 뜻깊었습니다. ‘발화 연습 문장’ 연작을 읽으면서 구체적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하지만 당연하게도 소설의 구체성과는 다르지요. 한 문장을 쓰고 한 문장을 지우고 다시 쓰는 일이 조금씩 내면으로 다가가려는 노력이라면 시를 따라 읽는 동안 저는 시의 화자를 따라 또다른 세계로 들어와 있다는 생각을 하는 한편, 밖의 소리가 하나도 들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창문이 없는 깊고 어두운 방 안이랄까요.

 

권민경 『베개는 얼마나 많은 꿈을 견뎌냈나요』(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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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정 권민경 시집에서 죽음과 관련된 느낌들이 정세랑 작가가 죽음을 다루는 방식과 본의 아니게 대비됐습니다. 정확한 사정은 모르겠지만, 이 시집을 읽으면서 시인이 투병하며 예감했을 죽음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구나 싶었어요. 그것이 그다지 슬프거나 무겁지 않게 전달되는데, 한편으로 그 이면의 진한 파토스가 자연스럽게 배어나오는 것도 왠지 숙연했고요.

 

하성란 그 이유가 자신의 고통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다른 이의 고통까지 되돌아보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종양에 맛」에서 잘 드러나는데요, 종양을 제거한 뒤로 고기를 먹을 때면 동물의 아픈 부위를 씹을까봐 조심스러워하게 되죠. 꼴을 먹는 소를 떠올리면 자신이 식물이 되어 소에게 아픈 부위를 씹히는 생각을 하게 되고요. 그 고통을 담담히 들여다보는 화자의 태도에 달관한 이의 활발함마저 느껴졌어요.

 

김미정 내 안의 혹을 떼어낸다는 건 사실 내 안의 이물감, 타자를 떼어낸다는 거잖아요. 내가 살기 위해서요. 나의 동일성을 유지하고 확인하기 위해, 즉 내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타자(혹)를 떼어내지만, 동시에 타자의 살을 먹어야만 사는 인간. 인간이 그런 존재라는 것을 담담하게 보여줍니다. 그런 인식들이 「종양의 맛」이나 「선지 요리 즐기기」에서 잘 드러나요. 궁극적으로 다른 존재에의 연민을 말하는데, 그런 연민이 선험적이지 않고 직접 몸을 경유하면서 나오는 과정들도 좋았고요.

 

하성란 「종양의 맛」에서 “한쪽 난소를 떼어낸 후”라는 구절을 읽으면서 시인의 투병에 대해 짐작했어요. 아이를 가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다가 「길(吉)」에서처럼 “삼십 년 후”의 미래를 그릴 수도 있게 되죠. 그렇다고 불안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에요. 언제든 느닷없이 닥칠 공포에 불안하면서도 시인은 그것을 이겨내려고 해요. 「그믐」에 나타난다고 생각했어요. “뒷면으로” 가는 것. 아무도 가지 않고 보지 않는 뒷면으로 가서, 그곳에서 그믐의 세계를 보려는 자세, 얼마나 자신의 고통과 직면했으면 이런 자세를 가질 수 있나, 뭉클해졌어요.

 

김수이 저는 시인의 암 투병 사실을 알고 있었는데, 큰 병을 앓으면서 얻은 삶과 죽음에 대한 통찰로 가득해요. 그런데 이 시집은 그런 선입견을 갖고 너무 경건한 마음으로 읽지 말라고 얘기해주는 것 같았어요. 「길(吉)」의 “내가 당신에게 바라는 것./큰 병에 걸리더라도 농담을 해주길./농담이 있으면 괜찮다”라는 대목을 보면, 고통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담담하고 성숙한 태도가 느껴져요. 병을 대하는 자세가 절제되어 있으면서 과하지 않고, 자기 고통을 명랑하게 윤색하지도 않아요. 병이 주는 불안을 의연하게 직시하고자 하죠. 이 시집에는 동물들에 관한 이야기가 많아요. 결국은 내가 하나의 동물이고, 코끼리나 개나 다를 바 없는 고깃덩어리임을 인정하면서 자신의 육체와 동물들에 대한 평등한 시선을 갖추어나가고 있어요.

 

김미정 「또, 내일」에서 “울음소리”를 “노랫소리”로 바꿔 얘기하는 것도 비슷한 태도 같아요. 점괘 얘기도 많이 나오잖아요. 우연성에 나를 의탁해야 하는 불안함이 아니라 일종의 의지의 낙관이 드러나는데, 그게 위화감 없이 전달돼요. 이 시의 마지막에 “도중에 어떤 괴물을 만났더라도, 지금은 기쁘다. 밤엔 잘 울지 않는다. 그럴 시간이 아니다”에서 ‘그럴 시간이 아니다’라는 대목이 특히 좋았어요. 생과 사의 간극이나 심연에 대해 경험하고 성찰했다는 게 어쩌면 이런 게 아닐까요. 자기연민에 빠져 있거나 고통을 어떻게 언어로 형상화할지는 부차적이죠. 살아 있는 누구든 지금 바로 이곳의 생 자체에 더 치열해야 한다는 인식은 중요하고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하성란 「귀여운 육손이」에서도 그런 태도가 잘 드러나는 것 같아요. ‘육손’은 어떻게 보면 여분의 삶인데, 안타깝게도 잉여의 손가락은 피아노 건반을 잘못 건드려 “잡음을 만들어내”기도 해요. 이 시에서 육손이 다정하게 그려지는 게 새로웠어요. 아까 이야기한 우다영의 소설에도 이삿짐을 날라주는 트럭 운전사의 손가락이 여섯개였다고 나오는데, 거기선 뭔가 불길한 전조로 나왔던 걸 떠올려보면 작가마다 시선이 참 다르네요. 시집에 ‘절단’이라는 표현과 이미지가 자주 나오는데, 어떤 의미로 읽어야 할지 어려웠어요.

 

김수이 절단의 이미지와 연결될지 모르겠는데 「펀치 드렁크」의 “나는 항상 아기가 무섭다. 내가 만지면 부서져버릴 거 같아서” 같은 표현은 병든 육체를 지닌 사람의 불행한 감각인 거죠. 「저주 후의 문진」에서 “기나긴 욕 속에 예언합니다” 같은 문장은, 아, 이건 정말 감당하기 힘든 고통과 불안을 끝내 극복한, 극복하고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얘기겠다 싶어요. 「오늘의 운세」는 “나는 어제까지 살아 있는 사람/오늘부터 삶이 시작되었다”로 시작해 “오늘부터 삶이 시작되었다/점괘엔/나는 어제까지 죽어 있는 사람”으로 끝나는데, 가슴을 치는 구절이었어요.

 

김미정 「오늘의 운세」나 「플라나리아 순간」을 보면 순간순간의 죽음들이 슬픔과 절망의 죽음이 아니고 계속 살아 있음을 증거하는 방식으로 소용되고 있는데, 이건 이제니 시집에서도 비슷하게 느꼈어요. 죽음을 통상적 이미지에서 탈구시키는 방식들은 삶에 대한 긍정을 다양하게 생각하게 한달까요.

 

하성란 앞서 말한 이제니 시집 ‘시인의 말’ 중 “손을 하나 그리고/손을 하나 지우고” “눈을 하나 그리고/눈을 하나 지울 수 있게 되었다”의 다른 버전 같은 느낌도 들었어요. ‘손’이나 ‘눈’을 ‘죽음’으로 바꾸면요. 오늘도 죽었지만 다시 살아나서 또다시 죽을 수 있는 거죠. 꾹꾹 눌러쓰듯이. 「이름 부르기」에서 세월호참사로 희생된 아이들의 명단 중 자신과 이름이 같은 아이의 이름을 불러주면서, 죽은 아이와는 다르지만 죽을지도 모르는 자신의 이름을 호명하는 부분은 읽을 때마다 마음이 아팠어요.

 

김수이 「플라나리아 순간」의 “몸이 잘리는 기쁨과 멀쩡히 살아날 거라는 실망 사이”에서 이 ‘실망’이 역설적인 표현을 겸하는 것 같아요. 암수술로 내 육체 일부분이 절단돼 본의 아니게 새로운 육체를 갖게 되고, 예전과는 다른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는 거죠. 수동적인 상황인데, 거기서 뿜어나오는 역설적인 에너지가 있어요. 실망을 희망과 낙관으로 바꾸는 중이라고 할까요.

 

김사이 『나는 아무것도 안하고 있다고 한다』(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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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성란 제가 감히 용기가 없어서 말하지 못했던 부분을 김사이 시인이 이번 시집에서 얘기해주었어요. 강남역 살인사건을 다룬 「균열」이라는 시인데요, 사실 이런 생각을 해보긴 했지만 입 밖에 내지는 못했었거든요. 제 속의 허위가 까발려지는 듯했어요.

 

김미정 「균열」과 「아무도 없었다」를 같이 읽을 때 얘기할 것이 많겠다 싶어요. 쉽게 얘기하기 어렵지만 지금 시대의 복잡성을 함축하는 지점들 같기도 하고요. 「균열」에서 가리봉동이나 원곡동이 아닌 “강남 한복판에서 바람에 불이 붙”은 것에 대한 묘사는 한국사회에 지리적·계급적·세대적·계층적 격차뿐 아니라 이전 시대의 가치나 전선으로 환원될 수 없는 모순들도 분명 존재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두 시는, 이 세계의 모순을 담지하는 다양한 요소들을 시야에 두지 않고 어느 하나만의 문제를 전면화할 때 놓치는 지점들을 과감히 문제제기한 것 같아요. 단일한 정체성과 의제로 이 세계의 문제가 환원될 수 있을까에 대한 질문까지 읽을 수 있었고요. 이 질문의 문제의식 자체에는 전적으로 동의하는데, 한편으로 그 맥락을 섬세하게 짚어봐야 한다고도 생각합니다.

 

김수이 가리봉동에서는 강남역을 이야기하는데 강남역에서는 가리봉동에 관심을 두지 않는 지금의 현실이 이 시집이 강조하는 비극의 핵심이죠. 노동의 문제만이 아니라, 말씀처럼 자본, 여성, 난민, 테러 등 많은 얘기를 해요. 살기 위한 노력이 폭력을 당하는 이유가 되는 끔찍한 현실은 공감과 연대의 선마저도 다시 분할하는데, 이 시집은 그 분할을 지우려는 이가 가장 소외된 노동자라는 아이러니한 현실을 보여줍니다. 아까 정세랑의 소설이 의미론적인 차원에서 죽어 있는 채로 살아가는 이 시대의 인간들을 얘기했다면, 이 시집은 생계의 차원에서 살기 위해 계속 죽음을 감수해야 하는 사람들, 그러나 부당하게도 갈수록 공감과 연대를 잃어가는 사람들을 이야기하죠. 「보통 날들」의 “뚱뚱하고 못생긴 게 말이 많아 몸뚱이는 자본에게 추행당하고 마음은 노동에게 희롱당하면서 반백의 중년이 되었어도 달라진 것 없는 (…) 보통 날들”이라는 구절은 노동이 더이상 신성하지 않고 오히려 나를 희롱하는, 정말 마지막 지점까지 내몰린 노동자, 특히 여성 노동자가 겪는 고뇌와 고통을 생생하게 그려냅니다.

 

김미정

김미정

김미정 여성의 노동이라는 제재는 지금 각별히 의미있다고 생각합니다. 노동에 대한 오랜 담론의 역사는 말하자면 임노동, 정규직, 남성에 대한 것이었잖아요.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던 노동의 조건들이 이렇게 문학적으로 환기되는 지점들은 굉장히 소중한 것 같습니다.

 

김수이 「다시 반성을 하면」에는 너무나 가슴 아픈 얘기가 나와요. “더불어 살자를 죽이면서 너도 죽이면서 숨을 쉰다”. 노동자는 이제 각개격파하면서, 내가 살아남기 위해 너를 죽일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우리의 현실이 이렇게까지 몰린 거죠.

 

하성란 「탈 탈」이라는 시에 구로디지털단지역 얘기가 나오는데, 구로공단역이 구로디지털단지역으로 이름이 바뀌면서 개인적으로 구로공단 앞을 지날 때마다 느꼈던 가벼운 감상들이 떠올라 부끄럽기도 했어요. 자신들의 한때를 바친 노동의 현장이 그럴싸한 이름으로 포장되고 그 노동 또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게 되었다는 슬픔이 묵직하게 다가왔어요. 그러면서도 이 사회의 경박성이 잘 드러났다고 생각되었고요.

 

김미정 “성장통이 담긴 내 청춘의 시들이/정처가 없어 헤맨다”는 부분에서 다소 후일담의 정서, 젊은 시절 치열했던 삶에 대한 낭만화된 정서가 느껴지기도 하는데요, 세련되게 버전업한 자본주의에 가려진 오늘날 노동의 문제와 젊은 시절 화자의 노동에 대한 기억 사이에 여전히 정리되지 않는 지점이 있는 것 같아요. 방금 후일담의 정서라고 거칠게 말하긴 했지만, 사실 그건 한 개인의 차원으로 이야기할 것은 아닐 거예요.

 

김수이 노동과 노동자의 이름이 지워지는 시대에 가장 가파른 삶의 전선에 선 노동자가 어쩔 수 없이 자본주의에 녹아들어가는 상황이 참담하기 그지없어요. 여전히 구로공단에서 일하는 노동자는 어떤 노동시를 써야 하는지의 문제도 간단치는 않습니다. 과거의 투쟁적이고 서슬 퍼런 시는 더이상 읽히지 않으니까요.

 

김미정 「성실한 앨리스」 같은 시가 도식적이고 쉽게 보여주는 느낌이 있는데, 의도된 것 같아요. 앨리스는 계급, 젠더, 인종, 연령 같은 요소들이 가로지르는 존재예요. 하지만 그 정체성들에 순서를 매기지 않고, 그 중첩들이 만들어내는 모순의 농도를 통해 앨리스를 보여줍니다.

 

하성란 “사랑 없는 섹스 같은 앨리스의 노동”이라는 구절 하나로도 생생하게 다가오는 게 있어요. 이런 노동이 더 나아가서는 「나를 사주실래요?」로 연결되는 게 아닌가 싶었어요. 노동력 착취와 그 대물림이 인간만이 아니라 원숭이들의 세계에서도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 정말 끔찍하게 다가옵니다.

 

김수이 노동의 고통을 얘기하는 것이 불편하고 금기가 돼버린 이상한 시대에 시를 쓰는, 노동하는 시인의 고민이 곳곳에 묻어 있어요.

 

김미정 「공포 영화」 같은 시도 낯설지 않은 화법으로 “위태로운 내 밥그릇 슬그머니 움켜”쥐어야 하는 공포를 말해요. 비극으로 내몰린 삶에서는 선택을 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아예 선택지 자체가 없는 것에 대한 공포나 불안이 크죠. 아는 것과 생각하는 것을 의지대로 선택할 수 없게 만드는 그런 세계에 대한 공포요.

 

하성란 이런 메시지가 앞에서 이야기한 시들처럼 쓰일 수 있을까, 만약 쓰인다면 어떻게 받아들여질까,라는 생각도 해보았어요.

 

김수이 가슴 아픈 진실은 빨리 잊고 외면하고 싶잖아요. 노동시가 과거처럼 많이 읽히지 않는 이유일 듯해요. 현재 노동자가 처한 현실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시 「내 죄는 무엇일까」에서, “네가 죽어도 일을 해야 해서/누가 죽어도 나는 살아야 해서/(…)/지금 살아야 해서 촛불을 들 수 없는/나는 아무것도 안하고 있다”는 고백이 무척이나 아프게 다가옵니다. 이런 시를 읽고 느끼는 불편함이 우리가 현실을 제대로 보려고 노력하는 계기가 되기를 빕니다.

 

김미정 저도 「내 죄는 무엇일까」를 보면서 이 시에서 미적인 완결성을 이야기하는 것이 무엇을 위한 것일까 생각했습니다. 미적인 것, 완결성이라는 것, 그리고 그게 규정될 수 있다는 믿음은 다른 층위의 얘기 같아요. 이 시들의 미덕을 포기하면서 얻는 미적 개념과 방법들이 포기된 미덕만큼의 힘을 발휘할지는 의문입니다.

 

김수이 어느덧 오늘 자리를 마무리할 때가 되었는데, 모두 여섯 작품, 총 일곱권의 소설과 시를 읽었습니다. 여섯 과목의 시험을 치르는 학생의 심정으로 시작했는데, 두분과 함께하다보니 어느새 즐거운 수다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우리 문학의 팽팽한 탄력과 생명력을 새삼 확인하면서 뿌듯해지는 시간이기도 했고요.

 

김미정 생각도 정리되고, 혼자 읽을 때 보지 못한 것들이 하나둘씩 시야에 들어온 시간이었습니다. 두분 덕택입니다.

 

하성란 두분의 개성있는 시선에서 많이 배웠습니다. 한동안 오늘 읽은 소설과 시의 수많은 화자들의 목소리가 뒤섞인 채로 떠나지 않을 텐데요, 그 시간도 즐겁게 보내겠습니다. 감사드립니다. (2019.1.23. 창비서교빌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