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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우리는 정상으로 돌아갈 수 없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세상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피터 베이커 Peter C. Baker
프리랜서 저술가. 가디언(The Guardian) 장문기사 고정필자.
apcbaker@gmail.com
* 이 글은 The Guardian에 게재된 “‘We can’t go back to normal’: how will coronavirus change the world?”(2020.3.31)를 번역한 것이다. ⓒ Guardian News & Media Ltd 2020 / 한국어판 ⓒ(주)창비 2020.
격변의 시대는 언제나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시대이다.
일부 사람들은 팬데믹이 사회를 개조하고 더 나은 미래를 건설할
한 세대에 한번 있을 법한 기회라고 믿는다. 다른 사람들은
팬데믹으로 인해 기존의 불의가 더 악화되기만 할 가능성을 우려한다.
—피터 베이커(Peter C. Baker)
모든 것이 새롭고 믿기 어려우며 감당하기에 너무 벅찬 느낌이다. 동시에, 자꾸 되풀이되는 오랜 꿈속으로 걸어들어간 것 같기도 하다. 어느 면에선 사실이다. 예전에 TV나 블록버스터 영화에서 본 적이 있다. 대충 상황이 어떠하리라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는데, 그렇다고 마주친 현실이 덜 낯설어지는 것이 아니라, 왠지 더 낯설다.
지난 2월까지만 해도 불가능하게 여겨졌던 사태의 진전—그저 며칠이 아니라 몇년은 걸려야 할 일—에 관한 보도가 매일 날아든다. 우리는 뉴스를 따라잡는 것이 중요하다는 시민의식 때문이 아니라, 마지막 보도를 접한 이후 너무 많은 일들이 일어났을 가능성 때문에 계속 새로운 뉴스에 귀 기울인다. 사태의 진전이 너무 급속하게 이루어져 그 진전이 얼마나 급진적인 것인지 깨닫기 어려울 정도다.
기억을 몇주 되돌려 누군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고 상상해보라: 한달 내로 학교가 문을 닫을 것이다. 거의 모든 단체 모임이 취소될 것이다. 세계적으로 수억의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게 될 것이다. 각 정부는 사상 최대로 꼽힐 만한 경기부양책을 서둘러 마련할 것이다. 곳에 따라서는 집주인이 집세를 받지 않고, 은행이 주택 담보 대출금을 징수하지 않고, 집 없는 사람들이 공짜로 호텔에 머물 수 있게 될 것이다. 정부가 직접 지급하는 기본소득에 대한 실험이 진행될 것이다. 세계의 많은 부분에서 가급적 최소 2미터의 거리를 상호 유지하는 공통 과제가—각기 다른 정도의 강제와 설득이 있기는 하겠지만—수행될 것이다. 이런 말을 들었다면, 과연 믿었겠는가?
현기증이 나는 건 단순히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들의 규모나 속도 때문만은 아니다. 민주주의 체제가 이처럼 큰 조치를 신속히, 혹은 전혀 취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듣는 데 익숙해졌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이 자리에 서 있다. 역사를 조금만 살펴봐도 위기와 재난이 빈번히 변화를 위한 계기, 많은 경우 더 나아지기 위한 계기가 되어왔음을 알 수 있다. 1918년 전지구적으로 확산된 스페인 독감으로 인해 많은 유럽 국가에서 국민 보건 서비스가 생겨나게 되었다. 대공황(Great Depression)과 2차대전이라는 한쌍의 위기는 현대 복지국가의 터전을 마련했다.
하지만 위기는 사회를 더 어두운 길로 내려 보낼 수도 있다. 9·11테러 사건 이후 시민에 대한 정부의 감시가 폭증하는 한편, 조지 부시(George W. Bush)는 무한 점령으로 이어진 새로운 전쟁에 착수했다.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침략한 지 19년 만에 아프가니스탄 주둔 병력의 숫자를 줄이려는 미 군부의 시도가 코로나바이러스와 관련된 복잡한 사정으로 인해 늦추어지고 있다.) 또다른 최근의 위기로 2008년의 금융위기는 엄청난 공공비용을 들여 은행과 금융기관을 사고 이전의 정상 상태로 복구하고자 했고 의도대로 수습된 반면, 전세계적으로 공공서비스 부문에 대한 정부지출은 대폭 삭감되었다.
위기가 역사의 진로를 결정하기 때문에, 그것이 어떤 식으로 전개되는지 연구하는 데 생애를 바친 수백명의 사상가들이 있다. 이러한—‘위기학’ 분야라고 부를 수 있을—작업은 주어진 공동체에 위기가 찾아올 때마다 그 공동체의 기저 현실이 어떻게 적나라하게 드러나는지 낱낱이 기록한다. 누가 더 많이 갖고 있고, 누가 더 적게 갖고 있는지. 권력은 어디에 있는지. 사람들이 소중히 여기는 것은 무엇이고,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인지.
이러한 위기의 순간에 사회의 고장 난 부분은 그것이 무엇이든 얼마나 심하게 고장 났는지가 드러나게 마련이며, 많은 경우 뇌리를 떠나지 않는 사소한 이미지나 이야기의 형태를 띤다. 지난 몇주간 뉴스 보도로 인해 우리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예를 접하게 되었다. 항공사들이 최우수 항로에 대한 자사의 자리를 지키려는 단 한가지 목적만으로 완전히 비었거나 거의 빈 항공기를 다수 운항하고 있다는 보도가 있다. 프랑스 경찰이 록다운(lockdown) 조치를 어기고 밖에 나와 있다는 이유로 집 없는 노숙인들에게 벌금을 물리고 있다는 보도도 있다. 뉴욕주의 수감자들은 손세정제를 병에 담는 일을 하는 댓가로 한시간에 1달러도 채 못 되는 임금을 받고 있지만, 정작 자신들은 알코올이 들어 있다는 이유로 세정제를 사용할 수 없다. 더구나 그들이 갇힌 감옥은 비누도 거저 주지 않아 매점에서 사서 써야 한다.
그러나 재난과 비상사태가 세상을 있는 그대로만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정상성의 장막을 찢어 열어젖히기도 한다. 벌려진 틈 사이로 우리는 다른 세상의 가능성을 얼핏 보게 된다. 재난을 연구하는 일부 사상가는 잘못될 가능성이 있는 모든 것에 더 초점을 맞춘다. 다른 일부는 좀더 낙관적인 태도로, 잃는 것뿐 아니라 무언가 얻을 수도 있다는 관점으로 위기에 접근한다. 물론 모든 재난은 성격이 다르며, 결코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다. 손실과 이득은 항상 공존한다는 얘기다. 사후에 돌이켜보았을 때에야 우리가 진입하고 있는 새로운 세상의 윤곽이 분명해질 것이다.
비관적 견해는 위기로 인해 나쁜 상황이 더 나빠진다고 본다. 재난—특히 팬데믹—연구자들은 재난이 외국인 혐오와 소수인종을 속죄양으로 삼는 경향에 불을 지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14세기 유럽에 흑사병이 돌았을 때, 크고 작은 도시가 외부인의 출입을 차단했다. 그리고 ‘탐탁지 않은’ 공동체 성원들, 대개는 유대인들을 공격하고 추방하고 살해했다. 1858년, 뉴욕시의 폭도들은 스태튼아일랜드(Staten Island)의 이민자 격리 병원에 난입해서 모두 떠나기를 요구한 뒤 병원을 불태워버렸다. 이 병원으로 인해 병원 밖 사람들이 황열병(yellow fever)의 위험에 노출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현재 위키피디아에는 ‘2019~20년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 관련 외국인 혐오증과 인종주의’ 사례를 35개국 이상으로부터 취합해놓은 페이지가 있다. 이들 사례의 양태는 모욕으로부터 공공연한 폭행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다.
세계화가 배양한 재난의 역사를 기록한 미국의 유명한 사학자 마이크 데이비스(Mike Davis)는 “완전히 합리적인 세상이라면 국제적 팬데믹이 국제주의의 확장으로 이어지리라 가정해도 좋을 것”이라고 말한다. 2005년 발생한 조류독감의 위협에 관한 책을 쓴 데이비스가 보기에, 팬데믹은 전지구적 자본주의가 (사람과 물건의 부단한 움직임 때문에) 이러한 위기에 특히 취약하다는 점, 동시에 자본주의적 사고방식으로는 (이윤을 넘어서는 관점에서 생각할 능력이 없으므로) 이를 다룰 수 없다는 점을 드러내는 위기의 완벽한 예다. “합리적인 세상이라면, 우리 자신은 물론 더 가난한 나라들도 사용할 수 있도록 기본 필수품—진단 도구, 마스크, 호흡기—의 생산을 증가시킬 것이다. 모두 함께해야 할 싸움이니까. 하지만, 세상이 꼭 합리적인 것은 아니다. 이 때문에 타인을 악마로 만드는 사례와 고립에 대한 요구가 많을 수 있다. 이는 세계 각지에서 더 많은 죽음과 더 많은 괴로움을 의미하게 될 것이다.”
미국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신종코로나바이러스를 “중국발(發)”로 낙인찍고, 팬데믹 사태를 국경 수비를 강화하고 망명 신청자를 더 적게 받아들일 구실로 활용하느라 애쓰고 있다. 공화당 측 공직자, 싱크탱크(think tank), 언론 매체는 코로나19가 중국에서 만든 인공 생물학 무기라고 주장하거나 암시해왔다. 이에 맞서 일부 중국 관리들은 미국 군인들을 통해 중국에서 전염병이 발생하게 된 것이라는 음모론을 적극 개진해왔다. 유럽에서는 헝가리 수상 빅토르 오르반(Viktor Orbán)이 최근 다음과 같이 공표했다. “우리는 양대 전선에서 전쟁을 치르고 있다. 하나의 전선은 이주(migration)이며, 다른 하나는 코로나바이러스와의 싸움이다. 둘 다 움직이면서 확산되기 때문에, 둘 사이에는 논리적 연관성이 있다.”
전쟁을 치르려면 적에 대해 가급적 많이 아는 것이 유리하다. 하지만 긴박한 위기가 닥치면 장기적 해악에 대한 고려 없이 감시 기제를 작동시키기 쉽다. 『감시 자본주의 시대』(The Age of Surveillance Capitalism)의 저자이자 학자인 쇼샤나 즈보프(Shoshana Zuboff)는 9·11 이전, 미국정부가 웹 사용자들에게 개인정보 사용 가능성 여부에 대한 실제적 선택권을 부여하도록 고안된 중대한 규제 법안을 개발 중이었다는 사실을 내게 상기시켰다. “불과 며칠 사이에 ‘개인 사생활 보호의 규범과 권리를 위반하는 이들 기업을 어떻게 규제할 것인가’에서 ‘우리에게 데이터를 수집해줄 수 있도록 이들 기업을 어떻게 양성하고 보호할 것인가’로 관심이 바뀌었다”고 즈보프는 말한다.
시민들을 훨씬 더 면밀히 감시하려는 정부, 그리고 그런 일을 함으로써 부를 축적하려는 기업에 전지구적 팬데믹만큼 완벽한 위기를 상상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요즘 중국에서는 드론을 이용하여 안면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은 사람들을 수색하고, 찾아내면 드론에 내장된 스피커로 경찰의 호통을 방송한다. 독일, 오스트리아, 이딸리아, 벨기에 모두 사람들의 동선을 추적하기 위해 주요 통신사들이 보내는 데이터를—지금은 익명으로—사용하고 있다. 이스라엘에서는 지금 국가안보국이 감염된 개인의 전화 기록에 접근하는 것이 허용된다. 남한에서는 잠재적 감염 가능성이 있는 개인들을 식별하고, 그들이 어디에 갔었는지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는 문자메시지를 일반 국민에게 보낸다.
모든 감시가 본질적으로 악의적인 것은 아니며, 새로운 기술 도구들이 결과적으로 바이러스와 싸우는 데 기여를 할 수도 있겠지만, 즈보프는 이들 긴급 조치가 영구화되고, 일상생활에 너무 깊숙이 결부되어 그 원래의 목적이 망각될 것을 우려한다. 록다운 조치로 인해 우리 중 많은 수가 집에 앉아 컴퓨터와 전화에 고착되어, 그 어느 때보다 더 대규모 기술업체에 의존하게 되었다. 바로 이들 기업 다수가 문제해결의 필수 불가결한 부분으로 자신들을 정부에 적극 선전하고 있다. 그들이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물어볼 가치가 있다. 채텀 하우스(Chatham House)에서 테크놀로지와 민주주의의 상호작용에 관해 연구하는 바수키 샤스트리(Vasuki Shastry)는 “팬데믹 같은 사태에 대처하려 할 때, 사람들이 개인 사생활 보호권을 기억하기는 어렵다”라고 말한다. “어떤 시스템의 규모가 일단 커지면, 그 규모를 다시 줄이는 것이 매우 어려워질 수 있다. 그러고 나면 아마도 그 시스템이 다른 용도를 취하게 될 것이다.”
몇주의 간격을 두고, 이스라엘과 헝가리 수상 둘 다 법원이나 의회의 간섭 없이 법령으로 통치할 수 있는 실질적 힘을 얻었다. 한편 영국에서 최근에 입안된 코로나바이러스 법안은 경찰과 이민국 공무원에게 바이러스 감염 의심자의 진단을 위해 이들을 체포하거나 구류시킬 권위를—향후 2년간—부여한다. 전염병이 발생한 이후, 미국 법무부는 비상시에 판사들이 법정 절차를 중지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새로운 규칙을 만들 것을 의회에 요청했고, 그리하여 사람들이 공식적으로 반대 입장을 표명할 기회도 없이 투옥될 가능성을 열었다. “우리 가운데 경찰을 지켜본 사람들은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안다”라고 시위권 보호에 집중하고 있는 영국 단체 넷폴(Netpol: The Network for Police Monitoring)의 케빈 블로우(Kevin Blowe)는 말한다. “이들 권력이 실행되게 되고, 당시로서는 그 실행에 충분한 타당성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얼마 안 있어 이들 권력은 민주주의나 공공의 안전과는 무관한 여타의 목적에 사용된다.”
범세계적 유행성 독감 발생의 증가에 따른 팬데믹 대응의 법적 측면을 다룬 2008년의 한 보고서에서, 미국시민자유연맹(American Civil Liberties Union, ACLU)이 구성한 사학자와 의료윤리학자 팀은 정부가 흔히 공공보건 문제를 범죄자 추적에 더 적합한 사고방식으로 다루는—그들이 보기에 9·11 이후 부활하고 있는—경향이 있다고 한탄했다. 이처럼 매사에 의심하는 사고방식이 결국 소수인종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고 그들은 주장했다. 이같은 전술은 정부와 시민 간에 불신이라는 단단한 쐐기를 박음으로써 질병과의 싸움을 더 어렵게 만들 수 있다. 보고서에 표현되어 있듯이 “질병이 아니라, 사람이 적이 된다.”
위기를 바라보며 어렴풋한 가능성을 엿보는, 또다른 사상 유파도 있다. 이 진영의 사상가들에게 2008년 금융위기의 예는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그런데 이들의 견해에 따르면, 2008년은 패배로 귀결된—대다수 국민은 아주 많은 것을 포기한 데 반해, 적은 소수가 이익을 얻은—반면 코로나19는 정치적 진보로 나아가는 문을 열 가능성이 있다.
“내 생각엔 지금의 우리는 2008년 사고의 여파를 목도하기 전의 우리와는 아주 다르다”라고 미국의 저술가 리베카 솔닛(Rebecca Solnit)은 말하는데, 솔닛은 위기와 위기의 함의에 대한 가장 설득력 있는 요즘 저술가 중 한 사람이다. “예전에는 좌파적 사고로 치부되었을 관념들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합리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 같다. 이전에는 없었던 변화의 여지가 생겼다. 좋은 기회가 열린 것이다.”
그 주장을 가장 간단히 말하면 정치적 현 상태가 무너져야 한다는 사실을 코로나19가 드러냈다는 것이다. 신종코로나바이러스에 대해 들어보기 오래전부터 예방할 수 있고 치료할 수 있는 병으로 사람들이 죽었다. 부가 넘쳐나는 사회에서 사람들이 불안정한 삶을 살았다. 전문가들이 팬데믹을 포함한 파멸적 위협이 임박했음을 경고했지만, 그 위협에 대해 거의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다. 동시에, 최근 몇주간 각 나라 정부가 취한 파격적 조치는 국가가 얼마나 많은 권력을 쥐고 있는지 생생히 증언한다—대담한 행동을 취하지 않으면 적법성을 완전히 잃어버릴 위험이 있다는 걸 깨닫게 될 때, 국가가 어느 정도까지 이루어낼 수 있는지 (그것도 아주 빨리!) 확실히 보여주었다. 판카지 미슈라(Pankaj Mishra)가 최근에 썼듯이 말이다. “재난이 나고서야 국가가 시민을 보호할 원래의 책임을 떠맡게 되었다.”
오랜 세월, 주류 정치에서 전통적인 노선은—보건부터 주택과 같은 기본 생계비에 이르기까지 모든 영역에서—세상에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광범위한 정부의 개입은 실현 가능한 해결책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대신, ‘공익’과 같은 낡은 관념이 아니라 이윤을 얻으려는 욕망에 동기를 두고 있는 기업에 더 큰 역할을 부여하는 ‘시장’이 가장 효과적인 해결책이라는 이야기를 들어왔다. 그러더니 바이러스가 퍼지기 시작했고, 각 정부가 며칠 사이에 수조에 달하는 돈을 썼고—심지어는 시민들에게 직접 수표를 써서 나누어주기까지 했다—실현 가능성의 문제가 갑자기 달리 느껴지게 되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의 과제는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바이러스와 싸우는 것이 아니다. 예전의 일상이 이미 재난이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목표는 바이러스와 싸우는 것—그리고 그 과정에서 예전의 일상을 더 인도적이고 안전한 것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2009년에 출간된 책 『이 폐허를 응시하라』(A Paradise Built in Hell, 한국어판 정해영 옮김, 펜타그램 2012)에서 솔닛은 재난에 관한—1985년의 멕시코시티 지진, 2001년의 테러 공격, 허리케인 카트리나 등을 포함한—사례연구를 통하여, 비상사태가 꼭 나쁜 것들을 더 나쁘게 만들거나 사람들이 반드시 더 공포에 떨고 의심이 많아지고 자기중심적이 되는 때인 것만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오히려 그녀는, 재난이 어떤 식으로 인간에게 비축된 임기응변과 연대와 결의의 곳간을 여는지, 그리고 상실과 고통의 와중에도 목적의식과 기쁨의 주머니를 열어젖히는지 집중 조망했다. 이 책이 재난을 기리자고 제안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재난이 내포하고 있을지 모를 가능성과 재난이 우리를 기존의 방식으로부터 떼어놓는 방법에 유의하자는 제안인 것은 맞다. 솔닛의 말에 따르면, “재난에 대한 ‘공식적’ 대응은 사람들을 해결책의 매우 귀중한 일부가 아닌, 처리해야 할 문제의 일부로 취급함으로써 사태를 망치는 경향이 있다.”
때로는 이런 잘못된 관리가 그저 무능의 결과일 수도 있다—하지만 더 사악한 의도를 숨긴 경우도 있다. 2007년에 출간된 책 『쇼크 독트린』(The Shock Doctrine, 한국어판 김소희 옮김, 살림Biz 2008)에서 캐나다의 저술가 나오미 클라인(Naomi Klein)은 위기 정치에 관한 암울한 설명을 펼쳤다. 클라인의 견해에 따르면, 언제나 1차 재난(지진, 폭풍, 군사분쟁, 경기침체)과 2차 재난(1차 재난에 이어 권력자들이 은밀히 벌이는 나쁜 행각으로, 극단적인 경제개혁 조치를 억지로 밀어붙인다든지, 나머지 사람들이 너무 멍해져서 눈치채지 못하는 동안 자신의 부를 축적하기 위해 위기 후에 찾아온 기회를 독식하는 따위의 행동)이 있다. (실제로 클라인은 때로는 이들이 이 모든 과정이 시작되도록 1차 재난을 교묘하게 설계하기도 한다고 주장했다.)
솔닛의 책과 달리, 『쇼크 독트린』은 모든 일이 끔찍하게 잘못되어갈 때 평범한 사람들이 보여주는 회복력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하지 않는다. (실제로 솔닛은 클라인이 이 부분을 생략한 데 대해 직접적인 비판을 가했다.) 그럼에도 이 두권의 책은 마치 퍼즐 조각처럼 서로 들어맞는다. 두 책 모두 위기가 진행될 때 필연적 혹은 ‘자연적’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의 관점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의 관점으로 위기를 다룬다. 또한 두 책 모두 금융위기의 잔해 속에서 구체화되고 있던 정치적 대화에 시의적절하게 기여했다.
2008년 버락 오바마(Barack Obama)가 당선된 며칠 후, 수석 보좌관 람 이매뉴얼(Rahm Emanuel)이 한 말은 유명하다. “심각한 위기를 결코 낭비해서는 안 된다.” 작금의 좌파들에게 오바마는 대체로 실망스러운 존재이지만, 이 말에는 쉽게 동의한다. 좌파들은 지난 몇차례의 위기에서 자신들이 패배했고, 지금이 만회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한다. 팬데믹에 직면하여 불과 몇주 사이에 이렇게 많은 것을 바꿀 수 있다면, 1년 후에는 얼마나 많이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에게 2008년의 위기와 현재의 위기는 현격한 대조를 이룬다. 신용 부도 스와프(Credit Default Swap, CDS. 은행 등 금융기관이 채무자가 부도, 파산 등으로 빚을 갚지 못하는 사태에 대비하여 보험회사 등 타 금융기관에 일정 수수료를 지불하고 신용사건 발생 시 채무자를 대신해 손실액을 갚아주도록 하는 파생 금융상품—옮긴이)와 부채 담보부 증권(Collateralized Debt Obligation, CDO. 금융기관이 회사채나 대출채권 등을 한데 묶어 이를 담보로 제 3의 기구를 통해 증권을 발행하여 현금을 조달하는 방식의 파생 금융상품—옮긴이)으로 얼룩진 막연하고 불투명한 금융위기에 비해, 코로나바이러스는 비교적 이해하기가 쉽다. 코로나바이러스는 십여가지의 위기가 한데 얽힌 것으로, 그 모든 위기가 순식간에 펼쳐지고 있기 때문에 아무도 그 사실을 놓칠 수 없다. 정치가들이 감염되고 있고, 부유한 연예인들이 감염되고 있다. 우리의 친구와 친척도 감염되고 있다. 꼭 우리 모두가 “그것을 함께 겪고” 있다고 할 수는 없을지 모르지만—언제나 그렇듯, 가난한 사람들이 더 심한 타격을 받는다—2008년의 여파에 비해 그 말이 진실에 가까운 건 사실이다.
이에 낙관론자들은 세상을 달리 보기 시작할 희망이 생겼다고 믿는다. 우리 사이에 문제가 공유된 것으로 인식할 가능성과 사회를 단순히 부와 지위를 놓고 서로 경쟁하는 수많은 개인 이상의 것으로 인식할 가능성이 생겼다는 것이다. 요컨대 시장의 논리가 현재 허용되고 있는 것처럼 인간 존재의 많은 영역을 지배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개별적 상황을 연결시켜 인식하게 되었다”라고 클라인은 말한다. “이 현상은 사람들의 경험과 관계가 있다. 일정 연령의 사람들에게 자본주의의 경험은 오로지 위기의 경험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상황이 달라지길 원한다.”
이 대화의 배경에서 들리는 요란한 소음은 기후위기에 관한 아우성이다. 클라인을 비롯해서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에게 2008년이 다시 되풀이하고 싶지 않은 재난이라면, 기후변화는 닥쳐오리라 예상되는—이미 닥쳤음을 아는—그래서 막아야 하는 훨씬 더 큰 재난이다. 실제로 클라인은 『쇼크 독트린』을 출간한 이후 여러해 동안 기후변화를 중심 초점으로 삼고, 기후문제를 화석연료로 부당 이득을 취하는 자들과 정부 내 협력자들의 손아귀로부터 떼어내야 할 대표적 비상 과제로 규정하고 있다.
코로나19가 2차대전 이후 최대의 전지구적 위기가 될 것 같기는 하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기후변화에 비할 바가 못 된다. 그럼에도 두 문제는 서로 시사점이 비슷하다. 두 문제 모두 비상한 수위의 전지구적 협력을 촉구할 것이다. 둘 다 내일의 괴로움을 줄이기 위해 오늘의 행동에 변화를 요구한다. 두 문제 모두 과학자들이 오래전부터 아주 분명하게 예측해왔음에도, 다음 회계분기의 성장 통계치 이상을 내다볼 수 없는 정부는 이를 무시해왔다. 따라서 양쪽 다 정부가 파격적인 조치를 취할 것과, 인간 활동의 특정 영역에서 시장의 논리를 추방하는 동시에 공공 투자를 수용하고 지원할 것을 요구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와 같은 새로운 수위의 국가 개입을 일시적인 요구사항으로 간주한다면, 기후재난을 향한 길로 계속 질주할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사람들이 일상적 모드에서 벗어나 비상 모드로 돌입하도록 여러해 동안 노력해왔다”라고 마거릿 클라인 쌜러먼(Margaret Klein Salamon)은 말했다. 쌜러먼은 전직 심리학자로 현재 ‘기후 총동원’(The Climate Mobilization)이라는 압력단체를 이끌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비상 모드에 돌입할 때—즉 위험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안전해지려면 가능한 모든 일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본으로 받아들일 때—정치적 가능성의 영역이 근본적으로 달라진다. 코로나바이러스에 대한 대응을 계기로 이 이론의 정당성이 인정되는 것을 보면서 흥미로웠다. 향후 난제는 위험의 정도가 수십배나 더 큰 기후문제에 관해서도 비상 모드가 지속적으로 작동되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정상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상황이 이미 정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두 위기 사이의 유사성은 그 정도이다. 기후변화의 영향이 코로나19의 영향보다 더 점진적이라는 사실을 회피할 수는 없다. 대개의 사람들은 자신이나 사랑하는 사람들이 기후위기로 인해 이번 달에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따라서 비상체제를 가동하거나 유지하기가 더 어렵다. 쌜러먼이 내게 지적했듯이, 우리가 기후 비상 모드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진심으로 받아들인다면, 뉴스는 매일 어느 나라가 오염물질 배출량을 가장 신속히 줄이고 있는지에 관한 최신 정보로 시작될 것이며, 사람들은 반드시 지도자들이 효과 있는 정책을 채택하도록 아우성칠 것이다.
그렇다고 코로나19의 경험이 기후변화를 다른 각도에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못할 것도 없다. 바이러스로 인해 산업 활동과 도로 교통량이 줄어들면서 대기오염이 급락했다. 3월 초, 스탠퍼드대학의 과학자 마셜 버크(Marshall Burke)는 중국 4개 도시의 오염 데이터를 이용하여, 심장과 폐를 공격하는 각별히 유해한 대기오염 물질, PM2.5(지름 2·마이크로미터의 초미세먼지로 주로 자동차 배기가스나 화석연료로부터 발생하며, 매우 작은 입자가 폐 속 깊숙이 침투하여 호흡기, 폐, 심장질환을 일으킨다—옮긴이)의 수준 변화를 측정했다. 그는 팬데믹이 시작된 이래 오염물질 배출의 감소로 인해 중국에서만 5세 이하의 어린이 최소 1400명과 70세 이상의 성인 51700명이 사실상 목숨을 건졌다고 추산했다. 다른 한편, 세계 각처에서 사람들이 새롭게 발견한 일화들—달콤한 냄새가 나는 산들바람, 널찍해진 자전거 도로, 근처에서 다시 듣게 된 새들의 노랫소리와 같은 이야기들—을 인터넷을 통해 공유해왔다. 이는 마치 리베카 솔닛의 작업이 디지털의 형태로 확산되고 있는 것과 유사하다. 사람들이 재난의 와중에 자신들이 원하고 필요로 하는 미래를 얼핏 보게 된다는 사실 말이다.
이와 같은 희망의 조짐과 더불어, 클라인의 ‘쇼크 독트린’ 틀에 잘 들어맞는, 그다지 고무적이지 않은 이야기도 전개되고 있다. 1차 재난: 코로나19. 2차 재난: 환경보호를 위해 고안된 빈약하기 짝이 없는 기존의 규칙마저 해체하는 것. 3월 26일, 에너지 산업으로부터의 로비가 있은 뒤, 미국 환경보호청(EPA)은 팬데믹이 노동력에 미치는 영향을 인정하여 회사가 오염 규제 위반 사실과 팬데믹을 연결시킬 수 있는 한, 규제를 위반해도 처벌하지 않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중국 환경부는 산업시설의 환경 영향 평가에 대한 조사를 면제하기 시작했다. 플라스틱 업계가 자금을 대는 압력단체가 비닐보다는 재사용 가방의 직물에 바이러스가 달라붙을 가능성이 더 크다는 입증되지 않은 주장을 퍼뜨리며, 일회용 비닐봉투 사용을 위한 대대적 홍보 활동에 나섰다. 2008년의 위기를 돌이켜보면, 그 당시에도 오염물질 배출이 줄어들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결국 2010년과 2011년에 크게 반등했다.
쌜러먼은 코로나바이러스로부터 얻은 한가지 교훈은 공유된 감정이 발휘하는 힘이 크다는 것이며, 이 공유된 감정으로 팬데믹의 확산 속도를 늦추기 위한 급진적 조치를 취할 수 있었다고 믿는다. “사람들이 의료 전문 지식을 서로 나누는 걸 말하는 게 아니다. 서로 전화해서 ‘어떻게 지내? 무섭지? 나도 무서워. 부디 아무 탈 없었으면 좋겠어. 우리 모두 무사해야지’라고 말한다는 얘기다. 기후문제에 대해서도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우리는 함께 두려워하고 무엇이 우리를 공포스럽게 하는지에 대해 의견을 모으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럴 때라야만 정부가 행동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고 그녀는 말했다. “팬데믹에 대한 비상 모드에 돌입한 것은 좋다. 하지만 기후문제에 대해서도 같은 대응을 하지 않는다면……” 하고 그녀는 더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낙관론자의 비전이 실현되려면 어떤 종류의 조치가 취해져야 할까? 『심각한 위기를 낭비하지 마라: 신자유주의는 어떻게 금융 붕괴에서 살아남았는가?』(Never Let a Serious Crisis Go to Waste: How Neoliberalism Survived the Financial Meltdown)의 저자인 사학자 필립 미로스키(Philip Mirowski)는 쉽게 안주하는 태도에 대해 경고한다. “금융위기로 인해 경제를 보는 특정 방식의 총체적 파산이 모두에게 너무 명백하게 드러났다고 좌파들은 생각했다. 그런데 그 사실이 모두에게 명백한 것은 아니었고, 결국 좌파가 패배했다”라고 그는 내게 말했다. 바이러스는 섬멸되었지만 예전부터 진행되던 그밖의 모든 재난은 여전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 될 때, 세상이 코로나19 이전의 형태로 회귀하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막을 것인가?
“전염병의 정치적 성과는 다른 모든 정치적 성과와 마찬가지로 투쟁을 통해서, 해석을 둘러싼 싸움에 의해서, 그리고 문제의 원인은 무엇이고 해결책은 무엇인가를 밝힘으로써 결정될 것이다.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이러한 분석을 세상에 내어놓아야 한다”라고 마이크 데이비스(Mike Davis)는 말했다. 물론, 한가지 주요 걸림돌은 사회적 거리두기인데, 이는 정치유세나 가두시위처럼 오랜 경험으로 보증된 여러 투쟁 방법에 사회적 거리두기가 방해가 될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에게 가장 큰 위험 요소는 집에 앉아서 소셜 미디어에 담긴 내용에 이 시간을 허비하면서, 소셜 미디어를 통해 할 수 있는 극히 제한된 형태의 정치적 삶을 살게 되는 것”이라고 클라인은 말했다.
데이비스는 시위대들이 하루속히 거리로 나설 방법을 찾기를 희망했으며, 손팻말을 든 모든 참여자들이 3미터 혹은 5미터의 간격을 두고 거리에서 행동하는 모습은 극적인 미디어 이미지를 만들어낼 것이라고 추측했다. 샌디에이고에 살고 있는 그는 우리의 대화가 끝나자, 이제 손팻말을 들고 길 한 모퉁이에 혼자 서서 자신의 몫을 하며 오후의 일부를 보낼 계획이라고 말했다. 팻말에 무엇을 쓸지는 아직 결정하지 않았지만, “간호사 노조를 지지한다!”나 “유급 병가를 요구한다!”를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바깥출입을 할 수 없는 이웃들에게 식료품을 가져다주기 위해 싹튼 배달 네트워크부터 나이 든 이웃의 현관 앞에서 음악을 연주하는 아이들처럼 좀더 상징적인 관여에 이르기까지 세계 각지에서 사람들이 서로 연결되고 서로 돕기 위해 온갖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용기를 얻는다고 솔닛은 내게 말했다. 이딸리아의 정치학자 알레산드로 델판띠(Alessandro Delfanti)는 코로나바이러스 발생 이후 미국과 유럽의 아마존 창고를 휘젓는 파업의 물결에서, 또 이딸리아 경제의 각기 다른 부문 노동자들이 필요한 안전장비를 확보하도록 서로 돕기 위한 조치를 취하는 데서도 희망을 발견하고 있다고 말했다.
차후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이러한 연대의 순간을 더 넓은 정치적 영역으로 옮기는 낙관론자들의 능력에 달려 있을지도 모른다. 즉 여타의 모든 문제를 함께 개조하려는 시도 없이, 공유된 자원으로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해 더 많은 일을 하는 세상을 창조하려는 노력 없이 코로나19를 다루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는 그들의 주장을 통해서 말이다. “우리에겐 이런 감정, 즉 끔찍함이라는 겉포장 속에 경이로움이, 슬픔 속에 기쁨이, 두려움 속에 용기가 찾아오는 이러한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언어조차 없다”라고 솔닛은 『이 폐허를 응시하라』에 썼다. “재난을 환영해서는 안 되지만, 재난에 대한 대응을, 실제적이고 심리적인 대응 모두를 소중히 여길 수는 있다.”
바로 지금, 세상이 몹시 낯설게 느껴지는데, 세상이 너무 빨리 변하고 있고 우리 중 누구든, 언제든 병에 걸릴 수 있다거나 혹은 이미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있는데 모르고 있기 때문—단지 그 때문—만은 아니다. 지난 몇주간 가장 거대한 것들이 항상, 언제라도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에 낯설게 느껴지는 것이다. 이 단순한 진실, 불안감을 일으키기도 하고 해방감을 일으키기도 하는 이 단순한 진실은 잊히기 쉽다. 우리는 지금 영화 한편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한편의 영화를 쓰고 있는 것이다. 다 함께, 끝까지.
번역: 이종임(李鍾姙)/영문학 박사, 네브라스카대학 영문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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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독자들에게: 제가 이 글을 쓴 것은 코로나바이러스가 전세계적으로 확산된 초기 단계의 긴박한 상황에서였습니다. 이후 몇주의 시간을 통해 기존의 문제들이 더 악화되고 있다는 증거와 더불어, 인간의 상호 연대와 보살핌의 놀랄 만한 증거도 충분히 얻을 수 있었습니다. 어느 쪽이 더 우세한지, 또 어디서 그러한지를 확언하기란 불가능할 것입니다. 이 문제는 역사가 해결해야 할 과제가 아닐까 합니다. 그저 제 입장을 말하자면—책상 앞에 앉아 글을 쓰며 겨우 8주 앞으로 닥친 첫 아이의 출산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으로서—이 기사가 세계 각처의 많은 분에게 읽히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감동하게 됩니다. 그중 많은 분들이 제게 직접 편지를 쓰기도 했습니다. 새로운 시기는 새로운 느낌을 만들어내기 마련이며, 우리가 첫번째로 해야 할 일은 그 느낌을 서로 나누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니, 언제든 자유롭게 apcbaker@gmail.com으로 연락해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