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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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명학수 明學秀

1966년 경기 동두천 출생. 201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eyaya66@naver.com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수진이 눈을 뜬다. 하마터면 더 오래 잠들어 있다가 오전이 지날 무렵 깨어나서 흐트러진 모습으로 기훈과 마주칠 뻔했지만 다행히 채 닫히지 않은 커튼 사이로 쏟아져 들어온 햇빛이 수진을 불안한 잠의 기운으로부터 건져낸다. 주위를 살펴 이곳이 어디인지 깨닫자마자 그녀는 본능적으로 두 손을 움직여 자신의 얼굴과 몸을 더듬는다. 청바지의 단추 한개가 풀어진 걸 알고 순간 놀라지만 원래보다 작은 사이즈여서 저절로 풀렸거나 자다가 불편해서 무심결에 풀었을 가능성이 떠올라 마음을 놓는다. 다행히 지퍼는 단단히 잠겨 있고 셔츠의 단추도 늘 그랬듯 위로부터 두개만 빼고 모두 채워진 상태이며 진작 벗어 던져도 좋았을 양말마저 그대로다. 현재 시각은 오전 5시 7분. 수진은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하고 얼굴을 살핀다. 끔찍하다. 너무 끔찍해서 쳐다보기도 싫지만 그 끔찍함은 익숙한 것이어서 수진은 오히려 안도한다. 그리고 당연한 순서처럼 후회와 자책이 뒤따른다. 어제 수진은 고등학교 동창들과 십년 만에 만났다. 대학로의 감자탕 전문점에서 오후 7시부터 시작되어 밤 11시쯤 끝날 것 같던 모임은 석촌호수 근처에 있는 기훈의 오피스텔로 옮겨서 계속 이어졌고, 새벽 1시쯤이었나, 수진은 갑자기 찾아온 두통을 견디다 못해 진통제를 먹었는데 오히려 그때부터 취기가 심해지더니 오바이트를 하고 눈물마저 뚝뚝 떨구다 기훈이 잠시 쉬라며 내준 침대에서 그대로 잠들고 말았다. 어떻게 그렇게 곯아떨어질 수가 있어? 돌았니? 미쳤어? 수진은 조금이라도 실수를 만회하려는 마음으로 흐트러진 침대 시트를 정리하고 이불을 반듯하게 개었으며 버건디색 커버가 씌워진 깃털 베개 위에서 머리카락 몇개를 줍는다. 하지만 겨우 그것만으로 기훈이 오랫동안 사용했을 잠자리가 원래의 상태를 회복했을지 그녀는 알지 못한다. 수진은 침대 옆의 바닥에 반듯하게 서 있는 자신의 토트백을 집어 들고 거실로 나간다. 집 안은 깨끗하고 조용하다. 지난밤 술자리의 흔적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다. 4인용 소파에서 누군가 이불을 둘둘 말고 잠들어 있어서 가까이 가보니, 기훈이다. 수진은 한숨을 내쉬고는 가방에서 수첩을 꺼내 한장 찢어서 메모를 남긴다. 어제는 정말 미안했어, 오전에 일이 있어 먼저 간다, 또 연락할게, 수진. 그녀는 서둘러 나가려다 현관에서 그녀의 살구색 구두 한쪽이 옆으로 누워 있는 걸 발견하고 멈칫한다. 굽이 높은 편이 아니어서 이러기 쉽지 않은데, 뭐지? 그것은 어제의 친구들이 남긴 서툰 인사처럼 보여서 수진의 기분은 살짝 불쾌해진다. 그녀는 쓰러진 구두를 세워서 다급하게 발을 꿰고 기훈의 집을 나선다.

 

수진과 기훈은 같은 고등학교의 문예부 부원이었다. 두 사람은 1학년 때 세명의 고3 학생들 앞에 나란히 앉아서 면접을 보았다. 며칠 후 세영과 영민과 현우가 차례로 같은 면접을 거쳐 부원이 되었고 2학년이 되어 교지 제작에 부족한 인원을 충원할 때 종수와 지연이 들어왔다. 그들 일곱명은 고3이 된 후에도 여름까지는 매월 독서 토론회를 하며 시와 수필과 짧은 소설을 써서 돌려 보았고 가을에는 1, 2학년들의 작품까지 한데 모아서 문집을 만들었다. 졸업 후에 그들은 아무런 약속 없이 각자에게 주어진 입시의 결과에 따라 뿔뿔이 흩어졌다. 간혹 행사가 있을 때 모교에서 뜻밖에 마주치거나 둘씩 혹은 셋씩 띄엄띄엄 만나는 경우는 있어도 그들의 의지나 계획에 따라 전원이 모인 적은 없었다. 거듭된 우연의 반복에 의해 일곱명의 최신 전화번호를 갖게 된 종수가 카카오톡에 단체대화방을 만들었고, 거기서 짧은 문장을 주고받으며 근황을 나누다 거의 6개월 동안 수도 없이 시간과 장소를 바꿔가며 조율한 끝에 겨우 십년 만의 모임이 성사된 것이었다.

 

수진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얼굴에서 화장을 닦아내고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아서 시트러스향 입욕제를 푼 다음, 오늘이 토요일인 걸 다행으로 여기며 몸을 담근다. 따뜻한 기운과 함께 몸의 회복이 시작되면서 정신도 맑아지고, 그러자 수진은 지난밤에 있었던 일을 다시 정리해야 하는 의무감에 사로잡힌다. 수진은 정해진 시각보다 10분 일찍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종수와 영민은 이미 와 있었고 5분 후에 세영이 왔고 잠시 후 기훈과 지연이 거의 동시에 도착했다. 현우는 오지 않았다. 모두 여섯명.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아무 말 없이 먹기만 하는 어색한 상황도 있기는 했지만 다 같이 파안대소하는 순간도 몇번인가 있었다. 그리고 기훈의 집. 어쩌다 거기까지 갔을까? 누가 먼저 가자고 했지? 난감해하던 기훈의 표정에도 불구하고 다들 가보고 싶다고 졸라댔다. 세영은 대학로에서 헤어졌지. 남자친구가 데리러 와서 어쩔 수 없다고 은근히 자랑을 해서 다들 장난스런 야유를 보냈어. 세영은 남자친구가 몰고 온 검정색 쉐보레를 타고 떠났고 남은 다섯명은 대리기사를 불러서 기훈과 영민의 차에 나누어 타고 석촌호수로 갔다. 혼자 살기엔 꽤 넓은 오피스텔이었지. 서른두평? 등단하고 삼년이 지나서 조만간 첫번째 소설집이 나올 예정인 작가답게 집 안은 온통 책이었고, 12층에서 바라본 야경이 예뻤고, 그리고 다들 와인을 많이 마셨어. 편의점에 들러 캔맥주를 잔뜩 사 갔지만 그건 손도 대지 않고 기훈이 갖고 있던 와인만 마셨으니까. 현우 얘기가 나와서 분위기가 잠시 썰렁해지긴 했어도 심각한 건 아니었고, 문제는 나였지. 원인이 뭘까? 두통이야 늘 있었지만, 술을 너무 많이 마셨나? 소주와 맥주에 와인까지, 여러가지를 섞어 마셔서?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맛이 가다니. 약 때문인가? 약의 성분과 와인이 화학반응을 일으켜서? 모르겠다. 수진은 생각을 멈춘다. 더이상 아무 생각도 이어지지 않는다. 뭔가 놓친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게 뭔지 수진은 알 수 없다. 몸이 물속 깊은 곳으로 가라앉는 느낌이 들고 눈꺼풀도 나른해진다. 수진은 고민을 그만두기로 한다. 별일 없었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싶어진다. 십대 시절의 추억을 되새기며 감상에 젖을 만큼 한가하지도 않고, 다음 모임이 또 언제 있을지, 과연 있기는 할지도 알 수 없다. 일년에 한두번 어제처럼 모여서 각자 사는 모습들을 서로 비교하고 폼도 잡고 시샘도 하고, 딱 거기까지. 그 정도면 충분하다. 수진은 무사히 집에 돌아왔다고 단톡방에 짧게라도 글을 올리려다 시간이 너무 이른 것 같아 그만둔다. 우선은 밤새 주인을 기다린 침대로 돌아가서 깊은 잠에 빠져들고 싶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자다 지쳐서 저절로 깰 때까지.

 

수진의 잠은 깊지도 않고 길게 이어지지도 못한다. 잠들었다 싶으면 쉽게 깨어났고 꽤 잔 듯해서 시간을 확인하면 겨우 30분 남짓 지났을 뿐이다. 두시간쯤을 그렇게 뒤척이다 견디다 못한 수진은 휴대폰을 들어 밤새 올라온 기사를 검색하고 이런저런 동영상을 보며 유튜브를 돌아다니다 단톡방에 들어간다. 모임 이후에 새로 올라온 글은 아직 없다. 사진도 많이 찍었으니 언젠가는 올라올 것이다. 거기 있는 모든 글에는 숫자 1이 남아 있는데 그건 아직 읽지 않은 사람이 있다는 표시이고 그가 현우라는 걸 수진은 알고 있다. 단톡방이 만들어지고 줄곧 그랬으므로 딱히 이상한 줄도 모르겠고 이유가 궁금하지도 않다. 누구에게나 각자의 사정이라는 게 있는 법이니까. 수진은 피로에 지친 눈두덩을 비비며 마치 조각 퍼즐을 맞추듯 자음과 모음들을 조합해서 짧은 인사라도 남기려 한다. 하지만 우정, 추억, 만남 같은 상투적인 단어들만 두서없이 떠오르다 사라질 뿐 좀처럼 그럴듯한 문장은 되지 않는다. 수진은 휴대폰을 던져놓고 베개에 얼굴을 파묻는다. 몸은 휴식을 원했으나 잠을 재촉할수록 정신은 수면을 피해 자꾸만 달아난다. 다시 휴대폰을 집어 만지작거리는데 문자메시지가 도착한다. 무사하냐? 짧고 무뚝뚝한 메시지의 주인은 세영이다. 수진은 그렇다고 답을 적으려다 통화를 선택한다. 세영이 바로 받더니 대뜸 묻는다.

“어디야?”

“어디긴, 집이지.”

“너 기훈이네서 잤다면서?”

수진은 깜짝 놀란다.

“어떻게 알았어?”

“정말이야? 거기서 잔 거야?”

수진과 세영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일년에 두세번, 서로의 생일과 연말연시 시즌마다 안부를 묻고 소식을 주고받으며 지내왔다. 수진이 분당에 있는 초등학교에 임용되고 세영이 출판사에 취업한 이후에는 홍대 앞과 종로에서 만나 밥을 먹기도 했다. 그때마다 세영은 수진에게 기훈의 근황을 전했다. 어느 신문의 신춘문예에 당선됐고, 언제 어디에 무슨 소설을 발표했으며, 어느 출판사와 계약을 했는지. 심지어 일년 전에 석촌호수 옆으로 이사를 한 사실도 세영이 알려주었다. 처음에 수진은 세영이 기훈에게 관심이 있나 의심했지만, 사실은 수진을 위한 거라고, 고2 때 잠시 기훈을 향해 기울었던 수진의 마음을 아는 세영이 수진에게 특유의 오지랖을 발휘하는 거라고 이해했다. 그래서 수진은 지난밤의 상황을 전하면서도 변명처럼 들리지 않도록 신경 썼고 불필요한 오해를 낳지 않도록 주의했다. 수진의 설명이 끝나자 세영이 묻는다.

“아무 일 없었어?”

“당연하지. 일이 있을 게 뭐가 있어?”

“뭐가 당연해? 너는 약기운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었다면서?”

수진은 입을 다문다.

“다른 애들은? 종수랑 영민이랑 지연이랑, 그애들은 뭐래? 물어봤어?”

물어보지 않았다. 그럴 생각조차 못했다. 수진은 세영에게 말한다. 걱정해주는 건 고맙지만 지금 아무런 문제도 없고 완전히 정상이라고, 그러니 걱정 말라고. 하지만 세영은 납득하지 못하는 눈치다.

“너 잊었어? 기훈이 고3 때 버스에서 몰카 찍다 걸린 적 있잖아.”

유월 즈음이었다. 3학년 1학기 중간고사와 기말고사의 사이, 그 무렵에 고3 남학생 한명이 시내버스에서 휴대폰으로 어느 여자를 몰래 촬영하다 붙들려 지구대로 끌려갔다는 소문이 퍼졌는데 당시에 학교에서 돌던 다른 소문들에 비하면 시시한 수준이어서 이삼일 떠돌다 잊힐 운명이었지만 책 많이 읽고 글 잘 쓰는 모범생 이미지였던 기훈이 범인이라고 알려지면서 아이들에게 충격을 안겼다. 종수와 영민은 기훈을 문예부에서 탈퇴시켜야 한다고 지도교사에게 건의했고 교무주임까지 나서 그 일은 기훈과 무관하다고 밝혔지만 아이들은 믿지 않았다. 기훈은 어떠한 시인도 부인도 없이 문예부를 그만두었다. 하지만 고3들의 활동이 사실상 멈춘 시기여서 그의 탈퇴는 유명무실했고 시월에 발간된 문집에는 기훈의 글이 두편이나 실렸다. 수진은 말한다.

“그건 그냥 루머였잖아. 그리고 벌써 십년이나 지난 일인데.”

“그 약, 두통약 맞아? 이상한 약 아냐?”

세영은 수진의 말은 듣지 않고 자기 말만 한다.

“다른 애들은? 그애들은 너만 놔두고 지들끼리 집에 간 거야?”

무언가 수진의 두개골을 날카롭게 지나간다. 잠이 부족해서 조금 피곤한 거 말고는 다 괜찮으니까, 이제 그만하라고 말하면서도 수진은 갑자기 찾아온 두통을 세영이 알아채지 못하도록 손끝으로 관자놀이를 세게 누른다. 세영은 더이상 말이 없다. 수진은 눈을 감고 통증이 가라앉길 기다린다. 세영은 나중에 다시 통화하자는 말만 남기고 전화를 끊는다.

 

수진은 침대 옆 협탁의 서랍을 열어 두통약을 찾는다. 빈 상자와 껍질만 있을 뿐 알약은 없다. 그 약, 두통약, 누가 줬지? 기훈이었나? 머릿속을 아무리 헤집어봐도 떠오르는 건 없다. 아무래도 어젯밤 분위기가 어땠는지 알아야 할 것 같다. 수진은 종수, 영민, 지연 중에 그나마 가장 편한 종수에게 전화를 건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전화를 받는다. 종수의 말에 따르면 수진이 기훈의 부축을 받아 방으로 들어간 뒤부터 분위기가 가라앉았고, 현우가 나타나지 않는 문제를 영민이 기훈의 탓인 양 말해서 둘 사이에 거친 말들이 오갔으며, 그후 분위기가 더 암울해져서 종수는 먼저 자리를 떴다고 한다. 아마 영민과 지연도 그리 오래 있지는 않았을 거라고 종수는 덧붙인다. 수진은 묻는다.

“무슨 일 있었던 건 아니지?”

“무슨 일? 무슨 일은 너한테 있었지. 넌 괜찮아?”

“난 괜찮아. 근데, 근데 말이야, 종수야. 나 좀 깨워주지, 왜 그냥 갔니?”

수진은 단지 궁금해서 물었을 뿐인데 어쩐지 원망하는 말투가 되고 말았다. 종수는 말이 없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어렵게 말문을 연다.

“그, 글쎄, 그랬어야 했나? 거기까진 생각을 못했네.”

수진은 괜한 걸 물은 거 같아 후회한다. 종수는 밝고 긍정적인 성격이었지만 주변 분위기를 읽지 못해 종종 눈총을 받고는 했었다. 그는 고등학교 2학년 겨울에 세영에게 고백을 했다가 거절당했는데, 그후에도 세영을 대하는 태도나 말투에 아무런 변화가 없어서 세영은 어이없어했다. 졸업 후에도 종수는 세영에게 가끔 연락을 하며 기회를 엿보았지만 세영은 종수에게 전혀 틈을 주지 않았다. 종수가 단톡방을 만들고 모임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이면에는 세영에 대한 미련과 어떤 기대가 적지 않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런데 세영이 남자친구까지 불러서 도중에 가버렸으니, 그런 상황에서 종수에게 다른 여자에 대한 염려나 배려를 기대한다고? 그건 무리다. 수진이 그런 추측을 하느라 말이 없자 종수가 말한다.

“기훈이도 있고, 영민이도 있으니까, 괜찮겠거니 하고 나왔지.”

“그애들이 있는데, 왜 괜찮아?”

종수는 또 대답이 없다. 그게 말문이 막힐 만큼 심각한 질문이야? 수진은 저쪽의 침묵이 답답했지만 별수 없이 견디며 기다린다. 잠시 후 종수가 묻는다.

“왜? 아무 일 없었다면서? 아니야? 뭔 일 있었어?”

아무 일 없었어. 아무 일 없었지만, 그렇지만, 종수야,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모르겠니? 수진은 쏘아붙이고 싶지만 그러지 않는다. 종수에게 꼭 그래야 하는 의무가 있는 건 아니니까. 수진은 세영이 될 수 없고 종수가 지켜야 할 그 무엇도 아니니까. 수진은 아무 일 없었다고 말한다. 종수는, 정말 괜찮으냐고, 마치 수진의 남자친구나 오빠라도 되는 것처럼 여러번 되묻는다. 수진은 괜찮으니 걱정 말라고 짐짓 밝은 목소리로 그를 안심시킨다.

 

세영과 한번, 종수와 한번. 딱 두번의 통화를 했을 뿐인데 수진은 새로 산 구두를 신고 진흙탕에 들어선 기분이 되고 만다. 수진은 생수 한잔을 천천히 마신 다음, 커튼과 창을 활짝 열고 욕실로 들어가서 찬물로 세수를 하고 가벼운 스킨과 자외선 차단제를 얼굴에 바르는 동안에도 터무니없는 스트레스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계속 다짐한다. 하지만 모든 루틴의 끝에서 습관처럼 휴대폰을 손에 쥐자 다시 고민에 빠져든다. 다른 애들 얘기도 들어봐야 하지 않을까? 특히 지연은, 같은 여자인데, 여자가 남자 혼자 사는 집에서 깜박 잠들었다가 새벽에 깨어나는 상황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지 않을 텐데. 지연은 수진을 싫어했다. 처음부터 편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다. 교지에 실릴 예정이던 지연의 수필 원고 파일이 수진의 실수로 삭제됐는데 당연히 원본 파일이 있을 거라 믿고 지연에게 사정을 설명했지만 지연은 파일이 없다고 말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고 수진이 묻자 지연은 오히려 그건 자기가 할 말이며 남의 원고를 잃어버렸으면 사과부터 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따졌다. 수진은 사과를 했지만 지연은 끝내 원고를 제출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선생님들과 친구들에게 수진이 파일을 일부러 지워버렸다고 떠들고 다녔다. 그후 두 사람은 피치 못할 상황이 아니면 대화를 하지 않게 되었고 어제 모임에서도 인사는커녕 가벼운 시선조차 나누지 않았다. 영민은 다소 까칠한 성격이어서 부원들과 크고 작은 충돌이 잦은 편이었다. 기훈과 특히 그랬는데, 영민은 기훈의 말과 행동에 수시로 시비를 걸어서 자신의 반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수진은 영민의 그런 행동이 기훈에 대한 열등감이나 질투심에서 비롯되었다고 여겼다. 다행히 수진과 심각한 갈등은 없었고 지연만큼 불편하지도 않지만 선뜻 내키지는 않는다. 수진은 기훈의 번호를 찾아 터치한다. 진작 그랬어야 했다. 지연이나 영민보다 기훈을 먼저 떠올렸어야 했다. 그러면 간단히 해결될 일이었다. 수진은 길게 이어지는 신호음을 들으며 기다린다. 아직 자는 걸까? 기훈은 받지 않는다.

 

수진은 자전거를 타고 6개월 정기권을 끊어둔 실내 수영장으로 가서 한시간 동안 수영을 했다. 평소 물속에서 보내는 시간은 삼사십분 정도였지만 오늘은 한시간 내내 물에 들어가 있었다. 지상의 중력을 벗어나 물의 부력 위에서 수진은 편안했다. 덕분에 기분은 한결 가벼워졌고 숙취와 모든 후유증으로부터 벗어난 느낌마저 들었다. 따뜻한 물로 천천히 샤워를 하고 탈의실에서 휴대폰을 확인해보니 지연이 남긴 부재중 전화 한통이 있다. 수진은 무시한다. 근처 식당에 들어가 비빔밥을 주문하고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다 수진은 종수가 애들에게 수다를 떤 게 틀림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확실한 근거는 없지만 그렇게 단정한다. 그러지 않으면 지연이 전화를 할 이유가 없으니까. 수진은 비빔밥을 떠서 입에 넣는다. 지연의 전화가 다시 오지 않을까 신경 쓰인다. 어젯밤 자신을 깨우지도 않고 먼저 간 것에 대해 지연이 무슨 변명을 늘어놓을지도 궁금해진다. 발끈하겠지. 그게 자기랑 무슨 상관이냐고. 수진은 휴대폰을 의식하지 않으려 애를 쓴다. 지금은 오직 밥을 먹는 것에만 집중하고 싶다. 그녀는 천천히 입을 움직여 밥을 씹는다. 마치 음식을 무사히 넘겨야 냉정을 되찾을 수 있다는 듯이. 하지만, 카톡의 신호음이 울린다. 지연이 사진을 올린 것이다. 감자탕을 앞에 두고 소주잔을 마주치는 남자들의 사진 두장과 서로 팔짱을 낀 채 웃고 있는 세영과 남자친구, 그리고 기훈의 집에서 찍은 걸로 보이는 두장의 사진이다. 수진은 마지막 두장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기훈과 종수 사이에 앉아서 고통을 견디느라 잔뜩 일그러진 얼굴. 남자들의 어깨 너머에서 기훈의 부축을 받으며 어딘가로 들어가는 뒷모습. 수진은 고개를 들고 당시의 상황을 헤아린 뒤에야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얼굴과 뒷모습이 누구의 것인지 알아챈다. 그러자 기억 속에 흐리게 남은 어제의 자신이 고스란히 누군가의 피사체가 되었다는 사실에 소름이 일어난다. 컵에 반쯤 남은 물을 들이켜고 휴대폰을 들어서 지연의 번호를 찾아 통화를 시도한다. 신호는 가지만 연결되지 않는다. 그녀는 비빔밥을 수저로 크게 한술 떴다가 도저히 소화시킬 자신이 없어서 포기하고 식당을 나온다. 수영장 주차장으로 내려가 자전거에 채워둔 자물쇠에 열쇠를 꽂으려는데 착신음이 울린다. 지연이다. 통화 버튼을 누르고 휴대폰을 귀에 대자 호들갑스러운 음성이 수진의 머릿속으로 마구 쏟아진다.

“웬일이야? 네가 나한테 전화를 다 걸고. 어제 일 때문에 그러지? 너를 깨웠어야 했는데 나만 쏙 와버렸잖아. 미안, 미안. 그런데, 사실은 나도 좀 그랬거든. 생각해봐. 남자들 세명이 있는데 나만 혼자였던 거잖아. 걔들이 옛날에나 순진했지 지금은 완전 아저씨들이잖니. 더구나 술까지 마셨으니, 그래서 너 혼자 기훈이랑 방으로 들어갈 때 내가 얼마나 황당했을지, 너 아니? 그래도 나는 이해했어. 왠지 알아? 너 옛날부터 기훈이 좋아했잖아. 그래서 나는, 얘가 아직도 마음이 남아 있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잘되라고 속으로 응원까지 했는데, 근데, 정말 아무 일 없었어?”

“누가 그래?”

“뭐? 아무 일 없었다는 거?”

“아니. 내가 기훈이 좋아했다는 거.”

지연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기쁨이나 호감과는 거리가 먼 웃음이다.

“야, 너 왜 그래? 우리 문예부에서 그거 모르는 애들이 어디 있냐? 너랑 기훈이랑 현우랑, 완전 삼각관계였잖아.”

수진은 기가 막혔다. 그리 심각하지도 않았고 혼자 놀라서 어쩔 줄 모르다 저절로 사라졌던 감정이어서 남들이 알아챌 거라고는 짐작조차 못했다. 혹시, 세영이? 설마, 그럴 리가.

“근데 기훈이 말이야, 안 좋은 소문 많았잖아. 현우랑도 그렇고 그런 사이다, 동성애자다, 아니다 양성애자다. 거기다 몰카 사건까지 터지고. 애가 겉보기와 달리 음흉한 구석이 많아. 너는, 괜찮아? 정말 무슨 일 없었어?”

기훈과 현우처럼 유난히 친한 사이여서 게이니 레즈니 하는 놀림을 받던 동성 친구들은 그들 말고도 많았다. 수진은 아이들의 유치한 놀림감에 불과했던 그들의 관계가 십년이라는 시간이 무색하게 지금도 진지하게 진행 중이라고 믿고 있는 정신 나간 인간을 설득하고 진위를 밝히는, 그런 멍청한 짓에 에너지를 낭비하고 싶지는 않다. 수진은 묻는다.

“그래서, 너랑 영민이는 거기서 몇시에 나온 거야?”

“우리? 글쎄? 한시? 두시? 두시 반인가? 기훈이가 빨리 가라고 얼마나 눈치를 주던지, 더 있고 싶어도 못 있겠더라. 그래서 우리는 은근 기대했는데. 솔직히 말해봐. 다 큰 성인들끼리 뭔 일 있는 게 무슨 흉이라고 그래.”

지연은 대답을 기다리는 눈치지만 수진은 그대로 전화를 끊어버린다. 지연은 십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다. 그렇다면 수진도 그래야만 한다. 왜 너희만 갔느냐고 따지지도 못했고 사진 얘기는 꺼내고 싶지도 않았다. 어설프게 건드렸다가 이상한 사람 취급만 당할 게 뻔하니까. 수진은 다시 기훈에게 전화를 건다. 그는 받지 않는다. 할 수 없이 영민의 번호를 선택한다. 신호가 길게 이어져서 어서 받으라고 내심 재촉하길 여러번 하고서야 통화는 연결된다. 영민은 아무것도 모르는 듯 웬일이냐고 묻는다. 수진은 어제 몇시에 기훈의 집에서 나왔는지, 지연과 함께 나왔는지, 종수는 왜 먼저 갔고 분위기는 어땠는지, 주로 무슨 얘기들이 오갔는지, 지연에게 묻지 못해 답답했던 것들을 빠른 말투로 물었는데, 영민에게는 그게 화가 나서 따지는 것처럼 들렸던 모양이다.

“너 왜 그래? 무슨 일 있냐?”

수진은 아무 말 없이 영민의 대답을 기다린다. 영민은 느리게 말을 이어간다.

“정확히 두시 되는 거 보고 거기서 나왔고, 지연은, 거기 그냥 버려두고 싶었지만 너무 취해서 어쩔 수 없이 데리고 나왔고, 종수는, 그 자식은 지가 혼자 삐져서 간 거고, 그리고, 무슨 얘기를 했느냐고? 몰라. 기억도 안 나. 술 취해서 무슨 대단한 대화를 나눴겠냐. 다 헛소리지.”

헛소리? 그냥 헛소리? 기훈이랑 나랑 그렇고 그런 사이다, 그런 헛소리?

“나는?”

“너? 너가 뭐?”

“나는 왜 안 깨웠니? 나도 깨워서 같이 데리고 나왔어야 하는 거 아냐?”

“너는, 기훈이가 잘 챙긴다고 했고, 나는 지연이, 솔직히 걔 때문에 정신도 없었고, 지연이가 좀 많이 취해서, 너까지 내가 어떻게 할 수는 없었는데, 그런데, 그런데 너 지금 나한테 따지는 거니? 왜? 뭔 일이라도 있었어? 아, 이거 좀 짜증 나려고 그러네.”

“따지는 게 아니라 정확한 사실이 알고 싶어서 그래.”

“정확한 사실? 야, 지연이 이년이 어제 나한테 뭐랬는지 알아? 나 혼자 낑낑대면서 차에 겨우 실었더니 자기 몸 터치하지 말라고 자꾸 건드리면 성추행으로 신고한다고 그러더라. 알아? 그게 정확한 팩트야. 완전 또라이 같아. 그렇게 걱정되면 술을 처마시지를 말든가. 기껏 챙겼더니, 뭐? 성추행? 왜? 너도 신고하게?”

거기서 내 얘기가 왜 나와? 내가 걔랑 똑같아? 나도 또라이라는 뜻이야?

“너는 술 마시고 그렇게 취한 적 없니?”

“있지. 아주 많지. 그래서 누가 나 챙겨주면 너무 고맙더라. 다음 날 술 깨면 바로 달려가서 신세 많았다고 인사하게 되더라. 나는 그렇던데, 너희는 어째 신고할 생각부터 하냐?”

술에 취해 떠든 헛소리를 도대체 어디에 갖다 붙이는 건데? 내가 언제 신고한다고 했어?

“너는 술 마시고 필름 끊겼을 때 퍽치기 당하고 몰매 맞아도 할 말 없겠다? 그치?”

“뭐라는 거야? 내가 지연이한테 정말 뭔 짓이라도 했단 거야? 너 그런 일 당했니? 기훈이가 너한테 그랬어?”

수진은 하마터면 그렇다고 말할 뻔했다. 하지만 바로 영민의 질문을 부정하지도 않는다.

“와, 여자들, 진짜 대단하다. 세상 남자를 죄다 범죄자 취급하는구나.”

“아니, 아니야. 나는 그저 어제 일을 정확하게 알고 싶을 뿐이야.”

“내가 분명히 말하는데 네가 어제 무슨 일을 겪었는지 모르지만, 너는 분명히 스스로 신이 나서 술을 마셨고 네 발로 기훈이 방으로 걸어 들어갔어. 우리 모두 똑똑히 봤으니까. 그후 너한테 무슨 일이 있었다면 그건 네가 자초한 거야, 알겠어? 그렇다고 내가 지금 기훈이 편을 들겠다는 건 아냐. 나는 그 자식이 싫어. 그 새끼는 변태 같은 놈이거든. 그 호모 새끼가 현우와 결혼을 한다 해도 이상하지 않고 너한테 무슨 병신 같은 짓을 했어도 전혀 놀랍지 않아. 그 새끼는 원래 그런 놈이니까. 겉과 속이 완전히 다른 사이코패스 같은 놈이라고. 우리들 중에 그걸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너만 빼고 말이야.”

수진의 손가락들이 떨리는 게 보인다. 휴대폰을 놓칠 것 같아 두 손으로 꼭 붙들지만 떨림은 가라앉지 않는다. 수진은 겨우 소리 내어 묻는다.

“기훈이가 나한테 무슨 짓을 했는데?”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영민은 버럭 소리를 내지르더니 전화를 끊는다. 전화기 너머에서 쏟아지던 말들이 갑자기 멈추면서 말들의 무게에서 놓여나자 수진은 뺨이라도 한대 얻어맞은 듯 그 자리에 주저앉는다.

 

수진은 자전거를 주차장에 그대로 둔 채 다소 멍한 상태로 길을 걷다가 스타벅스로 들어간다. 집에 가고 싶지 않았고 혼자 있고 싶지 않았고 커피를 마셔야만 했다. 실내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남자끼리 대화를 나누거나 여자 둘이 마주 보고 웃는 테이블도 있고 남녀 커플도 있다. 혼자인 사람들도 의외로 많다. 그들은 모두 책이나 노트북이나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다. 수진은 혼자다. 대화를 나눌 사람도 없고 열중해서 바라볼 그 무엇도 없다. 휴대폰은 손도 대기 싫다. 수진은 문득 자신이 다른 사람이 된 것 같다. 그건 TV나 영화에서 본 적은 있어도 직접 겪어본 적은 없는 감정이어서 그녀는 어찌할 바를 모른다. 누군가 벤티 사이즈의 아메리카노를 들고 와서 주문하신 거 맞느냐고 묻고 나서야 수진은 주문한 커피가 나왔음을 직원들이 수차례 알렸지만 전혀 듣지 못하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남자가 방에서 혼자 잠들어 있는 여자를 상대로 할 수 있는 최악의 행동은 무엇일까? 성폭행? 설마. 내게 그런 일이? 말도 안 돼. 그러나 수진의 손가락이 인터넷 검색창에 입력한 단어는 ‘성폭행 검사’다. 성폭행 여부를 의학적으로 판단하기 위해 행해지는 검사. 경찰에서 그것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판단 및 승인해야 하고 담당 경찰관의 동행과 참관하에 지정 병원에서 검사가 이루어진다. ‘성폭행 검사가 필요한 상황’이란 도대체 뭘까? 나도 거기에 해당될까? 바보 같은 생각이다. 수진은 얼른 창을 닫고 주위를 살핀다. 실내는 사람으로 가득하지만 그녀에게 신경을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수진은 고개를 젓는다. 다른 건 몰라도 그런 일이 없었다는 건 확신할 수 있다. 그 정도도 알아채지 못할 만큼 둔하지는 않으니까. 그럼, 또 뭐가 있지? 성추행? 도촬? 그 방. 기훈이 내준 방. 그 방에 뭐가 있었지? 커튼이 달린 창문과 침대. 그리고? 모르겠다. 방문을 잠갔던가? 기억나지 않는다. 약을 먹지 말았어야 했다. 뭔지도 모르고 덥석 받아먹다니. 왜 그랬을까? 바지는? 청바지의 단추 하나가 열려 있었다. 잠결에 내 손으로? 그게 그렇게 쉽게 풀려? 기훈은, 빈방도 있을 텐데 왜 소파에서 잤을까? 기훈을 깨웠어야 했다. 깨워서 물었어야 했다. 바보같이 그냥 나오다니. 애초에 거기를 가는 게 아니었어. 그따위 고등학교 동창들. 수진은 어제의 모든 순간들이 후회스럽다. 카톡의 신호음이 울린다. 수진은 화들짝 놀라서 휴대폰을 무음으로 바꾼다. 종수가 사진 여러장을 올린다. 카메라에 포착된 찰나의 표정들은 너무도 기이하다. 딱딱한 얼굴들은 화가 난 듯 벌겋게 달아올랐고 시선은 적의로 가득 찼으며 심지어 웃는 얼굴 위에도 허위와 자조의 잔상들이 떠돌았다. 수진의 미간이 구겨진다. 뭐가 그리 좋은지 술기가 잔뜩 올라서 입을 크게 벌린 채 웃고 있는 자신의 얼굴이 바보 같고, 돼지 등뼈 한조각을 손에 들고 살점을 물어뜯는 모습은 너무 짐승 같아서 수진은 두 눈을 질끈 감는다. 종수와 지연의 메시지들이 빠르게 올라온다. 발로 찍었냐? 사진들이 다 왜 이래? 건질 만한 게 너무 없어. 너도 만만치 않아. 저게 뭐야? 애들이 다 맛이 갔어ㅋㅋㅋ. 영민도 등장한다. 사진들이 존나 몰카 같다ㅋㅋ. 수진은 소리 지르고 싶다. 이따위 사진들을 도대체 왜 찍은 거냐고, 당장 내리라고. 하지만 손가락은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그들의 문장은 계속 발랄하다. 현장감 있고 좋은데 머. 우리가 전문가도 아닌데 재밌잖아 대충 넘어가. 기훈아 너도 사진 올려라. 그래, 기훈이 사진 보고 싶다. 빨랑 올려 궁금해 궁금해^^. 수진은 입력을 포기한다. 뭐라고 적든 저들이 들을 리 없다. 기분대로 한다면 단톡방에서 나가버리고만 싶다. 아니, 아직은 아냐. 지금 나가면 더 이상하게 여길 거야. 지들 멋대로 추측하고 부풀리고. 쓰레기들. 수진이 당장 할 수 있는 최선의 대응은 알림차단뿐이다.

 

수진은 스타벅스에서 나와 자전거를 타고 집을 향해 달린다. 차량들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비켜가며 그들의 성난 경적들을 무시하고 미친 듯이 달려서 집 주위를 한참이나 빙빙 돌다 날이 어두워지고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고 나서야 집으로 들어간다. 집에서도 수진은 가만히 있지 못한다. 집 안 청소도 하고 세탁도 하고 쌓아둔 쓰레기들도 내다버린다. 밥은 먹지 않는다. 콜라와 오렌지주스만 계속 마셔댄다. 침대에 누워서 TV 화면을 향해 시선만 던져둔 채 리모컨으로 끊임없이 채널만 바꾸고 있는데 세영의 문자 메시지가 온다. 나 지금 존나 욕먹는 중 ㅋㅋㅋ. 메시지에 링크된 URL을 타고 들어가니 세영이 트위터에 올린 글이 나온다. ‘친구가 동창인 남자의 원룸에서 여럿이 와인을 마시다 두통이 심해져 약을 먹고 깜박 잠이 들었는데, 아침에 깨서 보니 침대에 이불도 덮어주고 남자애는 혼자 소파에서 자고 있더래. 친구는 무사히 돌아왔고. 그 남사친, 요즘 보기 드물게 너무 젠틀하지 않음?’ 세영의 글에 달린 백개가 넘는 답글 중에는 간혹 남자애를 칭찬하는 글도 있지만 대부분의 답글에서 세영은 남성 혐오자였고 세영의 친구는 아무 데서나 몸을 굴리는 부주의한 날라리였으며 젠틀한 남사친은 동성애자거나 페티시즘 취향의 변태거나 소심한 병신이었다. 그리고 적지 않은 답글들이 아무 일 없었던 거 맞느냐고 조롱했다. 하지만 수진이 화가 난 대상은 모르는 이들의 악의 넘친 반응들이 아니다. 수진은 세영에게 전화를 건다.

“너 지금 제정신이니? 도대체 그런 글을 왜 올려?”

“왜 그래? 내 글 안 읽었어? 나는 좋은 뜻으로 쓴 거잖아.”

“좋은 뜻? 거기 달린 악플들 안 보여?”

“그건 이상한 인간들이 많다는 증거일 뿐이야. 그리고, 뭐 어때? 어차피 네 얘기라는 거 아는 사람도 없는데.”

“아는 사람이 없다고?”

“누가 알아? 우리 애들? 걔들은 오히려 재미있어할걸.”

너였구나. 네가 애들에게 기훈에 대한 내 마음을 떠들어서, 기어코 지연이 그년 입에서 나온 헛소리를 내가 듣고 말았던 거야. 맞지? 그런 거지? 수진은 말한다.

“내가 알잖아.”

“뭐? 무슨 소리야?”

“내가 안다고. 내가 싫다고!”

자신의 입에서 나온 목소리가 생각보다 너무 커서 수진은 놀란다. 하지만 주워 담을 생각은 없다. 잔뜩 가라앉은 세영의 목소리가 들린다.

“너 왜 그래? 괜찮아? 무슨 일 있어?”

수진은 입에서 흘러나오는 한숨을 도로 삼키고 건조한 어투로 말한다.

“아니. 아무 일 없어.”

 

수진은 옷장에서 어제 입었던 청바지를 꺼낸다. 청바지에 다리를 넣고 배에 힘을 준 상태에서 두 손으로 허리춤을 힘껏 당겨 겨우 단추를 잠근다. 지퍼를 채우고 전신 거울 앞에 서서 거울 속을 바라본다. 평소에 입는 바지보다 한 치수 작은 스키니진이다. 수진은 단추를 푼다. 잠글 때보다는 좀더 수월하다. 고개를 들어보니 어떤 여자가 눈에 들어온다. 바지의 단추가 풀어진 것도 모른 채 정면만 멀뚱하니 바라보는 여자의 모습은 어쩐지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 단지 단추 하나 풀었을 뿐인데 마치 모든 걸 포기한 사람처럼 보인다. 아무 데서나 몸을 굴리는 부주의한 날라리. 수진은 청바지를 벗어서 쓰레기통에 넣는다.

 

휴대폰 화면에 기훈의 전화번호를 띄워놓고 수진은 생각에 잠긴다. 기훈은 왜 전화를 걸지 않을까? 부재중 전화가 두개나 있으면 확인을 해야지. 더구나 내 전화라는 걸 알 텐데. 아니, 그래서 모른 척하나? 내 전화라서? 수진은 조금이라도 마음이 진정되길 기다려보지만 아무래도 그런 순간은 오지 않을 것 같다. 오히려 그러기 위해서 기훈과의 대화가 필요하다. 수진은 기훈의 번호를 터치한다. 신호음이 두번인가 이어지다 기훈의 음성이 들려온다. 수진은 사과부터 한다. 그게 예의니까. 웃음기 섞인 말투로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너무 놀랐고 쪽팔려서 혼났다며 자신의 실수를 가볍게 인정한 뒤, 소파에서 자는 기훈의 모습을 보고 너무 미안했지만 차마 깨울 수도 없어서 그냥 왔다고, 다시 한번 사과한다. 그리고 자연스러운 귀결처럼 묻는다. 빈방도 있을 텐데 왜 거실 소파에서 잤느냐고.

“내가 바닥에서는 못 자서, 침대가 하나뿐이라 어쩔 수 없었어.”

짐작대로다. 그의 대답은 당연하고 상식적이며 반박의 여지도 없다. 그러나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수진의 의문은 개운하게 해소되지 않는다. 약에 대해 물어도 마찬가지겠지.

“그래? 괜히 또 미안해지네.”

“아니, 근데, 나 가끔 소파에 누워서 책 읽다 자기도 해. 생각보다 편하거든.”

수진은 이제 사과는 그만하고 싶다. 그래서 대화의 방향을 바꾼다.

“단톡방에 애들이 올린 사진 봤어?”

“응. 봤어.”

“넌 사진 안 올려?”

“나? 올릴 사진이 없는데?”

“사진이 없어?”

“응.”

“왜?”

“왜긴, 안 찍었으니까 없지.”

“사진을 안 찍었다고? 정말?”

대답이 없다. 짧고 무거운 침묵이 흐르고, 기훈이 묻는다.

“왜 내가 사진을 찍었다고 생각하지?”

기훈의 목소리가 무거워졌다. 수진도 그렇게 느꼈지만 그녀의 말투는 달라지지 않는다.

“애들이 그러던데, 그래서 당연히 그런 줄 알았지.”

“내가 사진 찍는 거 봤어?”

“아니, 못 봤지만, 내가 못 봤다고 네가 안 찍은 게 되는 건 아니잖아.”

“애들이 찍었다고 하면 찍은 게 되고?”

“아냐?”

“뭐가?”

“정말 안 찍었냐고.”

기훈이 말이 없다. 수진은 그의 대답을 기다린다. 하지만 돌아온 건 질문이다. 수진이 너무도 많이 들었던 질문.

“너, 무슨 일 있니?”

돌이켜보니 수진은 기훈과 단둘이 대화를 한 적이 없다. 십년 전 언젠가 우연히 주고받았던 말들도 사적인 건 아니었다. 밥 먹었니? 마음에 들어? 괜찮아? 이런 말들을 수진은 들어본 적이 없다. 그래서 새삼 안부를 묻는 기훈의 목소리는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났음을 알리는 신호음처럼 들려서 수진의 가슴은 서늘해진다. 수진은 말한다.

“그건 내가 묻고 싶은 질문이야. 말해봐. 어제 무슨 일 없었어?”

기훈은 쉽게 대답하지 않는다. 수진은 길게 기다리지 못하고 다시 묻는다.

“사실대로 말해줘. 내가 네 방에서 자는 동안 나한테 정말 아무 일 없었어?”

기훈이 아무 일 없었다고 말하면 아무 일 없었던 게 되나? 기훈이 사실이라고 말하면 사실이 되고? 사실? 그게 뭔데? 기훈이 말한다.

“당연하지. 너도 알잖아. 아무 일 없었다는 거.”

내가 안다고? 내가 뭘 알아? 아무것도 모르겠는데, 도대체 뭘 안다는 거야? 내가 아는 건 오직 내 기분뿐이야. 아무 일 없었다면 내 기분이 왜 이래? 모든 게 엉망이야. 완전 거지 같다고. 수진은 말한다.

“나는 모르겠어.”

수진은 더이상 묻지 않는다. 궁금한 건 많지만 무엇을 묻고 무엇을 답하든 달라지는 건 없을 것 같다. 수진은 그저 기다린다. 기훈이 뭔가 말해주기를, 수진이 안도할 수 있도록 기훈만 아는 사실 한가지만, 사적인 한마디만 더 건네주기를. 오직 그것만 바란다. 하지만 그는 십년 전에도 그랬듯이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수진이 말한다.

“알았어.”

수진은 전화를 끊는다.

 

수진은 약국에 가서 두통약과 수면유도제를 산다. 그녀는 두 종류의 약을 동시에 먹어도 괜찮은지 약사에게 묻는다. 수진의 엄마와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여자 약사는 자기도 머리가 너무 아파서 잠을 못 자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늘 그렇게 먹는다고, 상관없다고 말한다. 수진은 집에 돌아와 두통약을 먹는다. 모든 창문을 잠그고 커튼은 빈틈없이 여민다. 현관문이 제대로 잠겼는지 두번이나 확인한다. 한번도 사용한 적이 없던 침실 문손잡이의 잠금 버튼도 두 눈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힘주어 누른다. 그리고 수면유도제를 먹는다. 수진은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워서 평소처럼 휴대폰을 든다. 카톡 아이콘에 붙어 있는 숫자 1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새로 업데이트된 메시지가 있다는 뜻이지만 수진은 외면한다. 휴대폰을 내려놓고 눈을 감는다. 약기운이 얼른 퍼져서 이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멀리 데려가주기만 기다린다. 하지만 약의 효과는 수진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 어둠과 고요 속에서도 수진의 신경은 가만히 있지 않는다. 이틀 동안 있었던 일들을 수진의 눈앞에 다시 불러내서 무심코 지나쳤던 말과 행동과 시선 속에 숨겨진 면들을 들춰내고, 카톡의 ‘1’이라는 기호 뒤에 뭔가 있을지 모른다고 계속 암시하고, 그게 뭔지 확인하라고 끈질기게 속삭인다. 결국 수진은 못 이기는 척 다시 눈을 뜨고 단톡방에 들어간다. 기훈이 올린 사진 한장이 있다. 뭐야? 사진 없다며? 안 찍었다며? 대학로의 인도 위에서 모두 한줄로 서서 찍은 사진이다. 기훈은 사진 속에 있다. 사진을 찍은 건 세영의 남자친구다. 반듯한 구도와 정확한 앵글 안에서 여섯명의 고교 동창들이 환하게 웃고 있다. 하지만 수진에게 보이는 건 그들의 미소가 아니다. 수진은 거기 없는 걸 보고 있다. 현우. 현우가 없어. 그녀는 처음으로 현우에 대해 생각한다. 그를 둘러싼 소문과 추측들을 다시 떠올리고 진작부터 품었어야 했으나 무심히 지나쳤던 의문들을 곱씹는다. 그리고 수진은 깨닫는다. 자신이 아무리 애를 써도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가려낼 수 없음을, 자신의 처지도 현우와 결코 다르지 않음을, 그리하여 앞으로 그들의 단톡방에 올라올 모든 메시지에 숫자 1이 아니라 숫자 2가 남게 될 것임을. 수진은 휴대폰의 전원을 끈다. 사방은 온통 어둠뿐이지만 그녀는 눈을 감지 않는다. 어둠 속 무언가를 길게 바라보다 수진은 고개를 젓는다. 아니. 나는 아니야. 그녀는 어둠을 외면하듯 옆으로 돌아누워 눈을 감는다. 절대 아니야. 그럴 수 없어. 나는 그 멍청이랑은 달라. 머릿속에 똬리를 틀기 시작한 수진의 생각들은 뱀의 몸뚱이처럼 깊은 동굴 속으로 계속 이어진다. 나는, 이대로 안 끝내. 싸울 거야. 고등학교 동창? 문예부? 다 필요 없어. 무사하냐고? 괜찮으냐고? 닥쳐. 나는 안 숨어. 꼭 밝혀낼 거야. 무슨 일인지,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필요하면, 뭐든 할 거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포기 안 해. 두고 봐. 어째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난 건지, 나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왜 그랬는지, 꼭 알아내고 말 거야, 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