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소설

 

 

187_460

남의현 南宜賢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3학년. 1995년생.

other9s0hyeon@gmail.com

 

 

 

오래된 청소년 길미와 선생님들

 

 

올저는 근면한 관광 해설자였다.

올저가 근면한 관광 해설자인 것과 별개로 그 사람은 질 낮은 범죄자였다. 나는 올저를 사랑했는데 그 사람의 근면함이나 질 낮음과는 무관하게 기억력에 매혹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를테면 올저는 어떤 것을 훔치는 장면을 마치 사진처럼 떠내와서 그대로 나에게 묘사해줄 수도 있었다. 한편 올저는 단 한번도 장물을 나에게 선물한 적이 없었는데, 나는 그것이 내심 서운하기도 했다. 만일 장물을 선물받게 된다면, 정말이지 낭만적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나는 올저와 범죄에 대해 비밀스럽게 두런거리는 순간을 몹시 사랑했다. 그 두런거림의 순간이 영원히 지속될 수만 있다면 나 역시도 올저의 범죄에 가담하여, 함께 오래오래 귀중한 것들을 훔치면서 살아가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러다 운 나쁘게 올저만이 혼자 감옥에 들어가더라도 그 사람을 위해 오래오래 기다리면서 오래오래 원치 않는 눈물을 흘릴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올저는 약을 복용했고 불면에 시달렸다. 불면 때문에 약을 복용하는 것인지 약 때문에 불면에 시달리는 것인지 나로서는 알 수 없었지만 여하튼 건강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약을 복용해도 잠들 수 없는 것 같았고 잠들 수 없어도 약을 끊지 않는 것 같았다. 올저의 약과 잠. 그 둘은 좁은 길 위에서 대립하는 사나운 개들처럼 늘 이빨을 세우고 으르렁거렸다. 올저가 건강하지 않고 나는 굉장히 건강하니까 하루에 한번씩 죽음이나 자살에 대해 생각하기로 마음먹기도 했다. 하루에 한번 죽음이나 자살,이라고 백지에 써두고 그것을 몇분간 들여다보기도 했던 것이다. 나에게 죽음은 그 정도로 멀리 있었다. 나는 죽음이 어떤 형태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일단 그것을 하나의 공간으로 인식하기로 해버렸다. 그러나 때때로 죽음이라는 공간 안에 자신을 놓아두어야 하는지, 자신이라는 공간 안에 죽음을 놓아두어야 하는지 헷갈려하기도 했다.

올저는 근면한 관광 해설자로 금경포에 관해서라면 모르는 것이 없었다. 금경포를 둘러싼 삼면에는 물살이 약한 강이 흘렀고 나머지 한면인 뒤쪽으로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있었다. 그러니까 금경포는 마치 섬처럼 조성된, 배를 타야만 도달할 수 있는 곳이었다. 정원이 열명인 작은 규모의 유람선으로 사람들을 금경포에 데려다주고 다시 뭍으로 데려오는 일을 내가 했다. 데려가고 데려오는 업무와는 무관하게 금경포는 조선시대에 잠깐 태어났다가 죽어버린 H왕의 유배지이기도 했다. 금경포의 외부는 커다란 숲처럼 보였는데 무성한 나무들이 겨울의 빛을 흡수하거나 토해내고 있는 입구를 지나면 H왕이 생활하던 작은 한옥채가 나왔다. 그곳을 어소라고 불렀다. 어소 주변에는 비와 탑이 있었고 그 돌들 나름대로 의미가 있겠지만 올저가 아닌 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

어소는 협소한 사각형의 공간이었다. 내부에는 문을 열면 바로 정면에서 감상할 수 있도록 <프랑수아 아모리>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그래서 어소는 <프랑수아 아모리>의 사진을 위한 거대한 액자처럼 보이기도 했다. <프랑수아 아모리>라는 가명을 가진 사람은 건축물을 주로 찍는 사진작가였는데, 어소 내부에 걸린 사진도 어소를 정면에서 찍은 것으로, H의 죽음 이후 한참 동안 비워져 있던 그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오래오래 존재했던 어소의 빈 공간이 어소 자신의 몸으로 메워진 것이다.

 

길미는 매일같이 어소를 찾아오는 청소년이었다. 교복을 단정히 입은 길미는 뭍에 정박한 배 위에 앉아 있었다. 관리소 건물에는 시시덕거리는 매표소 직원들이 상주했는데 길미는 그 사람들의 시시덕거림을 혐오했다. 그래서 길미는 늘 조타실 뒷좌석에 앉아 출항을 기다리고는 했다. 나와 올저는 관리소에서 나와 배를 향해 걸어갔다. 올저는 길미 옆에 앉자마자 그 얼굴이 핼쑥하고 몸이 기다란 여자애의 차가운 손을 잡고 그것이 따뜻해질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조타석에 가서 배를 출발시켰다. 배 안에는 길미 외에도 두명의 관광객이 타고 있었다. 길미 뒤에 앉은 그들은 나이 차이가 아주 많이 나 보였고 서로 팔을 포개어 손깍지를 끼고 있었다. 비슷한 색의 등산복을 맞춰 입은 연인인 듯했다. 강을 절반쯤 건넜을 때 등산복을 입은 남자가 내 옆으로 다가와 큰 소리로 물었다.

여기 수심이 몇 미터나 되나요.

글쎄요……

여기 이름의 유래가 어떻게 되나요.

뭐라고요……

나는 하루에 한번 죽음을 생각하는 바로 그 시간을 지나고 있었기 때문에 등산복 남자의 질문을 주의 깊게 듣지도 않았다. 등산복 연인은 더이상 나를 방해하지 않았다.

나에게 있어 가장 가까운 죽음은 H의 것이었다. H가 음독으로 즉사했던 자리를 매일 걸레로 닦아내는 사람이 나였으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음독사의 흔적은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으며 내가 닦아내는 것은 그냥 최근의 먼지나 빗물 따위였다. 금경포 쪽으로 배를 운전해가면서 H의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보려고 노력했지만 무언가를 생각해내기에 강의 폭은 꽤나 좁았고 무엇보다도 그가 죽은 것은 너무 먼 옛날의 일이기도 했다. 때때로 나는 대걸레로 어소를 닦아대면서 H가 어떤 식으로 죽었는지 상상해보려고 애쓰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죽은 바로 그 자리에서 구체적인 이미지를 떠올리자면 어느새 <프랑수아 아모리>의 사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등산복 연인은 올저의 해설에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들은 <프랑수아 아모리>의 사진을 보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이었다. 등산복 연인에게 어소는 역사적인 건축물이라기보다는 피사체 혹은 피사체였던 것으로만 인식되는 것 같았다. 등산복 연인은 깍지 낀 손을 이쪽 사람의 주머니에 넣었다가 저쪽 사람의 주머니에 넣었다가를 반복하면서 <프랑수아 아모리>의 사진을 한참 바라보고 서 있었다.

 

길미를 처음 만난 것은 지난겨울이었는데 그날 나는 겁에 질린 듯 기이한 모양으로 딱딱하게 얼어붙은 대걸레를 들고 어소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입구에 놓인 들어오지 마시오 팻말을 넘어서 마루에 발을 디디려고 했을 때 안쪽에서 움직이는 검은 형체를 발견했다. 드디어 죽음을 목격한 것이 아닌지 생각했지만 알고 보니 그것은 한마리의 토끼와 한명의 길미였다. 길미는 눈에 띄게 커다란 머리통 아래로 어깨 밑까지 검은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다. 길미는 쪼그려 앉은 채 아직은 도망가지 않은 얼룩 토끼를 지켜보고 있었다.

너 이 새끼 귀여운 얼룩 토끼를 데리고 무슨 짓 하는 거니.

아이는 잠에 취한 눈꺼풀을 힘겹게 열듯 큰 머리통을 천천히 들어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노부부>예요.

아이의 태도는 매우 공손했다. 게다가 아이는 몇가지 귀중한 사실을 나에게 알려주었다. 얼룩 토끼는 이 토끼의 가명일 뿐이며 진짜 이름은 <노부부>라는 것. 또 자신은 아주 오래전부터 그 토끼의 조상들을 알았고, 그들은 <노부부>의 부모이기도, 부모의 부모이기도, 이 부모의 부모는 또 부부이면서 남매이기도 했는데 여하튼 그들 부부는 죄다 늙어 죽을 때까지 오래오래 함께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노부부>의 내력을 듣다가 하나의 사실을 스스로 알아차렸는데, <노부부>는 이 지역에서 촬영했던 영화의 제목이기도 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아이가 그 영화의 내용을 얼룩 토끼의 내력으로 착각한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었는데,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내가 토끼 <노부부>의 진짜 이름을 영화의 제목으로 착각한 것은 아닌지 또다른 의심이 들기도 했다.

한겨울의 금경포는 한산했다. 거센 강바람 탓에 방문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기억을 되짚어봤지만 그 거짓말쟁이일 수도, 진실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는 아이를 금경포에 태우고 온 적은 없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길미는 올저가 데려온 아이였다. 올저 역시 배를 운전할 수 있었다. 그 사실을 그때 처음 알게 되었는데, 당연하게도 올저에게 면허는 없었다. 올저는 금요일마다 길미의 집에 방문하여 독서를 지도하고 있었다. 올저는 책 한권을 모두 읽히는 법이 없었다. 길미가 산만해서 그렇다. 올저는 그렇게 말했지만 내가 보기에 길미는 눈에 띄게 조숙하고 차분했다. 여하튼 길미가 읽는 것은 하나의 완성된 책이라기보다 이야기의 파편들이었으며 길미에게 있어 모든 책은 일부분으로만 존재했다.

 

실로 올저는 길미를 과도하게 아꼈다. 올저가 그 아이를 과도하게 아끼니까 나 역시 그러고 싶었다. 함께 있으면 기분이 썩 좋아진다고는 할 수 없는 그 아이에게 흥미가 생겼다거나 해서는 아니었고 단지 그 아이를 아끼는 올저의 감정이 뭐 그다지 각별할 것도 없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길미에게 무언가를 가르쳐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올저가 그 아이에게 조각난 이야기를 읽히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길미에게 배를 운전하는 법을 가르쳐주기로 했다. 내가 먼저 장비를 만지면 길미가 조금씩 따라 해나가는 식이었다.

나와 길미는 조타석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내가 타륜을 잡고 있을 동안 길미는 시커멓고 더러운 강물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거기에 중요한 물건이라도 두고 온 사람처럼 말이다. 길미, 시커멓고 더러운 강물이 아니라 타륜을 봐야지. 그렇게 얘기했을 때 길미는 나의 무릎 너머로 손을 뻗어 엔진을 역으로 작동시켰다. 엔진이 역으로 돌아가면서 배의 속도가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앞으로 나아가는 힘이 매우 미약해졌을 때 길미는 엔진을 완전히 정지시켰다. 엔진이 정지한 상태에서도 배는 프로펠러 소리를 내며 얼마간 계속해서 앞으로 진행했다. 배가 완전히 멈추어 강물 위에 둥둥 떠 있는 것에 불과한 상태가 되었을 때, 길미가 고백해왔다.

저는 정말로…… 아름다운 몸을 가지고 있었어요.

뭐라고?

길미는 등을 곧게 세우고 더 자세히 이야기했다.

길미는 우연히 지역 잡지에서 <프랑수아 아모리>가 찍은 H왕 어소 사진을 보게 되었는데, 이상하게도 그 이미지에서 극심한 그리움을 느꼈고 일주일간 그 느낌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고 했다. 일주일째 되던 날 길미는 수심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시커멓고 더러운 강물에 빠지게 되었는데 피부에 닿아오는 온도가 아주 미지근했고 잘 생각해보니 그곳은 전날 밤 스스로 뛰어든 부드러운 침대 속이기도 했다. 익사하는 꿈을 꾸고 있었던 것이다. 길미는 시커멓고 더러운 강물 속에 망설임 없이 몸을 버려둔 뒤 없는 몸을 이끌고 뭍으로 올라왔다. 그곳은 금경포였다. 어둠이 무성한 산책로를 따라 걷다가 길미는 어소에 다다를 수 있었다. 문득 길미의 안에서, 그 오래된 건축물에 가능한 한 가까이 가보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없는 몸을 이끌고 그 자리에 가서 섰을 때, 놀랍게도 길미는 건축물에 쏙 하고 들어갈 수 있었다. 건축물의 내부가 아니라, 건축물 자체에 말이다. 길미는 나의 귀에다 입술을 가까이 대고 속삭였다. 그 건축물이 바로 제 몸이었던 거예요. 저는 그때 모든 것을 기억해냈어요.

제가 정말이지 너무 오래되었다는 사실을요.

길미는 H라는 사람에 대해서만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혹시 H라는 사람에 대해서 잘 아시나요? 올저 선생님이 가르쳐주시는 것 말고요. 길미가 물었을 때, 나는 올저에게도 이 비밀을 말한 적이 있냐고 물었고, 길미는 없다고 대답했다. 나는 매우 당황스러웠는데, 길미의 이야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이 이야기는 내가 아니라 올저가 들었어야 할 비밀로 느껴졌던 것이다. 나는 굉장히 슬퍼졌는데, 올저에게서 길미의 비밀을 훔쳐왔다는 사실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이 비밀스러운 범죄에 대해 올저와 공유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이기도 했다.

 

낡은 빌라들이 즐비한 언덕에 길미의 집이 있었다. 길미는 나와 올저를 초대하기도 했다. 우리 셋은 길미의 집에서 종종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그것은 길미의 수업시간이었지만 말이다. 그 시간 동안 책을 읽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우리는 무언가를 마시고 씹으면서 시간을 버리고는 했다. 길미의 집에는 먹을 것이 풍족했는데 주로 훈제하거나 얇게 저미어 말려놓은 것들이었다.

길미는 찬장에서 보드카 한병을 꺼내왔다. 길미가 어른 손님들에게 귀한 것을 내올 동안 올저는 가방에서 책 한권을 꺼냈다. 어린 시절부터 약에 중독되어 꿈속에서도 약을 먹지 않으면 수면을 이어갈 수 없는 매우 늙은 소설가에 대한 책이었다. 올저는 길미에게 노인들의 이야기만을 읽혔다. 그 아이에게 청년의 시절은 영영 도래하지 않을 거라고, 혹은 그랬으면 좋겠다고 여기는 것처럼 말이다. 올저가 정말로 그렇게 여긴다면 어느 정도 진실에 다다른 것일 수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길미는 청년의 건강한 몸을 가져보지 않은, 아주 오래된 청소년이었으니까 말이다. 길미의 몸에서 영혼만을 꺼낸다면, 그것은 아마 유령과 다름없을 터인데, 여하튼 그 유령은 어찌나 오래되었는지 목을 틀어쥐고 몇번만 흔들면 금방 부서져내릴 수도 있을 것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 이상하게도 마음이 따뜻해졌다.

올저는 식탁 옆의 굳게 닫힌 문을 보고 있었다. 그 문은 늘 단단히 닫혀 있었다. 한번도 열린 적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저 문을 열어도 괜찮겠니. 올저가 묻자 길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올저가 문을 열었을 때, 그곳은 당연하게도 방이었다. 창문이 방문과 마주보고 있었고, 창문 바로 아래에 흰 시트를 씌운 침대가 세로로 놓여 있었다. 침대 오른편에 매우 거대하지만 화려한 장식이라곤 없는 목재 진열장이 있었는데 그 안은 박제된 조류들로 가득했다. 저것들은 아버지의 취미인가보구나. 내가 말하자 길미가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어머니의 취미인가보구나. 올저가 말하자 길미가 고개를 저었다. 그 여자의 취미예요. 길미가 말했다.

그 여자는 아주 어려요.

길미가 이어 말했다.

그 여자는 저에게 매일 밤 따뜻한 생수를 주세요.

길미의 새어머니는 박제된 조류를 수집했으며 그 집의 박제된 동물들은 전부 그 여자의 소유였다. 길미가 그 여자를 그 여자라고 불렀으니까 나와 올저도 길미를 따라서 그 여자를 그 여자라고 불렀다. 그 여자를 그 여자라고 부르는 데에는 물론 약간의 죄책감이 동반되었지만 길미가 그렇게 부르는 데에는 누구도 이상함을 느끼지 않았다. 그 여자를 그 여자라고 부르는 길미의 말투가 몹시 공손했기 때문이었다. 말할 것도 없이 길미는 무척 공손한 아이였다. 무엇보다도 그 아이는 손님들에게 대접을 해야 한다는 관습적 사고를 할 줄 알았고 찬장에서 술을 꺼내 우리에게 내왔으며 심지어는 그것을 함께 마시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오래된 청소년 길미는 거의 갓 태어난 어른 손님들을 대접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식탁으로 돌아온 올저는 길미의 유리잔에 물에 희석한 보드카를 채워주었다. 길미가 두 손으로 그것을 받아 마시는 동안 올저는 현관 옆으로 이어진 벽 앞에 놓인 협탁을, 정확히는 그 위에 놓인 새를 바라보았다. 그 새는 예외적으로 안방이 아니라 바깥에, 원기둥 모양의 유리통 안에 들어 있었다. 저것은 모형이니? 올저가 물었을 때, 죄송하지만 우리 집에 모형은 들이지 않아요. 저건 1900년대에 만들어진 디오라마 박제예요. 길미가 공손하게 대답했다. 올저는 술을 마시는 내내 그 새를 감시하듯 지켜보았다. 어쩌면 그 새가 날개를 살짝 퍼덕이는 것으로 시작해 유리통을 박살 낼지도, 그래서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려는 자신의 계획까지도 모두 박살 내버릴지도 모른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올저가 박제된 새를 감시하는 사이 길미는 물에 희석된 보드카에 취해 잠이 들려 하고 있었다. 길미는 식탁 위에 서서히 엎드렸다.

올저는 디오라마 박제를 슬며시 안아 들고 나왔다. 학생을 상대로 그래도 되는 것이냐고 내가 물었을 때, 올저는 바로 그렇기 때문에 훔쳐야 한다고 말했다. 올저는 박제된 새가 든 유리통을 품에 안고서, 한편으로 그것에 눈길도 주지 않고서 언덕을 내려갔다. 올저는 박제된 새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어 보였다. 박제를 좋아하냐고 내가 물었을 때, 올저는 그러한 윤리적으로 정말이지 끔찍한 것들 사이에서 길미가 자라나는 것에 단지 불만이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올저는 그 여자에게서 무언가를 빼앗아온 것에 작은 즐거움을 느끼는 듯했다. 그것은 좀처럼 즐거움을 느끼지 않는 올저가 누릴 수 있는 작은 기쁨일지도 몰랐다.

언덕을 내려갈 때면 늘 석탄이 연소될 때 나는 불길한 냄새가 났다. 멀리 붉은 벽돌로 된 이층집이 보였다. 그 집 우측 외벽에는 환하게 웃는 영화배우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그 집은 영화 「노부부」(1999)의 촬영지였다. 얼굴이 그려진 벽돌이 풍화되어 피부가 부분적으로 사라져 있었다. 이 때문에 영화배우의 얼굴은 오랜 시간에 걸쳐 벌을 받으면서 동시에 환하게 웃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 집을 지나면 바로 갈림길이 나왔다. 나와 올저는 각각 왼쪽과 오른쪽으로 갈라져야 했다. 우리가 서로 다른 길로 접어들기 전, 올저는 멈춰 섰다. 그리고 박제된 새를 나에게 건네주었다. 자신은 진짜 새를 기르고 있기 때문에 빈손으로 가야 할 것 같다고 했다. 드디어 장물을 선물받았다는 사실에 나는 뛸 듯이 기뻤지만, 그 순간이 그리 낭만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 박제된 조류들을 모두 가져와야 할 것 같다.

올저가 말했다. 올저는 빈손으로 뒤돌아서 오른쪽 방향으로 걸어갔다. 그것들을 가져오면 뭔가 달라질까?

그 아이는 자라나기에 이미 너무 오래되었어.

나는 올저가 밟고 지나간 길바닥에 대고 중얼거렸다. 중얼거리고 난 뒤에 나는 굉장히 낯선 종류의 쾌감을 느꼈는데, 방금 내뱉은 말은 올저가 단 한번도 소유해보지 못한 진실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제는 내 것이 되어버린, 박제된 새가 든 유리통을 품에 안은 채 갈림길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그 낯선 쾌감이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려고 말이다. 그러나 그러려면 너무 오랜 시간을 그곳에 머물러야 할 것 같았고, 나는 서서히 발을 떼어 왼쪽 길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올저와 길미가 같은 책을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박제된 새가 올려져 있던 협탁은 이제 텅 비어 있었다. 그 빈 공간은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기다리기를 완전히 포기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협탁은 별다른 장식도 없이 완전한 직육면체의 모습을 아름답게 유지하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어딘가 아귀가 맞지 않는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올저는 그 위태로운 협탁을 잠시간 쳐다본 뒤 보드카를 한모금 마셨다. 그러곤 길미에게 지난 시간에 읽었던 부분을 회상해내보라고 요구했다. 길미는 길고 검은 머리를 귀 뒤로 몇번 넘기며 긴장한 티를 냈다.

그 할머니는 미국인이었고 지독한 약쟁이였고 아주 저명한 소설가였어요. 할머니에게는 귀여운 한국인 손녀가 있었는데, 그 손녀를 끔찍하게 사랑하게 되어버린 나머지 손녀가 태어난 뒤로는 그 아이에 대해서만 썼어요. 어느 여름 손녀는 처음으로 할머니의 별장에 있는 서재에 들어가게 되었어요. 책상 위에는 쓰다 만 소설의 원고가 이리저리 흩어져 있었어요. 손녀는 한장 한장 순서도 없이 읽다가 중요한 사실 몇개를 알아챘는데, 주인공의 이름이 알렉스라는 것과, 그녀의 모습이 자신과 놀랍도록 닮아 있다는 것이었어요. 이상한 기시감에 휩싸여 손녀는 앉은 자리에서 잠도 없이 그 원고를 단숨에 읽었어요. 이야기에 너무 푹 빠진 나머지, 알렉스가 준혁보다, 그러니까 손녀 자신보다 앞서 존재하는 사람이 아닐지 의심하게 되었죠. 이후 손녀는 자신이 알렉스의 클론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강한 믿음을 품고 살게 되었어요. 할머니가 죽고 나서도 말이에요. 할머니가 죽고 오년 뒤에 손녀는 열다섯의 나이로 물에 빠져 죽게 되었어요. 손녀는 검은 물속에 빠진 채 몹시 짤막하고 깊은 잠에 들었어요. 그리고 잠에서 깨면서 죽음을 맞이했고, 눈을 떴을 때는 안락한 흔들의자 위였어요. 흔들의자는 커다란 창문, 문이라고 여겨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커다란 사각형의 강화유리창을 마주보고 있었는데 바깥의 정원 위로 먼지 덩이 같은 눈발이 어지럽게 흩어지고 있었죠. 그리고 감색 머플러를 넓게 펴 어깨에 두른 할머니가 눈을 맞고 있었어요. 놀랍게도 할머니 곁에는 이미 준혁이 있었어요. 손녀 자신이지만 자신보다 눈 주변이 더 밝고 불그스름한 볼에는 살이 적당히 차오른 어린아이가요. 할머니는 그 부드러워 보이는 볼을 살짝 쓰다듬고는 자신의 머플러를 끌러 아이의 목에 걸어주었어요. 실내의 손녀는 흔들의자에서 흔들거리면서 일어나 창 쪽으로 가까이 갔어요. 그러면서 어렴풋이 짐작할 수가 있었죠. 이 창문 밖으로 나가면 자신을 알렉스라고 소개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에요. 하지만 손녀는 죽어도 그러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실내에서만 소리쳤죠.

이 대목에서 길미는 잠시 멈췄다. 그리고 식탁 위의 둥근 전등으로부터 내려오는 빛과 그 협소한 밝음 안에서 천천히 회전하는 먼지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오래전에 실제로 겪었던 일을 기억해내려는 것처럼 말이다.

할머니가 만지고 있는 것은 부드러운 가면일 뿐이에요……

그만하면 됐다, 하고 올저가 길미의 대사를 끊었다. 그 찰나 문이 열리고, 그러니까 영영 스스로 열리지 않을 것만 같던 식탁 옆의 방문이 열리고 길고 검은 명주 가운을 야윈 몸에 걸치듯 입은 여자가 걸어 나왔다. 그 여자는 발을 바닥에 질질 끌면서 식탁으로 다가왔다. 우리는 그 여자가 그 여자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술병을 얼른 바닥에 내렸다. 그 여자는 잠에 취해 올저에게 짧은 인사를 건넨 뒤 길미의 옆자리에 슬그머니 앉았다. 그러고는 혈관에 슬슬 피가 돌기를 기다리는지 잠시 동안 눈을 감고 있었다. 올저와 그 여자는 구면인 것 같았다.

저쪽이 부부가 쓰시는 방인가요?

올저는 그 방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말했다. 여자가 서서히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우리는 부부가 아니에요. 말하자면…… 연인이죠……

그 여자는 창백한 뒷목이 훤히 보이도록 짧게 친 곱슬머리를 아래에서 위로 한번 쓸어올렸다. 그 여자는 말하기를 두려워하듯 입을 크게 벌리지 않은 채 주저하면서 발음했다. 끔찍하게 못생기고 검디검은 짐승들을 물고 있어서 입을 크게 벌리면 와르르 쏟아지기라도 할 것처럼 말이다. 그 여자는 길미의 엄마 같아 보이지도 언니 같아 보이지도 않았다. 그 때문에 더욱 그 여자라는 호칭에 걸맞아 보였고 내 안에 있던 약간의 죄책감도 전부 사라졌다. 다만 그 여자의 창백한 손이 옆자리에 앉은 길미의 한쪽 어깨를 자연스럽게 감싸고 있었고 그 행위 때문에 그 여자는 꽤 그럴듯한 보호자처럼 보이기는 했다.

그런데…… 이……분은?

그 여자는 나에게 시선을 두고 그러나 결코 내 눈을 마주 보지는 않고 말했다. 이 사람 또한 자신의 학생이며 우리 셋은 한달에 한번씩 만나 함께 책을 읽고 저녁을 먹기도 한다고, 올저는 말했다.

그렇다면 저도 함께…… 해도 될까요……

그 여자가 올저에게 말했다. 무언가를 눈치챈 것 같지는 않았다. 그 여자는 정말 따뜻한 음식을 내어왔다. 그 여자가 저녁을 준비할 동안 올저는 비어 있기도 매끄럽기도 한 협탁 위의 표면만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저녁식사가 모두 준비되었을 때, 그 여자는 매우 느리지만 결코 더듬거리지는 않는 말투로 길미에 대해 물어오기 시작했다. 학부모라면 물어볼 수 있는, 그저 그런 따분한 질문들뿐이었다. 하지만 종종 그 여자는 길미의 미지근한 유리컵에 알맞은 온도의 물을 따라주기도 하고, 식탁 가장자리에 있어 자칫 박살 날 것 같은 도자기 그릇을 안쪽으로 당겨주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올저는 불안한 듯이 수저를 들었다 놓았다 하기를 반복했다. 그 여자가 한번 더 길미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았을 때 올저가 자신 안에 있는 무언가를 쏟아내듯 다소 큰 소리로 말했다. 단순히 취기일 수도 있었다.

저 끔찍한 박제들은 어떻게 된 거죠?

어린 시절…… 워싱턴에서…… 조류 박제를 배웠어요…… 이 집에서 제가 만든 건…… 디오라마 박제…… 단 하나였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여자는 어떠한 단어를 꺼내놓으려는 듯 입을 살짝 벌렸다가 어느 순간 급하게 닫았다.

어떻게 아이를 이렇게나 오래 이런 곳에 방치할 수가 있죠. 이 불쌍한 박제들 사이에 말이에요!

올저는 마치 박제된 동물이 살아 있기라도 한 것처럼 주위를 의식하면서 말했다. 그러고는 스스로를 진정시키려는 듯 물을 한모금 마셨고 모든 것을 삼키고 나서 입에 담지도 못할 욕설을 그 여자 면전에 대고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 여자는 완전히 말을 잃어버렸다. 올저 주제에 죄를 묻고 있는 건가? 나는 그때 그 여자나 길미가 지었던 표정을 전혀 기억해내지 못하는데, 그 순간 전혀 다른 공간을 떠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재판소를 떠올리고 있었다. 일년 전쯤 나는 A의 재판을 보러 갔었다. A는 나와 결혼했던 남자로, 당시엔 우리가 이혼한 지 일년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나의 생각에, 내 안에 아직 A에 대한 애정이 남아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방청석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그 사람들과 함께, 질 낮은 범법자들에 대한 애정이 아직 마음에 남아 있다고 여기는 그 다정한 사람들과 함께 말이다. 나의 오른쪽에는 갓난아이를 앞으로 안은 이십대쯤 되어 보이는 여자가, 왼쪽에는 삼십대쯤 되어 보이는 남자 무리가 앉아 있었다. 판사가 어떤 남자에게 선고를 내렸을 때 삼십대 남자 무리는 환호성을 지르며 나갔다.

 

빈손 올저는 갈림길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저 아이가 나를 정말로 존경하고 아낀다고 생각해. 그런 생각을 하는 날에는 하루가 식욕으로 몹시 충만해져. 하지만 저 아이가 성장한다고 생각해봐. 더 넓은 도시에 나가서 자신의 삶을 자기 나름대로 살아간다고 생각해봐. 정말이지 그런 생각을 하면 나는……

올저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올저는 조금씩 훌쩍거리더니 급기야는 어린아이처럼 코를 흘리면서 엉엉 울기 시작했다. 올저의 흐르는 눈물을 맨손으로 닦아주는 동안 나는 덩달아 마음이 아팠고 올저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마음은 별다른 마음은 아니었고 오히려 늘상 가지고 있었던 것이기도 했다. 나는 평소의 마음으로 평소의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널 위해서 뭘 하면 좋을까.

올저는 그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는데, 어쩌면 내 말을 아예 들을 수 없었는지도 몰랐다. 내가 올저의 어깨를 천천히 쓸어내렸을 때 올저가 주머니에서 반짝거리는 무언가를 꺼내 나에게 보여주었다.

길미를 데려와야겠어.

그것은 열쇠였다. 질 낮은 범죄자 올저가 나에게서 열쇠를 훔쳐갔던 것이다.

우리는 그 아이의 선생님이잖아.

올저가 그런 식으로 말했을 때 나는 화들짝 놀랐다. 학생과 선생님들. 나는 한번도 우리 셋의 관계를 그런 식으로 정의해본 적이 없었다. 선생님들이라니, 누군가의 선생님들이라니. 나는 그런 것을 원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 징그러운 호칭에 구역질이 나려고 했다. 나는 단 한가지만을 강렬하게 원하고 있었다. 올저가 너절너절 더러워진 무릎으로 기어와 나에게 유괴를 도와달라고 사정하고, 그래서 함께 예기치 않은 범죄를 저지르는 것. 그렇게만 된다면 우리가 나란히 감옥에 들어가더라도 황홀할 것이다. 나는 올저의 등을 내려다볼 수 있을 만큼 더 깊이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올저가 등지고 있는, 붉은색이 울렁거리며 차오르는 하늘을 보면서 죄수복을 입고 나란히 선 연인을 그려보았다. 그러나 나의 품에서 벗어난 올저는 열쇠를 가지고 홀로 길미의 집 쪽으로 향해 갔다.

 

비상용 열쇠를 가지고 배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밤에 항해하기 위한 배가 아니었으니까 준비된 불빛은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손전등으로 강을 비추며 금경포에 닿을 수 있었다. 어소는 땀 냄새 나고 덩치 있으며 웅성거리는 여자아이들로 가득 차 있었다. 여자아이들은 발목까지 내려오는 긴 패딩 안에 푸른색 고교 축구팀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아무것도 마시지 않고 있었지만 주위에 검은 비닐봉지들이 서너 덩어리 놓여 있는 걸 보니 재미있는 놀이가 시작되기 직전이나 끝난 직후인지도 몰랐다. 가까이 다가갔을 때 그들에게서는 술 냄새가 풍겼다.

축구부원들은 풀숲 사이로 흘끗흘끗 보이는 <노부부>에게 고성을 지르고 있었다. <노부부>는 오히려 조용해질 때 잠깐 모습을 보였다가 그 애들이 부르면 사라졌다. 토끼는 언제나 잠깐 나타났다가 금방 사라진다. 금경포 안에는 나조차도 셀 수 없을 정도로 여러마리의 토끼가 살거나 죽어 있었다. 이 시끄럽기도 다정하기도 한 애들은 그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어떤 토끼가 나타나더라도 그것을 진심으로 <노부부>라고 불러주었다.

어소가 얼마나 역사적으로 중요한 공간인지 나로서는 명확히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스포츠계를 이끌어갈지도 모르는 예비 축구선수들이 그곳에서 술을 마시고 시끄럽게 군다 한들 나에게는 그다지 기함할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와는 별개로 약간의 분노가 치밀었는데 그곳은 내가 매일같이 걸레로 닦아내야만 하는 구역이었기 때문이다. 이 새끼들아. 내가 말했다.

와이파이도 없는 곳에서 뭣들 하고 있니.

축구부원들이 야유를 했다. 야유하지 않고 축구복도 입지 않은 단 한명의 학생이 있었는데 길미였다. 길미는 입구를 등지고 <프랑수아 아모리>의 사진만을 보고 있었다. 길미가 숨을 충분히 들이마시기만 한다면 그 사진 속으로 뛰어들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길미는 실제 어소보다는 <프랑수아 아모리>의 사진 속 어소에 더 애착을 느끼는 것 같았다. 과거에 가졌었다는 본래의 몸이 실제의 건축물이 아니라 사진 속의 건축물이었던 것처럼, 그러니까 그 두 건축물이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세워지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길미.

길미가 앉은 채 천천히 뒤돌았다. 마룻바닥에 흩어진 트럼프 카드들을 밟고, 들어가지 마시오 팻말을 타넘으면서 길미는 바깥으로 걸어 나왔다. 단지 그것뿐이었다. 축구부는 길미에게도 야유를 했다. 나는 두 손을 뻗어 길미의 뺨에 다소 거칠게 가져다 댔다. 거센 바람 때문에 바싹 마른 커다란 얼굴 전체에서 미열이 느껴졌는데 술을 마셔서인지 감기에 걸려서인지 알 수 없었다.

선생님이 여기에 데려다줬니?

길미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나는 길미에게서 몸을 돌려 하나의 길이 쭉 뻗어 있는 풀숲으로 진입해갔다. 몇걸음 걷고 나서 뒤를 돌아봤을 때 길미는 거기에 그대로 서 있지는 않았고 아주 느리게 느리게 헐거운 슬리퍼를 질질 끌면서 따라오고 있었다. 나는 이 아이에게 정말이지 더이상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멈추지 않고 계속 걸어가면서 목소리만 높여 말했다.

이 숲으로 들어가야 배에 다다를 수 있다.

걸어가면서 방금 뱉은 말을 속으로 곱씹어보았다. 이거야 원 마치 선생님 같잖니.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나는 왜인지 모르게 실실 웃음이 나와서 어깨를 떨면서 참다가 결국에는 소리를 내어 웃기 시작했다. 나는 길미가 더 빠른 걸음으로 따라오기를 바랐고, 뒤돌아보았을 때 정말로 길미는 내 등 뒤에 바짝 붙어 있다시피 했다. 실제로 우리는 풀숲을 지나 배에 다다를 수 있었다. 좌석에 길미를 남겨두고 혼자 조타실로 들어가 시동을 걸기 시작했다. 시동이 완전히 걸리고 배가 출발하기 직전에 조타실의 문이 슬며시 열렸고 길미가 들어왔다.

길미가 나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그러고는 나의 등에 뺨을 비비기 시작했다. 세상에, 뺨을 비비다니. 나는 상당히 두꺼운 패딩을 입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의 뺨이 닿은 곳으로부터 서서히 열기가 전해져오는 것 같다는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이 들었다. 길미가 나의 허리를 더 꽉 끌어안더니 그 큰 머리통을 겨드랑이에 밀어넣었다. 그 딱딱한 머리통을 감각하면서 나는 왜인지 미래의 어떠한 일들을 예감할 수 있었다. 이 아이는 이 머리통으로 어떻게든 헤쳐나갈 거야. 나는 서서히 속도를 줄였다. 아주 서서히, 속도를 줄이고 있다는 사실을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것처럼 아주 서서히. 아주 크고 질 나쁜 사건을 겪더라도 한번 정도는 말이야. 이 아이의 머리통은 너무나 크고 건강해서 오래오래 살고, 그 여자는, 입 안에 짐승들을 키우기 때문에 말하기를 두려워하고 조류 박제를 수집하는 질 나쁜 취미를 가진 그 여자는 이 아이에게 최선을 다할 거야. 그 여자가 할 수 있는 한에서 하고 싶은 한에서 말이야. 아이는 상황에 따라 좋거나 좋지 않은 일을 당할 수도 있겠지.

배가 뭍으로 느리게 향하는 동안 머릿속에서 그러한 생각들이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나는 그제야 금경포에 축구부원들을 두고 왔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나저나…… 그 애들은 도대체 뭐냐.

그냥…… 갈 때 배에 같이 탔어요.

우리는 이윽고 뭍에 도착했다.

 

올저가 감옥에 들어간 뒤로 좀처럼 그 사람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다. 이제는 올저 대신 김경이라고 하는 여자가 해설을 한다. 그녀는 올저와 마찬가지로 방문교사 출신이다. 자신이 방문교사였다는 해설사 김경의 말을 듣고 나는 곧장 올저를 떠올렸는데, 올저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놀랍게도 나는 올저에 대해 거의 모든 것을 잊어가고 있었다. 내가 기억해낸 것은 정작 길미와 나누었던 반복적이고 지겨운 대화였다.

그날 뭍에 내리고 나서, 나와 길미는 관리소에 들어가 히터를 켰다. 나는 그 몸이 길고 얼굴이 크고 핼쑥한 아이를 돌보고 싶은지 아닌지 스스로의 욕구에 대해서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 아이를 돌보고 싶더라도 할 수 있는 것은 달리 없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나는 우묵한 접시에 따뜻한 생수를 받아서 길미에게 주었다. 생수를 받아 마신 길미는 난데없이 물어왔다. H는 어떤 사람이었어요? 그런 옛날 일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올저가 전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는 입을 다물고 잠자코 있었다. 그러나 길미는 한번 더 물어왔고, 입을 다물고 있기가 곤란해졌다. 한참의 고민 끝에 이렇게 대답했다.

닥쳐라.

길미는 개의치 않고 또 물어왔고, 나는 다시 이렇게 대답했다.

글쎄, 나는 그 사람에 대해서라면 하나도 모른다.

길미는 짐짓 포기한 듯 접시에 담긴 물을 한참 동안 바라보더니 다시 입을 열어 종알대기 시작했다.

저는 기억을 유지하거나 되찾기 위해 매일 어소에 찾아갔어요. 매일 입장료를 내야만 했죠. 제가 왜 길미의 몸으로 오게 되었는지, 길미의 몸이 죽어 바스라지면 저는 어떻게 되는지, 저는 두려워요. 그러나 길미로 사는 와중에 다시 원래의 몸으로 돌아가게 되면 길미의 몸은 어떻게 되는 것인지, 길미로 살았던 기억이 또다시 사라지게 되는 것인지, 역시 두려워요. 저 몸에서 이 몸으로 오면서 H에 대한 것을 모두 망각했던 것처럼 말이에요. 저기서 여기로 오면서 저는 벌써 축구부원들의 이름을 죄다 잊어버리고 말았어요. 조금 전만 해도 그 애들의 등번호와 포지션까지 다 외울 수 있었는데도 말이에요.

길미는 슬퍼하는 것 같기도 억울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 어떡하라고…… 중얼거리며 나는 창문 너머로 금경포를 바라보았다. 어두웠으니까 금경포가 정확히 어느 쪽인지 확인하기가 힘들었다. 그렇게나 옛날 사람에 대해서 꼭 알아야만 이 성가신 계집애는 직성이 풀리는 걸까. 하지만 나는 그렇게나 옛날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는 올저를 좋아하기도 했다. 올저라면 어떻게 했을까. 올저라면 말이야. 나는 결국, 그 사람은 말이야, 하고 입을 뗐는데 사실 그것은 H가 아니라 A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 사람은 죄를, 얼마나 큰 죄냐면 말이야…… 재판소에 설 수 있을 만큼의 죄를 지었지. 어쨌거나 나와는 상관없는 죄였다. 그러나 나는 그 사람의 재판을 보기 위해 법원에 갔어. 나는 언젠가 그 사람이 재판을 받게 된다면 하염없이 눈물을 흘릴 수가 있을 거라고 예상했기 때문에 잘 다린 손수건을 세장이나 챙겨 갔다. 그리고 드디어 A의 차례가 왔다. 짧게 깎은 머리에 스크래치를 낸 남자가 문을 열고 걸어 나왔지. 하지만 말이야…… 그건 그 사람이 아니었어. 말 그대로…… 그곳은 그 사람의 재판소가 아니었다고. 분명 바깥에 붙은 명단에서 그 사람의 이름을 확인했는데 말이야. 내가 그 사람의 이름을 잊어버린 것일까? 아니면 재판소가 그 사람의 이름을 잊어버린 것일까? 그러니까…… 네가 그 축구부원들의 이름을 죄다 잊어버린 것처럼 말이다. 어떻게 된 일인지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놀라웠던 것은 눈물이 전혀 흐르지 않는다는 사실이었어. 도저히 눈물을 흘릴 수가 없어서 나는 밖으로 나갔다. 이미 법원 어딘가에서 그 사람의 판결이 시작되고 있을지도 몰랐고 나는 어디로 갈 것도 없이 바싹 마른 손수건을 들고 그냥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이 대목에서 길미는 고개를 젖혀가며 남은 물을 모두 마셨다.

모든 판결이 끝나고 재판소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오는 게 보였다. 맨 마지막으로 아이를 앞으로 안은 여자가 나왔지. 상기된 볼을 가진 아이는 죽은 듯 잠들어 있었어. 그런데 그 여자가 나에게 가까이 아주 가까이 다가와서 무엇인가를 비밀스럽게, 하지만 이상하게도 조금 기쁜 듯이 속삭였지. 그러니까 내 웃음소리가 그 안까지 다 들렸다고 말이다.

성가신 계집애는 그릇 안을 응시하고 있을 뿐 어떠한 반응도 없었다. 물이 채워졌다 비워진 그릇은 이전보다 한층 더 우묵해 보였다. 정말 축구부원들을 데려오지 않아도 괜찮겠냐고 내가 물었고 길미는 바로 입을 열었다.

이미 잊어버렸는걸요.

길미는 축구부원들이 죽어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말했다. 길미는 후드티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그릇의 우묵한 곳에 던져놓았다. 유람선에 시동을 거는 열쇠였다. 내가 알기로 그 열쇠는 두개 있으며 하나는 내가, 하나는 올저가 가지고 있었다. 이 열쇠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물어볼 기회도 주지 않겠다는 듯 길미는 입을 다물고 의자 깊숙이 몸을 파묻었다. 그러고는 별 노력 없이도 금세 잠에 빠져들었다. 길미는 의자 밑으로 가늘고 긴 팔을 시계추처럼 툭 늘어뜨리고 있었는데 미동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나는 발을 길게 뻗어 손끝을 살짝 건드렸다. 길미는 잠시 뒤척였지만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나는 데려와서 데려다주는 데에는 선수였다. 그 일을 업으로 삼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도 나는 이 아이를 올저에게 데려가지 않았다. 올저에게서 아이를 훔쳐와버린 것이다. 올저를 도와 이 아이를 유괴할 수도 있었다. 그랬다면 이 일은 나에게 있어 오래오래 간직할 낭만적 사건이 될 수도 있었다. 나는 어둠 속에 앉아 삶의 어떤 경로를 이미 지나쳐버렸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오래오래 창밖의 검은 전경을 내다보았고 저 멀리서 자동차 헤드라이트의 불빛이 울렁거리며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거기서 하나의 인영이 내렸다. 사물들을 밝혀줄 빛이 없었기 때문에 그 인영은 그림자가 바닥에서 일어나 어른어른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그림자는 빠른 움직임으로 배에 올라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무심코 패딩 주머니에 손을 넣었는데 열쇠가 사라져 있었다. 나는 우묵한 접시에 놓인 열쇠를 패딩 주머니에 도로 넣으면서 얼마간 혼자 즐거워했다. 그리고 강에 비치는 묽은 손전등 불빛을 지켜보다가 이윽고 잠에 빠져들었다.

 

새로운 해설사 김경의 모습을 보며 나는 올저의 아름다운 외모를 떠올리려고 애썼다. 그러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묘하게도 올저가 아니라 올저가 건네준 새였다. 모든 일이 끝난 뒤, 나는 박제된 새를 다시 돌려주러 가야겠다고 마음먹고 그 집으로 향했다. 올저와 함께 올랐던 그 언덕을 올라서 영화배우의 얼굴이 지워져가고 있는 벽돌집을 지나서 말이다. 올저가 키우던 새를 이제는 내가 키우고 있었기 때문에 더이상 박제된 새를 집에 둘 수 없었다. 그 집의 차임벨을 누르고 나서도 잠시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차임벨의 소리가 사라지면서 모든 소음을 함께 데려가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나는 그 잠깐의 시간 동안 투명한 원기둥 안의, 날갯짓으로 유리를 박살 내버리기에는 너무나 오래된 새를 보면서, 여기 들어 있던 기억은 어디로 가버렸는지 생각하게 되었다.

잠시간의 정적이 끝나고 현관문이 열렸을 때, 길미는 빈 그릇의 우묵한 표정으로 나를 마주하고 있었다. 길미의 얼굴은 더 야위었고 그 때문에 키가 조금 자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나는 인사도 없이 길미에게 박제된 새를 내밀었다.

죄송하지만 우리 집은 더이상 박제를 들이지 않아요.

그나저나 그것을…… 당신이 훔쳐갔었군요…… 그렇게 말하기만 할 뿐 길미는 손을 뻗어 새를 받아들거나 혹은 밀어내려고도 하지 않았다. 자신이 마주하고 있는 것이 단단한 몸이 아니라 느슨한 입자로 이루어진 흰 연기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디오라마 박제는 내가 훔친 것이 결코 아니었음에도 나는 특별히 부정하지는 않았고 유리통을 길미 가까이에 가져갔다. 길미는 몸을 움찔하거나 비켜서거나 뭐 그러한 반응을 보이지도 않았다. 나의 손이 길미의 몸을 슬며시 통과해 들어가더라도 길미는 꿈쩍하지 않을 것 같았다.

이것을 어떻게 하면 좋겠니?

전 전문가는 아니에요.

길미의 시선은 나의 얼굴에서 묘하게 비껴나 있었는데 얼굴을 마주하는 게 겸연쩍다거나 꺼림칙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어디에 초점을 맞추어야 나를 잘 인지할 수 있을지 가늠해보는 것 같았다. 얇은 천에 영사되는, 울렁거리는 영상을 감상할 때처럼 말이다. 문득 나는 길미의 머리통에서 느꼈던 온기를 선명하게 기억해냈다. 그때의 순간을 마치 소설처럼 집요하게 길미에게 묘사해줄 수도 있을 것 같았고 어쩌면 한번 더 그 감각을 느낄 수도 있을 거라고 기대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사실이 이상하게도 나를 억울하고 서글프게 만들었다. 이것은 정말로 내가 겪어야 하는 일이었을까. 문득 내가 누군가의 행로를 대신 걷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고, 더 정확한 표현으로는, 누군가의 행로를 통째로 가로채왔다는 느낌을 받았고, 그것이 누구지, 누구였지, 그런 식으로 과거의 기억을 되짚어보다가 도저히 답이 떠오르지 않아 차라리 길미의 기원에 대해 머릿속으로 떠올려보기 시작했다.

상상 속에서 나는 <프랑수아 아모리>의 사진을 정면으로 마주 보고 있었다. H왕의 어소는 여전히 액자처럼 보였다. <프랑수아 아모리>가 어소의 사진을 찍을 때, 나도 그 곁에 있었다. 그녀를 이곳에 데려오고 바깥에 데려다준 사람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녀는 붙임성이 좋은 여자였다. 해설사가 동행하지 않는 시간이었기 때문에 유람선에는 나와 그녀 단둘만 올라타 있었다. 그녀는 조타석에 가까이 와 이렇고저렇고 조잘조잘 떠들어대다가 나의 왼손 약지에 끼워진 반지를 발견하게 되었다. 반지에 대해서 상세히 얘기해보라고 그녀가 요구했을 때, 나는 이렇게 답했다.

우리 부부에게는 열다섯살 난 아이가 하나 있어요.

그렇게 말하고 나서, 나는 가볍게 웃어넘겼다. 열다섯살 난 아이를 가지기에 나는 너무나 어린 나이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프랑수아 아모리>는 짐짓 진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고 그러고 나서는 아예 입을 다물어버렸다. 나는 가벼운 농담으로 그녀를 닥치도록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 반응 때문에 나는 일순 혼란에 빠졌는데, 어쩌면 정말로 어릴 적 아이를 낳아놓고는 그만 통째로 잊어버린 것이 아닌지 스스로에게 의구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헛된 망상이 희미해졌을 때쯤에는 없는 아이에 대한 약간의 죄책감만이 내 안에 외롭게 남아 있었다.

유리통에서 반사된 빛이 감은 눈꺼풀 너머로 들어와 나는 정신을 차렸다. 어느새 길미는 없고 문은 한번도 열린 적 없던 것처럼 굳게 닫혀 있었다. 잠시 잠에 들었던 것일까? 그렇다기에 유리통은 아직 떨어져 박살 나지 않은 채 매끈한 표면을 유지하고 있었다. 방금 길미를 만났던 경험이 내 헛된 망상이고 사실 문은 애초에 열리지 않았던 것이 아닌지, 그렇다면 이 문은 언제부터 열리지 않았던 것인지, 어쩌면 정말이지 멀리 있는 과거부터 열리지 않았던 것이 아닌지 생각하다가 내가 이미 문을 등지고 걸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순간 저 멀리서부터 오래오래 사라져가고 있는 커다란 얼굴이 다가오고 있었고 나는 그것을 오래오래 바라볼 수 있도록 걸음을 늦췄다. 미미한 속도로 밀려나는 풍경들 속에서 나는 아이가 서서히 잊어갈 미래의 것들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심사평

 

3인의 심사위원들은 예심을 거쳐 「그림의 집」 「오래된 청소년 길미와 선생님들」 「안녕한 남자」 「심장에서 가장 먼 곳부터」 「부나, 나」 외 아홉 작품을 본심 진출작으로 선별했다. 대학생 문인을 대상으로 하는 장이니만큼 단점보다는 장점에 집중하고, 가능성과 참신성에 주안을 두어 작품을 검토하였다. 기성 작가의 영향을 받은 데서 나아가 이를 그대로 답습한 듯한 작품들은 논의 대상에서 배제되었다. 토론을 거쳐 최종 심사의 대상이 된 작품은 「그림의 집」 「부나, 나」 「오래된 청소년 길미와 선생님들」 세편이었다.

「그림의 집」은 잘 만들어놓은 미로와 같은 소설이다. 동유럽의 호스텔이라는 비밀스러운 공간을 활용하여 말과 텍스트라는 다소 추상적인 주제를 적절히 형상화했다. ‘비밀의 방’에서 스스로 자라나는 나무의 그림은 불완전하고 미숙한 우리의 존재 방식을 넘어서 생동하는 에너지와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작가는 그 변화무쌍한 시공간을 소설적 배경으로 무리없이 녹여내어 환상과 현실의 양면을 볼 수 있게 한다. 신화의 모티프를 따온 듯 안정적인 구조를 가진 것도 장점이다. 다만 그 세계의 낯섦을 드러내는 방식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여행과 꿈이라는 소재가 다소 진부하기도 하다. 작품 속 ‘나’의 고민이 개인의 내면으로만 회귀하는 것이 한계라는 의견도 있었다.

「부나, 나」는 심사 초반부터 논의가 뜨거웠던 작품이다. 도서관 사서인 ‘나’와 ‘부나’의 동성 간 연애를 다루는 이 작품은 눈에 띄는 장점과 좌시할 수 없는 단점을 나란히 가지고 있다. 긴 호흡의 만연체 문장이지만 때때로 마음을 먹먹하게 하는 서술과 대상을 날카롭게 직시하는 묘사가 적절하여 잘 읽히면서도 후에 남는 잔영이 짙다. 연애에 있어 뜨거운 만큼 낯설고, 매혹된 만큼 환멸을 느끼는 이중적 심리를 잘 드러냈다. 담담한 듯 깊은 울림을 주는 결말도 여운이 깊다. 다만 이 작품은 어떤 부분 스스로의 동력을 잃고 휘청거리는데, 가령 퀴어를 다루면서도 그 대상을 거칠게 소모하는 방식은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여행지에서 만난 아버지와 빠다의 에피소드는 지나치게 과잉되어 있어서 작가의 의도를 분별할 수 없게 한다. 뜬금없는 도입부의 요설체도 집중력을 깨트리는 부분이라 재고를 권한다.

「오래된 청소년 길미와 선생님들」은 기발한 제목처럼 낯선 분위기의 소설이다. 오래된 영혼을 가진 의젓한 아이와 선생님이라 칭해지는 미성숙한 어른들, 이들이 어우러지며 빚어내는 기묘한 조화가 흥미롭다. 물에 둘러싸인 금경포, 역사적 공간인 어소의 배경은 작품 특유의 몽환적 분위기를 자아낸다. 소설 속 소설에서는 클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길미의 집에는 박제된 새들이 있다. 금경포의 어소에는 실제 장소보다 더 유명해져서 이를 대체하는 지경이 된 프랑수아 아모리의 사진이 있다. 이처럼 이 소설은 끊임없이 무엇이 진실인가, 혹은 무엇이 진짜인가를 질문한다. 작가는 삶이 결국 복제본의 일면과 다름없다는 사실을 적절한 비유와 상징으로 드러낸다. 소설 속 무의미한 대화들은 표면을 스치고 지나갈 뿐, 어디에도 가닿지 못하고 미끄러져 흩어진다. 남는 것은 빛나는 이미지와 말의 껍데기뿐이다.

「오래된 청소년 길미와 선생님들」은 심사위원들에게 몇차례 재독을 요했던 작품이다. 작품의 완성도와 아름다움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의 환상성이 현실에 기반하고 있지 않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물 위에 어른거리는 인영 같은 작품의 특성이 자칫 현실을 제대로 볼 용기나 힘을 가지지 못한 탓은 아닌가 하는 견해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독자들을 다시 끌어당기고, 질문하게 하는 힘이 있다. 우리는 그 손에 잡히지 않는 모호함이 한편 새롭고 대담하게 자신만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는 데 합의했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전하며, 앞으로 더욱 활발한 활동을 해가길 바란다.

전경린 정한아 천운영

 

 

 

당선소감

 

8월에는 꿈을 꿨는데 아기낙타 밤부가 죽은 그림자를 물어왔다. 아기낙타 밤부는 팬더와 무관하게 그냥 밤부였는데 여하튼 그림자를 바닥에 내려놓고 자세히 살펴보니 실은 내가 바닥에 쏟아버렸던 동거인의 스투키들이었다. 이것 참 미안하구나…… 내가 말했을 때는 밤부도 그림자도 아무도 없었고 나도 아무 말 없이 밤부와 무관한 꿈을 계속 꾸어나갔다.

 

가명과 무관한 본명을 붙이는 것을 좋아한다.

몇년 전에는 동생에게 <깔깔곰>이라는 본명을 붙여주었다.

<깔깔곰>은 깔깔 웃기를 좋아하고 나는 <깔깔곰>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를 좋아한다. <깔깔곰>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때로는 <깔깔곰>보다도 좋아하는 것 같다. 내가 너무 좋아하니까 친구들은 이제 그만 듣고 싶어한다……

그래서 이것을 소설로 쓰고 모두에게 비밀로 했다.

 

꿈 안과 꿈 밖을 동등하게 좋아한다.

잠에서 깨면 꿈이 훼손당하는 것 같고 또 잠에 들면 현실이 훼손당하는 것 같아서 나는 꽤나 난감한 마음이 든다. 꿈 안에서는 현실을 회복시키고 싶고 또 꿈 밖에서는 꿈을 회복시키고 싶으니까 나는 아무래도 모호함이 본성인 것 같다.

죽은 그림자에게 스투키들이라는 가명 대신 ‘길미’라는 본명을 붙여주면서 꿈에서 데리고 왔다. 죽은 그림자를 회복시키려는 마음으로 말이다. 내가 꿈 이야기를 너무 많이 하니까 친구들은 이제 그만 듣고 싶어한다. 그래서 「오래된 청소년 길미와 선생님들」을 쓰게 되었다. 내 이야기를 싫어했던 모든 친구들에게 몹시 감사드린다.

 

이상하고 흥미로운 것들을 영영 적어나갈 ‘아네모네’ 친구들, 하나의 이름으로 묶이고 싶을 때마다 모일 ‘저자극’ 친구들, 옛 동거인과 지금의 동거인에게 감사한다. 그리고 금경포에 나를 처음으로 데려가주었던, 아직까지도 본명을 붙여주지 못한, 김수진에게 감사를 전한다. <깔깔곰>을 비롯한 귀엽거나 혹은 조금도 귀엽지 않은 가족 구성원들에게도. 나를 좋아하거나 혹은 그다지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지인들을 비롯해 내가 언제나 좋아하는 선생님들께 그리고 작품을 뽑아주신 세 심사위원분들께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다.

남의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