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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마르크 오제 『나이 없는 시간』, 플레이타임 2019
시간의 집에서 만나는 나이
김영옥 金英玉
생애문화연구소 옥희살롱 공동대표 daimon32@hanmail.net
“나이가 어떻게 되(시)나요?” 이 질문에서는 언제나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살면 안 된다는 경고음이 함께 울린다. 그러나 ‘나이에 어울리게’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관습을 빼고 나면 ‘나잇값’을 측정할 수 있는 방법이란 없기 때문이다. 나이를 저울에 올려놓고 한번 재볼까? 어떤 값이 나오나? 18세 참정권을 외치는 십대들이나, ‘광장’의 주도권을 탈환하고자 태극기를 품에 안고 전진하는 노년들이나 나잇값을 두고 투쟁을 벌인다는 점에서는 다 동지들이다. 마르끄 오제(Marc Augé)가 쓴 『나이 없는 시간: 나이 듦과 자기의 민족지』(Une ethnologie de soi: Le temps sans âge, 정헌목 옮김)의 논리에 따르면 이들 모두는 ‘나이로부터 자유롭게 나이 들겠다’는 자유 선언을 하고 있는 셈이다. 노년의 경우 이 자유 선언은 “노년에 이를 때까지 쌓여 간 시간은 과거에 일어난 일들을 순서대로 더한 축적물이 아니다. 시간은 쓰여 있던 글자 위에 다시 글자를 써넣은 양피지와 같다”(127면)는 깨달음을 동반한다.
이 책의 저자가 비장소(non-lieux)의 개념을 창안한 마르끄 오제라는 사실은 자연스럽다. 사람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정체성을 형성하고 공동체의 역사를 만들어나가는 장소는 시간과 더불어 형성되기 때문이다. 장소를 밀어내며 들어서는 비장소들은 시간을 알지 못하는 공간들이다. 그곳에는 잃어버린 과거를 향한 향수도,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기다림도 없다. 공항에서, 호텔에서, 쇼핑몰에서, 고속도로 휴게실에서, 인터넷 공간에서 ‘글자 위에 다시 글자를 써넣은 양피지’ 같은 시간을 경험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비장소의 깊이 없는 매끈한 표면 위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방명록이나 목록, 연보 같은 비시간의 무수한 점들이다. ‘나이’는 불가역성 속에서 순차적으로 이어져 있는 이러한 비시간의 무수한 점들이다. 그와 반대로 ‘시간’은 시적 회상 속에서 과거를 다른 모습으로 조우하게 만든다. 완전히 지워지지 않은 채 양피지에 스며 있던 문장·이미지들은 예기치 않게 떠올라 잃어버린 과거와 알 수 없는 미래를 연결한다. 애틋하게 시간과 함께 노니는, 시간 여행이 펼쳐지는 것이다. 나이 속에서, 나이와 함께 노니는 건 블랙유머에나 나올 법하다. 그러나 나이를 먹지 않고 시간과 노니는 일 또한 그에 못지않은 소극(笑劇)이다. 시간은 자아를 탐색하는 매개이고 나이는 사건을 정렬하는 표지들이라지만, 시간과 나이라는 두 요소의 상호 얽힘을 토대로 하지 않은 시간의 강조는 무의미한 표류로 끝날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시간의 역설이며, 이 역설 속에서 비로소 시간의 의미는 제 빛을 발한다. 그리고 이 역설을 이해하는 열쇠는 몸이다. 몸은 시간을 품고 있는 나이의 장소이기 때문이다.
“거울을 보면서 스스로 내가 나이 들었음을 깨닫는 갑작스런 인식의 순간, 설령 그때 내 모습을 추궁—거울 속 나를 ‘너’라고 부르며—한다고 해도, 그 순간에 나는 내 몸과 내 다양한 자아를 모아 재조합에 나서게 된다. 거울 단계로의 회귀는 역설적이게도 성찰적 의식이 처한 해결할 수 없는 어려움으로부터 나를 해방시킨다. 나는 나이를 먹는다, 그러므로 나는 살아간다. 나는 노화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105면)
비록 이렇게 고백하기도 하지만 이 책에서 몸은, 단지 어쩔 수 없기에, 시종일관 배면에서 어른거릴 뿐이다. 나이가 우리의 인생을 출생일과 사망일 사이에 갇힌 것으로 제시한다고 저자는 지적하지만, 나는 오히려 ‘갇힌’이 아니라 ‘사이’에 주목하고 싶다. 출생일과 사망일 사이의 삶은 사회문화적으로 구성될 뿐 아니라 육체적인 ‘-됨’(becoming)과 ‘-임’(being) 사이에서 지속적으로 협상되고 변형된다. 삶이 가역적인 시간성을 누릴 수 있는 건 출생일과 사망일 사이에서 그 사람의 몸이 ‘시간이 밴 장소’가 되기 때문이다. 몸에 새겨지는 시간의 위력이야말로 시적·민족지적 자아 탐구의 필연성과 가능성을 강화한다는 사실은 전혀 모순이 아니다. (통증으로든, 크고 작은 소외를 동반하는 손상이나 외모상의 변화로든) 몸이 너무나 압도적으로 현전할 때 우리는 몸을 떠나고자 한다. 몸의 그 도저한 현전이 추동하는 탈육체의 시도는, 누구나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미혹되는 나르키소스가 되게 만드는 연령대에서는 핍진성도 환상성도 띠지 않는다. 그러나 거울을 보면서 스스로 나이 들었음을 깨닫는 갑작스러운 인식의 순간 시작되는 육체와 탈육체 시도의 대결은 팽팽하다. 이것은, 나이는 그냥 숫자에 지나지 않을 뿐이라는 주의나 주장을 덥석 집어 들지도 말고, 어쩌면 살면서 가끔 퇴행적으로 빠져들었을지도 모르는 나르키소스의 거울단계와 단호하게 결별하고, 거울이 비추는 자신의 이미지를 제대로 조우해야 함을 의미한다. 이제 시간이 만든 육체를 끌어안으며 또 바로 그 육체에서 풀려나오는 시간과의 몽상으로 육체를 떠나는 일은 저마다의 유현한 이야기를 낳을 것이다.
“내 나이가 어때서, 투쟁하기 딱 좋은 나인데!” 십년이 넘도록 송전탑 건설 반대투쟁을 했던 밀양의 ‘할매들’이 부르던 투쟁가의 한 대목이다. 유행가의 일부를 개사해서 ‘사랑’의 자리에 ‘투쟁’을 넣었지만, 에로스의 추동력이 없이는 투쟁도 단명할 것이니 개사하지 않았다 해도 의미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밀양 할매들이 길도 없는 가파른 산을 오르내리며, 포클레인 앞에 몸을 내던지며, 쇠사슬로 서로의 몸을 엮어 움막 강제철거집행을 막으며, 그렇게 경이로운 투쟁의 역사를 만들어나가는 동안 ‘내 나이가 어때서’ 역시 슬로건 이상의 실체가 되어갔다. 밀양 할매들의 ‘내 나이가 어때서’는 나이를 부정하지 않음으로써 ‘나이에서 자유로운 나이 듦’을 가리킨다. 밀양 투쟁은 무엇보다 ‘나이 든 몸들’의, 더 정확히 말하자면 ‘시간을 품고 있는 나이의 장소인 몸들’의 투쟁이었기에 특별했다. 이분들은 ‘시간의 향유’라는 말의 애매모호함을 ‘시간을 품고 있는 몸의 향유’라는 좀더 분명한 말로 가다듬었다. 참담 속에서 명랑한 웃음이 끊이지 않았고, 분노 속에서 나눔의 향연이 풍성했으며, 격동 속에서 평온한 몰입의 경작이 이어졌던 밀양 할매들의 투쟁은 이후 소성리 할매들의 투쟁으로 번졌다. 저자는 “기다림과 경험이라는 반대되는 움직임은 모두 시간이라는 질료 속에서 어떤 수수께끼를 탐색하는 작업이기도 하다”(46~47면)라고 썼다. 밀양에서, 소성리에서 투쟁하던 할매들의 몸에서는 그 수수께끼의 신비가 순간적으로 드러나곤 했다는 것을 증언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