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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다시 5·18을 묻는다

 

 

노영기 魯永基

조선대 기초교육대학 자유전공학부 교수. 공저 『1960년대 한국의 근대화와 지식인』 『전쟁과 재현』 『한국현대사 1』 등이 있음.

noeyoungi@gmail.com

 

 

1. 왜, 다시, 5·18인가?

 

올해는 5·18항쟁1이 일어난 지 40년이 되는 해이다. 강산이 네번이나 바뀔 정도로 많은 시간이 흘렀건만 5·18항쟁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2018년 국회에서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을 통과시켰고, 2019년 12월에서야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가 첫발을 내디뎠다. 그동안 5·18이 여러차례 조사됐으나 제대로 청산되지 못한 까닭에 나라가 팔을 걷어붙였다. 과거에 폭력을 자행하던 국가가 이제는 진상규명 활동의 주역이 됐다. 이러한 모순된 현상이 5·18과 한국 민주주의의 어제와 오늘을 반영한다. 40년 동안 풀리지 않은 과제들이 켜켜이 쌓여 있기 때문이며 그 과제들은 과거만이 아닌 현재도 옥죄고 있다.

어쩌면 이미 ‘역사화’됐어야 할 사건이지만, 제때 청산되지 못한 과거는 과거뿐 아니라 현재와 미래도 왜곡한다. 5·18에 대한 가당찮은 폄훼와 왜곡이 ‘진실’처럼 둔갑해 인터넷을 떠돌며, 사실을 부정하는 책들이 버젓이 도서관과 서점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 의도와 정치적 목적은 뚜렷하다. 5·18뿐 아니라 한국의 민주주의를,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가로막으려는 것이다. 민주주의와 평화, 통일을 위협하는 세력들은 5·18을 폄하, 왜곡하는 세력들과 맞닿아 있다.

5·18항쟁을 겪은 뒤 이 땅의 사람들은 다시 민주주의와 인권을 입에 올리는 게 쉬운 일이 아님을 깨달았다. “뭐든지/진짜가 되려거든/목숨을 걸”(이광웅 시 「목숨을 걸고」)어야 한다는 점을 각인했다. 그러나 끌려간 사람들, 숨죽인 사람들, 부끄러웠던 사람들은 오월의 영령과 그 참혹했던 열흘의 기억을 지우지 않았다. 이내 항쟁의 조각을 이어 맞추며 저항의 불씨를 되살려냈다. 그리고 1980년 오월 영령들이 그랬던 것처럼 불법과 폭력으로 국민들의 핏방울을 딛고 권력을 움켜쥔 전두환정권에 맞서 나갔다. 공권력에 가로막힌 망월동을 찾아 산을 넘고 물을 건넜다. 총 대신 돌과 화염병을 들고 학살정권에 저항했다. 그 저항의 불씨들이 모여 1987년 6월항쟁으로 폭발했다. 더이상 빛고을은 ‘육지 속의 섬’처럼 외롭지 않았다. 비록 군부정권을 끝내지 못했으나 5·18항쟁 때 못다 이룬 외침을 전국 각지에서 되살려낸 것이다.

40년이 지나는 동안 5·18도 많은 변화를 겪어왔다. 아직 제 이름을 가졌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정부가 5월 18일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하고 ‘국립묘지’로 승격시킨 망월동에서 해마다 기념식을 열고 있다. 2011년 유네스코(UNESCO)는 민주주의와 인권 발전에 기여한 5·18의 세계사적 가치를 인정하여 관련 기록물을 인류가 보존·전승해야 할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했다.2 5·18이 그 역사적 의미와 가치를 인정받기까지는 오월 영령들을 비롯해 그들의 못다 이룬 뜻을 잇고자 했던 사람들의 노력이 있었다. 한국의 민주주의가 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투쟁의 결과물이듯이, 5·18이 오늘에 이른 것도 국민들의 관심과 투쟁, 그리고 희생 덕분이다.

그동안 5·18의 진상을 규명하려는 몇차례의 시도가 있었다. 제13대 국회는 ‘5·18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별위원회’(1988~89)를 구성하고 청문회를 열었는데, 여기에서 이전까지 ‘폭동’ ‘내란’으로 지칭됐던 5·18의 진상이 일부 드러났다. 뒤이어 1997년 국민들의 관심과 투쟁 속에서 문민정부는 특별법을 제정해 전두환·노태우 등 신군부의 인사들을 처벌했다.3 비록 얼마 지나지 않아 정치적 타협의 산물로 신군부 세력이 석방됐으나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나름의 역사적 의미를 남겼다. ‘성공한 쿠데타’일지라도 처벌할 수 있으며, 전직 대통령도 잘못이 있으면 역사적 평가와 함께 사법적 심판도 받아야 한다는 ‘과거사 청산’의 선례를 남긴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반성 없는 섣부른 ‘용서와 화해’가 ‘역사 왜곡’으로 악용될 수 있다는 점도 일깨워줬다.4

과연 1980년 5월 18일 이후 광주에서는 어떤 사건이 일어났으며, 오늘과 어떻게 연관될까? 왜 다시 5·18이며, 40년이 흐른 2020년에 5·18은 어떻게 이해될까?

 

 

2. 5·18항쟁의 재구성

 

1979년 10월 26일 ‘그때 그 사람’이 부하의 총격에 사망했다. 철옹성 같던 유신독재가 절대자의 죽음으로 무너지려 하고 있었다. 국민들은 독재자가 사라졌으니 곧 민주주의가 실현될 것으로 기대했지만 유신독재가 남긴 유산은 의외로 견고했다. 정치군인들이 호시탐탐 권력을 엿보았으며, 그들의 손에는 각종 정보와 물리력이 있었다. 그해 12월 12일 신군부는 군사반란을 일으켰다. 12·12군사반란을 성공하여 군 지휘권을 장악한 그들은 정권 탈취에 박차를 가했다. 1980년 2월 중순경부터 후방의 충정부대는 신학기의 학생시위에 대비한다며 ‘충정훈련’(폭동진압훈련)을 실시했다. 5월 초순 신군부는 난데없이 ‘북괴남침설’을 유포시켰다. 5월 17일 전군 주요지휘관 회의와 단 8분간의 국무회의를 거쳐 정부와 군은 “5월 17일 24시를 기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한다”라고 공포했다. 정치적 목적으로 군을 동원하는 동시에 군이 민간을 전면통제하는 조치였다. 그보다 앞서 김대중을 비롯한 야권 인사와 학생운동권 지휘부 등에 대한 예비검속이 실시됐다. 5월 20일 개원 예정이던 국회는 탱크와 무장한 계엄군에 가로막혀 문을 열 수 없었다. 계엄 포고에 따라 언론은 군에 의해 검열·통제되고, 옥내외 집회와 정치활동이 전면 금지됐다. 민주주의와 인권은 애초부터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오직 ‘국가안보’만을 앞세운 군이 국민들의 일상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의 모든 걸 장악했다.

5월 18일 새벽, 7공수여단이 점거하던 전북대에서는 학생 이세종이 사망했다. 이 사건은 계엄령 아래에서 민군관계가 어떻게 정립되는지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7공수여단은 그 사인을 ‘좌상박부 골절 및 우측 두개골 함몰 골절’로 인한 즉사이며, “변사자는 이 포위망을 탈출할 목적으로 지상 13m 동 회관(학생회관—인용자) 옥상 북편 전등주에 매달려 은신하려다 힘이 빠져 변사한 것”이며, “첩보 즉시 전주지검 안상수 검사가 현장에 입장, 지휘하여 진상규명 후 사체를 전북의대 부속병원 시체실에 안치 중”인 것으로 보고했다.5 그러나 이 보고는 사실이 아니었다. 당시 전주지검 검사 안상수는 현장에 접근하지 못했고, 이 사건은 서둘러 ‘추락에 의한 사망사고’로 덮어졌다. 그는 2004년 10월 11일 열린 제17대 국회의 전북도교육청 국정감사 자리에서, 자신이 보기에는 “총개머리판에 맞아서 사망”했으나 “수사권이 비상계엄하라서 군부에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끝까지” 밝히지 못해 “분통을 터뜨린 일이” 있었다고 했다.6

계엄령 아래에서는 군이 민간의 모든 것을 장악하고 통제한다. 심지어 국민의 ‘생사여탈권’도 군대의 손에 있다. 제주 4·3사건, 여순사건, 한국전쟁기 당시 민간인 학살의 상당 부분이 군에 의해 자행됐다. 군법회의로 진행된 재판이 요식행위나 다름없이 열렸고, 대부분은 현장 지휘관의 자의적 판단에 따라 결정됐다. 한국현대사에서 계엄령이 선포되고서 국회가 열린 경우는 거의 없었으며, 그나마 열린 부산정치파동(1952.5.25~7.7) 때도 ‘발췌개헌’을 통과시키려는 목적에서였다. 5·18 때도 그러했다. 현직 검사조차 자신의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을 정도였으니 평범한 국민들의 처지는 말할 필요가 없었다. 계엄령 아래에서는 국민의 인권은커녕 최소한의 법적 절차도 보장되지 않았다. 한국사회의 민주주의와 국민의 생존 및 일상이 공권력, 정확히는 군에 의해 파괴됐다. 5·18 직전 이른바 ‘서울의 봄’ 시기에 국민들은 ‘유신독재 청산’을 요구했다. 이러한 분위기를 송두리째 무너뜨리는 게 ‘비상계엄 전국확대’의 목표였다. 그리하여 ‘서울의 봄’은 4·19혁명 이후와 같은 운명에 처했다. 계엄군이 전국 92개 대학을 점거하고,7 ‘민주’를 입에 올리는 것에 목숨을 걸어야 할 때가 닥쳐왔다. 실현되지 않았지만 박근혜정부 시절 계엄령이 실시됐다면 어떤 일이 발생했을지는 역사에 그 답이 있다.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다.

광주에 투입된 7공수여단은 학생들을 난폭하게 구타하며 전남대와 조선대를 점거했다. 이날 아침 전남대 정문에는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정문 앞에 모여 휴교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고, 공수부대원들이 이 학생들을 해산시키는 것으로부터 5·18항쟁이 시작됐다. 해산된 학생들이 금남로로 나가 ‘비상계엄 전국 확대’와 ‘김대중 체포’ 등에 항의하며 시위를 계속했다. 이날 오후 4시경부터 공수부대원들이 광주 시내의 시위 진압에 투입됐다. 오전에 투입된 경찰이 시위 대열을 해산시킨 반면8 공수부대원들은 시위 참가자들을 끝까지 추적, 체포했다. 이들은 진압봉과 개머리판으로 구타하는 것만이 아니라 때로는 총에 대검을 꽂고 휘둘렀다. 관공서, 병원, 학원, 체육관, 숙박업소, 상가, 민가 등 장소를 가리지 않고 쫓아다니며 젊은이들을 연행해 갔다. 다음 날 상황은 더욱 악화됐다. 금남로에서 공수부대원들은 붙잡은 시민들의 겉옷을 벗기고 기합을 주거나 구타하며 연행해 갔다. 시민들의 생존과 일상이 파괴되고 있었다.

이같은 폭행뿐 아니라 고등학생, 주부, 직장인, 임산부 등 여성들에게 군인들의 성폭력이 자행됐다. 최근 ‘5·18 계엄군 등 성폭력 공동조사단’의 발표에 따르면, 5·18 기간에 여성에 대한 성폭행 사건이 총 17건 발생했다. 이 사건들은 5월 19일부터 21일 사이에 광주 시내에서, 그리고 이후 외곽봉쇄 기간에는 광주 외곽에서 저질러졌다. 피해자들의 연령은 10~30대였으며, 이들은 “지금도 얼룩무늬 군복만 보면 속이 울렁거리고 힘들다” “정신과 치료도 받아봤지만 고통이 잊히지 않는다” “가족에게도, 그 누구한테도 말할 수 없었다” “스무살 나이에 인생이 멈춰버렸다” “육체적 고통보다 정신적인 상처가 더 크다”라며 계속되는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9 국가폭력의 악영향이 과거에 머물지 않고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들뿐 아니라 군경에 의해 연행·구금된 여성들도 수사과정에서 성고문을 비롯한 각종 폭력에 노출됐고, 시위에 가담하지 않은 여학생, 임산부 등을 대상으로 한 성추행도 벌어지는 등 여성인권 침해행위가 다수 있었다.

시민들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폭력과 야만에 분노하며 공권력에 적극 대항했다. 학생시위가 시민항쟁으로 전환됐다. 이 와중에 많은 희생자들이 생겨났다. 5·18의 최초 희생자는 청각장애인 김경철이었다. 거리에서 그는 군홧발 소리를 듣지 못한 채 공수부대원들에게 붙들려 온몸을 짓밟혔다.10

이것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공수부대원들은 지나가는 버스와 택시를 멈춰 세운 뒤 시민들을 구타, 연행해 갔다. 피 흘리는 시민을 후송하던 택시를 세워 기사까지 폭행했다. 이 때문에 5월 20일 택시와 버스, 트럭 운전기사들이 공수부대를 몰아내겠다며 차를 몰아 전남도청 앞으로 향했다. 차량 대열은 공수부대원들의 저지로 금남로 3가에서 막혔으나 시민들의 저항은 멈추지 않았다. 이날 밤 9시경 시민들에 의해 병력이 고립된 광주시청으로 지원을 나가던 3공수여단 본부중대원들이 시민들에게 발포했다.11 뒤이어 시민들의 트럭이 광주역 앞의 병력을 향해 돌진해 병사 한명(정관철)이 희생됐다. 3공수여단은 시민들을 향해 집단 발포를 자행했고 다음 날 새벽 3공수여단이 떠난 자리에 2구의 시신이 남겨졌다. 시민들은 이 시신들을 1960년 4·19혁명 직전 마산 앞바다에 떠오른 김주열의 시신과 같이 받아들였다. 손수레에 시신을 싣고 태극기를 덮은 뒤 시민들은 금남로로 향했다. 이들은 대표단을 뽑아 ‘전교사 사령관과 도지사의 공개 사과, 정오까지 공수부대 철수, 연행자 석방’ 등을 요구하며 전남도지사와 협상을 벌였고 평화로운 해결을 모색했다. 비록 격렬하게 대치하던 중이었으나 이날 오전 시민들은 굶고 있던 공수부대원들에게 빵과 김밥을 건네줬다.

공수부대가 철수하지 않자 오후 1시경 이날 아침 아세아자동차(현 기아자동차 광주공장)에서 시민들이 꺼내온 장갑차가 전남도청 앞 광장의 계엄군 앞으로 돌진했다. 그 와중에 11공수여단 병사(권용운)가 희생됐다.12 이에 공수부대원들이 집단 발포를 시작하고 급기야 대열을 정비해 금남로의 건물 옥상에 병력을 배치한 뒤 시민들을 저격했다. 이 무렵 전남대 부근의 공수부대들도 발포했다. 이날 오후 전남대 부근의 집 앞에서 남편이 귀가하기를 기다리던 임산부가 군의 저격으로 희생되는 등 많은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광주 시내 병원에는 환자들이 넘쳐나고 의약품과 피는 부족했다. 영화 「택시운전사」(장훈 연출, 2017)의 주인공 위르겐 힌츠페터(Jürgen Hinzpeter)는 한 종합병원 뒷마당에서 수많은 희생자들의 시신을 필름에 담으면서 분노를 느꼈다고 한다. 베트남 종군기자 출신인 그도 이렇게 비참한 광경은 목격한 적이 없다며 카메라를 끌 정도였다.13 이때부터 시민들은 광주와 인근 지역에서 총과 무기를 구해 와 계엄군에 무력으로 대항했다. 시민들이 무장하자 계엄사령부는 계엄군을 광주 시내에서 철수시켜 외곽 봉쇄를 명령했다. 군에 의해 봉쇄된 광주는 ‘육지 속의 섬’처럼 고립됐다.

5·18을 왜곡하는 세력들은 당시 광주에 침투한 ‘북한군 특수부대’ 또는 ‘광수 몇호’가 시민들을 선동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사실에 맞지 않는다. 5월 21일 오후 광주 시내에서 물러난 계엄군은 광주 외곽의 주요 교통로 6곳을 봉쇄했는데, 이외에도 향토부대인 전교사와 31사단 병력이 배치된 지역까지 있었음을 감안하면 군의 봉쇄지역은 더욱 확대된다. 5월 22일 오전 11시 2군사령부는 각 부대에 ‘도로봉쇄 지점 간 간격 차단지시’(작상전 469호)를 내려 “부대별 책임 지역 할당, 협조점 부여 완전 차단, 광주시 외부로 탈출 방지” 등을 명령했으며, 이와 동시에 ‘해안 경계태세 강화’(작상전 470호)에서 “해안 경계 지도 및 감독체제 강화, 해안 경계 지휘체제 구성” 등을 지시했다.14 군이 광주 외곽만이 아닌 전남의 해안선을 봉쇄했기에 북한군의 침투란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또 군은 비상경계령인 ‘진돗개 둘’을 발령했다. 특히 광주와 전남은 완전무장한 계엄군과 경찰이 철통같은 경계망을 펼치고 있었으므로, 외부에서 600명이 광주에 침투하거나 다시 광주를 빠져나가기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북한군 침투설’은 역설적으로 군 스스로 국토방위에 무능했음을 자인하는 격이다. 공수부대의 임무 중 하나가 바로 대간첩작전이다. 5월 21일 오후부터 5월 24일 오전까지 공수부대는 광주 외곽을 봉쇄하고 있었다. ‘북한군 침투설’을 인정하게 되면, 시민들의 저항에 밀려 외곽으로 철수한 공수부대가 본래의 임무도 제대로 하지 못한 꼴이 된다. 이와 관련해 당시 육군본부 인사참모부 차장이던 박경석의 발언이 주목된다. 그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광주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니까 군에선 이북에 대한 경계에 초점을 두고 있었어요. 미군 7함대가 바다를, 미공군이 하늘을 지키고 있었죠. 우리도 비상경계하에 최고도로 철책선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국방부, 합동참모본부, 육군본부 모두 긴장하고 경계에 초점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600명은커녕 개미새끼 한마리 못 들어오는 경비태세였던 거죠. 그런데도 그런 주장을 하는 건 정말 미친 짓입니다. 국제적, 군사적으로도 난센스예요”15라며 ‘북한군 침투설’을 전면 부인했다.

5월 26일 계엄사령관은 ‘육군본부 작전지침’(상무충정작전)을 내려 상무충정작전의 실시를 명령하며 “항쟁이 장기화되면 이를 이용하여 불순분자나 북한의 무장 공비의 침투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했다.16 즉 1980년 5월 군조차 ‘북한군 침투설’을 인정하지 않고 북한의 ‘침투 가능성’이라고 했다. 하지만 군은 ‘북한의 사주 또는 침투’라는 인식을 기저에 깔고 있었으며, 오늘날 5·18을 왜곡하는 세력들의 ‘북한 특수부대 침투설’은 이미 1980년 5월부터 군의 논법에 배태되고 있었다. 역사가 이전과 똑같이 반복되는 것은 아니지만, 잘못된 과거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채 남겨둔 역사의 빚은 이처럼 훗날 되살아나 사실과 현재, 그리고 미래를 왜곡한다.

군이 물러가자 광주 시민들은 상처받은 공동체를 회복해갔다. 피 흘린 사람들을 후송하고 시신을 수습했으며, 기꺼이 차량과 기름을 내놓고 쌀과 돈을 모아 주먹밥을 만들었다. 매일 오후 전남도청 앞 광장에 모여 전두환과 정부를 규탄했다. 그렇게 시민들은 공동체를 다시 일으켜 세우면서 군과의 협상을 통해 평화로운 해결을 도모했다. 하지만 군은 시민들에게 ‘무장 해제’만을 요구하고 겁박하며 동시에 무력 진압작전을 계획했다.

광주를 벗어나는 곳에는 경계선이 그어졌다. 완전무장한 계엄군이 지키고 있던 외곽 봉쇄선은 ‘삶과 죽음의 경계’였다. 군은 사람들이 왜 광주를 드나드는지 묻지 않고 사격했다. ‘외곽을 봉쇄하라’는 명령이 국민들에 대한 ‘사살 명령’으로 적용된 결과였다. 말하자면 군은 국민들을 상대로 전투를 치른 것이었다. 희생자들 중에는 채소를 싣고 광주로 들어오던 이들, 광주를 빠져나가던 직장인들, 놀라 숨었던 초등학생들, 아들을 찾아 나선 어머니도 있었다. 5월 24일 오후 2시경 ‘오인 사격’마저 발생했다. 전교사 병력들이 송정리비행장으로 철수하던 11공수여단을 향해 사격하여 장갑차와 트럭이 부서지고 공수부대원들이 죽거나 다친 사건이다.17 사건 현장을 수습하는 것과 동시에 인근 마을을 수색한 공수부대원들은 마을 청년들을 연행해 즉결처분하며 ‘보복학살’을 저질렀다. 이외에도 주남마을사건, 광주교도소사건 등 광주 외곽의 봉쇄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됐다. 신군부는 이같은 학살을 ‘폭도들의 소행’으로 왜곡했다.

최근 조사에 따르면, 군은 광주를 진압한다며 전투기 출격을 대기시키고 광주 시내에 헬기를 출격시켰다. 광주 하늘을 떠다니던 헬기는 계엄사령부의 ‘경고문’ 등을 뿌리는 것을 넘어 발포까지 했다. 5월 27일 상무충정작전이 전개됐다. 작전에 앞서 도상훈련을 실시한 뒤 광주 시내로 ‘침투’하면서 공수부대 특공조 대원들은 손톱과 머리카락을 잘라 제출해야 했다. 당시 군의 광주진입작전이 어떤 성격이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는 ‘전투’에 나서는 군인들의 의식이며, 공수부대원들에게 광주 시민들은 보호해야 할 ‘국민’이 아닌 물리쳐야 할 ‘적’이었음을 의미했다. 군의 진입작전은 동틀 무렵에 끝났다. 전남도청, 전일빌딩, YWCA 등 광주 시내 주요 건물에는 광주 시민들의 상흔과 총탄 자국이 새겨졌다. 오월 영령들은 전남도청과 상무관 등지에서 검시된 뒤 청소차에 실려 망월(망월동 구묘역)의 품에 안겼다.

 

 

3. 5·18항쟁, 무엇을 남겼나

 

1980년 5월은 분노, 애통함, 부끄러움, 트라우마를 남겼다. 그해 오월을 겪은 뒤 사람들은 각성했다. 인권과 민주주의란 거저 주어지는 게 아니며, ‘나서면 죽는다’가 아니라 ‘나서서 바꿔야 한다’는 것을 깨쳤다. 사람들은 다시 돌과 화염병을 들었고, 그 거대한 물결이 6월항쟁에서 폭발했다. 그리고 또 한번 무도한 정권에 맞서 2016~17년에 ‘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을 되새기며 광장으로 나갔다. 그 촛불들의 외침이 촛불혁명으로 타올랐다. 촛불혁명은 한국사회의 권력이 누구에게 있는가를 확인하는 ‘역사’였으며, 5·18의 못다 이룬 민주주의의 외침을 잇는 항쟁이었다. ‘주권자’인 국민들이 생존과 일상을 파괴한 국가에 대항했다. 눈앞에서 저질러지는 공권력의 폭력과 야만에 맞서 ‘주권자’들이 일어섰다. 5·18항쟁 때는 촛불 대신 총을 든 시민들이 있었다. 5·18을 왜곡하는 세력들이 북한의 특수부대원으로 매도하거나 ‘광수 몇호’로 폄훼하는 이들이지만, 그들은 금남로나 충장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웃이었다. 길 가다 만나고, 가끔 사소한 이유로 다투며, 같이 웃고 울고, 국가폭력에 상처받고 분개하며 함께 총을 들 수밖에 없었던 지극히 평범한 이웃. 그들은 피가 부족하면 기꺼이 팔을 걷어 피를 뽑았는데, 광주지검에서 “각 병원의 실정은 의약품이 떨어져가고 있고(전남대병원), 혈액은 시민들의 자발적인 헌혈량이 많아져서 헌혈을 중지할 정도(적십자병원)”18로 보고할 만큼 따뜻한 사람들이기도 했다. 그들은 공권력에 파괴된 일상을 되살리고, 피 흘리며 쓰러진 이웃들을 일으키고, 총을 들어 국가폭력에 맞섰다.

비록 열흘의 짧은 기간이었으나 5·18항쟁은 한국사회에 많은 질문을 던져주었다. 5·18항쟁을 경험한 뒤 국민들은 무엇보다도 ‘국가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을 품었다. 국가가 폭력과 학살의 주체일 수 있고, 국민들이 국가에 맡긴 총구가 역으로 국민들을 겨눌 수 있음을 인식했다. 군인들이 군복을 입은 채로 권력을 탐내 정치에 나설 때 국민들의 생존과 민주주의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국민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워지는지 확인했다. 세월호참사와 농민 백남기의 죽음과 직면하면서 다시 같은 질문이 제기됐다. 국민들은 믿을 수 없는 현실을 보며 촛불을 들고 ‘국가란 무엇인가?’를 물었다.

5·18항쟁의 가장 큰 특징은 ‘피해자는 많지만 가해자는 없다’는 것이다. 누가 1980년 5월, 군인들에게 총과 칼, 곤봉 등을 쥐여주고 폭행과 발포를 사주했는지 불분명하다. 진상규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탓이다. 5·18 진실규명의 과제 중 하나는 ‘발포 명령’을 규명하는 것이다. 심지어 헬기 사격을 목격한 증인들도 있고 헬기 사격의 흔적이 지금도 전일빌딩 10층에 남겨져 있다. 헬기가 ‘경고문’을 뿌리고 선무방송만 하며 날아다녔다고 믿기 어렵다.19 여성들에 대한 인권침해가 저질러져 피해자들은 여전히 고통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건만 가해자들이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은 채 40년이 흘러왔다. 그렇다고 자료가 부족했던 것은 아니다. 방증 자료들은 넘치도록 많지만 ‘결정적인 증거’를 찾지 못했다. 의아한 현상이다. 당연히 있어야 할 자료들이 사라지거나 조작됐다. 5·18 한달여 전에 발생한 사북항쟁 때 1군사령부는 11공수여단의 투입을 검토했다. 공수부대의 투입을 앞두고 발포할 상황이 생기면 ‘계엄사령관의 사전 허가를 받으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1987년 6월항쟁기에도 비슷한 맥락의 명령서가 남아 있다. 그런데 5·18 자료들 중에 발포 관련 명령서는 여태껏 발굴되지 않고 있다. 최근 조사에서 제5공화국과 제6공화국 시기에 정부와 군이 5·18 관련 자료를 조직적으로 은폐, 왜곡, 조작했음이 드러났지만 전모를 밝히지는 못했다.

간혹 ‘그동안 할 만큼 했다’ ‘지겹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에 대한 답은 「오월의 노래 2」에 담겨 있다. “꽃잎처럼 금남로에 뿌려진 너의 붉은 피. (…) 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네.” 이 가사처럼 1980년 5월 금남로를 비롯한 광주 곳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쓰러졌다. 누가 이같은 폭력과 야만을 명령하고, 저질렀을까? 이어지는 가사는 이렇다. “왜 쏘았지, 왜 찔렀지, 트럭에 싣고 어디 갔지. 망월동에 부릅뜬 눈 수천의 핏발 서려 있네. 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네.” 왜 군은 국민들에게 그해 5월 그토록 잔혹했으며, 그때 사라진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 사라진 사람들의 가족들은 지금도 이사를 하지 않은 채 ‘언젠가는 돌아올지도 모를’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때때로 어디선가 시신이라도 나오면 혹여 자신의 가족일까 ‘억장이 무너지는’ 사람들이 있다. 몸에 새겨진 주홍글씨처럼 그날의 고통과 분노를 잊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 중에는 그날의 처참함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분들이 많다. 작년 8월 5일, 16세의 고등학생으로 5·18항쟁에 참여해 ‘막내 시민군’으로 불렸던 박정철도 그러했다.20

40년이 흐르고 5·18의 위상과 그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이 달라졌음에도 5·18을 폄훼하고 왜곡하려는 세력들은 아직도 활개치고 있다. 그들은 5·18항쟁을 왜곡·조작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는다. 한국의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인권을 무시하며, 평화와 통일을 무너뜨리려 시도하고 있다. 오늘도 그들은 ‘북한군의 사주를 받았다’며 5·18항쟁을 모독하고 있으며 나아가 ‘우리들’의 기본권과 민주주의를 되찾으려고 불을 밝혔던 촛불혁명마저 ‘북한의 사주를 받은 빨갱이들의 행위’로 매도하고 있다.

아직 5·18항쟁이 끝나지 않고, 끝나지 못하는 이유이다.

 

 

  1. 정부는 ‘5·18민주화운동’으로 규정했으며, 이외에도 ‘5·18광주민주화운동’ ‘5·18광주민중항쟁’ 등 다양한 명칭이 있다. 각각의 명칭마다 일정한 함의가 있으나 광주라는 지역에 가두기에는 그 영향이 너무도 크며, 인구 70여만명의 도시에서 최소 10만여명 이상의 시민들이 참여했을 만큼 규모가 컸기에 특정 계급이나 계층에 한정시키기에는 부족하다. 그러므로 필자는 ‘5·18항쟁’ 또는 ‘5·18’로 쓰겠다.
  2. 유네스코는 5·18이 “한국의 민주화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민주화를 쟁취함으로써 동아시아의 다른 국가들에도 영향을 미쳤다”라고 평가했다(유네스코 홈페이지 http://heritage.unesco.or.kr 참조). 5·18 기록물은 현재 광주의 5·18민주화운동기록관(옛 가톨릭센터)에 소장돼 있다.
  3. 처음 검찰은 관련자들을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며 기소하지 않았다. 이러한 결론에 대한 국민들의 비판이 높아지자 문민정부는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했다.
  4. 전두환은 2017년 발간한 회고록(전3권)에서 5·18이 북한 특수부대에 의한 도시게릴라 작전이라는 주장 등을 펼쳤다. 그로 인해 민·형사 소송이 잇따라 제기됐는데, 그중 출판·배포 금지 청구가 법원에서 받아들여져(피고는 출판당사자인 전재국) 회고록 중 1권의 출판·배포가 금지당해 상당 부분이 가려진 채로 개정됐다. 형사재판은 아직 진행 중이다.
  5. 전투교육사령부 「광주사태 전교사 작전일지」, 1980.5.18.
  6. 국회사무처 『2004년도 국정감사 교육위원회 회의록: 피감사기관 전북도교육청』, 2004.10.11.
  7. 5·17조치가 공표됨과 동시에 전국 201개 시설에 총 23,860명(장교 2,129/사병 21,731)의 계엄군이 배치됐다. 전국에 배치된 계엄군 병력 중 93%가량이 92개 대학을 점거한 반면, 주요 국가 보안시설 109개에는 전체 병력의 7%가량만이 배치됐다. ‘비상계엄 전국확대’의 목표가 ‘서울의 봄’을 이끌던 대학의 시위를 잠재우기 위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국방부과거사진상규명위윈회 「12·12, 5·17, 5·18 진상조사 보고서」, 2007, 55면.
  8. 전남도경찰국장 안병하는 시위 진압에 앞서 희생자가 나오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지시했다. 5·18 진압 직후 그는 계엄사령부 합수부에 연행되어 ‘직무유기’ 혐의로 수사받고 ‘자진 사퇴’ 형식의 해직을 당했다. 앞의 보고서 66~67면.
  9. 여성가족부·국가인권위원회·국방부 「5·18 계엄군 등 성폭력 공동조사단 조사 결과 발표: 5·18 계엄군 등에 의한 성폭행 등 다수의 여성인권침해행위 발견」, 2018.10.31.
  10. 「검시조서」의 사인은 ‘후두부 찰과상 및 열상, 뇌안상검부 열상, 우측 상지전박부 타박상, 좌견갑부 관절부 타박상, 진경골부, 둔부 및 대퇴부 타박상’이며, 후두부 타박상에 의한 뇌출혈이 직접 사인이다. 보안사령부 「광주사태 사망자 검시결과 보고」, 1980. 그는 제화공으로 일했으며, 아내와 갓 백일이 지난 아이가 있었다.
  11. 3공수여단 본부중대 근무자 이상래는 1988년 국회 청문회를 앞두고 전남대에서 출동하던 도중 트럭에서 발포가 있었다고 증언했다.
  12. 이 죽음을 두고는 여러가지 설이 엇갈린다. 군에서는 시민 장갑차에 깔려 사망한 것으로 주장하지만, 당시 11공수여단 부대원이던 이경남 목사는 계엄군 장갑차였다고 증언했다. 그 뒤 발굴된 자료에 의하면 이경남 목사의 증언에 설득력이 있다.
  13. 한국기자협회·무등일보·시민연대모임 엮음 『5·18 특파원리포트』, 풀빛 1997, 126~27면.
  14. 2군사령부 「광주권 충정작전 간 군 지시 및 조치사항」, 1980.5.22. 11:00.
  15. 소중한·박경석 인터뷰 「지만원과 가까웠던 장군, 왜 절연했을까 “5·18북한군 침투설 주장해 소리질렀다”」, 오마이뉴스 2019.2.26.
  16. 육군본부 「육군본부 작전지침(상무충정작전)」, 1980.5.26.
  17. 이날 오전 10시 50분경에는 봉쇄 임무를 마치고 부대로 복귀하던 31사단 병력을 향해 전교사 병력들이 오인 사격했다. 이로 인해 31사단 부대원 3명이 사망했다.
  18. 광주지검 『광주사태 당시 학원동향』, 1980.5.23.
  19. 5·18민주화운동 헬기사격 및 전투기출격대기 관련 국방부 5·18특별조사위원회 『조사결과보고서』, 2018.
  20. 한 연구자는 2019년 10월까지 총 46명이 자살한 것으로 추정했다. 1980년대에 25명, 1990년대에 4명, 2000년대 이후 17명이다. 김명희 「5·18자살과 트라우마의 계보학」, 5·18 39주년 기념학술대회 ‘5·18연구의 계보학’ 자료집, 5·18기념재단 2019, 132면에서 재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