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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곡

 

 

187_490

이재빈 李在彬

서울대 경제학부 4학년. 1990년생.

zevintothez@gmail.com

 

 

 

주리

 

 

등장인물

남자

여자

조율사

 

무대

무대는 마천루가 보이는 어느 메트로폴리탄의 고급 아파트.

 

 

1장

 

창밖으로 부드럽게 아침 햇살이 들어오면서 무대가 서서히 밝아진다.

식탁에는 아침식사가 차려져 있다. 출근 복장을 거의 다 갖춘 남자가 무대 한쪽 부엌에서 식사 준비를 분주히 마무리하고 있다. 여자는 그제야 잠자리에서 일어난 듯 자던 복장 그대로 한손에 책을 들고 무대 위로 등장.

 

여자 뭘 이렇게 많이 했어.

남자 평소대로인데 뭘.

여자 된장찌개에 조개까지 넣었네?

남자 그거 하나는 신경 좀 썼지. 어제도 책 보다 잠든 거 같던데 좀더 자지 않고.

여자 아니야. 벌써 해 다 떴는데 뭘. 남향에 사니까 아침만 되면 햇살이 쏟아져서 더 잘 수가 없잖아.

남자 와, 우리 예전 집에서는 그런 거 생각도 못했는데. 그치?

여자 여기는 햇살이 너무 세서 커튼을 두꺼운 걸로 새로 달아야 할 판이야.

 

여자가 식탁에 앉아 천천히 아침식사를 시작한다. 남자가 출근 준비를 마무리하고 집을 나서려 한다.

 

남자 아, 맞다. 냉장고에 김치 있는데.

여자 그건 내가 꺼내 먹을게. 늦기 전에 빨리 가야지.

남자 이 정도 할 시간이야 충분하지. 그리고 좀 늦으면 어때.

여자 늦어도 괜찮아?

남자 전에는 늦으면 큰일 난다는 생각에 주눅 들어 다니니까 조금만 늦어도 선배들이 날 엄청 갈궜거든? 근데 요즘은, 에이씨 그냥 늦으면 어때? 회사 그만둬버리지 뭐, 하는 생각으로 다니니까 좀 늦어도 뭐라 하지도 않는다니까.

여자 그럼 다행이네.

남자 이게 다 잘나가는 작가님이랑 결혼한 내 복이지 뭐.

여자 아무튼 그럼 잘 다녀오고.

남자 아 참, 오늘 조율사가 온다고 그랬나?

여자 응, 오늘이지.

남자 조율이 뭐라고 그렇게 비싼지 모르겠어.

여자 또 그런다. 비싼 만큼 비싼 값을 한다니까.

남자 그게 그렇게 어렵나?

여자 어렵지.

남자 저게 참 돈 먹는 하마구나.

여자 유일한 낙이 피아노 치는 건데. 피아노 없으면 글도 안 써진단 말이야.

남자 그래, 알았어. 그럼 이따 봐.

 

남자가 볼에 키스를 하고 나가고, 여자는 식탁에 책을 펼쳐두고 아침식사를 한다. 무대 서서히 암전.

 

 

2장

 

무대가 서서히 밝아지면 여자가 타자기 앞에 멍하니 앉아 있다. 초인종 울리는 소리가 난다. 여자가 일어나서 문을 열어주면 조율사가 무대 안으로 등장. 조율사는 검은색 양복을 말끔하게 차려입었고 등 뒤에 첼로 혹은 첼로보다 조금 큰 현악기가 들었음직한 악기 가방을 메고 있다.

 

조율사 안녕하세요, 작가님. 한달 만에 뵙네요.

여자 이번 달도 정확히 아침 열한시에 오셨네요. 일분 일초도 늦지 않고.

조율사 저는 프로니까요. 프로는 항상 시간을 지키죠.

여자 그러게요. 매번 느끼는 거지만 참 대단하세요.

조율사 그럼 조율 준비할까요?

여자 네, 바로 시작하면 될 것 같아요.

조율사 좋습니다. 그럼 작가님, 의자에 앉아서 잠시만 대기해주시겠어요?

 

악기 가방처럼 보였던 케이스에서 조율사가 흰 공업용 장갑과 검은색 굵은 밧줄, 그리고 붉게 칠해진 두개의 길쭉한 몽둥이를 꺼낸다.

조율사가 능숙하게 여자의 몸을 의자에 검은색 밧줄로 묶고, 자연스럽게 두개의 몽둥이를 여자의 정강이 사이에 끼운다.

조율사가 막대기로 정강이를 비틀어 고통을 주는 전통적인 고문 방식, 한국에서 ‘주리를 튼다’고 부르는 행위를 시행할 준비를 마친다. 모든 직업의 전문가가 그렇듯이 조율사가 이 모든 과정을 준비하는 손동작 또한 마찬가지로 최적화된 동선으로만 구사되어 일말의 군더더기가 없다.

 

조율사 그럼, 저번 달에 끝났던 곳에서 시작할게요.

여자 (잠시 망설이다) 저… 잠시만요, 조율사님. 사실 오늘은 시작하기 전에… 음… 제가 마음에 걸렸던 점들이 몇가지 있어서…

조율사 네, 말씀하세요.

여자 제가 조율사님을 못 믿어서 그러는 건 아니지만… 몇가지만 좀 물어볼게요.

조율사 네, 얼마든지요. 아시다시피 저희는 고객님과 완벽한 동의를 거치지 않으면 조율을 진행하지 않으니까요. 아시다시피 그런 점에서 저희는 완벽한 프로죠. 무슨 석연찮은 부분이라도 있으실까요?

여자 어제 자기 전에 누워서 스포츠 뉴스를 좀 봤는데, 저번 올림픽에서 약으로 메달을 딴 러시아 선수들이 좀 있었나봐요.

조율사 약이라고요?

여자 네, 신체 능력을 키워주는 약이요. 스테로이드라고 하나? 근육 강화제 같은 거라던데. 그게 적발돼서 올림픽위원회가 약을 한 선수들 메달을 전부 박탈한다나봐요.

조율사 그런 일이 있었군요. 어쩐지 러시아 놈들 너무 잘한다 했더니!

여자 그걸 보니까 두려워졌어요. 저도 그 러시아 선수들처럼 반칙을 저지르고 있는 건 아닌가 싶어서요…

조율사 음…

여자 조율을 받기 시작하면서부터 좋은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맞으니까요…

조율사 두려워하시는 부분이 정확히 어느 부분이시죠? 반칙한다는 죄책감 때문인가요? 아니면 러시아 선수들처럼 수상이 취소되는 게 두려우신가요? 만약 후자라면 전혀 걱정하실 필요가 없으세요. 저희는 국가에 의해서 합법적으로 공인된 전문직이니까요. 자격증이 발부된 사람만이 이 직업에 종사할 수 있죠.

여자 그건 아는데… 그래도 좀 뭔가… 제 글을 읽는 독자들을 속이고 있다는 기분이 들어요.

조율사 에이… 사실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잖아요. 인간은 보상보다는 처벌에 더 크고 확실하게 반응한다는 걸요. 그러고 보면 우리 조상님들 지혜가 참 대단하셨죠? 예전에는 사랑의 매를 아끼지 않았잖아요. 학교에서 체벌이 금지된 뒤로 우리나라 학생들 학업 수준이 급락한 것은 다 아는 사실이죠.

여자 서양의 기준에서 볼 때는 아동학대잖아요.

조율사 전혀 아닙니다. 서양 애들도 실은 뒤에서 몰래몰래 고문과 체벌을 하고 있는 거 모르셨죠? 걔네 그냥 쉬쉬하는 거예요. 제가 비교문학 전공으로 석박사를 미국에서 밟았거든요. 들어보셨을 수도 있는데… 미국 대학에는요, 추천으로만 알음알음 들어갈 수 있는 비밀 클럽들이 있는데요. 그 클럽에서 모여서 뭐 하는 줄 아세요?

여자 뭐 하는데요?

조율사 뭐 하긴요. 서로 고문하는 거죠. 미국 놈들은 선후배 개념도 없어서 얄짤없어요. 그게 다 미국 놈들 좋아하는 모티베이션을 위해서죠. 그래놓고 우리보고 아동학대다 뭐다 하는 건 지들 따라잡을까 겁나서 그냥 겁주는 거예요. 일종의 사다리 걷어차기죠. 한마디로 지들이 이룬 과학과 예술의 발전을 따라오지 말라 이겁니다.

여자 그래요. 뭐… 제가 하고 있는 게 수학 문제를 빠르게 푸는 거나 아니면 회계 장부를 정확하게 작성하는 거라면… 이 방법도 납득이 갈 것 같아요. 그렇지만 저는 작가예요. 아름다운 글을 쓰는 데 이런 폭력적인 방법으로 쓴다는 건 조금…

조율사 (말을 끊으며) 그건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아무래도 주로 예술가 분들을 고객으로 응대하다보니 이런 질문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으세요. 어떤 면에서 보면… 좀 진부한 질문이죠. 자…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작가들을 한번 떠올려보세요. 모두 어떤 식으로든 고통받는 삶을 살지 않았나요? 예를 들면 음… 도스또옙스끼. 그 얘기 아시죠? 도스또옙스끼가 젊었을 때 사형장에 끌려가서 죽다 살아난 얘기.

여자 그거야 워낙에 유명한 이야기니까요.

조율사 그 사람이 왜 죽기 직전까지 갔다 와서야 글을 쓰기 시작했겠습니까? 그리고 왜 도박장에 가서 정기적으로 재산을 탕진하면서 자신을 경제적 궁핍에 몰아넣었을까요? 고통 없이는 좋은 글을 쓸 수 없기 때문에 그런 거죠. 역사상 많은 위대한 작가들이 요절을 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좋은 작품을 쓰기 위해 자신에게 지나친 고통을 가했기 때문이에요. 그치만 그분들이 손수 만들어낸 고통들은… 뭐랄까… 전문가의 솜씨로 만든 게 아니었죠. 그렇기 때문에 부작용이 있었던 겁니다. 비유하자면… 몸이 아플 때 옛날 사람들은 산에서 약초를 캐다 먹었죠. 그러나 요즘에는 약초에서 필요한 화학물만 추출해서 약을 만듭니다. 작가에게 필요한 고통도 마찬가지죠.

여자 음… 정말 그럴까요?

조율사 생각해보면 당연한 게 아니겠어요? 어떻게 삶의 고통 없이 좋은 글을 쓰겠습니까? 요새 작가들 문제가 뭔지 아세요? 삶이 너무 편하고 풍요로운 거예요. 지 부모한테 학원비 따박따박 타다 학원 다니고, 매일 밤 꼬박꼬박 야자하고. 그렇게 자란 애들이 뭔 놈의 글을 쓰겠다고 난리인 건지 참. 그러니 인공적으로 만든 고통이 필요한 거지요. 약국에서 파는 매끈매끈한 알약처럼요. 비타민 영양제 챙겨 먹듯이요. 그러니 전혀… (다시 강조하며) 전혀 부끄러워하실 필요가 없으세요. 고개를 드세요.

 

여자가 고개를 든다.

 

조율사 네, 좋아요.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이번 달에 쓴 이야기를 들려주시겠어요?

여자 네. 그럼 시작할게요. 이번 이야기는 남편과 아내에 대한 이야기예요. 배경은 찢어지게 가난한 신림동 달동네 단칸방이에요. 남편은 눈이 보이지 않는 피아니스트고 아내는 귀가 들리지 않는 화가예요. 매일 밤 남편은 피아노를 연주하고 아내는 남편의 피아노 연주를 들으면서 그림을 그려요.

 

무대 뒤로 순간 핀 조명이 들어온다. 남자가 뒤에서 피아노를 치다 곧 시야에서 사라진다.

 

조율사 음… 글의 장르가… 가난 포르노인가요?

 

조율사가 진부하다는 생각이 드는지 붉은색 막대기를 손으로 만지작거린다.

 

여자 잠시만요… 끝까지 들어보세요…

조율사 네, 편하게 계속하세요.

여자 아침에 아내 대신 그림을 팔러 나갔던 남편은 아내가 가장 아끼는 그림을 두고 온 걸 뒤늦게야 떠올려요. 그건 피아노를 치고 있는 아내의 자화상이었죠.

조율사 음… 아내는 귀가 들리지 않는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여자 네… 그러니까 상상이죠. 상상.

조율사 아하… 이해했습니다. 계속하세요.

 

무대에서 사라졌던 남자가 그림을 들고 다시 등장.

 

여자 집으로 돌아온 남편은 그림만 챙기고 나가려다가 문득 아내 방에서 나는 신음소리를 건너 들어요.

조율사 불륜 드라마에서 많이 봤던 설정이군요.

여자 워낙에 청각이 예민한 사람이라… (흥분하면서) 안 들을 수가 없었던 거죠!

조율사 어… 잠깐만요. 아까 달동네 단칸방이라고 하지 않으셨나요?

여자 어… 그럼 방을 하나 더 늘리죠 뭐. 아무튼 두려운 마음을 붙잡고 방문을 천천히 열어본 남편은 아내가 의자에 묶여 주리를 틀리고 있는 걸 발견하죠!

 

여자의 이야기에 따라 무대 위에서 남자가 같은 동작을 행동으로 옮긴다.

 

여자 화가 치밀어오른 남편은 그 자리에서 총을 꺼내들고 탕 하고 쏴 갈겨요. 고문을 하던 사람은 머리에 총알이 박혀서 그 자리에 푹 쓰러지네요.

 

남자가 조율사에게 총을 쏜다. 조율사가 총을 맞고 쓰러진다. 그러나 곧 아무렇지도 않게 총 맞은 자리를 쓱 닦아내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조율사 잠깐만요… 잠깐만요… 어떻게 총을 쏜 거죠?

여자 남편 직업이 말단 형사였거든요.

조율사 피아니스트가 아니라요?

여자 피아노는… 음… 그냥 취미예요.

조율사 음… 설령 형사라 해도… 한국에서 형사가 총을 소지하고 다니는 경우는 매우 드물죠. 함부로 쏠 수도 없구요. 그러니 개연성의 측면에서… 문제가 있다고밖에 볼 수 없을 것 같네요…

 

조율사가 주리를 살짝 튼다.

 

여자 으으으으윽… 잠시만요… 그럼 배경을 바… 바꿀래요. 신림동 달동네가 아니라 뉴욕 맨해튼으로! 남편은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뉴욕 형사예요. 미국 남자답게 그대로 문을 발로 뻥 차고 들어오죠.

 

무대 밖으로 나가 있던 남자가 여자의 설명에 따라 다시 무대 안으로 문을 발로 차고 들어온다.

 

여자 (기계적으로 부자연스럽게) Hey… Honey! What the fuck is going on here?

 

남자가 총을 쏜다. 다시 조율사가 머리에 총을 맞고 쓰러진다. 그러나 곧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일어난다.

 

조율사 아무리 맨해튼이라도 보자마자 총을 쏘는 건 개연성에 문제가 있어 보여요. 이게 서부영화도 아니고 참.

 

조율사, 주리를 조금 더 튼다.

 

여자 조… 좋아요. 그럼 총을 쏘지는 않았다고 하죠. 남편은 껄렁한 사람이 아니니까요. 뉴욕 형사를 하기엔 신중하고 소심했죠. 그래서 처음 보는 사람이 처음 보는 방법으로 사랑하는 아내를 고문하는 광경을 목격했는데도… 주머니에서 총을 끝내 꺼내지는 않는 그런 사람이었던 거예요.

 

무대 밖으로 나가 있던 남자가 다시 문을 박차고 무대 안으로 들어온다.

 

여자 (아까보다 강하고 격한 어조로) Hey… Honey! What the fuck is going on here?

남자가 조율사에게 점점 다가온다. 허리춤에 찬 총을 만지작거리지만 총을 뽑지는 않는다.

 

조율사 음… 여전히 개연성에 문제가…

 

조율사가 생각에 잠긴 사이에, 남자가 조율사에게 성큼성큼 다가와서는 다짜고짜 주먹을 날린다. 앞서 조율사가 총에 맞았을 때보다 훨씬 더 큰 충격이 가해져 사방에 피가 튄다.

 

남자는 위협적으로 조율사의 멱살을 잡고 당장에라도 죽일 듯이 턱 밑에 총을 겨눈다. 엉겁결에 구타를 당해 겁에 잔뜩 질린 조율사가 두 손을 머리 위에 들고 말을 잇는다.

 

조율사 (겁에 질려) 뭔가 오해가 있으신 거 같은데… 제가 다 설명드리겠습니다… (사이) (묶여 있는 여자를 바라보며) 뭐라고 하죠?

 

남자가 조율사를 한차례 더 구타하고는 여자를 밧줄에서 풀어준다.

 

의자에서 풀려난 여자, 무대 위를 자유롭게 움직이며 관객을 바라보고 대사를 시작한다.

 

여자 (관객을 향하여) 아내는 자신의 남편에게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합니다. 사실 아내는 내심 알고 있었습니다. 저 잘생긴 남자가 자신에게 푹 빠진 이유에는 아내가 천재 작가라는 환상도 있었다는 걸요. 그 환상을 깨기 싫어진 아내는 남편에게 거짓말을 합니다. 사실 직업이 글을 쓰는 것이었기에 상황을 모면하는 거짓말을 순간 지어내는 것쯤이야 어렵지도 않은 일이었어요.

 

여자가 시선을 남자 쪽으로 돌려 대사를 잇는다.

 

여자 (눈물을 그렁그렁하며) 사실… 여기 있는 이 사람은 대학 시절 내 애인이야! 죽어도 나를 잊지 못하겠대! 그래서 이 나쁜 놈이 다짜고짜 찾아와서 나를 납치하고 감금하고 고문한 거야! (다시 관객을 향하여) 조율사는 당황합니다. 왜냐면 남편은 근육질의 외양에서 드러나듯 화가 치밀어오르면 앞뒤 없이 저질러버리는 타입의 다혈질이거든요.

조율사 (남자에게 멱살이 잡힌 채로) 사실 그렇게 생기지는 않았는데요.

여자 (조율사에게 쏘아붙이듯이) 왜냐면 남편은 겉보기에는 바싹 마른 자작나무처럼 희고 가녀리지만, 화가 치밀어오르면 앞뒤 없이 저질러버리는 타입의 다혈질이거든요! (다시 관객을 향하여) 당황한 조율사가 황급히 자초지종을 설명합니다.

조율사 (남자에게) 인류 역사상 많은 위대한 작가들은 실은 위대한 고통이 있었기 때문에 위대한 작품을 남길 수 있었습니다. 러시아의 위대한 대문호 도스또옙스끼는…

 

조율사의 말을 끊으면서 남편이 소리친다.

 

남자 (여전히 조율사의 멱살을 잡고 총을 겨눈 채 죽일 기세로) 개소리 집어치워! 이 또라이 정신병자 새끼야!

 

남자가 총을 쏜다. 조율사가 총을 맞고 쓰러진다.

 

여자 가엾은 조율사에게는 안된 일이었지만, 남편은 문학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습니다. 도스또옙스끼가 누군지도 몰랐는걸요. 그래서 조율사가 하는 말을 전혀 납득할 수가 없었죠.

 

쓰러진 조율사가 이번에는 꽤 아팠다는 듯이 총에 맞은 곳을 손으로 문지르며 일어난다.

 

조율사 아무래도 총이라는 소재가 적합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총 때문에 극적 갈등이 너무 쉽게 휘발되니까… (남자의 총을 힐끔 보며) 뭔가 좀 빨리 수정을…

여자 (뭔가 깨달았다는 듯) 아아아아… (다시 관객을 향하여) 사실 남편은 임관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초보 경찰이었습니다. 촉촉한 애기 피부에 붉은 생기가 돌 만큼 앳된 연하남이었거든요. 초보 경찰이 쏜 서투른 총알은 조율사의 귀 바로 옆을 휙 스쳐 지나갑니다.

 

남자가 총을 발사하고 총알이 조율사를 스쳐 지나가면서 방의 창문을 깬다.

조율사, 무대 뒤쪽으로 남자를 피해서 도망 다닌다. 남자는 조율사를 쫓는다.

 

여자 운이 좋은 조율사는 빗나간 총알 덕분에 자신을 설명할 시간을 좀더 벌 수 있었답니다.

 

결국 남자에게 붙잡힌 조율사가 열과 성을 다해 설명한다. 이때, 조율사는 입을 빠르게 웅얼거리지만 소리는 내지 않는 것으로 연기한다.

 

남자 (조율사에게) 거짓말하지 마! 지금 그 정신병자 같은 소리를 믿으라고? 당신이 무슨 능력으로 내 아내 이야기가 좋은 이야기인지 아니면 나쁜 이야기인지 판단할 수 있는데? 너 따위가 무슨 능력으로 그따위 일을 맡았다는 거야! 엉? 뭐, 니가 프로라고? 참… 어이가 없네… 야 이 새끼야. 니가 진짜 전문가면, 내 아내 이야기를 압도하는 그런 이야기를 지금 당장 내 눈앞에 떡하니 하나 만들어 놔봐, 이 새끼야.

 

남자가 완력으로 조율사를 끌어다가 의자 위에 강제로 앉히고는 조율사의 몸을 의자에 밧줄로 묶는다.

 

남자 (매듭을 묶으며) 시간은 딱 오분 주겠어. 오분 안에 이야기를 만들어내지 않으면, 널 그냥 정신병자 사기꾼으로 간주하고 (조율사의 머리에 총을 겨누며) 대갈통을 날려버릴 거야.

 

여자 조율사는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합니다. 사실 조율사는 프로도 아니고 전문가도 아니었습니다. 조율사의 자격증은 가짜였고, 그저 이야기를 좋아하는 아마추어 비평가에 불과했거든요.

 

의자에 묶인 조율사가 고민에 빠진다.

 

남자 (손목시계를 보며) 빨리 해라.

여자 조율사가 고민합니다. 그사이 마음에 여유가 생긴 남편은 부엌에 가서 아침에 내려뒀던 커피를 한잔 가져옵니다. 커피를 곁들여 조율사가 갓 지어낸 따끈따끈한 이야기를 들을 생각으로요. 그러나 남편의 마음은 이미 정해졌습니다. 조율사가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든, 그를 정신병자 사기꾼으로 간주하고 대가리를 날려버릴 생각이었습니다. (사이) 마침내 조율사가 입을 열고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조율사 (남자와 여자를 향해) 자 자… 두분 진정하시고… 제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세요. 제 이야기를 들어보시면 지금 상황이 오해라는 걸 금방 이해하실 겁니다. 너무 흥분하셨어요. 이것 참… 제 처지가 말이 아니네요. 미국에 이런 속담이 있죠. If the shoes fits, you must wear it! 신발은 신어봐야 그 주인을 알 수 있다 뭐 그런 말입니다. 제 처지가 꼭 그렇네요. 마치 꼭 도스또옙스끼가 된 기분입니다. 젊은 도스또옙스끼가 사형장에 서 있었을 때… 러시아 짜르가 만약 오분 안에 그대가 짐을 만족시키는 이야기를 지어낸다면 사형을 중지하겠노라! 하고 명했다고 칩시다. 제아무리 천하의 도스또옙스끼라도 오분 안에 짜르의 입맛에 맞는 이야기를 지어낼 수야 있었겠느냐 이 말입니다. 오분은 라면을 끓이기에도 충분치 않은 시간이니까요. (손으로 묶인 밧줄을 풀며) 그래도 정 제 이야기를 원하신다면… 이 자리에서 제 이야기를 한번 풀어보겠습니다.

 

조율사가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나 무대 위를 서서히 거닐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조율사 (관객을 향해) 옛날 옛날 먼 옛날에, 뉴욕 맨해튼이라는 도시에 완벽한 부부가 살았습니다. 부부는 모든 게 완벽했죠. 남편은 브래드 피트처럼 잘생겼고, 아내는 앤젤리나 졸리처럼 아름다웠습니다. 둘이 사는 아파트처럼 둘은 완벽했습니다. 기스 하나 없었거든요. 너무나 완벽했기 때문에… 둘은 삶에 생채기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남편과 아내는 서로를 묶고 때리고 상처 주는 행동으로 서로의 성욕을 채우며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남편은 여느 날처럼 아내를 의자 위에 앉히고 밧줄로 묶었습니다. 그리고 아내의 정강이 사이에 몽둥이를 끼우고 자극을 살며시 가하려던 참에! 갑자기 아침에 마시다가 부엌에 두고 온 커피가 생각난 겁니다. 그날따라 이상하게도 너무나 맛있게 내려진 커피였으니까요. 남편은 커피를 마시기 위해 부엌에 들어갑니다.

 

조율사의 이야기에 맞춰 여자는 의자 위에 다시 묶여 있고, 남자는 부엌으로 들어간다.

 

조율사 (관객을 향해) 그때 갑자기 부엌에서 총소리가 들립니다! 빵야!

여자 자기야, 왜 갑자기 하다 말고 총을 쏘고 그래?

조율사 (관객을 향해) 아내는 의자에 묶여 있어 아직 상황 파악이 잘 안 되었나 봅니다. 그러나 곧 누군가의 육중한 몸뚱이가 바닥에 쿵 하고 쓰러지는 둔탁한 사운드가 들려옵니다. 이윽고 아내의 발밑까지 피가 흘러나옵니다. 아내는 놀라서 비명을 마구 지릅니다!

여자 끼야아아아아악! 자기야! 무슨 일이야!

조율사 아내는 몸을 비틀어 빼냅니다. 남편은 아마추어여서 밧줄을 제대로 묶지는 못했거든요. 의자에 반쯤 묶인 채로 아내는 몸을 움직여 부엌으로 기어갑니다. 그리고 부엌에서 머리에 피를 흘린 채로 쓰러져 있는 남편을 발견합니다… 어리둥절한 아내는 생각합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아! 아내의 머릿속에 한가지 이야기가 번뜩 떠오릅니다. 아뿔싸! 부엌에서 커피를 따르던 남편이 실수로 허리춤에 차고 있던 권총을 바닥에 떨어뜨렸고 그 충격으로 총이 발사되었구나! 그래서 총알이 남편의 머리에 박혔구나…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아내는 어쩔 줄 몰랐지만 어찌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때, 누군가가 초인종을 누릅니다!

 

초인종이 울린다. 관객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던 조율사가 자연스럽게 무대 밖으로 나가며 대사를 이어간다.

 

여자 (울먹이며) 누구세요?

조율사 (명랑하게) 안녕하세요! 오늘 오후 두시에 방문하기로 한 조율사올시다. 문 좀 열어주시겠어요?

여자 조율사님! 지금 제가 문을 열어줄 수 있는 처지가 아니거든요? 거기 아래 번호키 보이죠? 비밀번호 840317 누르고 들어오세요! 빨리요!

 

조율사가 문을 열고 들어와서 충격적인 장면을 발견하고는 기절할 듯이 당황한다.

 

조율사 (뒤로 벌러덩 나자빠지며) 아이쿠야! 세상에나!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여자 빨리… 119에… 경찰에… 빨리… 아무 데나… 신고해주세요… 우리 남편이 죽어가요…

조율사 (관객을 향해) 그러나 조율사는 경찰에 신고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면 조율사는 거짓말로 사람들을 속여서 고문하고 다니는 사이코패스 범죄자였거든요. 그가 항상 품에 지니고 다니는 자격증이라는 것도 모두 위조였습니다. 모조리 거짓말이었죠! 조율사는 살인사건을 조사하러 경찰들이 들이닥치면 자신 또한 목격자로 출두해야 하고, 그러다보면 자기 신분과 그동안 해왔던 일들이 들킬까봐 두려워졌습니다. 그래서 조율사는 이야기를 하나 더 생각해냅니다. (여자를 향해) 에헴… 제가 보니까는요. 당신 남편은 실은 권총 오발 사고로 죽은 게 아닙니다. 자살을 한 거죠.

 

무대 서서히 암전

 

 

3장

 

1장의 사건이 일어나기 전날로 돌아간 것처럼 무대 위에는 1장과 2장의 흔적들이 모두 말끔하게 치워져 있다.

빈집에서 남자만이 백수처럼 누워 뒹굴면서 핸드폰 화면을 보고 있다. 초인종이 울린다. 남편이 부리나케 문을 열고 달려 나간다. 무대 안으로 조율사가 등장한다.

 

조율사 아이쿠, 사장님, 안녕하셨어요?

남자 예… 예… 뭐 인사치레는 제쳐두고 일단 거기 좀 얼른 앉아보시죠.

조율사 네, 그러시죠.

남자 이번에 내 아내가 쓰는 소설은 잘되어갑니까?

조율사 ‘나는 쌍뜨뻬쩨르부르그의 피아노 조율사’ 말이죠?

남자 네… 그 쌍뜨 어쩌구 하는 그 상놈의 것 말이에요.

조율사 잘되어갑니다. 곧 마무리 단계구요. 아시다시피 저도 이 분야에서 재능이 탁월한 편이고, 그건 사모님도 마찬가지죠. 서로 재능 있는 사람끼리 만났으니 훌륭한 결과물이 나오는 게 당연하지 않겠어요? 저도 이번만큼 제 일에 보람을 느낀 적은 처음입니다. 사모님을 제 손으로 고문할 때마다 창작의 전율이 막대기를 타고 제 손까지 전해진다고나 할까요?

남자 뭐… 그런 건 아무래도 다 좋은데… 그래서 이번엔 얼마나 팔릴까요?

조율사 그건 저도 확답을 드리기가 어렵네요. 소설의 작품성과 소설의 판매량 사이에는 상관관계가 뚜렷하지 않거든요. 그래도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사모님께서 그동안 쓰셨던 작품들 중에 가장 좋은 게 나올 것 같다는 거죠. 물론 작품성 측면에서요.

남자 작품성… 같은 헛소리는 우리 다 집어치우고… 지금 우리 가족이 필요한 건 당장 돈 많이 벌어다 주는 소설이다 이 말이에요. 거… 까놓고 말합시다. 돈이 필요합니다. (잠시 망설이다가) 그동안 아내가 책 팔아다 벌어온 돈을 끌어다 비… 비트코인을 좀 샀습니다. 솔직히 엊그저께만 해도 자고 일어나면 세상에, 가격이 두세배씩 막 뛰는데… 솔직히 안 사는 게 바보였잖아요? 초반에는 돈 좀 불려서 여기 아파트까지 오는 데 보탰던 거고… 그런데 지금은… 뉴스에서 워낙에 떠들어싸서 말 안 해도 다 알겄지만은… 전부 거품처럼 사라졌어요. 리플 한개에 사천원일 때 들어갔는데 지금은 삼백원입니다, 삼백원…

조율사 사모님께서도 그 사실을 알고 계시는가요? 어쩌면 사모님께 솔직하게 말씀드리는 게 도움이 될지도 모르죠. 러시아의 위대한 대문호 도스또옙스끼도 일부러 도박으로 재산을 거품처럼 날려버렸죠. 삶의 위대한 고통에서 위대한 예술이 나오거든요.

남자 (말을 끊으며) 도스토인가 토스트인가 그 지겨운 러시아 이름은 좀 집어치우라니까요. 난 평생 소설이라고는 거들떠도 본 적도 없는 사람이에요.

조율사 사모님이 모르신다는 말이군요.

남자 그걸 왜 말합니까? 아이고… 요즘도 글 좀 쓴다고 얼마나 유세를 떠는데. 얼마나 예민하게 구는지… 집에서 손가락 하나 까닥 안 하고… 무슨 완두콩 요정이랑 사는 기분입니다.

조율사 그래서 사장님께서 원하시는 게 뭐죠?

남자 이번 달에… 내 아내를 고문하는 양을 늘려주시오.

조율사 고문하는 양을 늘려달라구요?

남자 아내가 고문을 받으면 받을수록 글을 더 잘 쓰는 거 하나는 나 같은 문외한도 알고 있습니다. 예전에 쓰던 거랑 뭐가 다른지는 통 모르겠지만… 당신이 오고 난 다음부터 글로 돈 벌기 시작한 건 사실이니까… 어… 이보슈… 조율사 양반. 만약 이번 달 고문량을 두배로 늘려주면 내가 따로 사례를 따블로 쳐주겠습니다. 어때요?

조율사 사장님, 저는 프로입니다. 비전문가들 눈에는 대충 내키는 대로 주리 트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는데, 철저하게 계산하고 배운 대로 고문량을 측량하는 거죠. 무엇보다도, 따로 의뢰받아서 고문량을 늘리는 건 국제조율사연맹의 윤리 강령에 어긋나는 행동입니다. 죄송합니다, 사장님.

남자 하… 그딴 게 뭔지는 모르겠는데… 그러면 아무튼 내 아내한테 고통을 주기만 하면 된다는 거 아냐? 만약에 내가 내 아내한테 좀 못되게 굴거나… 아니면 더 심하게는 손찌검을 한다고 칩시다. 그거랑 당신이 막대기로 하는 그 짓거리랑 뭐가 다른 건데?

조율사 고통은 살덩이로만 오는 게 아니죠. 진짜 고통은 피부를 넘어서 뼈 마디마디를 타고 영혼 가장 깊숙한 곳까지 플로리다 전기뱀장어처럼 짜릿하게 파고듭니다. 메이저리그 에이스 투수가 던진 최고의 슬라이다가 포수 미트에 좌르르륵 꽂히듯이요. 사장님이 그런 식으로 만드는 억지 고통은 절대로 사모님께 좋은 자극이 될 수가 없습니다.

남자 그럼… 뭘 어떻게 해야 되는 거요?

조율사 사실… 별다른 방법은 이제 더 없습니다.

남자 아니, 당신도 이거 직업이잖아. 안 그래?

조율사 전문직이죠.

남자 직업이라면… 그… 증권사 펀드매니저들이 고과 평가받는 것처럼 객관적인 수치 같은 게 있을 거 아냐? 어떻게든 고객한테 수익률 왕창 뽑아내면 당신한테도 좋은 거 아니냐고, 어?

조율사 저는 고작 돈 좀 벌자고 이 일을 하는 게 아닙니다. 제 나름의 원칙과 철학이 있죠.

남자 끝까지… 아주 세상에서 지만 제일 고상한 놈처럼 구는 건 내 아내랑 똑같구만그래. 그래요. 내가 욕심 많은 놈인 거 다 인정합니다. 인정한다고. 아니, 그래도 돈도 못 벌고 살림도 못하는 문창과 여자랑 결혼한다 했을 때는… 나요, 욕심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거 하나는 알아줘야 됩니다, 그거는요. 그거 알아요? 아내는 할 줄 아는 게 책 읽는 거랑 피아노 치는 거밖에 없었어요! 돈은 내가 벌어서 먹여 살린다 했는데… 애들 장난인가 싶던 아내 글이 대박 난 거지! 난 그게 뭔지도 모르겠는데! 처음에 비트코인 대박 났을 때도 똑같았어… 근데 뭐 어쩌겠어. 이미 펑펑 쓰는 데 적응이 되어버렸는데…

조율사 (잠시 망설이다가) 그러면 이건 어떨까요?

남자 뭐 말이오?

조율사 (유쾌하게) 사장님께서 사모님 앞에서 권총으로 자살을 하는 겁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자살을 하는 것만큼 묵직하고 깊은 맛이 우러나오는 고통은 없죠. 특히 그 사람이 여전히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는 경우에는 더욱이 말이에요.

남자 나보고 자살을 하라고? 이거… 보자 보자 했더니 완전 또라이 새끼네…

조율사 진짜로 자살하라는 게 아닙니다. 자살하는 척 연기만 하라는 얘기죠. 그러고 나서 사모님이 소설을 다 끝내셨을 때 다시 나타나시면 됩니다. 충분히 사실인 것처럼 꾸며낼 수 있어요.

남자 그게 된다고?

조율사 제가 충분히 조율해낼 수 있습니다. 프로 조율사니까요. 저도 사모님 이번 작품이 어디까지 나올 수 있는지가 참 궁금해서요… 사모님께서 가장 애착을 느끼는 장소가 어디일까요? 두분이 같이 자는 침실? 아니면 샤워를 하는 욕실?

남자 음… (잠시 고민하다가) 아마 부엌일 거 같소… 내가 요리하는 걸 좋아해서… 주로 아내에게 요리해주는 곳이 거기니까… 오늘 아침만 해도 스크램블에그에 베이컨과 소시지를 구워서 블루베리잼과 크림치즈를 바른 베이글에 연어를 끼워서 아침상을 거하게 차려줬죠. 아내 입맛에 맞게 스크램블에그는 좀 걸쭉하게, 베이컨은 살짝 태워서.

조율사 그럼 아마 이 부엌이 가장 행복한 장소겠군요.

 

남자와 조율사가 천천히 부엌으로 다가간다.

 

조율사 여기쯤이 좋겠군요.

 

남자가 마침 부엌에 놓여 있는 커피포트에 커피가 내려져 있는 것을 발견한다. 컵에 커피를 따라서 한모금 마시더니, 앞에 사람을 두고 혼자만 마시는 게 머쓱했던지 조율사에게 묻는다.

 

남자 커피 좋아해요?

 

총소리와 커피포트 떨어지는 소리가 울리며 무대 서서히 암전.

 

 

4장

 

조명이 다시 서서히 밝아지지만 1장에서만큼 밝지는 않다. 저녁 어스름이 깔린 시간이다.

무대는 1장과 동일한 장소이지만 미묘하게 달라져 있다. 1장에서 무대를 고급스럽게 보이게 했던 여러 오브제들이 사라지거나 고장 나 있거나 혹은 낡은 것으로 대체되어 있다. 특히 피아노는 거미줄이 끼고 먼지가 잔뜩 앉아 더이상 연주될 수 없을 것처럼 보이면 좋겠다.

무대 한쪽 구석에는 부엌이 있다. 남자가 흘린 피와 깨진 커피포트에서 흘러나온 커피로 바닥이 얼룩져 흥건하다.

의자에 묶여 있는 것은 조율사이다. 조율사는 이미 여러차례 주리가 틀린 듯 온몸에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머리가 헝클어져 있고 양복은 군데군데 찢겨 있다.

 

조율사 그래서 모든 게 그렇게 된 겁니다.

여자 지금 나보고… 그 얘기를 믿으라는 건가요?

조율사 믿고 말고는 듣는 사람에게 달린 문제죠.

여자 거짓말하지 마! 어서 바른대로 더 고하지 못해!

조율사 이… 이야기는 이미 다 끝났습니다. 제 입을 다 떠났어요. 낙장불입, 아시죠?

여자 내 남편은 그럴 사람이 아니야!

 

여자가 사정없이 조율사의 주리를 튼다. 조율사가 비명을 지른다.

 

조율사 (고통스러워하며) 아이고… 더이상 나올 이야기 이제 진짜로 없으니까… 아이고… 이제 고만 좀 틀어요. 이러다 죽겠습니다… 진짜…

 

여자가 고문을 멈춘다.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처럼 의자 위에 묶인 조율사의 머리가 맥없이 축 늘어진다. 여자가 비틀비틀 몸을 움직여 간신히 책상 위에 앉는다.

여자가 홀린 것처럼 타자기에 무언가를 쓰기 시작한다. 여자는 타자를 치다가 멈추고 다시 조율사에게 말을 건넨다.

 

여자 근데… 이 이야기가 만약 하나도 사실이 아니라면… 전부 거짓말이라면 누가 책임을 지지? 국제조율사연맹에서 관련자가 책임이라도 져요? 아니면 누군가가 문책이라도 받냐구요.

조율사 그건 나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 완전히 사실인 게 어디 있겠습니까? 지금 이 아파트만 해도 그렇죠. 지금이야 이렇게 살아 숨 쉬는 것처럼 눈앞에 생생하지만 언제든 거품처럼 사라질지도 모릅니다. 피아노 연주해보셔서 아시잖아요? 피아노 건반을 두들기면 음악이 나오죠. 그건 있는 건가요, 없는 건가요? 사실인가요, 아니면 사실이 아닌가요?

 

이때 아파트의 초인종을 누르는 소리가 울려퍼진다.

 

남자 여보! 나 왔어. 문 좀 열어줘. 오늘은 일이 평소보다 좀 일찍 끝났어. 대박이지?

 

여자가 문을 열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인다.

 

남자 (문을 두들기며) 뭐 해? 빨리 좀 열어줘. 갑자기 우리 집 비밀번호가 기억이 안 나네. 마지막이 뭐였더라?

 

남자가 여러차례 비밀번호를 시도해보지만 문을 열지 못한다.

 

조율사 남편분이랑 저랑 마주하게 된다면… 제가 들려드린 이야기가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할 수 있겠죠. 저를 보내주시면 영영 확인할 방법은 없는 거구요.

 

여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 고민한다. 고민하다가 결국 조율사가 묶여 있는 의자의 밧줄을 떨리는 손으로 풀기 시작한다. 조율사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다. 여자, 남자가 들어오도록 문을 열어준다.

남자가 여유롭게 무대 안으로 등장하고 조율사가 비틀거리면서 무대 밖으로 퇴장한다.

 

남자 (무대 안으로 들어오며) 조율은 잘 끝났어? 오랜만에 하나 들려줘. 좋은 곡으로.

 

남자와 조율사가 서로를 알아보았는지 아니면 알아보지 못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은 상태로 무대 서서히 어두워지고 타자기를 두드리는 소리와 피아노를 연주하는 소리가 뒤섞여 들려오면서. 막.

 

 

 

심사평

 

희곡부문 응모작들의 소재는 다양했다. 소재는 다양했지만 인간에 대한 통찰력이 돋보이거나 개성있는 작품은 드물었다. 응모작 56편 중 「안다 말내 드씀 니립」 「섬」 「릴리와 데이지」 「비틀거리다가 캥거루를 쳤어」 「주리」 5편이 본심 대상이었다.

「안다 말내 드씀 니립」은 평범한 인간관을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인간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그러나 장기분실물을 폐기하기로 했다는 설정 하나만을 가지고 이야기를 끌고 가기에는 조금 부족했다. 또 진부하다 싶은 설정에 예상되는 결말을 갖고 있었다. 지금처럼 인간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시선을 지니고 있다면, 앞으로 좋은 소재를 만났을 때 탄탄한 작품을 쓸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섬」은 미성년자 성매매를 일상 차원에서 다룬 것이 흥미로웠다. 제2장에서 ‘은비’라는 새 인물이 투입되는 것도 신선했다. 그러나 개성있는 전개에 비해 극중 인물들이 상투적이라는 점과 인물들의 대사가 대부분 비슷하다는 것이 아쉬웠다. 극중 인물들이 구사하는 대사에 대한 고민이 뒷받침된다면 좋은 작품을 쓸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릴리와 데이지」는 한국이 아닌 듯한 배경이 나온다. 이 작품은 삶과 죽음을 표현하는 방식이 덤덤했다. 오히려 표현하는 방식이 덤덤했기 때문에 읽으면 읽을수록 인물들의 내면에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었다. 그러나 번역극 같다는 생각이 드는 동시에, 대사 또한 번역체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별한 사건 없이도 이야기를 꾸려나가는 솜씨는 분명 장점이었다.

결국 심사위원 두명은 「비틀거리다가 캥거루를 쳤어」와 「주리」를 두고 최종 논의를 하기로 결정했다.

「비틀거리다가 캥거루를 쳤어」는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간 청년의 모습을 사실감 있게 그렸다. 첫 장면부터 마지막 장면까지 단숨에 읽히는 매력적인 작품이었다. 소재와 대사도 흥미로웠다. 또, 이 작품을 무대 위에 올리는 상상을 해보았다. 공간과 인물, 음향까지. 그런데 그 상상에서 마땅한 답을 찾지 못했다. 하지만 이 작가가 이만한 대사와 지문을 쓰는 문장력을 갖추기 위해 얼마나 숱한 시간을 습작해왔을까? 그 열정에 따뜻하게 등을 두드려주고 싶었다.

「주리」는 자의적인 전개를 펼치는 작품이었다. 그런데 그게 묘한 매력으로 읽혔다. 왜 하필 작품의 제목이 ‘주리’일까? 죄인의 두 다리를 묶고 다리 사이에 두개의 주릿대를 가하는 형벌이라는, 주리를 튼다는, 그때의 주리란다. 이야기 속에 또다른 이야기가 들어 있는 것도 흥미로웠다. 1장부터 4장까지의 구성력 또한 단단한 매우 개성있는 작품이었다.

심사위원 두명은 「주리」를 당선작으로 정했다. 이 작품이 지닌 개성에 손을 들어주기로. 당선자에게 마음을 다해 축하를 전한다. 희곡을 쓴다는 일은 참 고단한 일이지만, 부디 앞으로 정진해주길 바란다. 응모해주신 다른 분들에게도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성기웅 윤미현

 

 

 

당선소감

 

꽤 오랫동안 마음 한구석에 얼음덩어리 하나가 꽉 박혀 있는 기분이었는데, 얼음조각으로 빚는다고 이리저리 주물주물 만지작거리다보니 저도 모르는 사이에 슬그머니 사라졌습니다. 왜 안똔 체호프가 「갈매기」를 코미디라 칭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었는데, 어느날 「갈매기」를 읽다보니 갑자기 뜨레쁠레프가 우스워 보였습니다. 스스로는 햄릿처럼 진지한데 거리를 두고 보니 어릿광대처럼 우스꽝스러웠습니다. 내가 고민이라고 부르던 놈도 별반 다르지는 않았겠구나 하는 깨달음이 스치자 태산같이 커 보이던 고통이 티끌처럼 작아 보였습니다. 단막극 「주리」는 그런 고민에 대한 고민들이 누적된 결과물인 것 같습니다.

학교에서 연극을 좀더 하고 싶었는데 이제 연극을 더는 할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을 때 희곡집을 읽는 데 재미를 붙였습니다. 저에게 희곡집을 읽는 것은 머리에 가상현실 기계를 쓰는 것 같은 체험이었습니다. 세상에 그 어떤 양식의 글보다 희곡집을 읽는 게 더 재밌었습니다. 공기업 A매치를 준비하는 사람들의 틈바구니에 껴서 늙은 나무 밑둥처럼 우두커니 걸터앉아 찬찬히 희곡집을 읽고 또 읽다보니 문득 이런 꿈도 꾸었었습니다.

 

이 몸이 졸업하여

무엇이 될꼬 하니,

먼지 앉은 책장 위에

한권 희곡집 되어,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하리라.

 

귀하고 영광스러운 지면에 자리를 마련해주신 대산문화재단과 창비 출판사, 그리고 심사위원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첫 타석에 멋모르고 힘껏 휘둘렀는데 빗맞은 공이 담장을 넘어간 격으로 과분한 큰 상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더 좋은 글을 쓰라는 채찍으로 알고 희곡을 쓰고 또 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재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