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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이동기 『현대사 몽타주』, 돌베개 2018

어떤 역사도 필연적이지 않다는 것

 

 

김득중 金得中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 alliga65@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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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몽타주: 발견과 전복의 역사』는 서양현대사 전공자인 이동기 교수가 2014년부터 약 2년간 『한겨레21』에 ‘이동기의 현대사 스틸컷’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 글을 모은 것이다. 저널 글쓰기는 수십년간 이루어온 연구의 결과를 깊이 짜내는 일이다. 논문보다 저널에 글쓰는 것이 더 어려운 주된 이유는 학계에서 유통되던 방식을 넘어 역사적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쉽게 접근하도록 설득력 있는 새로운 글쓰기 형식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저널이라는 매우 짧은 글 형식 때문에 현대사 ‘몽타주’(montage)라 이름 붙였겠지만, 이 책의 모든 글은 서로 긴밀하게 연관되고 하나의 주제로 수렴된다. 이 책은 1부에서 3부까지 전쟁, 폭력 그리고 혁명을 주제로 서유럽 현대사의 사건과 인물을 다룬 다음, 4부 ‘대안과 전망’과 5부 ‘기억과 전승’이 상호 연관되는 구조로 짜여 있다. 전쟁·폭력을 넘어 사회를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고자 했던 ‘평화’와 ‘혁명’에서는 남성 제국주의자와 새로운 세계를 꿈꾸었던 각국의 여성들, 그리고 민주사회주의자들의 궤적을 들려준다. 독자들은 이런 다양한 변주 속에서 희미하지만 새로운 희망의 등불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현대사 몽타주』를 한마디로 말하자면, 20세기 현대사에 대한 성찰이다. 성찰이 ‘비판적’(kritisch)이려면, 사실이 잘못되었다는 지적을 뛰어넘어 본질적 반성에 이르러야 하는 법이다. 영국의 역사학자 홉스봄(E. Hobsbawm)이 말하고 많은 역사학자들이 동의했던 것처럼, 인류는 20세기에 ‘전쟁’과 ‘학살’ 그리고 ‘폭력’을 여러번 경험했다. 우리(인류)는 계몽주의 이래 수백년간 발전했다고 자부하던 이성적 문명이 왜 이런 엄청난 자해와 비인간성을 경험해야 했는지를 스스로에게 물어봐야만 한다. 우리는 제대로 물어보았는가? 그리고 이런 질문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른 사람들과 공유했는가? 파시즘과 전쟁, 폭력을 혹시 지난날 벌어졌던 하나의 사건으로만 기억하고, 이제는 다시 벌어지지 않을 일회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있지는 않았는가?

저자는 이 질문을 서유럽 역사에 던지고 있다. 하지만 서유럽 ‘지역’에만 한정하지 않는다. 비록 시공간이 다르다 할지라도 유사한 것이 있다. 독일군의 “강제 매춘”(139면)과 성노예에 대한 글은 조선 위안부를 생각하게 하고, 독일 나치가 저지른 홀로코스트는 한국전쟁 전후에 벌어졌던 남한의 민간인 학살이라는 맥락에 닿아 있다.

역사적 맥락에서 공통성을 지닌다는 지적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유럽의 1968년 운동이 1950~60년대 제3세계 혁명투쟁과 저항운동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지적은 서양 중심의 사고방식에 경종을 울린다. 이런 의미에서 저자가 높게 평가한 서독 정치인 브란트(W. Brandt)의 ‘여러분의 힘을 자각하세요!’라는 말은 비유럽 세계 인민에게 들려줄 말이 될 것이다.

『현대사 몽타주』는 관습화되어 익숙해진 역사적 사실과 평가를 순순히 수용하지 않는다. 2차대전 후 세계 각지에서는 독립국가 수립이 이어졌다. 제3세계 민족 해방이 도래했다고 주류 역사학은 평가하지만 이 책은 알제리와 독일에서 전쟁의 종결은 평화가 아닌 학살의 시작과 강간의 아수라장이었다는 점을 일깨워준다. 2차대전에 승전한 연합군의 역사 해석이라고 할 수 있는 ‘해방자 신화’에 대한 근본적 문제제기는 한국에도 해당된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1945년 해방은 미·소 양군의 점령으로 시작되었고, 분단과 전쟁으로 곧바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잘 안다고 생각했던 아이히만(A. Eichmann) 이야기는 우리의 통념을 뒤집는다. 유대인 수백만명을 이송한 책임자인 아이히만은 아르헨띠나에서 체포되어 이스라엘에서 재판을 받았다. 이 재판을 방청했던 철학자 아렌트(H. Arendt)는 아이히만이 관료제적 타성에 젖은 ‘거대한 기계의 톱니바퀴’에 불과했다고 판단했다. 아이히만 재판은 아렌트가 ‘악의 평범성’이라는 유명한 개념을 탄생시킨 계기였다. 그런데 저자는 아렌트의 개념적 판단과는 달리, 아이히만이 시종일관 의식적인 능동적 가해자였고 아이히만의 연기에 아렌트가 속았다는 점을 알려준다.

개인의 주체적 판단과 활동에 대한 주목은 사실 이 책을 꿰뚫는 주요한 주제이기도 하다. 인류를 포화 속에 헤매게 했던 1, 2차대전의 원인에 대한 연구는 이루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고, 많은 사람들이 전쟁이 일어나게 된 구조적·필연적 원인에 주목해왔다. 하지만 『현대사 몽타주』는 최근 연구를 디딤돌 삼아 구조나 상황의 필연성을 강조하기보다는 다양한 역사 행위자들의 움직임과 결정을 훨씬 더 중요하게 여긴다. 저자는 책의 서문에서 구조적 분석에 치중한 역사학자 카(E. H. Carr)보다 소설가 오웰(G. Orwell)을 훨씬 더 높이 평가하면서 자신의 시각을 밝혔는데, 이러한 관점은 다른 역사적 사건에 대한 평가에서도 드러난다. 기존의 홀로코스트 연구들은 집단학살이 가능해진 이유를 관료제를 갖춘 근대국가 시스템에서 찾았지만, 저자는 가해자가 다양한 능동적 활동을 통해 형성되는 과정에 더 주목한다. 그래서 “근대국가 체제가 문제가 아니라, 국가 규율의 정지가 대량학살의 근원”(134면)이라거나, 1차대전이 “각국의 권력자들이 보여준 상황인식의 실패와 조정능력의 부족”(36면) 때문이라거나, 냉전의 근본 원인이 “공포와 오해의 악순환”(203면)이라는 주장도 나오게 된다. 이는 기존 연구를 완전히 전복시키고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는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구조와 인간 활동의 대립은 오랜 역사 철학의 문제이기 때문에 다양한 비판이 뒤따를 것이고, 명쾌한 해답은 아마 나오기 힘들 것이다. 다만 여기서 확인해두고 싶은 것은 저자가 ‘구조’보다 ‘인간 활동’에, 필연성보다 우발성에 더 주목하는 이유이다. 이는 구조적 요인에 대한 강조가 전쟁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주장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주체의 활동으로부터 더 나은 사회 형성의 가능성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구조의 필연성만 강조하다보면,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사고가 봉쇄되어버린다. 개별 인간의 경험과 고통, 불안, 분노를 이해해야 한다는 저자의 말은 역사학이 왜 인문학의 본령이 될 수밖에 없으며 또 되어야 하는지를 웅변해준다. 삶의 결을 꼼꼼히 살펴보지 않고 삶의 복합성과 모순을 이해하지 못하는 역사학이 어찌 인문학이 될 수 있겠는가?

이 책은 우리가 알지 못했던, 또는 잘 안다고 여겼던 사건들을 다른 시각에서 살펴볼 여지를 제공해준다. 한국사 연구자인 나에게도 시공간을 연결시키는 눈을 뜨게 해주었다. 다른 시각을 제공하는 것과 더불어 『현대사 몽타주』의 가장 큰 장점은 폭력과 전쟁의 과거사를 어쩌다 악인에 의해 발생한 불행한 해프닝이라거나 비극적 역사라고 반복해 읊조리는 것을 뛰어넘어, 이 문제를 현대사 연구가 직면해야 하는 중요하고 긴급한 이론적 과제로 본다는 점일 것이다. 지금까지 누구도 이 문제를 정면으로 응시하지 못했다. 역사의 주변부로 치부되었던 문제를 우리가 고민해야 할 중심으로 가져다놓은 성과만으로도 이 책은 읽을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