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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생태정치 확장과 체제전환
플라스틱 중독 시대 탈출하기
김기흥 金起興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 저서 『광우병 논쟁』 『기억하는 인간 호모 메모리스』(공저) 『로보스케이프』(공저) 등이 있음. edinkim@postech.ac.kr
1. 플라스틱 신드롬
언제나 그래온 것처럼 두가지 거대한 담론이 충돌하고 있다. 기술혁신과 죽어가는 지구 살리기. 전자는 이른바 ‘4차 산업혁명’이라는 이름으로 대두되고 후자는 ‘지구온난화’라는 문제로 구체화되고 있다. 풍족하고 안락한 삶을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경제성장률을 높이려 하고 새로운 먹거리 창출이라는 문제를 고민한다. 하지만 다른 한쪽에서 일어나는 폭염, 홍수, 산불, 지진 같은 이상기후나 자연재해는 전지구적 규모의 위기에 대한 논의를 이끌어낸다.
이 두가지 상반된 방향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단면을 잘 보여준다. 발전·개발을 향한 인간의 과잉된 욕망과 자연의 손실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손실을 체감하기에 자연은 범위가 너무 크고, 따라서 위험을 충분히 인지하기 힘들다. 그러나 최근 발생하는 이상기후나 자연재해는 그간의 관념을 바꾸기에 충분했다. 아마존 우림과 호주에서 발생한 대규모 화재, 인도와 방글라데시를 강타하면서 300만명의 이재민을 발생시킨 사이클론 파니, 남아프리카에서 천명 이상의 사상자를 낸 사이클론 이다이, 북극 지역의 기록적인 빙하 손실 현상 등 작년 한해에 벌어진 일련의 재난은 무엇인가 잘못되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전지구적 재난이라는 끊임없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무한성장의 낙관적 미래에 대한 욕망은 사그라들지 않아 문제해결을 불가능하게 한다. 제어 불능의 상황을 가장 명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플라스틱으로 뒤덮인 세상의 풍경이다. 플라스틱은 근대적 세계의 기반을 구성하는 인간의 욕망이 투사된 대표적 물질이 되었다. 자연세계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물질이 지구 전체를 뒤덮는 데는 불과 백년도 필요하지 않았다. 이처럼 빠른 속도로 특정 물질이 문명 전체를 규정할 만큼 지배적인 지위에 오른 것은 인류 역사상 아마 플라스틱이 유일할 것이다. 석기, 청동기, 철기로 이어져온 문명은 플라스틱의 개발로 인해 새로운 전환을 맞았다. 19세기 말에 개발된 플라스틱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승리를 선언하는 최고의 발명품이자 동시에 최악의 물질이라 할 수 있다.
플라스틱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 있을까? 이제 플라스틱은 자연의 일부가 되었다. 지구의 표면뿐 아니라 해저와 대기까지 플라스틱이 존재하지 않는 곳이 없다. 최근 지구에서 가장 깊은 해구로 알려진 마리아나 해구를 탐사한 연구팀은 해저 1만 미터에서 매우 흥미로운 관찰을 했다.1 직접 내려가본 사람이 역사상 단 세명뿐인 이 해저 심연에서 조사팀이 발견한 것은 플라스틱 봉지였다. 런던 같은 대도시의 공기에서도 엄청난 양의 미세플라스틱이 발견되고 있다. 매일 1제곱미터당 575~1008개의 플라스틱 조각이 공기 중에 섞여 있으며 비를 통해 지상으로 쏟아진다. 대기 중 미세플라스틱의 대부분은 사람들이 입고 있는 옷의 구성 성분인 폴리에틸렌이나 폴리스티렌에서 나온 부유물이다.2 한해 3억 3500만 톤(2016년 기준)의 플라스틱이 생산·배출되는 우리의 일상은 플라스틱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2. 신화의 시작
플라스틱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파크신(Parkesine)을 1856년에 처음 발명한 이는 영국의 알렉산더 파크스(Alexander Parkes)다. 그의 목적은 구하기 힘들고 값도 비싼 상아를 대체할 수 있는 물질을 만드는 것이었다. 파크신의 발명은 빅토리아 시대 영국에서 수요가 늘어가던 고급 셔츠 버튼이나 빗 같은 장식품 시장에 변화를 일으킨다. 당시 이러한 것들은 대부분 소뿔이나 진주, 거북이 등껍질, 그리고 상아로 만들어졌다.3 미국의 발명가 존 웨슬리 하이엇(John Wesley Hyatt)이 좀더 세련된 형태의 셀룰로이드를 개발하기도 했는데, 지금의 플라스틱에 가까운 물질이 본격적으로 개발된 것은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전기의 보급과 함께 전선을 절연할 수 있는 물질이 필요해지면서였다. 그에 따라 미국의 발명가 리오 베이클랜드(Leo Baekeland)가 새로운 합성 중합체인 베이클라이트(Bakelite)를 상용화했다.4
정치적인 변화도 플라스틱의 확산을 추동했다. 베이클라이트가 발명된 1907년은 반식민지운동의 확산으로 제국주의적 세계체계의 붕괴가 가속화하던 무렵이었다. 상아와 비단을 생산하던 식민지에서 일어난 저항으로 그 가격이 급등하면서 대체재 개발에 대한 요구가 증가하는 상황이었다.5
2차대전이 끝난 후 플라스틱은 새로운 소비사회의 도래를 알리는 신호가 되었다. 이미 세계대전에서 무기와 비행기에 사용되면서 유용성이 증명된 플라스틱은 전후 민간분야에 적용되면서 수많은 제품의 형태로 시장에 등장했다. 베이비부머 세대는 플라스틱 산업의 팽창과 함께 성장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플라스틱이 보여주는 변화무쌍한 유연성과 다양한 형태로의 변신은 이것이 ‘기적의 물질’로 새로운 유토피아를 만들 수 있는 기반이라는 생각을 가져왔다.6 결국 전후 소비사회 확대 및 경제 호황과 함께 플라스틱의 지배력은 급격히 강화되고 전세계적으로 확대된다.
경제학자이자 역사학자인 윌리엄 헤인즈(William Haynes)는 이 새로운 합성물질이 “히틀러나 무솔리니보다 우리의 자손들에게 더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7 실제로 파크신이라는 이름으로 탄생한 이 새로운 물질은 불과 백년이 안 돼서 인간의 활동을 추동하는 중요한 요소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자동차의 구성물 중 적어도 15퍼센트가 플라스틱이며, 보잉사에서 제조하는 비행기의 부품 가운데 50퍼센트가량이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다.8 코카콜라사는 매년 1200억개의 플라스틱 병을 생산하고 있다. 늘어놓으면 지구를 700바퀴 돌 수 있는 길이가 된다.9
플라스틱이 인간의 삶의 양식을 변화시키는 데 미친 영향은 결정적이다. 플라스틱은 무한성장과 소비의 유토피아적 미래를 현실화할 물적 도구로 인식되었다.10 자연의 제약에서 벗어나 완벽하게 깨끗하고 부드러우며 인간의 의지에 따라 그 형태와 크기를 조절할 수 있는 이상적 질료가 플라스틱을 통해 현실화된 것이다. 플라스틱으로 대표되는 물질적 풍부함은 인류가 빈곤과 결핍의 문제에서 해방될 수 있음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 기적의 물질의 생산량은 1950년 200만 톤가량에서 2015년 3억 2200만 톤가량으로 약 160배 급증했다.11 플라스틱은 인간의 이동경로와 생활에 함께하는 ‘동반 물질’이 되었다. 의식주에서 플라스틱을 빼놓고 삶을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지구는 플라스틱 행성이 되었다.
3. 그 많던 플라스틱은 어디로 갔을까?
플라스틱의 편재성과 풍부함은 이 물질이 지닌 문제점에 대한 인식을 압도해왔다. 특정 산물이 성공적으로 기능·작동할 경우 그 생산 과정의 복잡성과 작동원리는 자연스럽게 블랙박스 안에 갇히게 된다. 하지만 문제가 발생하거나 그 안정성이 흔들릴 때 사람들은 그 기술체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비로소 관심을 갖게 된다.12 비가시화되어 있던 플라스틱의 제조 과정과 복잡성을 담은 블랙박스가 열리기 시작한 것은 의외의 영역에서 일어난 사건 때문이었다.
1956년 일본 쿠마모또현 미나마따(水俣)시의 주민들이 메틸수은에 오염된 어패류를 먹고 알려지지 않은 신경질환에 집단적으로 걸린다. 질병 발생의 원인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메틸수은화합물이 비료에서뿐 아니라 플라스틱의 일종인 염화비닐 등을 생산하는 화학공장에서 폐수에 섞여 배출되었고 그것이 식수로 흘러들어간 사실이 밝혀졌다.13 그와 더불어 플라스틱의 생산량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사용 후 처리에 관한 문제가 제기되기 시작했다. 끊임없이 생산·사용되는 플라스틱의 폐기물은 도대체 어디로 사라지는 것인가? 폐기된 후 자연상태에서 완전히 분해되는 데 걸리는 기간이 약 450년이라는 사실은 플라스틱의 반영구적 성격을 잘 보여준다.
1950~2015년의 플라스틱 재사용과 폐기 현황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그동안 생산된 83억 톤가량의 플라스틱 중에서 사용 후 버려진 양은 약 58억 톤이며 그중 재활용된 것은 7억 톤 정도에 그친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듯 대부분의 플라스틱은 사용 후에 제대로 처리되지 못한 채 우리 주변을 배회하고 있다. ‘마법의 물질’이었던 플라스틱이 인간의 생존과 존재를 위협하는 치명적 파괴자로 변모한 것이다. 폐기물 관리를 고민하지 않고 방치하는 사이에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양의 플라스틱은 환경 재앙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해안을 접하고 있는 국가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 따르면 버려진 플라스틱의 총량은 2010년 기준 약 2억 7500만 톤이며, 그중 480만~1270만 톤이 바다로 흘러든 것으로 추정된다.14
최근 연구에 의하면 미세플라스틱은 알프스 같은 산악지대와 북극에서까지 발견되고 있다.15 육지에 축적된 미세플라스틱 입자는 바람에 날려 대기에 떠돌면서 중국 상하이나 태평양 갈라파고스 군도 그리고 체코의 강바닥까지 세계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16 매년 생산되는 엄청난 양의 플라스틱이 천천히 분해되면서 미세플라스틱으로 전환되어 바람을 타고 전세계로 확산된다. 미국의 사진작가 크리스 조던(Chris Jordan)의 사진으로 유명해진 것처럼 해양으로 유입된 플라스틱은 해양생태계를 교란하고 앨버트로스 같은 조류의 멸종을 재촉하고 있다. 많은 해양생물들이 바다에 부유하는 플라스틱을 먹이로 착각하기 때문이다.17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미 인간도 플라스틱을 먹는다는 것이다. 영국 플리머스대학 연구팀이 그린피스와 함께 수행한 연구 결과, 영국에서 잡히는 어류 중 3분의 2에서 미세플라스틱이 발견되면서 충격을 주기도 했다.18 전세계 수돗물에 대한 조사에서도 샘플 중 83퍼센트에서 미세플라스틱이 발견되었으며,19 시판된 소금에서도 나타났다.20 음식물을 통해 신체에 축적되는 플라스틱 입자의 존재에 대한 증거가 이렇게 다양하게 제시되고 있다. 인간의 건강에 미세플라스틱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해서는 아직 알려진 것이 많지 않지만 과학자들은 환경 문제와 더불어 보건 문제로서도 미세플라스틱의 존재를 우려하기 시작했다.21
4. 탄소경제와의 관련성
플라스틱이 하나의 지질구성물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파국의 가능성은 더욱 명백해졌다.22 자연상태에서 암석화된 인공 합성물질의 발견은 인간이 지질학적 시공간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증명하는 사례다.23 지질학자들은 인류의 활동으로 인해 지층에 근본적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가능성을 공식화하기에 이르렀으며 그 지질학적 시대를 ‘인류세’(Anthropocene)라고 명명했다.24 지질학의 층서학적 구분에 따르면 현재 지구는 신생대 제4기에 해당하는 홀로세(Holocene)에 해당한다. 하지만 인간이 만들어낸 다양한 활동의 결과물, 예를 들어 핵실험으로 인해 공기 중에 확산된 방사능 물질, 대규모 사육을 통해 생산·소비되는 닭의 뼈들, 도시공간을 구성하는 콘크리트, 그리고 화학합성물인 플라스틱은 인간의 물질활동이 지질에 엄청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앞서 본 것처럼 플라스틱은 근대 과학기술과 인간 합리성의 승리를 알리는 상징이었다. 플라스틱은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는 물질적 증거였으며 낙관적 미래를 보장하는 징표였다. 이러한 낙관론은 영국의 화학자 빅터 야슬리(Victor E. Yarsley)의 글에도 잘 나타난다. “‘플라스틱맨’은 인간이 창조한 강하고 안전한 청정물질로 이루어진 환경에서 살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사는 미래는 밝고 깨끗하고 좀더 아름다운 세계가 될 것이다. 그리고 국가가 갖고 있는 자원의 무계획적인 분배를 넘어서 일관되고 계획된 과학적 통제를 통해 완벽하게 문제를 해결할 것이다.”25
그러나 이러한 믿음과는 달리 플라스틱의 이면에는 단순하게 설명될 수 없는 생산방식의 메커니즘이 존재한다. 플라스틱이라는 블랙박스를 개봉하는 순간 드러나는, 복잡하게 얽힌 생산·작동 방식의 기저에는 석유를 기반으로 하는 탄소집약적 생산체계가 긴밀하게 자리한다. 플라스틱 생산량의 80퍼센트 이상이 석유처리 과정에서 만들어지며, 생산된 플라스틱이 시장으로 운송되는 과정에서도 온실가스를 배출하는 탄소경제 시스템에 의존한다. 폐기-소각-재활용까지의 과정에서도 막대한 양의 이산화탄소를 배출할 수밖에 없다. 정치학자 티머시 미첼(Timothy Mitchell)은 현대 민주주의의 역사는 에너지 생산체계의 역사와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다고 주장하면서, 특히 석유의 생산·사용을 중심으로 하는 탄소경제가 현대 민주주의제도를 유지하는 기반이라는 논의를 펼쳤다.26 그는 서구 민주주의제도가 화석연료 생산에 대한 독점 없이는 유지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기존 석탄 기반 에너지시스템과 비교해 석유는 훨씬 편리하게 운송하고 사용할 수 있다. 석유 기반의 농업 산업화, 그리고 합성화학물질, 즉 플라스틱의 개발은 식량 및 천연자원의 제한으로부터 해방된 시스템을 가능하게 했다. 다시 말해 에너지 사용과 소비의 한계를 고민할 필요 없이 무한한 경제성장이 가능한 낙관적 세계관을 제공한 것이다. 한편 민주주의는 기본적으로 계급 간의 투쟁과 갈등을 조절·통제하는 제도이다. 석유 기반 ‘탄소민주주의’는 계급갈등과 저항을 효과적으로 억제할 수 있는 시스템으로 발전하게 된다. 요컨대 무한 경제성장의 낙관론을 형성하고, 저항을 최소화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든 것이 바로 석유 기반 탄소민주주의라는 게 미첼의 주장이다.27
근대 민주주의와 화석연료 생산방식의 긴밀한 관계는 석유 생산 이전의 에너지원이었던 석탄 생산방식과의 대비를 통해 좀더 명확하게 드러난다. 17세기 이후 서구사회에서 산업혁명을 가능하게 한 물적 토대는 석탄 생산과 연관되어 있다. 석탄의 생산 과정에는 탄광, 철도, 항만, 해운 등 여러 단계가 필요한데, 그 안에 매우 복잡한 정치적인 관계가 존재한다. 석탄 생산 노동자들은 각 단계마다 정치적 힘을 보여줄 수 있었다. 이들은 자신의 정치적·경제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노동조합을 결성했고 파업과 태업, 사보타주 등을 통해 이 에너지원의 생산과 흐름을 통제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단 한명의 작업자라도 시스템 전체를 마비시킬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었다.28 석탄을 둘러싼 계급투쟁은 19~20세기의 정치적 흐름을 변화시킨 중요한 요소였다. 1970년대 영국 에드워드 히스(Edward Heath)의 보수당 정부를 붕괴시킨 것이 탄광노동자들의 총파업이었다. 그리고 1979년 마거릿 새처(Margaret Thatcher) 정권이 이른바 신자유주의의 실험으로 처음 시도한 것이 바로 탄광노조 와해와 탄광 폐쇄였다.
반면에 석유 생산체계는 석탄의 그것과는 매우 다른 특성을 갖는다. 석유는 주로 식민지였던 중동 지역에서 생산된다. 서구의 노동자들이 직접 채굴과 수송 같은 과정에 개입할 여지가 매우 적다. 대부분은 장거리 송유관을 통해 통제되는데, 송유관과 해상운송로의 통제는 노동자들의 정치적 개입을 차단하는 데 매우 유리한 장치이기도 하다. 석유 생산에 투입되는 이들은 비숙련 이주 노동자가 대부분이며 이로 인해 탄광노조 같은 단일한 결사체가 결성될 가능성이 매우 적다. 결국 석유 생산을 기반으로 하는 탄소경제는 행위자들을 공동체나 결사체에서 분리해 개인화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제공한다.29
이처럼 석유 기반 탄소경제의 역사는 현대 서구 민주주의의 역사와 중첩된다. 이 탄소경제를 유지하는 기본적 사고, 즉 자연자원의 제약을 넘어서 무한한 경제성장이 가능하다는 낙관적 상상을 가능하게 하는 한 축이 바로 석유를 활용한 합성화학물질인 플라스틱에 크게 의존하는 물적·사회적 체계이다. 플라스틱은 탈자연화된 정치 형태의 기반이 된다. 또한 탄소민주주의 체계에서 본다면, 플라스틱은 개인주의적이고 탈정치적인 이념을 체화하고 있는 합성물이기도 하다. 석탄 생산체계와의 대비를 통해 볼 수 있는 것처럼, 석유 생산체계는 집단으로서 계급의 저항을 해체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무한성장과 소비의 주체는 그 에너지원을 통제할 수 있는 집합적 계급이 아니었다. 대신 파편화되고 개인화된 노동을 할 수밖에 없는 행위자에 대한 이념을 강화했다. 무제한의 욕망을 실현할 수 있다는 근대적 낙관론도 투영되어 있다. 그로 인해 어느덧 과잉 생산과 소비는 미덕이 되었다. 플라스틱으로 대표되는 물질문명의 낙관적 비전을 믿었던 많은 사람들은 그 과잉의 욕망에 중독되는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이다.
5. 과잉 중독을 탈출하기 위한 탈성장
플라스틱의 과잉생산에 따른 환경 및 인간성에 대한 근본적 위협은 기존 삶의 방식에 대한 재고를 촉구하기에 충분했다. 특히 인류세 논의를 통해 인류라는 생물종의 멸절 가능성이 추상적 문제가 아닌 긴박하게 해결해야 할 문제로 다루어지면서 중요한 정치적 의제가 되었다. 풍요로운 석유의 시대는 종언을 고했으며 탄소경제가 가져온, 인간이 야기한 기후변화가 되돌릴 수 없는 상황으로 질주하고 있다. 기존 정치경제체제가 지닌 이념은 인류의 생존과 전지구적 위기를 해결할 방안으로서 힘을 잃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특히 플라스틱의 과잉 생산과 소비가 가져온 치명적 위기와 관련하여 무제한적 성장이라는 이념의 문제점을 비판하는 대안정치적 논의가 강력하게 대두하기 시작했다.30 이른바 ‘탈성장’ 담론이 등장한 것이다.31 탈성장론은 무한성장과 지속 가능한 발전론 같은 기존 정치경제적 언어에 도전하고 있다. 1970년대 말부터 프랑스를 중심으로 제기된 탈성장론은 정치경제학적 의미를 내포한 정치 슬로건으로 사용되었다. 1992년 리우회의에서 ‘지속 가능한 발전’ 개념이 채택되면서 성장담론에 대한 비판적 사고가 제안된 바 있지만 탈성장론은 이 또한 생산을 계속 보장하는 개념으로 보고 성장으로부터의 완전한 결별을 주장한다. 탈성장은 성장사회와의 단절이며 물적·언어적 측면에서 일어나는 변화라고, 대표적 탈성장론자인 세르주 라뚜슈(Serge Latouche)는 주장했다.32 탈성장은 단순히 성장담론에 대한 하나의 대안이라기보다 복수의 대안으로 이루어진 종합적인 스펙트럼을 의미하며, 경제규모의 감소만이 아니라 성장을 인간의 척도로 여기는 성장지상주의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목표로 한다.33 이들 탈성장론자는 2002년 빠리에서 열린 유네스코 콜로키움에서 ‘개발을 해체하라, 세계를 재건하라’라는 슬로건을 사용하면서 서구사회의 발전모델을 강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탈성장론은 기존 경제체계가 내포한 성장에 대한 중독 현상을 지적한다. 무한성장에 대한 환상에 기반해 끊임없이 창출되는 소비에 대한 욕망은 사용하던 제품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소비하도록 유도하는 이른바 ‘계획적 진부화’를 만들어낸다. 라뚜슈는 이러한 성장에 대한 욕망이 ‘인류의 암’이 되었다고 말한다.34 특히 그가 포기하도록 요구하는 것은 ‘기하급수적 성장’이다. 이것이 자본 소유자의 무한한 이윤추구와 자연환경에 대한 파괴적 결과를 일으키기 때문이다.35
기하급수적 성장에 대한 중독을 보여주는 가장 극단적인 형태가 플라스틱 사용 경향에서 발견된다. 한국의 경우 포장에 사용되는 플라스틱 사용량이 2015년 기준 세계 2위라는 사실이 발표되었다.36 2015년에 예상된 2020년 수치는 1인당 67.41킬로그램으로 역시 세계 2위이다. 포장용 플라스틱뿐 아니라 1인당 전체 플라스틱 사용량으로도 한국이 세계 최대 수준이다. 1인당 비닐봉지 사용량은 연간 460개(2017년 기준)로, 한국인 전체 사용량 235억개는 한반도를 70퍼센트 뒤덮을 수 있는 양이며, 연간 플라스틱 컵 사용량 33억개를 늘어놓으면 지구에서 달까지 도달 가능하다.37 스포츠 경기장 같은 곳은 물론이고 장례식장에서도 일회용 플라스틱 사용이 상식으로 통용되는 것 역시 플라스틱 중독 현상을 잘 보여준다.
라뚜슈는 무한성장 모델이 단순한 경제모델을 넘어 도구적 합리성으로 전환되어 식민지 의존성을 합리화하고 유지하는 기능을 했다고 지적한다.38 이러한 성장모델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는 기존 무한성장의 논리를 벗어나 새로운 상상력을 동원할 것을 요구하는바, 여덟개의 ‘R’로 지칭하는 탈성장 선순환체계를 제시한다. 시스템에 대한 재평가(reevaluation), 기존 개념의 재개념화(reconceptualization)와 재구조화(restructuralization), 소비 축소(reduction), 비서구 지역에 대한 부채를 상환하는 재분배(redistribution), 지역공동체에 기반한 재지역화(relocalization), 자원의 재사용(reutilization)과 재활용(recycling)이 그것이다. 이 여덟개의 선순환구조는 기존 가치관에 대한 반성을 통해 “자본주의 경제에서 벗어나 사회적 가치와 인간을 경제보다 중시하는 것”이다.39 그리고 선진국과 후진국 간 부의 재분배와 자연생태계에 대한 접근 기회의 재분배를 통해 소비 축소를 유도하면서 지역공동체 중심으로 지역생산물을 소비하도록 하는 ‘구체적 유토피아’ 프로그램이다.40
그렇다면 성장경제의 기존 문법을 충실히 체화한 플라스틱 문제에 대해 탈성장적 접근은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 영국의 저널리스트이며 윤리적 생활운동을 이끌고 있는 루시 씨글(Lucy Siegle)은 일상생활에서 ‘플라스틱 발자국’(plastic footprint)을 줄이기 위해 또다른 여덟가지 ‘R’ 원칙을 제시한다.41 라뚜슈가 제안한 탈성장 선순환체계와 유사한데 그 가운데 플라스틱을 줄이기 위해 강조된 세가지 원칙인 사용 축소, 재사용, 재활용에 다섯가지 원칙을 덧붙인 것이다. 플라스틱 사용을 기록(record)함으로써 소비를 평가하고, 플라스틱과 탄소 배출 문제 해결을 위한 재사고(rethink)를 해야 하며, 다른 제품으로의 대체(replace)와 플라스틱 사용 거부(refuse), 일상생활에서 일회용 플라스틱의 사용을 중단하고 리필(refill)하는 삶의 방식을 추구하자는 원칙이다.42 탄소경제가 부른 무한성장의 상상력이 많은 사람들에게 중독 효과를 일으키는 상황에서 씨글은 이에 대한 성찰을 주문한다. 과도하게 사용되는 플라스틱이 탄소경제 전반, 그리고 기후위기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정확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플라스틱에서 유래되는 온실가스의 양은 2015년 1.78기가톤이었으나 2050년경에는 6.5기가톤이 될 것으로 추정하는 연구결과가 제시될 정도다.43
과잉생산 과잉소비되는 플라스틱은 이러한 성장 패러다임의 물질적 결과물이다. 이같은 물질의 생산·소비 과정에 대한 비판적 논의를 위해서도 탈성장 개념은 유용한 대안적 프레임이 될 수 있다. 탈성장론적 접근은 과잉과 자극을 통해 반복되는 소비의 악순환을 끊을 수 있는 새로운 기획이다. 이를 계기로 탄소경제, 그리고 플라스틱으로 대표되는 생산·소비 체계가 야기하는 개인주의화와 파편화의 문제를 넘어 집합행동, 지역공동체, 공유정신 등을 복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근대적 성장논리를 극복할 얼마 남지 않은 기회를 인류에게 제공할 수도 있을 것이다.
플라스틱으로 대변되는 모종의 희망과 욕망은 이제 환경파괴와 인류 멸절 위기라는 악몽으로 바뀌었다. 탄소경제에 기반한 근대성의 기획은 이미 그 한계를 드러냈다. 무한한 성장을 통해 살아갈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고 만 것이다. 이제 남은 선택지는 하나뿐이다. 탈성장에 근거한 공동체의 복원만이 과잉생산과 과잉소비로 우리를 중독시킨 플라스틱 문화를 급진적으로 전환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다줄 것이다.
—
- Sanae Chiba et al., “Human footprint in the abyss: 30 year records of deep-sea plastic debris,” Marine Policy 96, 2018, 204~12면. ↩
- Stephanie Wright et al., “Atmospheric microplastic deposition in an urban environment and an evaluation of transport,” Environment International, 2019, 1~7면. ↩
- Lucy Siegle, Turning the Tide on Plastic, Trapeze 2018. 한편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의 풍요와 미국사회에 확산된 여가문화로 인한 당구의 붐 또한 플라스틱 개발을 견인하는 요인이었다. 아시아코끼리의 상아 하나로 겨우 서너개의 당구공밖에 만들 수 없던 상황에서 플라스틱의 발명은 여가와 사치품에 대한 수요를 충족시킬 대안이 되었다. ↩
- Karel Mulder and Marjolijn Knot, “PVC plastic: a history of systems development and entrenchment,” Technology in Society 23, 2001, 265~86면. ↩
- Jeffrey L. Meikle, American Plastic: A Cultural History, Rutgers University Press 1995. ↩
- 같은 책. ↩
- 같은 책 3~4면. ↩
- Julie Cohen, “A Plastic planet,” The Current, UC Santa Barbara 2017. 7.19. ↩
- 윌 맥컬럼 『플라스틱 없는 삶』, 하인해 옮김, 북하이브 2019. ↩
- Heather Davis, “Life & Death in the Anthropocene: a short history of plastic,” Heather Davis and Etienne Turpin, eds., Art in the Anthropocene: Encounters among Aesthetics, Politics, Environments and Epistemologies, Open Humanities Press 2015, 349면. ↩
- Julie Cohen, 앞의 글. ↩
- 브뤼노 라투르 『젊은 과학의 전선』, 황희숙 옮김, 아카넷 2016; Trevor J. Pinch, “Opening the black boxes: science, technology and society,” Social Studies of Science 22, 1992, 487~510면. ↩
- Karel Mulder and Marjolijn Knot, 앞의 글 273~75면. ↩
- Jenna R. Jambek et al., “Plastic waste inputs from land into the ocean,” Science 347, 2015, 768~71면. ↩
- Melanie Bergmann et al., “White and wonderful? Microplastics prevail in snow from the Alps to the Arctic,” Science Advances 5, 2019, 1~10면; Michael Scheurer and Moritz Bigalke, “Microplastics in Swiss Floodplain Soils,” Environmental Science and Technology 52, 2018, 3591~98면. ↩
- Mengting Liu et al., “Microplastic and mesoplastic pollution in farmland soils in suburbs of Shanghai China,” Environmental Pollution 242, 2018, 855~62면; “Microplastics threaten unique Galapagos fauna,” Daily Times 22, 2019. 3. ↩
- Lucy Siegle, 앞의 책; 찰스 무어·커샌드라 필립스 『플라스틱 바다』, 이지연 옮김, 미지북스 2013. ↩
- “From sea to the plate: how plastic got into our fish,” The Guardian 2017. 2.14. ↩
- “Plastic fibres found in tap water around the world, study reveals,” The Guardian 2017. 9.6; Microplastics in Drinking Water, WHO 2019. ↩
- Ali Karami et al., “The presence of microplastics in commercial salts from different countries,” Scientific Reports 7, 2017. ↩
- John Pauly et al., “Inhaled cellulosic and plastic fibers found in human lung tissue,” Cancer Epidemiology, Biomarkers & Prevention 7, 1998, 419~28면; Group of Chief Scientific Advisors, Environmental and Health Risks of Microplastic Pollution, European Commission 2019. ↩
- 지질학자들은 이 암석의 이름을 플라스티글로머레이트(plastiglomerate)라고 명명했다. 플라스틱 성분이 암석화되면서 형성된 것으로 인간이 만들어낸 인공물질이 자연화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이기도 하다. Patricia Corcoran et al., “An anthropogenic marker horizon in the future rock record,” GSA Today 24, 2014, 4~8면. ↩
- Patricia Corcoran and Kelly Jazvac, “The consequence that is plastiglomerate,” Nature Reviews: Earth & Environment 1, 2020, 6~7면. ↩
- 인류세의 개념은 노벨화학상을 수상한 네덜란드의 파울 크뤼천(Paul Crutzen)과 일군의 학자들이 2000년에 제기했다. Paul Crutzen and Eugene Stoermer, “The Anthropocene,” IGBP Newsletter 41, 2000, 17~18면. ↩
- Victor E. Yarsley and Edward G. Couzens, Plastics, Penguin 1941, 149~50면. ↩
- 티머시 미첼 『탄소민주주의』,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옮김, 생각비행 2017. ↩
- 미첼이 석유 기반 탄소경제가 민주주의제도의 형성과 유지에 결정적인 요인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분명히 하는 바는, 에너지 시스템의 물질성과, 자본-국가-노동운동 사이의 복잡한 갈등 및 투쟁으로 형성되는 연결망의 형태가 지금과 같은 형태의 민주주의를 야기했다는 것이다. ↩
- 같은 책 43~44면. ↩
- 같은 책 59~60면. ↩
- 세르주 라투슈 『탈성장사회』, 양상모 옮김, 오래된생각 2014; 『낭비사회를 넘어서』, 정기헌 옮김, 민음사 2014; 『발전에서 살아남기』, 이상빈 옮김, 민음사 2015; 『성장하지 않아도 우리는 행복할까?』, 이상빈 옮김, 민음사 2015; 자코모 달리사 외 엮음 『탈성장 개념어 사전』, 강이현 옮김, 그물코 2018; Valérie Fournier, “Escaping from the economy: the politics of degrowth,” International Journal of Sociology and Social Policy 28, 2008, 528~45면; Giorgos Kallis, “In defence of degrowth,” Ecological Economics 70, 2011, 873~80면; Joan Martínez-Alier, “Environmental justice and economic degrowth: an allience between two movements,” Capitalism Nature Socialism 23, 2012, 51~73면; Viviana Asara, Emanuele Profumi and Giorgos Kallis, “Degrowth, democracy and autonomy,” Environmental Values 22, 2013, 217~39면. ↩
- 플라스틱 소비 자체를 중단하고 새로운 생태학적 대안을 찾기 위한 운동과 관련한 논의로 Lucy Siegle의 앞의 책; 윌 맥컬럼의 앞의 책; 게르하르트 프레팅·베르너 보테 『플라스틱 행성』, 안성철 옮김, 거인 2014; Martin Dorey, No. More. Plastic, Ebury Press 2018; Harriet Dyer, Say No to Plastic: 101 Easy Ways to Use Less Plastic, Summerdale 2018. 지구온난화와 인류세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운동에 관해서는 Greta Thunberg, No One is Too Small to Make a Difference, Penguin 2019; Extinction Rebellion, This is not a Drill: an Extinction Rebellion handbook, Penguin 2019; Mike Berners-Lee, There is No Planet B: a Handbook for the Make or Break Years,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9; David Wallace-Wells, The Uninhabitable Earth: a Story of the Future handbook, Tim Duggan Books 2019. ↩
- 『탈성장사회』 61면. ↩
- Giorgos Kallis, 앞의 글 877면. ↩
- 『성장하지 않아도 우리는 행복할까?』 31면. ↩
- 이상호 「생태경제학과 탈성장: 조지스큐 -로이젠과 라투슈의 관계를 중심으로」, 『기억과전망』 2016년 여름호. ↩
- EUROMAP, Plastics Resin Production and Consumption in 63 Countries Worldwide, Europe Plastics and Rubber Machinery 2016. ↩
- 김이서 「플라스틱 대한민국: 일회용의 유혹」, 그린피스 2020; “국내 플라스틱컵 사용량 연간 33억개...쌓으면 달까지 닿아”, 연합뉴스 2020.1.4. ↩
- 한상진 「탈성장 접근과 중강도 지속가능성의 탐색: 환경정의 담론의 생태사회적 재해석」, 『ECO』 2018년 상반기호 75~102면. ↩
- 이상호, 앞의 글 176면. ↩
- 『성장하지 않아도 우리는 행복할까?』 11~14면. ↩
- Lucy Siegle, 앞의 책. ↩
- 같은 책 84면. ↩
- Jiajia Zheng and Sangwon Suh, “Strategies to reduce the global carbon footprint of plastics,” Nature Climate Change 9, 2019, 374~78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