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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임솔아 林率兒
1987년 대전 출생. 2013년 중앙신인문학상 및 2015년 문학동네 대학소설상으로 작품활동 시작. 소설집 『눈과 사람과 눈사람』, 장편소설 『최선의 삶』 등이 있음.
sol.a.2772@gmail.com
그만두는 사람들
고양이들이 유리문에 엉덩이를 기대고 있었다. 남쪽으로 나 있는 유리문은 이 시간이면 햇볕을 받고 따뜻해졌다. 이 동네 고양이들은 이 시간이면 햇볕 외에는 더이상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는 표정으로 이곳에 모여 있었다. 나는 유리문에 노크를 했다. 고양이들은 이제 놀라지 않았다. 심드렁하게 나를 쳐다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나는 유리문과 함께 고양이들의 엉덩이를 천천히 밀며 바깥으로 나왔다.
바닷바람 특유의 짠 내가 얼굴을 뒤덮었다. 나는 점퍼 지퍼를 목까지 끌어 올렸다. 해변에는 물이 빠져 수평선까지 뻘이 이어졌다. 장화를 신은 누군가가 뻘 한복판을 걷고 있었다. 노루섬으로 들어가는 중일 것이다. 하루에 두번, 바닷물이 빠지는 시간에만 길이 열려 섬으로 걸어갈 수 있었다. 주민들은 섬에 들어가 굴이나 파래, 다시마 같은 것을 채취하곤 했다. 이곳에는 그런 섬이 많았다. 그곳들은 모두 ‘노루섬’이라 불렸다. 어째서 모두 노루섬이냐고, 나는 주인 할머니께 물어본 적이 있었다.
“노루가 살아.”
재활용 쓰레기를 정리하며 할머니는 답했다. 무리로부터 이탈한 노루일 것이라 했다. 적을 피해 육지를 돌고 돌다 바다를 건너 무인도에 정착을 하는 것이라 했다.
“밤에 가끔 볼 수 있어.”
“뭐를요?”
“노루. 저쪽 숲에서 나타나서는 밤바다를 막 헤엄쳐서 섬으로 건너가.”
“낮이면 길이 열리는데 왜 밤에 헤엄을 쳐서 가요?”
“이 사람아, 낮엔 보이잖아.”
답답하다는 듯 할머니는 말했다.
“그것도 위험하긴 마찬가지일 텐데.”
“위험하지. 날 나쁘면 죽지.”
밤이면 나는 불을 끄고 창 앞에 서 있었다. 창밖에 펼쳐진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초승달이나 그믐달이 떠 있을 때의 바다는 오직 캄캄했다. 달이 점점 차올라 상현달을 지나면서부터는 파도의 물거품이나 바다에 떠다니는 빛조각들을 볼 수 있었다. 마침내 보름달이 뜨면 노루섬까지 보였다. 노루섬의 울창한 나무들이 파도 소리에 맞춰 흔들렸다. 그날은 하현달에 가까워지고 있었고, 바람과 함께 나무와 파도도 멎어 있었다. 자전축을 따라 별이 느릿느릿 움직였다. 나는 숲에 서 있는 검은 그림자를 단번에 알아보았다. 노루는 한참을 가만히 서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바닷물에 몸을 담갔다. 매끈했던 바닷물에 파문이 퍼졌다. 목을 끄덕거리며 노루는 앞으로 나아갔다. 물의 표면과 닿아 있는 노루의 목에서 파문이 겹겹이 생겨났다. 멀리멀리 퍼져갔다. 나는 숨을 죽였다. 노루는 꾸준한 속도로 이동했다. 그리고 섬에 앞발을 디뎠다. 몹시 지쳤는지 발목을 접질리며 미끄러졌다. 목을 낮추고 점프를 해서 섬으로 뛰어올랐다. 순식간에 사라졌다. 나는 참고 있던 숨을 내쉬었다. 밤마다 노루를 기다렸지만 정말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높은 파도 한번 만나지 않고 노루는 섬에 도착했지만, 노루에게는 가장 불안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내가 이렇게 쉽게 볼 수 있었으니까. 누구나 쉽게 노루를 볼 수 있었을 테니까. 노루가 목숨을 건 잠깐의 시간을 지켜보며 나는 어째서 경이로움을 느꼈을까.
그날 이후로도 나는 노루를 기다렸다. 쉽게 목격했으니까 한두번은 더 그 모습을 볼 수 있을 거라 여겼다. 노루는 나타나지 않았다.
곡선으로 휘어진 해변을 따라 곡선으로 휘어진 도로를 걸었다. 횟집과 잔치국숫집, 해물짬뽕 전문점을 차례차례 지나갔다. 불이 모두 꺼져 있었다. 거리에는 사람이 없었다. 토요일 점심부터 일요일 점심까지만 식당들은 문을 열고 손님을 받았다. 주말에는 캠핑족이 해변에 텐트를 치기도 했고, 내가 머무는 은돌콘도에 다른 숙박객이 찾아오기도 했다.
은돌해변을 지나면 차도가 나타났다. 이 차도를 따라가면 숲이 이어졌다. 숲에서 비포장도로로 빠져 한참을 올라가면 숲 한복판에 사비나가든이 있었다.
나는 무인 매표소 기계에 지폐 한장을 집어넣고 가든 안으로 들어갔다. 고운 흙이 깔려 있는 오솔길 양옆으로 곰솔나무가 늘어서 있었다. 곰솔나무길을 따라가면 스무평 남짓한 크기의 작은 연못이 나타났다. 연못의 표면에서 물안개가 피어올랐다. 연못 한가운데에 서 있는 낙우송을 올려다보았다.
사비나가 이 작은 연못을 사들인 것은 1952년이었다. 한국전쟁에 간호장교로 투입된 사비나는, 은돌고개 전투에서 동료를 잃었다고 한다. 그 동료에 대한 이야기를 사비나는 여러 사람에게 보낸 서신에 남겼다. 동료는 적군에 의해 사살된 것이 아니라 탈영을 하려던 아군을 저지하다가 다툼 끝에 살해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전쟁 트라우마와 향수병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사건은 종결되었다. 사비나는 오랜 시간 동료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알리기 위해 애를 썼다. 본국으로 귀환해도 좋다는 승인을 받았지만 사비나는 이 은돌마을에 남았다. 한국으로 귀화했다. 사비나는 외부와의 접촉을 차단한 채 작은 연못가에서 60년을 혼자 살았다. 그리고 9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작은 연못 뒤쪽에 지어놓은 자신의 목공실에서 사비나는 혼자 숨을 거뒀다. 사비나의 유언에 따라, 사비나가든은 일반인에게 개방되었다. 사비나는 작은 연못에서 시작되는 3만평 부지의 땅을 오랜 세월에 걸쳐 매입했고, 그곳에다 2만 7천여종의 식물들을 키워놓았다. 한국에 군락지가 없다고 알려져 있던 희귀식물과 절멸 위기종이 대거 발견되었다.
작은 연못에서 두갈래의 길이 나왔다. 왼쪽 길은 해안 절벽이고, 오른쪽 길은 동백나무 군락지였다. 오늘은 오른쪽 길을 선택했다. 동백나무 군락지를 지나 뿔남천과 풍년화 군락지를 지나 호랑가시나무 군락지에 도착했다. 겨울에 꽃이나 열매를 맺는 식물이 많았다. 샹소네트와 코튼캔디와 아사히주루 같은 동백나무들. 팔리다와 헬레나 같은 풍년화들. 로툰다, 디오르, 루브리카울리스 아우레아 같은 호랑가시나무들. 나는 흔들의자에 앉았다. 좀 앉고 싶다는 느낌이 들 무렵이면 의자가 놓여 있었다. 어떤 의자는 등받이 없이 통나무 조각만으로 되어 있었다. 어떤 의자는 줄을 매달아 그네처럼 설치되어 있었고, 어떤 의자는 비치체어처럼 다리를 쭉 뻗고 반쯤 눕게 만들어졌다. 비치체어를 닮은 의자에 앉으면 시선이 저절로 하늘을 향했다. 바로 그 자리에서 드넓게 펼쳐지는 낙조를 볼 수 있었다. 해안과 가까워 바닷바람이 부는 지역에는 힘이 좋은 소나무들이 바람막이 역할을 했고, 잎이 여린 식물들은 언덕 아래 바람이 불지 않는 곳에 심어져 있었다. 조약돌길이 끊어져 발소리가 잦아드는 자리에는 새들이나 오리들의 보금자리가 있었다. 오래도록 매만져 반질반질해져버린 나무 협탁처럼 모든 것이 완벽하게 햇볕과 바다와 어우러져 있었다. 그러나 겨울에 특화된 이 식물원을 찾는 관광객은 많지 않았다. 사비나가든은 매년 적자를 면치 못했다. 절멸 위기종을 제외한 나머지 식물들은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곳곳에 포토존이 설치되었고 기념품 판매점과 매점이 들어섰다. 그곳들은 까페로 바뀌었다가, 게스트하우스로 바뀌었다가, 결국 문을 닫았다고 했다.
말라 죽은 나무 아래에는 낙엽들이 무성히 쌓여 있었다. 나는 그곳에 쪼그려 앉아 낙엽 하나를 골라내기 시작했다. 잎맥이 선명한 한개를 주워 일어섰다. 오늘은 혜리에게 이 낙엽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혜리에게 처음 메일이 온 것은 칠년 전 겨울이었다. 나를 기억할지 모르겠지만,으로 시작된 메일이었다. 나는 혜리가 기억나지 않았다. 메일함에서 혜리의 메일 주소를 검색해보았다. 단 한번 나는 그에게 메일을 보낸 적이 있었다. ‘영화와 미술’이라는 교양수업 기말과제 때문이었다. 그 수업에서 혜리와 나는 함께 조별과제를 수행했다. 조별과제라지만 협업은 없었다. 네명의 조원이 각자의 작업을 이메일로 전송했고, 혜리는 그것을 하나의 파일로 합치는 역할을 맡았다. 그의 전공이 무엇이었는지, 나보다 언니였는지 동생이었는지, 나는 아무것도 아는 바가 없었다. 혜리에 대한 유일한 기억은 그의 노트였다. 강의실에서 대각선 앞자리에 앉아 있던 혜리의 팔꿈치 아래로 노트가 보였다. 같은 단어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내가 읽어낼 수 없는 언어였다. 나는 혜리에게 노트 이야기를 꺼내며, 잘 기억한다는 답장을 보냈다. 그가 나에게 연락을 한 이유를 알고 싶었다. 혜리는 노트 이야기를 반가워했다. 노트에 적은 언어는 스웨덴어였으며, 자신은 지금 스웨덴에서 유학 중이라고 했다. 혜리는 일요일이면 내게 메일을 보냈다. 다섯번째 메일이 도착했을 즈음, 나는 혜리가 아무 이유도 없이 내게 메일을 보낸다는 것을 알아챘다. 안부를 전하는 것. 그것이 유일한 이유라면 이유였다. 나는 답장을 하지 않았다.
여러 사람에게서 비슷한 메일을 받은 적이 있었다. 한학기 정도 친하게 지냈던 중학교 동창과 온라인으로 삼개월 동안 입시과외를 했던 수강생과 오래전에 연락이 끊어진 단짝친구에게서.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한국을 떠났다는 점이었다. 나는 그들의 메일을 입대한 지인에게 오던 편지 정도로 여겼다. 이십대 초반에 입대한 지인들은 친하든 친하지 않든, 기억이 나는 모든 사람에게 편지를 보내곤 했다. 다른 사람들이 그런 것처럼 나도 한때 그런 편지를 받았다. 우정으로 정성스레 답장을 해봤자 제대를 하고 나면 연락이 끊어진다는 것도 자연스레 알게 되었다. 비슷한 메일이 도착할 때마다 나는 적당히 다정한 답장을 보냈다. 수신자가 불쾌하지 않을 만큼, 그러나 메일이 이어지지는 않을 만큼 짧은 안부만 전달했다. 그들은 내가 무엇을 바라는지 빠르게 알아차렸고, 더이상 메일은 오지 않았다. 그리고 이년 전 겨울, 나는 혜리에게 답장이 아닌 메일을 처음으로 보냈다.
오늘은 비가 오다 그쳤고 그래서 오늘도 우산을 잃어버렸어. 시력이 떨어져서 안경알을 바꾸러 안경점에 다녀왔어. 오늘은 스케일링을 하러 치과에 갔는데 사랑니 네개를 모두 뽑자고 해서 그냥 나와버렸어. 집에 돌아오는 길에 영화관에 들러 혼자 영화를 봤어…… 혜리와 나는 서로에게 이런 식의 이야기를 적었다. 서로를 떠올릴 만한 기억도 공감대가 형성될 만한 주제도 없었으므로 각자의 혼잣말을 끝없이 늘어놓았다. 집에 돌아와 노트북으로 예능 프로그램을 틀어놓고 맥주를 마실 때나 혼자 묵은지를 썰어 김치찌개를 끓일 때면 나는 혜리를 떠올리며 다음 메일에는 이 이야기를 적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내 행동 하나하나가 혜리에게 건네는 말처럼 느껴졌다. 혜리와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만 같았다. 혜리와 나는 함께 영화관에 갈 리도, 마주 앉아 맥주를 마실 리도, 같은 날씨에도 같은 시간대에도 머물 리 없지만, 나는 그 점이 오히려 좋았다.
혜리는 스웨덴에서 박사과정을 밟는 중이라고 했다. 스웨덴에 처음 도착했을 때 혜리는 일부러 한국인을 피했다. 한국인과 어울리는 한국인은 영원히 한국인하고만 어울리게 된다는 경험담을 익히 들은 탓이었다. 한국인과 어울리기 위해 유학까지 온 것은 아니라고 혜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다른 국적의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말을 걸었고, 몇번 정도 무시나 거부를 당하기도 했지만, 결국 좋은 친구들을 사귀었다. 문제는 강의시간에 발생했다. 유학생들을 위해 마련된 스웨덴어 시간이었다. 교수는 혜리를 쳐다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한국인들은 그릇에 머리를 박고서 밥을 먹는다고. 개처럼.
너무나 상투적이게도 그런 일을 겪었다고 혜리는 적었다. 더 끔찍하게 상투적인 일은 그 이후에 일어났다고 했다. 혜리는 이 일을 친구들에게 말했다. 친구들이 함께 분노하기를 바랐다. 그의 친구들은 혜리에게 되물었다. 그런데 왜 밥상에 머리를 박고 밥을 먹는 거지? 친구는 정말 궁금하다는 표정이었다. 혜리는 그런 질문에 인종차별이 전제되어 있다고 차근차근 설명했다. 친구들은 그제야 혜리를 이해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혜리를 사무적으로 대했다. 지나치게 예의를 갖췄다. 혜리가 엉뚱한 좌석의 공연 티켓을 끊어왔는데 그 사실을 혜리에게 말해도 될까? 이 까페는 시나몬롤이 유난히 맛이 좋은데 혜리에게 그걸 시키자고 제안해도 될까? 혜리는 후회했다. 그들에게 인종차별을 주제로 한 이야기는 더이상 하지 않기로 했다. 자신이 누구였는지를 친구들이 충분히 잊을 때까지 기다렸다. 친구들은 서서히 되돌아왔으나, 몇달 뒤에 혜리는 수업시간에 비슷한 일을 다시 겪었다.
한인 커뮤니티는 이미 인종차별 사건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었다. 이들은 똘똘 뭉쳐 사건을 가시화했고, 문제 해결 절차를 밟아나갔다. 혜리는 그러나 한인들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 이미 오랜 시간 한국인을 멀리해왔기 때문이었다. 한인 커뮤니티는 혜리가 자신들을 은근히 무시하며 잘난 척을 하고 있다고 여기는 듯했다. 혜리가 도움을 청한다면 도움을 받게 될 테지만, 그것은 그저 도움을 받는 것만 의미하지는 않았다. 이 커뮤니티의 일원이 되는 것을 의미했다. 혜리는 그 사회에 소속되고 싶지 않았다. 혜리는 그 누구에게도 자신이 겪는 인종차별에 대해 말할 수 없게 되었다. 가까운 친구들은 가깝지만 멀었다. 한국인들은 멀었지만 가까웠다. 혜리는 나에게 자신이 겪은 숱한 모욕들을 적어 보냈다. 나처럼 멀리 있는 사람이 혜리에게는 필요했다. 가까워질 수 없고 개입도 불가능하고 그저 듣기만 하는 사람이 필요했다.
호랑가시나무 군락지를 빠져나오면 이 사비나가든에서 가장 높은 언덕이 나타났다. 거기에 사비나의 목공실이 있었다. 그곳은 목공체험 교실이 되었다가, 박물관이 되었다가, 지금은 방치되어 있었다. 벽에는 먼지를 뒤집어쓴 액자들이 걸려 있었다. 톱밥 부스러기와 목재들이 바닥에 굴러다녔다. 안쪽에는 사비나의 책상이 놓여 있었다. 사비나가 오랫동안 사용했던 노트가 펼쳐져 있었다.
1991년 9월 21일.
빳빳한 솔잎은 휘어졌다. 힘없이 시들었다. 보름 동안 솔잎들은 갈색이 되었다. 남쪽에서 발생한 재선충에 감염된 것. 감염된 소나무들을 모두 잘라내야 한다. 재선충은 바람으로 이동, 뿌리까지 태워야 박멸 가능. 잠복기간인 나무를 선별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결국 모두 죽여야 하는가.
그럴 수는 없다.
그가 심어놓은 모든 식물이 자라나고 죽을 때까지의 일들이 노트에 적혀 있다고 했다. 안내문은 이 식물일지를 영어가 아닌 한글로 적었다는 점을 특히 강조했다. 사비나가 한복을 입고 찍은 흑백사진이 한쪽에 프린트되어 있었다.
이 길의 끝에는 해안절벽이 있었다. 소나무들이 빽빽했다. 어떤 나무는 사람 정도로 키가 자그마했고, 어떤 나무는 빌딩처럼 높았다. 잘 살고 있는 나무와 죽어가는 나무가 섞여 있을 터였다. 그루터기만 남은 나무 앞에는 ‘떠나간 친구를 위해’라는 푯말이 꽂혀 있었다. 이곳은 그가 키운 식물들이 살아가는 자리였으며, 동시에 묘지이기도 했다.
하늘의 정수리에 태양이 떠 있었다. 작은 연못에 끼어 있던 물안개는 사라졌다. 햇빛이 연못 가득 떨어지고 있었지만 물은 어두웠다. 나는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콘도에서 몇걸음만 더 걸어가면 은돌항이 나왔다. 배는 없었고 해양 파출소는 문이 닫혀 있었다. 항구의 안쪽에는 컨테이너 박스 몇개를 이어 붙인 상가가 있었는데, 그곳이 은돌수산시장이었다. 시장이라지만 수산물을 팔지는 않았고, 가판대에 주민들이 모여 앉아 노루섬에서 채취한 것들을 다듬고 있었다. 나는 수산시장 가장 깊숙한 매점으로 갔다. 가끔 찾아오는 밤낚시 손님을 위한 물품을 주로 파는 가게였다. 그곳은 언제나 문을 열었다. 동네 사람들이 생필품을 구입할 수 있는 유일한 상점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나는 매일매일 계란이나 봉지쌀, 휴지 같은 것을 샀다. 전기장판에 앉아서 주판을 두드리고 거스름돈을 주는 할머니는 나에게 조금씩 바가지를 씌웠다. 한통에 칠백원이던 생수는 다음 날 팔백원, 그다음 날은 구백원이 되었다.
“뭉치 보고 가도 되죠?”
계산을 하며 나는 할머니에게 물었고 할머니는 그러라고 답했다. 가게 뒤쪽에 뭉치가 웅크려 있었다.
“뭉치야.”
뭉치는 느릿느릿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봤다. 아련하게 눈을 뜨고 코를 킁킁거리며 공기 냄새를 맡았다. 내가 그냥 이름만 부르는 사람인지, 다가와 놀아줄 사람인지를 가늠하고 있는 듯했다. 집 앞까지 가서 쪼그려 앉았을 때에야 뭉치는 바깥으로 나왔다. 뒷다리를 쭉쭉 펴며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같은 자리를 빙글빙글 돌고 두 발로 일어서며 나를 반겼다. 나는 손바닥을 내밀었다. 뭉치는 내 손가락을 핥다가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는 비벼댔다.
뭉치는 빨간 노끈으로 묶인 채 그곳에서 살았다. 할머니의 손주가 맡기고 갔다고 했다. 할머니의 말에 따르면, 뭉치는 이 은돌해변에 있는 모든 개 중에서 가장 호강을 하고 있었다. 사료를 먹는 개는 뭉치밖에 없을 것이라 했다. 개집 안에 방석도 넣어줬잖아. 할머니의 표정에는 뿌듯함이 가득했다. 그러나 길게 자라난 털 안에 있는 뭉치의 몸은 앙상했다. 털이 온통 엉겨 붙어 있었다. 목줄은 짧은데 화장실은 마련되어 있지 않아서, 개집의 외벽에다 다리를 들고 오줌을 누었다. 가끔 목줄이라도 풀어주면 어떻겠느냐고 나는 할머니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할머니는 손사래를 쳤다.
“손주가 방에서만 키우던 개야. 어디 가본 적이 없어서 돌아올 줄도 몰라. 차도 모르고. 못 피해.”
뭉치는 앞발을 모은 채 배를 드러내 보여줬다. 나는 뭉치의 배를 쓰다듬었다. 사람에게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과 마음을 받는 방법을 잘 알고 있는 개였다. 나는 검지와 엄지를 폈다. 총을 쏘는 흉내를 내며 뭉치에게 겨누었다. 뭉치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항복하는 것처럼 두 발을 들었다. 새까만 발바닥이 보였다.
나는 콘도로 돌아왔다. 유리문에 모여 있던 고양이들은 사라져 있었다. 늦은 점심을 차려 먹고 설거지를 했다. 샤워를 하고 방 청소를 마치면 창밖으로 저녁의 기운이 몰려왔다. 이곳에서는 오후 네시부터 해가 지기 시작했다. 주민들은 오후 일곱시만 되어도 잠자리에 드는 듯했다. 여덟시면 모든 불이 꺼지고 사방이 캄캄해졌다.
나는 탁자에서 노트북을 펼쳤다. 메일함에 접속했다. 확인하지 않은 메일들을 확인하지 않았다. 그중에는 재연이 보낸 메일도 있었다.
재연은 넉달 전 내게 메일을 보냈다. 개인전 도록에 같은 주제의 나의 글을 싣고 싶다는 청탁 메일이었다. 나는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꼭 함께 작업을 하고 싶다고 적었다. 며칠 뒤 재연에게서 다시 메일이 왔다. 재연도 나와 꼭 함께 작업을 하고 싶었다고 적었다. 그러나 다음 작업은 존재하지 않을 것 같다고 덧붙였다. 이 작업을 마지막으로 창작은 관두겠다고 했다. 재연은 얼마 전에 동료 작가의 자살 소식을 접했다. 그는 꽤 유명한 작가였고 수년간 이슈마다 한가운데에서 목소리를 내던 사람이었다. 그는 늘 배제되고 있다고 느꼈다. 협조적인 사람을 찾고 있다는 통보와 함께 그는 매번 프로젝트에서 제외됐다. 이제 포기하고 생업을 찾고 싶다는 그에게 재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작업을 그만두고 다른 길을 찾아도 된다고. 그 말을 해주지 못한 것이 재연은 미안했다. 재연은 건강에 대한 안부를 담아 메일을 끝냈다. 나는 바로 답장을 썼다.
예전에 제게 꿈이 뭐냐고 물은 적이 있지요. 을지로에 있는 당신의 작업실에서였어요. 재연씨는 휴학 중이었고, 저는 막 등단을 해서 활동을 시작하고 있었어요. 저는 머뭇거리다가, 꿈이 이루어져버렸다고 답을 했지요.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고 재연씨가 제게 되물었잖아요. 하지만 사실이었어요. 제 꿈은 그저 글을 쓰면서 살아가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미 이루어진 꿈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저는 좋았어요. 꿈속에서 영원히 같은 꿈만 반복하며 살고 싶었습니다. 다른 꿈을 꾸는 일은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어요. 제가 살면서 그 어떤 상처를 받게 되어도 이 꿈에는 영향을 끼치지 못할 거라 여겼습니다. 완전히 안전한 지대라고 믿었던 걸까요? 함께 문학을 하던 동료들이 한명씩 그만둘 때마다, 저는 그들을 완전하게 이해하지는 못했어요. 심지어 재능은 있으나 끈기는 부족한 경우라고 단정 짓기까지 했답니다. 저는 이제야 그들을 다시 생각합니다.
이년 전쯤이었을 겁니다. 제 동료가 문학계 권력 남용 문제를 이슈화하기 위한 포럼에 패널로 초청을 받았습니다. 포럼에서 발표할 자료를 수집하던 중에, 동료는 포럼 기획자에게 연락을 받았어요. 비판을 하되, 언론을 통해 이미 알려진 내용으로만 발표문을 작성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애초에 그럴 생각이었다면 무엇을 위해 이런 포럼을 기획하였는지 동료는 질문을 했어요. 경각심을 통한 변화의 과정이 중요한 것이지, 우리가 내부고발자가 되자는 것은 아니라고, 우리가 그런 위험에 빠질 이유는 없다고 기획자는 동료를 설득했다고 합니다. 동료는 그것이 보여주기식 포럼이라고 느꼈어요. 포럼에 한명의 도구로 사용된다고 느꼈어요. 결국 기획자로부터 받은 부탁의 내용까지를 포함해서 발제문을 작성했습니다. 이후 동료는 해리포터 시리즈에 나오는 볼드모트가 되어버렸습니다. 아무도 동료의 이름을 부르지 않아요. 이런 이야기를 다른 동료 작가들에게는 해본 적이 없어요. 재연씨가 문학을 하는 사람이었다면 재연씨에게도 하지 못할 이야기겠지요.
저는 올해 처음으로 이력서라는 것을 제대로 써봤습니다. 그동안 이력서를 써보지 않은 건 아니지만, 형식상 필요해서 제출하는 정도였거든요. 취업이라는 것을 해보려고 다른 사람들의 이력서를 검색하고, 희망연봉을 적고 자기소개서도 작성했습니다. 결국은 취업에 실패했지만, 그래도 기분이 좋았어요. 내가 다른 길을 가보려고 도전이라는 것을 해봤구나, 나도 달라질 수 있겠구나 싶었습니다.
여기까지 적고 나는 전송 버튼을 눌렀다. 그러나 잠시 뒤에 재연에게 다시 메일을 썼다.
관두자,라는 마음에, 더 해보자,라는 말을 하는 것. 그거 말도 안 되는 말입니다. 그런 말이 사람을 고통으로 몰아간다는 걸 알고 있는데. 미안합니다. 재연씨에게도 제가 잘 모르는 재연씨의 동료분에게도요.
나는 메일을 전송하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내가 모르는 재연의 동료를 상상하는데, 내 친구의 얼굴이 떠올랐다. 활동가로 일했던 그 친구는 일을 그만두고 곧 캐나다로 떠난다며 내게 송별회를 열어달라고 했다. 탈조선을 축하하는 나에게 친구는, 이렇게 또 한명의 활동가가 한국에서 조용히 휘발된다며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나는 핸드폰을 꺼냈다. 그 친구와 그동안 나눈 문자 메시지를 살펴보았다. 몇달에 한번씩, 그 친구는 내게 뜬금없는 문자를 보내곤 했다.
“살아 있어야 돼.”
처음에는 그 문자에 적잖이 당황했다. 내게 하는 말인지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인지도 구분이 되지 않았다. 친구가 술에 취해서 센티해진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일을 그만두고 떠나가는 동료들이 한명씩 늘어나면서 알게 되었다. 그것이 문자 그대로의 진심이라는 것을. 일을 지속하든 떠나가든, 살아 있어야 된다는 그 말이 정말로 그저 살아 있어야 된다라는 뜻임을. 내가 그들과 같은 부류라는 사실을 그들은 나보다 먼저 알고 있었을지 몰랐다.
친구들이 한명씩 유학을 떠나거나 대학원에 입학하거나 취업을 할 때 나는 이 일을 계속하는 것을 선택해왔다. 통장 잔고가 간당간당할 때에도 나는 늘 글을 쓸 시간을 더 많이 확보하는 것을 선택해왔다. 술을 끊었고 취미를 없앴다. 외출을 최소한으로 줄였다. 동네 산책을 할 때에도 까페에 가지 않기 위해서 텀블러에 커피를 담아 들고 나갔다. 친구도 가족도 만나지 않았다. 주말도 명절도 없었다.
등단을 하고 나서부터는 끊임없이 일거리가 들어왔다. 인스턴트 음식을 전자레인지에 데워 먹고 밤을 새우며 글만 썼다. 모든 수입은 원고료였고, 그나마도 허리디스크가 생기면서부터는 병원비로 쓰였다. 일을 해서 병을 얻고 그 일로 병원비를 충당했다.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기쁨이 있었다. 가난을 예술가의 조건쯤으로 여기면서. 그러다가 포럼에 초청을 받았다. 그 사건 이후로 나는 그만두고 싶다는 마음을 억누르기 위해 억지로 글을 쓰는 사람으로 변해갔다. 나는 혜리에게 이 이야기를 털어놓았듯이 재연에게도 이 이야기를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나라는 주어를 동료라는 주어로 야금야금 바꾸었다. 나를 은닉하고 보호하려는 과도한 노력이 몸에 배기 시작했다.
그만두고 싶다는 사람과 함께할 때가 나는 편안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지만 금세 친밀감을 느꼈다. 그 사람을 잘 알고 있는 듯했다. 신입생 때 나처럼 문학에 대한 열정을 온몸으로 뿜어대는 동기들이 가장 좋았듯이.
재연은 그 뒤로도 여러차례 나에게 메일을 보냈다. 나는 그 메일들을 차마 열어볼 수 없었다. 두달 뒤, 재연이 개인전을 열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전시장은 행인이 드문 주택가 골목에 위치했다. 공사를 하다 중단된 것처럼 보이는 콘크리트 건물이었다. 입구에 들어서자 곰팡내가 풍겼다. 내부에는 아무도 없었다. 석유난로만 빨갛게 켜져 있었다. 프로젝터의 불빛이 공간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동그란 렌즈에서 삼각형을 그리며 뿜어져 나온 영상이 벽에 맺혀 있었다. 나는 프로젝터 옆에 쪼그려 앉았다. 허공에서 물이 흘러내렸다. 한 사람이 두 손을 오목하게 모았다. 두 손으로 흘러내리는 물을 받았다. 손안에 투명하게 차오르던 물이 손가락 사이로 이내 흘러내렸다. 다른 사람의 두 손이 그 물을 받아냈다. 또 그 아래에 오목한 두 손과 흘러내리는 물이. 또 그 아래 두 손과 흘러내리는 물이…… 비가 오는 것 같았다. 내 머리 위로 떨어질 비를 저 손들이 다 받아내고 있는 것 같았다.
입간판에 붙은 포스터가 우글우글 젖어 있었다. 정말로 비가 오고 있었다. 처마 바깥으로 손을 내밀어보았다. 내리는 것조차 느끼기 힘들지만 걷다보면 옷이 젖게 되는, 안개비였다.
“얼음의 언저리를 걷는 연습.”1
재연의 전시 제목을 보며, 나는 얼음의 언저리에다 자기 발을 조심스레 내려놓는 재연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나는 우산을 펼쳤다. 입간판 윗면의 경첩 사이 작은 틈에 우산을 꽂았다.
혜리에게 메일을 썼다. 노루섬에 대해. 사비나가든에서 주운 낙엽에 대해. 수산시장 뒤쪽에서 만난 뭉치에 대해 썼다. 혜리의 부탁대로 뭉치에게 총 쏘는 흉내를 내봤더니, 혜리의 말대로 뭉치가 앞발을 번쩍 들어 항복하는 자세를 취했다고 적었다. 나의 눈에는 마치 만세를 부르는 것처럼 보였다고 적었다.
혜리와 내가 서로에게 이런 유의 부탁을 하기 시작한 것은 작년 여름이었다. 스웨덴은 백야가 한창이었고, 한국은 폭염이 시작되었다. 몇달씩 어둠과 장마가 지속되는 극야보다는 백야가 훨씬 좋다고 혜리의 친구들은 입을 모았다. 잔디밭에 앉아 햇볕을 쬐고 밤새워 맥주를 마시며 혜리의 친구들은 백야를 만끽했다. 축제가 시작되었고 백야를 보기 위한 관광객들이 전세계에서 몰려들었다. 혜리는 극야보다 백야가 더 견디기 어려웠다. 끝이 없는 빛보다 끝이 없는 어둠이 차라리 나았다. 낮에도 낮이고 밤에도 낮이었기 때문에, 밤에 잠을 자도 눈을 뜨고 있는 것 같았다. 종일 취한 사람처럼 나른하기만 했다. 혜리는 스톡홀름에 있는 한식당이 여름 시즌 냉면을 개시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매년 여름마다 들려오는 소식이었지만 혜리는 한번도 한식당을 찾아간 적이 없었다. 값이 비싼 이유도 있었지만, 한국음식에 대한 향수를 끊어버리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컸다. 영어만으로도 말이 통하는 스웨덴에서 현지인들만 사용하는 스웨덴어까지 익혀온 것은 자신의 뿌리를 완전히 옮기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십사시간 외국어를 듣고 말해도 머릿속으로는 한국어를 중얼거리는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지나가는 사람의 한국말은 넋을 놓고 있어도 알아들었으나, 외국어는 온 신경을 집중해 머릿속으로 번역을 해야 했다. 가끔은 누군가와 한국말로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한국에도 여기에도 소속되지 못할 것이라는 불안감이 언제나 혜리를 따라다녔다. 긴 유학생활이 끝났을 때, 무엇이 남게 될지를 상상하면 혜리는 늘 아득했다. 한국을 떠날 때 품었던 해방감 대신에 혜리를 찾아온 것은 고립감이었다. 혜리는 진절머리가 쳐지는 소속감보다는 고립감이 낫다고 여겼다. 그랬던 혜리가 처음으로 냉면을 사 먹으러 가는 길이었다. 살얼음이 둥둥 떠 있는 육수를 들이켜고 싶었다. 축축한 미트볼 대신 아삭아삭한 무생채를 씹어 먹고 싶었다. 백야 때문에 찌뿌둥했던 온몸의 세포가 깨어날 것 같았다.
한식당은 한산했다. 짐작했던 것보다 냉면은 더 비쌌다. 짐작했던 것보다 냉면은 더 맛없었다. 육수는 미지근하고 찝찌름했다. 양념장에서는 캡사이신 맛이 났다. 면은 퉁퉁 불어 들러붙어 있었다. 냉면도 아니고 냉면이 아닌 것도 아닌 맛이 꼭 자신의 몰골 같다고 혜리는 생각했다. 만약 냉면을 좋아한다면, 그리고 을밀대 근처를 지나갈 일이 생긴다면, 자기 대신 물냉면 한그릇을 먹어달라는 부탁을 농담처럼 던지며 혜리는 메일을 끝냈다.
나는 을밀대에 갔다. 워낙 유명한 곳이니 한번쯤 먹어보아도 괜찮겠다는 생각으로 줄을 서서 기다렸다. 한시간이나 기다려서 들어갔으나 을밀대의 물냉면은 내 입맛에 맞지 않았다. 육수는 밍밍하기만 했다. 면은 미끄덩거렸고 툭툭 끊어졌다. 허여멀건한 무생채에는 고춧가루 한두개가 붙어 있었다. 이것을 왜 사람들이 맛있어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나는 혜리에게 말했다. 혜리는 내 메일을 재밌어했다. 말투만 읽어도 얼마나 맛이 없었는지 생생하게 전달이 된다고 했다. 냉면 생각이 날 때마다 내 메일을 반복해서 읽겠다고 했다.
혜리와 나는 서로에게 간단한 부탁을 하기 시작했다. 만약 근처에 갈 일이 있다면,으로 시작되는 부탁이었다. 나는 스톡홀름의 노벨박물관에서 파는 노벨 아이스크림을 먹어봐달라고 부탁했다. 아이스크림은 엄청나게 화려했지만 처참하리만큼 맛이 없는 시큼한 딸기가 토핑되어 있었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아이스 홍시를 사 먹어달라는 부탁을 들었고,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샤베트 같은 아이스 홍시를 먹어보게 되었다. 혜리는 린드그렌 작가의 집을 찾아가달라는 나의 부탁을 들어주다가 근처에 있는 시립도서관을 발견했고 처음으로 들어가보게 되었다. 원형의 서가로 둘러싸인 웅장하고 고풍스러운 공간에 매료되었다고 했다.
나는 혜리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이전보다 더 자주 바깥에 나왔다. 더 많이 걸었다. 그리고 혜리에게 부탁할 것들을 궁리했다. 그다지 원한 적 없었던 사소한 것이라도 생각해내려 애썼다. 혜리는 두달 전쯤에는 뭉치를 찾아가줄 수 있겠냐는 부탁을 해왔다. 이번에는 ‘근처에 갈 일은 없을 테지만’으로 시작되는 메일이었다.
나는 혜리에게 메일을 쓰다 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냄비에 불을 올렸다. 계란 네알을 삶고, 차가운 물에 식혀 껍질을 벗겼다. 간장에 양념을 한 다음, 계란과 함께 조렸다. 보글보글 끓는 소리와 함께 방에 간장 냄새가 차올랐다. 밥을 다 먹고 나면 혜리에게 계란장조림 레시피에 대해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간장 정도는 식료품 가게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을 테니까 혜리도 맛있게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환기를 하려고 창문을 열었다. 잠시 창밖을 내다보았다. 달은 아직 내 창문에 담기지 않았다. 밤이 더 깊어지면 달은 이 사각형 안에 머물 것이다. 이 창가에서 맞이하는 두번째 보름이 될 것이다. 나는 퇴실을 미뤘고, 또 퇴실을 미뤘다. 사박 오일로 계획했던 여행 일정이 두달 가까이로 늘어나고 있었다. 이곳에서 영원히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것도 괜찮은 선택 같았다.
창문을 닫고 계란장조림과 함께 밥을 먹기 시작했다. 다 먹으면 메일을 다시 쓸 것이다. 내일도 낙엽 하나를 주우러 사비나가든에 갈 것이다. 그리고 사비나의 노트의 다음 장을 읽을 것이다. 사비나는 어떻게 소나무숲을 지켜냈던 것일까. 어디부터 어디까지를 잘라내고 태웠던 것일까. 죽일 나무와 살릴 나무를 어떻게 선별했을까. 사비나는 스스로를 떠난 자라고 여겼을까, 아니면 남은 자라고 여겼을까. 미국에서 사비나는 사라진 사람일 것이다. 내일이면 혜리에게서 새로운 답장이 도착할 것이다. 나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혜리는 뭉치의 다른 특징 한가지를 내게 더 알려줄 것이다. 겨드랑이에 가마가 있다거나, 노래를 따라 부를 줄 안다거나. 나는 바다를 건너가는 노루를 한번 더 보기 위해 매일매일 창가에 서 있을 것이다. 보이지 않기를 바라면서 기다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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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술작가 강지윤의 개인전 「얼음의 언저리를 걷는 연습」(탈영역우정국 2019.11.22~12.3)에서 이미지를 빌려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