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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박소연 朴昭姸
연세대 국어국문학과 4학년. 1995년생.
batto5@naver.com
오래된 비디오테이프의 동력, 그 마음을 움직이는 힘
최은영 작가론 1
1. 비디오키드의 비디오테이프
여기, 역사 속으로 사라져가는 과거의 친구가 있다. 자기테이프(magnetic tape)에 영상과 소리를 기록하는 수단인 비디오테이프는 IMF에 유년기를 보내며 문화 향유가 어려워진 80~90년생들의 주된 문화 향유 매체였다. 말하자면 그 시절 비디오테이프는 ‘키즈’에게 끊임없이 이야기를 들려주는, 모두의 친구였던 셈이다. 늦은 시간까지 오지 않는 누군가를 기다리며 캄캄한 어딘가에서 색색으로 번져가는 영상을 오래도록 바라봤던 기억, 동시대를 지나며 이러한 공유 기억을 가진 존재들을 이 글에서는 조심스럽게 ‘비디오키드’라고 명명해보고자 한다.
우리는 사회적 병폐와 맞닿은 개인의 고통이 연대를 통해 정치적 입장이 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으며 우리의 삶은 지점에서 지점으로 이어진다. 다시 말해 우리는 세월호, 강남역 살인사건, 대통령 탄핵의 단절면 이후가 아닌 연속선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럼에도’, 그 무엇도 한순간에 바뀌지 않았으며 우리는 여전히 일상 속에서 끊임없이 부조리를 마주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은 꾸준히 피로하고 때때로 버거운 것이다.
최근의 소확행 담론과 SNS로 표상되는 단문의 활성화, 즉 가벼운 고통과 적당한 행복을 전시하는 분위기는 무거운 현실을 외면하고 점점 더 가벼워지고자 하는 시대적 분위기를 보여준다. 그러나 동시에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러한 흐름 속에서도 우리가 지나온 지점들, 앞서 말한 사건들에서 생성된 분위기는 여전히 유효하다는 데 있다. 이는 타인의 고통에 귀 기울여 어떤 공동체적 연대를 이루려는 ‘진정성’에 기반한 윤리 또한 다시 유효해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때의 진정성은 어떤 주체가 성찰적, 참여적이게 하며 어떤 가치, 정신, 태도를 중시하는 사회적 구조를 다시금 재정립한다.2 그렇기에 이러한 사회적 담화는 문학에 되돌아와 문학이 무엇일 수 있느냐를, 즉 문학의 윤리와 의미를 다시금 물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단순히 문학이 다시금 정치적・사회적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요구로 회귀했다고만 보기는 어렵다. 문학은 시대에 따라 변하는, 유동적이고 말랑말랑한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비디오키드 최은영의 목소리가 값진 이유는 무거운 현실을 외면하고자 하면서도, 공동체적 연대를 이루려는 윤리 또한 유효해지고 있는 시대적 분위기에서 과거와 현재의 연속 지점을 당사자의 입장에서 직접 들려주는 목소리라는 것에 있다. 다시 말해 당사자를 표방하는 최은영의 목소리는 동시대적 감각과 감수성을 가진 목소리이며 이는 더 나아가 우리 모두가 같은 시대, 같은 구조 속에 있다는 점에서 모두의 당사자성으로 확장될 수 있다는 데까지 의의가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최은영의 비디오테이프는 시간의 결을 거슬러 올라 서사를 재현하고, 현재를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그 서사와 맞닿은, 공통된 감수성을 가지고 있는 우리를 강한 인력으로 끌어당긴다.
최은영의 서사는 오래된 비디오에 겹쳐진 내레이션과 같은 목소리에 기반을 두고 구축된다. 이를테면 요란한 전자음을 배경으로 뻣뻣하게 돌아가는 애니메이션의 장면처럼 정제된 모노톤의 세계이지만 동시에 선명한 목소리를 가진 세계인 것이다. 이는 우리에게 익숙한, 오래된 감각이지만 결코 빛바랜 감각은 아니다.
2. 순차접근의 방식
상처받은 기억들, 혹은 그때의 마음들은 “기억나지 않는 시간”(「지나가는 밤」)이 될지라도 어딘가에 “분명한 자국”(「쇼코의 미소」)으로 남는다. 충분히 슬퍼하고, 그 슬픔이 온전히 받아들여지지 못한 기억들은 현재의 우리를 자꾸만 멈춰 서게 만들거나 ‘이유 없이 아프다’고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더이상 아프지 않기 위해서는, 아프다는 것을 자각하고 왜 아픈지를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 치유는 상처를 발견하고 인정하며 시작된다. 우리에게는 분명히 알아야만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는 순간들이 있다.
비디오테이프는 ‘순차접근’만이 가능한 기억장치이다. 그렇기에 비디오테이프에 기억된 어떤 지점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그 서사를 차례로 판독하며 되짚어봐야 한다. 최은영은 우리를 덜컥 멈춰 서게 하는 ‘아픈 지점’을 찾기 위해 차례로 탐색을 실시한다. 그 ‘지점’을 찾기 위해서는 바로 파고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 지점의 전후, 더 나아가 시작과 끝을 모두 훑어봐야 하기 때문이다. 최은영은 우연한 계기로 어떤 관계가 시작되고, 깊어지며, 옅어지고, 끝나는, 그리고 그 이후의 지점까지를 조명한다. 지나온 마음들을 발견하고 위로하기 위해, 혹은 그때의 마음을 되돌려주기 위해 비디오키드 최은영은 비디오테이프를 천천히 재생시키는 것이다. 비디오테이프에 나열되는 서사들은 지금의 내가 왜 아픈지에 대해 말하기 위해 촘촘하게 기록된 유년의 서사들과 그 서사를 둘러싸고 있는 감정을 발굴하며 천천히 굴러간다. 이 비디오테이프에서 최은영은 이따금 아팠지만 아픈 줄 몰랐던 지점을 발견하기도 하고, 현재의 작은 행복에 몰두하며 과거의 상처를 애써 잊고자 하는 우리를 상처받은 그때로 끌고 가 “헐벗은 마음을 정직하게”(「한지와 영주」 174면) 바라보며 온전한 슬픔을 마주하게도 한다.
「쇼코의 미소」는 한국인인 소유와 일본인인 쇼코의 성장담이라고만 요약될 수 없으며 「그 여름」 또한 이경과 수이의 사랑 이야기로만 요약될 수 없다. 이 안에는 같은 구조 속에서 다르게 흘러가는 각자의 삶이 있으며, 복잡한 감정의 결들, 다시 말해 단일하지 않으며 계속해서 움직이는 마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 여름」에서 “이경과 수이는 열여덟 여름에 처음 만”난다(9면). 둘의 서사는 운동장을 가로질러 가던 이경이 축구부였던 수이가 찬 공에 우연히 얼굴을 맞으면서 시작된다. 이경은 수이를 볼 때마다 “철봉에 거꾸로 매달린 것처럼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13면)거리는 듯 마냥 들뜨고 떨리는 마음을 느낀다. 둘의 관계는 점차 깊어지지만 일찍 성정체성을 깨달은 수이는 둘의 관계를 들킬까봐 극도로 불안해하며, 이경은 그런 수이에게 서운함을 느낀다. 둘은 언제나 더 나은 미래를 약속하지만 그후 수이는 “아무런 악의도 없었다던 남자애의 ‘장난’으로 돌이킬 수 없는 부상”(20면)을 입은 뒤 축구를 그만두고 20살이 되고 나서는 자동사 정비소 일을 시작하며 바빠진다. 대학생이 된 이경은 바빠진 수이로 인해 더욱 외로움을 느끼고 레즈비언 바 사장이 추천한 까페에서 사람들을 만나면서 두 사람은 점점 더 멀어진다. 이후 이경은 까페에서 만난 은지에게 호감을 느끼고 수이와는 이별한다. 하지만 그 연애도 전 애인을 잊지 못한 은지로 인해 일년도 되지 않아 끝이 난다.
「그 여름」의 천천하고 느슨한 서사는 우리로 하여금 계속해서 변하는 마음이 미묘하게 틀어지기 시작하는 순간을 포착하고 균열의 지점을 목격할 수 있게 한다. 이경은 오랜만에 내려간 고향의 둔치에서 “이제 그곳에 수이와 다시 올 순 없을 거라는 예감”(26면)을 느끼지만 관계는 이때 끊어지지 않는다. 이 예감의 전후에는 어떤 전조가 있으며 예감 후에도 관계는 끝나지 않고 미묘한 균열을 계속해서 생성해나간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느슨한 서사를 따라가며 끝을 예감하는 순간의 앞과 뒤에도 서사가 있음을 알게 된다. 관계를 극도로 조심하는 수이에게 이경이 서운함을 느낄 때, 바빠진 수이로 인해 이경이 외로워졌을 때, 이경이 처음 은지와 마주쳤을 때, 이야기하지 않는 수이를 이경이 답답해할 때, 멋진 애인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마음에 이경이 수이를 부끄럽게 여길 때 당시에는 크게 문제되지 않았을 순간들이 관계의 균열을 생성하고 이전부터 서서히 틈을 벌리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최은영이 순차접근을 통해 포착하는 것들은 바로 이러한 순간순간이다. 감정이 세세하게 바뀌는 이 순간을 따라가며 우리는 나비효과처럼 그 미세한 균열들이 가지고 오는 끝을 찬찬히 목격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때 순차접근을 통해 제시되는, ‘모든 것은 천천히 변한다’는 명제가 잔인하다기보다 오히려 따뜻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이 천천히 흘러가는 섬세한 서사가 정확하고 집요하게 감정의 결들을 포착해내기 때문이다. 이러한 말하기 방식은 읽는 이에게 결코 간단히 축소될 수 없는 마음의 변화와 무게를 온전히 전달하며 우리에게 이해할 시간을 주고, 그 감각을 동일하게 느낄 수 있도록 하여 공감하게 한다. 그렇기에 이는 ‘누구나 그렇다’는 측면에서 오히려 따뜻한 위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3. 내레이터의 기능
내레이터는 어떤 상황에 대해 말하는 자이지만 장면에 직접 등장하지는 않으며, 현재의 관점에서 재맥락화되는 발화는 그때의 자신과 완벽히 동일하지 않다. 오래된 비디오테이프 역시 재생을 반복함으로써 조금씩 왜곡되고 단절되며 잡음이 섞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기에, 내레이터는 그 장면과 어느 정도 거리감을 둔 채 지나온 세계에 대해 복합적인 발화를 할 수 있게 된다.
고봉준은 “목소리를 낸다는 것, 말한다는 것은 내러티브(narrative)를 만들고 제공하는 행위이다. 그래서 한 인간이 지니고 있는 내러티브 능력을 부정하는 것은 결국 그 사람의 삶 자체를 부정하는 것, 그리하여 삶을 가치 없는 것으로 만드는 일과 동일한 효과를 낳는다”3고 말했다. 이 맥락에서 그는 “다른 사람의 ‘손’과 ‘입’을 통해 대신 표현되던 소수자들의 욕망이 점차 직접적으로 발화되고 있다는 사실은 꽤 중요하다”고 지적하며 “우리가 사는 세상은 자신의 욕망을 ‘대의/재현’의 방식으로 표현하던 시대에서 ‘직접’ 이야기하는 시대로 이동하고 있다고 생각한다”(39면)고 밝혔다.
목소리를 가진 존재는 어떤 ‘존재’ 혹은 ‘주체’가 되므로 비디오키드인 최은영의 발화는 희미해진 목소리들을 선명하게 한다. 그렇기에 이는 ‘보여지는 존재’로만 판단되었던 마이너리티에 주체성을 부여하며 거대한 구조 속에서 역사화되지 않은 존재들의 기록이 되고, 개인의 서사가 사회적 서사로 이어질 수 있는 지점을 갖는다. 이때의 당사자성은 동시대의 이야기로 확장되면서 과거와 현재에 연속적인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의미를 끊임없이 재생산한다. 모두가 같은 구조에 있다는 측면에서 확장될 만한 지점을 가지기 때문이다. 이 맥락에서 당사자성을 표방하는 최은영의 서사는 사회구조 속 폭력, 여성 문제와 청년 문제를 모두 포함할 수 있게 된다.
이때 내레이터로서 최은영의 가치는 진지하고 분명한 목소리로 고통에 대해 이야기함에 있다. 최은영은 ‘슬프지만…… 웃는다!’라는 신파적 담론에 머무르지 않으며, 그렇다고 위계를 전복하여 진정으로 슬픔 앞에서 웃어 보이지도 않는다. 그저 그 고통의 무게를 온전히 견딜 뿐이다. 그는 진지하고 분명한 목소리로 고통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는 그 고통의 몫을 고스란히 떠안는 자이므로 그에게 고통은 고통일 뿐인 것이다. 이 고통에 대한 진지한 사유는 어떤 고통도 경시하지 않는 태도로 이어진다. 또한 가감 없이 감정에 대해 말하는 솔직함은 우리의 마음을 묵직하게 건드린다. 이는 감정의 무게를 온전히 견디는 자의 말이 더 섬세하게 우리의 마음을 건드리는 것과 같은 결을 가진다. 서영채는 이를 두고 “어쩌면 감동이란 세련됨이나 참신함을 통해서가 아니라, 진부함과 미숙함을 통해서만 다가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4이 든다고 말했으나 이는 진부함이 아니라 ‘무엇을’ 말할지를 두고 가장 필요하고 명징한 ‘어떻게’를 활용해 말한 최은영의 ‘진심’이라고 하고 싶다.
마음은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왜곡되고, 가끔은 보잘것없어진다. 우리는 상처를 고백하고 슬픔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민폐인 시대를 경험해왔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는 여전히 진심을 말한다는 것이 쉽게 우스워지는 시대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맥락에서 내레이터 최은영은 더욱 빛난다. 최은영은 말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거운지 알고 있으며, 말하지 못하는 존재를 이해하기 때문이다.
“말에는 힘이 있”(「쇼코의 미소」 15면)으나 마음을 말하는 법을 잊어버린 사람들은 슬퍼도 슬프다고 말하지 못한다. 그들은 “생각하는 대로 말하지 못하고 슬퍼도 제대로 울지 못하는 사람”(「모래로 지은 집」 133면)이 되어 “슬픔을 억누르고 억누르다 결국은 어떻게 슬퍼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사람”(「쇼코의 미소」 48면)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징징거리지 않고 울지 않고 불평하지 않는”(「아치디에서」 208면) 것이 강하다고 생각하는, 다시 말해 마음을 말하는 것을 유약하다고 여기는 시대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우리가 말하지 못하는 마음이 상처가 됨에도 ‘말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과 같다. 이 ‘말할 수 없음’은 소통을 가로막고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하게 한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개인은 점점 더 단절되고 소외되는 것이다.
최은영은 “이야기, 숨기지 않고 해. 힘들면 힘들다고 말하고 싫으면 싫다고 말하”(「그 여름」 33면)라고 하면서도 “참지 말라고 말했으면서 정작 습관적으로 눈물을 참는”(「모래로 지은 집」 131면) 마음 또한 이해한다. 다시 말해 최은영은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말하기 자체의 중요성과 그 어려움을 모두 온전히 이해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최은영은 이 마음들을 오롯이 지지하며, “착하게 말고 자유롭게 살아” “울어서 미안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싫어”(「아치디에서」 282면)라며 아픈 마음에 대한 강한 위로와 지지를 보낸다.
4. 고통을 짚어내는 나선형의 윤리
나선형으로 돌아가는 비디오테이프는 그 누구의 서사도 구석에 두지 않는다. 이는 비디오테이프가 추구하는 나선형의 윤리가 아무도 구석에서 울도록 두지 않는다는 것과 같은 결을 가진다. 나선형은 모든 고통을 짚어냄으로써 어떤 고통도 소외되게 두지 않으며 고통을 위계화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모래로 지은 집」에서 선미는 자신의 고통을 이야기하지 않는 모래를 솔직하지 않다고 비난하면서도, 공무가 군대에 가고 학원 아르바이트 때문에 강원도에 간 자신 때문에 모래가 외로웠다고 말하자 “여기서 외롭지 않은 사람이 너 하나”(165면)였느냐며 모래를 비난한다. 또한 선미는 자신을 구속하는 나이 많은 남자친구와 헤어지지 못하는 모래를 두고 “충분히 벗어날 수 있는 상황에 다시 들어가놓고 나와 공무 앞에서 외롭다고 징징대다니”라고 생각하며 모래를 ‘단죄’하기까지 한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진짜 고통이 있는데, 고작 이런 일로 애처럼 울고 있다니”(166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음이 구겨져 있는 사람 특유의 과시”(127면)였으며 이때 선미가 말하는 ‘진짜 고통’이란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시달리는 자신의 고통과 권위적이고 위협적인 아버지로부터 학대받다가 현재에는 군대라는 또다른 폭력 구조 안에 있는 공무의 고통이었다. 그러나 이후 모래가 떠나고 나서야 선미는 자신이 모래를 오해했으며, 자신이 누구보다도 마음을 기댔던 사람이 모래였음을 깨닫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모래를 다시 볼 수 없으리라”는 것을 직감할 때, 다시 말해 완전히 그 관계가 끝이 나고 나서야 선미는 “말과 눈물이 나약함이 아니라 용기에서 나왔다는 것을” “고통을 겪는 당사자를 포함해서 어느 누구도 그 고통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판단할 권리가 없다”(180면)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최은영은 어떤 관계를 완벽히 잃게 됨으로써 이해하게 되는 과정에 주목한다. 다시 말해 어떤 상실로 인해 더 자랄 수 있는, 덜 미성숙해질 수 있는 그 지점을 긍정하는 것이다.
「아치디에서」의 하민은 딸이라는 이유로 모아온 돈 전부를 오빠의 결혼자금으로 빼앗긴다. 그러고도 삼교대로 돌아가는 병원의 노동을 견디지만 그 노동의 아픔을 말하는 사람들에게는 공감하지 못한다. 즉 하민은 스스로를 소외시켜가며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을 혐오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하민은 랄도에게 이러한 이야기를 털어놓음으로써, 마음이 유약한 랄도가 삶을 견디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듣게 되고 눈물을 흘린다. 자신의 아픔에 대해 말함으로써 자신이 ‘혐오했던 아픔’에 공감하여 눈물 흘리게 된 것이다. 랄도는 한국에서 가족들을 부양해왔다는 하민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의 깊은 우울증과 무기력으로 인해 자신을 부양해야만 했던 누나와 하민이 닮았다고 생각한다. 랄도는 하민이 자신의 고통을 보잘것없게 느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하민에게 위로와 공감을 받으며 자신이 엄마와 누나의 고충을 애써 모른 척해왔음을 발견하게 된다. 랄도 또한 자신의 고통을 털어놓고 인정받음으로써 타인의 고통을 인지하게 된 것이다.
최은영의 화자들은 모두 아프며, 가끔은 자신만이 가장 아프다고 생각하는 “마음이 구겨져 있는 사람 특유의 과시”(127면)를 갖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은 가까운 타자에 의해 자신만이 아픈 게 아니라는, 그 명징한 현실을 깨닫게 된다. 이때 더 나아가 자신 또한 누군가에게 상처 줄 수 있는 사람임을 깨닫게 되는 것은 어찌 보면 잔인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고백」에서 진희는 친한 친구인 미주와 주나에게 커밍아웃을 한다. 진희에게는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너흰 이해해주리라고 생각”(196면)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주나와 미주에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진희는 자살한다. 이후 미주를 피하는 주나로 인해 둘은 멀어지게 되고, 미주는 그런 주나를 원망하며 주나가 자신을 피하는 이유가 그때 주나가 진희에게 쏟아부었던 말들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만 후에 만난 주나는 미주가 진희를 “걔가 사람도 아닌 것처럼, 그렇게 경멸하듯”(206면) 봤다며 미주를 비난한다.
자신 또한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것을 자각할 때, 본인의 상처만 알고 ‘사람들을 다치게’ 하고 ‘망가지게’ 했던 본인을 오롯이 바라볼 때 우리의 세계는 날카로운 파열음을 내며 무너지게 된다. 그러나 이 무너짐이 오히려 긍정이 될 수 있는 것은 상처의 고름이 터짐으로써 오히려 고통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 서늘한 감각은 인물들이 미성숙함을 인정하고 이해하면서 조금 더 자랄 수 있게 한다.
또한 최은영의 서사에는 ‘나쁜 마음은 그래도 나쁘다’고 말하는 어린아이 같은 착함이 존재한다. 「모래로 지은 집」에서 선미는 공무의 아버지를 두고 “교통사고를 당해 끔찍이 아끼는 첫째 아들이 중환자실에 있으니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모래에게 “그 사람 감정까지 생각하고 싶지 않아”(125~26면)라고 말하며 공무보다 공무 아버지의 감정을 더 살피는 것 같은 모래에게 불쾌감마저 느낀다. 그러나 이때 모래는 선미에게 ‘아픈 사람’한테 잔인하게 굴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고통은 고통일 뿐이니 고통에 위계를 두어 고통을 모르는 척하려는 ‘나쁜 마음은 그래도 나쁘다’는 것은 맑고 깨끗한 진심이 되어 우리에게 와닿는다.
고통을 위계화하는 것은 오히려 자신의 고통을 더 심화시키며 타인에게도 상처를 준다. 그렇기에 모든 고통이 개별적이고 주관적이라는 생각만으로 고통을 받아들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각자의 상처에만 몰두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나 역시 누군가에게 상처 줄 수 있다는 것을, 모든 고통은 그저 고통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때 상처를 마주 보는 순간 상처의 치유가 시작되듯 미숙함을 인정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비로소 자랄 수 있다.
5. 모래로 쌓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연대
최은영은 실제 본인이 그렇게 생각하듯5 작품 내에서 무조건적인 화해와 연대를 긍정하지는 않는다. 최은영은 고통의 공감을 통해 약자들이 연대를 이루어내는 모습에 주목하기보다는 약자들끼리의 연대가 왜 어려운지, 왜 진정한 공감은 어려운지에 집중한다. 즉 공통된 상처로 인해 연대하기보다는 기존의 사회질서에 의해 연대하지 못하는 측면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먼 곳에서 온 노래」에서 기자가 된 95학번 선배는 “나도 여자지만 여자애들, 뭉칠 줄도 모르고 도무지 조직이라는 걸 이해 못 하잖아요”라고 말하며 신입생인 소은을 쏘아본다. 선배는 여자애들이 사회에 융화가 안 된다며 “우리 대학 여자들이 좋다는 게 뭐야. 제3의 성이잖아”(197면)라고 말한다. 즉 선배는 본인이 여성임에도 자신과 위계를 두어 또다른 여성을 비난하는 것이다. 이때 소은을 대신하여 미진 선배는 “김연숙씨나 잘하세요”라고 말하며 “여자인 게 그렇게 부끄럽고 괴로운 일이었어요? 여자들은 감정적이고, 분란 일으키고, 이기적이어서 조직 배반하기 쉽고, 여자의 적은 여자고. 그런 자기부정이 김연숙씨가 말하는 건강함이었습니까?”(199면)라고 쏘아붙인 뒤 자리를 뜬다.
이처럼 여성들이 연대하지 못하는 장면은 오히려 거대한 가부장적 구조 속 폭력을 고발하고, 기자 선배 역시 이 구조 속의 피해자임을 명징하게 보여준다. 연약함을 여자의 특성으로 치부하며 여자를 부정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기자 선배 역시 이러한 담론을 학습하게 된 피해자이기 때문이다.
「601, 602」에서 주영은 가부장적이고 남녀차별적인 분위기로 효진을 함부로 대하는 효진의 가족들에게 분노하고 차별당하는 효진을 안타까워하지만 동시에 화목한 가정인 척하는 효진에게 불쾌감을 느끼기도 한다. 이때 주영에게 두드러지는 감정은 효진을 안쓰러워하면서도 동시에 효진과 자신을 분리하려는 점이다. 아들을 낳지 못했다는 이유로 스트레스를 받는 엄마를 목격하면서도 더 차별받는 존재인 효진과 자신을 분리해 위계화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타자들이 ‘조금 더 나은’ 자신이 되기 위해 분투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명징한 것은 기자 선배와 소은, 효진과 주영은 분명 같은 구조 속에 살아간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남학생 중심으로 운영되는 집행부”(「먼 곳에서 온 노래」 199면), 그리고 계집애는 공부할 필요가 없다는 효진의 엄마에게 요즘 남자 여자가 어디 있느냐 말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 “넌 여자애야”(「601, 602」 96면)라고 말하는 구조 안에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셸러(M. Scheler)는 공감의 기본적인 구성요소로서 “이해” “뒤따라 느낌” “뒤따라 삶”을 제시한다.6 공감은 타인의 체험과 느낌에 대한 이해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이다. 이는 타자와 나를 동일선상에 놓는 것이 아니라 ‘이해’ 이후에 진정한 공감이 있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최은영이 말하는 연대는 우리가 서로 다른 사람임을 인지해야 한다는 것에서 시작하기에 얼핏 모순적이지만, 이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진정한 연대를 이룰 수 있다는, 즉 서로 다른 우리가 결국 같은 구조 속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함으로써 가능하게 한다. 앞서 말했듯 우리가 서로 같은 구조의 폭력 속에서 각자 고통받으며 살고 있고 모든 고통은 고통일 뿐이라는, 그 이해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군대에서 선임의 괴롭힘으로 인해 자살한 선배에게 “네가 이렇게 괴로울 동안 그런 줄도 모르고 잘 먹고 잘 살았다면서 미안하다고, 미안하다”(「모래로 지은 집」 135면)고 말하는 대목은 서로 다른 사람임에도 같은 구조 속에 살고 있기에 그 고통에 죄책감을 느끼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처럼 죄 없는 사람들의 죄의식은 다른 이의 고통에 마음을 기울이는 연대가 인간의 윤리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다른 사람이며, 다른 환경 속에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기에 우리의 연대는 모래처럼 연약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이 연대를 긍정할 수 있는 것은 무너진 모래를 다시 쌓게 만드는 ‘그런 밤’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기대고 싶은 밤. 나를 오해하고 조롱하고 비난하고 이용할지도 모를, 그리하여 나를 낙담하게 하고 상처 입힐 수 있는 사람이라는 피조물에게 나의 마음을 열어 보여주고 싶은 밤” “사람에게 이야기해서만 구할 수 있는 마음이 존재하는지도 모른다고 나의 신에게 조용히 털어놓았던 밤”(「고백」 209면) 말이다.
최은영을 신뢰하는 이유는 마음을 잃어가고, 말을 잃어가는 시대에 고통받은 마음에 대해 말하는 것을 민폐라고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이러한 태도를 긍정하는 따뜻함 때문이다. 진심이 쉽게 우스워지고 점점 더 가벼움을 추구하는 시대에서도 진심을 말하는, 그리고 서투른 시간들을 인정하고 반성하는 묵묵한 용기가 있기에 우리는 최은영의 소설에서 따뜻한 단단함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어쩌면 우리가 함께 흘린 눈물들이 모래를 더 단단하게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애니메이션 영화 「인사이드 아웃」(피트 닥터 연출, 2015)의 기쁨이와 슬픔이는 둘다 머리가 파란색이다. 슬픔까지 포용할 때 진정한 기쁨 역시 찾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최은영이 소설 속에서 이야기하는 관계의 단절이 슬픔에도 따뜻한 색감을 갖는 이유는 어쩌면 지금은 잃어버렸지만 지나온 마음들을 인정하고 포용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잊고 지내온 오래된 가치가 오히려 우리의 마음을 지지하고 굴러가게 할 수도 있는 것이다. 미숙하기에 서로에게 상처 주고 상처받았지만 시간은 그 상처들을 온전히 이해하게 하고 그때의 아픔조차 소중하게끔 한다. 한때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고, 미워했고, 상처 줬지만 공무의 카메라로 모래가 찍은 사진들처럼 그 시간들은 분명 유효하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때의 따뜻함과 색감은 유효할 것이라는 그 믿음, 나를 아프게 하지만 동시에 소중한 “시간과 마음” “잊을 수 없고 앞으로도 잊지 않을”(「모래로 지은 집」 188면) 그 시간들에 대한 신뢰는 최은영의 근본적인 따뜻함이다. 그리고 이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은 우리가 더이상 만나지 않아도 여전히 내 기도의 귀퉁이에는 당신의 안부가 있을 것이라는, 그 시절 비디오테이프 속 착한 캐릭터를 닮은 바보 같은 마음일 것이다.
심사평
이번 대산대학문학상 평론부문에는 모두 16편이 응모되었다. 예년에 비해서 수준이 높고 완성도가 뛰어난 글이 많아 반가웠다. 올해는 주제나 소재의 측면에서도 변화의 흐름이 뚜렷했는데, 페미니즘을 포함하여 한국사회의 정치적 이슈를 다룬 글들이 현저히 줄어들고 작가와 작품에 집중한 섬세한 평문들이 주조를 이루었다. 문학작품의 꼼꼼한 읽기를 시도하는 글이 늘어났다는 점은 반가웠으나 한편으로는 지나치게 작가나 작품의 입장에 기울어진 해설로 흐르는 경향이 우려되었다. 비평의 고유한 힘은 애정적인 독자로서의 충실한 읽기를 기반으로 하되 작품이 다루는 삶과 현실의 역동적인 지점을 면밀히 포착하는 데 있음을 강조하고 싶다. 대상작을 선정할 때 작품이 지닌 현재적인 의의에 대한 평자 자신의 고유한 문제 설정이 필요하며, 작품의 의의와 한계를 고루 지적할 수 있는 비평적 거리의 확보가 중요하다.
본심에서 집중적으로 논한 작품은 다음 네편이다. 「토르소의 시학: 안희연展」은 안희연 시를 가로지르는 상상력을 ‘부재의 미학’으로 정의하고 토르소의 상징성을 통해 작품을 읽어가려는 독특한 지점이 돋보였다. 덩어리의 상상력에 착안하여, 안희연 시에서 엿보이는 불완전한 주체가 지닌 가능성의 세계를 적극적으로 읽어내려는 시도도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시인의 첫 시집 자체에서 도출할 수 있는 가능성 자체를 지나치게 확장하려는 의욕 속에서 텍스트 해석의 충실함과 설득력이 떨어지는 아쉬움이 있었다. 젊은 시의 계보 속에서 안희연 시가 갖는 위치에 대한 비평적 평가도 보완되어야 할 지점으로 보인다.
「아토포스의 제국」은 타자의 환대와 소설의 모호한 존재들이 겪는 딜레마를 주시하는 정지돈 소설 고유의 특성을 집중적으로 파고든 글이다. 이론적 주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대상을 집요하게 분석하면서 평가를 이끌어내는 비평적 패기와 의욕이 돋보였다. 그러나 대상작에서 포착하려는 이론적 주제가 앞선 나머지, 작품이 실제로 성취한 문학적 의의와 한계를 제대로 평가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동의하기 어려운 대목이 적지 않았다. 아토포스의 의미와 타자 담론을 연결 짓는 데도 좀더 정치한 매개 고리가 필요하다고 본다.
「착란의 시간, 착상의 언어: 김민정 시 세계의 변모 과정」은 안정적이고 매끄러운 논의의 흐름을 지닌 글이다. 작가론의 형식 속에서 충실한 작품 해석을 시도함으로써 김민정 시세계의 궤적을 차분하게 서술한 점이 돋보였다. 아쉬운 점은 이미 상당한 분석과 평가가 이루어진 김민정 시의 기존 평론들과 이 글이 변별되는 지점이 선명하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선행 논의들의 성과를 명확하게 서술하고 본인이 새롭게 보는 비평적 지점이 무엇인지 부각할 필요가 있다.
「오래된 비디오테이프의 동력, 그 마음을 움직이는 힘: 최은영 작가론」을 당선작으로 뽑는 데는 흔쾌히 합의할 수 있었다. 비평 역시 독자를 대상으로 발신하는 글의 형식임을 상기할 때 이 글의 부드럽고 유려한 서술 방식은 큰 미덕으로 다가온다. 평자는 공동체적 연대의 윤리를 섬세한 감성으로 발신하는 최은영의 소설이, 문학의 윤리와 의미를 현재적으로 묻는 의미있는 텍스트임을 논리적으로 규명하고 있다. 비디오테이프의 상징성을 통해 효과적으로 논의를 전개한 점도 개성적이며, 무엇보다도 작가와 작품에 밀착하여 세밀하고 진솔한 읽기를 시도한 점이 돋보였다. 다만 고통을 사유하는 최은영 소설의 당사자성과 진정성을 강조하다보니 비평적인 거리 두기가 상대적으로 소략한 부분도 있다. 그럼에도 공감과 이해의 서사가 어떠한 방식으로 사회성을 지니는가의 문제를 한편의 글로써 설득력 있게 규명한 점이 값지게 평가되었다. 이 글을 출발점으로 삼아 좋은 비평가로 성장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당선자에게는 아낌없는 축하를 드리고 응모해주신 모든 분들에게 응원과 감사를 드린다.
백지연 한기욱
당선소감
저의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어쩌면 문학과 아주 무관하게 살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사실은 정말 그렇게 될까봐 많이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제가 여전히 문학을 사랑하고 문학의 힘을 신뢰한다는 사실이 큰 위안이 되기도 했습니다. 부족한 제 글을 믿어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복잡하게 얽힌 길 위에서 작은 이정표 하나를 발견한 기분입니다. 사랑하는 이 세계에 오래오래 머무를 수 있도록 열심히 배우고 부지런히 쓰겠습니다.
사랑하고, 그보다 조금 덜 미워하는 엄마 아빠
제가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게끔 하는 다정한 민서 언니, 형석 오빠, 명준 오빠
큰 응원이 되어준 서현, 유진
따뜻하고 보글보글한 행복을 주는 지현, 혜림, 미희, 다은, 혜진, 희진, 정민
덧붙여 일상 속에서 분명한 위로가 되어준 세렌디피티 지민이에게도, 모두 고맙습니다.
무엇보다도 지수야, 너는 존재만으로 내게 큰 위안이고 감사고 행복이야. 나와 함께 별을 봐주던, 또 앞으로도 함께 별을 봐줄 네가 있어서 나는 어떤 형태의 어둠이든 두렵지 않을 거야. 늘 네 편에 설게. 사랑 사랑 사랑해.
고민이 있을 때마다 흔쾌히 저를 위해 시간을 내어주신 정명교 교수님, 조강석 교수님, 그리고 인간과 인간의 윤리에 대해 고민하고 성찰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 연세대학교의 교수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저로 하여금 많은 것들을 다짐하게 한 이 순간과 이 순간의 마음들을 놓치지 않겠습니다. 어떻게 해야 좋은 어른이 될 수 있을지, 어떤 삶이 의미있는 삶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막연하지만 어찌되었든 그 방향을 향해 가겠습니다.
끝으로 이 지면을 통해 연세대학교 총여학생회를 지지한다는 말을 꼭 남기고 싶습니다.
문학이 제게 건넸던 무수한 위로들을 되돌려주며 살겠습니다. 모두 감사합니다.
박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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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최은영의 단편 「한지와 영주」 「쇼코의 미소」 「먼 곳에서 온 노래」(이상 『쇼코의 미소』, 문학동네 2016)와 「그 여름」 「601, 602」 「지나가는 밤」 「모래로 지은 집」 「고백」 「아치디에서」(이상 『내게 무해한 사람』, 문학동네 2018)를 참고했다.↩
- 김홍중은 「근대문학 종언론의 비판」을 통해 “근대문학의 종언은 근대소설의 죽음을 넘어서, 근대소설을 가능하게 하는 어떤 가치, 정신, 태도의 사회적 구조인 진정성의 윤리 그 자체의 죽음을 지시하고 있다”고 보았다. 『마음의 사회학』, 문학동네 2009, 131면.↩
- 고봉준 「다른 목소리들」, 『문학3』 2018년 2호, 32면.↩
- 서영채 해설 「순하고 맑은 서사의 힘」, 최은영 『쇼코의 미소』, 문학동네 2016, 276면.↩
- 최은영은 인터뷰에서 “화해하는 것이 언제나 좋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누가 누구와 화해하는가, 어떤 맥락에서 화해하는가, 무엇을 위해 화해하는가, 화해하는 당사자들의 관계성은 어떠한가. 이런 것들을 살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사회는 오랜 시간 약자들에게 강자와의 ‘화해’를 미덕으로, 좋은 것으로 강요하곤 하였는데요. 저는 쉽게 화해하지 않으며 끝까지 갈등할 수 있는 것도 용기라고 생각합니다. 화해는 부지불식간에 되는 것이 아니라, 잘못을 저지른 사람의 진정한 반성을 통해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과거의 허물을 인정하고 잘못을 저지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자세가 되어 있는 사람이 화해의 물꼬를 틀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시사저널』 2018. 8. 10)라고 말한 바 있다.↩
- M. 셸러 『동감의 본질과 형태들』, 조정옥 옮김, 아카넷 2006, 49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