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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고형렬 『에세이 장자』(전 7권), 에세이스트 2019

‘파종성 영장류 질환’의 팬데믹 시대에 ‘장자’를 읽다

 

 

장석주 張錫周

시인 kafkaj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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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형렬은 시인이자 재야의 ‘장자’ 연구가다. 그가 재야에 머물며 ‘소요유(逍遙遊)’ ‘제물론(齊物論)’ ‘양생주(養生主)’ ‘인간세(人間世)’ ‘덕충부(德充符)’ ‘대종사(大宗師)’ ‘응제왕(應帝王)’으로 구성된 『장자(莊子)』를 풀어 쓴 에세이를 펴냈다. 본디 이 책은 중국 전국시대의 송나라에서 ‘칠원리(漆園吏)’라는 미관말직에 있던 장자라는 인물의 우화·우언을 모은 이야기 모음집이다. 『장자』는 ‘괴이한 인물전’이자 ‘도가 학파’의 모태가 된 책이다. 동아시아의 가장 유명한 철학서적 중 하나로 무용과 유용의 분별에서 벗어나 쓸모없음의 큰 쓸모를 구하는 지혜의 책이다. 생태주의 정치철학을 펼친 선각의 사상서이자 낡은 가치의 뒤집기를 선동하는 사상을 담은 서책이다. 아울러 국가 재난이 잦은 위험사회에서 국가의 포획에서 벗어나 덕과 양생의 처세술을 담은 자기계발서다.

『장자』는 불연속적으로 펼쳐지는 이야기 모음집이다. 장자는 도덕철학의 발명자가 아니라 우주의 천변만화에서 양생의 원리를 궁구하고, 뭇 생명의 뒤엉킴에서 지혜를 찾아 들려주는 이야기꾼이다. 이야기는 만물의 순환과 흐름을 품고, 추방과 배제, 비주류와 방외의 길에서 찾은 생명정치의 철학을 풀어낸다. 고대 그리스에 호메로스가 빚은 이야기가 있다면, 동아시아에는 장자의 이야기가 있다. 호메로스가 성스러운 신들의 이야기를 펼쳤다면, 장자는 전국시대의 혼란을 뚫고 나가는 방외인의 이야기를 빚는다. 예로부터 인류는 허구의 현실을 작동하는 시뮬레이션이자 지식과 윤리적 감수성을 전하는 수단인 이야기를 통해 위험을 회피하는 항로를 찾았다. 이야기가 재미와 집단지성의 나침반이고, 위성항법장치(GPS)를 가동시키는 까닭이다.

저자는 『장자』를 낮밤 없이 끼고 살며 “기준 없음의 사유가 바로 상물(相物)이거나 시비(是非)를 넘어서 기이한 통섭의 문법”(1권 259면)임을 찾고 그 풀이에 도전한다. 전7권 3200면이 넘는 방대한 저술이 그 결실이다. 『장자』를 해제한 동서양의 서책은 흔하지만 이만한 방대한 분량의 책을 찾기는 어렵다. 고형렬은 장자의 무위철학에서 인간의 타고난 참마음을 제약하는 인간 종 중심주의에 맞서는 대안철학을 찾는다. 그 모색은 “자연소요와 천변만화 속에 전화(轉化)하고 놀라며 기뻐하고 아파하는 존재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생명소요를 축복하는 길”(2권 651면)을 구하는 사유의 유격전으로 이어진다. 만물의 시작과 끝을 하나로 아우르며 이만한 사유의 넓이를 구하는 궁구와 천착의 노고에 감탄한다.

고형렬은 『칠원서』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장자는 까마득한 태시(太始)의 세계로 돌아가 아득히 저물어간 이전 세상의 한 세계를 보여준다. 아니면 이것은 먼 미래의 지구의 끝과 아침을 보여주는 예시(豫示)일까.”(1권 12~13면) 장자는 인간, 사물, 자연을 품은 채 광대무변한 공간으로 상상력을 뻗친다. 두루 넓게 뒤섞는 혼효와 숙성을 거친 뒤 혼융, 초극, 변주, 방외, 일탈, 전복, 해방의 이야기를 주르륵 펼쳐낸다. 장자에 따르면 우주는 혼돈의 덩어리다. 그 혼돈은 끝없는 변화함 속에 있다. 장자는 혼돈에서 내재적 흐름과 운동성을 보고, 그 리듬을 타고 유유자적 노니는 삶을 꿈꾼다.

‘소요유’에는 바람을 타고 하늘로 솟구치는 붕새가 등장한다. 대붕의 비상은 “무위지법(無爲之法)의 비상”이고, “절대순수의 비상”이다.(1권 20면) 화이위조(化而爲鳥)의 이야기는 변화와 초월의 서사이자 대자유인, 혹은 실존의 한계를 넘는 사색인의 탄생을 알리는 서막이다. 인간이 보거나 겪은 바가 없는 장자의 반문명의 상상력과 반인간 철학이 낯을 내민다. 장자는 반짝이며 출렁이는 소요(노닒)의 기쁨을 소개한다. 소요와 무위는 한 짝이고, 무위는 하지 않음 속에서 부지런함을 구한다. 장자는 바람과 물이 그러하듯 허허로운 무위의 길에서 삶의 도를 찾는다. 인위의 산물인 문명화는 도와 대극(對極)을 이룬다. “일이 사람을 사로잡아 놓아주지 않”게 되자 “노닒이 없어지고 치마[馳馬]와 바쁨, 과로”에 시달리게 되었다.(5권 66면)

‘호접몽(胡蝶夢)’은 꿈과 현실의 경계를 넘나들며 찰나에서 영원을 엿보는 이야기다. 장자가 나비가 되고 나비가 장자로 변하는데, 그 경계는 모호하다. 나와 나 아닌 것의 상호적 연관은 고정불변이 아니라 찰나와 영원 사이에서 천변만화한다. 이것은 저것이고, 저것은 이것으로 변한다. 저자는 “소요와 제물은 상아와 물화에 연결되어 있다. 만물은 자아를 잊은 나이다. 상아 속에 물화된 대상들이 소요하고 그 소요의 주인공들이 자연 제물의 법칙 속에서 편제(編制)된다”(2권 646~47면)라고 말한다. 본디의 ‘나’는 무아로 만물제동 속에서 소요한다. 그러니 “나를 찾지 말라”(2권 647면)라고 하며 도주한다. 국가가 ‘나’를 포획하는 인위의 결사체이기 때문이다. ‘소요유’의 붕새와 ‘제물론’의 나비는 무위를 좇으며 국가 포획에서 도주하는 존재의 표상이다. ‘장자’의 숱한 방외인들이 그렇다. “장자는 국가를 삶의 영역에서 멀리 소외시키고 비와 바람이 불어 오가는 자연 속에서 거하기를 바랐을 것이다.”(6권 129면)

본디 무위 속에 노닒이 있었다. 무위는 사람에 있지 않고, 자연에 속한다. 생명의 본성 자체가 무위함이다. 인위로 구속하지 않는다면 생명은 스스로 탈각하며 변화를 꾀한다. “무위는 하염없이, 무엇을 위하지 않음이다. 이것은 무엇에 이익이 생기지 않게 하며 명예가 생기지 않게 하고 이름이 나지 않게 함이다.”(1권 379면) 그런데 인류는 무위를 버리고 유위로 돌아선다. 무위와의 격절, 무위와의 대극이 문명화다. 굳이 위계를 따지자면 인간은 자연의 무궁함에 종속된다. 하건만 인간은 자연의 스스로 그러함을 억누르고 인위로 바꾼다. 인간이 “자연의 일을 빼앗”고, “신인이 죽고 자연을 인간이 식민지처럼 착취”한다.(1권 261면) 그 결과는? 자연을 재화로 재생산하는 과정에서 지구의 자기조절 메커니즘의 교란이 일어나는데, 저자는 이를 “재앙의 겁운(劫運)”이라고 말한다.(6권 19면)

문명화의 격류는 인위의 무한복제와 생명공학의 남용으로 인한 재난의 현실태가 탈근대주의 시대로 들어서며 창궐한 ‘파종성 영장류 질환’의 팬데믹이다. 우리는 이쯤에서 인위로 번성한 문명이 만든 재앙의 세기에서 살 길은 있는가라고 물음을 던져야 마땅하다. 장자는 “만물이 비춰보는 거울의 물”, 즉 “만물지수(萬物止水)”의 첫 발견자다.(5권 69면) 생명은 이 만물지수에 자기를 비추고 무위자연으로 돌아가는데, 이 회귀는 불행 회피를 위한 선택이며 불가결한 당위다. 고형렬은 지구 생물권의 교란과 재난이 상습화된 시대에 『장자』라는 거울에 자기를 비추고 지수상심(止水尙心)을 찾는 실마리를 구한다. 『에세이 장자』를 읽는 내내 나는 두개의 물음을 품었다. 우리는 문명과 대극하는 대붕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가? 과연 그 영원한 마음으로 회귀하는 길은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