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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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덕 金姸德

한국예술종합학교 서사창작과 2학년. 1995년생.

elfy95@naver.com

 

 

 

재와 사랑의 미래

 

 

우리는 나란히 누워 천장에 길게 난 유리를, 그 위로 일렁이는 나무 그림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손을 잡고 눈을 감고 반쯤 잠들어, 그간의 어떤 오후보다 사이가 좋게.

스스로 망가뜨린 기억도 잊을 수 있게.

 

나는 고개를 돌려 네가 움켜쥔 이불을 보고. 늘어나는 구석을 그대로 둔다. 네가 싸우는 싸움을 다 알 수는 없다.

 

가루가 날린다. 바닥이 기운다. 마른 잎이 하나씩 바스러진다.

 

굳게 잠긴 문고리를 흔드는 바람. 깨우는 사람도 없는데 숲이 환하다.

 

정했던 마음은 왜 실내에서 금방 녹을까. 지속되는 운동은 왜 밖에 있을까. 되뇔수록 어제들은 가벼워진다.

 

완전한 암흑에서만 떠다니는 먼지가 있어. 꼬리가 타야 단단해지는 대기가 있어. 너는 휴지를 뭉쳐 운석들 간의 충돌을 설명하고. 나는 태아처럼 웅크린 채 그걸 듣는다. 일어난 적 없는 일이 서서히 부풀다 빛에 싸여 부식되는 순간을 본다.

 

뒤척여도 같은 색을 띠는 얼굴들.

 

부서지는 온도를 짐작하지 못한다.

 

가까스로 낮과 밤을 구분할 수 있을 때

가지런한 사물들은 어두워지고.

이 끝에서 저 끝까지 걸어보다가 선반과 벽 사이에서 번지게 된다.

 

만져보기 전에 모두 스미게 된다.

 

눈을 뜨면 가지보다 낮아진 하늘. 어떤 균열도 소리도 없이 창이 깨진다.

 

맞잡은 손 바깥으로 잎이 모인다.

 

대폭발은 책에서나 보던 단어라 종말이란 말도 그저 농담 같구나.

 

 

 

솟는 이마. 열리는 문. 흐르는 햇살. 지나간 이들의 이름을 부르는 너의 옆에서 여전하게 자라나는 손톱을 본다.

 

함께 보낸 시절들을 돌이켜본다.

 

숨과 숨을 비껴가는 투명한 고리. 걸어볼 수 있을 만큼 둥글고 크다.

함께 만든 먼지가 달라붙는다.

 

생명은 가끔 끔찍하고 거짓말 같아. 나부끼는 옷깃에도 티브이에도 희망에도 유리에 베인 살갗에도 깃들어 있다.

“수고했어, 처음부터 기다리느라……” 미안해하는 너에게도 남아 있는 것.

 

무감과 무연은 하나로 연결돼 있다. 예감할 수 없는 빛 속에서 나는 웃는다.

 

마지막은 왜 드라마 같은 느낌을 줄까.

정리될 의지는 누구부터 가지는 걸까.

 

창틀처럼 딱딱하고 무표정한 시간이 우리의 마음을 관통해 지나가고 있다.

어디로 갈지 모르는 방과 입술들. 그대로 두면 튀어오르는 몇마디 말들.

 

좋은 것만 떠오르는 하루가 있지. 어제의 수치도 배경처럼 느껴지는 오후가 있다. 그런 날엔 할 말부터 잃어버리지. 쓰레기통에 가득 찬 운석을 들여다보며 이곳은 참 좁구나 생각하다가. 내가 버린 것을 꺼내 펼치고 나면, 내일이 또 올 것처럼 휴지를 산다. 동그랗게 뭉친 말을 굴려도 본다.

 

해가 지면 멀어지는 것들이 있다. 손대지 않아도 갈라지는 구름이 있다.

 

고리가 다 끊어지면 무엇을 할까. 국수를 넣고 멸칫국물을 마시고 싶다. 투명해지는 얼굴을 감추고 싶다.

 

방치할수록 조금씩 커지는 감정.

 

돌아누워도 움직이는 등을 안는다.

 

 

 

세계의 끝은 나뭇가지로 설명하기 어렵다. 점으로도 선으로도 같이 꾸는 꿈으로도. 물이 끓는 시간처럼 정해진 게 아니다.

 

불붙은 가지 위로 박히는 조각.

 

국수를 삶다 한줌을 더 넣어본다. 부족하진 않지만 남기고 싶어. 냄비가 넘쳐흐른대도 만들고 싶다. 완성되는 맛은 낭비. 그리고 온기.

 

남은 빛은 티브이에서 보도해준다. 커다란 집에 모여 있는 사람들이 나온다.

밀치기 전에 머뭇대는 손발이 작다.

 

창백한 기도는 서로의 이름을 무너뜨리고, 고요를 다른 고요로 덮어버리고.

 

붇지 않는 국수가 희고 가늘다.

 

죽어서도 손톱은 자란다는데

먼저 멎는 손톱이 부러워진다.

 

 

 

천문대에 오른 적이 한번 있었지. 인파를 헤치고 계단에 올라 렌즈를 돌려, 아름다운 유성이 슥 지나갈 때.

 

불분명한 미래만이 전부였을 때.

 

너는 어깨를 흔들며 소원 대신 끝을 물었다. 여기 지구보다 거대한 돌이 떨어져, 한순간에 사라지면 어쩔 거냐고. 이게 다 예정되어 있다면 넌 뭘 할 거냐고.

 

미리 겪은 사람처럼 서 있는 네가 망원경을 만지다가 허공을 본다. 눈물을 닦고 고개를 털고 부은 눈을 깜빡이다 담배를 피우고. 무언가를 꾹 참는 듯 입을 다문다. 타지 않은 몸이 되어 떠다니는 운석들.

 

지표면의 중심에서 흩어지는 유리들.

 

우리를 이끈 어두움은 어디서 왔나.

 

흩어지는 입김이 숲을 만든다.

 

그럼 나는 별장에서 나무 볼 거야. 들어가서 하루 종일 안 나올 거야. 슬픈지 지루한지 갑자기 막 화나는지 옆에 누울 너한테도 물어볼 거야. 다르다면 눈을 감고 느껴볼 거야. 주위가 암흑처럼 어두워지면 하지 못한 말들도 다 뒤집어놓고 부러지는 소리만 기다릴 거야.

 

한줄로 서서 내려가던 사람들이 발을 멈춘다. 계단의 돌이 그림자보다 가팔라진다. 목덜미로 파고들던 겹겹의 흰빛. 네가 먼저 본 것들은 어디 갔을까.

 

팔짱을 끼고 재잘대도 너는 별말이 없고. 나는 빌었던 소원을 잊은 채 걷고 걷는다.

 

밀려오는 가능성에 맞서 싸운다.

 

혼자 남은 방 안에서 오르던 열꽃.

내가 하는 싸움을 네가 알 수는 없다. 망원경을 쥐여줘도 볼 수가 없다.

 

한번 생긴 숲은 아마 계속될 테지. 우린 때로 산책하고 같이 눕는다. 새로 자란 피로를 나눠 가진 채, 먹고 싶은 것들도 떠올리면서.

 

들어오기 전으로는 돌아가지 못한다.

 

유성에서 비롯된 일은 아니다.

 

 

 

그림자를 덧댄 식탁에 그릇을 둔다.

 

기울어가던 바닥이 잠잠해진다.

 

영원. 또는 먼지. 또는 어리석은 냄비들.

 

나무를 가르며 천천히 다가오는 운석이 보인다.

 

 

⦅⦆⦅

 

떠올려보아라그날의분리와상상과달빛을돌이킬수없는밤이남기고간돌들을말과창과구멍과식어있던계단을발목덮고따라오던환하디환한냉기가모여앉아여기서또우주몇개만든다심심하면코풀듯다없애보려고직전에는마음도좀가져보려고착각이뭘구하는지알아보려고그래역시네사랑은이런걸몰라네사랑은미래보다앞서있는것이해할수없는곳에발을들인댓가가돌림병처럼지겹고혹독하여도반복되는충돌만은멈출수없어미움받지않으려는그저그런나열과입술햇빛나무국수세상모든안간힘움켜쥔펜한자루가맥락들을지운다소용없어늦은납득돌아선등도사라짐을겪어본쓰레기통도나라고단지나라고기다려주는다음세계옵션들인간적인선택지와예의바른숲그런거는아니지낡았으니까처음부터그렇게만열렸으니까그치만또들어간다더할것도없어서비유도정황도책임도없는세계와네끝으로별장속으로

 

 

렌즈

     숲길                    첫              

                                                 너          

                       방                                 그림자와 누구든

 

 돌

                      내             빛         

                                          둘

                                                     따라

     셀 수         망원경

                               조각이                              없는

 

  흰                                          밤

              사람들  

                                                            가스

몰래                  저곳 사람들                                    다

 

 높이                                         더            높이

                        우리?

 

               어                   채워                         

                   네 것                                      우스울 때

 

      멎는                                해

                                     왜냐하면           넌

  생각보다 

 

                     미안합니다                               휙    

 

  모든                                          냄비들

                있다       돌이킬

 

                나와                            암흑, 또 암흑    

                                                                  넌

      걷자 그냥 걷자

                                      파고들던

섬광

                                                               쌓여

                       새로운               눈           그리고

                바닥                            응, 

                                    없어요

 

 

 

가까이 붙어 숨 쉴수록 기우는 바닥. 우리는 나란히 누워 일렁이는 나무 그림자를 본다.

 

스스로 망가뜨린 기억도 잊을 수 있게.

손을 잡고 눈을 감고 반쯤 잠들어,

 

 

 

사랑이 아니라고 외치는 사람의 사랑이 언젠가 잃어버린 슬리퍼를 찾을 때

 

 

물에 빠져 허우적대던 팔과 다리가, 깊은 수면 아래 희게 때로 검게 출렁이던 나의 신체가 침대 밑에 가지런히 놓여 있다 먼지와 못과 더이상 신지 않는 슬리퍼 온갖 부스러기들과 함께 살고 있는 그것은 어두운 밤 침대가 덜컹일 때마다 숨 막히는 물속을 떠올리지만 대부분의 경우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 거품이 어떻게 터지고 모였는지 사방에서 몸을 누르던 공기가 얼마나 차가웠는지 끝내 알아볼 수 없던 그러나 다른 생명체와는 분명히 다르게 움직이고 떠다니던 생명체 털이 수북하던 해저의 괴생명체가 대체 무엇이었는지 생각하지 않는다 궁금해하지도 환영에 시달리지도 않는다 그저 언제부터 뒹굴었을지 모를 바닥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침대 밑에서 잠자거나 뒹굴며 하루를 보낼 뿐 아침마다 옅게 들어오는 빛줄기에 팔목을 뒤집어 비춰볼 뿐 그것은 속수무책으로 분리된 망원경이나 망원경의 뼈, 뼈의 미래처럼 보이기도 한다 너무 많이 돌려본 미래는 과거보다 먼 과거 오래 묵은 침대 스프링 같은 것 조금씩 느슨해지며 망가지는 것이기에 그러다 결국 잠잠해지는 것이기에 물에 같이 빠졌던 개는 그것이 뼈가 아님을, 죽지도 살지도 않은 사람의 팔다리라는 것을 알지만 가끔 몸을 낮추고 들어와 뼈를 핥듯 핥는다 매만진다 개의 따뜻하고 축축한 혓바닥이 나의 팔을 간질일 때 먼지 구덩이 속에서 나의 다리를 부드럽게 닦아줄 때면 바다와는 무관한 꿈 처음 보는 언덕에 누워 햇빛을 쬐는 꿈을 꾸고 나는 모든 걸 잊은 채 멀리서 이쪽으로 뛰어오는 개를 괴생명체를 나의 어깨를 본다

 

 

 

소외보다 나은

 

 

너에게는 엽서를 고르는 친구와 엽서를 쓰는 친구 그것을 받아 보관하는 친구와 파쇄기에 갈아 없애버리는 친구가 있다 그들은 모두 손바닥만 한 산 풍경과 사랑에 빠진 자들 침엽수를 바위를 반짝이는 골짜기의 얼음을

 

사람처럼, 아주 가까웠고 가까워서 멀었던 그 사람의 말들처럼 느끼는 자들 산 생각만 하면 열이 오르고 잠을 설치고 몇번의 기쁨 몇번의 망설임 속에서 냉랭해지는, 물컹하고 어두운 마음이 되어 스스로를 내던지는 자들 산도 엽서의 존재도 모르는 너의 친구인 자들

 

어느 산에도 오른 적 없어 어떤 길도 잃어본 적 없는 너는

엽서 대신,

산 뒷면을 눌러가며 꿈꾸거나 꿈 깨는 대신

전화선을 배배 꼬며 거실과 친구들 사이를 오간다 흩어진다

 

너는 한장의 엽서도 쓰거나 받은 적 없지만 시시한, 불가사의한 마음 옆에 나란히 선 채 추워져본 적 없지만 그들은 오늘도 너희 집 다락에 모여 숨죽이며

다락방 창문에서 잘 보이는 산 정상을, 골짜기와 등산가를 바라보며 그걸 다 침대 위로 가져와 무너뜨린다 다시 세운다 아무것도 묻지 않는 너를 껴안는다

 

내던져진 기슭과 기슭을 맞추는 동안 그들과 너 사이 처음 보는 산 그림자가 생기고 잠시 네게 닿고 너는 영문도 모른 채 먼저 떤다 모르던 말들을 흉내 낸다

이것이 네가 엽서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이유

그들의 친구로 남은 이유다

 

 

 

아이스버그

 

 

팔꿈치끼리 맞닿아

사랑을 할 때

우리는 간다

선인장이 사는 집으로

 

병들거나

 

고립되지 않는 곳으로

무심코와 천천히를 데리고 간다

 

사람보다 식물이 많은 곳에서

 

사람으로 손잡은 우리는 사람으로 낮을 느끼고 사람으로

느낀 낮을 나누지 않고

선다

이렇게 기다란 선인장은 처음 본다는 말과

이렇게 매끄러운 팔을 처음 본다는 말이 다르지 않다 믿으며

 

서로를 늘린다

원하는 속도로

무한하게

 

얇아지고 있다

 

어는 것과 녹는 것

유리 한장 차이라면

너는 내 한계가 돼가는 걸까

 

안쪽이

우후죽순 부푼다

 

다 기억하거나

다 버리는 방식으로

 

식물들은

말없이 잘 있는다

 

 

비치는 밖

 

눈을 감았다 뜬다

 

부딪혀 반사되는 모든 것이 환한데

한순간 정전이 된 것도 같다

 

아름답지

잎과 잎을 관통하는

전류 속에서

우리는 사랑하기 좋은 팔을 가졌구나

 

계속해서 자라면 선인장은 천장까지 닿을 거야 가시가 빛처럼 박혀 유리는 깨지고 말 거야

나는 끝을 묶어두면 된다고 했고

너는 끝을 베어내면 된다고 했다

 

얇아진 얼굴

 

사다리 없이도 믿고 싶은 것이 있었지만

 

반으로 가르면

즙 대신 피가 나올 것 같았다

 

 

먼지가 앉는다

 

고요히 폭발하는 팔꿈치가

다음 이야기

 

식물보다 사람이 많아지기 전까지

 

우리는 갇혀 잠시

그대로 있다

 

 

 

여름장미

 

 

던졌는데 어딘가로 사라져버린 공처럼 공의 공포처럼 잊히지 않는 밤이 있다 그것은 날이 밝으면 고개를 수그리고 물을 끓이고 처음 보는 사람들 사이에 앉아 커피를 마신다 창밖에 흐드러진 장미에 대해 말한다 어떤 죽음이 그렇듯 상담사가 그렇듯 그것은 주목받기도 주목받지 않기도 하지만 사람들에게는 저마다의 공이 있어 저마다의 여름밤 잃어버린 빛이 있어 몇몇은 주전자에서 흐르는 물소리에 사로잡히고 다정하게, 남 얘기처럼 밤은 작은 잔에 나누어 담긴다 저기요, 당신 언젠가 만난 적 있는 것 같아요 저기요, 말이 잘 통하네요 어디선가 들었던 말을 흉내 내며 한 시기가 지나간다고 느끼며 눈물을 닦으면 꼭 맞는 모서리에 기대는 기분이 들고 다각형이, 어른스러운 다각형이 되어가는 것 같지만 실은 공기가 둥글어지고 있는 것이다 주먹 쥔 손이 벌어지는 것이다 잠든 머리 위에 공이 하나씩 떠오른다 이상한 점선을 그리며 회전한다 물소리가 멎고 빛은 여기저기서 얼굴처럼 부풀어오르고 마지막 잔이 채워지기 전 해가 진다 돌아오지 않는 건 돌아오지 않지만 허공에 잠시 멈추었던 공은 어디로 갔을까 나뭇가지를 부러뜨렸을 수도 누군가의 머리를 쳤을 수도 여전히 손안에 있을 수도 처음부터 없었을 수도 있다 대부분의 공은 장미와 관련이 없다 대부분의 공은 다각형일 수도 있었다 부드러운 모서리의 장미는 시끄러워지자는 듯 돌이킬 수 없는 말을 돌이켜보자는 듯 끓어오르듯 핀다 그 안에도 공이 하나쯤 숨어 있을 것 같다 어떤 얼굴이 눈 뜨고 있을 것 같다

 

 

 

심사평

 

두가지 의미에서 심사가 쉽지 않았다. 296편 모두 고른 기량을 가졌다는 것이 하나, 그중 분명하게 ‘이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작품이 없었다는 것이 다른 하나다. 문학상에 충분히 도전해도 좋을 만큼 일정한 수준에 오른 이들이 많아졌다는 의미도 될 것이고, 부족하지만 개성있는 시보다 기성의 문법에 충실한 시들이 많아진 탓도 있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대산대학문학상의 심사를 맡는다는 것이 영광이면서 지극히 괴롭고 어려운 일인 건 분명하다.

 

응모작 중 일곱명의 작품 35편이 본심 대상이었다. 한 테이블에 둘러앉아 다시금 작품들을 돌려 읽으며 세명의 심사위원들은 이미 기량을 갖춘 대상작들 중 좀더 나은 작품을 골라내기 위해 고민했고 그중 「사이먼이 말하기를」 외 4편, 「낭만역학」 외 4편, 「재와 사랑의 미래」 외 4편을 두고 최종 논의를 하기로 합의했다.

「사이먼이 말하기를」 외 4편은 유쾌한 리듬과 사유의 끈기가 돋보였다. 이는 자신만의 시를 쓸 준비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리라. 그럼에도 시 속 이야기가 응집되지 않고 자꾸만 흩어져버린다는 점은 아쉬웠다. 이를 밀도의 부족이라 해도 좋겠다. 빛나는 이미지와 인상 깊은 비유들이 그럼직한 방식으로 엮이지 않고 낱낱의 문장이 되어 겉돌았다. ‘엮어내는 힘’을 갖게 된다면 더 좋은 시적 성취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낭만역학」 외 4편은 개성이 돋보인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자신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이를 시로 풀어내는 능력 또한 뛰어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소 설명적인 문장들이 시 곳곳에 끼어들어 시적 긴장은 물론 읽는 이의 집중을 방해하는 것이 아쉬웠다. 시와 비시의 경계를 외줄 밟는 듯한 아슬아슬함이 즐거움을 주기도 하지만 때론 맥을 풀어놓기도 한다는 점을 유의해 선택과 배제를 한다면 더 완성도 있는 시를 쓸 수 있게 될 것이다.

「재와 사랑의 미래」 외 4편은 적당한 거리감과 명료한 이미지, 교차하는 감정의 순간을 세밀하게 드러내는 실력이 발군이다. 무엇보다 시인이 자신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 단정하고, 단호하다. 밀착되어 있는 시 속 대상과 정황으로부터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능력은 쉽게 얻기 어렵다. 시인이 얼마나 오래 숙고하고 습작해왔는가를 쉬이 짐작해볼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재와 사랑의 미래」 외 4편은 당선작으로서 손색없는 여러 미덕을 갖춘 것으로 보였다. 표제작에서 보여준 일종의 형식적 실험이 파격적이라기보다 다소 익숙하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지만, 사유를 따라가는 데에 있어 큰 방해요소가 되지 않았다. 심사위원 세명은 고민을 접고 흔쾌히 「재와 사랑의 미래」 외 4편을 당선작으로 선택했다.

 

시는 언어를 쌓고 해체하는 일종의 구축물이다. 그러다보니 형식이 강조되곤 한다. 그러나 형식의 배면에는 말하지 않거나 말하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그 모든 것을 아울렀을 때 마침내 ‘한편의 시가 나타났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심사 대상작들에서 느낀 아쉬움은 이런 것이다. 우리는 완성된 세계가 아니라 완성되어가는 세계를 보고 싶다. 어떤 세계도 완성될 수 없기 때문이다. 본심에 오른 「진시황은 살아 있습니까?」 외, 「아스피린 사용법」 외, 「Anechoic」 외, 「어린 왕은 머그잔에 비친 왕의 얼굴에 자신을 겹치어본다」 외 등의 작품은 모두 뛰어난 수준을 보여주지만 이런 점에서 아쉬웠다. 마지막으로 두려움 없이 과학의 용어를 빌려와 자신만의 ‘구축물’을 시도한 시편들과 앙상한 문장과 빈 이미지로 중세의 숲을 연상하게 하는 시편들에도 격려를 전한다. 방법에 집중한 나머지 과하거나 덜하고 때론 반복적이어서 본선에 이르진 못했지만, 포기하지 않고 해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크다.

 

당선자에게 진심 어린 축하를 전한다. 지금의 장점을 잊지 않는다면 분명 좋은 시인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당부하건대, 주위보다는 앞을 보고 자신을 믿고 나아가길 바란다.

김이듬 신용목 유희경

 

 

 

당선소감

 

쓰는 자리와 사랑하는 자리가 다르지 않다고 말하고 싶지만, 사랑은 언제나 시보다 환하거나 어둡다. 사랑은 바쁘고 사랑은 힘이 세고 대사관 책상처럼 머리가 좋다. 사랑은 시보다 단순해 겁이 없고, 가까운 풍경과 기관에 함부로 상처를 낸다. 때때로 사랑은 시를 속이기도 한다.

속고 싶지 않을 때마다 에너지가 두배 필요했다. 사랑 앞에 떳떳한 것은 시 앞에 떳떳한 것과 큰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시 앞에 떳떳한 것과 사랑 앞에 떳떳한 것이 전혀 다른 영역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서로 지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감정이 가진 힘이 너무 강해 대부분 시가 졌다. 시는 느렸고 나이에 비해 머리가 나빴다. 그래서 기다렸다. 기다리면 아주 가끔, 시가 사랑이 되고 사랑이 시가 되는 순간이 왔다. 그럴 때면 사랑도 사람 같았다. 현실 같았다. 갑작스러운 정지와 머뭇거림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나의 총합과 내 사랑의 총합, 세계의 총합과 시의 총합은 전부 다를 것이다. 시간은 지금도 흐르고 나와 내 시는 끝없이 다른 몸이 되어가고 있을 것이다. 조금 전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총합 같은 건 중요하지 않다. 내가 보는 것과 듣는 것과 만지는 것이 시의 일부가 되고, 시가 보는 것과 듣는 것과 만지는 것이 나의 일부가 된다는 것을 믿는다.

처음 만난 것처럼, 처음 반말한 것처럼, 처음 배신당한 것처럼

나를 두렵게 하고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시가 좋다.

사랑을 이기지 못하는 시가, 나를 다 모르는 시가 너무나 좋다.

 

쓰는 자리와 사랑하는 자리가 드물게 뒤섞일 수 있음을 알게 해준 친구들이 있습니다.

함께 시를 쓰는 용준 준형 민성 예은 세인 희수

넘치도록 많은 곁이 되어주어서 고맙습니다.

서창과 동기들 소연 세은 슬기 경동, 지금껏 그래왔듯 묵묵히 같이 가요. 김경욱 선생님, 권희철 선생님 감사합니다. 사랑보다 나은 우정을 주는 동우에게, 곧게 서는 법을 가르쳐주신 김산 선생님께, 모난 나를 안아주는 가족들에게 감사합니다.

 

처음의 마음을 잊지 않고 온 힘을 다해 걷겠습니다. 기회를 주신 세분의 심사위원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김연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