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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김영옥 외 『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 봄날의책 2020
아픔과 늙음을 새로운 ‘가능성’으로 바꾸는 말들
서보경 徐甫京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bo.seo@yonsei.ac.kr
신종감염병의 창궐에 몸에 대한 우리의 감각이 급격히 변화하고 있다. 손을 꼼꼼히 씻고, 마스크를 잘 착용하라는 권고가 이미 우리 몸에 익숙히 자리 잡은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이 일상의 규칙만으로 감염 위험을 충분히 피할 수 있을지 걱정을 떨치기 어렵다. 타인으로부터 옮는 것이 걱정스러운 만큼, 내가 타인에게 바이러스를 옮길 수도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치 않다. 감염의 위험이 일상에 상존한다는 것은 내 것인 줄만 알았던 몸이 다른 몸들과 얼마나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지, 그리고 이 몸들의 연결에 따라 얼마나 약해질 수도 혹은 튼튼해질 수도 있는지 다시 생각하게 한다. 『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 질병, 돌봄, 노년에 대한 다른 이야기』는 몸의 이 위태로운 조건을 불안이나 공포가 아니라 돌봄의 가능성으로 마주할 수 있게 하는 용기를 주는 책이다.
2020년 현재 전세계가 경험하고 있는 혼란은 한편으로는 백신의 부재라는 의학적 한계를 극복하기만 하면 금세 해결될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 혼란의 근본에는 전지구적 차원으로 존재하는 무수히 많은 몸들의 끊어낼 수 없는 연결과 그에 따른 공통적 약함을 어떻게 돌볼 것인가라는 질문이 자리 잡고 있다. ‘생애문화연구소 옥희살롱’에 속한 네명의 저자는 이 시급한 질문을 한국사회의 맥락에서 먼저 고민한 이들이다. 지금까지 한국사회는 돌봄위기사회라는 복잡한 진단을 가족의 약화나 국가적 지원의 부족으로 납작하게 단순화시켜왔다. 한국에서 코로나19로 인해 목숨을 잃은 사람 중 많은 수가 요양병원에 입원 중인 노인이거나 정신병원에 장기 입원 중인 환자라는 사실은 우리 사회의 가장 취약한 공간이 어디인지를 극명하게 드러냈다. 장기요양시설은 돌봄이 수발 노동이자 의료 서비스의 부스러기로 터무니없는 헐값에 팔리는 공간인 동시에 삶과 죽음을 가르는 절대적인 힘으로 돌봄이 제 모습을 드러내는 곳이다.
이 책의 저자들은 여성주의 철학의 자장 속에서 세계를 지탱하는 돌봄의 힘에 다가갈 수 있는 생각의 도구들을 제시한다. 몸의 취약성을 드러내고, 공유하고, 의미화하고, 정치화할 수 있는 중요한 개념들을 저자들의 경험을 통해 구체화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견디고, 계속 살고, 계속 살리는 일”(6면)을 하고 있는 여러 존재들, 특히 여성 환자와 돌봄자들의 경험을 철학적 사유의 중심에 놓는다. 저자들은 생애 경험의 전반에서 누구나, 언제든, 각기 다른 방식으로 고통에 뒤척이는 몸과 마주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직면’하도록 요청하면서, 그 직면의 순간에 피어날 수 있는 눈부신 통찰과 치유의 능력, 정치적 기회를 유려한 문체로 펼쳐낸다. 네명의 저자는 마치 실내악 연주자들처럼 각각의 글에서 자기 음색을 드러내면서도 공통의 선율을 이어가고 변주하면서, 서로에게 응답하는 긴 호흡으로 책 전체를 완성하고 있다.
전희경은 현재 한국의 돌봄 위기 속에서 가장 중요한 작업은 돌봄의 시장화, 사회화, 국가화의 연쇄를 빠르게 이어가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정책의 언어가 말하지 못하는 ‘관계’의 문제에 집중하는 것이라고 책 전반의 문제의식을 노정한다. ‘아프고 늙으면 누가 나를 돌봐주지’라는 처량 맞은 질문을 ‘나는 누구를 돌볼 것인가’라는 담대한 질문으로 바꾸어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가족과 사회를 이루는 관계들을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가정과 사회 전반에서 강제된 여성의 희생과 착취를 부정의의 문제로 파악하고 이를 구조적으로 해소해나가는 과정을 반드시 필요로 한다. 그리고 이러한 일상적이면서도 거대한 변화를 이끄는 이들로서 자신과 타인을 돌볼 수 있는 ‘시민’이 등장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때, 돌봄 능력을 갖춘 시민은 많은 자원을 확보하여 자신과 타인의 취약성을 극복해내는 능력자가 아니라 고통의 무게를 ‘근근이’ 감내하면서 앓는 존재이다. 관계의 어려움을 이해하고 공유할 수 있는 지적이고 사회적인 힘, 돌봄의 문해력을 키우는 것이 그 어떤 암보험보다도 중요하다는 저자의 통찰이 귀하다.
탁월한 번역자이기도 한 메이는 몸의 고통을 기록하고 공유하는 일이 앓기의 존재 조건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자신의 독서 리스트를 통해 보여준다. 메이의 글은 고통이 병리학적 소인과 임상적 사실로 해체될 수 없는 체화된 진실임을 핍진하게 드러내며, 이 진실을 듣고 말하는 시간이 어떻게 약이 되는지를 아픈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다가간다.
시간에 대한 인식이 몸의 경험을 어떻게 자연화하고 또는 왜곡하는지에 대한 깊은 성찰을 바탕으로 이 책은 젊고 아픈 존재들의 고독을 섬세하게 그려내는 것은 물론 치매를 말하는 방식 자체에 비판적으로 다가갈 수 있게 해준다. 이지은은 치매와 돌봄에 대한 인류학적 논의들을 찬찬히 제시하면서, 통제력과 기억을 잃고 주변을 알아보지 못하는 짐스러운 존재가 될 것이라는 두려움으로는 결코 파악할 수 없는 몸의 감응력을 강조한다. 의존을 부정적 상태가 아닌 몸과 자아의 구성을 가능하게 하는 마땅한 전제로 끌어안을 수 있을 때,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서로의 필요에 응답하는 의미있는 경험들이 쌓여갈 수 있다는 것이다.
김영옥은 “앓고 돌보며, 스스로에게 낯설어지는”(25면) 시간으로 노년을 바라볼 때 얼마나 넓고 깊은 철학적 지평이 생겨나는지를 보여준다. 현상학적 몸 개념에 대한 시적 개설(槪說)이기도 한 이 글은 노년의 무능력과 상실의 시간이 형벌이 아니라 세계-내-존재로서 몸/자아의 새로운 모험과 놀이가 감행되는 창조적 순간일 수 있다는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노년의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존재론적 변모 속에서 의미화할 수 있어야, 이 시간을 살아가는 인간에게 필요한 도움과 지지가 무엇인지 우리는 비로소 제대로 논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는 통증과 마주하고 있는 사람들, 또 돌보는 일의 기쁨과 슬픔을 감내하고 있는 이들에게 선물 같은 위로를 주는 책이자, 새로운 세계를 열어가기 위해서는 어떤 변화가 필요한지를 힘 있게 제시하는 책이다. “상호의존적 삶이 정의롭고 평등한 삶이 되도록”(24면) 만들어야 한다는 저자들의 확신에 찬 목소리는 인구의 초고령화와 신종전염병의 전지구적 확산을 멸망의 징후가 아니라 변혁의 시작점으로, 두려움에 휘둘리지 않고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나아가 여성주의 돌봄 철학과 이론이 한국의 현실 속에서, 또 한국어의 호흡과 말법을 통해서 어떻게 새로운 방향성과 적실성을 확보할 수 있는지를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정의로우며 심지어 기쁜 돌봄이 있는 사회”(7면)를 당겨오기 위한 이 책의 마음 깊은 시도가 더 많은 학문적 논의의 장과 정치적 모색의 길로 이어지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