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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김경식 『루카치의 길』, 산지니 2018

루카치의 길, 본연의 맑스주의로 가는 길!

 

 

정성철 鄭盛喆

서울대 미학과 강사 citta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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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말 이후의 30여년은 자본주의가 인간의 얼굴을 하는 데 한계가 있음이 뚜렷해졌음에도 맑스주의는 오히려 쇠잔해진 시기였다.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과 새로운 사회운동의 부상 앞에서 맑스주의가 시원하고 제대로 된 이야기를 할 수 없었던 탓이 클 것이다. 저명한 주류 경제학자들이 앞다투어 자본주의의 미래를 걱정하는 글들을 내놓기 시작할 만큼 자본주의의 불안정이 심화된 지난 10여년 동안에야 비로소 ‘맑스’(K. Marx)가 학계 내에서만이 아니라 그 밖에서도 다시 울려 퍼지기 시작했는데, 한국은 잠잠한 편이다. 이런 시점에서 『역사와 계급의식』(Geschichte und Klassenbewusstsein, 한국어판 지만지 2015) 한권만으로도 맑스주의의 역사와 20세기 지성사에서 한자리를 차지할 루카치(G. Lukács)에 대해 ‘업데이트’ 되고 더 ‘온전해진’ 이해가 담겨 있는 책 『루카치의 길: 문제적 개인에서 공산주의자로』가 오랜 세월 루카치를 옮기고 알리고 읽는 데 진력해온 이에 의해 집필, 출간된 것은 더할 나위 없이 반가운 일이다.

루카치의 삶의 역정 및 주요 저작의 윤곽을 조근조근 이야기해주고 한국에서 루카치가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를 알려주는 첫 두장에서는 루카치에 대한 저자의 애착과 한국에서의 루카치 수용에 대한 저자의 실망 사이의 거리가 부각된다. 더 자유로운 곳을 마다하고 개혁의 희망을 끝내 버리지 않은 채 현실 사회주의와 결속된, 학자 이상의 실천적 삶을 살았고 남성 중심적 사회에서 잘난 남자들이 흔히 갖기 쉬운 권위적이고 ‘나쁜 남자’적인 면모 따위는 전혀 찾아볼 수 없으며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맑스에 충실하기’를 모토로 해서 맑스주의를 더 깊고 넓게 사유해온 이에 대한 애착을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다. 물론 한국이 아직까지도 맑스 전집이 출간되지 않았는데도 이런저런 포스트 담론들이 유행하는 나라라는 사실을 두고 볼 때 루카치가 한국에서 받고 있는 대접이 그리 이상하지는 않다.

3장은 리얼리즘론과 더불어 그나마 한국에서 가장 인기를 누렸던, 맑스주의자가 되기 전의 루카치를 대표하는 『소설의 이론』(Die Theorie Des Romans, 한국어판 문예출판사 2007)에 할애되어 있다. 독자들은 『소설의 이론』이 어떤 의미에서 역사철학적인지, 그 저작에서 헤겔적인 요소는 무엇이고 헤겔과 갈라지는 지점은 무엇인지, 맑스주의로 선회한 이후의 루카치가 그 저작에서 어떤 한계를 보는지 등을 일목요연하게 알게 된다. 헤겔과 맑스 사이에는 역사를 모순에 찬, 그리고 그 모순을 통해 발전해가는 과정으로 본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하지만 이 시기의 루카치는 당대의 세계가 발전의 과정이 아니라 “죄업이 완성”(106면)되는 몰락의 과정에 있다고 보고 그 과정 자체에 새로운 세계를 출현하게 하는 동력이 내재해 있을 가능성을 살피지 않은 채 새로운 세계를 갈구했다는 점에서 헤겔과 달랐고, 그런 한에서 맑스주의적이지 못했다.

4장은 개인들로부터 더 주체적이고 소질과 능력이 더 온전하고 조화롭게 펼쳐져 있고 더 개성적인 삶의 전망을 닫아버리는 자본주의사회와 그런 삶에 대한 “인간의 근원적 욕구”(146면)를 동력으로 하는 예술 사이의 대립이 루카치 미학의 기본 구도임을 알려준다. 이 대립은 아주 명백한데, 그래서 자본주의사회의 예술 적대성에 대한 루카치의 주장은 살짝 과한 느낌을 준다. 자본주의사회에서야 예술가들은 역사상 처음으로 후원과 검열과 주문의 구속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창작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자본주의만 놓고 보자면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예술가를 편협하고 주관적인 전문가가 되게 하는 압력이 더 커진다는 루카치의 인식은 타당하다. 지배 이데올로기적 봉쇄에는 항상 틈이 있기에 그 틈을 통해 봉쇄를 뚫고 나갈 것인지 여부는 상당 부분 작가 개인에 달려 있다는 주장 또한 그렇다.

루카치의 리얼리즘론을 『미적인 것의 고유성』(Die Eigenart des Ästhetischen)의 맥락에서 다루는 4장의 나머지 절들은 평자의 기대에 조금 못 미쳤다. 리얼리즘이 후기 루카치에게도 훌륭한 예술작품의 필요조건이라면, 그리고 후기 루카치의 리얼리즘론도 여전히 ‘어떤 모더니즘 작품들이 우리 시대에 맞는 리얼리즘 작품들이다’라는 취지의 아도르노(Th. W. Adorno)의 주장을 승인할 수 없는 리얼리즘론이라면, 『미적인 것의 고유성』은 마땅히 그처럼 완고한 리얼리즘론을 뒷받침하는 미학적 논변을 제공했어야 할 것인데, 저자의 설명으로는 별로 그러지 못한 것 같다. 어쩌면 평자가 느낀 미진함은 ‘전지적’인 작가와 ‘온전히’ 훌륭한 작품을 요구하는 듯한 루카치 미학 자체의 과도한 규범성을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다. 의식을 제한하는 이런저런 지배이데올로기적 기제들로 가득한 세계에서 그런 요구는 실현 불가능한 이상이 아닐까.

5장에서는 존재를 복잡성의 수준에 따라 무기적 자연, 유기적 자연, 사회라는 세가지 존재형식으로 구분하고 역사성과 복합체성이 세가지 존재형식을 관통하는 보편적인 원리임을 주장하는 것을 골격으로 하는 후기 루카치의 맑스주의 존재론이 소개된다. 그 소개대로라면 그 존재론이 담긴 저작들은 주제의 포괄성, 논변의 심오함, 구성의 체계성 면에서 『역사와 계급의식』을 뛰어넘는다. 자연이 사회적 존재의 근거이자 전제로서 시야에 들어오고, 노동이 인간이 자연적 존재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사회적 존재로 비약하고 계속해서 사회적 존재로 살아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하고 있는 것으로, 모든 사회적 실천들의 원형으로 다뤄지며, 사회의 역사적 변화가 선택의 여지 없이 결정되어 있지도 않고 그렇다고 인간 주체들의 기획대로 진행되지도 않는 인과적이고 합법칙적인 과정으로 그려진다. 한마디로 그 존재론은 1980년대 이래 30여년간 많은 좌파 식자들 사이에서 관심이 시들해지고 심지어는 비난까지 당했던 맑스주의적 ‘빅 히스토리’이자 ‘거대서사’이고 ‘총체화하는 이론’이다. 이를테면 독자들은 루카치의 존재론 저작들에서 노동을 도구적 합리성의 영역에 귀속시켜 노동과 소통적 합리성을 따로 떼어놓는 하버마스(J. Habermas)식의 이론화 작업과는 극명하게 대조되는 변증법적이고 구체적인 사유를 만날 수 있다.

루카치가 논하는 존재의 두 보편적 원리 중 맑스주의 존재론에 더 결정적인 것은 복합체성인 듯하다. 자연이 인간이라는 사회적 존재의 역사적 운동에 휘말려 막대한 변형을 겪어왔다는 사실은 “자유로운 사회에서 자유로운 인간들에 의한 자연지배”(149면) 운운하는 루카치에게는 아직 보이지 않는 듯한 ‘인류세(人類世)’라는 문제의식을 당연한 것이 되게는 해도 자연도 역사성을 본질로 한다는 이해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 역사성을 인간의 사회적 존재에만 국한한다고 해서 인간이 자연적 존재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생기지도 않는다. 한편 모든 존재들을 복합체로 보는 것은 두가지 면에서 맑스주의 존재론에 적실하다. 하나는 복합체를 구성하는 요소 복합체들에 대한 전체 복합체의 “존재론적 우선성”(210면)을 함축한다는 것이다. 사회의 경우라면 사회를 구성하는 제도, 기구, 그리고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개인에 대해 하나의 전체로서의 사회가 존재론적으로 우선한다는 것이다. 이런 얘기는 물론 그 자체로는 사회주의를 정당화하지 않으며 전체주의를 옹호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사회라는 것에 개인들과 ‘작은 사회들’—맑스가 ‘인간은 사회적 관계들의 앙상블이다’라고 했을 때의 그 관계들—의 운신, 생각, 느낌의 폭을 제한하는 구조적 속성이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사회를 구성하는 요소 복합체들의 “존재론적 이질성”(258면)에 즉해서 각 요소 복합체들의 불균등 발전을 설명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저자 자신이 『정치경제학비판 강요』(Grundrisse der Kritik der politischen Ökonomie) 서설에서 맑스가 제기한 경제적 토대와 예술의 불균등 발전 문제를 그렇게 설명하고 있다. 예술과 경제는 서로 다른 것이기에 경제의 발전이 곧바로 예술의 발전을 함축할 리는 없다. 이를테면 혁신적 모더니즘 예술운동이 가장 활발했던 곳은 자본주의가 먼저 발전하고 가장 발전해 있었던 영국이 아니었다.

향후 몇십년 사이 루카치는 맑스주의가 다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고 그 목소리가 다시 사그라들지 않을 것 같은 우리 시대의 가장 살아 있는 맑스주의자 가운데 한명으로 다시 출현할 것이다. 한국에서는 저자가 지금까지 루카치를 붙들고 해온 작업들의 성과물들, 특히 이 책이 그렇게 되는 데 최초의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될 것이다. 맑스에 관심이 있는 이들이라면 루카치도 읽어야 할 것이고, 루카치를 읽고자 하는 이들은 이 책부터 읽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