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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방민호 『문학사의 비평적 탐구』, 예옥 2018
비평의 결핍에 맞서
강경석 姜敬錫
문학평론가 netka@hanmail.net
“내 비평의 현장은 오늘에 이르는 한국 현대문학사의 ‘모든’ 중요 국면들”(8면)이라는 서문의 한 대목이 말해주듯 『문학사의 비평적 탐구: 꽃은 숨어서 피어 있었다』는 남다른 규모와 의욕을 지닌 저작이다. 다루는 텍스트는 이인직의 신소설 『혈의루』(1906)에서 한강의 장편 『소년이 온다』(창비 2014)에 이르고 참조범위는 영국의 빅토리아조 문학에서 D. H. 로런스를 거쳐 러시아의 똘스또이와 솔제니찐을 아우른다. 소설원론에 해당하는 글부터 시인·작가·비평가론뿐 아니라 문학사 연구동향과 탈북자 문학에 대한 검토까지 넘나드는 이 책에서 일관된 관점의 시계열적 질서를 기대하기란 일단 쉽지 않을 것이다. 우선은 긴 기간에 걸쳐 쓰인 글들을 추려 엮은 때문이겠지만 그렇다고 이들을 일이관지할 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의 성격을 규정한 ‘평론집’이라는 표지(標識)가 열쇠다. 문학사적 과거를 주로 다루고 있음에도 이 책은 어째서 연구서가 아니라 평론집인가.
작가, 작품, 문학적 현상에 대한 이월가치의 분석과 재평가를 통해 현재적 의의를 생생하게 획득할 수 있다면 비록 그 대상이 과거의 유산이라 할지라도 비평 범주에 넣지 못할 이유는 없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문학사 연구야말로 가치평가라는 비평의 회랑을 통과해야만 제대로 된 학문적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문학사의 비평적 탐구’라는 제목은 이 책의 성격을 있는 그대로 정확히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의 문제의식은 구체적이다. “사실, 최근의 이른바 첨예하다는 일부 한국현대문학 연구 글들을 보면, 작품을 낳은 작가가 단지 당대의 담론들을 실어 나르는 대리인으로나 간주되고 있는 듯한 인상을 받게 되는 경우가 많다. 유행에 민감한 연약한 심성들이 ‘저자의 죽음’ 같은 멋진 용어들, 개념들에 마음이 흔들린 지 너무 오래되었다.”(571면) 그가 보기에 현재의 문학사 연구, 더 나아가 비평의 현장이 지닌 핵심적인 문제점은 “한편으로는 ‘작품을 작가로부터 분리해서 이해하라’는 신비평주의의 낡은 교리를 무비판적으로 답습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작품을 그것을 둘러싼 환경으로부터 이해하라’는 역사현실주의의 에피고넨으로도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570~71면)에 있다. 이로써 앞의 인용문들을 포함한 글 「작가연구 아직도 유효할까?」는 책의 맨 말단에 놓여 있으면서도 사실상 이 책 전체를 감싸는 서론 또는 총론의 성격마저 띠는 것이다.
최근의 한국현대문학 연구가 “작가연구에 관한 무능력”(575면)을 드러내고 있다는 비판적 인식 아래 저자가 수행한 작업들은 대개가 “문학연구 상에서 가장 촌스럽고, 덜떨어진 연구방법으로 간주되어”(570면)온 ‘작가연구’ 계열이다. 이를 매개하는 것은 물론 비평적 주체로서 고유한 ‘나’의 감각과 사유일 것이다. 실제로 책을 읽어가다보면 곳곳에서 통념에서 자유로워지려는 노력들과 마주칠 수 있다. 가령 이광수의 『무정』(1918)에 관한 연구경향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지(知), 정(情), 의(意)와 같은 서구 지성사적 개념을 직접 개입시키는 대신 안창호의 「무정한 사회와 유정한 사회」(1926)와의 사상적 교호 가능성에 주목한다든가(「이광수 『무정』을 어떻게 읽어 왔나?」) 난숙한 자본주의의 산물로 이해되곤 해왔던 모더니즘을 “충분히 잘 양육된 자본주의 체제의 문화적 상부구조라기보다는 구체제의 위압 속에서 새롭게 부상하고 있지만 미래적 가능성을 확실하게 엿볼 수 없는 사회정치적 상황 속에서 배태되는 문화적 경향”(「경성 모더니즘의 개념 구성에 관하여」)으로 파악하는 등의 사례가 우선 그렇다. 무엇보다 독창이 두드러진 작업은 해방 이후와 한국전쟁기를 ‘해방 후 8년 문학사’로 총괄함으로써 태평양전쟁과 한국전쟁에 따르는 두개의 ‘전후’를 연속체로 볼 것을 제안한 「해방 후 8년 문학사에 관하여」와 백낙청의 비평세계를 D. H. 로런스 연구와 관련해서 해명한 「역사와 문학의 시적 완성이라는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전자는 ‘해방공간’이라는 개념의 역사적 불모성을 논증하거나 월북문학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외된 월남(越南)문학의 “창조력과 생산성”(162면)에 대한 재평가를 정당하게 촉구한 등의 의의에도 불구하고 해방 직후 ‘조선사회’를 “일종의 전후 공간”(168면)으로 볼 수 있는가 하는 근본적 회의를 남긴다. 일본발 ‘전후’ 개념에서 착안한 듯한 이 구상은 당시의 기본과제가 독립된 통일민족국가의 수립이 아니라 마치 ‘전후처리’였던 것 같은 착시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식민지조선이 태평양전쟁의 직접적 수행 당사자가 아니었던 만큼 ‘해방조선’에서 ‘전후’는 희미한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게 아닐까. 이러한 구상이 설득력을 확보하려면 지금보다 더 많은 세부적 검증작업이 요청될 것이다.
그에 비해 「역사와 문학의 시적 완성이라는 문제」는 저자의 『납함 아래의 침묵』(소명출판 2001)에도 실려 있는 오래전 글이기는 하지만 설득력 있는 구도와 관점, 꼼꼼한 읽기와 논증을 고루 갖추고 있어 여전한 생명력을 발휘하는 문제작이다. 사실 1970~80년대 민족문학론 연구의 활성화와 함께 백낙청의 비평세계와 그 특유의 리얼리즘론에 대한 평가가 심심치 않게 이뤄지고 있음에도 서구 문예사조론적인 리얼리즘/모더니즘의 낡은 대립구도나 민족주의/탈민족주의 비판의 환원론을 벗어나는 논의들은 아직까지 찾아보기 어렵다. 물론 “백낙청의 민족문학론은 매슈 아놀드의 문명비평론을 한국적 실정에 적용하여 ‘번역’하다시피 한 것”(381면)이라는 등의 안이한 단정들이 적지 않지만 백낙청 비평세계에 있어 로런스와 하이데거가 차지하는 위상을 밝히고 그것이 그의 1970년대 이후 서구사실주의와 구분된 특유의 ‘시적인 것’으로서의 리얼리즘론에 도달하는 여정을 분석함으로써 “그와 그의 비평에 관한 세평을 재확인하는 데” 그치지 않고 “백낙청이라는 한 비평적 개성에 대한 발견적 개입”에 도달한 드문 성취임엔 분명하다.(349~50면) 이로써 “식민지 과정을 경유한 사회의 문학이 독자적인 가치를 유지하고 발전시켜 세계문학의 당당한 일부로 되는 방법을 지속적으로 모색한”(379면) 백낙청 비평의 “희귀한 가치”(387면)와 한계를 그 실상에 입각해 새롭게 평가할 의미있는 출발점 하나가 마련된 셈이라고 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문학사의 비평적 탐구』에는 자신의 직관에 망설임 없이 뛰어드는 평론가 방민호의 개성이 잘 드러나 있다. 그런 만큼 읽는 사람에 따라서는 동의하기 어려운 지점들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문학과 학문제도가 실은 비평의 결핍을 구조화하고 재생산하는 제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다르고 보면 이런 작업에 좀더 다양한 저자들이 나설 필요가 있다. 물론 과학의 검증을 거치지 않은 ‘비평’이 위험하다는 것은 상식이지만 따지고 보면 검증 또한 비평의 중요한 일부가 아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