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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곡
이다은 李多恩
숭실대 예술창작학부 4학년. 1995년생.
dob6819@naver.com
돼지의 딸
등장인물
유경 : 희자의 딸. 20대.
희자 : 유경의 엄마. 60대.
아이
유령
무대
산 끝자락과 닿아 있는 돈사.
한편은 돼지가 사는 사육장이고 다른 한편은 사람들이 사는 숙소이다.
1장
무언가 배웅하듯 무대 뒤쪽을 보고 있는 유경.
유경 오늘도 팔려가는구나. 저 돼지새끼들 우는 소리. 울어봤자 얻어맞고, 얻어맞아서 더 울고. 악순환. 그걸 왜 모를까? 돼지고 주인이고 멍청해. 멍청한 것도 하루 이틀 일이지. 지겨워. 이번에는 정말 끝장 볼 거야.
유경, 몸을 돌려 중앙으로 걷는다. 반대편에서 쇠갈퀴로 일을 하던 아이가 막아선다.
아이 누구세요?
유경 너야말로 누구니? 여긴 우리 집인데.
아이 아니에요. 여긴 ‘유경돈사’인걸요.
유경 내가 그 ‘유경’이야. 우리 집이 돈사지. 여기에 있으면 곧 냄새가 옮을걸. 장난칠 생각 말고 얼른 나가는 게 좋을 거야. 어디 가서 무시당하기 싫으면 말이야.
아이 들어오지 마세요.
유경 (무시하고 다가선다) 가까운 읍내까진 걸어서 두시간이나 걸리는데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야. 하여간 애들은 뭐든지 할 수 있어서 무서워.
아이 (쇠갈퀴를 들이대며) 더 들어오면 안 돼요.
유경 이거 봐라? 너 그게 얼마나 위험한 줄 알아?
아이 더 위험한 건 그쪽이에요.
유경 내가 왜 위험하니.
아이 돼지들이 병에 걸린단 말이에요. 작년에도 돼지를 얼마나 묻었는지 아세요. 빨리 소독해요.
유경 아, 소독. 까먹었어. 정말로. 내가 오랜만이긴 한가보다. 미안해. (소독실에서 소독하는 시늉) 내가 집에 온 게 6년 만이거든. 대학 다니느라 말이야. 여긴 너무 시골이잖아. 너 산 타봤지. 내리막길 뛰는 건 쉬워도 오르막길 걷는 건 어렵잖아. 한번 시골로 내려가면 서울로 다시 올라오기가 너무 힘들어서 마음을 다잡으려고 안 내려왔거든. 근데 넌 정말 누구니?
아이 이 집 아이요.
유경 이 집 아이는 나라니까. 마지막으로 봤을 때 서로 작정하고 주먹질에 패대기치며 싸우긴 했다만. (사이) 희자는 어딨니?
아이 희자요?
유경 엄마 말이야.
희자가 아이 등 뒤 방향에서 걸어 나온다.
희자 다신 안 온다더니.
아이 엄마! 모르는 사람이 왔어요.
희자 (아이에게) 인사하렴. 내 딸이란다. (유경에게) 너도 인사해. 내 딸이야.
아이, 쇠갈퀴를 내려놓고 희자에게 다가간다. 두 사람을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는 유경.
유경 야, 미쳤어?
희자 뭐가 문젠데.
유경 어디서 데려온 거야.
희자 내 딸이라니까.
유경 애인이라도 생겼나봐. 그런 줄도 모르고 괜히 왔네.
희자 이 돼지우리에 어떤 남자가 기어들어와. 네 애비처럼 기어나가면 또 몰라.
유경 그럼 뭐야.
희자 축사에 똥 덩어리가 꿈틀거려서 돼지새끼인 줄 알고 씻겼더니 사람새끼더라고.
유경 그래서.
희자 길렀어. 그게 6년째야.
유경 경찰에 신고는.
희자 나쁜 짓도 아니잖아. 애 기르는 거.
유경 나쁜 게 아니라 상식과 도덕과 법에 어긋난 거지.
희자 전에 텔레비전 보니까 법도 잘못됐다고 고치더라.
유경 섬노예 알아, 몰라. 납치 유괴 알아, 몰라. 아동착취 알아, 몰라.
희자 너도 이렇게 자랐잖아.
유경 얘하고 나하고 같아. 남이랑 자식이랑 같냐고.
희자 다르더라.
유경 그래, 다르지!
희자 쟤가 일을 더 잘해.
유경 뭐?
희자 봐. (아이에게) 돼지 밥 줬니.
아이 네.
희자 분변은 치웠니.
아이 케이지에 쌓인 거 긁어다가 수레 채워서 옮겨놨어요.
희자 그리고 또 뭐가 있더라.
아이 축사 구석에 거미가 집 지은 건 부지깽이로 다 부숴놨어요. 이따 돼지 이빨하고 꼬리 자를 도구들 미리 챙겨놨고요. 음, 그리고 또…… 아, 저 까먹은 거 있어요. 수놈 정액 채취 준비 아직 못했어요.
희자 그건 내가 하면 돼. 아침밥은 먹었니?
아이 아뇨, 아직요.
유경 밥도 안 먹이고 애한테 일을 시켰어.
아이 일하다보면 남 밥만 챙겨주고 자기 밥그릇은 못 챙기는 거랬어요.
유경 부려먹는 와중에 별걸 다 가르쳤다.
희자 이제부터 먹으면 되지. (유경에게) 너 줄 건 없다.
유경 누가 밥 먹으러 온 줄 알아? 난 이 집 음식 절대 안 먹어. 뜨끈한 음식 냄새 대신 퀴퀴한 돼지 냄새만 나고. 퇴비에서 자란 파리나 꼬이는 밥. 차라리 굶는 게 낫지.
희자 그럼 가서 굶어.
아이 전 가서 밥 차려놓을게요.
무대 밖으로 나가는 아이.
희자 아주 순하고 순박하고 착해. 어렸을 때 너 보는 것 같다. 정말 귀여웠는데. 그때 기억나니. 일하다가 문득 네가 없어져서 찾으면 꼭 돼지우리에 들어가 있었지. 막 기어다니기 시작할 무렵이었는데 어떻게 거기까지 간 걸까. 네발짐승같이 기어서 그런지 모돈도 널 깔아뭉개지 않고 오히려 젖 빠는 자리를 하나 내줬지. 그 때문에 원래 자기 자리를 뺏긴 새끼 돼지는 평생 살이 안 붙는 찔찔이가 되어버렸어. 평생이라고 해봤자 몇개월도 안 된다만. 그런 어설픈 놈들에게 사료를 주면 손해야, 손해. 손해가 누적되면 다 죽는 거야. 그렇게 돈사에 목매달고 똥 지린 놈들 많아. 그럼 혼자 남은 부인이 남편 시체 내리고 나서 남은 돼지들은 변변찮은 값에 팔고 떠나버리지. 수입 냉동 고기값 반푼도 안 된다. 살아 있는데도 값어치가 죽은 것보다 못해. 나는 내 시체 내려줄 사람 없으니 아주 지독하게 길렀다. 너도, 돼지도.
유경 그래, 아주 고생 많았지.
희자 네가 죽을 때가 되었나. 드디어 철이 들었구나.
유경 내가 고생이 많았지. 나는 손에 물이 닿으면 당연히 간지러운 건 줄 알았어. 초등학교 입학식 날 다들 손 씻고 교실에 들어가는데 내가 손을 벅벅 긁고 있으니 담임선생님이 내가 더러운 줄로만 알고 몇번이나 날 붙잡고 씻겼지. 그래도 계속 간지러워서 양호실로 데려갔는데 한참이나 살피더니 주부습진이라고 하더라.
희자 똥독보다는 습진이 낫지.
유경 그 선생님이 졸업식 날 나를 불러다 핸드크림을 듬뿍 발라 손을 마사지해줬어. 그러면서, 꼭 일을 해야 하니? 묻더라. 나는 그제야 일을 꼭 안 해도 된다는 걸 알았어.
희자 그렇게 해야 살 수 있었는데 어떡하니?
유경 쟤도 그렇게 기르겠다고.
희자 이번에는 지독하게 말고 순하고 순박하고 착하게 기를 거야. 그러니 내 시체는 네가 내려줘야 한다.
유경 자식한테 할 소리야, 그게?
희자 애는 죽을 각오로 길러야 하는 거야.
유경 우리 편하게 살자.
희자 어떻게.
유경 폐업하자.
희자 또 그 소리.
유경 정부에서 하는 말이, 폐업하면 돈을 주겠대. 시설, 부지, 이런 거 다 따져서.
희자 나 싸울 힘도 없다. 그만하자.
유경 그래. 보상금을 생각만큼은 못 받을 거야. 근데, 그게 시세인 거야. 이거마저 놓치면 영영 여기 못 떠.
희자 왜 멀쩡한 걸 부숴서 남 좋은 일만 시켜.
유경 우리 좋은 일이야. 아까 말한 그 아줌마들. 빈 축사 남겨놓고 어디로 갔어. 숨어버리듯 사라졌잖아. 보상금이 못해도 서울 빌라 보증금은 될 거야.
희자 밥은 무슨 돈으로 먹고.
유경 (사이) 일을 하면 되지. 늘 해온 게 일이잖아.
희자 그게 편하게 사는 거야? 여기선 내가 주인이야. 거기선 내가 돼지고.
유경 차라리 돼지가 낫지. 로프랑 유서를 늘 품고 일하는 주인보다.
희자 난 여기서 쟤 기르며 살래. 이만하면 다 애 하나 기를 정도로 멀쩡해.
유경 멀쩡? 멀쩡은 무슨 멀쩡이야. 정부에서 왜 폐업하면 돈을 주는 줄 알아? 여기가 멀쩡하지가 않아서 그래. 냄새나고, 더럽고, 혐오스럽고. 역겨워서. 이따위 돈가 얼마나 갈 거 같아. 케이지에다 돼지새끼들 처박아놓고 평생 걷지도 못하게 하다 죽게 하는 거. 밖에서 뭐라고 하는 줄 알아? 착취라고 해, 착취. 요샌 뭐든지 윤리적인 걸 따져. 여긴 돼먹지 않은 곳이야. 못되어먹은 곳이라고.
희자 그놈의 윤리적인 게 뭔데.
유경 내가 누굴 괴롭히지 않았다는 확신.
희자 네가 비윤리적이다. 네가 날 괴롭혀. 돌아가.
유경 내가 왜 다시 돌아왔는지 알아? 나 한번도 여길 제대로 떠난 적이 없어. 읍내로 학교 다닐 때도, 가출했을 때도, 대학과 고시원을 오가는 내내도. 당신이 여기에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여기에 묶였어.
희자 너는 꼭 그런 식이지. 날 못된 년으로 만들어.
유경 진짜 못됐잖아.
희자 못 배워먹었어도 난 착해. 세상 누가 버려진 애를 주워서 키우니. 나나 그러지.
유경 경찰서에 보내서 가족에게 돌려보내거나 보육원에 보내서 새 가족을 찾아주지.
희자 그 가족이 제대로 된 사람들이라는 보장이 어디 있어. 차라리 여기가 나아.
유경 애한테도 선택권이 있어야지.
희자 쟤는 여길 싫어하지 않아.
유경 그걸 어떻게 알아.
희자 벗어나려고 들지 않잖아.
유경 쟤도 크면 달라질걸.
희자 쟤는 다를 거야. 쟤는 너하고 달라. 너하고 다르게 순하고 순박하고 착해.
아이 (목소리) 엄마 밥 드시러 오세요. 다 식었어요. 다시 데울까요?
희자 (목소리를 향해) 아냐. 식은 밥이 오히려 넘기기도 좋지. 잘했어. (유경에게) 넌 알아서 해라. (가버린다)
유경 평생을 알아서 해왔어, 평생을. 새삼.
암전.
2장
일하는 아이. 멀리서 쭈그리고 앉아 지켜보는 유경. 손엔 공산품 빵이 들려 있다. 신경 쓰이는 듯 흘깃거리는 아이.
유경 왜 보니.
아이 (우물쭈물하며) 그게 뭐예요?
유경 뭐. (빵을 들며) 이거?
아이 네.
유경 이리로 와봐.
아이 저는 일해야 해요. 이리로 오세요.
유경이 아이 근처로 가서 다시 쭈그리고 앉는다.
유경 힘들지 않니?
아이 엄마가 더 힘든걸요.
유경 어른하고 아이를 비교하면 안 돼. 이거 먹으면서 좀 쉬어.
아이 밥 안 먹었잖아요.
유경 할 얘기가 있어서 그래.
못 미더운 얼굴로 옆에 앉는 아이. 유경이 넘겨준 빵을 급하게 먹는다.
유경 맛있니.
아이 너무 맛있어요.
유경 이런 거 먹어본 적 없니.
아이 네.
유경 읍내만 가도 많아.
아이 읍내는 싫어요.
유경 몇번이나 가봤다고.
아이 싫은 건 한번만 가도 알아요. 전 거기 싫어요.
유경 엄마랑 갔니.
아이 병원 때문에요. 전에 엄청 아팠거든요.
유경 걸어갔어? 그 거리를?
아이 아뇨. 엄마가 수레에 실어줬어요.
유경 그 똥 실어다 버리는 데에다가?
아이 호스로 물 뿌려서 씻기는 씻었어요. 근데 가니까 사람들이 다 싫어하더라고요.
유경 싫어할 만도 하지. 그 냄새가 얼마나 독한데.
아이 거기도 비슷하던데요, 뭐.
유경 그래도 거기는 더 좋아.
아이 전 여기가 좋아요.
유경 몰라서 그래. 여기가 얼마나 불편하고 힘들고 괴로운지. 딴 곳 가서 며칠만 보내면 금방 알아.
아이 그러면 딴 곳 안 갈래요.
유경 너도 고집이 세구나. 시야가 좁고. 멍청하고. 돼지는 실어봤니? 그게 여기 일 중에서 가장 끔찍하다. 나고 자란 돈방 떠나기 싫다고 안 움직이려고 뻐팅기지. 백 킬로 넘는 애들을 온몸으로 밀어 실어야 한다. 그러다보면 그 울음소리가 머리뼈에 새겨져.
아이, 다 먹은 빵 봉지를 바닥에 버리고 일어서려고 한다. 유경이 팔을 잡아 앉힌다.
유경 서울 가서 제일 시끄러운 소리가 뭔지 아니? 그 돼지 악쓰는 소리야. 기필코 쫓아와서는. 귀로 들리는 거면 손으로 막으면 되는데 뼈에 새겨진 걸 무슨 수로 떼어내니. 머릿속으로 돼지를 얼마나 죽였는지 몰라. 너도 나처럼 되고 싶니? 없는 칼로 없는 돼지를 죽이는 사람.*
아이 일해야 해요.
유경 안 해도 돼.
아이 엄마가 혼자 하고 있어요.
유경 엄마는 혼자 알아서 한다. 그게 어른이야. 말고 네가 중요해. 너는 정말로 하고 싶은 게 없니?
아이 지금 일하고 싶어요.
유경 일을 왜 하고 싶은데.
아이 엄마가 하니까요.
유경 아이들은 어른들 따라 하는 게 본능이야. 나도 어렸을 때 면도하다가 피 여러번 흘렸다. 본능 말고 이성적으로 찬찬히 생각해봐. 갖고 싶은 건 없니.
아이 엄마요.
유경 엄마?
아이 네, 엄마 갖고 싶어요.
유경 그래, 그럴 줄 알았어. 당연한 거야. 그래, 아빠도 가지고 싶지?
아이 아뇨, 아빠는 괜찮아요. 엄마만 가지면 돼요.
유경 왜 아빠는 싫니?
아이 엄마가 아빠는 있어서 닮아봤자 쓸모가 없댔어요.
유경 틀린 말은 아니구나. 법적으로 미혼 여성은 입양하기 힘들 텐데. 아냐, 알아보면 되겠지. 내가 꼭 알아봐줄게.
아이 괜찮아요. 안 알아봐도 돼요.
유경 아냐. 내가 그래도 엄마랑은 다른 사람이야. 뭐 알아보고 처리하는 거에는 도가 텄단다. 혼자서도 잘해. 나만 믿으렴. 어떤 엄마를 갖고 싶니?
아이 다른 사람은 됐어요.
유경 다른 사람이라니?
아이 나는 엄마를 엄마로 삼고 싶은 거예요. 더 안 찾아봐도 돼요.
유경 뭐?
아이 당신 엄마의 딸이 되고 싶다고요.
유경 부모님을 갖고 싶은 게 아니라?
아이 네.
유경 왜 하필 내 엄마니?
아이 그냥요.
유경 뭔가 이유가 있을 거 아냐.
아이 좋아서요.
유경 어디가 어떻게 좋은데. 설명을 해봐.
아이 감정이라기보단 감각이에요.
유경 이해가 안 돼.
아이 (침묵)
유경 도대체.
아이 (침묵)
유경 어떤 선생님이 계셨지. 아주 훌륭한 분이셨어. (사이) 아니 훌륭한 사람은 아니었어. 그냥…… 말이 잘 통했지. 대화하는 기분이 들었어. 그분이 종종 말 안 듣는 자제분들에 대해 말해주실 때마다 내가 저분의 자식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단다. 나 같은 자식이 있다면 선생님도 좋아하실 거야, 그렇게 생각했지. 뭐든지 말이 통하는 것들에게 먼저 정이 들잖아. (사이) 그게 이렇게 무서운 얘기로 돌아올 줄은 몰랐다.
아이 무서워요?
유경 그래.
아이 낮이잖아요.
유경 그래 낮이지. 새파란 낮. 이런 낮에 이렇게 무서울 수도 있다는 걸 몰랐다.
암전.
3장
수풀로 둘러싸인 길을 혼자 걷고 있는 유경.
유경 파출소에 가서 실종 신고된 아이가 있나 보자. 없으면 그다음엔 가장 가까운 보육원을 알아보자. (사이) 괜히 덤터기 씌우진 않겠지? 아냐. 그렇게 잘 자란 애를 누가 학대했다고 여기겠어. 때리는 것도 사랑인데. 그럼. 버리는 것도 사랑이지. 돌려보내주는 거야. 더 좋은 가능성이 있는 곳으로. 난 그 가능성마저도 가지지 못했는걸. 나에게 나처럼 해주는 사람도 없었지. 오로지 엄마와 나 단둘뿐이었어. 이 길을 지나 고등학교를 오가면서 늘 생각했지. 여기에서 벗어나야지 사람처럼 살 수 있겠다고. 새벽 네시에 일어나 돼지 뒤치다꺼리를 하다가 학교에 가고 밤 열두시에 돌아와 꿈도 못 꾸고 죽은 듯 잠드는 삶이 아니라 정말 사람답게, 딱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일곱시간만 자는 삶 말이야. 잠에서 밀려나듯 심장이 떨려서 일어나는 삶 말고 자연스럽게 떠진 눈으로 햇빛을 보는 삶. 그게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닌데. 어떻게 그렇게 살았을까. 기억이 안 나. 왜 힘들었던 때는 돌이켜보면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을까? 그때도 나쁘지 않았다고, 나름 좋았다고, 괜찮았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하자면서 스스로를 속이게 되어버리잖아. 나 자신한테 가장 나쁜 건 나 자신이야. 늘 속이고, 속고…… 그러니 죽었는데 산 줄 알고, 살았는데 죽은 줄 알고…… (멈춰 서서) 혹시 경찰서나 보육원에서 아이를 우리 집으로 돌려보내면 어떡하지? 그러면 정말 어떻게 해야 하지? 아냐,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유령이 멀찌감치 서 있다. 말을 되뇌며 빨리 걷던 유경이 멈춰 선다.
유경 (유령을 발견한다.) 뭐야, 너 아직도 여기 있니? 오랜만이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처음이니까 너도 육년 만이구나. 그동안 뭐 하고 살았어. 이제 그만 좀 미련 버리고 성불하지. 너도 참 변함없다.
유령 (침묵)
유경 진짜 여전히 말도 없구나. 유령이면 말이 많을 법도 한데. 내가 봤을 때 너는 쌓인 것들을 못 풀어내서 유령이 된 거야. 뭐든지 쌓이면 병이 되는 거야. 변비도 병이라잖아. 뭐라도 말을 해봐, 응? (사이) 그럼 내가 물어봐줄게. 왜 나왔어? 내가 돈사로 갈 때는 안 보이더니. (알아챘다는 듯) 아까 네 이야기 했던 거 아냐. 내 이야기 했던 거야. 네가 늘 듣던 내 이야기 말이야.
유령 죽고 싶어.
유경 이미 죽었는데?
유령 이렇게 살기는 싫어.
유경 (사이) 내가 너한테 가장 많이 한 말이구나.
유령 이렇게 살기 싫은데 살려면 이럴 수밖에 없어.
유경 그래. 너한텐 입이 있으니까 내가 한 말들을 빌려줄게. 맘껏 쓰렴. 대신 네 귀 좀 빌려주라.
유령 죽고 싶어.
유경 서울에서 가장 슬픈 건 말할 사람이 없다는 거였어. 혼잣말은 미친 사람이나 하는 거더라고. 여기서 하듯 중얼거리면 모두가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지. 그래서 대화하는 모습을 따라 해봤는데 다들 질려하는 표정을 짓더라고. 내 평생 대화를 제대로 해본 적이 있어야지 말이야. 너는 내 말을 들어주기만 하고 돼지는 내 말을 들어 처먹지를 않고 엄마는, 엄마는 자기 말만 하니까.
유령 죽고 싶어.
유경 네가 그러니 처음으로 대화하는 것 같다. 죽고 싶니?
유령 이대로 살기 싫어.
유경 이대로 살기 싫다고?
유령 이렇게 살기 싫은데 살려면 이럴 수밖에 없어.
유경 아냐. 다른 방법이 있어.
유령 죽고 싶어.
유경 죽이면 되는 거야.
유령 이대로 살기 싫어.
유경 이대로 안 살면 되는 거야.
유령 이렇게 살기 싫은데 살려면 이럴 수밖에 없어.
유경 그럴 필요 없어. 그래, 엄마가 했던 대로만 하면 돼. 그래, 그 방법이 있는데 내가 왜 생각을 못했지. 멍청해. 멍청하다니까.
유령 어떻게?
유경 없던 것처럼 만들면 돼.
암전.
4장
밥상을 사이에 두고 앉아 있는 희자와 아이.
희자 또 밥 먹어야 하는 시간이네. 밥때는 왜 이렇게 자주 오는지 몰라. (사이) 네 언니는 못 봤니? 또 그새를 못 참고 어딜 간 거야.
아이 언니요?
희자 유경이 말이야.
아이 저한테는 언니가 없어요.
희자 걔는 내가 낳았고 너는 내가 길렀어. 피가 안 섞였더라도 내 아래에서 둘은 가족이야.
아이 언니처럼 느껴지질 않는걸요.
희자 철이 없어서 그래. 어렸을 땐 너랑 똑같았는데. 커버려서 그래.
아이 예전엔 안 그랬어요?
희자 그래, 어렸을 땐 아주 작고 귀여웠지. 나밖에 몰랐단다. 걔한테 내가 전부였지. 내가 아주 힘들었을 때엔 걔가 내 전부였고. 그러다 머리가 굵더니 일하기 싫다고 도망가고, 잡아오고, 그러면 또 도망가고…… 너처럼 착실하게 자기 역할을 하면 얼마나 좋을까. 한명이 자기 몫을 못하면 어떻게 되는 줄 아니?
아이 어떻게 돼요?
희자 다른 한명이 세명 노릇을 해야 해.
아이 두명에서 하나가 비는 것뿐인데 왜 세명이에요?
희자 혼자 두명 몫을 하려면 세명처럼 굴어야지 겨우겨우 살아.
아이 그러면 엄마는 늘 세명처럼 살았겠네.
희자 세명이 뭐야. 네명, 다섯명, 열명, 백명, 그만큼 살았지.
아이 이제 제가 있으니까 한명만 하세요.
희자 그래, 그래.
아이 언니까지 돌아오면 없는 것처럼 있으세요.
희자 그래, 그래. 우리 아가.
암전.
5장
한밤중, 산속을 걷는 유경과 아이. 유경이 아이 손을 잡은 채 앞서 걷고 있다.
아이 (하품하며) 엄마가 한참 찾았어요.
유경 일을 시키려는 거지.
아이 돌아가서 얼른 자고 얼른 일어나서 일해요. 할 일이 많아요. 백명이 해야 할 정도로요.
유경 (사이) 이것도 일이란다.
아이 어디 가는 건데요?
유경 (침묵)
아이 산은 처음 와봐요.
유경 그래. 옆이긴 해도 올 일이 없긴 하지.
아이 무서워요.
유경 낯설어서 그래.
아이 엄마가 산에는 들짐승이나 유령이 있댔어요.
유경 걔네가 무섭니?
아이 한번도 본 적이 없어서. (사이) 언제까지 가야 해요?
유경 이제 곧이야.
아이 언니는 여기 와본 적 있어요?
유경 (사이) 그래.
아이 언니 혼자요?
유경 엄마랑. 너 왜 언니라고 하니?
아이 싫어요?
유경 아니, 낯설어서.
아이 엄마랑 왜 왔어요?
유경 (사이) 엄마가 나한테 이야기 들려주려고.
아이 좋겠다. 엄마랑 같이 오고. 무슨 이야기였어요?
유경 옛날 얘기들. 철쭉을 진달래로 착각해 먹었다가 벙어리가 된 아이들 이야기. 학교에서 숙직한 선생님들이 연탄 중독으로 다 같이 죽은 채 발견된 이야기. 아궁이 가까이 묶어둔 돼지 엉덩이가 타버려 잘라낸 이야기.
아이 병들고 죽고 다치는 얘기뿐이잖아요.
유경 사는 게 그런 거 말고 또 뭐가 있겠니.
아이 돼지들은 더 다양하게 사는걸요.
유경 어떻게?
아이 섹스하고 낳고 기르고.
유경 그게 아름답니?
아이 낯설어요.
유경 무섭다는 거야?
아이 아뇨, 그냥 낯설어요.
유경 나는 그게 낯설 수 있다는 게 신기하다. 네가 어려서 그런 걸까. 나도 어렸을 땐 그게 낯설게 느껴졌을까? 지겨운 게 아니라.
아이 저기 뭐가 있어요.
유경 무덤이야.
아이 누구 무덤이요?
유경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죽은 사람이라 모르겠어. 묘비도 없거든.
아이 저기 옆에 들짐승이 있어요.
유경 들짐승이 아니야. 유령이란다.
아이 뭐가 다른 거예요?
유경 짐승은 먹을 걸 줘야 살갑게 굴고, 유령은 말을 건네야 살갑게 굴어. 자, 봐라. 유령아, 나야. 거기가 네 무덤이니? 너를 길이 아니라 무덤에서 보는 건 처음 같다.
유령은 대답이 없다. 유경과 아이가 천천히 다가간다.
아이 말이 없어요.
유경 얘는 말을 몰라.
아이 돼지 같아요.
유경 그럼 네가 돌보고 있을래?
아이 그게 일이에요?
유경 그래. 가만히 돌보고 있으렴.
아이 가만히 있는 거랑 돌보는 거랑 어떻게 같이해요.
유경 하다보면 알 수 있을 거야.
아이 어려워요.
유경 모돈이 새끼들한테 젖 물리는 거 봤지? 아주 얌전히 가만히 있는데도 자기 새끼를 돌보는 거잖아. 어렵게 생각하지 마. 무언가를 돌보기 위해서는 가만히 그 자리에 있을 수밖에 없단다. 응, 이제 알겠지? (뒷걸음질하며) 널 두고 가는 게 아니야. 알았지?
암전.
6장
희자와 유경. 각자 농기구를 들고 있다. 불안하게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희자에 비해 유경은 꿋꿋이 일을 한다.
희자 왜 애가 안 보이지. 너 못 봤니?
유경 숨 참고 있으니까 말시키지 마요.
희자 참 유난이다. 숨을 쉬어야지 코가 무뎌지는 거야.
유경 내 식대로 할래요.
희자 일이 중요한 게 아니라, 애가 없어졌다니까.
유경 말시키지 말라니까. 걔도 다 컸으니 놀러 어디 산이라도 갔나보죠.
희자 산은 내가 가지 말라고 했는데. 걔가 설마 내 말을 안 들을까.
유경 이제 말 안 들을 때도 됐어요. 대신 제가 일 많이 할게요.
희자 너 왜 이렇게 살갑게 구니? 깍듯하고.
유경 (팔짱을 끼며 다정하게) 왜? 이러는 게 싫어?
희자 허, 참. 하, 참 나. (팔을 풀어낸다.) 야, 거기 밟아봐라.
유경 참 나, 여기? 여기 왜 이렇게 부드러워?
희자 구제역 때 돼지를 파묻은 자리야. 산 채로 죽으면서 땅에 흡수되었지. 처음에는 땅이 끈적거리다가 물컹거리니 말랑해지더라. 썩으면 말랑해지는 거야. 뭐든지 그래. 사람도 마찬가지지. (사이) 무슨 수작 부리는 거야?
유경 수작이라니.
희자 난 네가 뭐라고 꼬드겨도 절대 폐업 안 할 거야. 여기서 뒈질 거야. 그 말랑거리는 땅 파서 하얀 돼지 뼈 옆에 누워 죽을 거야.
유경 그렇게까지 해야 해?
희자 그래.
유경 엄마는 하여간. 진짜 좆같이 굴어. 알아? 좆도 없으면서. 응?
희자 네가 그걸 쏙 빼닮았다.
유경 도대체 왜 여길 못 떠나겠다는 거야? 아빠가 돌아오기라도 할까봐?
희자 네 아빠를 내가 왜 기다리니.
유경 그럼 이해가 안 가. 이 망할 땅. 팔리지도 않는 여기서 산 사람까지 말려 죽이며 사는 이유가 뭔데.
희자 나한텐 이 양돈장밖에 없다. 내 전부를 두고 어딜 갈 수 있겠니.
유경 여기밖에 없다고 생각하니까 어디도 갈 수 없는 거야. 응? 애도 없어졌잖아. 제발 우리 여기 벗어나자. 엄마, 내가 나만 좋자고 이러는 거 아니야. 혼자 살려면 나도 혼자 살아. 같이 살자고. 응? 같이 살자고 이러는 거야. 사람답게 말이야. 잠도 자고. 꿈도 꾸고. 내 말 이번 단 한번만 들어줘, 엄마. 제발. (무릎 꿇고 매달린다.)
희자 (유경의 멱살을 잡고 들어올린다.) 네가 애를 어디다가 숨긴 모양이구나.
유경 (사이) (뿌리친다.) 숨겨? 숨기긴. 버리고 왔지.
희자 어디다 두고 왔어!
유경 엄마가 옛날에 나 버렸던 데에다 그대로 똑같이 버렸어. 기억은 해? 난 다 기억해. 어떤 나무를 지나고 웅덩이를 몇개 넘었는지. 발에 밟힌 풀 냄새가 얼마나 아린지까지.
희자 (사이) 그걸 기억하고 있었어?
유경 그래. 내가 엄마 닮아서 멍청하긴 해도 기억할 건 기억해.
희자 그럼 왜 여태껏 말 안 했어?
유경 난 그동안 엄마가 버리고 간 줄 몰랐어. 내가 엄마를 잃어버린 줄 알았지.
희자 멍청한 내 딸.
유경 멍청한 게 아니라 엄마를 믿은 거지. 그 애를 버리러 가니까 그제야 알겠더라. 엄마가 날 버리려고 했었다는 걸. 버릴 거면 제대로 버리기나 하지. 나처럼.
희자 엄마랑 같이 데리러 가자. 아직 안 늦었다.
유경 아냐, 늦었어. 엄마 혼자 잘 살아. 난 정말로 돼지나 치면서 살지 않을 거야. 난 정말 다시 오지 않을 거야. 나 혼자라도 끝을 낼 수 있다는 걸 돌아오는 길에 알아챘어. 다 끝장이야. 끝장이라고.
유경, 뛰어나간다.
암전.
7장
혼자 웅크리고 앉아 있는 아이. 유경, 다가간다.
유경 널 한참 찾았다.
아이 가만히 있었어요.
유경 안 무서웠니?
아이 무서울 게 뭐가 있어요.
유경 사실 내가 무서웠어. 네가 없어졌을까봐. 이제 돌아가자.
유경, 아이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운다. 끌고 걸으려고 하나 아이가 움직이지 않는다.
아이 언니, 사실 그동안 언니가 하는 말들 하나도 이해 못했어요.
유경 대답해줬으니까 괜찮아.
아이 그런데 여기 있는 동안 정말로 알게 된 말이 있어요.
유경 무슨 말?
아이 돼지 울음소리가 여기까지 쫓아왔어요. 들릴 리가 없는데 귀를 막아도 들렸어요. 눈을 감고 칼을 쥐었어요. 몇번이나 찔러도 더 악을 쓰고, 악을 써서 더 찌르고. 그게 한두번도 아니고 계속이었어요. 죽은 돼지들이 여기 무덤 가득 쌓였는데 눈을 뜨면 사라지고, 눈을 감으면 다시 악을 쓰고. 언니, 저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돈사에 가기 싫어요. 언니, 나 읍내에 갈래요. 서울도 갈래요. 이제 여기가 싫어요.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는 곳으로 갈래요.
암전.
8장
돈사.
희자 왜 돌아오지 않는 거야. 일이 이렇게나 많은데. 경찰에 신고를 해야 하나. (사이) 아냐. 꼭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면 그때 돌아오지. 완전히 떠났다고 생각하면 그때 돌아오는 거야. 다시 올 때까지 잊고 살면 되는 거야. 일하자. 일을 하자. 일을 하면 돼.
농기구를 꺼내오는 희자. 멀쩡한 대가 부러지거나 수레바퀴가 빠지는 등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 기어코 무리하다가 크게 넘어진다.
희자 (누운 채) 도대체 왜 이러지, 내가? 죽을 때가 됐나보다. 정말로. 그러면 땅을 미리 파둬야 하는데. 땅을 파줄 사람이 없는데…… 묻히지도 않고 죽을 수는 없어.
겨우 땅을 짚고 일어서는 희자. 웅크리고 앉는다. 유령이 옆으로 다가와 나란히 앉는다.
희자 너는 누구 유령이니?
유령 모르겠어.
희자 이목구비가 익숙해. 넌 내가 아는 유령일 수도 있겠다.
유령 내 무덤이 무엇인지 알아?
희자 아무 무덤이 네 것이야. 이 널린 땅, 이게 다 네 무덤이야.
유령 그럼 내 몸도 알아? 알면 내 몸을 돌려줘.
희자 네 몸? 네 몸은 저기 있지.
희자, 겨우 일어나 비척대며 축사로 들어간다. 따라가는 유령. 남아 있는 돼지들.
희자 봐라. 이게 네 몸이다.
유령 돼지잖아.
희자 그래.
유령 몸도 없는 놈이라고 날 놀리는 거야?
희자 아니야. 내 몸은 이것들로 이뤄져 있어.
유령 나는 아니야. 이건 내 몸이 아니야. (돌아선다)
희자 또 어딜 가려고.
유령 여긴 내가 살 곳이 아니야. 나는 갈 거야. 미안해. 정말 미안해. 나는 돼지 치면서 살고 싶지 않아. 한곳에 못 박힌 듯 사는 것은 사람답게 사는 게 아니야.
희자 그럼 사람답게 사는 게 도대체 뭐야.
유령 채 자라지도 않은 것들을 죽이며 살고 싶지 않아.
희자 대답해! 사람답게 사는 거랑 동물답게 사는 게 뭐가 달라! 돼지하고 사람하고 뭐가 다르냐고! 대답하고 가!
유령, 대답하지 않고 가버린다. 희자, 멀어지는 유령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배웅이라도 하듯 뒤돌아 서 있다. 유령이 사라지고 나서야 돼지들에게 다가간다.
희자 (쓰다듬으며) 그동안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너희에게 시키고 있었구나. 너희가 새끼를 낳으면 내가 그 새끼에게 사료 먹여 키워다 팔고 그렇게 번 돈으로 고기를 사다 먹고 그 힘으로 너희를 돌봤지. 그러는 동안 너희가 내 엄마가 되고 내가 너희 엄마가 되어버렸구나. 너희의 살과 뼈와 피가 내 살과 뼈와 피에 섞여버렸어. 끊임없이 서로가 서로를 낳고 있구나, 우리. 우리가 어쩔 수 없이 서로의 딸이구나.
막.
심사평
「돼지의 딸」을 읽으며 짜릿한 흥분을 느꼈다. 돼지를 치는 집이라는 독특하면서도 간결한 설정에서부터 무심한 듯 툭툭 던져지는 대사들이 힘있는 자장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네 등장인물이 둘씩, 셋씩 만나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차근차근 이어나가는 서사도 흥미를 자아냈다. 모놀로그나 유령의 등장 같은 연극적 어법이 쓰이고, 투박한 듯 리듬감 있는 대사들 가운데 사변적인 대사가 끼어들곤 하는데, 어쩌면 상투적이랄 수도 있는 그런 요소들도 글쓴이가 일부러 어떤 스타일을 구사하고 있기 때문이라 여기며 읽어나가게 되었다.
흥분이 컸던 만큼 결말은 성에 차지 않았다. 풍부한 상징을 띠는 것 같았던 키워드들의 의미가 쪼그라들어 흔한 관념 속에 갇히는 것 같았다. 어쩌면 이 희곡은 아직 미완성이라 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여덟장 중 두장은 길이가 유난히 짧은데, 쓰고 싶은 바를 마음껏 풀어내지 못한 상태로 투고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희곡을 당선작으로 뽑지 않을 도리는 없었다. 다른 응모작들의 수준을 현저하게 넘어서며 새 극작가의 출현을 예고하는 작품이라는 데 이견이 없었다.
이 희곡이 공연되는 기회를 얻는다면 그 과정에서 미진했던 글쓰기가 보완될 수 있을 것이다. 심사위원 중 한 사람은 ‘유령’의 존재를 매개로 후반부에서 더 드라마틱한 절정이 빚어지기를 바라고 있다. 또 한 사람은 이를테면 유령과 아이의 대화 같은 새로운 장면이 더해지며 이 희곡의 지평이 넓어질 수 있을 거라 기대하고 있다.
그다음으로 관심을 끌었던 응모작은 「뜨거운 아스팔트 위의 소녀들」이다. 두 십대 소녀의 만남과 대화로 이루어진 이 희곡은 그 문학성에 비해 연극성이 부족하다. 대사 속에 관념과 이미지가 넘쳐나는데, 읽어내기가 어렵다. 대사를 소리 내어 읽어보니 뜻이나 이미지가 도리어 더 흐려지는 것 같았다. 서사의 역동성이 적고 극의 시간이 너무 고여 있다는 불만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혹은 과거의 시간이 너무 많이 들어차 있어 인물들의 현존을 방해하고 있다.
다른 응모작 중에도 이 희곡처럼 기성의 세계에서 소외받아 주변부로 밀려나 있는 청춘들이 많이 나온다. 그건 요즈음 젊은이들이 느끼는 기성의 세계에 대한 불신과 불만에 의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소녀들의 세계 역시 단순한 이분법에 갇힌 채 너무 좁은 우물에 머무르고 만다는 아쉬움을 느꼈다. 이를테면 편의점 알바생이나 경찰로 보이는 남자 같은 인물들은 애초부터 살아 있는 인물로서 존재감을 부여받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보니 소녀들과 그런 인물들 사이에 제대로 된 교섭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밖에는 「옆집에 사자가 산다」와 「가장 완벽한, 직선」을 놓고 토의했다. 「옆집에 사자가 산다」를 기성의 드라마 문법에 대한 패러디로 쓰여진 희곡이라 이해한다면 그 재기발랄함에 감탄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비틀기를 통해 이 작품이 우리에게 무얼 던져주느냐 따진다면, 또 글쓴이가 품고 있는 자기만의 목소리가 무엇이냐 묻는다면 답을 찾기 어려웠다. 「가장 완벽한, 직선」은 무척 세밀하게 세 등장인물의 세계를 상상하고 기술해나가고 있다. 그런데 충분한 이야기나 정서가 쌓이지 않은 채 파국이 찾아온다고 할 수 있다. 그건 일종의 오픈-릴레이션십이라 해야 할 이 소재에 관해 충분한 이해 없이 글을 쓰기 시작했기 때문은 아닐까? 더불어 이 희곡이 연극이라는 장르와 잘 맞는가 하는 의문도 들었다. 너무 세세하게 대사와 동작, 심리가 제시되어 있어 무대화 과정과 공연의 재미를 위한 여지를 남겨주지 않는다. 또 이 이야기를 풀어놓기에는 단 사흘 동안의 시간이 너무 짧다는 생각도 들었다.
올해 대산대학문학상 희곡부문은 작년보다 응모 편수가 줄었다. 그래도 개성있거나 솜씨있는 원고를 적지 않게 만날 수 있어 다행이었다. 부디 극작가를 지망하는 대학생 여러분이 글쓰기를 위한 글쓰기, 당선을 위한 희곡쓰기보다는 인간과 세계에 관한 자신만의 경험과 통찰을 극작으로 전이해내는 도전을 이어가주길 빈다.
김수미 성기웅
당선소감
내가 말했던 문장들이 내게 돌아오고 있다.
그럴싸하게 한 대답이나, 뜻도 모르고 인용한 격언, 또는 다짐들.
지금 하는 말들이 또다시 어떤 무게로 돌아올지 몰라 두렵다. 그래도 이렇게 되어버렸으니 이제 그만 무서워하자고, 나 자신에게 부탁한다.
자기비난을 오랫동안 해왔던 내가 스스로에게 부탁할 수 있을 정도로 누그러진 것은 글을 쓰기 시작한 후부터다.
글을 쓰면서부터 나는 인물들에 대해 쓰기 위해 주변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미워하는 사람의 뒷면, 좋아하는 사람의 옆면, 그리고 나 자신의 정면.
오래전 그 문장을 말했던 내 모습을 돌아본다.
이제야 제대로 솔직하게 응시할 수 있는 기분이다.
이 기분을, 글쓰기를 좋아하는 마음을 오래오래 간직하고 싶다.
언젠가 이곳에 적은 문장들이 다시 내게 돌아올 그날을 위해 노력하겠다.
항상 글쓰기에 대한 마음을 일깨워주시는 조경란 선생님.
글을 쓰는 일이 외롭지 않다고 느낄 수 있게 함께해주는 연작 멤버들.
숭실대에서 절 지금의 모습이 되기까지 가르쳐주신 조성기 선생님, 최승호 선생님, 김인섭 선생님, 이재홍 선생님, 백로라 선생님, 김선아 선생님, 김미진 선생님.
짧은 시간이었지만 오랫동안 남을 가르침을 주신 고연옥 선생님. 함께하며 더 많이 배울 수 있게 해준 동덕여대 B207호 멤버들. 특히 가영과 현경.
고등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절 지탱해주시는 안보윤 선생님, 주원익 선생님, 은승완 선생님.
발표 날이 다가올수록 자신의 일기장에 내 당선을 빌어줬던 태영.
지금은 각자 다른 집을 갖고 있지만 분명 같이 살게 될 우리 이씨 셋. 본느. 상희.
나 대신 동전을 던져줬던 현정.
항상 내 자랑인 혜린.
같이 있기만 해도 즐겁고, 헤어지면 다시 만날 날이 기대되는 소중한 다솔과 원이.
짓궂은 나를 늘 웃으며 받아주는 선우.
늘 생각하는 안양예고 친구들, 소식을 듣자마자 연락 준 숭실대 사람들.
내가 미워하면서도 사랑하는 가족들.
부족한 글을 읽어주시고, 좋은 말씀을 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
그리고 이름을 적지 못한 분들까지.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사람들에게 한없이 감사합니다.
그리고 제가 실수를 저질렀던 이들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이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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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기석 「없는 나라」(『오렌지 기하학』, 문학동네 2012)에서 영향을 받아 쓴 구절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