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의 목소리
어느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통일을 위하여
▶ 지난호 특집 중 「통일문학사를 생각한다」를 인상 깊게 읽었다. 통일에 대해 다양한 주제로 얘기할 수 있겠지만 ‘문학’이라는 키워드는 낯설고 또 새로웠다. 그외에 평화적 감수성이라 일컬을 수 있는 생태나 젠더 문제에 대해서도 흥미롭게 이야기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예를 들어 통일 후 북한 지역을 개발하면 경제적 이익을 크게 챙길 수 있다는 주장에는 개발에 따르는 생태 파괴의 위험이 소거되어 있다. 또한 통일과정에서 정치적·경제적 이슈가 앞서다보면, 여성 문제는 부차적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이런 생태나 젠더 문제를 포함하는 평화적 감수성은 정부가 주도하는 통일 과정에서 배제되기 쉬우므로, 시민들의 참여가 확장될 필요가 있다. 통일문학사 또한 그 지점에서 다뤄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체제는 다르더라도 모국어가 하나이면 둘은 굳이 번역할 필요조차 없이 통해야 옳지만 분단체제는 혹여 ‘내통’하는 장면이라도 발각되면 누구도 예외없이 가혹한 응징을 가했다.”(57면) 이 문장을 읽고 ‘동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국어사전에 등재된 동무의 뜻을 찾아보면 ‘늘 친하게 어울리는 사람’ ‘어떤 일을 짝이 되어 함께 하는 사람’으로 나와 있다. 즉 ‘친구’의 뜻인 셈인데, 동무라고 하면 왠지 모르게 북한 억양으로 재생되어 귓가를 맴돈다. 사실 남과 북이 갈라서기 전까지 동무는 친구의 의미로, 정감있는 단어로 사용되었다. 분단으로 인해 언어조차 제대로 쓰지 못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모국어 안에서 이념의 국경을 지워가는 길, 바로 그 위에서 통일문학사가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통일문학사를 생각하니 걱정도 되었는데, 이러한 마음은 정부 차원의 통일에서 배제될 수 있는 평화적 감수성을 시민들이 만들어가야 한다는 이야기와도 통한다. 남과 북이 통일문학사를 써내려갈 때, 이데올로기의 경계를 지우고 보편성을 극대화해야 하지만, 그 보편성에 무엇이 포함되는지도 검토해보아야 한다. 어느 누구도 배제하지 않고 평화적 감수성을 확장할 때 통일문학사는 빛을 발할 수 있을 것이다.
조윤서 myattic564@naver.com
여름호 소설들에 대한 짧은 감상
▶ 『창작과비평』 여름호에 신경숙 작가가 4년 만에 복귀작을 발표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발간 전에 논란부터 접하고 들었던 섭섭함과 실망은 페이지를 넘겨가다보니 미안함과 부끄러움으로 변해 있었다. 신경숙의 「배에 실린 것을 강은 알지 못한다」는 지난해 세상을 떠난 허수경 시인을 추모하는 것으로 짐작되는 작품이다. 친구의 병환 소식을 접하고 그를 만나기 위해 선뜻 유럽으로 향하는 주인공과, 그런 주인공에게 자신의 약해진 모습을 보여주길 꺼려하는 친구의 모습에서 두 작가의 우정을 엿볼 수 있었다. 그 우정이 짐작 가기에 이별을 직감하고 상대를 한없이 배려하는 마지막이 먹먹하게 읽힌다.
이번호 소설란은 여느 때보다 풍성했는데, 김성중의 「정상인」은 과거 운동권 끝물에 함께 맑스를 공부했던 선후배가 이십여년 만에 다시 만나는 이야기이다. 세월이 흘러 사회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후배와 여전히 맑스주의자로 살아가는 선배 사이의 뚜렷한 경계와 긴장을 잘 묘사한 작품으로 인상 깊은 문장들도 많았다. 오선영의 「우리들의 낙원」은 인간의 속물근성을 두 소녀를 통해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번호 가장 좋았던 문장으로 무엇을 꼽을지 「정상인」과 나란히 놓고 오래 고심했다. 임국영의 「헤드라이너」는 이번호에서 가장 ‘골때리는’ 이야기를 유쾌하게 들려주었다. 지금까지 보여준 것보다 앞으로 보여줄 것이 훨씬 많은 작가일 텐데, 박민규와 이기호가 동시에 떠오르는 발견이었다. 천운영의 「금연캠프」에서는 소설 속 주인공들의 금단현상과는 대비되는 맛깔난 문장들이 쉼없이 펼쳐진다. 인물들의 과거나 이후의 이야기들로 소설이 확장되어도 좋을 것 같다. 난 과거의 이야기에 한표. 마지막으로 이기호의 장편연재가 시작됐다. 아일랜드 태생으로 광주외대 교수로 일했던 ‘싸이먼 그레이’의 일대기를 실험적인 방식으로 전개해 특유의 작품세계를 보여준다. 남은 연재에서 펼쳐질 이야기가 더 많은 작품임을 바로 직감할 수 있었다. 기대감이 커진다.
박지영 parkdrew@naver.comt
대학을 넘어 세상을 구하는 페미니즘
▶ 대학에서 페미니즘이 제 역할을 할 수 있을지, 아니 존재하기나 할 수 있을지 회의적이었다. 학생들은 학교에 대한 멤버십을 잃은 지 오래고, 대학은 더욱 위계적인 조직이 되어버렸다. 취업률 높은 학교, 취업이 잘되는 ‘간판’학과만이 각광받는 시대에 평등을 고민하는 페미니즘이 설 자리가 있을까? 모두 사라져버린 서울 내 대학의 총여학생회와 학교 커뮤니티에 올라오는 맥락없는 여성혐오 글이 이러한 각박한 현실을 증명하는 듯 보였다.
이번호 대화 「페미니즘이 대학을 구한다」는 대학의 문제점을 총체적으로 진단하고 있다. 젠더 문제를 외면하는 구조적 관성에 찌든 대학의 문제점들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고, 특히 교수와의 관계가 곧 기회가 되는 ‘대학원’에서 성폭력 피해가 발생할 경우 더욱 특수한 고립에 처한다는 사실도 처음 알게 되었다. 학생회가 학생들에게 학교를 ‘학문 공동체’로 감각하는 기회를 준다는 점에서 대학 내 ‘여자’ 학생회의 존재가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이 글의 끝에서 내가 느낀 것은 ‘희망’이다. 총여학생회는 모두 사라졌지만, 페미니즘을 배우는 소모임과 동아리는 늘어나고 있다. 대학에는 여전히 분노하는 여학생들이 있고, 인지하는 남학생이 생겨나고 있다. 대학은 학생들에게 페미니즘을 던져주는 공간이 되지 못했지만, 대학 안에서 학생들은 끊임없이 ‘페미니즘’을 말하고, 향하고 있다. 페미니즘이 취업과 경쟁 중심으로 돌아가는 대학에 ‘정의’에 대한 감각을 다시 불러일으키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문장은 나의 회의감을 희망으로 바꾸어주었다.
‘페미니즘 리부트’를 겪으며 내가 느끼고 공부한 페미니즘은 나를 바꿨다. 그래서 페미니즘은 대학을, 대학을 넘어선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다. 도덕과 윤리의 최저선이 무너진 이 세상을 구할 수 있는 것은 페미니즘뿐이라고, 나는 믿는다.
조연주 renderingyj@gmail.com
그들의 본질이 코리안일까
▶ 「고향은 부칸입니다」는 이향규가 그의 딸 린아와 함께 매주 토요일 런던한겨레학교에서 자원활동한 일을 그린 산문이다. 이 학교 학생들은 대부분 부모님이 북한 출신인 이민 2세대로, 영어는 유창한데 한국어는 잘 모르는 아이들이다. 필자와 그의 딸은 이 학교에서 ‘우리말’을 가르쳤다. 북한 난민을 가장 많이 받아들인 나라가 영국이라는 사실을 이 산문을 읽고 나서 처음 알았다. 현재 영국에는 700여명의 탈북자들이 체류하는데 이 가운데는 남한을 거쳐서 영국으로 간 경우도 많다고 한다. 남한에서 “잘 지내지 못하면 ‘부적응사례’가 되고 잘 지내면 ‘모범사례’가 되는 관심이 부담스러웠겠다”(474면)는 이향규의 말을 들으니 그런 선택이 이해가 되었다. 고향으로는 돌아갈 수 없고, 남한도 딱히 메리트가 없다면 가장 살기 좋은 나라를 찾는 게 합리적이리라. 이향규가 아이들에게 우리말을 가르친 방법이 인상적이었는데, 그는 우리말 시를 가르쳐준 다음 아이들이 각자 이해한 방식으로 영어로 번역해보게 했다. 이 산문에도 그 일부가 발췌되어 있는데, 윤동주나 나태주의 시를 번역해놓은 솜씨가 신선했다. 전체적으로 재미도 있고 새로운 것도 많이 알게 되어 좋은 글이었지만 한가지가 아쉬웠다. 글 중반부에 필자가 아이들에게 ‘북에서 왔는지 남에서 왔는지 질문받았을 때 어떻게 대답하는지’ 묻는 장면이 있다. 필자 스스로 그 질문이 “남과 북을 구별하는 집착”과 “남한 사람이라는 우월감이 깔려 있”(476면)는 바탕에서 나왔음을 시인했지만, 그것과 별개로 그 아이들의 고향은 영국이라는 사실을 필자가 잊은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북한사람도 남한사람도 아니고 영국에서 태어나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영국인이다. 한 아이가 공책에 “내 고향은 론돈입니다”(478면)라고 쓴 것처럼 말이다. 그들이 한국어를 배우는 것은 부모와 소통하기 위한 목적이 먼저지, 코리안이기 때문에 마땅히 배워야 해서는 아닐 것이다. “코리아가 노스와 싸우스로 나뉘어 있는 것도 처음 알았다는 얼굴”(477면)을 하고 있는 아이들을, ‘아무리 영국에서 태어나고 자랐고 살아갈 것이지만 너의 본질은 코리안’이라는 시선으로 바라봐서는 안 될 것 같다.
홍지성 iyahong24@naver.com
일을 잘하고 싶은 시인의 이야기
▶ 박소란 서효인 시인이 만난 「작가조명」을 읽으며 어쩜 시인들은 인터뷰에서조차 시적이고 아름다운 문장을 사용할까 감탄했다. 처음 만나는 사이라는 두 사람은 조심스럽게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시인이라 하면 왠지 모르게 신비한 분위기를 풍기는, 예민하고 우울한 예술가일 것 같은 막연한 생각이 있었다. 그러나 인터뷰를 통해 드러난 시인 박소란은 훨씬 인간적이고 나와 비슷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시 쓰는 일을 ‘생활’로 정의하여 잔꾀 부리거나 재주에 기대지 않고, 하루하루 출근도장 찍듯이 잘해내고 싶다는 말이 와닿았다. 시인의 숙명은 당연히 좋은 시를 쓰는 것이고, ‘일을 잘하고 싶다’는 두 시인의 단단한 마음이 내게도 전해졌다.
박소란은 슬픔을 관조하거나 모른 체하지 않고 울거나 웃는다. 그가 십년 전에 쓴 「용산을 추억함」이라는 시가 있다. 사랑하는 이를 영영 잃어버린 자의 슬픔의 무게가 아득하게 전해져왔다. 오래전 일이지만, 세상은 더 복잡해졌고 제2, 제3의 용산참사는 계속해서 일어나기에 슬픔은 무뎌질 틈이 없다. 시인의 말대로 감정의 장르인 시는, 읽는 이를 지독히 가슴 아프게 만든다.
그리고 깨어나도 선명한 꿈을 곱씹는 시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꿈에서 깨어난 뒤의 묘한 기분을 좋아하는 나여서 흥미로웠다. 평범한 꿈을 꾸고, 멋진 시를 쓰면서도 자신의 시에 대해 잘 모르겠다고 대답하는 박소란의 담담한 말들이 도리어 더욱 시적으로 느껴졌다. 나와 비슷한 일상 속에서 저런 문장들을 써내는 작가의 능력에 감탄하며 누군가의 글을 훔치거나 닮으려 하지 않겠다는 그의 다짐과 대비되게도, 그의 시처럼 좋은 글을 쓰고 싶다는 소망이 피어오른다. ‘단단한’이라는 단어를 좋아하는데, 박소란 시인에게 잘 어울리는 단어인 것 같다. 앞으로도 단단한 삶에 관한 이야기를 오래도록 공유해주었으면 한다. 한 사람의 시가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고, 용기를 준다는 사실을 알아주었으면 한다.
김민재 movdn@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