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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다시, 부패된 조건들을 바라보며

새로운 ‘관리철학’의 역풍과 최근 소설들의 분투

 

 

김녕 金寧

문학평론가. 201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주요 평론으로 「선명에서 창연으로」 「파괴의 반복을 기억한다는 것」 등이 있음.

cruciris@naver.com

 

 

1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이 남긴 마지막 저서 『레트로토피아』(Retrotopia)1의 서문은 벤야민(W. Benjamin)의 잘 알려진 「역사철학테제」의 한 대목을 인용하면서 시작된다. 파울 클레(Paul Klee)의 「새로운 천사」에 대해 남긴 메시지로서 과거와 미래가 “각각의 미덕과 악덕을 서로 맞바꾸는 과정”을 포착한 글이다. 바우만은 벤야민의 통찰을 빌리되, ‘지금’ 「새로운 천사」를 다시 살펴보면서 “역사의 천사는 유턴하는 중”이며, 당대의 폭풍은 “뒤쪽으로”(24면) 불고 있다고 사태를 뒤집는다. 그러니까, 역사는 미래가 아니라 과거를 향해 방향을 바꾸었다. “미래는 희망과 올바른 기대가 발생하는 서식지”가 아니라 “악몽의 장소로”(30면) 전환되었다. 낙관적이고 활기 넘치던 유토피아적 미래에 대한 희망이 패배주의적으로 낙담한, 그러나 안온하게 여겨지는 과거에 대한 향수(鄕愁)로 젖어가고 있다.

물론 이러한 논의는 핵과 개인무장이 증강되고, 국경장벽을 강화했으며, 월가 점령 시위는 실패로 돌아간 미국의 사정을 주된 근거로 삼는다는 점에서 한국사회의 상황과 딱 맞아떨어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다행스럽게도, 우리의 ‘역사의 천사’는 괄목할 만한 전진을 이루지 않았던가. 개개인은 ‘나’라는 단자로서 사적 영역에 유폐되는 대신 광장의 경험을 갖게 되었고, 리부트된 페미니즘은 ‘으레 그러한 것’으로 치부되어온 성차별적 관습에 경종을 가하고 개인의 문제로 환원되어왔던 성폭력 문제를 공론화하고 척결하면서 ‘연대’의 새 지평을 열었으며, 퀴어를 필두로 한 새로운 다원주의의 부상은 타자 인식의 제고를 가져왔다. 주지하다시피 최근의 한국문학 역시 전환을 맞은 ‘새로운 감수성’에 부응하고자 안팎으로 변화하고 있다. 광장을 시작으로 한 일련의 경험이 한때 ‘전망 없음’으로 채색되기도 했던 문학의 미래 구상에 대안적 가능성이라는 새로운 색채를 공급해준 셈이다. 대체로 상황은 바우만이 경고하는 레트로토피아를 향하기보다는, 미지의 영역에 놓인 두려운 미래를 더 낫고 올바른 세계로 주조하려는 의지와 그럴 수 있다는 희망을 끌어안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최근의 어떤 소설들은 그러한 낙관에 제동을 걸려는 듯 어렵사리 마련한 대안과 활로에 다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심지어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가치관의 재현까지 시도하면서 이들이 보여주려 하는 ‘한계상황’은 단지 대안의 구상과 실천에 뒤따라오는 현실적인 어려움의 개별 사례로도 보인다. 어쩌면 이들은 긍정적인 전진에 들이닥친 역풍을 ‘새로운 위기’로 인식하고 날카로운 경고음을 발신하는 것은 아닐까. 이것이 그저 기우에 불과한지, 아니면 정말로 대비해야 할 폭풍인지를 식별하려면 아무래도 바로 그 ‘최근의 어떤 소설들’을 뜯어보아야겠다.

 

 

2

 

전진, 그러나 거꾸로 부는 바람. 이처럼 상반된 두 방향의 힘과 관련해, 장희원의 「우리〔畜舍〕의 환대」2는 제목에서부터 의미심장한 암시를 던져준다. 공동체의 내부자로서 외부를 향해 가져야 할 태도로 흔히 상상되곤 했던 ‘환대’가 ‘(내부인) 우리가 보내는 것’이 아닌 ‘외부가 보내오는 것’으로 전도되어 있고, 환대에도 불구하고 내부의 시선은 외부를 ‘축사’로 명명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소설은 재현 부부에게 초점을 두고, 그들이 아들 영재의 초대를 받고 호주로 건너가 영재와 동거인들의 환영을 받는 상황을 그린다. 한데 이 집에 사는 사람들이 “손님인 그들을 위해 최선을 다”(216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부는 시종일관 어떤 불온·불쾌·불편한 느낌에 사로잡혀 긴장한다. 그 불쾌의 근원은 재현과 아내에게서 각각 다르게 상상되지만, “아들과 흑인 노인, 어린 여자애가 함께”(215면) 살고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는 점은 공통적이다. 아내가 묘한 불편을 느끼는 지점은 문신한 허벅지를 훤히 드러내놓고 다니는 민영과 아들이 한집에 살고 있다는 데서 주로 비롯되고, 재현이 예민하게 신경을 쓰는 건 아들과 흑인 노인 사이에서 빈번하게 이루어지는 스킨십이다.

이러한 차이는 과거 영재가 고등학생이었을 때 포르노와 관련한 에피소드에서 해명되듯이, 아내의 경우엔 영재가 포르노를 보았다는 사실만 알고 있는 데 반해 재현의 경우엔 그것이 게이 포르노였다는 데까지 아는 점에서 연원한다. 요컨대 아내에게 영재는 의심 없는 ‘이성애자’여서 여성인 민영이 불안의 대상이지만, 아들이 ‘게이’일 가능성을 ‘더럽게’ 생각하는 재현에겐 흑인 노인이 불안의 대상인 셈이다. 소설에 영재와 흑인 노인 그리고 민영의 실제 관계를 확정 지을 수 있는 근거는 명확히 제시되지 않는다. 다만 아버지로부터 “더러운 놈”(209면)이라 모욕당하고 심한 폭행을 당했던 영재에겐 그들이 유효한 ‘대안적 가족’일 것이라는 짐작은 가능하다. 재현을 두고 “오빠한테 그렇게까지 했던 사람으론 안 보”인다며, “오빠가 저희랑 함께 살게 돼서 다행”(271면)이라는 민영의 말 역시 그 점을 뒷받침한다.

즉 영재의 ‘소속’은 이미 재현 부부가 아닌 흑인 노인과 민영 쪽으로 옮겨져 있다. 영재의 입장에서 이날의 저녁식사는 자신의 부모, 그러니까 종전의 ‘가족’을 ‘룸메이트’들과 함께 맞이하는 행사가 아니다. 오히려 스스로 선택한 ‘새로운 가족’과 ‘함께’ ‘부모’를 환영함으로써, 혈연이 부여한 전통적 가족관계와 결별을 선언하는 행사에 가깝다. 영재에겐 새로운 가족을 옛 가족으로부터 ‘승인’받아야 한다는 의무감이나 강박이 없다. 이미 ‘가족’은 재편되었다. 다만 ‘부모’와 관계 자체를 단절하는 대신 환대하여 받아들일 뿐이다. 그러니 자신들이 “이제 영원히 아들을 잃었음”을 깨닫는 중이라는 재현의 상념은 정확한 것이며, 재현이 “그들의 모습이 너무나 눈부시다는 듯”(220면) 눈을 움찔거렸다는 묘사는 그가 영재가 자리 잡은 새로운 공동체의 가치를 모르지는 않음을 암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영재의 새 보금자리가 ‘축사’로 호명되는 제목은 재현 부부가 최종적으로는 그 새로운 공동체를 받아들이지 못한 정황을 가리킨다. 그들은 가족관계의 전통과 규범에 어긋나는 낯선 가족 형상이 불러일으키는 ‘이름 붙일 수 없음’의 공포 안에 있고, 외부를 짐승들의 ‘축사’로 격하하는 방식으로 그 공포를 불식하고 붕괴된 혈연가족 공동체의 안온한 울타리를 재건하고자 하는 셈이다. 즉 여기서 재현되는 재현 부부의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입장이 보여주는 바는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인식의 확산에도 불구하고, 나아가 그것에 맞서 더더욱 단단한 수세를 구축하려는 움직임이다. 오히려 이 소설의 아쉬움은 진전된 인식에 대한 역풍으로서 재현 부부의 입장에 집중한 나머지, 영재가 몸담은 공동체의 실제적인 세부를 생략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의 관계를 이해할 단초를 재현 부부의 짐작과 통념에 기댄 추측에서 찾을 수밖에 없어 실제로 그들이 생활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습은 보기 어렵다는 점 말이다. 물론 그건 영재와 공동체에게 환대의 ‘주체’의 자리를 할애하고 있기에 발생하는 일이기도 하겠다.

이러한 사실들을 고려하며 정리하자면, 우선 기존질서의 불합리에 반한 대안공간의 고안에 도달한데다 그 자신이 거절했던 기존질서에 환대의 손까지 내미는 영재 쪽의 낙관적인 힘이 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반대편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낯선 변화 앞에서 ‘인정의 주체’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게 된 기존질서가 당혹감 속에 자기보호의 담장을 더욱 공고히 둘러치고 있다. 이는 기존질서가 환대의 제스처를 취할 준비가 되어가기는커녕, 오히려 환대를 보내오는 새로운 주체들을 더욱더 강하게 거부함으로써 악화되어가는 상황을 나타낸다. 이는 실제로 보수성이 두드러지는 공적 영역이나 일부 종교계의 반응이기도 하다.

그런데 아들의 낯섦을 받아들이기 위해 낡은 규범을 버리는 대신, 익숙해서 아늑한 규범을 지키기 위해 차라리 아들을 잃는 쪽을 택하는 재현 부부의 모습. 역시 동일한 거센 역풍에 속하지만, 실은 더 나쁜 상황에 대한 경고 신호를 발산하고 있다. 바로 국가·민족·종교라는 커다란 범주의 ‘먼 외부’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개개인의 바로 곁에 밀착된 채 세워진 ‘구분’의 울타리—‘차이’를 존중하는 대신 ‘격리’시키려는 울타리에 대해서 말이다. 앞으로 나아가려는 발걸음에 제동을 거는, 환대를 거부하며 세워진 이 울타리를 어떻게 넘어야 할까? 그 앞에서도 환대는 여전히 유효할까? 현 단계에서 「우리〔畜舍〕의 환대」만으로는 그 답이 잘 보이지 않는 것 같다.

 

 

3

 

얼마간 ‘동네’ 단위의 소규모 지역공동체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작업해온 김혜진의 소설을 이쯤에서 긴요하게 읽을 수 있겠다. 특히 최근 소설 「불과 나의 자서전」3은 본디 하나의 ‘남일동’이었으나 행정구역 개편으로 양분되어 재개발 무산과 성사라는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된 ‘남일동’과 ‘중앙동’의 내력을 서술하면서 시작된다. 물론 소설이 겨냥하는 것은 도시개발로 인해 구획된 공간의 계층화뿐만 아니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심상에 그어지고 있는 모종의 구분선들이다.

아닌 게 아니라 개발이 이루어진 중앙동 사람들은 남일동을 ‘남일도’로 바꿔 부르는데, “섬처럼 고립되어 있는 동네라는 뜻”(183면)이라는 화자의 설명대로 격하의 의도를 지닌 멸칭임은 분명해 보인다. 남일동에 대한 대단히 부정적인 인상과 평가는 소설에서 여러차례 반복된다. “그곳엔 미래라고 할 만한 게 없다고 여겼던 것 같”다거나 “체념이나 포기 같은 것을 빨리 배우게 되는 동네”(187면)라는 진술은 물론, “나 역시 남일도를 고작 숨기 좋은 동네쯤으로 여긴다”(194면)는 고백까지도 ‘저 동네’에 대한 부정적 인상을 요약적으로 보여준다. 특히 ‘나’의 아버지는 분명 남일동에 살았고, 거기서 화자 ‘나’를 낳기까지 했는데도 “우린 남일도에서 산 적이 없다”(186면)며 작금의 낙후된 ‘남일도’와 거리를 두고자 애쓰기까지 한다.

그것은 “타인의 섬뜩한 운명으로부터 격리되는 것은 불가능”(바우만, 앞의 책 54면)해진 조건 속에서 발현되는 일종의 방어기제처럼 보이는데, 그렇다면 그 방어적인 태도는 남일동과 중앙동이 너무 달라서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저 ‘남일도’로부터 충분히 멀어지지 못했다고 여기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일 터, 아버지에게 ‘남일도’는 ‘실제로’ 아주 근접한 곳에서 도드라져서는 사라지지 않는 불쾌한 운명의 현현이며 겨우 빠져나온 곳으로 다시 추락할지 모른다는 공포를 자극하는 이미지인 셈이다. 그래서 그곳은 더더욱 ‘구분’하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그렇게 해서 이 새로운 구분선은 자기 계급의 ‘위’나 ‘아래’ 대신 ‘옆’을 향해, 이웃을 향해 세워지고 있다. 그러니 ‘남일도’라는 명칭은 실제로 그 동네가 ‘섬처럼 고립’되어 있기 때문이라기보다 그렇게 고립시키고 ‘싶기’ 때문에 부여된 것에 가깝다. 이러한 외부로부터의 ‘선긋기’와 ‘전망 없음’의 이미지는 남일동에 무기력의 공기를 짙게 드리우는 데에 일조했을 것이다.

그러한 남일동에 변화를 가져온 인물이 ‘주해’이다. 약국에서의 작은 호의를 계기로 주해와 그녀의 딸 인아와 차츰 가까워지면서 ‘나’의 생활에는 모종의 활기와 “긍정적인 에너지”(193면)가 생겨나는데, 그건 ‘나’뿐만 아니라 동네 전체에도 마찬가지이다. 특히 세 사람으로 시작했던 ‘프리마켓’은 약국 앞의 공간을 작은 광장 삼아, 동네 주민은 물론 멀리서도 사람들이 찾아오는 행사로 발전한다. 이러한 풍경은 흔히 위에서 내려오는 탁상행정상의 ‘마을 활성화 사업’과는 다른, 주민공동체의 자치로서 아래로부터 만들어낸 대안적 미래 구상의 맹아를 포함하는 듯 보인다. ‘나’의 표현대로 주해가 가져온 변화는 “남일도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겼던 것, 그래서 달라질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바꾸는” 것, “습관처럼 인이 박인 어떤 것들에서 충분히 벗어날 수 있다는 걸 보여준”(213면) 것이었고, 그것은 곧 무기력한 ‘미래 없음’의 자리를 다른 희망의 가능성으로 메꾸어나가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일도가 꾸기 시작한 진일보의 꿈은 다시금 곤경에 부딪힌다. 그것은 물론 재편되는 공동체 내부에서 발목을 잡는 요소들, 가령 변화를 주도하는 주해에게 모든 역할과 책임을 덧씌우는 “무리한 요구”들이나 “이기적이고 얌체 같은”(205면) 행태로도 기입되기는 하지만 이러한 목록은 다소 부수적이다. 여기엔 설명이 좀 필요한데, 우선 이 소설이 ‘남일동’에 대한 이야기이면서도 중앙동 쇼핑센터의 햄버거 가게에서 주해와 가게 주인의 언쟁을 둘러싼 ‘뒷말’들로부터 주해를 변호하고자 쓰이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짚어야겠다.

인아가 화상을 입은 사고에 대해 책임을 회피하는 가게 주인에게 주해가 거세게 항의한 끝에 마침내 사과와 재발 방지 약속을 받아낸 일, 그리고 마침 포스기 앞에 있던 저금통이 떨어져 박살 난 일. 그 별개의 사건이 “대단한 몸싸움”(233면)이 있었던 것처럼 과장되어 주해에 대한 악담이 퍼지고 있는 상황에서 “주해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겠다”(183면)는 결심의 결과물이 곧 이 소설 자체에 해당한다. 이를 고려하면 이 소설의 제목은 주해에 대한 변이 되지 못하고, 단지 ‘나의 자서전’에 ‘불과’해졌다는, ‘나’의 실패를 암시하고 있지 않은가.

‘나’는 왜 주해에 대해 쓰려던 말들이 ‘불과’ ‘자서전’으로 낙착되어버렸다고 판단하는 것일까? 우선 그것은 쓰기 위해 돌이켜보는 과정에서 스스로 남일동이나 주해를 동등한 위치가 아니라, ‘외부자’의 시선으로 대했다는 자각과 반복적으로 부딪히면서 귀결된 자리이다. 실제로 남일동에 대한 생각을 돌이키는 가운데, 그때엔 그것이 선입견이나 편견임을 몰랐다는 진술은 여러차례 등장한다. “그때는 그런 생각을 못 했던 것 같아요”(207면)로 요약되는 자기인식은 결정적으로 햄버거 가게 사건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 감당할 수 없이 육박해오고 만다. “나를 알아보는 누군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 때문에 “괜히 왔다” “돌아가자” 생각하며 “출입문 쪽을 흘끔거”렸던 자기, 자신을 자꾸 돌아보는 “인아가 없었다면 그냥 가게를 나와버렸을”(231~32면) 스스로를 대면하는 순간에서 말이다. 이 순간은 ‘나’로 하여금 자신의 증언을 ‘함께 겪은 이야기’가 될 수 없다고 받아들이도록 끌어내린다. 동시에 소설의 마지막 문장이기도 한 주해의 날선 한마디, “내가 중앙동에 산대도 저 사람이 저렇게 했을까요?”(233면)라는 물음에서 주해에게도 깃든 ‘남일동’과 ‘중앙동’의 공고한 구분선이 노출되는 순간, ‘나’와 주해가 각기 ‘한 사람’으로서 이룩한 듯 보였던 ‘공동’은 다시금 구획된 편견을 한계점 삼아 안팎으로 파열되어버린다. 줄곧 ‘나’를 괴롭혀왔고 소설의 진행과 함께 악화되는 원인불명의 알레르기 증상 역시 의식으로 통제할 수 없는 거부·과민 반응으로서 반사적으로 작동하는 편견에 대한 은유로 읽을 수 있을 터.

그러한 ‘나’의 자기인식의 연장선상에서 남일동 주민들이 소란을 일으킨 그녀를 두고 “어디나 사람이 잘 들어와야”(183면) 한다며 외지인 취급하는 것 역시 성찰되어야 한다. 그것은 아버지가 자신의 역사로부터 남일동을 배제하는 방식과 동일한 사태이기 때문이다. 하나 그렇기 때문에, ‘어딜 가나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은 있다’는 식으로 한계와 난경의 요인을 ‘개인’의 차원에서 찾는 것은 동어반복이다. 김혜진이 남일동의 ‘조건’에 대한 서술을 소설의 앞쪽에 배치했듯이, 우리가 남일동 주민들의 태도를 바라볼 때 고려할 것은 그들의 행동양태를 유발하는 ‘조건’이다. 앞서 아버지의 태도를 거론한바, 섬뜩한 운명에 노출될 수밖에 없으나 그 공포와 불안을 달래줄 마땅한 수단이 없을 때에는 누구라도 자신만은 ‘비참한 운명’이 피해가길 바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운명은 오직 다른 나라, 다른 동네, 다른 사람의 것이어야 한다……

이처럼 점점 더 가까운 곳으로 다가오며 조밀하게 그어지는 구분선은 가중되는 불안과 공포와 지속되는 ‘전망 없음’의 조건 속에서 개인이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움츠리고 있다는 신호이다. 심지어 「우리〔畜舍〕의 환대」에서는 그 구분선이 전통적 가족관계 내에서도 그어지고 있음을 생각건대, 이제 ‘동네’는커녕 ‘가구’라는 공공의 최소단위마저 악화된 조건으로부터 안도감과 미래에 대한 희망을 제공해주지 못하는 듯 보인다. 최소한의 안전보장과 미래 구상이 온전히 개인의 몫이 된 것이다. 어떻게든 나아가보려 했던 주해의 노력이나, 금세 다시 주저앉아 울타리를 세우는 남일동 주민들의 태도나 모두 같은 조건에서 발현되는 다른 반응이다. 이때 주목할 점은 그 조건 자체를 개선해야 할 공적인 영역의 역할이 부재하다는 것이다. 이 소설 속 인물은 모두 하나의 동네를 갈라 격차를 만들어놓고 그걸 해소시키려는 어떠한 노력도 없는 상황 속에 방치되어 있다.

그러므로 새로운 공동의 구성과 타인에 대해 말하기에 실패했음을 고백한다 하더라도, 그게 이 소설의 실패는 아닐 것이다. 화자의 이야기는 그 실패를 통해서 우리를 나아가게 해주는 듯하다. 명백하게도, 무언가에 맞서 그것을 넘어서고자 한다면 우선 그것에 대해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나’의 글쓰기 또는 말하기는 편견이라는 알레르기에 대해 인식하려는 시도, 그 알레르기가 발생하는 상황과 조건을 응시하고자 하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김혜진의 소설이 포착한 조건을 참조해 「우리〔畜舍〕의 환대」의 재현 부부가 처한 조건을 구성해본다면 어떨까? 외부의 낯섦에 대해 자신의 지근거리에 협소한 구분의 울타리를 세우는 재현 부부의 모습. 그것 역시 사회 전체의 인식을 전진시키려는 공적 영역의 노력이 부재한 탓에 감각의 낯선 변화 속에 방조되어, 당혹감 속에서 ‘일단 거부’를 선택하게 되는 개인의 조건을 나타내는 것이 아닐까?

 

 

4

 

임솔아의 「눈과 사람과 눈사람」4은 ‘연대’의 현장에서도 바로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갈등의 화살이 향하는 것을 보여주면서, 그 조건에 대해 사유한다는 점에서 주목을 요하는 텍스트다. ‘영혜’ ‘규미’ ‘지원’ ‘민조’ 그리고 화자인 ‘나’는 성폭력 피해자이자 연대자인 ‘나래’의 블로그를 드나들다가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댓글 하나로 연대를 표하”(137면)는 대신 작은 일이라도 해보겠다는 마음으로 모인 사람들이다. 소설은 나래 이외의 피해자들과도 연대해 활동을 이어나가던 그들이 나래로부터 “일을 빼앗아가고 있다고”(138면), “시간과 노동력을 착취”(139면)하고 있다는 비난과 문제제기를 받고 난 직후에서 시작된다.

그들은 마침 1월 1일에 모여, 함께 음식을 해먹고 나래의 문제제기에 대한 입장문을 다듬는 것으로 새해를 맞는다. 육아와 가사에 매인 터라 모이지 못한 민조까지 영상통화로 동참하는 가운데, 100면이 넘어갔던 입장문 초안은 서로 돌려 읽고 가다듬기를 거듭하면서 절반도 안 되는 분량으로 줄어든다. 제기된 비판에 대해 충분히 해명하기 위해 동원된 말들이 결과적으로 성폭력 피해자인 나래에게 상처를 가하게 될, “말하지 않는 게 옳은 말”(143면)들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영혜와 ‘나’는 그 일로 정신과 상담을 받고, 법적 해결을 권고받기도 했지만 그러지 않기를 선택한다. 민조가 아이를 키우고 남편과 시댁의 일을 챙기느라 정신없는 와중에도 함께하듯이, 입장문 다듬는 일과 밥을 지어먹고 음식물쓰레기를 치우는 일상적인 일들이 함께 이루어지듯이, 성폭력 피해자와의 연대를 그들은 생활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하나 분명 ‘나’에게 “조용히 이 일에서 손을 떼고 사라지라고”(146면) 진심으로 권고하면서 의사가 해주는 이야기는 충격적이다. 피해자와 연대해온 사람들이 바로 그 피해자의 폭력에 노출되어온 사례들, 그로 인해 연대자가 또다른 피해자가 되고 연대를 포기하고 떠나는 일이 오랫동안 반복되어왔다는 것이다. 연대의 현장에는 언제나 “자기 밥그릇을 채우려는 은밀한 욕망을 가진 사람들”이 있고, 모든 이의 마음이 100퍼센트 순결할 수도 없으며, 또 서로가 그러한 “순결하지 않은 경우”(146면)를 용납하지 않아 상처를 주고받는다. 의사의 충고는 이러한 사태가 누군가의 힘으론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일이므로 거기서 떨어져 자신을 지키라는 것이다. 심리적 어려움을 호소하는 내담자에게 원인 ‘현상’으로부터 거리를 두라는 권고는 의사로서 본분을 다한 것일 테지만, 연대의 지평을 밀어 올리려는 희망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동일한 사태가 되풀이되어왔다는 그의 이야기는 피해자들의 폭력을 유발하는 공통적인 조건을 상상케 한다.

가령 나래의 항의에서는 ‘상대적 박탈감’과 관련된 표현들이 두드러진다. 자살을 시도한 피해자를 구하기 위해 100만원이 넘는 병원비를 결제한 영혜를 두고 “으스대며 카드를 내밀었다고”, “돈 없는 자의 소외감을 뼈저리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고”(133면) 개탄했던 나래의 포스팅에서 상대적 박탈감은 대단히 직접적으로 표출된다. “사람들이 자신의 일을 빼앗아가고 있다”(138면)는 언급 또한, 나래가 느끼는 박탈의 감각을 드러낸다. 이때 중요한 것은 이러한 박탈감이 타당한지 따지는 일이 아니다. “고통받는 사람들의 불만과 반대, 그리고 최종적으로 이어지는 항의와 저항을 결정하는 것은 겪고 있는 고난의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규모와 혹독함이 아니”(바우만, 앞의 책 158면)기 때문이다. ‘상대적 박탈감’은 단지 박탈되었다는 인지 상태를 보여줄 뿐이지, ‘객관적인’ 박탈의 여부나 정도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그러한 박탈감은 “‘실시간’을 살아가는 동시대인들, 보고 만질 수 있고 익숙하거나 들어본 적 있는 사람들”, 즉 “생활세계를 제공하는 이들”(159면)과의 ‘상대적인’ 비교를 통해 발생하게 된다. 그들이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의 메시지는 비교적 명료하다. 가해자나 권력자는 피해자들의 생활세계로부터 달아났으며, 그 탓에 피해자의 항의의 화살이 곁에 남은 사람들을 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래의 사례는 피해자의 일상 자체가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로 조건화된 양상을 보여준다. 자신의 일상을 녹여내어 함께하는 연대의 풍경은 분명 대안이었고 일말의 전진이지만, 그것을 기회 삼아 가해자는 자신들의 책무를 연대자들에게 내팽개치고 몸을 숨겨버린다. 그들은 그렇게 가까스로 연대가 꾸려진 생활세계에 현전(現前)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훼손하는 권력을 발휘한다. 투쟁과 비교의 대상, 박탈감-안도감의 균형추는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전가된다. ‘일을 빼앗기고 있다’는 나래의 박탈감이 성폭력 피해 고발 이후 그녀에게 일러스트를 맡긴 클라이언트가 연락을 끊는 등의 직업적 불이익에서 일부 기인하지만, 그 항의의 표현은 연대자들을 향한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정말로 일을 ‘빼앗은’ 자에게 나래의 공적 항의는 닿지 않기 때문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래의 비난을 적극적으로 반박하려는 태도를 보였다가는 가해자들이 기뻐하리라는 ‘나’ 연대자 그룹의 인식은 대단히 소중해 보인다. 당장 눈앞에 있는 현실적인 갈등이 ‘전쟁’으로 보이는 착시에 속아 넘어가지 않고 멀리 있지만 진짜 싸워야 할 상대를 직시하는 것이므로.

그러나 그러한 연대란 그들의 고통과 희생을 토양으로 유지되는 것일 터다. 그것은 숭고하지만 참혹한 임시방편처럼 보인다. 이러한 상황은 “전 사회적 정치의 임무가 개인적으로 영위하는 ‘생활정치’로 ‘하청subsidiarizing’되는 사회”(바우만, 앞의 책 162면)라는 명명과 그다지 먼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우리〔畜舍〕의 환대」와 「불과 나의 자서전」이 포착해낸, 방조된 개인의 조건도 이 맥락에서 엮이는 듯 보인다. 이 소설들은 “행위와 그 결과에 대한 책임감으로부터 손을 떼려는 계책”, “의무들을 ‘외부에 위탁하려는 속임수’”(같은 책 58면)가 이미 우리의 생활세계를 조건 짓는 새로운 ‘관리철학’과 ‘통치전략’으로서 효과적으로 유포되었음을 보여준다.

다소 범박한 명명이지만, ‘사회인’ 전반이 공감할 만한 소재와 ‘회사’의 다양한 상하·수평 관계를 망라하는 최근의 ‘회사 소설’들도 거대한 시스템이 구사하는 비가시적인 ‘관리철학’을 예민하게 포착하고 있다.5 특히 장류진의 「잘 살겠습니다」6의 화자 ‘나’가 순진을 넘어 무지하기까지 한 ‘빛나 언니’를 대하는 태도는 그 대표적인 사례다. 일견 ‘나’는 기브 앤드 테이크에 밝지 않은 빛나 언니에게서 ‘손해’를 보았다는 이유로 불쾌해하는 듯 보이지만, 뜯어보면 빛나 언니를 미워하기보다는 걱정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소설의 마지막 문장에 자리한 “부디 잘 살 수 있으면 좋겠는데”(121면)라는 바람 역시 답례 떡에서 비롯된 일시적인 호의가 아니라, 애초의 진심이었을 것이다.

빛나 언니의 어떤 행동이 심기를 거스를 때, ‘나’의 내면에 떠오르는 메시지는 이렇다. “대체 왜 저렇게 하지 (…) 나라면 그러지 않을 텐데.”(114면) 이러한 언술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빛나 언니에 대한 증오가 아니라, ‘나’가 빛나 언니를 통해 투사하는 자기의 불안이 아닌가. 이미 ‘나’가 신입사원 시절부터 빛나 언니를 통해 얼마든지 자신도 ‘전체 회신녀’라고 조롱받을 수 있었다는 추락의 가능성을 체감한 이래, 빛나 언니는 줄곧 ‘나’에게 불행과 모멸에 대한 불안의식을 자극하는 위태로운 거울상이었다. 그렇게 곁에 있는 사람으로부터 상기되는 불안과 분투하는 사이, 정작 이미 주어져왔고 아직도 이어지고 있는 불평등의 조건은 ‘나’의 의식에서 금세 휘발되어버리고 만다. 같은 회사에 일하는데도 남편 구재와 연봉이 1030만원이나 차이 난다는 걸 알고 그 부당함에 의문을 표했으면서도, 결국은 만원 단위에 불과한 빛나 언니와의 손익계산에 더 치열하게 매달리는 모습은 결코 ‘나’ 개인의 성격적 결함 같은 것이 아니다. 「잘 살겠습니다」의 ‘사실적인’ 재현은 불평등에 대한 항의가 개인 간의 갈등으로 은밀하게 치환되는 국면까지를 아웃포커스로 담아내고 있는 셈이다.

 

 

5

 

이쯤 이야기하니, 어렵게 이룬 진전을 부패시켜서 다시 뒤로 떠밀려는 움직임을 타개할 방책을 얼른 찾고 싶어진다. 그러나 아직 한가지 더 살펴봐야 할 역풍의 도구가 있다. 고통을 유발하는 조건에 항의하는 것보다 훨씬 더 효과적으로 고통을 경감해주기 때문에 우리의 관심을 잡아끄는 장치들 말이다.

앞서 「눈과 사람과 눈사람」에서 정신과 의사가 도맡은 역할이 바로 그것인 셈인데, 그렇다면 문진표까지 삽입해가며 우울증을 중요하게 다루는 김이설의 「미아」7는 어떤가. 이 소설에 삽입된 각종 실존 서적들이 증명하듯이, 우울증을 단순한 성격적 결함이나 심각한 ‘정신병’으로 오해하던 세간의 통념은 상당히 감소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비교적 최근의 일로, 심리적 어려움을 해소하기 위해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데에 대한 거부감 역시 많이 줄어들어 심리상담 자체가 비약적으로 대중화되었다.

이런 현실을 배경으로 「미아」를 읽을 때, 남편 도현이 관계나 태도의 개선을 위해 애쓰는 게 아니라 ‘나’에게 각종 우울증 관련 서적을 사다 나르고 치료를 권하는 한편 아내가 정신과에 드나든다는 사실을 수치스럽게 여기는 행태는 불온하게 다가온다. 우울증에 대한 도현의 인식은 상당히 지체되어 있는데다, ‘나’와의 불화를 서둘러 종식하면서도 자기 책임은 완전히 회피하는 방편으로 그것을 적극 활용하는 것이다. 우울증에 대한 각종 객관적 자료들과 인용문들은 바로 그 책임의 전가와 하청에 악의적으로 동원되고 있다. 그러니 이 소설이 보여주는 건 가정이라는 공동체가 ‘공동’으로 해결에 나서야 할 문제가 ‘나’ 한 사람의 치료해야 할 ‘질병’으로 전가되는 폭력, 즉 ‘책임의 개인화’ 국면이다.

그러니 소설의 말미에서 던져지는, “나에게 필요한 건 항우울제뿐”(193면)이라는 ‘나’의 진술은 보기보다 대단히 비극적인 뉘앙스를 함축한다. 항우울제는 ‘나’의 정신적 고통을 한동안 완화해주겠지만, “이런 의약품들은 외적인 용도나 개인을 초월한 현실에 적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개인적인(그리고 내적인) 용도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섭취했을 때에는 자신이 겪고 있는 곤란함의 본질을 판단하지 못하게 만드는 데 도움이 되지만 그 문제의 근원을 뿌리 뽑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바우만, 앞의 책 240~41면)기 때문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당장의 고통을 경감해주는 도구들을 찾아 헤매도록 해놓고, 사회적으로 해결되어야 할 문제들에서는 슬그머니 발을 빼는 셈이다.

여기서 다시 장류진으로 돌아가, 등단작인 「일의 기쁨과 슬픔」8에 대해 이야기해야겠다. 이 소설은 갑을관계의 불균형과 그에서 비롯한 갖은 고통을 감내하는 다양한 방식을 포착하고 있어서 사회적 책무를 개인화하는 데에 악용되는 요소들을 풍부하게 그려내기 때문이다.

우선 소설에서 불합리한 것으로 서술되는 것들의 목록은 작게는 ‘나’의 회사에서 오전마다 진행되는 ‘스크럼’에서 시작된다. 각자의 작업 상황을 공유하면서 업무 효율성을 끌어내기 위한 관리 기법인 스크럼은 이 회사에선 대표에게 사유화되어 조회나 다름없어졌고, 수평문화를 상징하는 ‘영어 이름’은 오히려 수직문화를 공고히 한다. 한편 ‘나’의 회사가 개발·운영 중인 중고거래 어플리케이션의 왕성한 이용자인 ‘거북이알’의 경우는 사정이 좀 다르다. 카드사 직원인 그녀는 회장의 눈 밖에 나, 월급을 카드 포인트로 지급받는다. 유명한 클래식 매니아인 회장이 자신의 ‘추종자’들의 요청에 따라 기획을 지시한 ‘루보프 스미르노바 내한공연’의 성사 사실을 자기가 인스타에 자랑하기도 전에 공식발표해버렸다는 이유였다. “정말 너무한 거 아니”냐는, “그게 말이 되”냐는 ‘나’의 항의에 대한 거북이알의 반응은 현실적이고, 현실적이어서 의미심장하다.

“이상하다는 생각을 안 해야 돼요. 그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머리가 이상해져요.” 거북이알이 내세우는 ‘무사유’의 방책은 일견 저항이 불가능해 보이는 폭력에 대한 더없이 현실적인 반응이지만, 동시에 그 폭력을 개인의 차원에서 삭여내는 반응이기도 하다. 카드 포인트로 임직원몰에서 저렴하게 구매한 상품을 중고로 팔아 생활을 영위하는 거북이알의 모습은 주어진 난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살아갈 방법을 찾아낸다는 점에서 모멸의 통치술에 굴복되지 않는 힘을 보여준다. 동시에 통치술의 주체에게 저항하는 대신 그 효과를 개인의 영역에서 상쇄한다는 점에서는 ‘하청받은 개인’의 전형이며 만성화된 고통에 속박된 신체이기도 하다. 그렇게 “더한 사건들도 많다”(235면)는 사실은 항의가 아니라 감내의 이유가 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거북이알을 무엇보다 위로하는 것은, 그녀가 기르는 세마리의 거북이들이다. 반려동물의 사진과 동영상을 자랑하며 기뻐하는 건 우리의 지친 일상을 위무하는 하나의 ‘소확행’으로 흔한 모습이고, 람보·마쎄·페라라는 거북이들의 이름이 슈퍼카 브랜드에서 왔듯이 반려동물의 이름을 명품 브랜드에서 따오는 경우도 그리 드물지 않다. ‘나’ 역시 ‘일의 슬픔’을 클래식 덕질과 여행으로 감내해내는 중이 아닌가. 케빈이 덕질하는 ‘레고’가 암시하는 ‘키덜트’, 정확히는 그것에 대한 소비시장의 전략 역시 의심스럽게 짚인다. ‘취향존중’이라는 말로 대변되듯 개개인의 주체적 선택에 대한 존중이라는 관념의 제고에 힘입어, 새로운 즐거움의 형식들이 고안되고 다변화되자 소비시장은 여기에도 재빠르게 반응했다. ‘덕심’을 자극하는 상품은 경쟁적으로 쏟아져 나오고, 각종 ‘신상’과 콜라보와 한정판의 홍수 속에서 개인들은 작고 확실한 위무의 수단을 끊임없이 소비하도록 권유받고 있다. 이러한 상황의 최대 수혜자는 소설 안에서 찾자면 ‘회장’이나 ‘대표’이겠지만, 그들에겐 그다지 실질적인 항의가 가해지지 않는다. 사람들의 관심은 일의 슬픔을 경감시킬 방도가 아니라 일에 의한 슬픔을 경감시켜줄 소비의 기쁨에 쏠리고 있다.

‘나’가 회사에 남아 클래식 리사이틀 티켓과 항공권을 예매하는 소설의 마지막 대목 역시 인상적인데, 여기서 ‘나’가 서버 시계까지 띄워놓고 성공을 기원하고 있는 바로 그 리사이틀이 거북이알이 겪어야 했던 고난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덕질을 향유하게끔 해주는 시스템의 움직임 속에 짓눌리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을 목도했음에도 별다른 거리낌이 없는 ‘나’의 모습에서도 어두운 ‘조건’은 보인다. 애초에 거북이알이 자신이 겪은 일들을 ‘나’에게 이야기하는 단계에서, 이미 짓눌림의 고통은 상당히 경감된 채 서술되었기 때문에 ‘나’로서는 그녀가 겪은 고통의 경중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을 터. 저 ‘무신경’ 또는 ‘무사유’는 ‘나’의 탓이 아니다. 오히려 항우울제와 같은 기제들이 가져온 ‘곤란함의 본질을 판단하지 못하게’ 만드는 부작용이 유포되는 방식을 ‘나’는 보여주고 있다.

 

 

6

 

여기까지 짚어본 소설들에서 ‘한계상황’은 한국사회가 지난 몇년의 굴곡을 거치면서 이루어온 일련의 긍정적 변화에 발맞추어 그 패러다임을 바꾸고 있는 듯 보인다. 이제 그것은 부당한 관습과 폭력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지키기 위해 구상·실천했던 ‘인간다운 삶’에 대한 거센 희망을 정면으로 꺾는 대신, 바로 그것들을 도구 삼아 우리를 다시 속박하려 든다. 그러니까 개인의 선택과 차이를 존중하는 문화, ‘나’를 소중히 하는 문화, 고통받은 이들과의 연대, 합당하고 합법한 절차의 요구, 생활에 가까워진 정치에 발맞추는 방식으로 말이다. ‘자기’를 지키기 위해 이웃의 ‘다름’을 향해 구분의 격벽을 세우고, 연대해야 할 이들과 이익투쟁을 벌이도록 조장하고, 절차와 원칙을 악의적으로 적용하고, 사회적 책무를 개인윤리와 ‘멘탈관리’의 영역으로 하청 주면서, 개인들을 작지만 확실하고 안전하며 익숙한 ‘소비하는 기쁨’의 영역에 머물게 하면서, 그 권력은 점점 더 눈도 손도 닿지 않는 곳으로 모습을 숨기고 있다.

살펴본 소설들이 새로운 위기상황 자체를 명징하게 바라보는 데에 많은 통찰을 제공해주는 건 분명하지만, 한계의 타개책까지를 ‘제시’해주는 건 아니다. 아마도 해답을 모색하는 일은 한편의 소설과 ‘개인’의 몫이 아니라 모두의 동참을 필요로 할 터. 앞서 「우리〔畜舍〕의 환대」를 닫으면서 여전히 환대가 유효한 대답일 수 있겠느냐고, 회의적으로 물었다. 「불과 나의 자서전」에 대해서는 타인에 대한 앎과 관계의 실패를 고백하는 것이 실패이지 않을 수 있겠느냐고 했고, 「눈과 사람과 눈사람」에 대해서는 자기를 변호하려고 상처 입은 사람과 싸우지는 않겠다는 선택이 오래 지속되기 힘들어 보인다고 썼고, 「일의 기쁨과 슬픔」에 대해서는 ‘위’에서 가해지는 압력에 항의하기보다 그것을 견딜 수단을 찾는 모습을 부정적으로 서술했다. 그러나 한편 한편이 아니라 그 모두를 되돌아보면, 바로 그 지점들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저 방편들은 개개인을 외롭고 협소한 영역 안에 머물게 하고 다만 견디게 만드는 힘과 정반대로 발을 내디뎌서, 곁에 있는 타인을 향해 다가서고 있지 않은가. 「일의 기쁨과 슬픔」의 ‘나’가 ‘케빈’에게 건네던 한정판 레고처럼, 우리를 속박하려 들던 장치들도 얼마든지 관계를 새로 생성하고 나아지게 만드는 ‘선물’이 될 수 있다. 심지어 ‘덕질’마저도 타인과의 관계 맺기를 동반한다면, 대상의 ‘좋은 점’을 서로의 삶에 더해 삶 자체를 ‘더 좋은’ 상태로 끌어올리려는 의지를 견인한다. 모든 것이 첨예하게 개인화되기에, 그런 작은 ‘함께’들은 점점 더 소중해진다. 물론 종국에 ‘함께’해야 할 일은 다시 공적 영역을 향해 의무를 다할 것을 요구하는 것일 터다.

 

 

  1. 지그문트 바우만 『레트로토피아』, 정일준 옮김, 아르테 2018.
  2. 장희원 「우리〔畜舍〕의 환대」, 『Axt』 2019년 34월호.
  3. 김혜진 「불과 나의 자서전」, 『현대문학』 2019년 4월호.
  4. 임솔아 「눈과 사람과 눈사람」, 『대산문화』 2019년 봄호.
  5. 이에 지난봄에만 ‘대기 발령’을 다룬 소설이 여럿이었다는 사실은 특기할 만하다. 그 자체로 새로운 현상은 아니지만, 염승숙의 「거의 모든 것의 류」(『쓺』 2019년 상반기호)와 장강명의 「대기 발령」(『릿터』 2019년 45월호) 그리고 전예진의 「점심」(『현대문학』 2019년 4월호)은 그것을 단순한 징벌이나 근신의 상황적 배경이 아니라 인간을 모멸과 불안 속에 방치하는 통치술로 주목한다. 이들 재현의 사례에서 대기 발령은 회사의 정당한 인사권으로 판단되어 법에 저촉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도로 개인을 모멸감 속에 방치하는 데에 악용된다. 이는 아주 느리게나마 노동자의 권익에 대한 보호를 넓혀가는 현실에 대한 능동적인 반작용이다. 노동자들의 항의와 저항이 아무리 입법화되어 특정 행위들이 정당하지 않은 것으로 금지되더라도, 기업은 금지된 바로 그 수준만을 교묘하게 회피하여 종전 상태로 회귀하기 위한 수단과 방법을 개량개발하는 데에 주저가 없다. 대기 발령은 이미 폭넓게 실행되고 있는 새로운 관리철학의 대표적인 사례에 해당한다.
  6. 장류진 「잘 살겠습니다」, 『현대문학』 2018년 12월호.
  7. 김이설 「미아」, 『Axt』 2018년 1112월호.
  8. 장류진 「일의 기쁨과 슬픔」, 『창작과비평』 2018년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