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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박하빈 朴荷彬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4학년. 1994년생.
mintvin@naver.com
* 이 글은 최은영의 소설집 『쇼코의 미소』(문학동네 2016) 『내게 무해한 사람』(문학동네 2017)과 안희연의 시집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창비 2015)의 수록작을 대상으로 한다.
이제는 남겨진 당신의 얼굴을 마주할 때
1. 얼굴의 숨겨진 표정
얼굴을 본다는 것은 단지 한 사람을 마주하는 일만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얼굴 아래 깃든 표정을 읽는 일, 표정 아래 감추어진 무수한 시간의 행적을 좇는 일이다. 누구나 한번은 타인을 마주한 뒤 잔상처럼 남은 얼굴에 붙들려본 일이 있을 것이다. 그럴 때 타인의 얼굴은 표정으로만 기억되지 않고 시공간을 압도하는 하나의 영역으로 우리의 의식을 지배하며 언제고 “불쑥불쑥 방문을 열고 들어”(안희연 「백색 공간」 10면)와 불현듯 우리 앞에 또 하나의 세계를 펼쳐놓는다. 한참이나 서 있던 그가 사라지고 나서야 그의 얼굴이 더 많은 표정을 갖고 있었음을 알게 되는 것처럼 우리는 이때의 세계가 흰 종이같이 비어져 있는 것이 아닌, 무한한 가능성으로 채워진 곳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최은영의 작품 속 인물들은 어떤 오해나 사건 앞에서 구구절절 이야기를 늘어놓거나 묻지 않고 얼굴을 본다. 이들에게 얼굴을 바라보는 일은 “미끄러지면서/계속해서 미끄러지면서” 끊임없이 타인의 “내부로 들어”(안희연 「백색 공간」 64면)가기 위한 시도다. 최은영의 소설에서 종종 발견되는 얼굴은 안희연의 시에서도 “그리다 만 얼굴”(「백색 공간」 10면)로 더 많은 표정들을 지니고 우리와 마주치게 된다. 얼굴과의 만남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물을 만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차원을 열어주는 행위다.1 타자는 나로부터 완전한 초월성과 외재성을 지니고 있기에 친밀한 관계라 하더라도 결코 서로에게 용해되지 않는다. 타자의 얼굴은 그와 마주한 이만이 아닌 다른 모든 사람과 결속되어 있는 무한한 형태로 현현되며 우리의 삶에 개입한다. 상처받을 가능성, 외부적인 힘에 대한 저항의 불가능성을 내포한 타인의 얼굴은 그 자체로 호소력을 지니고 있기에 우리는 그의 표정을 헤아리게 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때껏 많은 얼굴을 마주하고 지내왔으며, 많은 얼굴을 한곳에서 마주할 수밖에 없는 일을 겪기도 했다. 바다 아래로 세월호가, 수백명의 목소리가 허망하게 잠기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슬픔과 비통한 마음을 안고 광장으로 나가 서로를 만나게 되었다. 그후로도 더 나은 세계를 다시 꿈꿀 수 있길 바라며 염원의 노래를 부르기 위해, “어두운 쪽에서는 밝은 쪽이 잘 보이”(최은영 「손길」)므로 부디 이 빛이 더 잘 보이길 바라는 마음으로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섰다. 광장에서 마주한 이들의 얼굴에 슬픔이 깃들 때, 우리는 그 슬픈 얼굴을 보느라 그 안에서 서로 미세하게 다른 표정들을 하고 있음을 살펴보지 못했다.
이들의 모습이 투영된 작품은 ‘연대’라는 긍정적인 가치에 집중해, 수많은 사람이 모였다는 것에 가장 큰 의의를 둔 해석들로 논의되어왔다. 물론 끝내 함께하여 어둠을 밝혀낸 연대의 가치와 의미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스름이 어느 정도 걷히고 난 이제 우리가 읽어내야 하는 것은 모임이 아닌, 모여 있는 동안의 무수한 고투와 그 사이로 끼어든 “몸을 벗듯이 색색의 모래들이 흘러내리는 벽”이 아닐까.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고 믿었던 이들 사이로 생겨난 벽이 무엇이었는지 확인해보아야 하며 그러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렇게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나의 두 손으로 너의 얼굴을 가려보”(안희연 「파트너」)는 것뿐이다. 이렇게 감춘 얼굴은 아직 짓지 않은 타인의 무수한 표정들을 헤아려보며 “몸이 바닥 쪽으로 기울 때 한꺼번에 쏟아지”기를 자처해 “바닥으로부터 다시 몸을 일으키는 동작”을 통해 타인에게 무해한 방식으로 “나의 최대치가 되어”(안희연 「러시안룰렛」)볼 수 있게 만든다. 그러나 무해한 방식은 자칫 타인에 대한 거리감을 지레 형성하여, 또 하나의 벽을 만드는 일이 되기도 한다. 안희연과 최은영의 작품에서는 이러한 ‘벽’의 현전이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나는 것을 찾아볼 수 있다. 이제는 벽에 감춰진 겹겹의 얼굴을 살펴보아야 할 때이다.
2. 사라졌다고 믿는, 사라지지 않는 벽
안희연과 최은영의 작품에서 벽은 타인의 얼굴이 된다. 다시 말하자. 타인의 얼굴은 종종 가닿을 수 없는 거리감을 느끼게 만드는 벽의 모습으로 인물 앞에, 우리 앞에 나타난다.
그는 모자를 벗는 척하면서 얼굴을 벗고
벽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들 앞에 하나의 벽이 놓인다
(…)
우리를 가로막은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끝없이 미끄러지는 음계를 통해서
나는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성대 잘린 개들을 위한 발성법
빛이 한 사람을 어디까지 망가뜨릴 수 있는지……
—안희연 「트릭스터」 부분
타인이 얼굴을 벗을 때, 우리가 이야기를 시작할 때 생겨나는 것은 벽이다. 벽이 있고, 그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한 뒤에 그들 앞에 생겨나는 “하나의 벽”의 배치에 주목해야 한다. 안희연의 시에서는 벽의 이미지가 빈번하게 삽입된다. 예컨대 「벽」에서는 벽이 계단을 감추고 있으며 「포르말린」에서는 춤을 추고 있는 우리의 상(相)이 벽에 비쳐 목격된다. 위의 시편에서 안희연은 또다시 “벽 이야기를 시작한다”. 여기서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벽이 아닌 벽의 ‘시작’이다. 벽은 단지 무언가를 가로막는 대상이 아니라 그 너머에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는 상상을 동반한다. 비가시화된 영역인 타자와 나의 간격은 주체의 인지를 통해서만 이미지로서 가시화되어 나타난다. 벽 너머에 있는 타인(의 얼굴)은 그 살갗 자체로 나를 “가로막은 것”이자 결코 주체에게 종속되지 않는 절대적인 존재다.
두 작가의 첫 작품집 해설은 공통적으로 서로가 한데 있어 생겨난 연대와 그 안에서 형성된 윤리적 실현(가능성)에 주목했다. 안희연 시집 해설(김수이)의 경우 수평적 구도의 ‘옆’의 존재론에 주목하면서 이들이 생산적인 방향으로만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수동적이고 기계적인 기존 세계의 부정적인 운동성까지도 내포하고 있으나, 비록 실패할지언정 연대의 함께하고 있음 그 자체로서 의의와 가치를 지닌다고 밝힌다. 그러나 바로 그 ‘옆’에 무엇이 자라나고 있는지를 미처 확인해보지 못한 것 같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안희연과 최은영의 작품 속 화자 및 인물들은 자신의 옆에 있는 이들에게서, 타인의 얼굴에서 벽을 발견할 줄 아는 이들이다. 동시에 이들은 자신 역시 누군가에게 타인이기에 자신의 얼굴 또한 벽이 될 수 있음을 안다. 비가시화된 연대의 틈을 보여주는 최은영의 서사는 안희연의 ‘벽’의 이미지와 함께 더욱 첨예한 ‘연대’의 형상으로 그려질 수 있기에 둘의 작품은 동시대 안에서 같은 주제를 공유하며, 화소를 상호 보완해준다.
최은영이 그리는 인물들은 행위 안에서 나와 타자 사이에 벽 같은 것이 놓여 있음을 감지한다. 이토록 민감한 시선을 가진 인물의 등장은 등단작 「쇼코의 미소」(이하 『쇼코의 미소』)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소유는 쇼코와 자매학교 행사를 통해 만나 자신의 집에서 함께 지내며 그의 얼굴에서 꾸며낸 부끄러움과 상대를 편하게 해주려는 포즈를 발견한다. 이후 소유는 쇼코에게 호감을 느끼고 동네의 천변을 걷다 팔짱을 끼기도 하는데, 이는 관계에서 형성된 유대감과 친밀감에 서로 거리가 좁아졌다고 믿으며, 일시적으로 상대방의 일부를 장악하고 향유한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지는 이가 취하는 표정이자 자세다.
여름
우리는 아름답게 눈이 멀고
그제야 숲은 자신의 호주머니 속에서
눈부신 정원을 꺼내주었던 것입니다
색색의 꽃들 아름다워 손대면
검게 굳어버리는 곳
아이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멀찌감치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습니다
아니 거기서 무얼 하고 계세요 왜 그런
굴러떨어질 것 같은 얼굴을 하고 계세요
무심코 둘러보았는데
모두들
자신을 꼭 닮은 돌 하나를
말없이 닦고 있었습니다
—안희연 「돌의 정원」 부분
얼굴이 벽임을 아는 인물들에게도 “아름답게 눈이 멀”었다고 믿으며 타인이 내게 “눈부신 정원”과도 같은 세계를 꺼내 보였다는 착각의 순간은 예외 없이 일어난다. 이는 종종 타인을 이해했다는 인식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타인의 얼굴은 이해되거나 어떠한 인식의 매개가 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빛’이 있을 때 우리의 시야에 들어와 일시적인 현전으로 포착될 뿐이다. 얼굴은 무방비한 상태로 드러나는 것처럼 보이나, 외부로부터 빛이 투사되기 전에도 의미를 지니고 있기에 이미 헤아릴 수 없는 무한과 초월을 내재하고 있다.2
쇼코는 이후 소유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다 커버린 어른이 유치한 어린아이를 대하는 듯한 웃음”(14면)으로는 단정 지을 수 없는 보다 다층적인 얼굴을 드러낸다. 펜팔 중에 돌연 연락이 끊기고 나서 몇년 뒤 소유는 일본으로 찾아가 오랜만에 직접 쇼코를 만나고 “어린 시절에는 차갑고 어른스럽게 보이던 그 웃음에서 (…) 쇼코의 나약하고 방어적인 태도를 읽”는다. 소유는 “이상한 우월감에 휩싸”(26면)여 쇼코의 할아버지 간병과 진학 문제를 건드리며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27면)는다. 우리는 자주 타인의 얼굴을 마주하고 있다는 관계성, 유대감만을 천착해 타자의 내밀한 부분에 침입하고야 말며 뒤늦게 무언가 “검게 굳어버리는” 것을 느끼곤 한다. 소유는 자신을 향한 미소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남은 쇼코의 모습에서 “익숙한 뒷모습”(안희연, 인용시)을 본다. 뒷모습만 보고도 낯이 익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후 또 한번의 만남을 갖게 될 둘을 잠시 여기에 두고, 실로 오랜만에 재회하고도 한눈에 서로를 알아본 이들을 먼저 본다.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에서 죽은 순애는 해옥의 병실에 날개를 달고 찾아온다. 이렇게 성사된 만남인지라, 혹은 이렇게 성사된 만남이기에 “껍데기는 할머니들이 다 됐”(98면)는데도 이들은 서로를 알아볼 수 있다. 젊은 시절 순애의 남편이 국가의 억압하에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반동분자로 낙인찍히면서 해옥은 “처음에는 순애 이모와 형부를 위해서였지만 나중에는 끌리듯이”(108면) 기도회에 나간다. 순애의 남편은 고문을 당한 뒤 수감되고 나머지 이들은 사형을 당했다는 사실을 안 해옥은 “조용히 눈물을 흘렸고 그 일에 대해서 영원히 입을 다물”고, 세상에 대한 이해 불가능함은 “도저히 뚫고 들어갈 수 없는” “단단한 벽”(109면)으로 나타나 해옥을 침묵하게 만든다. 이러한 침묵의 벽을 깨뜨린 사람은 같은 회사에 다니는 남자다. 해옥은 그의 어머니가 전쟁 막바지에 이르러 살아남은 것을 두고 평생 죄의식을 품고 살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뒤 그와 혼인신고를 한다. 아무 일도 하지 않았기에 세상에 가담하였다고 생각하며 차가운 얼굴로 살아온 그와 해옥의 결혼은 삶의 불확실성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불확실한 삶은 나와 타자 모두에게 해당한다. 인간은 모두 외부의 폭력에 노출되어 취약성을 지니며 살아간다. 나라는 존재는 타자와의 접촉 속에서 타자를 포함하며 형성되기에 나의 얼굴과 피부는 타인으로부터 영향받을 수밖에 없는 취약성을 담보로 한다.3 고로 타인과의 관계 안에서 형성된 표정이며 시간들은 자연스레 나의 얼굴에 담기며, 나를 구성한다. 그렇게 나를 구성하는 이질성이 나와 타자들의 윤리적 관계를 출처로 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순애에게 매정하게 굴던 할머니와 동료들과 관계를 맺은 해옥은 자신의 생활이 안정될수록 순애에게 조금씩 부담을 느끼고, 그들이 그랬듯 순애를 냉정하게 대하기에 이른다. 해옥은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순애의 집에 방문하여 그의 삶을 비로소 바라본다. 오랜 시간 해옥을 눈물 흘리게 만들었던 순애의 남편은 고문의 후유증으로 해옥의 치맛단을 오줌으로 적시고, 이에 순애는 해옥에게 갈아입힐 옷가지가 없는 것에 대해 사과하면서도 “항상 이렇게 사는 건 아니”(120면)라며 해옥을 떠나보낸다.
“죽음 직후에 사람의 영혼이 멀리 떨어져 있는 소중한 사람을 보러 간다”(120~21면)는 것이 비단 소설 속 이야기만이 아니라면, 예측 불허한 것이 삶이라고 거듭 말해도 좋지 않을까. 해옥은 어쩌면 용서받지 못했을지 모르는데도 자신을 찾아온 순애의 딸을 보고 이전같이 쉽게 연민하지 않는다. 눈물을 흘리지도 않으며, 그저 순애의 이름을 속삭일 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해옥의 이런 변화 또한 타자와의 관계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타자와의 만남은 귀환 불가능한 자아의 변형을 초래한다.4
연민은 고통받고 있는 자의 얼굴을 지켜보며, 상상적 동일시를 통해 그의 고통을 내가 체험했다고 착각하는 데에서 발생한다. 너무 많이 참느라 무표정해 차가워 보이기까지 하는 얼굴을 한 남편의 모습은 상상적 동일시를 성립 불가능하도록 이끈다. 이는 균열을 촉진하고, 그렇게 벌어진 틈 속에서 나와 타자의 거리감은 더욱 선명해진다. 이러한 간격은 내가 상대에게 의미를 부여하고, 동일시하려고 했던 행위에 이의를 제기한다. 그렇기에 우리의 반응은 “그의 얼굴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의 말을 듣는 것, 그의 말에 응답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5 얼굴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말에 가깝다.
그렇다면 소유가 쇼코의 모습에서 본 익숙한 뒷모습은 자신의 얼굴이자, 자신이 보았던 수많은 이들의 얼굴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도 같다. 자신의 할아버지에게 무정히 대하며 소유를 응대하던 쇼코의 얼굴부터 부모에게 한창 투정을 부릴 나이에 삼촌의 가게에 나가 일을 돌봐야 했던 소유의 할아버지, 보이지 않는 증상으로만 아픈 엄마, 이처럼 “슬픔을 억누르고 억누르다 결국은 어떻게 슬퍼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사람”(48면)의 얼굴들이 겹겹이 포개어진다. 다시 재회한 쇼코와 소유는 그간의 일들에 대해 구구절절 말하지 않으며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부러 무언가를 더 함께하려 하지도 않으며 위로하거나 사과의 말을 건네지도 않는다. 사람이란 “서로를 쓰다듬을 수 있는 손과 키스할 수 있는 입술이 있는데도, 그 손으로 상대를 때리고 그 입술로 가슴을 무너뜨리는 말을 주고받”(「모래로 지은 집」, 『내게 무해한 사람』 179면)는 것을 아는 이들이기에. 「돌의 정원」에서 보았던 이 언제고 “굴러떨어질 것 같은 얼굴”들은, “자신을 꼭 닮은 돌”이자 “나를 해치는 돌덩어리”(같은 곳)다. 언제고 자신이 벽이 될 수 있음을 아는 이들은 상대의 감정에 쉽게 동조하거나 연민하지 않는다. “몸은 약간 떨어져서 팔로 서로의 등을 두르는 식의 포옹”(「쇼코의 미소」 64면)만을 나눌 뿐이다.
3. 모래알의 커뮤니티
모래는 무언가를 쌓아 형상을 만들기 위한 최소한의 입자다. 벽을 만들 때에도 모래가 필요하며, 반대로 벽이 된 “자신을 꼭 닮은 돌”은 깨뜨리면 모래가 되어버린다. 모래로 만들어졌기에, 이 벽은 다시 모래로 흘러내릴 수 있다. 이렇게 모래의 형상은 분명히 존재하면서도 무한한 형태로 모습을 바꾸기에 마치 사라진 것 같은 오묘한 인상을 준다.
기억은 우리의 현재 속에서 그 흔적이 발견되는데도 잡힐 듯 잡히지 않고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 최은영의 대다수 작품들은 회상의 형식을 띤다. 소설의 일반적인 기술법대로라면 회상은 인물의 주요 정보를 드러내는 것으로 중간에 삽입되어야 정석이겠으나, 최은영은 그러지 않고 어느 지점까지 이야기를 전개시킨 뒤에야 지금까지의 장면들이 모두 화자의 회상이었음을 밝힌다. 그러나 이러한 최은영식 과거 회상은 무의미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모래의 입자들이 뭉치지 않고 한알 한알 떨어져 있듯, 현재와는 거리를 두면서도 분명히 현재와 현재의 인물을 구성하고 있는 기표들로 섬세하게 만들어진 회상이기 때문이다.
「모래로 지은 집」(이하 『내게 무해한 사람』)에서 공무와 모래, 나비는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천리안의 ‘B고등학교 99년 입학생 모임’이라는 동호회를 통해 만난다. 셋은 동호회 폐쇄 직전 정모나 한번 하자는 공무의 제안으로 셋만의 모임을 가진다. 그들의 관계는 MSN 메신저에 채팅방을 만든 모래의 노력으로 지속된다. 이후 셋의 새로운 커뮤니티는 “모래가 틀어놓은 음악”(112면)으로, 공무의 카메라에 담긴 “어떤 사진이 공무의 것인지, 모래의 것인지”(169면) 정확히 알 수 없고, “화소가 충분하지 않”으며 때로는 “사람의 형태만 분간할 수”(170면) 있는 사진들과 같이 분유(分有/紛揉)된 것들로 구성된다. 소통의 자리에 있는 것은 주체나 연합의 존재들이 아닌 바로 공동체와 분유된 것들이다.6 공동체는 엄밀히 말해 분유된 것들이 ‘함께-있음’의 상태로 있는 것으로 봐야 한다. 일종의 모래처럼 연합도 원자화도 아니며, 결합체를 갖지 않고도 함께 있을 수 있다.7
공무와 모래, 나비는 각자 한알 한알로 존재하는 이들이기에 셋의 관계는 “손바닥으로 쓸고 지나간”(169면) 양 흩어졌다 가까워지기를 반복한다. 모래와 공무는 “감정싸움에 섞인 서로에 대한 애정”(122면)으로 나비로 하여금 테두리 밖으로 밀려나는 기분을 느끼게 만든다. 모래가 공무에게 고백을 했다 거절당하면서, 사람을 의심하거나 나쁘게 보지 않는 모래의 태도를 나비가 넉넉한 집안에서 자라 “더 가진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118면) 순진함과 관대함으로 느끼면서, 모래가 새로운 남자친구를 사귀면서 셋은 서로의 간격 속에서 “예전처럼 지낼 수는 없”(166면)을 거라는 것을 예감하기에 이른다.
이와 달리 어떤 관계는 미처 예감하지 못하고 바뀌기도 한다. 「고백」의 미주와 종은은 두달을 교제하고 친구로 십년을 지내고 있는 사이다. 미주는 불쑥 수사가 된 종은에게 하느님은 살인자도 용서하시냐고 물으며 주나・진희와 함께 찍은 스티커 사진을 꺼내 고등학교 시절을 회상한다. 그 시절 미주는 학생부장의 터무니없는 폭력에 자기 일처럼 항의해준 주나와 자신의 글을 처음 봐준 진희 사이에서 학창시절을 보내며, 자신이 둘의 관계에 딸린 부록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를 미주가 주나와 진희에게 털어놓으면서 세 사람은 “셋이라는 숫자 안에서 모두가 소외감”(193면)을 느꼈다는 점을 깨닫고 가벼워진 마음을, 한편으로는 시린 마음을 품은 채 섞여 있는 옷가지와 칫솔처럼 서로의 틈에 끼어든다.
너의 머리를 잠시 빌리기로 하자
개에게는 개의 머리가 필요하고 물고기에게는 물고기의 머리가 필요하듯이
두개의 목소리가 동시에 터져나오더라도 놀라지 않기로 하자
정면을 보는 것과 정면으로 보는 것
거울은 파편으로 대항한다
잠에서 깨어나면 어김없이 멀리 와 있어서
나는 종종 나무토막을 곁에 두지만
우리가 필체와 그림자를 공유한다면
절반의 기억을 되찾을 수 있겠지
몸을 벗듯이 색색의 모래들이 흘러내리는 벽
그렇게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
나의 두 손으로 너의 얼굴을 가려보기도 하는
왼쪽으로 세번째 사람과 오른쪽으로 세번째 사람
손목과 우산을 합쳐 하나의 이름을 완성한다
나란히 빗속을 걸어간다
최대한의 열매로 최소한의 벼랑을 떠날 때까지
—안희연 「파트너」 전문
이렇게 타인과 나의 관계는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 그 틈을 통해 보다 명확히 가시화된다. 관계는 언제나 유대의 부재 또는 비움의 무한을 전제로 한다.8 위의 시편 속 시적 주체는 슬픔이 끼어들 때 얼굴을 보지 않고, 도리어 “나의 두 손으로 너의 얼굴을 가려보기도 하는” 태도를 취할 줄 아는 이다. 이렇게 타인의 부재를 전제로 할 때 주체는 고독에 노출되며 진정한 의미에서의 ‘우리’가 성립된다. 고독과 연대는 대립항이 아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의 이름을 완성”한 것처럼 보이나, “두개의 목소리가 동시에 터져나”올 수 있는 개인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이 “너의 머리를 잠시 빌리”고 “필체와 그림자를 공유”하여, “나란히 빗속을 걸어”가기 위해서는 모종의 커뮤니티를 필요로 할 수밖에 없다.
안희연의 시 속 “원탁에 둘러앉은 사람들”(「백색 공간」 11면)이 그러하듯 최은영의 작품 속 인물들도 커뮤니티를 공유한다. 예컨대 대학을 비롯한 학교의 학부제나 행사, 네이버 카페나 MSN, 페이스북 메신저로 가시화되는 또래집단이라는 커뮤니티는 최은영의 작품 속에서 하나의 세계이자 공동체의 대표적인 소통의 장이다. 커뮤니티는 어딘가에 종속되어 있다는 안정감을 주며, 타인과 내가 공통적으로 무언가를 공유하며 하나의 결합체가 되어 있다고 믿게끔 한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을 배반하는 것이 커뮤니티의 근원적인 속성이다. 커뮤니티는 사람들을 맺어주면서 동시에 분리시킨다.9 인물들은 소통을 하면 할수록 이 커뮤니티 내부에서 자신들이 서로 일정한 사이를 두고 있으며, 동화될 수 없는 감각과 거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실감한다. 모래 속 모래알들이 서로 간격을 두고 한데 있는 양태야말로 우리가 목도한 공동체의 실상이다. “색색의 모래들이 흘러내”릴 때, 함께 있던 “왼쪽으로 세번째 사람과 오른쪽으로 세번째 사람”은 언제든지 서로 상이한 방향으로 분리될 수 있다는 잠재성을 우리는 반드시 주시해야만 한다.
우리가 공동체나 연대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커뮤니티는 언제나 우리의 기억에 의해 재구성되어왔다. 실제로 그가 지었던 표정과 내가 회상해내는 표정이 미세하게 다르듯 공동체 역시 스쳐지나간 표정처럼 하나의 현상으로서만 포착된다.
휴일이 되자 다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누군가 헬멧처럼 내 얼굴을 뒤집어쓰고 손목 안으로
손목을 밀어넣었다
(…)
장갑은 손처럼 생겼지만 손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나에게는 없는 손을 장갑 속에서 발견한다면
얼마나 부끄러워질 것인가
접시와 접시 사이에는 또다른 접시가 있고
식탁 위에는 이인분의 음식이 차려져 있지만
나는 내가 한사람이라는 것을 믿는다
—안희연 「하나 그리고 둘」 부분
“다른 목소리”를 지녔음에도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종종 “헬멧처럼 내 얼굴을 뒤집어쓰고” 있는 타인의 얼굴을 나와 동일 선상에 놓는다. 타인이 나의 얼굴을 뒤집어쓰고 있다고 한들 “장갑은 손처럼 생겼지만 손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것처럼 나와 그는 ‘공동’으로 무언가를 공유하고 있을 뿐,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고 단정할 수 없다.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이인분의 음식”이 아닌 “접시와 접시 사이에는 또다른 접시가 있”다는 숨겨진 사실이다. 이렇게 커뮤니티는 도리어 우리 사이에 ‘또다른’ 접시가 있음을 암시하며, 우리가 미처 의식하지 못했던 문제들을 수면 위로 끌어올려 좀더 첨예하게 결합체의 다양한 모습을 구상하게 만듦으로써 공동체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한다. 모래 속 모래알처럼 서로가 각자 다른 하나의 개별적인 존재임을 역설하며, 상이한 방향의 개별적 주체들의 성격을 고민할 때야말로 간격을 좁혀 모래의 잠재태로서 현존할 수 있다.
4. 연애와 연대가 교차할 때
타인과 나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질 때, 우리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되고 만다. 연애는 너와 나 사이의 구분을 잃는 강렬한 경험을 통해 하나의 결합체가 되었다는 착오를 일으킨다.
“어떻게 우리가 두 사람일 수 있는지 의아할 때도 있었어요. 네가 아픈 걸 내가 고스란히 느낄 수 있고, 내가 아프면 네가 우는데 어떻게 우리가 다른 사람일 수 있는 거지? 그 착각이 지금의 우리를 이렇게 형편없는 사람들로 만들었는지도 몰라요.”(최은영 「그 여름」 29면)
이러한 물음을 던지는 「그 여름」은 고등학교에서 만나 사랑을 나누다 끝내 헤어지고 마는 레즈비언 커플의 이야기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이렇게만 설명해서는 안 될 것 같다. “어떤 연애는 우정 같고, 어떤 우정은 연애 같다”(「쇼코의 미소」 24면)는 잘 알려진 문장처럼 ‘연애’는 간단하게 정의될 수 있는 감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수이는 학교에 축구 동아리가 없어 남자 중학교 학생들과 경기를 하며 몸을 만지거나 하는 추행을 참아내고, 자신의 성 정체성이 밝혀졌을 때 외부 세계로부터 받게 될 억압과 지탄을 염려한다. 이경은 그런 수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홀로 대학에 진학하며, 직업학교의 허름한 복장 그대로 레즈비언 바를 찾아온 수이를 다른 이들과 비교한다. 사랑을 지속가능하게 하면서, 끝내 이별에 이르게 하는 것 또한 우리가 한 사람이라는 착각에 기인한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단 한 명이 필요”(42면)했다는 은지의 고백을 빌려와야 할 것 같다. 과거 은지는 가족이 다 모인 자리에서 동생에게 아우팅을 당해 아빠와 삼촌들에게 몰매를 맞은 전력이 있다. 여성들에게 있어 외부 세계는 언제고 권력과 힘에 노출된 공간이다. 그런 세계에서 여성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힘’이나 ‘권력’이 아니라 “내 편을 들어줄 단 한 사람”이다.
유년기를 다룬 많은 문학 작품 안에서 남성들과 달리 여성들의 관계는 우정과 연애가 쌍을 이루며 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최은영식 회상이 더욱 값지고 유의미한 이유 또한 이 때문이다. 「601, 602」에서 효진이 기준에게 폭력을 당하거나 가족으로부터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무시받을 때, “무언가 내 머리를 쾅 치고 지나가는 것 같”(75면)아 기준의 폭력을 저지하고,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겪게 되는 차별에 저항하는 인물은 주영 단 하나다. 「먼 곳에서 온 노래」(『쇼코의 미소』)의 소은이 ‘나약’한 ‘여성’으로 보인다는 이유로 수모를 겪을 때 강경한 발언을 하는 것 역시 여성인 미진이다. 왜 이들의 관계는 “어떤 연애는 우정 같고, 어떤 우정은 연애”처럼 보이게끔 작동할 수밖에 없었을까. 여성들이 서로에게 갖는 애정은 불가피하면서 그렇기에 운명처럼 찾아드는 사랑이자 동시에 억압과 권력의 세계로부터 서로를 지켜낼 수 있는 유일함 힘이며 생존방식은 아니었을지 돌이켜볼 부분이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생각한다
같은 어깨를 나눠 가진다는 것에 대해
왜 한 나무는 웃자라고 한 나무는
묘목에 그쳐 있는가에 대해
(…)
이 나무에서 저 나무에게로
이 나무에서 저 나무에게로
똑같이 아픈 나무를 오가다
눈앞에 없는 나무를 생각한다
한번도 열린 적 없는 철문이 열리고
흐느낌처럼 새어나올 빛을 생각한다
—안희연 「세그루 나무를 사랑한 한마리 지빠귀처럼」(이하 「세그루」) 부분
우리는 서로를 대하며 느끼는 감촉과 경험을 통해 열리고, 허물어진다. 젠더나 섹슈얼리티는 “같은 어깨를 나눠 가진” 것처럼 주체의 완전한 소유물이 될 수 없으며 다른 사람이 곁에 있음으로써 가능한 존재양식이다. 젠더와 섹슈얼리티에 대해 발화하는 행위는 그 자체로 복잡한 의미를 지시하는 목적을 내포하고 있다. 타인에 노출되고, 사회 및 문화 규범에 연루 및 각인되어 사회적 의미 속에 이해되는 것은 몸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나의 신체는 타인의 응시에 노출되어 있으므로 “이 나무에서 저 나무에게로” 갈 수 있는 매개이자 도구로 기능한다. 우리는 우리의 신체가 타인과의 접촉에 양도되는 상황을 피할 방법이 없다.10 수많은 외부의 접촉은 타인과 나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듯한 착각과 혼란을 야기한다. 그렇다면 “눈앞에 없는 나무를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안희연은 ‘시인의 말’에서 도끼로 내려찍는 듯한 심정으로 가시화되지 않은 존재를 다시 언급한다.
한편 한편 도끼로 나무를 내려찍는 심정이었다. 견딜 수가 없어서였다. 무엇을 견딜 수가 없었는가 하면 잘 모르겠고, 그래서 견뎌졌는가 하면 그것도 잘 모르겠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도끼자국 흉물스러운 나무 한그루만 남았다.
(…)
돌이켜보면 모두가 가엾다. 눈앞에 없는 사람만 사랑하고 핏방울만이 진짜라고 믿었던 시간들.
타자를 진짜라고 믿는 시간 속에서 우리가 “같은 어깨”를 의심하지 않는 실수를 범하지는 않았는지 고민하다보니, 결국 의문만이 남는다. 과연 눈앞에 없는 사람을 사랑하고 상상하는 것이, 우리가 한 사람이라는 착각을 하지 않는 것이 가능하기는 한 것인가 싶어 시인의 심정을 조금은 알 것도 같다. 뾰족한 묘수가 아직 떠오르지 않으니 이쯤에서 최은영의 소설을 좀더 보자.
최은영의 인물들조차 이러한 시간들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듯하다. 가령 「601, 602」에서 딸을 차별하는 효진과 주영의 엄마는 동일한 성별임에도 같이 묶일 수 없음을 보여준다. 각각의 삶은 언제나 차이를 지닌 채 유지되어왔다는 경계를 일깨우고, 약자들의 세계의 억압과 질서 속에서 생겨나는 또다른 이데올로기를 보여주며 이에 그치지 않고 문제를 제기한다. 같은 아픔을 나누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나무 사이에는 눈앞에 없는 나무가, 사람이 있다. 그러므로 「그 여름」은 필시 더 이야기되어야만 하는 소설이다. 동일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기에 동일한 세계와 연대 속에서 삶을 살아야 한다는, “어떻게 우리가 다른 사람일 수 있”냐는 생각은 이성애 및 가부장제의 논리와 흡사한 형태의 질서와 폭력을 양산한다. 인물들은 그러한 생각이 “형편없는” “착각”임을 보다 빠르게 깨닫고, 정체성의 문제를 더욱 확장시켜 서로가 얼마나 그리고 어떻게 다른지 인식하기에 이른다. 이를 직시하는 일은 도끼로 내려찍는 것처럼 황망하고 참담한 심정일 테다. 그러나 잘 벼려진 날은 무언가 끼어들 수 있는 틈을 만들 수도 있지 않겠는가.
「아치디에서」는 그렇게 벌어진 약자들의 세계의 틈을 더욱 첨예하게 그려내고 있다. 랄도에게는 아버지에게 폭행당했던 과거가, 하민에게는 가족들로부터 희생당했던 트라우마가 있다. 이러한 트라우마는 이들이 피해자라는 것을 드러낼 뿐 아니라 변화하는 시공간 안에서 이들도 가해자로 전치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감정의 집합들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모두를 외면했다는 하민의 고백은 랄도로 하여금 자신이 엄마와 누나에게 또다른 피해를 양산하고 있었음을 깨닫게 해주는 기점이 된다. 이들은 음악을 나눠 듣고 서로의 어깨에 기대어 잠에 들기도 하며 “이상한 감정 다툼”(295면)을 한다. 연애와 연대가 교차되면서 일어나는 관계의 국면은 때론 ‘연애’나 ‘연대’ 어느 한쪽의 단어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서로 다른 개별적 주체들이 연애처럼, 연대처럼 시간을 보내며 균열을 겪는 과정은 인위적인 통일성에서 벗어나게 하며 더 넓은 관계의 지평을 열어준다.
관계의 관점을 증진시키기 위해서는 ‘너’ 그리고 ‘우리’의 소환이 불가피하다. 그러나 때때로 안희연의 시 전반에 걸쳐진 이들의 형상은 다소 추상적이며, 우리 시대와 세대의 현실이 너무나도 직접적이고 손쉽게 작품 내에 당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을 자아낸다. 마찬가지로 최은영 초기작의 주된 배경인 사회·인권 문제는 종종 인물들에게 갈등과 위기의 순간을 부여하기 위한 장치에 그친다는 아쉬움을 낳기도 한다. 이들이 호명한 곳에 자리할 수 있는 이들이 누구인지 더욱 경각심이 요구되는 것은 당연하다. 문학작품은 현실 반영의 부산물이 아닌, ‘백색 공간’으로서 언제나 열려 있다. 단순히 현실의 문제와 약자들의 이야기로 갈무리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끼어든 불화를 목격할 때 우리는 연대의 틈까지도 놓치지 않을 수 있다. 문학과 현실을 조응시키는 이미지와 서사의 구현이야말로 너와 우리를 비롯한 무수한 교차 속에서 눈앞에 없는 것에 대한 상상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5. 가장자리에 있는 사람들
“가시권 밖의 안부”를 상상하기 위해서, “그리다 만 얼굴이 더 많은 표정을 지녔음”을 알기 위해서는 “한참을/서 있다 사라지는 그를”(「백색 공간」 10면) 보아야만 한다는 것을 이제, 우리는 안다. 두 작가의 작품에서 “한 번도 열린 적 없는 철문이 열리”(「세그루」)는 것만 같았던 그날의 순간을 잊지 않겠다는 결의를 엿볼 수 있었다. 이들이 ‘우리’를 부르는 목소리를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은 굳게 닫힌 문이 열리고, 그 너머에 감추어진 빛들이 흘러나올 것이라는 믿음과 마음을 모르지 않기 때문일 테다. 그러나 너무 많은 것들이 쏟아져 “중심에서 밀려나고 사람들에게서도 밀려나서, 역시나 대양에서 밀려난 바다의 가장자리를 만나는 기분”(「쇼코의 미소」 9면)으로, “흐느낌처럼 새어”(「세그루」) 슬픔과 좀체 분간하기 어려운 빛을 마주한 우리의 얼굴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던가.
그간 ‘연대’는 서로를 ‘환대’해야만 할 것 같은 긍정적이고도 이상한 책임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없었다. 벽 앞에 서야만 상상을 통해서나마 벽 너머에 가닿을 수 있는 것처럼, 가로막은 문을 보아야만 문이 열리기를 바랄 수 있는 것처럼 가장자리에 서 있을 때에만 가능한 것들이 존재한다. ‘가장자리’는 절벽이나 문이 아닌, 바다와 모래의 경계처럼 희미하고 언제고 흐려질 수 있는 윤곽으로 재정립된다. 「모래로 지은 집」의 이들이 사진 속 프레임에 간신히 걸쳐놓은 사람의 형상은 그것을 밀쳐내거나 외면하지 않겠다는 최소한의 의지인 것이다.
목적 없이 모였다 흩어지기
제목이 없어서 가능한 마음들처럼
개는 단숨에 소년을 앞지를 수도
엎지를 수도 있지만
순서를 위해서는 아니다
*
나란히라는 멀리
달력에는 없는 시간으로 굴러가는 바퀴들
담장을 넘어간 공이 무심코 돌아오듯
어느새 소년은 백지 바깥에 도착해 있다
어둠속에 홀로 남겨졌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안희연 「개에게서 소년에게」 부분
촛불 이후 우리는 중심부로 모였다 다시 제자리로 흩어지게 되면서 때때로 다시 가장자리 바깥으로 밀려나 있는 이들이 아닌가 고민하게 되었다. 현세대들이 SNS와 커뮤니티에 느끼는 애착과 결속감 역시 함께 있을 때 생겨나는 중심부의 힘에 대한 고민과 결부되어 있을 것이다. 안희연과 최은영의 작품은 연대가 굳고 견고하게 닫혀 있는 하나의 완성체가 아닌, 그 자체로 바다와 같이 열려 있는 백색 공간임을 확인시켜주었다. “나란히”와 “멀리”라는 부사가 동의어의 관계에 놓이는 세계에서는 모였다 흩어지는 것의 의미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게 함께 있는 것과 “어둠 속에 홀로 남겨졌다는 것”이 별반 다르지 않을지 모른다고 느끼게 되는 순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다시 바라보는 것, 어쩌면 오직 어둠 속을 오래오래 바라보는 것뿐.
함께 모여 있던 수많은 이들의 얼굴이 사라진 지금, ‘연대’란 과연 무엇인가. 연대는 커다란 변화를 같이 이끌어내는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에 빛과 그림자의 관계가 서로 상반된 관계가 아니라는 사실을 천천히 곱씹는다. “어둠 속에 홀로 남겨졌다는 것”이 남겨진 것이 아니라 남아 있기를 자처한 것이라면 어떠한가. 바로 여기에 멀리 그리고 나란히 남아 있는 한 사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어두운 쪽에서는 밝은 쪽이 잘 보이잖아. 그런데 왜 밝은 쪽에서는 어두운 쪽이 잘 보이지 않을까. 차라리 모두 어둡다면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서로를 볼 수 있을 텐데.” (최은영 「손길」 235면)
이들은 깜깜해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음에도 “조율이 완벽한 것도 아니었고 실수가 없는 것도 아니었는데, 조금씩 어긋나고 틀어지고 부딪치는 소리”(234면)를 통해 그곳에 서로가 있음을 감지한다. 도리어 어둡기에, 희미한 빛만으로도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고, 쉽게 규정하지 않으며 오래도록 상상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안희연의 ‘벽’과 최은영의 소설 속 인물 간의 불가측한 거리를 통해 우리는 타인의 얼굴을 대면하는 방식을 더욱 고심할 수 있었다. ‘벽’은 우리의 옆에 놓인 하나의 창으로 언제든지 열릴 수 있으며 타인과 나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을 들여다보기 위한 필수적인 틈으로 전환된다. 언제고 다른 사람에게 타인이 될 수 있다는 ‘타자성’에 대한 자각은 “발만으로는 갈 수 없는 깊은 골목”(「백색공간」 75면) 너머에 가닿을 수 있게 한다.
이곳을 찾아올 이에게는 외롭지 않도록, 남아 있었던 이에게는 홀로 남겨진 것이 아니라고 말해줄 수 있도록 어둠 속에 남아 당신을 기다리기로 한다. 빛이 있는 곳에 어둠이 있는 것처럼, 타인이 있기에 나 또한 존재할 수 있다. 어렴풋하게 들리고, 보이는 정도의 조도와 거리에서도 “물도 햇빛도 없이/침묵이 고이면 얼마나 깊은 두 눈”(「백색공간」 74면)을 갖게 되는지 경험한 우리는 이제 표정을 헤아려보는 것이 가능한 이들이기에, 당신의 얼굴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심사평
이번 대산대학문학상 평론부문 응모작들은 다양한 주제와 작품을 다루면서도 최근 문학현장의 이슈들을 적극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가 보였다. 여러편의 글들이 페미니즘, 퀴어, 독자공동체에 대한 현재적 논의들을 기반으로 작품을 논한 점이 인상적이다. 상당수의 글이 참신하고 의욕적인 문제제기를 통해 신인의 고유한 비평적 시선을 드러낸 점은 의미가 있으나, 평자의 주장이 앞서느라 작품 읽기가 내실 있게 진행되지 않은 경우도 많아 아쉬웠다.
본심에서는 다섯편의 작품을 중심으로 논의를 진행하였다.
「첨단에 서지 않는 시, 새날의 냄새가: 문태준 시의 타자성 읽기」는 차분한 문제제기와 안정된 구성방식으로 작품해석을 진행한 장점이 있지만, 대상 작가와 작품이 현재적으로 조명되어야 할 비평적 맥락에 대한 규명이 부족하였다.
「텍스트의 경계를 횡단하는 실패의 미학: 박상영론」은 박상영 소설이 지닌 대중성과 정치성을 적극적으로 읽어내려는 의욕이 보인 글이다. 독자공동체와 수행적 독자라는 비평적인 문제의식을 도입부에서 강조하는 점이 흥미로웠으나 작품 분석이 정치하게 진행되지 못하였다.
「딸기밭에 묻은 항구의 사랑 꺼내기: 레즈비언 소설론」도 문제제기와 해석의 발상이 흥미롭게 다가온 글이다. 다만 폭넓게 거론되는 선행 논의들에 대한 필자의 입장과 평가가 명료하지 않은 점, 작품 역시 소재 중심으로 분석되는 측면이 아쉬웠다.
「불가능한 유토피아를 뛰어넘는 여성들: 김초엽론」은 대상 작가와 작품에 대한 필자의 신뢰와 지지를 기반으로 비평적 주장을 집중적으로 풀어간 장점이 있으나, 일부 작품 해석에서 대상 작품과의 비평적 거리를 확보하지 못하고 상찬 위주의 평으로 기울어진 점이 아쉽다.
당선작으로 뽑은 「이제는 남겨진 당신의 얼굴을 마주할 때」는 유려하고 집중적인 작품해석, 차분한 논거 제시를 통해 읽는 이를 설득하는 힘이 돋보이는 글이다. 장르를 횡단하여 최은영의 소설과 안희연의 시에 나타난 타자성의 문제, ‘벽’과 ‘연대’가 교차하는 지점들을 섬세하게 해석한 점이 새롭게 다가왔다. 물론 분석 대상의 주제적 연계성을 강조하다보니 두 작가의 개성과 차이가 충분히 드러나지 못한 점도 있다. 그럼에도 작품에 대한 평가에서 공감과 애정으로만 기울지 않고, 한계와 아쉬운 지점을 예리하게 짚은 부분은 귀중한 비평적 덕목으로 여겨졌다.
진심으로 당선을 축하드리며, 작품을 응모하신 모든 분들에게 격려와 감사를 드린다.
백지연 한기욱
당선소감
지난겨울, 저는 공연장에서 하우스어셔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피아니스트의 연주회 리허설 무대를 점검하게 되었습니다. 누군가 두고 간 물건은 없는지, 연주 소리가 객석까지 온전히 잘 전달되고 있는지 살펴야 했습니다. 무대 위로 피아니스트 곁에 누군가 앉아 악보를 넘겨주는 것이 보였습니다. 막연히 공연이 시작되면 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그는 연주회가 시작된 후에도 여전히 피아니스트 옆에 앉아 악보를 넘겨주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페이지 터너’라고 했습니다.
책을 읽다보면 어느 순간 누군가 제 곁에 앉아 페이지를 넘겨주고 있는 듯한 기분을 느낍니다. 왜 그런가 하면, 아마도 그곳에는 제가 보았던 것 혹은 보지 못했거나 보지 못한 척했던 크고 작은 일들이 담겨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일들이 그곳에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그저 오랫동안 책을 붙들고 있었을 뿐인데, 결국에는 오랫동안 붙들려 있고야 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제가 보았던 것들에 대해 써내려가면서 저는 ‘쓰기’의 방식을 자주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고통은 어느 누구에게도 먼 일이 아니라는 것을 저는 문학으로부터, 인물들로부터 배울 수 있었습니다. 쓰는 나로 살아가기 위해 번번이 너무 많은 ‘나’들에게 기대며 살아왔습니다. 나일지도 모르는 이들에게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그들의 목소리를 외면하지 않는 것, 더 오랫동안 응시하는 것, 분명하고 정확한 언어로 그들과 세계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평론을 써야겠다고 다짐한 것 또한 그 무렵의 일입니다.
저의 첫번째 페이지 터너는 어머니였습니다. 제가 선택한 일이라면 무조건 믿어주신 지은경, 당신에게 이 자리를 빌려 무한한 사랑의 말을 전합니다. 지도해주시고 격려해주신 교수님들께도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오랜 시간 기꺼이 제 글의 평론가가 되어준 친구들에게도 고맙습니다. 제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도 감사합니다.
작가와 비평가는 모두 ‘페이지 터너’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행간을 놓치지 않겠습니다. 앞으로 좋은 페이지 터너가 되기 위해 읽고 쓰는 이 일을 더 많이 사랑하겠습니다.
끝으로 이 글을 쓰는 동안 제 곁에서 책장을 넘겨주신 안희연, 최은영 작가님께 미안하고 감사합니다.
박하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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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영안 『타인의 얼굴: 레비나스의 철학』, 문학과지성사 2005, 148면 참조. ↩
- 레비나스는 얼굴을 “타자의 벌거벗음”으로 본다. “벌거벗음”이란 어떤 형상이나 규정으로부터도 자유롭지만 자신을 전적으로 노출하며 그 자체로서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뜻한다. 얼굴은 자신을 둘러싼 타자의 관념을 넘어서고 개념적인 틀에 고정되지 않은 채 자신을 제시한다. 이러한 얼굴을 만나는 것은 필연적으로 주체를 놀라게 하는 사건과도 같다. 김도형 『레비나스와 정치적인 것』, 그린비 2018, 19~26면 참조. ↩
- 나의 일부는 “타자들의 수수께끼적인 흔적들”로 이루어지기에 나는 자신에 대해 완전히 알지 못한다. 그러나 내가 상처를 입을 때 “바로 그 상처는 내가 자국이 날 수 있는 존재임을 입증하고 또 내가 완전히 예측하거나 통제할 수 없는 방식으로 타자에게 양도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이를 인정한다면 타자와 완전히 동떨어진 윤리학이나 책임감이라는 문제는 있을 수 없다. 내가 살아가는 사회의 이름 없고 얼굴 없는 죽음들, 내가 부인하거나 애도하는 죽음들에 의해 나는 구성된다. 주디스 버틀러 『불확실한 삶』, 양효실 옮김, 경성대학교출판부 2008, 79~80면 참조. ↩
- 이은지는 해옥이 순애가 세상 누구보다 귀한 사람임을 꿰뚫어보는 태도를 잃었다고 본다(「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통해 한 사람으로 존재한다: 최은영론」, 『문학동네』 2016년 겨울호 81면 참조). 그러나 해옥을 위하는 마음을 가지고 기도회를 드나드는 듯 보였던 순애의 태도는 연민에 가깝다. 도리어 순애가 세상 누구보다 귀한 사람임을 알게 되는 것은 이후 무수한 타자와의 만남 속에서 죽은 순애와의 재회가 이뤄지는 순간, 더이상 순애의 슬픔에 너무나도 쉽게 공감하거나 연민하지 않을 때 일어난다. 그렇기에 해옥은 순애의 죽음 앞에서 그에게 용서받았다는 확신이 없음에도 이전처럼 쉽게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있다. ↩
- 김도형, 앞의 책 23면. ↩
- 장뤽 낭시 『무위의 공동체』, 박준상 옮김, 인간사랑 2010, 66~67면 참조. ↩
- 모리스 블랑쇼·장뤽 낭시 『밝힐 수 없는 공동체/마주한 공동체』, 박준상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5, 125면 참조. ↩
- 앞의 책 48면 참조. ↩
- “세계에서 함께 산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탁자가 그 둘레에 앉는 사람들 사이에 자리잡고 있듯이 사물의 세계도 공동으로 그것을 취하는 사람들 사이에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사이(in-between)가 그러하듯이 세계는 사람들을 맺어주기도 하고 동시에 분리시키기도 한다. (…) 그래서 서로 마주보고 앉아 있던 두 사람은 더이상 떨어져 있지 않지만 동시에 만질 수 있는 그 무엇에 의해 완전히 서로 분리되어 있다.”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 이진우·태정호 옮김, 한길사 1996, 105~106면. ↩
- 주디스 버틀러 『젠더 허물기』, 조현준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5, 37~49면 참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