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평
아리엘 도르프만 『아메리카의 망명자』, 창비 2019
‘완료된 세계’의 정직한 회고
최민우 崔旻宇
소설가 daftsounds@gmail.com
『아메리카의 망명자: 칠레와 미국, 두번의 9·11 사이에서』(Feeding on Dreams: Confessions of an Unrepentant Exile, 황정아 옮김)는 칠레 출신의 작가 아리엘 도르프만(Ariel Dorfman)의 회고록이다. 역자도 ‘옮긴이의 말’에서 밝히듯 도르프만은 “이곳에서 잘 알려졌다고도, 또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고도 할 수 없는 애매한 지점에 놓여”(475면) 있는 작가지만 그가 쓴 수많은 작품 중 다음의 둘은 종종 회자된다. 하나는 사회학자 아르망 마뗄라르(Armand Mattelart)와 함께 저술한 『도널드 덕 어떻게 읽을 것인가』(How to Read Donald Duck, 한국어판 새물결 2003)이고, 다른 하나는 영화로도 제작된 희곡 『죽음과 소녀』(Death and the Maiden, 한국어판 창비 2007)이다. 전자는 미국의 문화적 제국주의를 정조준하는 문화비평서이고, 후자는 과거·죄·용서·정의가 복잡하게 얽힌 어두운 심리극이다. 이론을 겸비한 실천적 지식인이자 빼어난 문필가, 더불어 군부독재의 서슬을 피해 오랜 세월 떠돌아야 했던 망명자인 동시에 아르헨띠나와 칠레와 미국에 자신의 영혼을 분배하여 심어놓은 코즈모폴리턴으로서, 도르프만은 ‘지식인’과 ‘작가’가 분리되지 않고 작가와 역사를 떼어낼 수 없었던 시기, 우리가 ‘20세기’라 회고하는 그 시기를 체현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이러한 점이 『아메리카의 망명자』를 읽고 받는 인상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이 책이 한편으로 무척이나 내밀하게 다가오는 것도, 다른 한편으로는 향수 어린 회고에 종종 푹 젖은 듯 느껴지는 것도 그 때문이라고 본다.
그런 맥락에서 『아메리카의 망명자』가 도르프만의 ‘두번째’ 회고록이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도르프만은 1998년에 『남을 향하며 북을 바라보다』(Heading South, Looking North, 한국어판 창비 2003)라는 회고록을 이미 발표한 바 있다. 회고록이 한 사람의 인생을 근본적으로 돌아보는 문학 양식이라면, 두번이나 자신의 인생을 근본적으로 돌아볼 사정이란 무엇일까? 이는 도르프만이 서문에서 스스로에게 묻는 질문이기도 하다. 그는 이에 대해 첫번째 회고록에서 “많은 질문이 답을 얻지 못한 채 남”(20면)겨져 있었는데 2006년 한 다큐멘터리 작가가 그의 삶을 영화로 기록하는 프로젝트를 제안했을 때 자신이 이를 승낙하면서 책이 시작되었고, 아메리카 대륙에서 일어난 두번째 9·11, 즉 세계무역센터의 붕괴로 인해 “폭력과 용서, 기억과 정의, 관용과 테러에 관한 물음과 직면할 수밖에 없”(22면)게 되면서 책을 집필할 필요성이 절박해졌다고 밝히고 있지만, 나는 어쩐지 그보다는 약간 세속적이고 직관적인 추측에 더 끌린다. 작가가 직접 정리한 책 말미의 연표에서 이 책을 쓰게 된 “촉매제”(473면)라 밝힌 삐노체뜨의 죽음 말이다.
다큐멘터리 촬영을 위해 칠레로 향했던 2006년 겨울, 도르프만은 삐노체뜨가 심장발작으로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가 입원한 산띠아고 육군병원으로 갔을 때, 병원 앞에는 독재자의 초상화를 든 채 선글라스 아래로 눈물을 줄줄 흘리는 작고 통통한 여인이 서 있었다. 도르프만은 그 여인에게 다가가 부드럽게 위로의 말을 건넨다. 마치 무엇에 씐 것처럼(402면). 그로부터 일주일 뒤 삐노체뜨는 사망한다. 도르프만은 그 일화를 가지고 공감과 이해에 대한 세련되고 깊은 통찰을 제시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그 장면은 미리 치르는 장례식처럼도 보인다. 아옌데의 죽음에서 시작하여 삐노체뜨의 죽음으로 끝나는, 한 망명 지식인의 인생 대부분을 휘둘렀으며 심지어는 자기가 죽었다는 뉴스를 살아서 접하게 만든(11면) 폭력적인 세계의 장례식. 책의 곳곳에서 언급되는 끔찍하고 비참한 죽음들, 또한 앞으로도 영영 어둠 속에 묻힐 공산이 큰 수많은 죽음이 떠돌고 있는 세계의 장례식. 한 세계가 장례식을 거쳐 완료되었다면 그 세계와 그 세계 속의 자신을 회고하는 것도 가능하다. 물론 삐노체뜨가 죽었다고 해서 그가 만들고 남긴 모든 것이 눈 녹듯 사라지지는 않으며, 심지어는 고삐 풀린 광견처럼 더 난폭하게 기승을 부릴 수도 있다(이는 우리가 모르는 일이 아니다. 독재자의 유산이 한 사회에 드리우는 길고 어두운 그림자에 대해서라면 우리 역시 칠레 사람들만큼이나 할 말이 많을 것이다). 그렇다 해도 불의로 가득했던 한 시대가 종결을 맞이했다는, 최소한 새로운 전기로 들어섰다는 신호마저 없는 것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싸움은 끝나지 않겠지만 그것은 달라진 세계에서 다른 방식으로 이어질 것이다. 꿈은 이어져야 하겠지만 그 꿈이 실현되는 세상은 예전에 상상하던 그 세상은 아닐 것이다. 한 세계가 완료되었다는 것은 그런 의미라고 생각하며, 책에서 도르프만이 칠레를 ‘완전히’ 떠나는, 혹은 여행을 끝내는 이유도 그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떠남은 단념도 체념도 아니다. 그보다는 결론을 내리는 행위에 가까워 보인다. 어떤 결론? “뿌리 내린 코즈모폴리턴”(449~50면)으로 살아가겠노라는, “내 삶과 내 문학을 국적의 협소한 제약에서 자유롭게 풀어놓”(462면)겠다는 결론. 물론 물리적인 시간선에서 그가 칠레를 완전히 떠나는 것은 삐노체뜨가 죽기 한참 전이지만, 책의 시간은 현실의 시간과 같지 않다.
시간 이야기가 나온 김에 『아메리카의 망명자』가 시간을 다루는 방법에 대해서도 말하고 싶다. 이 책은 두개의 시간을 번갈아 제시하는 구성을 취한다. 하나는 삶의 전기가 되는 ‘짧은’ 시간, 다른 하나는 그 전후의 ‘긴’ 시간이다. 긴 시간, 그러니까 1973년에서 2011년 사이의 시간을 다루면서, 도르프만은 스페인어와 영어가 서로의 팔꿈치를 툭툭 건드리며 나아가는 문장으로 망명자 세계의 희비극과 갈등, 스스로의 정체성과 관련된 문제들을 입담 좋게 풀어낸다. “삐노체뜨가 있어도 삶은 계속됐고 때로는 삐노체뜨 때문에 삶이 계속되기도 했다.”(117면) 짧은 시간은 민주화 이후 칠레로 돌아온 1990년 여름에서 1991년 겨울 사이의 반년으로, 긴 시간에서 뜨문뜨문 흩어져 있던 경험과 성찰은 이 시기에 『죽음과 소녀』로 응축된다. 확실히 이런 구성은 ‘소설적’이며, 이 책을 회고록과 자전적 소설 사이 어딘가로 슬쩍 옮겨놓는 점이기도 하다.
『아메리카의 망명자』는 시간과 예술과 역사에 대한 길고 풍성하며 향수 어린 여행이다. 이 책에서 역사와 얽힌 시간은 망명자의 삶 속에서 접히고 풀어지면서 주름을 만들고, 망명자는 그 주름을 언어로 번역하여 종이에 베끼는 과정을 이어간다. 그 끝에 있는 것은 “밤을 밝히며 불타는 그 인간다움에 값하는 사람이 되어 있어야 한다는”(455면) 의지와 “지금과 다르다면 그게 뭐든 씁쓸할 것이”(468면)라는 달콤쌉싸래한 회한이다. 이 둘 사이의 간격이 어떤 이들에게는 감상적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나는 도르프만이 그 점을 애써 감추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작가의 정직함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