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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마리 힉스 『계획된 불평등』, 이김 2019

전산화를 떠받친 여성 조작원들의 역사

 

 

강연실 姜姸實

가톨릭대 박사후연구원 fmlm66@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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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컴퓨터’가 기계를 가리키지만, 반세기 전에는 복잡한 계산을 담당하던 사람, 특히 여성 계산원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영화로 제작되기도 한 마고 리 셰털리(Margot Lee Shetterly)의 『히든 피겨스』(Hidden Figures, 안진희 옮김, 한국어판 노란상상 2017)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이 바로 인간 ‘컴퓨터’들이다. 마리 힉스(Marie Hicks)의 『계획된 불평등: 여성 기술인 배제가 불러온 20세기 영국 컴퓨터 산업의 몰락』(Programmed Inequality, 권혜정 옮김)은 계산하는 기계의 조작원이 된 인간 컴퓨터의 역사를 다룬다. 작년 미국출판협회(AAP)가 수여하는 프로즈상의 과학·기술·의학사 부문 수상작이기도 한 이 책은 컴퓨터의 역사를 노동의 역사로 서술한다. 20세기 영국정부의 전산화 과정을 따라가며 정부기관에 고용된 여성 기술인들이 어떻게 제도적으로 배제돼왔는지 꼼꼼히 그려낸다. 또 전산화를 통해 권력의 분산이 아닌 집중화를 꾀했던 영국의 기술관료제가 결국 어떻게 영국 컴퓨터산업을 처참한 실패로 이끌었는지 그 과정을 보여준다.

이 책의 핵심은 성별화된 기계노동자 집단이 어떻게 탄생하고 유지되었는지 보여주는 2장 ‘평화 시대의 데이터처리 노동’과 3장 ‘행운과 노동력 부족’이다. 2차대전 시기 블레츨리 파크(Bletchley Park)에서 암호 해독 작전을 수행하는 데 동원된 수많은 여성들은 전쟁 이후 탈숙련화(deskilling)와 전산노동의 평가절하로 인해 임금 상승과 승진 기회마저 잃게 되었다. 이러한 박탈은 ‘기계 직급’을 새로이 만듦으로써 수월하게 이루어졌다. 1948년 초 여성에 대한 동일 임금을 요구하는 시위가 일어나자 영국 재무부는 사무 및 사무보조 조직 안에 여성들이 주로 맡고 있던 계산, 천공카드, 회계기를 다루는 업무를 광범위하게 포괄하는 직급을 새로 만들었다. 이 직급에 따르는 별도의 임금체계와 승진경로도 함께 설계했는데, 이들이 정부조직의 최하위 노동자계층을 구성하게 되었다. 영국정부는 여러차례 조직개편을 통해서 집요할 정도로 여성 기계노동자들의 임금을 낮추고 승진 기회를 박탈했다. 여성 전산노동자들에게 견고한 “기계 천장”(108면)이 지어진 것이다.

더 주목할 점은 기계 직급을 신설함으로써 기계를 다루는 노동 그 자체를 성별화하는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해당 직군에 여성을 몰아넣고 급여를 줄이는 정도에 그치지 않고, 여성이 몰려 있다는 사실을 통해 직업의 권위와 위신을 깎아내리며, 발전 기회를 앗아간다는 의미였다.”(117면) 2차대전을 거치며 여성이 주로 종사하게 된 전산노동은 지적인 작업이 아니라 단순한 노동으로 여겨졌고, 완전 전산화로 가는 단계에서 필요한, 곧 사라질 직종쯤으로 치부됐다. 동시에 대중매체는 기계와 여성을 함께 등장시킴으로써 성별화된 기계노동의 이미지를 굳혀나갔다. 1960년대 초반 신문에 실린 컴퓨터 광고가 정면 얼굴을 보이지 않고 기계를 작동시키는 여성들을 보여줌으로써 거대한 기계 시스템의 일부로 여성을 위치시켰다면, 1960년대 후반부터는 여성 조작원의 성적 이미지를 적극 활용한 광고들이 등장했다. 세련된 복장의 여성 조작원이 주인공인 광고는 컴퓨터를 구매한다면 여성 조작원 한명으로도 수많은 업무를 처리할 수 있다거나, 혹은 “고임금 프로그래머나 관리자가 아닌—타자공이 조작”(183면)할 수 있을 정도로 쉬운 일임을 내세워 컴퓨터가 비용 절감에 탁월함을 강조했다. 이러한 광고는 교묘하게 여성 조작원의 능력을 평가절하하고, 전산노동이 단순하다는 점을 내세워 저임금으로 해결할 수 있는 영역이라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1960년대 중반 이후 정부 시스템 전반을 운영하는 데 컴퓨터 기술의 가치가 높아지자 영국정부는 “좀 더 신뢰할 수 있는 핵심 전문가 집단”(222면)으로 남성 컴퓨터 조작원들을 채용하고자 노력한다. 오랫동안 전산 분야에서 기계를 다룬 여성 기계노동자 직급은 새로이 발전하는 컴퓨터 기술을 다루기에는 역량이 부족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여성 관리자가 남성 노동자를 감독할 수 없다는 신념도 강해 몇년간 전산노동에 종사한 선임급 여성 노동자라 할지라도 관리직으로 진급하지 못했다. 한편 같은 전산노동이라고 해도 남녀가 종사하는 분야가 나뉘기도 했다. 원자력공사(公社)의 경우 행정 전산시설에는 여성 노동자가, 과학 연구용 전산시설에는 남성 노동자가 주로 배치됐다. 이러한 사실들은 전산노동의 여성화가 근대 기술이 표상하는 미래의 중심이 아닌 주변부에 여성을 머무르게 하려 한 적극적인 개입의 산물임을 잘 보여준다.

과학기술사의 여러 저작과는 달리 이 책에서는 전산기술 발전에 기여한 과학자나 공학자를 찾아볼 수 없다. ‘위인’들이 아닌 전산화라는 기술-사회적(socio-technical) 변화를 떠받치는 수많은 기술노동자들이 주인공이다. 특히 저자는 하나의 계급으로서 여성을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이 노동자들 대부분은 개인의 이름 없이 집단으로서만 기록되어 있고, 집단으로서만 존재감을 표출”(329면)하기 때문이다. 블레츨리의 수많은 여성 기계노동자들에 대한 기록은 군사기밀이라는 이유로 당시 개발된 기계들의 도면과 함께 모두 폐기되었고, 전쟁 이후 거대한 전산기계가 된 영국정부 곳곳에서 천공 작업과 프로그래밍을 담당했던 여성 노동자들 또한 이름 없는 하나의 부품으로만 남았다. 역사적 관점에서 여성들을 하나의 계급으로 이해할 때 “제도적 억압과 문화적 규범의 만남이 여성의 출세를 가로막는 것 이상으로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재구성할 수 있다.”(96면) 전산화를 통해 권력의 집중을 꾀했던 영국정부는 정부조직 내에서 숙련된 여성 기술인력의 성장을 적극적으로 배제함으로써 계급구조와 성별 계층을 더욱 공고히 하고 영국 컴퓨터산업의 경쟁력을 저하시켰다. 결국 여성 기계노동자에 대한 ‘기계 천장’을 없애는 일은 여성 기술노동자의 처우 개선을 넘어서는 일임을 힉스는 이 책을 통해서 강조한다.

기술과 젠더라는 큰 축을 따라 이 책을 읽다보면 자동화와 노동이라는 더 일반적인 문제에 다다르게 된다. 영국정부의 전산화 역사는 노동자 없는 ‘자동화’란 허상에 불과함을 명백하게 보여준다. 수많은 진공관들이 굉음과 열을 내며 작동하던 기계식 컴퓨터에서 전기기계식, 그리고 전자식 컴퓨터로 변화하는 과정은 “혁명보다는 진화에 가까운”(150면) 변화였으며, 이 과정에서 필요한 전산노동력은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증가했다. 그러한 변화의 한가운데에서 바뀌지 않은 것은 영국정부 내 최하 계층 노동자였던 여성 조작원들에 대한 처우였다.

우리는 여전히 자동화를 꿈꾼다. 그 꿈이 투영되는 대상이 전산화 기술에서 로봇이나 인공지능 기술로 바뀌었을 뿐이다. 영국 여성 기계노동자들의 역사는 자동화의 성공에는 그것을 뒷받침하는 기술노동의 취약한 고리를 찾아 보강하는 일이 매우 중요함을 잘 보여준다. 기계의 미래는 결국 사람에게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