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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백영서 엮음 『백년의 변혁』, 창비 2019
다시 여는 100년에 물음을 던지다
김정인 金正仁
춘천교대 사회과교육과 교수 redpeng66@hanmail.net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새해부터 이를 기념한 여러 색채의 책들이 출판되었다. 너무 유명한 사건이지만 실증 연구가 턱없이 부족했던 3·1운동을 섬세하고 다채롭게 재구성한 책들(조한성 『만세열전』, 권보드래 『3월 1일의 밤』, 박찬승 『1919』)이 무엇보다 호평을 받았다. 한국역사연구회는 5권으로 구성된 총서 ‘3·1운동 100년’을 내놓고 100주년을 새로운 역사학의 모색기로 삼고자 했다. 더불어 ‘지금 여기’, 2019년의 시각으로 3·1운동의 현재적 의의를 재조명한 책들(김정인 『오늘과 마주한 3·1운동』, 강경석 외 『촛불의 눈으로 3·1운동을 보다』)도 출간되었다. 그리고 연초부터 시끌벅적했던 100주년 축제를 갈무리하듯 2019년 연말에 ‘3·1에서 촛불까지’라는 부제를 단 『백년의 변혁』이 세상에 나왔다.
이 책은 부제부터 범상치 않다. 2018년 겨울부터 정치권을 중심으로 3·1혁명론이 제기되었다. 국무총리와 여당 대표가 불을 지폈으나, 학계에서는 운동이든 혁명이든 자신의 견해에 따라 호명하면 된다는 분위기가 강했다. 한편 2016년 가을부터 2017년 봄까지 타올랐던 촛불은 촛불정부를 자임하는 문재인정부에 대한 평가와 연동되면서 지금은 촛불시위, 촛불항쟁, 촛불시민혁명 등 다양한 호칭으로 불리고 있다. 이 책의 편집진은 3·1에 혁명적 성격을 부여하는 데 적극적이고, 촛불이 한반도 차원의 변혁으로 승화하면서 혁명‘화’하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혁명의 일회성을 강조하기보다는 계속성을 드러내되, 그 성격에 대한 다양한 변주를 고려해 섬세하게 ‘3·1에서 촛불까지’라는 부제를 붙인 듯 보인다.
‘3·1에서 촛불까지’ 100년의 “‘점진적이고 누적적인 성취’의 변혁 과정”(6면)을 추적하는 이 책의 키워드는 독립, 민주, 분단체제 극복, 평화, 동아시아 그리고 공동체이다. 열세명의 필자가 참여해 글의 색채는 조금씩 다르지만, 이 책이 그려낸 100년의 상을 조심스럽게 정리해보자면, 우선 3·1의 뿌리는 동학농민전쟁과 민중종교에 있다. 또한 3·1은 한국 근대의 본격적인 출발점으로 이후 변혁적 중도의 길이 실패하면서 분단이 되어 지금도 한반도에서는 근대 나라 만들기가 단계적으로 진행 중이다. 3·1운동을 비롯한 독립운동, 그리고 해방 이후 4월혁명, 5·18, 6월 민주항쟁으로 이어진 민주화운동에 기반해 87년체제가 만들어졌다. 87년체제하에서 발발한 ‘촛불혁명’은 민주주의와 국민주권을 소환하는 시민항쟁이었으며 그 결과로 80년대 민주화운동의 기수들이 집권세력으로 들어섰다. 촛불항쟁에 대한 기대는 분단체제의 극복에 대한 희망으로 모아진다. “촛불항쟁으로 실현된 남한의 정권교체가 남북관계의 획기적 개선으로 이어지고 한반도 전역에 걸친 민중역량의 비약적 증대를 이룬다면 이는 ‘혁명’의 이름에 전혀 손색이 없을 것이”(백영서 ‘책을 펴내며’, 10면)다. “촛불혁명이 남북관계의 전환을 이끌어내고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를 진전시킴으로써 한국사회, 나아가 한반도의 결정적인 전환을 촉진하고 있”(이남주 「3·1운동, 촛불혁명 그리고 ‘진리사건’」 190면)으며, 촛불 이후 “젠더에 따른 차별이나 배타적 민족주의를 넘어, 기존의 협소한 공동체 개념을 해체하고 새로운 공동성”(정헌목 「미완의, 혹은 진행 중인 혁명」 374면)이 도래하기를 기대한다.
이처럼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계보 끝에 선 ‘촛불항쟁’을 다시 미래지향으로써 분단체제 극복의 출발점으로 바라보는 이 책을 덮으며, 우선 문재인정부의 ‘정치 주류세력 교체’라는 언명을 떠올리게 된다. 해방 이후 줄곧 보수/우파 쪽으로 기울어 있던 ‘운동장’은 촛불시민의 힘으로 마침내 진보/좌파 쪽으로 기울었다. 촛불정부를 자임하는 문재인정부는 출발부터 적폐청산과 보훈선양을 내세우며 정치 주류세력의 교체를 공공연히 천명했다. 2018년 3월 1일 내놓은 삼일절 기념사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3·1운동의 정신과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대한민국 역사의 주류로 세울 것”임을 선언했다. 2019년에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문재인정부가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을 계승한 ‘촛불시민혁명’이 만든 정부, 즉 정치 주류세력의 교체를 상징하는 정부임을 대대적으로 알리는 기념사업을 펼쳤다. 이 책이 그리는 100년의 과거·현재·미래는 큰 틀에서 보면 독립과 민주화에 기반한 평화 정착을 추구하는 문재인정부의 시대 인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런 점에서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3·1과 촛불’의 대화를 시도하며 지난 100년의 역사상을 재구성한 이 책은 해방 이후 부조리한 현실을 비판하며 저항해온 진보 지식인의 역사와 현실 인식이 이제는 주류화되고 정설화되어가고 있음을 새삼 깨닫게 한다. 분명한 것은 이러한 변화가 공짜로 얻어진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해방 이후 오랜 세월 반공주의와 독재에 맞서 싸운 지식투쟁과 정치투쟁의 산물이다.
100년의 축제로 시작해 진흙탕으로 마감된 2019년을 보내고 2020년 벽두에 이 책을 읽으며 무엇보다 낯선 것은 곳곳에서 드러나는, 100년의 끝이자 시작인 촛불에 대한 여전한 기대이다. 더욱이 지난 가을과 겨울에 ‘조국사태’를 겪으며 촛불시민세력이 갈등하는 상황을 겪었음에도 검찰청 앞에 모인 시민을 “더이상 민주주의의 퇴행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시민”(유재건 「한반도 분단체제의 독특성과 6·15시대」 352면)으로 평가하는 대목은 당혹스럽기까지 하다. 물론 이와는 다른 결로 “촛불항쟁이 실제 혁명적인 변화로 이어지려면 (…) 다양한 주체들이 (…) 각자의 문제의식을 더욱 발전시키고, 계속해서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하”(홍석률 「4월혁명, 민주항쟁의 가능성과 현실성」 251면)려 할 때 가능하다는 현실 인식도 담겨 있다.
오늘의 현란한 현실에 휩쓸리는 한 사람으로서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한다는 자괴감을 품고 사나, 이 책을 덮으면서는 ‘백년의 변혁’을 기반으로 다시 열리는 100년을 생각해보게 된다. 이 책이 말하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로서의 분단체제의 해체가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아노미 상태의 정치, 국경을 무색하게 만드는 신종코로나바이러스의 기습, 그리고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기후 재앙에 대한 불안감 등이 혼재된 오늘을 넘어 미래로 가는 혁명적이고 변혁적인 길을 열 수 있을까? 분명한 것은 일국적 시야로 미래를 내다보는 때는 지났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도 분단체제의 해체가 동아시아는 물론 세계체제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체제라는 거시적 시각으로만 미래를 내다볼 수 없는 시대인 것도 분명하다. 변혁과 혁명이라는 거대서사에 가려진 개별적이고 다양한 ‘삶’의 시야에서 전망할 수 있는 미래란 어떤 세상일까? 이 책에는 없지만 우리 모두가 스스로에게 던지고 풀어야 할 물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