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촌평
김도현 『장애학의 도전』, 오월의봄 2019
장애학의 도전과 변방의 자리에서시작하는 재생산정의 운동
나영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 SHARE 대표 curiousnyny@gmail.com
장애학은 아직 많은 사람들에게 낯선 학문이다. 이름만 들어서는 정확히 뭘 연구하는지 곧장 이해되지 않거나 혹은 섣불리 ‘질병이나 손상으로서의 장애를 연구하는 학문’ ‘장애인의 복지에 대해서 연구하는 학문’ 정도로 오해하기도 쉽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여성학’으로, 해외에서는 주로 ‘젠더 연구’(gender studies)로 소개되는 학문의 영역이 흔히 오해되듯 단지 여성이라는 성별 범주의 사람들을 연구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장애학 역시 단순히 장애인에 대해서 연구하는 학문이 아니다. 그래서 『장애학의 도전: 변방의 자리에서 다른 세계를 상상하다』는 장애학이 무엇인지, 의학이나 사회복지학, 특수교육학 등에서 다루는 장애 연구와는 어떻게 다른지를 소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그 차이가 바로 이 책에서 소개하는 장애학의 ‘도전’이다.
저자는 1장에서 네개의 키워드로 장애학을 소개하는데 핵심은 장애학이 장애를 ‘사회적’인 것으로 분석하는 학문이라는 점이다. 장애인을 단순히 개인적으로 특정한 ‘손상을 지닌 사람’으로 정의하지 않고 특정한 활동이나 사회적인 무언가를 ‘할 수 없게 된 사람들’(disabled people)로 정의할 때, 장애학은 그러한 활동을 ‘할 수 없게 만든 사회’(disabling society)를 드러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 작업을 시작함으로써 장애학은 ‘경계를 넘나들고’, ‘실천적’이며, ‘해방적’인 학문이자 운동으로서의 역할을 하게 된다. 저자가 반복해서 밝히듯이 장애학의 이런 측면은 여러모로 페미니즘의 젠더 연구와 닮아 있다. 젠더 연구 역시 단지 특정 성별 범주나 개인의 성역할 형성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그 범주를 만들고, 작동시키고, 유지시키는 사회적・정치경제적인 구조의 문제를 연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다보면 정상성과 정체성, 차이와 동일성, 해방과 정의, 자립과 의존, 연대와 횡단, 노동과 공생 등 여러 문제를 완전히 새로운 시각으로 보게 된다. 그중에서도 우생학에 관해 다루는 3장과 자기결정권에 대한 문제의식을 전하는 7장은 평자가 활동하고 있는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 운동과 만나는 지점이기도 하고, 앞으로 함께 중요하게 논의해나갈 영역이기도 하여 꼭 소개하고 싶은 부분이다.
지난해 4월 11일, 헌법재판소는 ‘낙태의 죄’를 명시하고 있는 형법 제27장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같은 조항에 대해 2012년에는 합헌 결정을 내리면서 여성의 자기결정권과 태아의 생명권을 대립구도에 놓은 바 있다. 이러한 태도는 임신중지가 마치 여성과 태아의 관계에서만 개별적으로 벌어지는 일인 것처럼 인식하게 만들었지만, 한국사회에서 전개되어온 인구정책의 역사를 조금만 살펴보아도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그동안 ‘자기결정권’도 ‘생명권’도 권리로서 존재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단적인 예로, 1973년 가족계획정책과 함께 제정된 모자보건법은 2009년 개정 전까지의 시행령에서 ‘현저한 범죄경향이 있는 유전성 정신장애’까지 인공임신중절수술의 허용한계 항목에 포함시킬 정도로 우생학적 목적을 선명하게 담고 있었고, 그로 인해 한센인을 포함해 수많은 장애인과 빈민이 ‘단종’수술의 대상이 되었다. 장애나 질병을 지닌 여성들은 국가, 사회, 가족이나 시설에 의해 동의 없는 피임과 임신중지를 겪는 한편, 본인의 결정으로 임신중지를 하고자 해도 불법인 존재가 되는 딜레마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이 본격적으로 공론화된 2016년부터 낙태죄 폐지 운동은 개인에 대한 처벌이 아니라 국가와 사회의 책임을 묻는 “낙태가 죄라면 범인은 국가다”를 외치며 운동의 담론을 전환한 끝에 마침내 헌법불합치 결정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임신중지가 비범죄화된다 하더라도 개인의 몫으로 남은 현실은 여전히 존재하며, 특히 우생학적 목적은 저출산 대응 정책으로 확대된 ‘난임’ 지원 과정에서 산전검사와 배아 선별 등을 통해 여전히 강화되고 있다. 임신성공률을 높이기 위해 여러개의 배아를 착상시킨 다음 취약한 태아를 선별하는 과정이나, 산전검사를 통해 태아의 장애나 질병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난임시술을 받는 여성들, 특히 장애나 유전적 질병을 지닌 여성은 선택의 딜레마에 놓인다. 사실상 임신중지 외에는 마땅한 선택지가 없거나 장애와 특정 질병의 유전을 막을 기술의 사용을 요구받기도 하는 것이다. 사회적 책임은 부재한 상태에서 그 결과는 오직 개인적인 ‘선택’의 책임으로만 남게 된다. 3장 ‘우생학의 시대는 끝나지 않았다’에서 저자는 이를 구체적으로 지적하면서, “여성에게는 임신을 중지할 권리가 있어야 하지만, 임신을 중지하지 않아도 그녀와 아이가 충족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사회가 할 수 있는 조치들을 취할 것이라는 확신을 지닐 수 있어야만 한다”라는 루스 허버드(Ruth Hubbard)의 말을 인용한다(136면). 이와 함께 “우생주의적 욕망이 내면화되는 과정에는 무엇보다도 무한경쟁의 체제에서 도태된 주체들을 ‘사회적 배제’의 영역으로 밀어내 ‘죽게 내버려’지도록 만드는 현실이 존재한다”(156면)라는 저자의 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현실에 도전하는 실천은 어떻게 가능할까?
책의 후반부에서 저자는 이에 대한 구체적인 대안들을 제시하는데 평자는 특히 두가지에 주목했다. 하나는 ‘자기결정권은 사회권이다’라는 주장이고, 다른 하나는 ‘상호의존으로서의 연립’을 모색하자는 제안이다. 일례로 8장에서 저자는 발달장애인의 자기결정권을 둘러싼 문제들을 검토하면서 자기결정권이 결정 능력이나 ‘혼자서 결정한 대로’ 보장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자기결정권에 대한 요구는 결정을 보장할 수 있는 과정과 사회적 여건을 마련하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7장에서는 자립과 의존의 이분법이 정상과 비정상의 이분법과 동일한 논리구조를 지니고 있다고 지적하며 이 이분법을 해체하는 것을 운동의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해체된 자리에 ‘함께 어울려 섬’, 즉 연립(聯立)을 놓자고 제안한다. 이 문제의식과 제안은 재생산권리의 보장을 넘어 재생산정의(reproductive justice)를 실현하자는 운동과도 매우 중요하게 연결되어 있다. 성관계와 파트너십에서부터 피임, 임신, 임신중지, 출산, 양육과 돌봄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과정은 서로 연동되어 있으며 그 과정에서 의존과 자립의 이분법을 넘어 연립할 수 있는 사회적 정의를 만들어나가야 한다는 것이 재생산정의 운동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재생산정의 운동을 제안했던 미국의 유색인, 이주민, 선주민 여성들과 아시아의 여성들은 권리의 실현을 가로막는 불평등과 차별, 환경과 경제의 부정의 같은 문제에 집중하며 오늘날 운동을 확장해나가고 있다.
변방의 자리에서 시작하는 ‘장애학의 도전’은 이렇게 ‘재생산정의 운동의 도전’과도 직결된다. 5장에서 언급되듯이, “모든 생명은 존엄하다”라는 추상적인 명제 대신 ‘어떤 사회적 관계와 조건 속에서 인간은 존엄해질 수 있는가’를 구체적으로 묻고 바꿔나갈 때 우리 사이에 놓인 수많은 장벽들을 함께 횡단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