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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이자켓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2학년. 1995년생.
jackystarr@naver.com
축구를 사랑해서
푹 꺼진 소파에 앉아 우린 경기를 보았다
곧 후반전의 킥오프가 진행될 참이었다
붉은색 유니폼을 입은 선수들이 둥글게 모여
서로의 어깨를 잡고 고개를 숙인 채 경기의 재개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붉은색 유니폼을 입은 관중들이
자주색 스카프를 흔들며 연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나는 성냥을 그었고 그때부터 우리의 대화는 시작되었다
관중들이 꺼지지 않을 불씨처럼 움직였다
일어날 수 있을까
크게 다친 것 같진 않은데
얼굴이 고통스러워 보여
무릎을 잡고 있는 게 아마 발을 디딜 때 다친 것 같아
돌아올 수 있을까
큰 문제가 아니라면 일어서겠지
못 돌아올지도 몰라
나는 꺼져가는 담뱃불을 재떨이에 짓이겼다
저 선수 없이 팀이 이길 수 있을까
저 선수를 대체할 사람은 많아
동물원의 기린처럼 말이야
너는 얼음 같은 나의 입술을 녹이고
내게 서서히 들어오고 있었다
경기는 여전히 큰 점수 차였고
판세는 뒤바뀔 것 같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 몸을 엎치락뒤치락하며
기괴한 모양새가 되어갔다
긴 다리들이 천장으로 바닥으로 향할 때
소파의 가죽은 맥 빠진 소리를 냈다
그때 텔레비전에서 엄청난 아우성이 쏟아져 나왔고
우리는 잠시 고개를 돌려 골 장면을 바라보았다
그물망 앞에 놓인 공을 주운 선수는 묵묵히
하프라인을 향해 달려갔다
엄청난 골이네
응 엄청났어
점수 차를 뒤집긴 어렵겠지만
그래도 아름다웠어
대각선에서 힘이 실린 슛이었어
관중들의 환호성도 엄청났지
그래 대단했어
축구를 사랑해서 그렇지
응 축구를 사랑해서
가끔은 선수들이 기린 같다고 생각해
동물원에 갇힌?
맞아 우리 안에 갇힌
언제든 긴 다리로 우리를 나올 수 있을 것 같은데
절대 그러지 않아 우리에서 우리의 규칙을 지키는 것처럼 보여
우리도 그런 것 같지 않아?
서로의 문밖을 나서면 끝인데 말이야
경기가 끝나고 관중들은 일제히 일어나 경기장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선수들은 그라운드에 드러누워 오랜 시간 일어나지 않았다
모두 축구를 사랑해서
그랬다
그러지 않았을까
식물 구조대
종일 어지러웠다
스프링클러가 회전했다
옅은 무지개도 같이 돌았다
우린 식물원 벤치에 앉아
털이 많고 큼지막한 열대식물들을 봤다
잎새가 커서 그늘도 짙었다
시위대처럼
늘어선 식물을 보며 넌 말했다
식물에 물을 준다는 건 거짓말이라고
화분에 화원에 식물들을 묶어두기 위해
물줄기를 뿌리는 것이라고
공터에 사는 무성한 나무들 잡초들
누구도 물을 주지 않지만 잘 자란다고
아름다운 장소는
조금씩 무서웠다
식물들이 서로에게 들러붙은 눈물을
조심스럽게 핥고 있었다
무척 투명한 혀여서
그들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식물원을 빠져나올 때
누군가가 나를 불러 뒤를 돌아봤다
너는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목이 무척 탔다
너와 내가 사람인 세계는
수상했다
수상한 비가 내렸다
세상의 절반
릭에 관해서는 할 말이 많다
릭은 말이 많은 것이 “달갑지 않다”고 했다
그래도 나는 릭에 관해 쓸 수 있다
우리는 번호판이 없는 옥색 승용차 보닛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릭은 손을 덜덜 떨며 담뱃재를 털었다
입김이 연기와 함께 흩어졌다
우리는 담배꽁초를 대로 쪽으로 던지고 주차장을 떠났다
자주 가던 이발소에 들렀다
릭과 나는 자리에 앉아 거울을 바라봤다
나는 릭이 비추어진 거울을
릭은 자신이 비추어진 거울을 바라봤다
스포츠머리요
우린 동시에 말했고 두명의 이발사는
같은 자리에서 같은 머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우리는 말없이 서로의 눈을 힐끔 쳐다봤다
옆머리로 새하얀 살이 보이는 우리는
가로수의 가지가 모두 잘려나간 거리를 걸었다
릭, 가로수가 꼭 벌거벗고 있는 것 같지 않아?
가지가 잘린 것이지 벌거벗은 게 아냐
그렇지만 가로수의 속살이 보이는 걸
그건 속살이 아니라 나무의 단면이야
속살을 보인다는 건 비애와 닮은 것 같아
나무는 그저 나무일 뿐이야
나무는 나체, 나체는 나무야
매끄러운 릭의 등을 안으며 나는 말했다
릭의 체구는 분명 작지만
어쩐지 등만큼은 길고 넓게 느껴져서
등을 안고 있으면
시원한 늦여름, 커다란 그늘에 누워 있다는
착각이 들곤 했다
릭은 언제나 같았다
바깥에 나갔다 집에 돌아오면
옷도 갈아입지 않고 침대에 누웠다
토스터를 사용하고 뚜껑을 닫지 않았다
함께 본 영화를 기억하지 못했다
나는 절반만 사는 듯했다
우린 벌거벗은 나무와 나무처럼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간격을 두고서
서로에게 잘린 팔을 뻗고 있었다
릭, 나는 세상이 반반이라고 생각해
운 좋은 쪽과 운이 좋지 않은 쪽
한탕 치는 놈은 그저 운 좋은 쪽이라고
릭, 나는 네게 한탕 치고 싶었어
그 앞날이 지옥이건 슬픔이건 어느 쪽이든 걸 수 있었어
지금은 그 무엇에도 걸 수 없지만 말이야
릭은 언제나 그대로였다, 릭은 언제나 그대로였다
그런데 나는 이제 릭을 부를 수 없다
겨울이 온 행성의 절반은 여전히 어두웠다 그리고
차가웠다
같은
법정의 봄,
망치를 세번 내려치면
실내가 세번 울리고
사람의 삶이 세번 끝납니다
망치를 내려놓자
망치가 묻습니다
말 같은 말
사람 같은 사람
그런 것이 있습니까
망치가 울고 난
장내에 사람들이 숙연합니다
너무 가만히 있어서
사람들 머리에서 꽃이 핍니다
그 꽃을 뽑습니다
뽑힌 꽃을 자루에 담습니다
간혹 꽃잎에 개미가 매달려 있습니다
꽃을 딸 때마다
귀가 멍합니다
멍해진 귓속에서
망치를 세번 내려치면
귓속이 세번 울리고
삶 같은 삶이 세번 끝납니다
귀를 내려놓습니다
꽃이 가득 든 자루를 끌고
법정 밖으로 걸어 나갑니다
빛을 밟습니다
죄도 없는 놈들은
죄인이라고
누군가 윽박지릅니다
그 말이 싫은데
나는 고개를 끄덕입니다
탓
겨울이라 그래
너는 왜 그런 말을 했을까
과천에서 돌아오는 버스
난 울음을 그치지 못하고
넌 그런 나를 바라보고
오늘이 마지막이야, 말을 했지
겨울의 동물원은 한산해서
우린 실내에서 뱀을 구경했다
실외에는 동물이 없는 사육장이 많았다
뱀들이 차가운 비늘을 벗고 남긴 허물 뭉치
언젠가 내가 잃어버린 물건 같았지
겨울은 나쁘다
겨울 탓을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
추워서 그래
어쩐지 우울해
모든 것이 쓸쓸해 보여
찬바람이 지나간 얼굴을 마구 비볐어
손으로 무엇이든 붙잡고 싶어
저 뱀은 손이 없는 절벽
넌 수천가지 손이 움직이는 강물
너와 내가 같이 붙인 포스터를 떼어내고
하얀 벽에 붙은 테이프를 커터 칼로 긁어내며 너는 말했다
투명해도 느낄 수 있어
그러니까 나는 투명한 걸 볼 수 있어
네가 내 가슴을 열고 손을 집어넣는다
냉장고가 열릴 때 켜지는 희뿌연 불빛 같은 것이
내게도 있다
괜찮다, 괜찮다 하여도 진정되지 않는 마음이 있고
의미를 모르지만 알아들을 수 있는 마임이 있고
네가 내게서 빛 덩어리를 뽑아낸다
나는 어쩐지 잔에서 잔으로 불꽃을 일으키며 떨어지는
칵테일을 떠올린다
겨울은 그렇다
겨울은 그래서
흰밥과 뜨거운 술을 삼키게 한다
너는 그래서
나의 몸이 온통 물비늘로 둘러싸였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너는 그래서 너는 그래서…
긴말들을 묶은 얼음 뭉치가 된다
누구의 탓도 아니다
이 겨울이 가기 전엔
심사평
‘공모’에 참여하는 우리가 심사(深思)해야 할 바는, 이 행위의 본질이 ‘누군가 선택되고 누군가는 배제된다’가 아니라 ‘고심할 기회, 고심하고 드러낼 기회, 드러난 것을 접할 기회’를 얻는 데에 있다는 것이다. 고심하고 고심하여 마침내 드러난 작품들을 읽을 수 있어 기뻤다.
시마다 깃들어 있는 반짝이는 사유, 가득한 에너지를 느껴가며 한편 괴로웠다. 그중 한 사람을 찾아내야 함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대산대학문학상’은 투고작의 수도 많고, 작품마다 기량이 고르며 그 수준도 높아서 심사하기 까다롭기로 정평이 나 있다. 그 명성에 걸맞게 한번 살피는 것으로는 결정하기 어려워 재차 살피고 또 살피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1700여편 작품 모두에 만족할 수는 없었다. 기시감이 느껴질 정도로 기성의 것을 따르는 문법, 낯선 소재에 의탁해 새로움을 얻으려는 피상적 시도, 일반적인 상황을 극적으로 가공하려는 작위적인 구성 등은 매해 지적되어온 부분이다. 올해 역시 이를 피하지 못한 작품들이 많았다. 특별히 외래어 사용에 대해 언급하고 싶다. 익숙하지 않음과 새로움은 별개다. 하물며 너무 많은 이들이 외래어를 이용해 낯섦을 만드는 방식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은 생각해볼 거리다. 쓰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필연적인 순간, 신중하게 접근해 사용할 때에야 그 의도는 성공하게 될 것이다.
전체 투고작을 살핀 다음 심사자들 각자 세명씩 선택해 총 아홉명을 두고 토론했다. 1차 독서를 통해 네명의 작품을 배제했고 「홈 비디오」 외 4편, 「탈출묘기」 외 4편, 「최초의 충돌」 외 4편, 「중학교」 외 4편, 「축구를 사랑해서」 외 4편 등 총 다섯명의 작품이 최종 대상이 되었다. 「홈 비디오」 외 4편은 언어 구사 능력이 돋보인다. 이뿐만 아니라 그 언어를 능숙하게 구조화해낸다. 시마다 반복되는 이미지와 단어는 아쉬운 점이다. 때로 정확하지 않은 문법들도 눈에 띈다. 「탈출묘기」 외 4편은 풍유적(諷諭的) 이야기들과 그 서사를 떠받치는 감각적 문장들로 읽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그러나 쉽게 뻔해질 수 있는 풍유법의 약점을 온전히 극복해내지 못했다. 간파당하지 않을 만큼 비틀 수 있다면, 그러면서도 지금의 완성도를 갖출 수 있다면 좋은 성과를 얻을 수 있을 거라 기대한다. 「최초의 충돌」 외 4편에서는 시인의 실력을 느낄 수 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긴장감 있게 써내려가는 능력이 발군이다. 그러나 잘 쓴 시가 곧 좋은 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좋은 시, 매력적인 시를 얻기 위해서는 ‘나’의 고유성을 담을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려는 기대이기도 하지 않은가. 기대하고 있겠다.
고른 기량과 고유의 전개 방식을 가진 시는 「중학교」 외 4편이었다. 차분하다. 불쑥 치고 들어오는 위트가 불편하지 않다. 특별한 문장 없이도 어느 순간 독자를 멈추게 만드는 호흡 역시 각별하다. 사유를 풀어놓는 정도도 적당해 따라가고 싶어진다는 점도 좋았다. 그럼에도 선뜻 당선작으로 고를 수 없었다. 힘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시들이 가진 가능성이 컸기에 더 멀리 볼 수 있게 해주길 바랐다. 지금이 아니어도 분명 기회가 있을 것이다.
숙고 끝에 당선작으로 선정한 작품은 「축구를 사랑해서」 외 4편이다. 이 작품들은 읽는 이를 시 속으로 잡아당기는 힘을 가지고 있다. 단순하면서도 자욱한 문장들을 따라가다보면 어느새 시 속 일원이 되어 낯선 거실 소파에 앉아 축구를 보거나 이국적인 이발소 대기석에 앉아서 차례를 기다리는 것만 같은 기분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이처럼, 시가 다루는 시-공간은 일상 속 익숙한 것들이지만, 시 속에서 그것들은 어느새 생경해지고 특정할 수 없는 긴장에 사로잡혀 다음, 그다음을 따라가게 되고 만다. 우리는 이것이 시인이 가진 힘이자 무기이고, 근사한 시적 의도라고 생각했다. 간결한 문장으로 풀어가는 흥미로운 이야기, 일순 날카로워지는 시선 모두 좋지만, 이 시인의 탁월한 지점은 바로 여기, 감동이 아닌 감동이며, 새로움이 아닌 새로움이고 익숙함에서 끄집어낸 다름에 있다. 더러 긴장감이 풀어지는 시도 있지만, 그것마저 끌어안아 잘 마무리하는 실력이 발군이다. 이처럼 시어를 조탁해, 자신만의 색을 입히고 건넬 줄 아는 이에게 너머를 부탁하여 맡기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부디 균형을 잃지 않고 바깥에 휘둘리지 않는 의지를 길러가면 좋겠다. 응원한다.
‘대산대학문학상’이 문학을 사랑하는 젊은이들을 위한 축제의 장이 되었으면 하고 바란다. 인생의 한 지점을 결정하게 되는 필생의 기회로 인식되지 않기를 바란다. 기꺼이 축하를 전하고 또 마음 다해 서로를 격려하는 기회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주지하지만, 투고한, 접수한, 이를 두고 읽은 우리는 이를 기회 삼아 가능성을 발아해보았고, 발화했으며, 기꺼이 보고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보다 중요한 것이 또 있겠는가. 당선자를 비롯해 우리 모두에게 축하와 격려를 전한다. 언제 어디서든 기꺼이 만나 인사 나눌 수 있기를.
강성은 박소란 유희경
당선소감
하던 대로 하겠다.
물이 끓는다.
커피를 마셔야지.
파란 머그잔에 커피를 따라야지.
뜨거우니까 조금 식은 뒤에 마셔야지.
크래커와 함께 먹어야겠다.
담배를 태우고 왔다.
생각이 멎었다 다시 순환한다.
살던 대로 살겠다.
특별할 것 없는 하루들.
살던 대로 살 수 있나?
그렇게 살아가도 괜찮은 걸까.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다.
유별나지 않아도 괜찮다.
유별나더라도 괜찮다.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그냥 걷자.
거리가 길어서 오랜 시간 걸을 수 있어.
밤을 새운다고 뭐가 달라지겠니.
그건 불면증이 아냐.
수면 위를 걷는 것뿐이야.
처음에는 무서울 거야.
하지만 다시 봐봐.
이 풍경은 하나도 낯설지 않아.
너의 방. 너의 조명. 너의 인형. 너의 로션. 너의 담뱃갑. 너의 안경. 너의 오리 유령. 너의 잠꼬대 노래. 너의 노란 저수지. 너의 찌질한 우아함. 너의 굽다 만 슬픔. 그 근처를 맴도는 나.
썩 괜찮지 않아?
이제 우리는 나아갈 수 있어.
먼 곳으로, 그동안 아주 가까워질 거야.
그러니 우리 그냥 걷자.
이자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