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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배수아 裵琇亞

1965년 서울 출생. 1993년 『소설과사상』으로 등단. 소설집 『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 『훌』 『올빼미의 없음』 『뱀과 물』, 장편소설 『에세이스트의 책상』 『독학자』 『알려지지 않은 밤과 하루』 등이 있음.

badmaria11@hotmail.com

 

 

우루의 딸 우루

 

 

우루는 보는 눈이다. 우루는 그림자들 사이에서, 춤을 추면서, 걷고 혹은 걷지 않으면서 본다. 눈을 뜨고 있을 때, 그리고 심지어 눈을 감고 있거나 잠을 자면서도 본다. 우루는 결코 정면으로 보지 않는다. 관찰하지도 않고, 응시하지도 않는다. 우루는 단 한번도 뚫어지게 들여다보거나 시선으로 파헤친 적이 없다. 단지 옆으로 흐르듯 보이는 것을 볼 뿐이다. 우루는 보지만, 보지 않으면서 본다. 우루는 비치는 것, 보이는 것에게 끌릴 뿐이다. 우루의 애정은 그런 종류이다. 보이는 것은 고정된 현재가 아니다. 그것은 하늘이나 수평선처럼 허구이다. 산책을 나선 우루는 산비탈 길가에서 허리 높이만 한 커다란 엉겅퀴를 발견했고, 멀리 회색과 녹색, 보라색이 섞인 보리밭을 내려다보았다. 길가에는 넓적한 돌을 쌓아 만든 양치기의 오두막과 잎이 연한 어린 떡갈나무들이 서 있었다. 한낮은 불처럼 뜨거웠고 저녁의 길고 달콤한 황금빛 여명은 하루의 종말을 한없이 늦추었다. 바람이 불어왔고 숲처럼 우거진 키 큰 풀들이 파도쳤다. 먼 비탈의 초록은 경사면을 따라 서로 다른 농담으로 일렁였다. 석회암 절벽 아래 사이프러스 나무들은 창처럼 뾰쪽했다. 우루는 산책을 계속했다. 돌아오는 길에는 최후의 푸른빛이 비늘처럼 반짝이는 하늘에서 천둥소리가 울렸다. 맞은편 희고 편평한 고원 위로 오렌지색 번개가 수평으로 번쩍였다. 검고 날카로운 제비들이 초록과 금빛이 섞인 허공을 낮게 활강했다. 우루는 집의 창을 모두 열어둔 채로 산책을 나왔기 때문에 폭풍우가 몰아치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녀는 은연중에 자연을 경외했다. 산길 입구에서 뱀을 보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뱀은 무척 길었으며 누르스름한 갈색이었고 몸통에는 반지처럼 검은 고리 무늬가 있었다. 뱀은 오솔길과 숲 사이의 경계가 되는 낮고 하얀 돌담 위를 몸서리치듯 사정없이 꿈틀거리며 넘어가는 중이었다. 고리 무늬가 진한 뱀을 조심해야 한다고 들었다. 그것은 도래할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루는 맨발로 뜨거운 흙을 디디며 계속해서 걸었다.

우루는 사진을 본다. 손바닥보다 더 작은 흑백사진이다. 그것은 바닷가를 찍은 낡은 풍경사진인데, 짙은 땅거미 진 해변을 달려가는 세마리의 개가 있다. 수면 위로 수없이 중첩된 희미한 빛과 모래언덕의 그늘 사이, 개들은 한 생에서 막 다른 생으로 흐르는 유체인 듯 허공에 몸을 띄운 상태이다. 그리고 사진 가장자리에 마치 예상치 못하게 프레임 속으로 들어온 우연한 피사체처럼, 바다를 향해 비스듬히 서서 개들을 바라보고 있는 한 여자의 몸이 절반쯤 보인다. 여자는 나체이다.

“상상해봐요” 하고 우루의 손님은 말했다. “이렇게 상상해봐요. 우리는 그동안 오랜 여행을 하던 중이었는데, 어느날 둘이 함께 기차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동시에 기억을 잃은 거라고, 그래서 모든 이름과 얼굴을 다 잊었다고 말이에요.”

우루는 본다. 그녀의 눈은 어디에서 왔을까? 여리고 숨겨진, 노란 달을 감춘 개과 동물의 눈동자는. 우루는 끊임없이 보는데, 그녀가 보는 것은 한번도 만난 일이 없는 최초의 여인이다. 최초의 여인은 매번 모습을 바꾸며 나타나 우루의 앞을 지나쳐간다. 어느날 우루는 시내에서 어떤 얼굴과 마주쳤다. 우루는 버스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고 있고 그 얼굴은 인도를 걷고 있었다. 그들 사이의 거리는 손을 뻗으면 서로 닿을 정도로 가까웠다. 속도를 줄인 버스는 정류장에 멈추어 섰고, 얼굴은 버스를 지나쳐 계속 걸어갔다. 얼굴은 작고 여위었으며, 갈색 얼룩으로 덮인 채 뜨거운 재처럼 흐릿하게 휘발되는 중이었다. 얼굴은 아직 살아 있는가? 믿을 수 없지만 그래 보였다. 얼굴에는 인상이 실려 있었다. 조용하고 움직임이 없는 종류였는데, 하지만 평화로움이나 초연함은 아니고, 입을 벌린 채 살짝 일그러진, 고요하게 굳어버린 어떤 최후의 격렬한 감정이었다. 그것은 차마 혀에 도달하지 못하는 어떤 이미지를 강하게 연상시켰다. 한참 뒤 마침내 우루의 머리에 떠오른 것은 회색 머리카락이 달린 해골이었다. 우루는 그것이 한번도 본 일이 없는 최초의 여인이라고 믿었다.

우루의 손님은 말했다. “나는 당신의 미래를 알아요.”

우루가 보는 것은 어떤 장면이기도 하다. 기억이 시작되는 태초에 장면이 있었고, 그것은 지금도 분명히 알고 있는데, 어느날 저녁의 학교였다. 그것은 마치 다른 세상으로 통하는 문처럼, 지금도 종종 우루의 눈앞에 경이롭고 장엄하게 떠오르곤 했다. 검은 제비들이 해질녘의 운동장 위를 짧고 날카로운 화살처럼 히스테릭하게 질주했다. 제비들의 외마디 울음이 텅 빈 학교 운동장에 가득했다. 제비들의 활강은 점점 더 빠르고 점점 더 낮아지고 있었으므로, 마침내는 짧고 단단한 제비의 부리가 운동장 흙바닥에 앉아 있는 우루의 속눈썹을 스칠 것만 같았다. 서쪽 하늘의 무겁게 층이 진 짙은 구름들의 테두리는 연한 장미색과 푸르스름한 회색, 갈색과 연두색 빛이 섞여 흐릿하게 반짝였다. 공기는 물속처럼 뜨끈하고 무거웠다. 우루는 손을 들어 손바닥을 살펴보고, 눈꺼풀 위의 모래알을 털어냈다. 입천장에서 쇠와 먼지의 맛이 느껴졌다. 가느다란 빗방울이 몇방울 떨어지다가 멈추었고 우루는 느리게 일어섰다. 우루가 앉아 있던 흙바닥에는 그날 오후 내내 우루를 괴롭혔을 것이 분명한 검붉은 얼룩이 있었다. 그것이 자신의 몸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우루는 납득하기 힘들었다. 속옷에 묻은 피의 흔적은 아마도 비누칠을 하면 없어지리라. 우루는 바닥에 놓인 책가방을 집어 들었다. 구름 아래로 펼쳐진 낮고 편평한 산 위로 오렌지색 섬광이 번득였고, 지붕이 낮은 모래색 집들이 거울에 비친 달걀더미처럼 드러났다. 우루는 그 번갯불 속에 자신의 집이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자신이 이제 그곳으로 가야 한다는 것도 알았다. 고향의 뒤편 하늘에서는 번개가 번쩍이며, 아버지도 어머니도 죽었다고 했으므로……

우루는 일생 동안 다른 직업을 갖고 있었고 단 한번도 글을 써본 적이 없었지만, 최근 들어 어떤 기회에 글을 쓰기 시작했고 작가가 되었다. 어느날 우루는 한 사람을 저녁식사에 초대했다. 그들은 마치 기적처럼 여행지의 커다란 강변에서 우연히 마주쳤던 것이다. 뜨거운 햇빛이 모든 것을 태우는 한낮, 그는 푸른 강변의 흰 계단에 사지를 뻗고 누워서 눈을 감고 있었다. 우루는 부활의 기적 앞에 선 사람처럼 그 앞에서 얼어붙었다. 한마디 말도 없이, 한줄의 편지도 없이 떠나간 사람을 먼 외국의 강가에서, 그것도 이런 방식으로, 마주칠 수 있다니!

그의 검은 여행가방과 벗어 던진 신발, 책과 담배가 주변에 흩어져 있었다. 그날은 뜨겁게 작열하는 햇볕 속에서 바람이 휘몰아쳤다. 그는 강물에 떠내려온 사람처럼 보였다. 태양빛은 저절로 불이 붙을 듯이 뜨거운데 그의 바지와 셔츠가 아직 젖어 있었다. 신발을 벗어 던진 그는 혼자였다. 우루는 그토록 오랜 세월이 흐른 다음에도 자신이 그를 알아볼 수 있다는 것을, 아니 그를 알아본다고 생각한다는 사실을 불가사의하게 여겼다. 앞으로 우루는, 나는 기적과도 같은 일을 만났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강에서 나온 사람을 만났어! 그의 입에는 고대의 동전이 물려 있었고.” 우루는 근처의 분수로 달려가서 손수건을 물에 흠뻑 적신 다음 그것을 죽은 듯 누워 있는 그의 입술에 갖다 댔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외쳤다. “마셔요, 이것을 빨아 마셔요!” 그러자 그가 눈을 떴다. 오, 나는 기적과도 같은 일을 만났어! 그는 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가볍게 몸을 떨었고, 그제야 우루는 그가 잠시 잠이 들었을 뿐 죽어서 강물에 떠내려온 시체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우루는 그를 저녁식사에 초대했다.

우루는 살구버섯 요리와 라이스 샐러드를 만들었다. 라이스 샐러드는 우루가 잘하는 음식이고, 살구버섯은 오래전 그가 좋아한다고 말한 것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요리하는 동안 라디오에서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오늘 동물원에서 기이한 사건이 있었다. 한 남자가 코요테 우리로 들어가서 죽은 채 발견된 것이다. 남자는 전날 동물원의 문이 닫히고 아무도 없는 시간까지 동물원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밤이 되자 울타리를 기어오르고 그다지 깊지 않은 작은 해자를 뛰어넘어 코요테 우리로 들어간 것 같았다. 코요테는 과거에 사슴 방목지였던 우리에서 살았는데, 그곳은 키 작은 관목 숲과 연못, 계곡과 사막, 무릎 높이의 풀들이 넓게 펼쳐져서 코요테의 고향인 초원지대와 흡사했다. 과거 20여마리의 사슴이 살던 그곳에 지금은 기이하게도 단 한마리의 코요테가 살았다. 그래서 코요테는 눈에 거의 뜨이지 않았고, 사람들은 그곳이 빈 우리라고 생각하고는 그냥 지나쳐버렸기에 낮에도 무척 한산한 장소였다. 사실 동물원에서 코요테는 크게 흥미로운 동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슴이 사라져버린 후 풀들은 점점 더 무성하고 높게 자라났고, 그 사이에 숨어 있는 코요테는 점점 더 발견하기 힘들어졌다. 이른 아침 해가 떠오를 때 연두색 안개가 지상 낮은 곳을 가득 뒤덮었고, 이슬 맺힌 풀들은 연한 모래색으로 빛났다. 남자는 녹색 담요 하나를 몸에 둘렀을 뿐 나체였다고 한다. 손에는 긴 호두나무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고 한다. 그의 시신에는 훼손된 흔적이 있었지만, 정확히는 왼쪽 귀가 사라졌지만, 그것이 주로 시체를 먹는 코요테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까마귀나 쥐 등 다른 동물들의 짓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코요테가 남자를 죽인 걸까? 아니면 남자는 저절로 죽은 것이고 코요테는 우연히 거기에 있었을 뿐일까? 그들은 과연 서로 만나기나 한 것일까? 그런데 남자의 시체가 발견된 후 이상한 주장이 제기되었다. 남자가 거기 들어간 것은 어제가 아니라 더 이전이며, 어쩌면 일주일, 열흘 이상일지도 모르는데, 그동안 남자와 코요테는 그 누구의 눈에도 뜨이지 않은 채 한 우리에서 살았고, 서로 거리를 유지하며 주의 깊게 지켜보기만 하다가, 남자는 아마도 굶어서 죽었거나 혹은 다른 이유로 죽었을 거라는 주장이었다. 그동안 아무도 그 사실을 몰랐던 이유는, 남자가 녹색 담요를 머리까지 뒤집어쓰고 항상 키 큰 풀 사이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고, 또 코요테 우리를 유심히 들여다보는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동물원에서 코요테는 크게 흥미로운 동물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코요테는 고양이보다 위험할까? 그뿐만 아니라 또다른 기이한 사실이 있었다. 비록 부르는 사람은 없지만, 코요테는 동물원에서 지어준 이름이 있고, 우리 앞 안내판에도 그 이름이 적혀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죽은 남자 역시 코요테와 똑같은 이름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우루는 프라이팬을 불에 올린다. 타이 고추 한개를 잘게 썬다. 양파를 잘게 썬다. 마늘 두알을 까서 압착기로 으깨자 진한 마늘 향이 풍긴다. 우루는 이 행위를 좋아한다. 압착기 속에 들어간 두알의 마늘, 손목에 힘을 주면, 마늘이 압착기 안에서 순간적으로 으깨지고, 진액이 밖으로 살짝 튀면서, 섬유질을 제외한 하얗고 연한 마늘 속살이 압착기 밖으로 비어져 나온다. 귀한 수액을 듬뿍 머금은 식물의 혈관이 손안에서 파열되고 분출되는, 이 관능의 순간. 버터 한조각을 나이프로 잘라 달구어진 팬에 올리고 다진 마늘과 고추와 양파를 넣고 볶는다. 버터는 금세 녹는다. 팬에서 뜨거워지는 버터와 마늘의 향기. 우루는 그것을 좋아한다. 이완되는 얼굴 표정이 그 사실을 누설한다. 연기가 피어오르자 우루는 서둘러 환풍기를 켜고 불을 줄인다. 팬에 버터를 한조각 더 넣고 살구버섯을 볶는다. 체에 걸러 물기를 제거했지만 버섯에서 스며 나온 수분이 금세 팬에 고인다. 볼에 달걀을 두개 풀고 거품기로 젓는다. 한 방향으로, 속도를 일정하게 유지하며, 노른자와 흰자가 균일하게 섞이도록, 내용물이 조금이라도 덩어리지지 않게, 처음부터 노른자도, 흰자도 아니었던 것처럼.

“어머니가 죽었다 내 기원의 징후가 사라졌다!”

갑자기 라디오에서 터져 나온 이 외마디 외침에 우루는 문득 고개를 든다. 의혹과 불안을 담은 얼굴이 주방 벽의 거울에 잠시 스치다가 사라진다. 우루의 입술이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살짝 달싹이다가 멈춘다. 손에 든 거품기에서 달걀이 뚝뚝 떨어져 우루의 맨발과 마루를 더럽힌다. 라디오의 목소리는 다시 평범한 날씨 예보로 옮겨 간다. 팬에서 익는 살구버섯은 맹렬하게 수분을 증발시킨다. 실내의 공기가 축축해진다. 우루는 목덜미를 한번 쓸어올린다. 우루의 표정에 순간 절망적인 이미지가 실린다. 그것을 상쇄하려는 듯 우루는 서둘러 살구버섯이 익는 팬에 달걀을 붓는다. 우루는 달걀이 살구버섯과 골고루 섞이도록 조심해서 젓는다.

음식이 완성되자, 탁자에 라이스 샐러드와 살구버섯 요리를 올린다. 납작하게 썬 오이와 레몬, 민트를 띄운 물병도 컵과 함께 갖다 둔다. 식사 준비가 끝났다. 우루는 주방을 치우고 손을 씻은 후, 체크무늬 행주에 손을 닦고, 스커트를 살짝 가다듬은 다음 탁자에 앉는다.

손님은 이미 도착해 있다.

우루는 라이스 샐러드를 손으로 한움큼 집는다. 올리브기름이 묻은 따뜻한 쌀알과 미끈거리는 아보카도 조각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와 탁자로 떨어지지만 개의치 않는다. 손님은 그다지 놀라지 않고 그것을 지켜본다. 향긋하고 달콤하고 새콤한, 아릿하고도 쌉쌀한 맛. 묵직한 향을 머금은 올리브기름과 단단한 껍질을 가진 와일드 라이스의 맛. 우루는 라이스 샐러드를 계속 집어 입으로 가져간다. 손님도 손으로 라이스 샐러드를 조금 집어 손가락 끝으로 살짝 뭉친 다음 능숙하게 입으로 가져간다. 손님은 우루보다 손으로 먹는 행위에 더 익숙한 듯이 보이지만 그건 사실과 다르고, 단지 우루보다 훨씬 더 신중한 편일 뿐이다. 우루로 말하자면, 능숙하다기보다는 이런 식으로 먹는 행위를 매우 즐기는 편에 가깝다.

손님과 마찬가지로 우루도 살구버섯 요리를 손가락으로 집어 먹는다. 올리브기름과 버터로 손은 기름투성이가 되었지만 둘 다 개의치 않는다. 체크무늬 행주가 식탁 위에 있고, 그들은 필요할 때마다 행주로 손을 닦는다. 그리고 서로 마주 보며 미소를 교환한다. 음식이 주는 쾌감과 만족이 피처럼 그들의 두 육체를 관통해 흐른다. 우루는 손가락을 빨면서 식사를 계속한다. 그녀의 얼굴에 불그스름한 홍조가 피어난다. 어느 정도 허기가 가신 우루는 접시를 밀어놓고 체크무늬 행주에 손가락과 입술을 닦는다. 우루의 식사 초대는 성공이다. 요리는 실수가 없었고 손님은 제시간에 도착했다. 손님은 우루가 일러준 대로 문지방 위에서 열쇠를 찾아냈다. 그는 소리 없이 문을 열었고, 안으로 들어와, 요리에 분주한 우루를 방해하지 않고, 라디오를 들으면서 식사가 완성되기를 기다렸다. 그들은 과묵했고, 배불리 먹었다. 심지어 아무런 대화도, 아무런 인사도 필요 없을 정도라니, 얼마나 놀랍고도 신비한 일인지. 우루는 무의식중에 손으로 왼쪽 귀를 만진다. 아니, 그것은 우루가 아닌 손님의 손이었던가.

우루는 말했다. “처음 강가에서 당신을 보았을 때, 나는 책의 페이지를 넘기다가 무심코 고개를 쳐든 참이었어요. 이 도시의 아름다운 묘지에 관해서 읽고 있었죠. 긴 플라타너스 가로수 길가에 수천년 전의 석관들이 끝없이 늘어서 있는 묘지예요. 시체를 매장하지 않고 석관에 보관했으니까요. 옛날 강 상류 지역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입속에 동전을 물려 강물에 시체를 흘려보냈다고 해요. 시체는 강물을 따라 이 아름다운 도시에 이르게 되고, 사람들은 시체의 입에서 동전을 꺼낸 다음, 이곳 묘지에 묻어주기 때문이죠. 그래서 난 당신을 발견하자마자, 강물에 떠내려온 시체라고 생각해버렸답니다. 입속에 향기로운 동전을 물고 있는.”

손님은 대답했다. “하지만 상상해봐요. 우리가 이토록 먼 곳에서 이토록 오랜만에 우연히 만나게 되다니, 놀랍지 않나요? 그렇다면 다른 상상도 얼마든지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여기서 만난 건 기적도 우연도 아니에요. 왜냐하면 우리는 지난 수년 동안 함께 여행 중이었을지도 모르니까요. 그런데 둘이 똑같이 기차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동시에 기억을 모두 잃었고, 그래서 우리가 그동안 함께 긴 여행 중이었다는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거라고, 그렇게 한번 상상해봐요. 어떤가요. 이 상상이 당신에게서 뭔가를 불러일으킨다면, 그러면 우리가 이 론강 가에서 마주친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닌 거죠. 우리는 헤어진 적이 없으니까요. 단지 기억하지 못하는 것뿐.”

“그렇다면 당신에게 있었던 일을 아무거나 이야기해봐요.” 우루가 진지하게 요청했다. “혹시 그 안에 나와 무의식중에라도 관련된, 내 기억을 되살릴 수 있는 이야기가 들어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지금 막 떠오른 것은, 오래전 나는 게릴라 전사였다는 겁니다.” 손님이 말했다. “물론 진짜 게릴라가 아니라 게릴라 연극을 말하는 거죠. 이십여년 전쯤 매우 독특한 공연 형태가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그건 비싼 공연장을 구하지 못하는 가난한 극단이나 예술가들이 주축이 되어 폐교나 버려진 주유소, 비수기의 해변 까페 등 방치된 장소를 주인의 허락을 받지 않은 채 공연장으로 무단 사용하는 형태였죠. 물론 나도 그중 한명이었고, 아니 정확히는 오래전 1인 극단을 운영하면서 상당히 이른 시기에 그런 게릴라 공연을 적극적으로 주도한 연출가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가장 중요한 일이 관객을 모집하는 거였는데, 들키면 벌금을 내고 잘못하면 고소를 당할 수도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이 매우 비밀스럽게 이루어졌어요. 대개 공연이 임박한 며칠 전에 고객을 하나하나 직접 찾아가서 초대장을 판매하는 방식이었죠. 게릴라 공연은 오직 그렇게 은밀한 방식으로 초대장을 받은 사람들만이 올 수 있다는 것이 특징이었습니다. 공연 일시와 장소가 초대장에만 나와 있고 심지어는 공연작품까지도 초대장을 받은 다음에야 알 수가 있으니, 초대장은 마치 스파이들의 밀서와 같은 역할을 했죠. 공연날 저녁, 대개 으슥하고 구석진, 인적이 드문 외딴 장소에 사람들이 하나둘 택시를 타고 모여듭니다. 게릴라 극단의 고정관객 리스트에 올라 있는 그들은 매번 컬트 의식이 거행되는 비밀의 동굴에 초대받은 것처럼 굴었답니다. 참으로 바보같이 들리겠지만 그 당시에는 그런 방식이 통했으니까요. 공연은 주로 인적이 없는 밤에 열렸는데,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조명도 사용할 수가 없어서 겨우 촛불 정도 켜놓은 어둠 속에서 배우들은 더듬거리며 연기를 하고, 그것조차 없을 때면 무대와 객석의 구별도 불가능하여 종종 배우와 관객이 섞여버리는 일도 일어나곤 했습니다. 불평하는 사람은 없었어요. 그런 걸 즐겼으니까요. 게릴라 공연이 여기저기서 한창 열리던 시절에는 예술가들도 매우 대담해져서, 종종 위험할 정도의 자유주의 공연을 시도해보는 경향이 생겨나기도 했어요. 예를 들자면 조르주 바따유의 소설을 낭독하면서, 배우들이 시연을 벌이는 식으로. 그런데 사실 내가 하려는 이야기의 핵심은 게릴라 공연이 아니라, 젊은 시절에 잠시 알고 지내던 한 여자에 관해서입니다. 물론 나도 알아요, 이것이 게릴라 공연보다 더 바보같이 들린다는 것을. 나는 대단히 멋진 남자는 아니고, 보다시피 지금과 마찬가지로 당시에도 매력적이지 못한 외모에다 성격도 원만하거나 사교적이 아니지만, 게다가 남들보다 뛰어나게 좋은 운을 타고나지 못했는데도 불구하고, 젊은 시절에 꽤 열정적으로 알고 지낸 여자가 몇명 있었어요. 그중에는 진지한 관계였던 여자들도 있고 그런 여자들 중 한명과는 어쩌다보니 당신도 알다시피 결혼까지도 했는데, 그런데 정작 내가 하려는 말은 이게 아니라, 그렇게 알고 지내던 여자 중 한명, 너무도 젊어서 엉겁결에 만난, 책임감이나 신의와는 무관하게, 가벼운 우정조차도 없이, 사실은 알고 지낸 기간도 아주 짧았고 서로에 대해서 거의 모르는 상태로 흐지부지되어버린, 단지 스친 듯한 인연이라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할 텐데, 그렇지만 단순한 친구나 동료 사이가 아니라, 아주 짧은 기간이지만 친구 이상이었던 건 부인할 수 없겠고, 하지만 사귀는 중에도 솔직히 서로를 크게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은 한번도 없이, 아니 그런 생각으로 진입할 계기조차 없었고, 사실상 서로의 경솔함을 즐겼을 뿐 아무것도 아닌, 그래요, 당신 짐작이 맞아요, 지금 돌이켜보면 없었으면 더 좋았을지도 모르는, 솔직히 고백하자면 후회하는 관계, 바로 그런 관계에 있던 여자 중 한명에 관한 겁니다. 그런데 바로 그녀가 내 마지막 게릴라 공연의 파트너 연기자였죠. 우리는 조르주 바따유의 텍스트를 읽는 낭독 공연을 기획했고, 연습실에 그녀가 나타났을 때 난 좀 놀랐어요. 그녀를 단번에 알아보았거든요. 내가 알던 과거의 그녀는 갓 십대를 벗어나 아직 소녀에 가깝던 초보 배우였으며, 미숙하고 서글펐지만 어느 정도는 야망도 있었고 어느 정도는 도발적이기도 했죠. 그 시절에도 확실히 나쁜 배우는 아니었어요. 재능이 없지는 않았단 말이죠. 그러나 슬프게도 운이 좋은 배우도 결코 아니었어요. 차츰 활동이 뜸해지면서 옷가게의 점원이나 화실의 누드모델, 무용수로 일한다는 소문이 돌더니, 그런 소문과 함께 배역을 맡는 일은 더더욱 줄어들었고, 아마도 결혼을 하면서 연극을 떠난 이후 오랫동안 모두에게서 잊혔다가, 게릴라 공연이 시작되면서 활동을 다시 하게 된 듯 보였습니다. 이상하게도 그녀는 일반 연극이 아닌 게릴라 공연 무대에만 선다고 들었어요. 오랜만에 다시 만난 그녀는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눈치였고, 나도 굳이 우리의 짧은 과거를 일깨워주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마르고 수척해지긴 했지만 놀랄 정도로 거의 변하지 않았어요. 그런데도 나는 그녀가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는데 아마도 그건 그녀가 이상하리만큼 과묵한 배우가 되어버린 탓일 겁니다. 과거 그녀의 특징은 화려한 낭송이었어요. 그녀의 낭송은 그야말로 발 없는 춤 같았죠. 그런데 이제는 목소리나 발음도 살짝 불분명한데다 거슬리게 변했고, 그 때문인지 본인도 가능하면 대사가 적은 역할을 원했어요. 연습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된 건데, 그녀는 혀에 문제가 있는 듯했어요. 그것이 기분 나쁘도록 거슬렸지만 딱히 이유를 캐볼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녀도 중년에 가까운 나이가 되었고, 나이 든다는 건 그런 것일 테니까요. 게다가 내 공연에서 그녀의 역할은 어차피 대사가 한마디도 없기도 했어요. 다시 나타난 그녀의 환경에 대해서 나는 과거나 마찬가지로 거의 아는 게 없었습니다. 그녀는 친구도 없었고 친하게 지내는 동료도 가족도 없다고 들었어요. 더이상은 아무도 몰랐죠.”

“그런데 그녀의 이야기가 나와 어떤 관련이 있을까요?” 손님이 잠시 말을 멈추자 우루가 물었다.

“아마도 직접적인 관련은 없겠지만, 어떤 사실 하나가 이상하게 도저히 마음에서 지워지지 않는군요.”

“그게 뭔데요?”

“그녀의 이름. 그녀는 당신과 이름이 같았어요.”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우루가 담담하게 말했다. “내 이름은 아주 흔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같은 이름을 가진 여자가 아주 없지는 않을 거예요.”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 나도 모르게 이렇게 말할 뻔했답니다. 우루, 나는 당신의 미래를 알아요. 미안해요, 하지만 그게 나를 불편하게 합니다.”

“그래서 당신은…… 그런 이유로 단 한번도, 편지도 전화도 하지 않은 건가요?”

“그편이 나을 것 같았으니까요.”

“그녀와 내가 이름이 같기 때문에?”

“그녀와 당신이 이름이 같기 때문에.”

“하지만 세상에는 이름이 같은 사람은 정말 많이 있잖아요! 게다가 나는 그녀가 아닌데요! 나는 단 한번도 배우인 우루가 아니었어요! 나는 그녀를 모르지만, 그래도 나는 그녀가 아니에요!”

“상상해봐요.” 손님이 말했다. “상상해봐요. 만약 우리가 함께 긴 여행 중이었는데, 어느날 동시에 기차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둘이 똑같이 기억을 모두 잃은 거라면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이름을, 우리 자신까지도 잊은 거라고 말이에요.”

 

그의 마지막 게릴라 연극, 버려진 낡은 학교에서 바따유의 2인극 공연 중에 작은 사고가 있었다. 그와 함께 공연하던 여자 배우가 갑작스럽게 발작을 일으켰다.

여자 배우의 사지가 비틀리고 입에서 거품이 흘러나왔으나 관객들은 그것을 당연히 연기의 일부로 받아들였다. 그녀는 잠시 동안 경련을 일으키다가, 입가에 살짝 침을 흘리며, 정말로 자연스럽게 죽었다! 함께 공연하던 남자 배우 말고는 아무도 그녀의 죽음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정도였다. 공교롭게도 그녀가 맡은 역할은 네크로필리아(necrophilia)인 연인을 위해 시체인 척 흉내 내는 여자였기 때문이다. 무대 한가운데서 죽은 배우를 두고 공연은 계속되었다. 그녀는 죽은 다음에도 간헐적으로 사지를 수축하듯이 떨었다. 한번은, 분명히 죽은 다음인데도, 두 눈을 번쩍 뜨고 의자 위에서 왼쪽 팔을 뻗어 머리 위로 들어 올리면서 왼쪽 다리를 높이 쳐들어 오른쪽 다리 위로 꼬았다. 마치 춤을 추듯이, 정말로 자연스럽게. 그녀의 왼쪽 발에서 구두가 벗겨졌다. 하지만 마침 그때 격정적인 클라이맥스 낭독이 터져 나오는 순간이었기에 관객들은 박수를 쳤고, 그 틈을 타 남자 배우는 바닥에 떨어진 구두를 발로 옆으로 밀어버릴 수 있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리고 여자 배우는 축 처졌고, 두번 다시 움직이지 않았다. 남자 배우는 그녀의 입가에서 침과 함께 흘러나온 핏방울을 보았다. 거품이 섞인 피였다. 그는 원고를 읽으면서 팔을 크게 움직이는 척하며 소매로 그녀의 입가를 닦았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막이 내린 후 남자 배우는 죽은 배우의 몸 위에 공연장 구석에 굴러다니던 초록색 담요를 덮어두고, 그녀가 피곤해서 잠이 든 거라고, 그래서 커튼콜을 할 수 없다고 둘러댔다. 게릴라 공연은 모든 면에서 전형적인 연극과는 매우 달랐으므로, 관객들은 그다지 의아하게 여기지 않았다. 최후의 한 사람까지 모두 돌아가고 공연장이 텅 비게 되자, 남자 배우는 아무도 모르게 그녀의 몸을 옮기기로 했다. 게릴라 공연장에 시신을 그대로 둘 수는 없었고, 게다가 그와 단둘이 공연하던 중에 죽었다는 게 밝혀지면 어쩌면 그가 범인으로 몰릴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그는 그녀가 근처에 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날 공연 시작 전 대화 중에 그녀는 자신의 집이 근처 언덕 위 텅 빈 공터 가운데에 홀로 서 있는 녹색 건물 2층에 있다고, 그 집은 작고 방이 하나밖에 없지만 방세를 내지 않아도 되며 창으로는 바다가 보인다고 지나가듯 말했던 것이다. ‘아마도 그녀는 그 집을 말한 걸 거야.’ 그는 게릴라 공연장에서 똑바로 바라다보이는 언덕 위의 초록색 작은 집이 바로 그녀가 말한 집일 거라고 짐작했다. 그런데 그녀는 정말로 그 집에 사는 것일까? 그는 의심과 불안을 떨쳐버리기 위해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만약 아니라면, 이제 앞으로 살면 되겠지.’

그녀는 몸집이 작은 편이었기에 남자는 양팔에 간단하게 안고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신은 놀랄 만큼 뻣뻣하고 무거웠으므로 생각보다 훨씬 힘들었고 게다가 언덕 위로 오르막을 한참이나 올라가야만 했다. 인적이라고는 없는 언덕 위의 공터는 거의 키 높이까지 자란 무성한 잡초 사이로 쓰레기가 흩어졌고 내다버린 가구와 녹슨 캐비닛이 을씨년스럽게 서 있었다. 고장나서 문이 반쯤 열린 채 완전히 닫히지 않는 빈 캐비닛은 연신 삐걱이는 소리를 냈고 그 뒤에는 누군가가 무슨 용도인지 알 수 없는 빈 천막을 쳐놓았다. 천막의 찢어진 천이 바람에 펄럭였다. 남자의 이마는 땀으로 흥건히 젖었다. 그곳에 원래 있던 다른 몇몇 허름하고 낡은 집들은 사람이 떠나버린 뒤 아무도 돌보지 않아 무너져 내렸고, 그녀가 산다는, 적어도 남자가 짐작한 그녀의 집만이 폐허와 잔해 사이에서 유일하게 온전한 건물로 덩그러니 서 있었다. 집은 3층이었는데 모두 불이 꺼져 있었다. 집 앞에는 자동차가 한대 있었으나 가까이 가 보니 그것은 유리창도 모조리 깨지고 타이어와 핸들이 뽑혀나간 채 방치된 차였다. 마침내 집 입구의 현관을 통과한 남자는 기운이 하나도 남지 않아 마지막에는 죽은 여자의 다리를 잡고 몸을 질질 끌면서 계단을 한칸 한칸 올라가야만 했다. 그런데 이건 정말로 그녀의 집일까? 집세를 낼 여유가 없는 그녀가 철거 예정 지역의 빈집을 무단으로 점유하고 사는 게 아닐까? 남자는 문득 이런 의심이 들었다. 그는 그녀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고, 그녀가 죽어버린 지금은 더더욱 알 길이 없었다. 그녀는 열쇠를 어디에 두었을까? 이렇게 생각하기가 무섭게 그의 손이 자신도 모르게 빈집의 현관문 위쪽을 더듬었다. 정말로 거기 열쇠가 있었다. 그는 최후의 안간힘을 내어 시신을 집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커튼이 없는 창으로 흐릿한 불빛이 스며들어 전등을 켜지 않고도 어느 정도 사물을 분간할 수 있었다. 남자는 천이 찢어져 속 내용물이 튀어나온 낡은 소파에 온기가 채 사라지지 않은 시신을 앉혀두는 데 마침내 성공했다. 그런 다음에도 당장 그곳을 떠나지는 않았다. 숨을 고르고 기운을 회복하기 위해 소파 곁 바닥에 주저앉아 잠시 쉬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빈집에는 한동안 그의 거친 숨소리가 울렸다. 죽은 배우는 고개를 옆으로 기울인 자세로 눈을 반쯤 감고 있었다. 살짝 부풀어 튀어나온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 노르스름한 왁스처럼 움직임이 없었고 입가에는 피를 흘린 자국이 있었다. 문득 연민의 마음이 솟구친 그는 여자를 위해 무엇인가 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고, 손수건에 수돗물을 적셔 여자의 입가를 닦았다. 젖은 수건이 닿자 여자의 입술이 조금 달싹이는 것 같았다. 물을 마시면 살짝 죽어 있던 생명이 다시 돌아오는 건 아닐까? 문득 이런 미신적인 생각이 든 그는 물을 흠뻑 적신 손수건을 여자의 입술에 대고 자신도 모르게 외쳤다. “마셔, 이것을 빨아 마셔!” 대답은 없었고, 대신 입술 사이로 검게 변한 혀끝이 조금 튀어나왔다. 혀는 배가 통통한 작고 검은 뱀처럼 보였다. 그는 손수건의 물을 짜서 여자의 혀에 떨어뜨렸다. 혀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고, 대신 여자의 머리가 갑자기 앞으로 푹 꺾였다. 여자는 턱이 가슴이 닿을 정도로 고개를 깊이 떨구었고, 앞으로 쏟아진 머리카락이 여자의 얼굴을 완전히 덮었다. 창으로 스며든 흐릿한 빛이 그가 팔걸이에 올려둔 시신의 양손을 비추고 있었다. 확연히 구부러진 왼손 가운뎃손가락 끝이 가만히 떨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생명의 몸짓은 아니었고, 도리어 그 반대인 경직의 과정에 가까웠다. 그는 떠나야 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달아나야 했다. 땀이 어느 정도 식고 호흡도 진정되자 그는 집을 나와 문을 잠갔고, 열쇠를 원래 있던 자리에 올려놓았다. 그는 자신이 지나온 자리의 짓밟힌 풀들을 따라 더듬거리며 갔다.

 

“그런데 게릴라 공연은 왜 사라진 건가요? 누군가 당신들의 바따유 공연을, 예를 들자면 음란하다는 이유로, 고발하기라도 했나요?” 우루가 물었다.

“아닙니다. 게릴라 공연이 중단된 직접적인 이유는 관객들을 모으기가 점점 어려워졌기 때문이에요. 연극이나 낭독 공연 자체가 살아남기 힘든 시대이기도 하고, 더구나 그렇게 불편한 장소로 굳이 오려는 열혈 관객들은 더더욱 많지 않았거든요. 그나마 소수이던 충실한 관객들은 죽거나 해외로 떠나버렸어요. 우리가 가진 리스트는 점점 줄어들기만 했고 새로운 관객을 찾는 일은 더욱 어려워졌어요. 그렇게 게릴라 공연은 세상의 다른 일들과 마찬가지로 소문도 없이 말라 죽어간 거죠. 바닷가 폐교에서 열린 마지막 게릴라 공연에는 관객이 단둘이었다고 들었습니다. 여든아홉살 먹은 은퇴한 여자 배우와 그녀의 푸들이었죠……”

“당신은, 혹시 그걸 다시 기획해보고 싶은 생각은 없나요?” 우루가 문득 열성적으로 물었다.

“뭘 말입니까?”

“게릴라 공연을.”

“글쎄요, 그런 것이 여전히 유효할지 난 잘 모르겠습니다.”

“당신의 이야기는 내게 유효했어요. 어떤 글이 하나 떠올라요. 아마도 내가 곧, 오늘 저녁이나 늦어도 내일 새벽까지는 쓰게 될 글이에요. 어떤 글 하나가 내게 보이는데, 소설일지 희곡일지 형태는 아직 모른답니다. 어쩌면 일기나 편지일 수도 있고, 그냥 낭독 공연의 대본일 수도 있겠죠. 아직은 하나의 목소리에 불과한 것인데, 당신의 말을 듣다보니 그것을 희곡으로 만들어 게릴라 공연 무대에 올리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그게 반드시 게릴라 공연이어야 할 이유가 있나요?”

“그건, 공연의 형태가 어떻게 될지 미리 예측할 수가 없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또 이게 중요한 이유인데, 어쩌면 그 공연은, 돌발적인 결말을 갖게 될 수도 있어요. 그러니 반드시 게릴라 공연이여야만 해요.”

“돌발적인 결말이라니, 어떤 내용인지 흥미롭군요.”

“내용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어요. 배우의 역할은 그냥 무대에 있기만 하는 거예요. 원칙적으로 그는 혼자예요. 주고받을 대사도 없고, 특별한 행동을 할 필요도 없어요. 일단 맨몸 위에 커다란 초록색 담요를 뒤집어쓰고 앉아 있는 게 전부랍니다. 얼굴까지 완전히 감싸는 담요니까 관객들과 눈을 마주칠 일조차 없는 거죠.”

“맨몸 위에 초록색 담요를?”

“그리고 손에는 지팡이를 하나 들고 있어야 해요.”

“정말로 그게 전부인가요?”

“그래요, 그게 전부예요. 물론 배우가 원할 경우 즉흥적으로 모놀로그를 할 수 있어요.”

“그렇다면 무대에서는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다는 건가요?”

“그가 아무 일도 안 한다고 해서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 건 아닐 거예요. 단지 그 일이 뭔지 우리가 모르고 있을 뿐이죠. 무대에는 그 말고도 다른 연기자가 하나 더 있으니까요.”

“그건 누굽니까?”

“코요테예요.”

“뭐라구요?”

“코요테라구요.”

“그건, 그건 사람이 아니잖아요.”

“네 맞아요.”

“살아 있는 진짜 코요테를 말하는 건가요?”

“그럼요, 살아 있는 진짜.”

“그럼 코요테는 뭘 하는 거죠?”

“누가 코요테의 계획을 미리 알 수 있겠어요.” 우루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 말은……”

“그래요, 우리는 아무것도 몰라요. 단지 무대에는 커다란 철창이 설치되어 있고, 동물원의 코요테 우리와 같은 형태죠, 그 안에 초록 담요를 뒤집어쓴 주인공이 코요테와 함께 들어가 있는 거예요. 대사는 없어요. 정해진 대사가 없다는 뜻이에요. 정해진 행동도 없어요. 심지어 연극은 정해진 시간도 없답니다. 몇시간 안에 연극이 끝날 수 있고, 며칠, 몇주일 동안 계속될 수도 있죠. 중간휴식은 없고 무대에 물이나 음식물이 제공되지도 않아요. 주인공에게도 코요테에게도. 연극이 계속되는 동안 관객들은 자유롭게 출입하며 공연을 관람할 수가 있답니다. 내 희곡은 이게 전부예요. 나머지는 주인공 역을 맡은 배우와, 그리고 코요테에게 달렸어요.”

“정해진 공연시간이 없다면, 연극은 언제 끝나게 되나요?”

“그건 오직 배우만이 알아요. 배우가 알아서 결정하는 거죠.”

잠시 시간이 흐른 뒤 손님이 나직하게 물었다. “당신은…… 정말로 믿는 겁니까?”

“뭘 말인가요?”

“그런 연극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존재는 상상이라고, 당신이 말하지 않았던가요?”

“그 작품의 배우를 구하기가 쉽지는 않을 거란 매우 어두운 예감이 드는데…… 맞나요?”

“코요테를 어떻게 구할 건지 묻는 거라면, 아직 아무런 방안이 없어요.”

“만약 코요테를 구한다고 해도, 초록색 담요를 뒤집어쓸 주인공을 영영 찾지 못할 수도 있는데 그러면 어떻게 할 생각인가요?”

“그 걱정은 별로 안 했답니다. 그 역할은 내가 할 거니까요.”

우루는 일어섰다. 방은 이미 한참 전에 어두워졌지만 그들은 전등을 켤 필요를 그다지 느끼지 못했고, 서로의 희미한 실루엣을 마주한 채 대화를 이어나갔다.

잠시 뒤 우루는 일어서서, 아마도 그녀가 곧, 오늘 저녁이나 늦어도 내일 새벽까지는 쓰게 될지도 모르는 글을, 그래서 무대의 조명이 꺼진 암흑 속에서 오직 목소리로만 흘러나오게 될 모놀로그를, 오직 즉흥적으로 낭송하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죽었다 내 기원의 징후가 사라졌다!

어느날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몰랐고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는데,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머니의 사진이 내 손에 들려 있었다.

그것은 저녁의 바닷가를 달려가는 개들을 찍은 사진이다. 사진 왼쪽 가장자리에는 반쯤 등을 돌린 무심한 자세로 해변의 개들을 바라보고 서 있는 희고 둥그스름한 여인의 나체가 함께 찍혀 있다. 여인의 불룩하게 이완된 아랫배와 약간 휘어진 모양의 다리. 나는 그 사진이 나 자신과 깊게, 이 세상의 다른 무엇보다도 더욱 깊게 연관되어 있음을 안다. 구체적으로 어떤 연관인지는 설명할 수 없다.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보는 순간 그냥 알게 되는, 휘발되는 향기와 같은 그런 앎이 있다. 오래된 건물을 철거하러 온 사람들이 문을 열었을 때, 어머니는 의자에 앉은 채로 이미 죽어 있었다고 들었다. 어머니의 물건이라고 할 만한 건 가방 하나가 전부였는데, 그 안에는 낡은 옷가지와 립스틱, 이 한장의 사진뿐이었다고 한다. 다른 사진을 비롯하여 개인적인 내용이 있는 유물은 전혀 없었다. 물론 이 사진 속 나체의 여인이 어머니라고 특정할 근거는 없다. 내가 아는 것은 단지, 이것이 어머니의 유품에서 나왔으며, 오래전 내 아버지는 우체부였지만 아마추어 사진가이기도 했다는 사실뿐이다.

사진 속 여인의 비스듬한 프로필은, 입을 살짝 벌리고 있으나 미소는 짓지 않았다. 차가운 바람 때문인지 찡그린 얼굴에 가깝다. 그녀의 포즈는 전문적인 목적을 가진 모델의 그것이 아니라 오직 사적인 계기로 카메라 앞에 서 있는 자의 것이라고 짐작되지만, 이런 특수한 상황에서도 긴장이 느껴지지 않는 것으로 보아 무척 대담한 성격이었을 것 같다. 그녀가 향하고 있는 바다는 파도를 몰고 오는 중이다. 해변에는 세마리 개들이 달리고 있다. 어디서나 흔하게 보이는 종류가 아니라, 날렵한 유선형 몸매의 사냥개들이다. 카메라는 개들이 빛과 빛 사이의 층을 가로지르며 도약하는 순간을 포착했다. 그런데 그것은 그녀의 개들일까? 여인의 시선은 개들을 향하고, 여인의 머리카락은 검은 뱀 모양으로 휘날린다. 사진에는 보이지 않지만 아마도 가까운 곳에 그들이 타고 온 우체부용 구식 자전거 한대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내 어머니가 맞을까?

나는 사진을 본다. 사진은 누군가의 바라봄이지만, 내가 보는 것은 그 눈이 사라진 이후, 머나먼 익명의 잔상이기도 하다. 그래서 종종 사진을 본다는 것은, 눈 없이, 멀리서 보는 행위이다. 나는 눈 없이, 오직 멀리서 본다. 그녀는 여기 있었다. 여기가 어디인가? 내 손가락 끝 혹은 왼쪽 귀? 오래전 일이고, 그들은 젊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었을까? 생의 어떤 순간에 내 입에서는 단 한번 노래가 흘러나왔다. 고향의 뒤편 하늘에서는 번개가 번쩍이며, 아버지도 어머니도 죽었다고 했으므로……

나는 양팔을 아래로 늘어뜨린 자세로 죽은 듯이 의자에 앉아 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른다. 집 안은 어둑하다. 어디선가 스며든 기묘하게 강렬한 오렌지색 저녁 햇살이 내 왼손 가운뎃손가락에 머물러 있는 것이 보인다. 손가락은 연한 회색이며, 과도하게 휘었고, 정체 모를 슬픔으로 경련하듯 떨린다. 그 순간 나는 온전히 내면의 존재였다. 그 순간 내 언어는 온전히 내면의 언어였다. 그 순간 내 기억은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았다. 그런 순간들이 있었다. 내 안에서 최초의 여인을 느끼는 순간, 내 안에서 최초의 여인이 고요히 타기 시작하는 발화의 순간, 불현듯 내가 누군가의 유령이라는 강한 느낌과 함께, 그것이야말로 내 존재의 유일한 근거이며 이유라는 확신이 드는 순간.

화가란 마치 개처럼 사물을 보아야 한다, 하고 쎄잔은 말했다. 가만히, 그리고 동시에 거의 외면하면서.

우루는 본다. 멀리서, 우루를 본다.

어머니가 버려진 낡은 집에서 홀로 죽었다는 사실은, 그녀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던 어린 시절부터 이미 내 삶의 초언어적 상징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내 최초의 기억은 이른 나이에 시작한 초경의 충격이었다. 그날 나는 혼돈의 어린아이인 채로 홀로 태어났다. 핏빛 번개 속에서 나는 집으로 갔고, 그날 이후로 어머니를 한번도 만난 일이 없다. 어머니는 내 기억의 저편 강가에 누워 있다. 평생 동안 나는 어머니의 뜨거운 살로부터, 어머니의 역겨움으로부터 안전한 삶을 살았다. 어머니는 자신의 아이를 목 졸라 죽였다는 이유로 감옥에 갔고, 출소 이후에는 스스로 모습을 감추어버렸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의 저녁은 제비들에게 뜯어먹히며 빠르게 흘러갔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를 모른다. 시간이 한참 흐른 다음에야 내 야생이 다름 아닌 최초의 여인, 그녀의 자연에서 왔다는 것을 짐작하게 되었을 뿐이다.

어느날 기차를 타고 여행하다가, 우연히 식당칸에서 검은 옷을 입은 한 여자가 홀로 식사하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원래 검은색인 머리에 꽤 많은 흰색 머리카락이 섞여 있었지만 등과 목이 유난히 곧고 자세가 우아한 그녀의 나이를 짐작하기는 어려웠다. 서른살에서 여든살 그 사이의 어디라도 가능해 보였다. 그녀는 상반신을 곧게 세우고 앉아, 접시 한가득 담긴 커다란 커틀릿을 주의 깊게 잘라 입속에 넣고 신중하고 꼼꼼하게 씹고 있었다. 나는 통로 반대편 식탁에 앉아 그녀를 지켜보았다. 그녀가 고기를 자르고 입에 넣고 씹는 그 일련의 반복적인 행위에는 내 마음을 사로잡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녀의 옆 차창으로는 노란 유채밭이, 흉측한 고층건물이 늘어선 도시 외곽이, 초록의 강과 다리와 목초지가 번갈아 지나가고 있었다. 간혹 돌발적인 암흑이 차창을 가득 뒤덮었고, 유리창에는 커틀릿을 먹는 여자와 그것을 지켜보는 내 모습이 또렷하게 반사되었다. 나는 끝나지 않는 기나긴 터널을 보았다. 시간이 갈수록 그녀의 먹는 행위는 비슷한 깊이를 지닌 인간 행동의 다른 심연으로 대치되고 있었다. 마치 그것이 깊은 사색이나 비명, 찬란한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는 눈동자, 피투성이 속옷, 파렴치한 범죄나 종교적인 제의와 동일하다는 듯이. 그녀의 옷자락에는 장례식용 검은 브로치가 달려 있었다. 식사 도중에 그녀는 포크를 내려놓고 접시를 옆으로 밀쳐내더니, 고개를 숙여 긴 머리카락을 앞으로 늘어뜨리고는, 양팔을 좌우로 벌린 자세로 머리를 급작스럽게 앞으로 깊이 수그렸다. 이마가 식탁에 부딪히는 소리가 쿵 하고 들릴 정도였다. 흰색이 섞인 검은 머리카락이 식탁과 접시를 뒤덮었다. 그녀는 그 자세 그대로 굳어버린 듯 한동안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그것은 서두르거나 주저하지 않고, 그 어떤 과장도 없이, 하지만 그녀 자신만이 알고 있는 비밀의 필연성을 갖춘 동작이었다. 그래서 마치 춤과 같은 인상을 주었다. 나는 이유를 모른 채 그녀와 그녀의 기묘한 춤에 강하게 사로잡혔다. 그러나 나는 내 자리에서 아무런 말도 없이, 아무런 반응도 없이 계속 그녀를 지켜보기만 했다. 언젠가부터 내가 알게 된, 세상을 바라보는 어떤 방식으로, 즉 가만히, 그리고 동시에 거의 외면하면서.”

 

바닷가에서 우루는 본다. 흐릿한 빛의 여운 사이사이 고인 검은 그림자의 구덩이들이 진하고 깊었다. 세마리 검은 개가 해변을 달려가고 있었다. 다양한 농담의 반투명한 검은 빛들이 층을 이룬 사이로 개들의 짙은 실루엣이 길게 넘실대다가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 나타났다. 개들이 뛰어오를 때마다, 허공은 검은 광채로 이루어진 무수한 수평선으로 쪼개졌다. 모든 수평선의 수면에서 일제히 반사하는 빛의 그림자가 세계의 파도를 이루었다. 개들은 길게 이지러진 달처럼 미친 듯이 몸을 떨며, 어둠으로부터 빛의 거울 속으로 뛰어들어갔다가, 빛으로부터 다시 어둠의 거울 속으로 미끄러지기를 영원히 되풀이했다. 개들의 검은 실루엣이 움직일 때마다 그것들을 둘러싼 무수한 검은 수면들이 파열하면서 빛을 입은 투명한 어둠의 파편들로 퍼져나갔다. 그것은 춤인데, 춤추는 것은 막 육체에서 이탈하는 중인 개의 영혼이었고 개의 순간, 개의 죽음이었다. 흰 이빨과 검은 내장, 성기와 혀 그 사이로 흐르는…… 모든 것이 동시에 눈에 들어왔고, 모든 것이 동시에 흘러갔다. 우루는 떨었다. 자신 안에서 고요히 불타기 시작한 한그루의 떨기나무를 느꼈다. 카메라의 플래시가 터지는 섬광의 순간, 그녀는 눈에 들어온 미래의 아름다움과 잔인함을 믿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