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사경위
만해문학상 운영위원회는 올해 예심위원으로 박소란 안현미 양경언(이상 시 부문) 김미월 김정아 이경재(이상 소설 부문) 『창작과비평』 상임편집위(이상 비문예 부문)를 위촉했다. 예심위원들은 만해문학상 운영규정에 따라 등단 10년 이상 또는 그에 준하는 경력을 가진 이의 최근 2년간(2019년 5월 31일까지) 출간된 한국어로 된 문학적 업적을 대상으로 예심을 진행하였다. 각 부문별로 진행한 예심회의에서 논의 끝에 아래와 같이 시집 4종, 소설 5종, 평론 1종, 비문예물 3종(총 13종)을 본심 진출작으로 선정했다.
곽재구 『푸른 용과 강과 착한 물고기들의 노래』, 김혜순 『날개 환상통』, 박라연 『헤어진 이름이 태양을 낳았다』, 이경림 『급! 고독』(이상 시), 권여선 『레몬』, 김금희 『경애의 마음』, 김성동 『국수』, 이혜경 『기억의 습지』, 황정은 『디디의 우산』(이상 소설), 최원식 『문학과 진보』(평론), 김경식 『루카치의 길』, 김두식 『법률가들』, 노회찬 『우리가 꿈꾸는 나라』(이상 비문예).
마찬가지로 만해문학상 운영위원회가 위촉한 4인의 본심위원들은 8월 8일 1차 본심을 열고 총 13편의 본심 진출작을 대상으로 한 심사에서 앞의 발표문에 나온 대로 시집 2종, 소설 4종, 비문예물 1종을 ‘최종심 대상작’으로 결정했다. 만해문학상은 2016년에 개편된 방식에 따라 최종심인 2차 본심에서 수상작(상금 3천만원)을 선정한다. 아울러 본상과 다른 장르의 작품에 특별상(1천만원)을 수여할 수 있다. 9월의 2차 본심(최종심)을 거쳐 10월 초 수상작이 결정되며 본심위원 명단 및 자세한 심사평은 『창작과비평』 2019년 겨울호에 발표된다.
최종심 대상작 7편에 대한 예심평은 다음과 같다.
최종심 대상작 예심평
시 부문
김혜순의 『날개 환상통』은 반동의 발길질로 움직여온 시인의 오랜 작업이 결코 한편으로 치우쳐진 방식으로 귀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한 시집이다. 생을 따를수록 죽음이 딸려오고, ‘나’를 발견할수록 거기에 침잠되어 있던 ‘세계’의 흔적이 더욱 가시화될 수밖에 없다는 삶의 이치가 인간의 형상과는 가장 상이한 ‘새’의 형상으로 혹은 동작으로 구현됨으로써 종국에는 ‘순(純)’과 ‘불순’이 한몸으로 뒤섞이는 현장을 펼친다. 시인은 해방되지도, 구속되지도 않았다. 확답할 수 없는 진실의 세계, 환상이라는 ‘통증’으로 각인되는 그 세계를 다만 김혜순적인 리듬으로 응할 뿐이다.
이경림의 『급! 고독』은 촘촘한 밀도를 유지하는 다양하고 이질적인 화법들로 가득 차 있다. 요령을 흔들며 작두를 타는 무당이 내뿜는 무가 같기도 하고 머리에 꽃을 꽂은 미친 여자가 부르는 노래 같기도 하고 빠른 비트에 맞춰 주워섬기는 가수의 랩 같기도 하다. 어째서 시인은 그토록 오랫동안 그같은 촘촘한 밀도와 다양한 발화를 유지하고 있는가. 생물학적 나이와 시력을 생각할 때 때로 그 요설에 가까운 촘촘한 밀도와 미학은 경이로움을 넘어서 괴기스러움까지 느끼게 한다. 이 시집을 끝까지 읽으며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불교의 사유를 시적으로 형상화한 이 시집을 만해의 문학을 기리는 상의 후보로 추천해도 좋다고.
소설 부문
권여선의 『레몬』은 삶의 의미에 대한 작가의 깊은 통찰이 추리를 근간으로 하는 치밀하고 정교한 서사와 매우 성공적으로 만난 결과물이다. 장기 미제로 남은 여고생 살인사건을 둘러싸고 주변의 세 여성이 돌아가며 화자가 되어 사건의 실마리를 풀어나가는 이 소설은 엄청난 몰입도와 설득력으로 무장하여 결국 독자가 책장을 덮은 후 “찰나에 불과한 그 순간순간들이 삶의 의미일 수는 없을까”(199면) 같은 무거운 질문의 답을 스스로 찾게 만든다. 생동감 넘치는 인물들, 간명하고 빠른 전개, 서사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반전까지, 모든 요소가 결국 신의 존재에 대한 회의로 이어지고 삶과 죽음의 의미에 대한 성찰로 나아가는 데 기여한다는 점이 놀랍다.
김금희의 『경애의 마음』은 이른바 ‘쿨한’ 사람들이 익명의 공간에서만 내밀하게 주고받던 마음의 세세함이 결국 실명의 세계로까지 확장될 수밖에 없는 과정을 때로는 웃음으로 때로는 콧등 시큰한 감동으로 선사한다. 인간의 심리가 인물을 파악하기 위한 단순한 수단을 넘어 소설의 골격을 이루는 것은 물론 자잘한 실핏줄이 되어 미세하고 복잡하게 흐르고 만난다. 또한 이 소설은 기성세대의 죄로 밝혀진 참사가 밑그림이다. 『경애의 마음』이 특별한 이유는 연애소설로서, 사랑하는 마음들의 들숨과 날숨을 현미경처럼 드러내는데 그것이 개인의 심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시대의 질문과 세대의 현상에 대한 깊은 성찰로 나아간다는 점이다.
김성동의 『국수』는 그야말로 역작이다. 삼십여년에 걸친 집필기간이 알려주듯 작가의 모든 공력이 고스란히 담긴 작품이다. 작품 속 주요 인물들은 역사기록에 남지 않은 미천한 계급 출신으로, 서세동점의 대격변 속에 사라져간, 조선을 ‘살아낸’ 무명씨들이다. 민초들의 삶이 지닌 아름다움과 위엄을 그들이 사용하는 유장한 조선말의 대하로 펼쳐놓은 이 작품은 무엇보다도 한국문학이 오랫동안 잊고 있던 명제, 즉 작가는 그 나라말의 마지막 수호자라는 것을 되새기게 한다. 낡아 보이기도 하지만 너무나 소중한 명제를 우리 문학계에 다시 제시했다는 점만으로도 그 가치는 매우 크다고 볼 수 있다.
황정은의 『디디의 우산』은 「d」와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로 이루어진 연작소설이다. 전자는 이전에도 작가가 다룬 바 있는 세운상가를 배경으로 하여 그림자가 되어가는 존재들의 말로 표현되지 않는 존엄을 말하는 작품이다. 후자는 촛불세대의 정치적 내면이 탄생하는 과정을 담담하지만 가슴 시리게 그려낸 작품으로, 1990년대 중반의 ‘연대 사태’로 시작하여 계속되는 현실의 역주행 속에서 참된 삶을 고민하는 젊은이들의 조용하지만 치열한 고투의 과정이 새겨져 있다. 특히 최근 주목받는 젠더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소외된 자들이 느끼는 삶의 실감을 매우 감각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비문예물 부문
김두식의 『법률가들』은 해방 이후 초기 법률가들의 행적과 인적 관계망을 치밀하게 복원해냄으로써 사법·검찰 권력의 역사적 정당성 문제를 도발적으로 심문한 보기 드문 노작이다. ‘선출되지 않은 권력’의 민주적 통제를 핵심으로 하는 사법개혁과 검찰개혁이 촛불혁명을 거치며 사회적 의제로 급부상한 오늘날, 읽는 이들은 이 책의 곳곳에서 변화하는 시대의 뜨거운 맥박을 감지하게 된다. 조선정판사 위폐사건(1946)의 조작적 시말을 중심에 놓고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남한 사법·검찰권력의 정치적 뿌리를 밝히는 이 책은 법률전문가가 아니어도 누구나 읽을 수 있지만 법률전문가이되 참다운 비판적 지성이 아니고는 쓸 수 없는 종류의 책임에 틀림없다.
한편 본심작 중 고(故) 노회찬 의원의 『우리가 꿈꾸는 나라』는 고인의 유지와 정치적 메시지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는 예심위의 뜻이 있었으나 저서가 아니라 사후에 출간된 강연록인 점을 감안해 최종심에는 올리지 않기로 결정했음을 밝힌다.
김미월 김정아 박소란 안현미 양경언 이경재 및 『창작과비평』 상임편집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