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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김종철 『대지(大地)의 상상력』, 녹색평론 2019
민중을 바라보는 샤먼의 마음
박수연 朴秀淵
문학평론가 pinepond1@hanmail.net
『대지(大地)의 상상력: 삶-생명의 옹호자들에 관한 에세이』는 주로 1980년대에 쓰인 김종철의 평론을 모아놓은 것이다. 일곱편 중 네편이 그렇고, 한편은 1979년에 쓰였으니 이 또한 시기상 80년대에 가깝다. 나머지 두편은 2000년대의 소산인데, 가장 늦은 글이 2010년에 발표된 것이다. 그런 만큼 이 책에는 30대 이후 그의 정신세계를 이끌어온 평생의 지적 화두가 들어 있다고 할 만하다. 민중의 편에서 펼치는 역사관이나 근자의 생명·생태관, 좌와 우를 포괄하려는 인문정신에 대한 강조가 한데 어우러져 있어 저자가 한국 지성계나 실천 현장에서 대표자 격으로 자리매김한 생태주의 활동의 근거들을 두루 알아볼 수 있다는 점이 우선 이 책의 미덕이다.
일곱편의 발표 시기는 각각 블레이크론(1984), 디킨스론(1982), 매슈 아널드론(1987), 리비스론(2000), 프란츠 파농론(1979), 리처드 라이트론(1982), 이시무레 미찌꼬론(2010)이다. 이 중 앞 네편은 아무래도 정통 영문학자들에게 좀더 관심받을 만한 글이다. 저자의 글은 논의 대상을 설명하고 길을 잡아주는 일에 매우 상세하고 친절해서, 이 글들을 읽는 것만으로도 마치 이 작가와 평론가들의 전모를 알게 된 것 같은 착각이 들게 한다. 항상 느끼는 일이지만, 대상 작가보다는 자신의 논점에 좀더 집중하는 경우가 많은 국문학자들과 달리 영문학자들은 대상 작가의 전모를 밝히면서 논점을 강조한다는 특징이 있다. 이 책의 글들도 그렇다. 뒤에 이어지는 세편의 글은 현대의 민중적 삶을 본격적으로 다루는 작가들에 대한 논의이다. 라이트와 파농이 각각 미국과 식민지 알제리 민중의 삶을 되돌아보게 한다면 마지막의 이시무레는 저자의 가장 최근 관심사인 생태문제를 천착한 작가이다. 일곱편의 글 모두 한국문학의 독자들이 충분히 관심을 가져야 할 주제 속에서 전개된다. 제대로 이해받지 못한 민중시인 블레이크, 민중 친화적이었으나 변혁의 구체적 상상이 부족했던 디킨스, 인문주의적 균형감각이 돋보인 아널드, 진정한 창조성의 보편적이고 공동체적인 면모를 주장하는 리비스, 식민주의에 대한 고발의 현재성을 환기하는 파농, 흑인 민중의 삶에 대한 당당한 기록자 라이트, 그리고 근대의 파괴적 면모를 고발하는 이시무레. 실로 이들이야말로 저자가 여전히 유지하고 있는 필생의 사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블레이크의 난해함을 두고 시인을 따라가지 못하는 시대적 결함으로 해석하는 관점도 흥미롭고, 리처드 라이트에 대한 논의 속에서 오래 익어왔을 그의 리얼리즘론을 따져 읽는 일도 의미있다. 이런 글들이 사유의 밑바탕을 이루는 것들이라면, 그 사유의 현재를 잘 알려주는 글은 이시무레 미찌꼬론이다. 평자는 이시무레에 대해 완전히 문외한인 터라 이 글을 읽고 가장 먼저 현재 참여하고 있는 독서회에서 읽어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내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샤먼(shaman)으로서의 작가를 이야기하는 부분이다. 리얼리스트 김종철이 어쩌면 내심 강조하고 싶었던 부분이기도 할 터이다. 리얼리스트는 운명적으로 샤먼일 수밖에 없어서다. 그렇다면 리얼리스트는 세계의 표면을 훑어가는 사람이 아니라 세계-존재의 내면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세계의 생명을 되살리는 일이리라.
생태주의와 생명사상은 세계에 대한 인위적 착취를 부정하고 온전히 세계 자체를 긍정하면서 수용하는 이념이다. 세계의 온전한 긍정이란 인간의 주관적 해석 이전의 대상 세계를 인정하는 것에서 가능할 터이다. 그렇다면 생태나 생명에 대한 이해는 인간 사유의 결과가 아니라 세계 스스로의 활동능력으로부터 토대가 생기는 것이다. 이 책을 읽고도 여전히 의문이 남는 이유는 주체로서의 인간이 그의 앞에 놓인 세계를 어디까지 ‘수용-긍정’하고 어디서부터 ‘영유-주체화’하는가의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생명으로서의 대상이나 타자를 인정하고 수용하는 일은 자칫 또다른 주관 혹은 세계에 대한 인위적 구부림을 수동적으로 인정하는 일과 같은데, 그것이 포스트 이념의 상대주의 같은 것으로 귀결돼서는 곤란하다. 만약 그렇다면 저자가 이곳저곳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보편적 삶의 지향이 무화될 것이다.
그에 반하여 능동적 주체로서의 문학적 개성과 세계의 보편적 진실(김종철은 이를 리비스론에서 ‘비개성의 영역’이라고 쓴다)이 무리 없이 결합하는 모습은 바람직한 지향점이기는 하되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해서는 구체적 답을 찾기 어렵다. “창조적인 예술가에게 있어서는 철저히 개성적인 진실에 충실함으로써만 리비스가 ‘제3의 영역’이라고 명명하는 예술의 특이한 경지, 즉 사사로운 것도 아니고 피상적인 의미의 공적인 것도 아닌 독특한 ‘비개성(impersonality)’의 영역에 도달하는 일이 가능하다”(222면)는 진술은 앞에 말한 ‘샤먼’론에 이어지는 것이기는 해도 자칫 세계에 대한 주관적 주장의 한가지로만 그칠 우려도 있다.
평자는 여전히 생태주의와 문학적 과제 사이에 가로놓인 간극을 해결하지 못하는 편이다. 세계를 그 자체로 온전히 인정하고 삶의 동반자로 삼아야 한다는 수준으로 이해하면서 생태주의를 받아들이는 것이 나의 상식이다. 그런데 이런 관점과 함께 문학언어의 창조성을 새로운 언어형식과 연관시키는 순간 불편함이 밀려온다. 흔히 모더니즘의 새로운 언어는 세계를 변형시켜 착취하는 양식이라고 이해되듯이, 세계를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것과 문학언어를 새롭게 형식화하는 것 사이에는 화해되지 않는 생각의 충돌이 있다. 받아들이는 것은 ‘수용-긍정’하는 것이지만 새로운 형식화는 주체적 해석이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가령, 리얼리즘은 세계의 본질을 드러내고 수용-긍정하는 언어인가 아니면 파괴된 세계의 현실을 새롭게 형식화하는 언어인가와 같은 질문이 여전히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문학언어의 새로움이 항용 제기하곤 하는 난해성의 문제와도 연결될 것이다. 문학언어가 가진 ‘새로움의 난해성’은 세계를 인위적으로 착취하는 행동을 합리화하는 것에 불과한가 아니면 세계의 본모습 그 자체인가? 블레이크의 시는 저자의 말처럼 세계를 제대로 형상화했으되 사람들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인가 아니면 지나친 주관적 언어 때문에 난해시로 남고 만 것인가? 어쩌면 생명론과 생태주의가 이 난점을 해결하는 길에서 저자의 블레이크론이 다른 사람들과 차이가 나는 이유가 해명될지도 모르겠다.
한국문학이 미래를 상상하면서 크게 펼쳐 보이는 두갈래 길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깊고 크게 받아들이는 대지적 상상력과 편리하고 세련된 속도의 세계를 만들어 삶의 깔끔한 갈무리를 도모하는 도시적 상상력이 그것이다. 아마 1960년대부터 한국 현실의 미래상을 따져보면서 이미 그것은 출발했을 것이다. 소농공동체적 비전과 중공업적 기획이라고도 할 수 있을 그 미래상 중에서 어느 한편만이 문학적 새로움의 언어와 관련된다고 말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그러나 때로는 무의미한 일들에 대한 상상이 현실의 끈덕진 질곡을 벗어나게 하는 동력이 되기도 하는데, 실로 한국문학의 수많은 상상 영역이 그렇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질문을 던진다. 문학에 있어서 생명과 생태에 대한 사유는 세계 그 자체의 온전성에 대한 것인가 아니면 질곡을 벗어나야 하는 현실의 새로움에 대한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