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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신동엽 시의 ‘하늘’과 동학사상, 민중사관
김윤태 金允泰
문학평론가, 신동엽기념사업회 이사. 저서 『한국 현대시와 리얼리티』, 공편 『신동엽 시전집』 『신동엽 산문전집』 등이 있음.
windor2@hanmail.net
* 이 글은 기존의 『신동엽 시전집』(창비 2013)에 묶이지 않은 시 「우리가 본 하늘」 「복(伏)」과 미발표작 「백록담(白鹿潭)」에 대한 해설로 쓰였다. 이해를 돕기 위해 이 작품들을 395~403면(평론 뒷부분)에 별도로 수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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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신동엽 시인이 세상을 떠난 지 50년이 되는 해이다. 그것을 기념하여 지난 4월 초에 발간된 『신동엽 산문전집』(창비 2019, 이하 『산문전집』)을 편찬하는 데 필자도 참여하였다. 이 일은 신동엽문학관의 개관(2013.5.3)에 맞추어 발간한 『신동엽 시전집』(이하 『시전집』)의 후속 작업이었다. 그 작업을 하는 동안 신동엽의 육필 원고들을 찾아 대조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시 세편을 새로이 발견할 수 있었다. 두편은 시인이 살아생전 『현대문학』에 발표했던 것이고, 한편은 처음으로 공개되는 작품이다.
이 세편을 소개하는 데 필자를 망설이게 했던 것은 미발표작 「백록담」이다. 시인이 살아생전 발표하지 않은 작품을 굳이 찾아내어 새 발굴 작품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신중해야 할 일이 아닐 수 없다. 단지 습작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고, 시인 스스로가 태작(—作)이라 여겨 발표를 미뤄두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필자의 이러한 염려는 신동엽의 전집들을 편찬하면서 느꼈던 감회에서 비롯한다. 시인의 20주기에 맞추어 미공개 자료들을 모아 엮어낸 시집 『꽃같이 그대 쓰러진』(실천문학사 1988)에 수록된 시들 때문이다. 여기 수록작들은 대체로 완성도가 떨어진다고 필자는 보았기에, 더욱 조심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백록담」이 비록 발표되지 않은 것이긴 하나 비교적 완성도를 갖추었다고 생각되었고 관련 자료들과 비교할 만한 가치도 있어 보여서 공개를 결정하였다. 이 작품은 원고지 세장에 종서(縱書)로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는데, 시인 자신이 어느 매체에 투고하기 위해 청서(淸書)해둔 것으로 짐작된다. 그동안 필자는 신동엽문학관의 개관과 운영에 관여하면서 수많은 육필 자료들을 살펴봐왔는데, 그 결과 습작은 공책이나 금전출납부같이 큰 장부책, 혹은 그냥 백지에 끄적거려놓은 것이 대부분임을 알 수 있었다. 반면 매체에 발표하였거나 투고하려 했던 글들은 대개 원고지에 잘 청서되어 있었다. 그 점에서 이 시는 혹시 어느 매체에 실렸을지도 모르겠으나 아직 발견되지 않았음을 감안할 때, 현재로서는 투고용 청서 상태의 글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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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엽의 시들을 자주, 그리고 자세히 눈여겨 살펴본 사람이라면, 같은 표현이나 구절들이 여러편의 작품에 걸쳐 반복되거나 변주되고 있음을 쉬이 알아차렸을 것이다. 아마도 시인 자신이 젊은 날의 습작들을 훗날 가필하거나 수정하면서 의식/무의식적으로 그리됐을 수도 있고, 아니면 시인의 사후 전집이나 시집들이 거듭 출판되는 과정에서 선자(選者)들이 습작들 가운데서 가려 뽑아 추가하면서 발생한 오류 아닌 오류 때문에 그리됐을 수도 있다. 특히 장시 「금강」에는 서정단시로 발표된 작품들이 다수 녹아들어가 있다. 한 작품이 통째로 다른 작품에 포함된 경우도 있고, 거의 비슷한 표현들로 짜이거나 확대·개작되어 삽입된 경우도 있다. 전자의 예로는 「빛나는 눈동자」와 「산사(山死)」가 있는데, 이것들은 첫 시집 『아사녀』(문학사 1963)에 실린 작품으로서, 훗날 각각 「금강」 제3장과 제24장에 그대로 다시 등장한다. 후자에는 「종로5가」(1967.6)와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1969.5)가 있는바, 이 두편은 각각 「금강」과 비슷한 시기(1967.12)에, 혹은 그 이후에 유고1로 발표된 것이란 점에서 전자와 차별된다.
이번에 새로 발굴된 시 「우리가 본 하늘」(『현대문학』 1967년 9월호)도 후자의 경우에 해당한다. 이 시는 행갈이와 몇군데 표기를 빼고는 「금강」의 ‘서화(序話) 2’와 사실상 똑같은 작품이다. 아마 「금강」을 공개하기 전에 그 일부를 골라 미리 발표한 것이 아닌가 싶다. 마치 시 「종로5가」가 「금강」의 ‘후화(後話) 1’의 변주인 것과 비슷한 꼴이다.
제목에서 드러났듯 이 시에서 가장 눈에 띄는 지점은 첫 구절 “우리들은 하늘을/봤다”이다. “하늘을 봤다”라는 언술은 「금강」뿐만 아니라 신동엽 시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상징이자 관념이다. 그 언술은 곧바로 “1860년 4월 5일/기름 흐르는 신록의 감나무 그늘 아래서/수운은,/하늘을 봤다.”(「금강」 제2장, 『시전집』 108면)로 이어지는바, 동학의 1대 교주 수운 최제우의 시천주(侍天主) 사상을 그대로 옮겨놓았다. “사람은 한울님이니라/노비도 농사꾼도 천민도/사람은 한울님이니라//우리는 마음속에 한울님을 모시고 사니라/우리의 내부에 한울님이 살아 계시니라/우리의 밖에 있을 때 한울님은 바람,/우리는 각자 스스로 한울님을 깨달을 뿐,/아무에게도 옮기지 못하니라./모든 중생이여, 한울님 섬기듯 이웃 사람을 섬길지니라.”(「금강」 제4장, 『시전집』 116면)
수운의 시천주 사상은 2대 교주 해월 최시형에서는 사인여천(事人如天), 3대 교주 손병희에서는 인내천(人乃天)으로 발전하는 동학사상의 뿌리인데, 여기서 ‘하늘(天, 한울)’은 장시 「금강」의 전편을 지배하는 핵심 시어가 아닐 수 없다. 「금강」 제9장은 바로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시전집』 137면)라는 구절로 시작하는데, 거기에는 주인공 신하늬의 각성과정이 그려져 있다. 하늘을 가리는 먹구름과 쇠항아리를 하늘로 잘못 알고 일생을 살아가는 필부들의 시야를 넘어서 ‘영원의 하늘, 구원의 하늘’을 본 하늬는 ‘외경’과 ‘연민’을 알아차리고 마침내 전봉준을 만나 개벽(開闢)의 세상을 향해 나아가게 된다. 신동엽문학관 전시실의 작품 해설에는, “역사를 짓눌던, 검은 구름짱을 찢고” 나타난 그 ‘하늘’은 ‘희망적 세계의 표상’2이라고 씌어 있다. 그 ‘하늘’이 상징하는 바가 희망적 세계이든 평화공동체이든, 아니면 혹자의 주장처럼 한국인의 ‘영성’을 가리키든3, 그것은 기존 질서를 무너뜨리고 도래할 새로운 세상에 대한 시인의 열망과 혁명에의 의지와 관련이 있다.
「우리가 본 하늘」에서도 신동엽은 1960년 4·19혁명과 1919년 3·1만세운동과 1894년 동학농민혁명을 하나의 역사적 흐름 위에 놓고 있다. 이 세 사건을 한국사에서 다수의 사회정치적 약자인 ‘우리’, 곧 민중이 가부장적 독재정권, 일제 식민지 권력, 조선 봉건왕조에 맞서 싸웠던 천지개벽적인 거사, 즉 “잠깐 빛났던/(…)/영원의 하늘”(『시전집』 104면)로 보았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러한 민중혁명의 커다란 물줄기를 한국사의 정통성으로 보고자 하는 신동엽의 역사관을 어렵지 않게 읽어낼 수 있으리라.
장시 「금강」에서는 이후에도 “하늘을 보았다”라는 언술이 농민봉기 장면(제17장), 우금치 전투 장면(제20장), 시공을 건너뛰어 4·19혁명의 순간(제22장)마다 나타나지만, 가장 절정인 대목은 아무래도 동학농민군 지도자 전봉준이 교수(絞首)되기 전 남겼다는 말 한마디, “하늘을 보아라!”(「금강」 제23장, 『시전집』 308면)일 것이다. 절명의 순간에도 하늘을 보라고 한 혁명 지도자의 외침을 통해 시인은 죽음이 단지 패배가 아니라 또 새로운 싸움의 시작임을 암시하고자 한 것이 아니었을까. 애초 장시 「금강」의 제목을 “하늘을 보아라”로 하려고 했다는 것4은 공연한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처럼 “하늘을 보아라”라는 언술을 통해 획득된 각성과 새로운 혁명의 준비는 또다른 시 「수운이 말하기를」(1968)에서 보듯이, 이미 동학사상 내부에 예비되어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시인은 “한울님은 콩밭과 가난/땀 흘리는 사색 속에 자라리라./바다에서 조개 따는 소녀/비 개인 오후 미도파 앞 지나는/쓰레기 줍는 소년/아프리카 매 맞으며/노동하는 검둥이 아이,/오늘의 논밭 속에 심거진/그대들의 눈동자여, 높고 높은/한울님이어라”(『시전집』 386면)라고 노래함으로써, 동학사상을 현재적으로 재해석한다. 125년 전 농민혁명의 시점에서 오늘의 현실로, 한반도 조선에서 아프리카까지 시공간을 확장하며 동학혁명사상의 현재성을 피력하였다. 또 나아가 “밀알 한알이 썩지 않으면/언제까지나 한알로 있을 뿐이나,/땅에 떨어져 썩으면/더 많은 밀알 새끼 치느니라”(『시전집』 311면)고 한 수운의 말을 빌려와, 시인은 “한반도에서는/세계의 밀알이 썩었느니라”(『시전집』 387면)고 혁명의 연속성에 대한 갈망을 버리지 않았다. 따라서 신동엽에게서 ‘하늘’이 의미하는 바는 단순히 ‘시천주’와 같은 동학의 교리나 후천개벽의 세계를 고대하던 동학당의 이상에만 그치지 않고, 그것을 넘어서서 부패한 왕조에 맞서 싸우는 농민군들의 원망(怨望)과 새로운 평등세상을 꿈꾸는 혁명(개벽)에의 의지를 품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오래전에 읽었던 신동엽 평전의 한 대목이 생각나, 유족인 장남 신좌섭 교수에게 그의 조상들에 대해 질문을 한 적이 있다. 그 평전에는 “부친 신연순5은 애초엔 경상북도 금릉 사람이었다. 그러나 가세가 기울자 부친(동엽의 조부) 신현철을 따라 경기도 광주와 충남 서천 등지를 전전하다, 마침내 부여군 옥산면 홍연리에 이르게 됐으며, 그 뒤 얼마 안 있어 지금의 동남리에 정착하게 됐노라고 술회했다”6라고 적혀 있는데, 혹시 증조부가 동학당이지 않았느냐고 단도직입으로 물었다. 신교수는 긍정하는 표정을 지으면서, 자신도 어려서부터 조부로부터 동학에 관한 이야기들을 들으며 자랐다고 했다. 그러한 사연은 신교수의 시에 다음과 같이 아예 명시적으로 나오기도 한다.
① 갑오년/핏덩이로 어미 품에 안겨/부여에 숨어들어온 당신의 아버지/동학의 후예/적어도 난민이라 짐작하면서부터//할머니 등에 업혀/‘새야 새야 파랑새야’를 배우면서부터/당신 삶은 역사를/짚어오르기 시작했네7
② 동학년 어느날, 핏덩이로 어미 등에 업혀 부여에 숨어든 탓에 유난히 조상들을 그리워했던 할아버지,8
어쩌면 신동엽에게 동학은 모태신앙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그는 부친 신연순으로부터 들은 조부 신현철의 이미지를 「금강」의 신하늬에게 투사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선지자로서, 예언자로서의 시인인 자신을 또한 농민혁명군의 가상 인물 신하늬로 형상화한 것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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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살펴본 「우리가 본 하늘」이라는 작품은 이미 「금강」에 포함되었던 만큼 딱히 새삼스러운 점은 사실 별로 없다. 굳이 새롭게 주목을 하자면, 창작적인 측면에서 시인이 유독 집착했던 표현으로 “하늘을 보아라”라는 구절이 가진 의미연관일 것이다. 따라서 새로운 발굴이란 점에서는 오히려 「복(伏)」(『현대문학』 1963년 9월호)이 더 문제적이기도 하다. 총 6장 36연으로 구성된 이 시는 시인 스스로 ‘장시’라고 규정지었는데, 300여행에 달하는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보다는 확연히 짧지만(130여행), 서정단시들 가운데서는 비교적 긴 편에 속하는 「아사녀의 울리는 축고」(1,200자)나 「주린 땅의 지도원리」(1,226자)보다는 두배에 가까운 분량이다(2,045자).
이 시는 내용만 쫓아가다보면 맥락을 파악하기가 만만치 않다. 구체적으로 어떤 사건인지 특정하기 어렵고, 또 어느 시기를 배경으로 한 건지도 불분명하다. 마침 신동엽문학관에 보존되어 있는 육필 원고 가운데서 이 시의 초고라고 짐작될 만한 작품을 다행히 찾아낼 수 있었다. 1957~58년경에 창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작품의 육필 원고에는 시인이 제목을 정하는 데 매우 고심한 흔적들이 다수 남아 있다. ‘대피호(待避壕)’ ‘복담(伏譚)’ ‘말복담(末伏譚)’ ‘삼복(三伏)’ ‘대합실(待合室)’ ‘시생대(始生代)’ ‘경보(警報)’ ‘꽃뿌리’ ‘천여발(千餘把, A thousand and more arm measures)’ ‘흙굴’ ‘삼복행렬’ ‘전야(前夜)행렬’ ‘지천(地天)행렬’ ‘당신과 행렬’ 등등의 단어들을 백지 여기저기에 써놓았다. 그리고 시의 본문이 시작되는 곳에는 ‘역지(逆地)’ ‘조용한 계곡(溪谷)’ ‘저류(底流)’ ‘지수(地水)’ ‘기다리는 사람들’ ‘군사(群史)’ 등을 써놓고는 다 금을 그어 지우고 마지막으로 ‘대피호’로 제목을 정해놓았다. 그런데 정작 『현대문학』에 발표할 때는 초고를 꽤 많이 수정하였으며, 제목도 ‘복’으로 최종 선택하였다.
이 수많은 가제(假題) 중 ‘대피호’와 ‘행렬’ ‘흙굴’ ‘기다리는 사람들’이라는 어휘가 주목을 끈다. ‘흙굴’ 같은 ‘대피호’에 숨어서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행렬’ 혹은 그 이야기라는 줄거리를 만들어낼 듯싶기 때문이다. 이 시의 시간적 배경은 제목에서처럼 삼복더위가 한창인 7~8월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1장은 한여름 가뭄에 시달리며 굶주림에 지친 정황을, 그리고 2장에서는 사람들이 무언가를 간절히 기다리지만 아직 낙관하기 어려운 상황임을 암시한다. 3장은 어떤 혁명적 상황의 전야나, 아니면 그것이 실패로 끝나고 도망쳐 숨어 지낼 수밖에 없는 분위기 속에서 다시 무언가를 기대하는 듯한 느낌을 자아낸다. 독특한 표현으로 “이조(李朝)스런 병신들”이라는 구절이 있는데, 신동엽은 한국사의 지난 왕조들 가운데 신라와 조선을 가장 비판적으로 바라보았다. 특히 사대(事大)와 신분차별, 부패로 얼룩진 조선 왕조에 대해 가장 신랄한 편이었다. 여기서 ‘병신들’은 아마 가장 미천한 신분의 천대받는 사람들을 비유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시를 꽤 난해하게 만드는 것은 장면 전환을 서술할 때 영화에서의 교차편집(혹은 병행편집)과 같이 시공간을 마구 건너뛰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 시의 각 장면들에서 보국대, 구주탄광은 일제 말기를, 휴전선과 경원선 지뢰는 한국전쟁 시기를 연상케 한다. 또 한편 산속 동굴이나 참호, 창고 같은 장소에서 자하문 고갯길이나 동대문 전차의 도시 서울의 풍경으로 장면들이 휙휙 넘나드는데, 3~4장이 대체로 그러하다. 이어서 4장에는 그 기대조차 실은 그리 크게 바라기 힘들 거라는 체념과 한탄이 배어 있다. 특히 한국전쟁의 상황과 연관된 듯한 표현들이 나오는데, 미국을 떠올릴 만한 “전통 짧은 나라” 혹은 “빠다 가닥”이라든가, “가슴에 그어진 휴전선” ‘경원선’ ‘지뢰’ 같은 구절들이 그러하다. 5장의 장면은 천포창(天疱瘡)9을 앓는 사람에 대한 묘사이다. 어떤 고립된 상황과 장소(가령 동굴)에 부득이하게 유폐된 사람(들)이 처한 질병과 고통을 그리고 있다. 6장은 그러한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들의 간절한 갈망을 노래하는데, 여기서의 ‘동굴’은 애초 제목을 ‘대피호’로 정한 것과 연관이 있을 듯하다. “와야 되요. 노아의 홍수도 보다 시원한 것이어도, 오긴 와야 되요”라고 한 마지막 행은 세상을 완전히 뒤집어버릴 혁명의 도래와 같은 것을 암시하는 듯하다.
신동엽의 작품들에서 역시 자주 발견되는 것이지만, 이 시에서도 3장의 1연 2행은 「살덩이」(『창작과비평』 1970년 봄호)라는 작품과 그 시적 정황이 매우 유사하다. 전체적으로는 산을 내려가 퇴각 혹은 탈주하는 빨치산 낙오병들의 처지를 연상케 하는 작품이다.
우리들의 이야기는/걸레//살아 있는 것은/마음뿐이다.//마음은/누더기//살아 있는 것은/뼈뿐이다.//오, 비본질적인 것들의/괴로움이여//뼈는/겉치레//살아 있는 것은/바람과/산뿐이다.//그렇게 많은/비단을 감았지만//너를 움직이는 건/흔들리고 있는 것은/고깃덩어리 알몸//물건 없는 산/소나무 곁을/혼자서 너는 걸어가고 있고야//오, 작별한 냄새여/살덩이가/지금 저 산을/내려가고 있고야(밑줄은 필자, 『시전집』 418~19면)
그 외에도 유사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작품들은 더 찾을 수 있다. 빨치산 종군 경험의 형상화라는 일각의 주장으로 이념적 논란(『산문전집』 451면)에 이미 휩싸인 바 있던 「진달래 산천」에서도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은/산으로 갔어요”(『시전집』 16면, 18면)라고 했다. 이것과 연결지을 때, 「복」은 이미 산으로 간 사람들이 처한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서 변화와 희망을 기대하며 무언가를 ‘기다리는’ 이야기로 보인다. 그러나 시적 정서나 표현 면에서는 「아 사녀의 울리는 축고」나 「주린 땅의 지도원리」와 더 흡사하다. 특히 후자는 1963년 『사상계』 11월호에 발표되었는데, 「복」과 시기적으로도 연결이 자연스럽다. 표현에서도 더러 유사한 대목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들의 포둥 흰 알살을 덮은 두드러기며 딱지며”(『시전집』 352면), “그것은 산이었다./노루 없는 산/벌거벗은 내 고향 마을엔/봄, 가을, 여름, 가난과 학대만이 나부끼고 있었다.”(『시전집』 353~54면)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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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번째 발굴 시 「백록담」은 평소 등산과 유적 답사를 즐겼다는 신동엽이 1964년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서울-부여-목포-제주의 코스로 7월 29일에서 8월 8일까지를 기록한 「제주여행록」(『산문전집』 351~66면)과 함께 읽으면 도움이 될 것이다. 1연에 묘사된 시적 정황은 아래 인용한 기행문에서 그려내는 정황과 거의 일치한다(특히 밑줄 친 부분의 어휘나 표현 참조). 이 시의 창작 시기는 정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지만, 적어도 1964년 8월의 제주 여행 이후라고 보면 될 것이다.
부산 산악회원들이 회기(會旗)를 앞세우고 도착하다. 20명 가운데 여자가 3인. 용진굴 골짜기에서 밥을 짓고 있던 많은 선착객들이 박수갈채를 보내면서 환영하다. 여자 대원 3인에게 아낌없는 칭찬을 보내다. 남자 대원들은 모두 삼십대, 사십대의 장년들이다. 가장 완전한 장비를 갖춘 일행들이다. 그들이 선사한 오이냉국에 몸과 마음이 함께 쇄락해지다.
이따금 굵은 빗방울.
백록담은 안개 속에 가리워져 좀처럼 봉우릴 드러내지 아니한다.
오후 3시, 용진굴 출발.
가장 가파른 곳이다. 경사가 급해서 서서 기어오르는 듯한 느낌이다.
곳곳에 자연사한 ‘구상나무’의 하얀 둥치가 이국 풍취를 풍겨주면서 서 있다.
모두 한결같이 이름 모를 고산식물들.
‘노가리’ 나무 뽑다. 집에 가져가려고. 노가리나무 단장 만들다. 현선생의 호의.
왕관봉 능선 위에서 현선생 안내로 ‘시러미’ 열매 따먹다. (…) 새콤하고 달고, 한주먹씩 따서 입에 넣는 맛. 부인 냉병에 특효약이라 한다. 톳나물처럼 바닥에 새파랗게 깔려 있는 시러미나무에 팥알만큼씩 한 까만 열매.(밑줄은 필자, 『산문전집』 362~63면)
2연은 한라산 정상, 해발 2천 미터(정확히는 1,950미터)에 오른 시적 화자의 감회를 읊고 있다. 이 대목은 정지용의 대표시 「백록담」과 함께 읽으면 더욱 흥미로우리라 생각한다. 신동엽문학관에는 그의 애독서로 정지용의 시집 『백록담』이 보존·관리되고 있는데, 신동엽이 정지용을 염두에 두지 않고 이 시를 썼을 리 만무할 것이다. 정상에 가까이 올라갈수록 시시각각으로 변모하는 한라산의 풍경을 세세하고 치밀하게 묘사한 이 기막힌 절창의 명편을 신동엽이 어찌 감히 몰랐겠는가.
그러나 정지용의 「백록담」 시대에는 아직 알 수 없었지만 정지용도 한국전쟁으로 실종되기 전 언론을 통해 도저히 모를 수 없었을 1948년의 4·3사건은 이념갈등의 분쟁을 넘어 참혹한 양민학살의 현장이기도 했다. 1948년이면 신동엽이 전주사범학교 4학년 때이고, 당시 그는 동맹휴학에 가담하여 퇴학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만 18세, 아나키즘에 경도됐을 만큼 한창 사상적으로 민감했을 나이에 신동엽이 4·3사건을 모를 리 있었을까. 3연에서 “일찍이 육만의 사내들이 발치에서 찢기고 미쳐죽을”이라고 했듯이, 신동엽은 4·3사건의 희생자를 6만으로 보는 듯하다. 이제껏 학살 피해자가 대체로 2만 5천에서 3만명 선으로 알려져왔는데, 신동엽은 어떤 근거로 6만이라고 봤을까— 놀랍게도 최근의 한 주장에 따르면, 당시 제주지사가 미국 정보국에 전달한 정보에는 제주도민 사망자가 6만명이라는 것이다.10 기행문 「제주여행록」에도 4·3사건과 관련된 언급이 군데군데 나온다.
누구냐. 제주를 관광지라 말한 사람은. 배부른 사람들의 눈엔 관광지일지 몰라도 내 눈엔 구제받아야 할 땅이다.
그 모진 돌밭의 틈서리에서 보이는 건 굶주림과 과도한 노동과 헐벗음과 발악 아니면 기진맥진뿐이다.
제주는 구제받아야 할 땅이다.
제주는 가슴 메어지는 곳이다.(『산문전집』 355면)
관덕정 앞에서, 산사람 우두머리 정(鄭)이라는 사나이의 처형이 대낮 시민이 보는 앞에서 집행되었다고. 그리고 그 머리는 사흘인가를 그 앞에 매달아두었었다 한다. 그의 큰딸은 출가했고 작은딸과 처가 기름〔輕油〕 장사로 생계를 잇는다.
4·3 사건 후, 주둔군이 들어와 처녀, 유부녀 겁탈 사건.
일렬로 세워놓고 총 쏘면, 그 총소리에 수업하던 국민교 어린이들 귀를 막고 엎드렸다.(『산문전집』 357~58면)
또한 이 시는 제주에 관한 그의 다른 시 「서귀포: 제주기행시초(抄)」와 함께 읽어도 좋을 것이다. 시 「서귀포」 역시 제주 여행 후 어느 시기에 쓰였을 것으로 보이며, 아래 인용 ①과 ②에서 보듯이 밑줄 친 부분의 유사함에서 시와 기행문 간의 연관성을 쉬이 확인할 수 있다.
① 누군가, 이곳에 배 띄웠다 하더라./그날, 불로초는 몇 포대나 얽매고 갔을까……//천제연 가는 길엔 비만 흩뿌려오고/껌 파는 동생애들 밥 내가던 소녀가,/발밑 기어가는 바닷게를 잡아준다.//늪 속 열두길, 천연기념물이어선가 뱀장어/보이질 않고/양쪽 벼랑 이끼 묻은 화강암은/육지돌 같아 정다운데,//깍두기집 없는 포구에서, 또/나는 뉘와 더불어 서귀하란 말인가……//원주민의 남루는 바람에 날려 치솟고/먼 파도가 태평양다히 부서지는데//허기진 나그네의 허리 아래로, 팔월달의/빗물만 흘러나리더라.(「서귀포」 전문, 『시전집』 558면)
② 8월 2일
새벽부터 태풍.
비에 흠씬 젖으며 길가에서 게를 잡던 소녀, 천지연폭포 구경.
고(高) 22m, 심(深) 21m, 큰 뱀장어(천연기념물).
(…)
천지연에서 흰 모래가 박힌 화강암. 설악에서 흔히 보는 결 좋은 해성암(海成巖)을 발견하고 하도 반가워 혼자 큰 숨을 쉬었다.(『산문전집』 355~57면)
신동엽의 제주 관련 시 두편(「서귀포」 「백록담」)과 「제주여행록」 자체에서는 4·3사건이 슬쩍 지나치듯 언급될 뿐, 중심적인 주제로 자리 잡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앞서 말한 「복」과 같은 수많은 다른 작품들에서 이미 그는 민중들의 삶과 비애를 읽고 아파하지 않았던가. 신동엽이 아니고서야 1960년대 냉전과 반공이데올로기로 마녀사냥하던 시대에 어느 누가 감히 나서 제주를 이리 노래할 수 있었을까. 동학에서도, 신동엽에게서도 ‘사람이 곧 하늘’이었으니……
우리가 본 하늘
우리들은 하늘을
봤다. 1960(一九六○)년 4(四)월
역사(歷史)를 짓눌던, 검은 구름짱을 찢고
영원(永遠)의 얼굴을
봤다.
잠깐 빛났던,
당신은
우리들의 안창, 깊은
강물이었다.
하늘 물
한아름 떠다
1919(一九一九)년 우리는
우리 얼굴 닦아놓았다.
1894(一八九四)년쯤엔,
들에도 나무등걸에도
당신의 얼굴은 전체가
하늘이었다.
하늘,
잠깐 빛났던 당신은 곧 가리워졌지만
꽃들은 해마다
강산(江山)을 채웠다.
태양과
추수(秋收)와, 연애와,
노동.
동해(東海),
원색의 모래밭
사기 굽던 천축사(天竺寺) 뒷길
방학이면 등산모 쓰고
절름거리며 찾아나섰지.
없었다,
접시도 살점도,
바깥세상엔
없었다.
잠깐 빛났던
당신의 얼굴은
영원(永遠)의 강물,
끝나지 않는
우리들의 깊은
가슴이었다.
—『현대문학』 1967년 9월호
복(伏)
1
허지만 생각해보세요
성황당(城隍堂)이야 김삿갓 담뱃대 두드린 돌소리 담겼다지만
허기진 대장(大腸) 쇠소리나 채우랍시면.
설령 말입니다. 허릴 가누지 못해 칠십리(七十里) 이바짓질, 돌바람스런 숨결로 논물 퍼마셨다고 옛 얘기 들어봐요.
칡순 같은 건 말이 서지 안 해요.
쩔쩔 끓고 있었어요. 태양(太陽)이 박혀서, 논뺌이는.
고샹밭에선 허릴 다친 뱀이 철리(哲理)를 꿈꾸고 있었구요. 물론 빠알간 모자(帽子) 쓴 병사(兵士)가 단장을 짚고, 바늘끝 같은 꽃총(銃)으로 대낮의 풀밭을 외출(外出)하고 없었지만.
2
여보세요, 흰 등산모(登山帽). 보국대(報國隊). 솔뿌리 캐던 저녁나절, 고향(故鄕) 앞 지나가던 아가씨. 구주탄광(九州炭鑛) 돌 깎던 우리들의 가슴은 버금과 함께 녹아갔어요.
내일이면 바다에서 소식(消息)이 와요. 하지만 아주 먹구름일 거예요.
많은 사람들이 홰치고 밤을 울었쌓지만 새벽은 상기 멀어요.
돌아가세요 밤은 멀었어요. 나려앉으세요 창(槍)살이 날라요. 나려앉으세요, 작대기질 치며 장님이 와요.
3
엉덩이보다 불쌍한 게 또 있겠어요. 눈도 코도 없이.
오늘은 산(山), 어제는 자갈밭, 오늘은 벌거벗은 물건 없는 산(山), 소나무 곁을 지금 당신은 끌려가구 있군요. 하늘과 땅 움직이고 있는 건 살덩이뿐. 살덩이가 지금 저 벌거벗은 황토(黃土)산을 나려가고 있군요.
돌아오세요. 거미집마냥. 수제비 칼도마마다 애호박 풋고추였죠. 돌아오세요. 돌아오세요. 보고 싶었어요.
알고 보면 눈물은 아무 데고 없었어요. 바위돌 밑에도 나무등걸 속에도 손잽이에도 마음 한복판에도. 생각하면 기가 맥힐 나날은 이제부터 와요.
현대식궁성(現代式宮城)들 화려해요. 한톨 구슬꽃 삶아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온몸의 살들이 몸살했을까요. 푸석한 돌밭이 됐을 거예요.
왜 벌써 나려오세요. 한잔하셨구료.
무릎 깨지구, 바지 틀어지구, 비참하게시리…… 벌써 파장이 됐던가요—
여름은 숲으로 하늘로 휘어 오른다. 어느덧, 허면 가을은 시원스런 낫질로 하늘을 뻘어 따에, 흩는다. 겨울은 말없이 깔고 앉는다. 깔고 앉았다가 봄이 되면 슬그머니 물러앉는다.
그렇다 여름은 고향(故鄕)을 거역(拒逆)하고 내일(來日)로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허면, 우리들의 여름은 어디— 허면, 우리들의 여름은 어디—
이조(李朝)스런 병신들이여 산(山)으로 오르라.
이조(李朝)스런 병신들이여 다시 한번 궁성(宮城)으로 오르라. 올라서 네 눈엔 구데기지. 구데기 정상(頂上)에 기(旗)를 꽂으라. 사슴이의 멱에 대초롱 박고 마음껏 마셔라, 꼬아라.
아직 때가 아닌가봐요. 시끄러운 저 아우성 들어보세요.
얼른 내밀지 마세요. 아예 목청 가다듬을 때가 아니예요.
엉덩이짝 흔들기도 아까운 세상예요.
엎디이세요. 참호 속 엎디어 아무 꺼구 긴 작대기에 매달아 높이높이 흔들기나 하세요.
얼른 내놓지 마세요.
흙탕물 날라요.
입 벌리지 마세요. 자갈을 멕혀요.
4
주택(住宅)이 어디 있겠어요. 도야지우리도 못 되는 창고(倉庫)뿐. 쇠스랑이며 부서진 물레 자서 흙냄새도 없이 땅 없는 설움, 창고(倉庫)에서나 살다 가겠어요.
온종일 돌아다녀도 사람다운 발가락은 보이지 않더군요. 앉은뱅이 모이 줍듯 땅 후비며 시오리 아스팔트길 무릎 이겨 기었어요. 해질녘 들면 자하문 고갯길 석간(夕刊) 사 들고 지겟군 넘구요.
해지기 전 만나지면 다행예요. 그 꼴일 꺼예요. 돗자리 짐에 고무신 박쪽 매달고 둘이서 동대문(東大門) 전차(電車) 찾고 있겠죠.
회기(會期)가 끝나면 고향에 가요. 좀 섭섭하지만 고국(故國)으로 날라요. 아푸리카산(産) 진줄 가지고.
탑(塔)마다 기(旗)가 꽂혔어요. 바다를 열두달 날라도 뭍은 없구요. 찍고 있었어요. 대목(大木)을 찍듯, 골통엔 도끼를 찍혀요.
가뭄은 우리에게만 있었나요. 미인(美人)들의 얼굴도 금이 가고요. 손이 트고 논밭이 쪼개졌어요. 석달 열흘 먼지가 일어서.
도야지를 죽여서 마당 적셨어요. 소라도 잡아다 한접시 짜내야 했거든요.
전통(傳統) 짧은 나라, 너의 노래가
듣기 싫어. 빠다 가닥 같은 너의
시늉은 차마 견딜 수 없어.
그 뾰죽탑(塔)이 싫어.
어젯날 당신이 욕본 뜻은 할아버지가 너무 늙었기 때문. 내일(來日)은 당신의 망해야 할 날이 와. 건, 병신(病身) 자식을 슬하에 길러뒀기 때문.
눈물도 없이, 괴춤에선 바지가 흘러나리고, 역사(歷史)마다 등져 간 사람들은 한이 없어요.
가슴에 그어진 휴전선(休戰線)쯤 생각하면 뭘해요. 밀가루 반죽에 묻어둔 이스트처럼 경원선(京元線) 이쪽저쪽에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을 지뢰(地雷)쯤 생각해 뭘해요.
군시럽게.
군시럽게.
왜 알파베트일까. 통행금지(通行禁止)!
금강산 장안사(金剛山長安寺)에도 아침해는 뜰까.
신의주(新義州) 그 여관(旅館) 앞 전신주(電信柱)도 그냥 서 있겠지.
5
차마 당신을 미워할 순 없었어요. 당신의 눈동자 안엔 어제 냇가에서 길어온 물사발이 그대로 흐르고 있었어요.
그리고 흙 위에 앉아 공손히 풀 줄거릴 우구려 넣고 있었지요. 아침에 내 갔을 때.
그리고 난 당신을 보았어요. 아침저녁 무엇에 실려 다니는 서글픈 육신(肉身)들 가운데서.
손잽이를 쥔 채 당신의 가랭이는 바이 바이 꼬여서 앓고 있었어요.
언젠가 당신은 나의 아래 잠들고 있었지요. 목, 허리엔 금걸이가 무지개 돋고 살갗은 포등 희게 빛나고 있었어요. 허지만 당신의 목젖은 나비처럼 가녀리게 팔뜨락 팔뜨락 빨닥거리고 있더군요.
발가락을 보았어요. 그 오만하던 당신도 새끼발톱이 모냥 없이 짜부러져 있더군요.
그래요. 난 본 적이 있어, 당신의 미끈한 그 흰 각선(脚線). 임거정(林巨正)의 정자나무 마을 앞 삼복(三伏)도 고니 따던 그 논뺌이 속서 봤었어요.
6
여보세요 신사(紳士). 머리 너풀거려 재다간 냄새나는 동굴(洞窟) 속 해골처럼 뒹굴어.
설령 말입니다. 세상이 온통 낫질이라 해봐요.
헛간 속 풀덤풀 위 즐거운 사람과 살갗이나 맞대보겠어.
배고파요. 오늘은 풀밭 엎디이어 찐덕한 사람과 입술이나 빨아보겠어.
허지만 와야 되요. 노아의 홍수도 보다 시원한 것이어도, 오긴 와야 되요.
—『현대문학』 1963년 9월호
백록담(白鹿潭)
노가리, 구상나무 오백년의 고목(枯木)밭을 돌면서, 용진굴에 얻어 마신 오이냉국을 생각했다. 왕관릉(王冠陵), 흰 가슴 같은 구름밭 위에선 입술 새까맣도록 전설(傳說) 지닌 시러미를 따 넣고.
하늘은 더 멀기만 하더라. 해발(海拔) 이천미(二千米)의 정상(頂上)에서. 누구누구였을까, 이 호수(湖水)ㅅ가 용암(熔岩)돌 쓸어안고, 못다한 속세(俗世)의 오뇌(懊惱) 몸부림쳐 울고 간 사람은. 저 아래선 누더기 갈중이 속 말 잃은 노동(勞動)의 행렬(行列). 임자 없는 송아지의 커다란 눈동자가 침 묻은 입으로 소맷깃 부여잡으니, 우리들은 전생(前生)에 이웃 신선(神仙)이었었나.
일찍이 육(六)만의 사내들이 발치에서 찢기고 미쳐 죽을 때도 꿈틀거림 한마디 없이 초연(超然)한 자세로 하늘만 우러러 팔장 끼던 한라(漢拏). 발을 굴러보고 싶은 조국(祖國)이었다. 오늘은 낯선 나그네에게 손을 흔들어주는 부산 산악회 아가씨의 사람 그리운 눈동자만이 구름밭 위에서 승천(昇天)하려 하고 있구나.
—
-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는 시인 자신이 아니라 유족 혹은 잡지 관계자에 의해 수록된 것이라, 엄밀히 볼 때 그 창작시기를 확정하기 힘들다. 「금강」 제9장의 앞 8행까지는 거의 유사한 구절로 이루어져 이 시의 축소판이라 할 만하다. ↩
- 신동엽문학관 전시실의 해설 참조. 이 글은 신동엽 평전을 쓴 김응교가 쓴 것으로, 그는 한편 “「금강」 전편을 관통하는 ‘하늘’이란 이미지는 모든 사람들이 서로 돕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평화공동체를 상징한다”라고 평가하고 있다(『좋은 언어로: 신동엽 평전』, 소명출판 2019, 185면). ↩
- 김형수 「신동엽의 고독한 길, 영성적 근대」, 『신동엽 50주기 학술대회 자료집』(2019.4.5) 12면. ↩
- 이 말은 부여군 초촌면 산악전투 중 빨치산들이 전투 막판에 굴속에서 여러번 외친 구호라고 시인의 벗인 노문이 증언하고 있다. 『산문전집』 450면. ↩
- 신동엽의 부친 신연순은 바로 그 동학년, 곧 1894년생이라고 한다. ↩
- 윤재걸 「평전: 한반도의 민족시인」, 구중서 엮음 『신동엽: 그의 문학과 삶』, 온누리 1983, 235면. ↩
- 신좌섭 「아버지의 옛집에서」, 『네 이름을 지운다』, 실천문학사 2017, 84~85면. ↩
- 신좌섭 「정월 초하루」, 같은 책 92면. ↩
- 육필 원고에는 4장과 5장 사이 별도의 낱장에 ‘천포창’이라는 단어를 써놓았으며, 영어로도 “The name of an ulcer—that spreads”(퍼져 있는 궤양의 이름, 번역은 필자)라고 씌어 있다. 천포창은 피부에 큰 물집이 생기는 질환을 말한다. 그리고 두꺼운 글씨체로 ‘太白山脈’ ‘第二의 移住民’ ‘求心’ ‘故鄕’ ‘黃海’ 같은 단어들을 한자로 표기해두었다. 아마 또다른 제목들을 구상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저 추측할 따름이다. ↩
- 「“1949년 당시 제주지사, ‘4·3 희생자 6만명’ 美 정보국에 전달”」, 연합뉴스 2016.10.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