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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생태정치 확장과 체제전환

 

‘자본세’에 시인들의 몸은 어떻게 저항하는가

 

 

나희덕 羅喜德

시인, 서울과학기술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최근 시집으로 『야생사과』 『사라진 손바닥』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파일명 서정시』 등과 시론집 『보랏빛은 어디에서 오는가』 등이 있음. rhd66@hanmail.net

 

 

끝나지 않은 술루세(Chthulucene)는 미친 정원사처럼 인류세의 쓰레기, 자본세의 박멸주의, 그리고 부스러기와 찢어진 조각들과 퇴적물들을 그러모아야 한다. 그리고 여전히 가능한 과거들과 현재들과 그리고 미래들을 위해 훨씬 뜨거운 퇴비더미를 만들어야 한다.

—도나 해러웨이

 

 

1. 지구는 불타오르며 녹아내리고 있다

 

2016년 『싸이언스』(Science)에는 얼 엘리스(Erle Ellis)를 비롯해 이십여명이 공동집필한 논문이 발표되었다. 연구진은 그린란드 빙하 지역의 퇴적물 단면을 시각화하고 그 성분을 분석하였다. 여기에는 “기후변화로 빙하가 녹으면서 이끼 등 유기 조직물이 빙하 위를 덮고 그 아래 흙, 유기물과 뒤섞인 플라스틱 찌꺼기, 콘크리트 잔해, 혼합시멘트, 핵물질, 살충제, 금속 성분, 바다로 유입된 비료 반응성 질소(N2), 온실가스 농축 효과의 부산물 등”1이 포함되어 있었다. 지구온난화로 일어난 이 지질층의 변화는 인류세라는 담론의 증거물이자 기후위기에 대한 강력한 경고가 될 만한 것이다. ‘인류세’(Anthropocene)는 현재의 ‘홀로세’(Holocene)를 잇는 지질시대를 가리키는 개념으로, 인류가 지구를 공멸시킬 주범이라는 위기의식을 담으며 다양한 분야에서 새로운 쟁점을 만들어내고 있다.

먼저 이 글의 제목에 ‘인류세’ 대신 ‘자본세’를 쓴 이유를 설명할 필요가 있다. ‘자본세’(Capitalocene)라는 용어는 생태맑스주의자인 제이슨 무어(Jason Moore)나 안드레아스 말름(Andreas Malm) 등이 인류세 논의의 문제점을 비판하기 위해 사용하기 시작했다. 사회주의 페미니스트인 도나 해러웨이(Donna Haraway)도 인류세 개념으로는 당면한 문명적 위기를 제대로 설명하거나 극복할 수 없다고 보았다. 인류세라는 말에는 지구를 파괴한 것도 인간이지만, 그것을 해결할 주체 역시 인간이라는 인간중심주의가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인류세 담론이 지구의 생태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내놓는 대책들도 기존의 시스템 이론으로부터 크게 자유로울 수가 없다. 위기관리라는 명분으로 더 큰 문제를 만들어낼 가능성이 있고, 정치적 이해관계나 자본의 논리에 의해 개량화되거나 관료화될 위험도 적지 않다.2 그런 데다 인류라는 막연하고 보편적인 가해자를 상정함으로써 어떤 경제적 계층이나 정치적 입장과도 대립하지 않으며, 자본가들의 책임을 은폐하고 모든 사람의 책임인양 문제를 희석한다.3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호주에서는 산불이 계속되었다. 작년 9월부터 시작된 산불로 벌써 10억마리가 넘는 야생동물이 폐사되었고, 수많은 생명체가 멸종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아마존 화재나 호주 산불은 단순한 자연재해가 아니다. 2013년부터 장기집권하고 있는 우파 정당(자유국민연합)과 보수 미디어들은 신자유주의를 신봉하며 자본가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해왔다. 줄곧 석탄 수출국 1위를 지켜온 호주는 화석연료 중심의 경제정책을 강화하기 위해 마구잡이식 삼림채벌을 용인해주었고, 대화재는 그 필연적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기후위기가 지금 같은 속도로 심각해질 경우 2100년이면 해수면이 1미터 이상 높아지고 해안가에 살고 있는 호주 국민의 대다수가 삶의 터전을 잃어버릴 것이라고 한다.4

이런 사정은 한 나라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근대화에 토대를 둔 이 위험사회는 산업화가 지구적으로 전개되면서 체계적으로 강화될 수밖에 없고, “기술적 선택의 능력이 커짐에 따라 그 결과의 계산 불가능성도 커”5졌다. 최근 빠르게 확산되는 신종코로나바이러스의 위험을 생각해보라. 먼 나라의 산불이 아니라 언제든 나와 가족이 전염병에 감염될 수 있다는 공포에 온 세계가 사로잡혀 있다. 오늘날 자연재해와 사회적 재난은 무관할 수 없고 국지적 양상을 띠지도 않는다. 글로벌 자본주의체제가 지속되는 한, 화석연료에 의존한 성장사회를 멈추지 않는 한, 부유한 계층이 기득권과 탐욕을 내려놓지 않는 한, 환경파괴와 노동착취는 가속화될 수밖에 없다.

‘인류세’ 논의를 주도해온 과학자 브뤼노 라뚜르(Bruno Latour)는 지구의 급박한 위기상황을 “연료가 바닥난 비행기, 구멍이 난 배, 불타고 있는 집”6에 비유했다. 이 총체적 재난은 “빈곤은 위계적이지만, 스모그는 민주적”7이라는 울리히 벡(Ulrich Beck)의 말처럼, 특정한 나라나 계층에 한정되지 않고 누구나 겪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책임과 영향은 결코 공평하지 않으며, 가장 피해를 많이 입는 것은 경제적・사회적 약자들이다. “위험분배의 역사는 부와 마찬가지로 위험이 계급유형에 밀착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지만, 그 방향은 서로 반대다. “부는 상층에 축적되지만, 위험은 하층에 축적된다.”8 생태문제가 정치체제나 경제구조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고 ‘생명정치’ 또는 ‘정치생태(학)’라는 말이 시대적 키워드로 회자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1991년에 창간된 이래 생태 사상과 운동을 지속적으로 펼쳐온 『녹색평론』의 글들을 일별해보면 생태적 전환을 모색하는 범위나 접점, 문제의식 등이 계속 확대되어온 것을 확인하게 된다. 김종철의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녹색평론사 2019)에서도 에콜로지가 농업, 민주주의, 자본주의, 시민권력 등의 문제와 전방위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머리말에서 저자는 이렇게 쓰고 있다.

 

아무리 순환적 삶의 질서의 회복과 흙의 문화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하더라도, 현실적으로 그러한 사회로 방향전환을 하자면, 우리의 집단적 삶의 운명을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의사결정 과정, 즉 ‘정치’가 합리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의미에서, 일찍이 호세 무히카 우루과이 전 대통령이 “지금 인류사회가 직면한 진짜 위기는 환경위기가 아니라 정치의 위기이다”라고 했던 말은 매우 의미심장한 발언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7~8면)

 

십대의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Greta Thunberg)는 2019년 9월 뉴욕에서 열린 유엔 기후행동정상회의에 참석한 각국의 지도자들을 향해 “당신들은 헛된 말로 저의 꿈과 어린 시절을 빼앗았습니다”라고 강력하게 항의했다. 꿈을 저당 잡힌 채 미래의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다음 세대들의 항변 앞에서 시를 쓰는 일이 과연 툰베리의 호소만큼 강렬한 울림과 호소력을 지닐 수 있을까 되묻게 된다. 전지구적 생태위기와 자본주의의 말기적 증상 앞에서 시인은 어떤 공포와 불안과 슬픔과 분노와 우울에 갇혀 있는가. 그 정동(情動)은 시인들의 몸-언어를 통해 어떻게 발현되는가. 이 글은 그런 질문에서 시작해 자본세를 살아가는 시인들의 몸이 어떻게 저항하는지를 살피고자 한다.

2000년대 이후 한국시는 지배적 감각체계를 바꾸고 새로운 윤리를 모색하는 전환기를 통과하고 있다. 특히 생태정치가 세계의 위기와 삶의 고통을 발화하는 공통지점으로 등장하고, 다양한 정동의 양태와 언술방식으로 분화한 점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그 스펙트럼은 매우 넓지만, 이 글에서는 백무산, 허수경, 김혜순의 최근 시를 중심으로 논의하려고 한다. 이 시인들은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대립구조 속에서는 다른 경향을 지닌 것 같지만, 생명과 죽음, 노동과 계급, 문명과 자본주의, 전쟁과 폭력 등에 대한 지속적 탐구와 시적 실천을 해왔다는 점에서 친연성을 지닌다. ‘자본세’의 디스토피아를 예민하게 감지하는 그들의 몸은 언어라는 가장 무력한, 그러나 바로 그런 이유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로 맞서 싸우고 있다. 이 싸움이 주체 중심의 증언과 선언이든, 타자 지향의 질문과 대화이든, 타자-되기의 연행과 제의이든, 그 모두를 ‘저항’9이라고 부르지 않을 이유가 내게는 없다.

 

 

2. 나는 그 폐허를 원형대로 건져내야만 한다

 

백무산의 시는 일종의 폐허의식에서 출발한다. 「패닉」(『폐허를 인양하다』, 창비 2015)에서 ‘나’는 한밤중 산길에서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만져질 듯한 별들이 패닉처럼/하얗게 쏟아지는 우주//그 풍경이 내게 스며들자/나는 드러난다/내가 폐허라는 사실이”. 자연이나 우주의 풍경이 폐허를 인식하게 하는 거울이 되어준 셈이다. 그 순간 ‘나’는 다짐한다, “그 폐허를 원형대로 건져내야만 한다”고. 마치 인류세의 지질층을 보여주려고 그린란드 빙하 지역의 퇴적물을 탐사한 과학자들처럼, 시인은 패닉에 빠진 세계의 폐허를 언어로 인양해내려고 한다. 그러나 폐허를 인양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인양」에서처럼 “가라앉은 것은 건져올리지 못한다 그것은 항해를 계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캄캄한 수심 아래 무거운 정적 속으로 배는 멈추지 않고 항해를 계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배’가 위험을 적재하고 어둠 속을 항해하는 현대문명의 상징이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폐허를 인양하다』가 2015년에 출간된 사실을 감안하면, 이 ‘배’는 구체적으로 ‘세월호’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2009년 용산참사, 2014년 세월호참사, 2018년 노동자 김용균의 죽음 등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폭력과 무책임에 의해 일어나고 방치된 사회적 재난들은 ‘지금 여기’의 삶이 폐허임을 말해준다.

이성혁은 이러한 상황에서 시인들이 쓸 수도 없고 쓰지 않을 수도 없는 딜레마를 해결할 수 있는 미학적 방식으로 ‘증언의 시학’을 채택하고 있음에 주목한다. 그는 증언시의 특성으로 ‘사태의 전면화와 정치적 의미의 폭로’를 들고, “경악스러운 사태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거나 충격적으로 드러내기 위해서는, 그리고 그 사태에 따르는 시인의 사유나 정동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는 기교가 필요”하지만, “그 꾸밈이나 기교는 심미화가 목적이 아니라 사실을 더욱 잘 증언하기”10 위해서라고 설명한다. 백무산의 시가 주로 증언과 선언의 언술방식을 취하고 있는 것도 절박한 현실의 사태를 생생하게 전달하고 그 정치적 의미를 선명하게 부각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사태의 핵심을 향해 직진해 들어가는 사유와 명료한 언어들은 그의 초기 시부터 줄곧 유지되어온 특성이지만, 현실인식에 있어서는 적지 않은 변화를 보여준다. 1980년대 나온 첫 시집 『만국의 노동자여』(청사 1988)에서 “피가 도는 밥을 먹으리라/펄펄 살아 튀는 밥을 먹으리라/먹은 대로 깨끗이 목숨 위해 쓰이고/먹은 대로 깨끗이 힘이 되는 밥”(「노동의 밥」)이라고 했던 시인은 더이상 노동의 밥이 깨끗하지도 살아 있지도 않다고 여기는 듯하다. 그는 한 대담11에서 “현대 노동은 결코 신성하거나 인간적이지 않”으며 그 자체가 반생태적이고 반인간적인 노동윤리에 의해 가치화된 것이라고 말한다. 특히 “소비자본주의에서는 소비도 노동의 범주에 포함된다”라거나 “미래의 노동은 노동을 극복하는 노동이어야 할 것”이라는 대목에서 노동에 대한 그의 성찰이 계급적 당파성을 넘어 생태적 사유를 통해 한결 풍부해졌음을 알 수 있다.

 

몸이여

참 미안하다

나를 먹이려고 땀과 아픔을 바치고

굴욕과 죄도 달게 삼켰지 목구멍뿐 아니라

사랑도 변변찮아 네 뜨거운 출구도 늘 쓸쓸하게 두었지

그래도 넌 비열한 곳에 가서 줄을 서려고 안달하진 않았지

그래서 비겁했고 오래 괴로웠던 내

몸이여

이제야 처음으로 지친

널 안아본다

—「몸이여」 부분

 

이 시가 실려 있는 『그 모든 가장자리』(창비 2012)에서 시인은 ‘노동’뿐 아니라 ‘몸’에 대한 새로운 발견에 이른다. ‘몸’을 청자로 삼은 이 시에서 ‘나’는 몸을 향해 ‘미안하다’며 처음으로 지친 몸을 안아본다. 몸에 각인된 허기와 고단한 노동의 시절을 떠올리며 ‘나’는 더이상 제 몸의 주인이 아님을 깨닫는다. 인용의 7행과 8행에서 ‘내’와 ‘몸’을 분행한 것도 몸의 독립성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인간만의 특별한 신체를 만든 건/노동의 역사 때문이라는 자연변증법보다” 이제 그가 더 신뢰하는 것은 “인간의 몸은 춤추는 동안 만들어진 신체”라는 사실이다.(「춤추는 인간」) 춤은 어떤 목적을 위한 도구적 행위가 아니라 생명의 힘과 아름다움을 자연스럽게 발산하는 자기목적적 행위다. D. H. 로런스가 「제대로 된 혁명」에서 “어쨌든 세계 노동자를 위한 혁명은 하지 마라/노동은 이제껏 우리가 너무 많이 해온 것이 아닌가?/우리 노동을 폐지하자, 우리 일하는 것에 종지부를 찍자!/일은 재미일 수 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일을 즐길 수 있다”12라고 했듯이, 이 시에서도 몸은 노동을 위해 바쳐진 제물이 아니라 ‘제대로 된 혁명’을 수행하기 위해 살아 있는 감각과 행위의 터전으로 인식된다.

몸에 대한 발견과 각성은 다른 생명체에 대한 경이와 소통으로 확장된다. 「잃어버린 새」에서 ‘나’는 새를 잡아보며 새의 몸이 따뜻하다는 것에 놀란다. “두려움에 떠는 새의 심장을 만져”보기도 한다. “그 야성의 심장에 손이 닿자 나의 온몸이 경련처럼 떨린다”. 그 경이 속에서 ‘나’와 ‘새’는 오래, 깊이, 서로의 눈을 들여다본다. 자연과의 교감은 “내 몸 안에서 잃어버린 새를 찾을 수 있을까” 되물으며 야생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데, 지구라는 별의 시원을 더듬어가는 모습은 다음 시에도 잘 나타난다.

 

잠에서 깨어나 창을 열면 이곳이 별이라는 생각

벌거벗은 인간이구나 하는 생각으로 눈을 뜨기를

그래서 나는 습관처럼 인간의 가장자리 사회의 가장자리

그 모든 가장자리를 그리워한다네

한 십만 년을 소급해서 살고 싶다네

—「그 모든 가장자리를」 부분

 

‘나’는 오히려 “우리 사는 곳에 태풍이 몰아치고 해일이 뒤집고/불덩이 화산이 솟고 사막과 빙하가 있어” “고맙다”고 한다. “내가 사는 곳이 별이란 사실을 언제나 잊지 않게/지구의 가장자리가 얼어붙고 들끓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고, “도심에 광야를 펼쳐놓은 비바람 천둥에도” 두근거린다. 여기서 시인이 그리워하고 꿈꾸는 ‘가장자리’란 “아직 별똥별이 떨어지고 아무것도 길들어지지 않은” 야생의 시공간이다.(같은 시) 하지만 그런 ‘인간의 바깥’은 어디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없다. 자본과 문명이 다 점령해버렸기 때문이다. “밖을 다 지우고 밖을 다 안으로 구겨넣고/밖이 증발하니 밖을 잃은 혁명은 구더기가 다 파먹었”(「인간의 바깥」)기 때문이다.

그렇게 세계를 독점하고 탕진해버린 세력들을 향해, 문명의 “저 눈알을 후벼파는 조명을” 향해, 시인은 단호한 명령문으로 말한다. “밖을 볼 수 없다 밖을 내버려두라 침묵을 내버려두라/고요를 내버려두라 흘러가는 것을 내버려두라”고.(같은 시) 마치 “살아 있는 모든 것에 시간을 부려놓고 수레처럼 빠져나가지만/시간의 주름 하나 잡히지 않는”(「물의 시간」) ‘물’의 몸처럼. 여기서 ‘내버려둔다는 것’은 단순한 방치나 정지가 아니다. 장자(莊子)가 말한 ‘무위(無爲)’처럼, 모든 것이 자연의 본성에 따라 흘러가도록 서로 존중하고 기다려주는 ‘자유’의 행위다. 문명의 맹목적인 질주와 탐욕을 내려놓고 고요와 침묵, 부재와 죽음의 자리를 세상 한켠에 남겨두라는 주문이기도 하다. 그런 생태적 전환 없이는 “내가 더 태어나야 할 곳”이자 “나의 잠재적인 신체”(「인간의 바깥」)로서의 ‘바깥’은 더이상 기대할 수 없다.

하지만 『그 모든 가장자리』를 출간한 이후 세월호를 비롯해 대형참사가 이어지고 경제적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한국사회는 더 깊은 나락으로 곤두박질쳤다. 백무산은 이 참혹한 현실을 전달하기 위해 “시가 무모해지더라도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시를 기회주의자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폐허를 인양하다』 ‘시인의 말’)라고 썼다. 실제로 『폐허를 인양하다』에는 사회적 재난에 대한 메시지들이 다급하게 타전되고 있다. 이성혁의 표현처럼 “시인이 포착한 한국사회의 실재(The Real)”를 보여주는 이 시집 속의 ‘폐허’는 “인지자본주의 시대에서 세계의 상황뿐만 아니라 주체성의 상태 역시 지칭”13한다. 따라서 “일상생활의 잠재적 장 속에 정치적인 것을 관통시키면서 강도 높은 정동을 촉발하고 우리의 행동 능력을 확장시”14키기 위해 시인의 목소리는 증언과 선언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3. 이름 없는 섬들에 살던 많은 짐승들이 죽어가는 세월이에요

 

백무산의 시적 화자가 증언과 선언을 선호한다면, 허수경의 시적 화자는 질문과 대화를 선호한다. 허수경의 시는 일반화된 진리나 주장을 전달하기보다는 타자의 상황을 살피고, 안부를 묻고, 타자에 대한 기원과 고백을 개인적인 방식으로 수행한다. 의문형과 청유형 종결어미가 자주 등장하고, 편지 형식이나 대화체가 많은 것도 청자 중심의 태도를 잘 보여준다. 그 청자는 눈앞에 있는 존재뿐 아니라 아주 먼 시간과 공간에서 지금 여기로 호명된 존재들도 있다.

 

발신자: 고대의 여름

수신자: 현대의 겨울

 

안녕,

다시 가보지 못할 폐허여

경적을 울려대며 사방팔방에서 밀려 나오던 낡은 차들이여

소리소리 지르며 혁대를 팔던 소년들이여

양의 피가 바닥에 흐르던 시장이여

초와 비누 대추야자와 강황 가루를 팔던 거리여

날아가던 총알에 아이의 심장이 거꾸러져도

아무도 그 심장을 거두지 않던 오후여

—허수경 「카프카 날씨 2」 부분(『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허수경은 두권의 시집을 낸 직후 독일로 건너가 고고학을 공부했고, 근동지방 발굴작업에도 참여했다. 그런데 오래된 지층을 탐사하며 문명의 기원을 밝히는 작업이 그에게는 세계 곳곳에서 일어난 전쟁과 폭력을 목격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고대의 여름’을 발신자로 삼아 ‘현대의 겨울’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의 이 시에서 현대는 “다시 가보지 못할 폐허”로 명명된다. 그런데 폐허의 이미지를 3인칭으로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2인칭으로 일일이 호명한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각 시행이 ‘-여’라는 호격조사로 끝을 맺는 것은 시인이 객관적 관찰자가 아니라 정동적 주체로서 참여하고 있음을 뜻한다. 평범한 거리와 시장의 모습이 펼쳐지던 2연에서 돌연 “날아가던 총알에 아이의 심장이 거꾸러”진다. “아무도 그 심장을 거두지 않던 오후”를 향해 익명의 화자는 탄식한다. 전쟁의 참상은 3연에서 더 구체화되는데, “얼굴에 먼지와 피를 뒤집어쓰고/총 쏘기를 멈추지 않던 노인”과 “붉은 양귀비꽃이 뒤덮인 드넓은 들판”과 “무너진 담벼락 사이로 터지던 지뢰”와 “종으로 팔려가서 영영 돌아오지 않던 소녀들”이 차례로 호명된다. 이 호명의 대상에는 사람도 있고, 사물도 있고, 자연도 있다. 그것들 사이에는 어떤 차이나 위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시적 주체인 ‘나’는 단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김소월의 「초혼(招魂)」처럼 그 돌아올 수 없는 타자들을 부르며 지극한 애도를 표하고 있다.

허수경은 전쟁을 직접 경험한 세대가 아니지만, 첫 시집 『슬픔만 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실천문학사 1988)부터 마지막 시집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문학과지성사 2016)에 이르기까지 전쟁과 문명에 대해 지속적인 문제제기를 해왔다. 첫 시집에 실린 ‘원폭수첩’과 ‘조선식 회상’ 연작은 일제강점기 피폭희생자의 육성을 전달하거나 전쟁과 분단에 얽힌 가족사를 들려주었다. 한국의 식민지 역사에서 촉발된 반전(反戰)의식은 독일에 체류하며 펴낸 시집들에서 코즈모폴리턴적인 관점과 시야를 얻게 된다. 그 시들에서 시인의 시선이 머무는 대상은 주로 전쟁에 의해 희생되거나 고통받는 사회적·인종적·젠더적 약자들이다. 이런 타자들에 대한 섬세한 공감력은 인간뿐 아니라 모든 생명체들에게 닿아 있다.

 

이름 없는 섬들에 살던 많은 짐승들이 죽어가는 세월이에요

 

이름 없는 것들이지요?

 

말을 못 알아들으니 죽여도 좋다고 말하던

어느 백인 장교의 명령 같지 않나요

이름 없는 세월을 나는 이렇게 정의해요

 

아님, 말 못하는 것들이라 영혼이 없다고 말하던

근대 입구의 세월 속에

당신, 아직도 울고 있나요?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부분(『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문학동네 2011)

 

이 시는 모든 “이름 없는 것들”에 대한 애도뿐 아니라, 그들을 죽게 만든 폭력의 주체를 환기한다. 이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을 가진 가해자는 “말을 못 알아들으니 죽여도 좋다고 말하던/어느 백인 장교”이자, 자연을 향해 “말 못하는 것들이라 영혼이 없다고 말하던” 근대적 주체들이다. ‘이름’과 ‘말’로 대변되는 근대적 이성의 이름으로 다른 인종이나 자연의 종들에게 폭력을 자행해온 주체들을 향해 시인은 말한다. “거대정치의 이름으로 사람을 죽이는 사람이여, 말이 그대를 불러 평화하기를, 그리고 그 평화 앞에서 사람이라는 인종이 제 종(種)을 얼마든지 언제든지 살해할 수 있는 종이라는 것을 기억하기를. 어떤 의미에서 인간이라는 종은 ‘살기/살아남기’의 당위를 자연 앞에서 상실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런 비관적인 세계 전망의 끝에 도사리고 있는 나지막한 희망, 그 희망을 그대에게 보낸다.”15 전쟁과 살육의 역사 속에서 시인이 건네는 나지막한 희망이란 무엇인가. 시집 전체에서 그것은 ‘어머니’ ‘달’ ‘물’ ‘동그라미’ 등 여성성의 이미지로 변주되고 있다.

 

아이들을 향해 달려가는

저 푸른 마스크를 쓴 이는 누구의 어머니인가,

저 어머니들의 얼굴에 찍혀 있는 청동의 총,

저 아이를 끌고 가는 피곤한 얼굴의 사람들은

 

아이들의 어머니인가

원숭이 고기를 끓여 아이에게 주는 푸른 마스크의

어머니에게 제발 아이들의 안부 좀 전해주어요

아이들이 자라는 그 청동의 시간도, 그 뜨거운 군인이 될 시간도

—「물 좀 가져다주어요」 부분(『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

 

 

‘청동의 시간’과 ‘감자의 시간’은 죽음과 생명이라는 대립구도를 보여주는 듯하지만, 시인은 그 경계를 해체한다. “아이들이 자라는 그 청동의 시간”은 “차가운 시간 속 뜨겁게 자라는 군인들”의 시간이지만, 한편으로는 “땅속에서 감자는/아직 감자의 시간을” 살고 “땅속에서 땅사과가 아직도 열리는” 시간이기도 하다. 이 시에 세번이나 반복되는 ‘아직’이라는 부사어에는 시인이 간신히 붙들고 있는 희망이 깃들어 있다. 그리고 “아이들을 향해 달려가는” 어머니, “원숭이 고기를 끓여 아이에게 주는” 어머니가 쓴 ‘푸른 마스크’는 뜨거운 태양에 맞서 싸우는 생명의 징표라고 할 수 있다.

진술보다 이미지가 두드러진 허수경의 시에서 색채의 상징성은 중요한 요소다. 이혜원은 허수경 시에 나타난 전쟁 표상을 분석하면서 “검은 군인” “검은 노래” “검은 비닐” 등에 나타난 ‘검은색’의 폭력성은 개성을 은폐함으로써 강화되며 “개인과 무관하게 행사되는 무지막지한 집단적 폭력의 가능성을 함축”16한다고 보았다. 이 검은색과 대비되는 흰색, 푸른색, 연등빛 등은 생명의 색채로서 계열체를 이룬다. 선명한 색채의 대비는 “전쟁과 관련하여 선과 악, 약자와 강자, 삶과 죽음, 여성성과 남성성의 대립적 개념을 부각시키는 경향”17을 대변한다.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남성이지만, 여성은 그 피해를 감당하면서 일상을 지키고 생명을 살리는 존재라는 인식이 여기에는 깔려 있다.

 

나는 눈먼 사제의 딸, 이렇게 죽인 소를 사지요, 잘 다져서 볶지요, 고춧가루 마늘에다 은밀한 산그늘에서 가지고 온 고사리를 넣고 끓이지요, 세계를 국솥에 두고 끓이지요 먼 나라에서 온 악기쟁이들을 불러다놓고 끓이지요, 햇빛에 달빛에 별빛에 바람 오는 자리들을 깊숙이 세계의 한켠에다 집어두지요,

—「흰 부엌에서 끓고 있던 붉은 국을 좀 보아요」 부분

 

‘나’는 대지모신(大地母神)처럼, 또는 “눈먼 사제의 딸”처럼, “흰 부엌”에서 “세계를 국솥에 두고 끓이”고 있다. “이 국 끓이는 여사제(女司祭)야말로 시인 허수경의 자화상”18이라는 성민엽의 말은 첫 시집에서 “가난한 선술집의 주모”19를 떠올리던 송기원의 말의 변주처럼 들리기도 한다. ‘시인의 말’에서 “이 시집에 묶인 시들을 反전쟁시라고 부르고 싶다”고 한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에는 그 분명한 의도 때문인지 전쟁/평화, 남성성/여성성의 이분법적 구도가 다소 단순하게 자리 잡고 있다. 그런 점을 의식해서인지 시인은 단정적 진술을 피하고 시적 메시지를 의문문의 여운 속에 남겨두거나 청자에 대한 대화적 태도를 잃지 않는다.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는 시인이 발굴지나 전쟁터에서 돌아와 다양한 타자들과 만나는 일상적 풍경을 보여준다. 그러면서 문명의 폭력성에 대한 첨예한 인식은 생명에 대한 사랑과 생태적 감각을 회복하면서 다층적이고 풍부해진다. 「푸른 들판에서 살고 있는 푸른 작은 벌레」에서 바지에 묻어온 벌레를 털어내며 ‘나’는 “벌레여 이 바지까지 온 네 삶은 외로웠나/이렇게 말하는 건 나, 중심적임을 안다네,”라며 인간중심주의적 태도를 반성한다. 그러나 시인은 이미 “벌레가 나를 벌레적으로 생각하며 푸르러지는 오후”에 도착해 있다. 인간과 자연의 생태적 관계를 잘 보여주는 「내 손을 잡아줄래요?」의 화자는 쥐도 인간도 아니다. “나와 쥐는 이제 기억의 공동체”라고 말하는 ‘나’는 익명화된 존재로서 “내 손을 잡아줄래요?”라며 빈손을 건넨다. ‘쥐의 당신’과 ‘나의 당신’이 만나 말없이 서로의 손을 잡는 것만이 세계와 불우와 슬픔을 견디는 방법이라는 듯이.

 

 

4. 나에겐 노래로 씻고 가야 할 돼지가 있다

 

김혜순의 시에서는 주체의 목소리와 타자의 목소리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겹쳐지거나 밀착된다. 화자가 타자에게 시적 주체성을 양도하거나 다른 존재가 되는 실존적 기투를 감행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시적 주체에게 고유한 얼굴이 주어져 있지 않다는 점은 김혜순의 시를 읽을 때 어려움을 느끼게 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어려움은 독자가 전통 서정시의 단일한 자아 또는 화자의 목소리를 상정하고, 정서적 동일화나 잠언적 메시지를 기대하는 데서 생겨난 것인지 모른다. 그의 시를 읽는 방법은 요동치는 시의 몸속으로 들어가 함께 난장을 벌이며 그 언어적 카니발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렇게 주체와 타자가 한데 섞여 만들어내는 다성적 언술방식은 ‘여성적 글쓰기’ 20라는 말로도 표현되어왔다.

 

시 속의 내가 말하지 않고 어머니가 말한다는 것은, 자기 정체성의 영원한 불일치 속에 있는 화자가 말한다는 것이다. 타자와의 몸 섞임 없이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는 어머니가 말한다는 것이다. (…) 그러기에 어머니의 언어는 연기(演技)의 언어, 연희(演戱)의 언어다. 어머니는 고착된 자아가 내지르는 언어를 알지 못한다. 저 어두운 곳에서 포효하는 고립된 자아의 무서운 진리의 목소리를 알지 못한다.21

 

여성시의 화자는 자아를 사유하는 주체로 인식하지 못하는, 단지 몸으로 느끼고 행동하는 감성적 주체, 행위자다. 그러나 시간도, 공간도 자유롭게 건너뛰는 신체 기반적 수행 주체다. 이쪽과 저쪽을 동시에 살아내는 주체 망각의 분열 주체다. 그러나 그 주체가 기르는 이미지 속에 공동체의 죽음과 생명을 운반하는 소명과 의지가 숨어서 숨 쉬고 있다.22

 

시인의 말처럼 여성적 글쓰기란 ‘나’를 지우고 ‘내 속의 어머니’로 하여금 말하게 하는 언술방식이다. 그런 점에서 여성의 언어는 “연기(演技)의 언어, 연희(演戱)의 언어”다. 이때 시적 주체는 고착되거나 고립된 자아가 아니라 타자와 몸을 섞으며 시공간을 넘나드는 ‘신체 기반적 수행 주체’이자 ‘주체 망각의 분열 주체’다. 또한 진리를 표방하는 ‘사유적 주체’가 아니라, 몸으로 느끼고 행동하는 ‘감성적 주체’다. 따라서 “공동체의 죽음과 생명을 운반하는 소명과 의지”가 표출되는 통로나 방식도 일반 서정시와는 다르다.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은 시쓰기가 반드시 ‘탈주체화’와 같은 무언가를 동반하며, 시인들이란 “끊임없이 미치광이가 될 위험과 자신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위험을 무릅쓰는”23 존재들이라고 했다. 김혜순의 시쓰기 역시 일종의 빙의 체험처럼 타자-되기의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술적이고 제의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훔치지도 않았는데 죽어야 한다

죽이지도 않았는데 죽어야 한다

재판도 없이

매질도 없이

구덩이로 파묻혀 들어가야 한다

 

(…)

나에겐 노래로 씻고 가야 할 돼지가 있다

노래여 오늘 하루 12시간만 이 몸에 붙어 있어다오

 

시퍼런 장정처럼 튼튼한 돼지 떼가 구덩이 속으로 던져진다

무덤 속에서 운다

네 발도 아니고 두 발로 서서 운다

머리에 흙을 쓰고 운다

내가 못 견디는 건 아픈 게 아니에요!

부끄러운 거예요!

무덤 속에서 복부에 육수 찬다 가스도 찬다

무덤 속에서 배가 터진다

무덤 속에서 추한 찌개처럼 끓는다

핏물이 무덤 밖으로 흐른다

비오는 밤 비린 돼지 도깨비불이 번쩍번쩍한다

터진 창자가 무덤을 뚫고 봉분 위로 솟구친다

부활이다! 창자는 살아 있다! 뱀처럼 살아 있다!

 

피어라 돼지!

날아라 돼지!

—「피어라 돼지」 부분

 

『피어라 돼지』(문학과지성사 2016)의 1부 ‘돼지라서 괜찮아’는 열다섯편의 시로 이루어진 한편의 장시로도 볼 수 있다. 2011년 무렵 구제역의 악몽 속에서 300만마리가 넘는 돼지들이 잔인하게 살처분되거나 생매장되었다. 시인은 그 희생된 돼지들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돼지들이 ‘되어’ 말한다. 아니, 그것은 언어 이전의 울음이고, 비명이고, 한숨이다. 아무 잘못도 없이 전염병의 위험인자가 된다는 이유만으로 죽임을 당한 수많은 생명체들24의 비명이 구덩이 속에서 썩어가는 창자처럼 낭자하게 들려온다. 돼지들의 고통을 온몸으로 느끼고 그 공포와 수치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서야 어찌 이런 시를 쓸 수 있었을까. 시인은 말한다, “나에겐 노래로 씻고 가야 할 돼지가 있다”라고. 그리고 간절히 청한다, “노래여 오늘 하루 12시간만 이 몸에 붙어 있어다오”라고. 그러니까 이 시는 열두시간 동안 숨 가쁘게 진행되는 씻김굿이다. 이 노래와 제의는 무덤 속에서 썩어간 돼지들의 영혼을 진혼하고 부활시키는 데 바쳐진다. “피어라 돼지!/날아라 돼지!”는 그 원혼들을 깨우는 주문인 셈이다. 이렇게 시인은 자신의 입으로 스스로 말하는 자가 아니라 언어를 갖지 못한 다른 존재들에게 자신의 입을 빌려주는 자이다.

이 고통스러운 ‘돼지-되기’의 과정을 통해 우리는 인간이 문명 속에 처한 상황이 구덩이에 던져지는 돼지들과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는 박준상이 말한 것처럼 “적지 않은 근대 문인이 부르주아지에게 아부하기 위해 애지중지하면서 쓰다듬어왔던 문학적 주체성이라는 겉치레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은 위선 또는 허위”를 벗어던지는 행위이며, 그런 의미에서 “일종의 ‘유물론적’ 전망 위에—설사 시인이 의도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또는 의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역설적으로>—일종의 ‘정치적’ 전망 위에 놓여 있다”25라고 말할 수 있다. 시인은 “나는 돼지/노출증 환자 돼지//나는 내 오물을 나의 독자들에게 나눈다”(「요리의 순서」)라고 말함으로써 시란 고상한 이념이나 낭만적 환상을 주입하는 도구가 아니라 인간이 싸지른 온갖 ‘오물’을 공유하는 매개체임을 천명한다.

김혜순은 1980년대부터 한국 여성시의 전위로서 젠더적 글쓰기의 새로운 길을 열어온 시인이다. 그런데 2000년대 이후 그가 펴낸 시집들을 보면서는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강력한 질문과 회의를 자주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피어라 돼지』에서 돼지-되기를, 『날개 환상통』(문학과지성사 2019)에서 새-되기를 감행함으로써 남성/여성의 이분법뿐 아니라 인간/비인간의 경계마저 해체하고 있는 그의 시들을 과연 젠더적 관점만으로 제대로 읽어낼 수 있을까26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런 질문에 대해 박슬기는 “이제 우리는 김혜순의 시에서 여성성 혹은 여성시라는 낙인을 떼어내야 한다. 그것이 단일자로서의 보편에 대항하는 모든 주변의 것들, 타자성의 시학의 다른 이름이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여성시라고 부를 때, 그 담론은 여성을 주체화한다”27라고 주장한다. ‘여성성(여성시)’이라 규정하는 순간 여성을 주체화할 위험이 있고, 그것은 은폐된 타자들에 대한 또다른 대상화가 될 수 있다는 이 말은 김혜순의 시뿐 아니라 여성성과 타자성의 관계에 대해 새로운 사유의 지점을 제공한다고 여겨진다.

 

 

5. 미친 정원사처럼 뜨거운 퇴비를 만들어야 한다

 

첫머리에 인용한 도나 해러웨이의 말로 돌아가보자. 그럼, 파국을 향해 치닫는 위험사회 속에서 난민과도 같이 살아가는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는 무엇일까.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인류세의 쓰레기, 자본세의 박멸주의, 그리고 부스러기와 찢어진 조각들과 퇴적물들을 그러모아” “뜨거운 퇴비더미”를 만드는 일이다. 이는 앞서 살펴본 시인들처럼 몸적 주체로서 이 세계에서 버려지고 고통받고 죽임당하는 존재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 목소리들을 다양한 방식으로(증언과 선언/질문과 대화/연행와 제의 등) 드러내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세 시인이 공통적으로 ‘병들고 불구가 된 흙’에 주목하는 것은 우연한 현상이 아니다.

 

녹색은 기적이다

부유하는 먼지와

불구가 된 흙과

폐기된 배설물과

추방된 독극물과

배제된 토사물을 먹고

허공 신전의 푸른 기둥을 올렸다

—백무산 「땅을 딛고 일어날 뿐」 부분(『그 모든 가장자리』)

 

에이디 2002년 팔월 새벽 여섯 시 삽으로 정방형으로 땅을 자른다, 비씨 2000년경 토기 파편들, 돼지뼈, 염소뼈가 나오고 진흙으로 만든 개가 나오고 바퀴가 나오고 드디어는 한 모퉁이만 남은 다진 바닥이 나온다 발굴은 중단되고 청소가 시작된다 (…) 일 미터를 지나왔는데 내가 파낸 세월은 한 오백 년, 내가 서 있는 곳은 비씨 2500년, 압둘라가 아침밥을 먹으러 간 사이 난, 참치 캔을 딴다, 누군가 이 참치 캔을 한 오백 년 뒤에 발굴하면 이 뒤엉킨 시간의 순서를 어떻게 잡을 것인가, 이 시간언덕을 어떻게 해독할 것인가

—허수경 「시간언덕」 부분(『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

 

오물은 오늘 밤 온몸으로 오물이 차오르는 걸 그냥 내버려두었다

수렁의 오물들이 고고의 성을 무한하게 내질렀다

 

(…)

 

동물과 식물과 사물들과 친구들의 테두리가 다 터져버리다니

집을 땅속에 묻어야 하나 땅을 땅속에 묻어야 하나

 

눈을 떠도 감아도 수은 빛 환한 오물이

보이지도 않는 방사능 같은 오물이

— 김혜순 「오물이 자살했다」 부분(『피어라 돼지』)

 

백무산은 “부유하는 먼지와/불구가 된 흙과/폐기된 배설물과/추방된 독극물과/배제된 토사물”을 먹고도 나무들이 허공에 “푸른 기둥을 올”리는 것을 ‘기적’이라 부른다. 인류세의 토양이 오염되었더라도 그는 자연에 남아 있는 생명력을 발견하고 녹색의 기적을 꿈꾼다. 허수경은 정방형으로 자른 한조각의 땅 속에서 ‘토기 파편들, 돼지뼈, 염소뼈, 바퀴, 곡식알’ 등을 발굴해낸다. 그리고 “참치 캔”을 따며 자신이 속한 인류세의 흔적이 후대에 어떻게 발굴될 것인지를 헤아린다. 김혜순은 “수렁의 오물들”이 내지르는 비명을 들으며 문명의 찌꺼기인 “금속의 영혼” “수은 빛 환한 오물” “방사능 같은 오물”이 지천에 차오르는 걸 견디고 있다. 그러면서 “동물과 식물과 사물들과 친구들의 테두리가 다 터져버리”는 경험을 한다. 이렇게 시인들은 먼지와 흙과 배설물과 독극물과 토사물과 유물과 오물로 뜨거운 퇴비더미를 만들어낸다, 미친 정원사처럼.

해러웨이는 ‘인류세’의 대안적 용어로 ‘술루세’28 를 창안했다. 그가 보기에 지금 지구는 피난처도 없이 난민(인간이든 아니든)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이제는 더이상 전면적인 혁명이나 문제해결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다. 다만 술루세에서 “필멸의 동물로서 잘 살고 잘 죽는 한 가지 방법은 피난처를 재구축하고, 부분적이며 강력한 생물학적-문화적-정치적-기술적 회복과 재구성을 가능하게 하는 힘들에 합류하는 것”29이라고 말했다. 이와 함께 그는 자연/인공, 남성/여성, 인간/동물, 백인/흑인 등 다양한 이분법적 사고에 저항하면서 ‘친족 만들기’(making kin)를 제안했다. 그가 말하는 ‘친족’이란 조상이나 계보로 묶인 관계가 아니라, 탄생에 의한 연결이 없는 친척이나 탈가족화된 돌봄에 의해 형성된 집합적 개념이다. ‘아기가 아니라 친족을 만들라’라는 그의 슬로건은 인구감소를 걱정하는 이들에겐 다소 당혹스러운 주장이겠지만, 그는 친족을 만들고 혁신하는 것이 윤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더 단단한 바탕 위에 있다고 믿는다.30

『곤란함과 함께하기』31에서 해러웨이는 자본세의 파괴가 극심한 지구 곳곳에서 그 회복을 위해 노력하는 창의적 공동체들을 ‘퇴비의 공동체’라고 불렀다. 그들은 기술이나 혁명 같은 유토피아적 구원을 추구하기보다는, 불완전하지만 타자를 향해 열린 공동체를 만들고자 한다. 근대가 파괴한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회복하고 피난처를 복구하기 위해서는 현실적인 실천이 필요하겠지만, 문학을 통해 새로운 ‘삶의 예술(기술)’을 열어가는 것도 그 일환이 될 수 있다. 자신의 몸이 모든 생명체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 인간은 그 인드라망의 주인이 아니라 그물코에 불과하다는 것, 이런 생태적 전제들을 시인들은 잘 체득하고 있다. 따라서 만물과 ‘살’을 공유함으로써 그들과 함께하는 ‘시쓰기’는 일종의 ‘친족 만들기’ ‘퇴비 만들기’라고 할 수 있다. 심보선의 말을 빌리면, “시란 시인의 고뇌에서 탄생하여 나아가는 수직적인 이행이 아니라, 하나의 몸에서 또 다른 몸으로 나아가는 평면적 확장”32이다. 그 수평적 이행과 새로운 공동체의 탄생을 위해 모든 형태의 이분법과 위계를 부정하고 낯선 타자들과 함께하는 것, 이러한 저항과 창조는 생태적인 동시에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1. 이광석 「인류세 논의를 둘러싼 쟁점과 테크노: 생태학적 전망」, 『문화과학』 2019년 봄호 28면.
  2. 클라이브 해밀턴은 『인류세』(정서진 옮김, 이상북스 2018)에서 지구 시스템 과학의 입장에서 에코모더니즘, 포스트휴머니즘, 신유물론, 사회민주주의 등을 차례로 비판하며 새로운 인간중심주의를 주장한다. 그러나 그는 인류세를 극복해야 하는 인간의 책임과 새로운 윤리를 막연하게 강조할 뿐, 그것이 어떤 장치나 방법을 통해 가능한지는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못한다. 또한 “인류세의 위협에 대한 유일한 대응방식은 집단적인 방식, 즉 정치를 통하는 것”(249면)이라는 발언처럼, 정치권력이나 주류세력에 의존적이라는 점에서 현상 유지에 기여할 공산이 커 보인다.
  3. 이 글의 제사(題辭)가 포함된 Staying with the trouble(Duke University Press Books 2016)의 번역 및 설명은 최유미의 ‘도나 해러웨이, 곤란함과 함께하기’ 온라인강의(아트앤스터디) 자료를 참조했다.
  4. 막심 랑시앵 「호주에서의 지옥의 한 철」, 『르몽드디플로마티크』 2020년 2월호 참조.
  5. 울리히 벡 『위험사회』, 홍성태 옮김, 새물결 1997, 57면.
  6. 브뤼노 라투르·폴린 줄리에 대담 「지층과 자연: 왜 인류세(Anthropocene)인가?」, 『오큘로』 7호, 2018, 86면 참조.
  7. 울리히 벡, 앞의 책 77면.
  8. 같은 책 75면.
  9. ‘저항’의 의미를 푸꼬와 아감벤의 생명정치 논의와 연관시킬 수도 있겠다. “푸코와 아감벤의 논의는 규범과 법의 규정에서 방향을 달리하지만 생명권력이 지배하는 체제 안에서 가능한 투쟁전략은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라는 공통적인 질문을 던진다. 생명권력에 통제·관리·배제되는 삶에서 ‘육체’는 가장 급진적인 저항의 전위이자 장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정현 「생명정치와 디스토피아 문학」, 『어문론집』 73집, 2018, 242면.
  10. 이성혁 「최근 한국시에 나타난 증언시의 시학: ‘사회적 재난’에 대한 한국시의 대응 양상들」, 『시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예옥 2020, 179면.
  11. 백무산·이기인 대담 「미래의 노동, 미래의 노동시」, 『열린시학』 2008년 봄호 37~47면 참조.
  12. D. H. 로렌스 「제대로 된 혁명」, 『제대로 된 혁명』, 류점석 옮김, 아우라 2008.
  13. 이성혁 「인지자본주의의 정동정치와 시의 정치적 위상」, 『외국문학연구』 71호, 2018, 158면.
  14. 같은 글 165면.
  15. 허수경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 뒤표지 글, 문학과지성사 2005.
  16. 이혜원 「허수경 시에 나타난 전쟁 표상과 생명의식」, 『문학과환경』 2019년 18권 1호 145면.
  17. 같은 글 152면.
  18. 성민엽 「고고학적 상상력과 시」,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 해설, 147면.
  19. 송기원 「저주와 은총의 사랑」, 『슬픔만 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해설, 134면.
  20. 김혜순은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문학동네 2002), 『여성, 시하다』(문학과지성사 2017), 『여자짐승아시아하기』(문학과지성사 2019) 등 ‘여성적 글쓰기’에 대한 시론을 꾸준히 펼쳐왔다.
  21.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 84~85면.
  22. 『여성, 시하다』 35면.
  23. 조르조 아감벤 『아우슈비츠의 남은 자들』, 정문영 옮김, 새물결 2012, 171면.
  24. 우리나라에서 과거 20년간 구제역으로 약 400만마리, 조류독감으로 약 9415만마리, 아프리카 돼지열병으로 약 15만마리 등 대략 1억마리의 가축이 전염병 확산을 막는다는 명목으로 살처분되었다. 「‘돼지열병’ 살처분 불과 15만? 20년간 1억 가축 파묻었다」, 한국경제 2019.10.22.
  25. 박준상 「문학의 미종말(未終末)」, 『현대유럽철학연구』 42호, 2019, 88면.
  26. 양경언은 2000년대 시에서 ‘성차가 약화’되어가거나 ‘탈인간화’가 두드러지는 현상을 다루면서 “젠더 프레임을 경유하여 최근 시를 읽는 일의 다양한 가능성”을 논의한다. 이를 위해 “시적 주체가 젠더 규범을 허무는(undoing) 지점을 발생시킴으로써 기존의 ‘인간’ 범주를 의문에 부치는 시편들과, 젠더와 섹슈얼리티를 삶의 존속과 생존을 위해 수행되는 개념으로 전환하여 입체적인 ‘나’를 구사함으로써 ‘삶다운 삶’을 추구하는 시편들”을 분석한다. 양경언 「최근 시에 나타난 젠더 ‘하기’(doing)와 ‘허물기’(undoing)에 대하여」, 『안녕을 묻는 방식』, 창비 2020, 93면.
  27. 박슬기 「김혜순이라는 거울, 살아 있는 언어들의 핼러윈」, 『누보 바로크』, 민음사 2017, 83면.
  28. ‘술루세’(Chthulucene)는 땅 아래 숨어 있는 힘에 주목한 개념으로, 역동적으로 지속되는 공-지하적(sym-chthonic)인 힘과 다양한 지구 차원의 촉수권력들이 모여 재구성하는 시간성과 공간성을 가리킨다. 거기에 얽혀 있는 집합적 존재들에는 인간 이상의 것, 인간 아닌 것, 비인간적인 것, 부식토로서의 인간 등이 모두 포함된다. 도나 해러웨이 「인류세, 자본세, 대농장세, 툴루세: 친족 만들기」, 김상민 옮김, 『문화과학』 2019년 봄호 168면 참조.
  29. 같은 글 167~68면 참조.
  30. 같은 글 169~72면 참조.
  31. 각주 3과 같음.
  32. 심보선 「‘천사-되기’에서 ‘무식한 시인-되기’로: 평론가, 시인, 문맹자의 문학적 정치들」, 『창작과비평』 2011년 여름호 268~69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