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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이성혁 『시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예옥 2020

사랑의 정치를 위한 시학

 

 

양재훈 梁宰熏

문학평론가 ddalgimilk2u@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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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문학에 몸담았거나 뜻을 둔 사람이라면 이 질문을 품고 있을 것이다. 근대 이후 문학은 우리 사회에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해왔지만 이제는 근본적인 질문부터 다시 해보아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에 답하기 위해 이성혁이 가져오는 것은 정치다. 이 답변은 그러나 정치적 프로그램에 따라 작품을 창작하는 케케묵은 ‘정치 문학’과는 거리가 멀다. 그에 따르면 문학과 정치의 접합이 가능한 이유는 문학이 정동(情動)을 창출할 수 있는 상상력과 독자를 정동시킬 수 있는 감응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문학에서 정동이 창출되고 그것을 읽은 자가 정동되는 과정에서 작가와 독자는 삶의 변화를 겪게 된다. 사회의 변화는 삶의 변화를 겪은 이들로 이루어진 ‘정동의 공동체’에 의해 이루어진다.

문학과 정치의 접합에 대한 이성혁의 모색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비평가로서의 삶 전체를 이 주제에 바쳤다고 해도 좋을 만큼 그의 모색은 진지하다. 『시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은 그러한 모색의 결과물이다. 이성혁은 동시대 한국사회와 문학 논단의 흐름을 살피며 자신의 글쓰기가 놓인 사회적/문학적 맥락 속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왔고, 때문에 이 책은 논쟁적인 글들을 많이 담고 있다. 특히 이른바 ‘미래파’ 논쟁에 대한 그의 논의는 서로 의견을 달리하는 두편을 횡단하며 새로운 차이를 생산하는 토론의 진수를 보여준다. 그는 ‘미래파’에 대한 과도한 평가에 비판적이다. 예컨대 새로움을 들어 그들을 ‘전위적’이라 평가한다면 이는 20세기 전반기에 존재했던 전위예술에 대한 이해의 부족 때문이라는 식이다. 이성혁에 따르면 전위란 가장 새로운 실험과 형식이 아니라 투쟁의 최전선에 서는 일이기 때문이다. 전위는 시간적 개념이 아니라 공간적 개념이다.(「시적인 것과 전위성에 대한 논의들」) 하지만 단순히 미래파를 비판하는 입장에 서는 것도 아니다. 이성혁은 미래파가 기존의 시단과 확연히 단절한 이후 기성의 미적 척도가 해체되었다는 점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미래파를 받아들일 것이냐 거부할 것이냐가 아니라 기성의 미적 척도가 해체된 상황에서 어떻게 새롭고도 정치적인 미학을 구축할 것이냐다.(「‘미래파’ 이후를 생각하며」)

한편 미래파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던 때는 2000년대 후반으로, 이후 쌍용차사태, ‘광우병 소고기’ 파동, 용산참사, 세월호참사, 메르스참사 등 한국사회가 이윤을 위해 구성원 개개인의 삶을 파괴하는 ‘삶권력’의 지배 아래 있음을 보여주는 일련의 사태들을 겪어야 했다. 이러한 사태들 속에서 이성혁은 문학이 사회의 위기를 가시화하고 그에 대응해야 함을 역설한다. 그리고 그러지 못한다는 데서 문학의 위기를 감지한다.(「비평의 위기와 시문학의 위기」) 문학의 현실대응력이 문제이므로, 위기를 타개할 방법도 문학과 정치의 접합에 있다. 특히 이성혁은 강고한 신자유주의체제 아래 혐오의 정동이 만연해진 지금, 문학에 요구되는 것은 사랑의 능력을 회복시키는 시적 상상력이라고 말한다. 문학이 지닌 상상력과 감응력으로 사랑의 정동을 발동시키고 정동적 연대를 생성하여 현실 속에 상호 생성하는 사랑의 힘을 충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의 기저에서 전위주의가 지속적으로 참조된다. 이성혁은 20세기 전반기의 전위운동을 일종의 미학적·윤리적 전범으로 삼고 있는 것 같다. 때문에 그는 삶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바꾸는 문학을 원한다. 그럼 문학에 그럴 힘이 있다는 말인가? 그는 “승산 유무를 계산하지 않는 선택”으로 ‘소수자 되기’를 감행하며 “패자에게 힘을 주”는 것이 문학의 힘이라고 말한다.(「시는 시 자신을 위해서라도 세상을 바꾸고자 해야 한다」 376면)

패배자의 입장에서 그들의 고통에 공진(共振)하며 사랑의 정동을 발동시키는 것이 시- 문학의 역할이라는 그의 말에 동의한다. 이를 사랑의 정치를 위한 시학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 같다. 다만 그것은 투쟁의 최전선에 서는 것으로서의 전위와 일종의 시차(parallax)적 관계에 있지 않은지 묻고 싶어진다. 예컨대 그는 2016년 말의 촛불 이후 우리 사회 저변에 스며든 ‘을의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와 대중적 정치 행동들 가운데 문학이 전위가 아닌 후위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한다. 한데 문학의 힘이 승산 유무를 따지지 않고 패자의 입장에 설 수 있게 하는 데 있다면 전위냐 후위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것 같다. 나 역시 문학은 아직 ‘말이 되어 있지 않은 것’을 말함으로써 기성의 언어구조를 교란하고 그럼으로써 언어로 구조화되는 현실 자체의 변화 가능성까지를 마련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다만 이제는 그러한 개입이 그 가능성의 실현으로 이어지지 않아도 상관없다고도 생각한다. 결과에 영향받지 않고 행위 자체를 위해 행위할 수 있게 하는 이른바 ‘최후 심판의 관점’을 배웠기 때문이다(나는 이를 바울, 헤겔, 벤야민, 지젝 등에게서 배웠다). 언젠가 있을지 모를 최후 승리의 시점에서 돌아보면 무력하게 패배하고 흔적 없이 사라진 과거의 모든 패배가 그때의 승리 가능성을 마련한 행위가 되리라는 뜻이다. 패할 수밖에 없는 연약함을 자신의 강함으로 전유하며 과거의 패배들과 접속하고 현재의 패배 속으로 뛰어드는 주체성은 이성혁이 말하는 ‘시의 힘’과도 달라 보이지 않는다.

한편 이성혁은 문학이 전위에 나서지 못하는 주요한 요인을 문학제도에 선택받고자 하는 출세주의의 유혹에서 찾는다. 그런데 이런 문제의식에는 ‘사회에 대한 반항심’을 품은 작가가 왜 ‘문단에서의 출세’를 보장하는 제도에 점령당하느냐는 질문이 동반되어야 할 것 같다. 사회의 위기를 해결하려는 주체적 개입이 무기력 속에서 중단되는 데는 두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위에서 말한 패배의 예측이고 다른 하나는 문제가 해결되더라도 자신의 삶은 나아지지 않으리라는 예측이다. 참여를 통해 개인 자신의 문제가 함께 해결되리라는 전망이 없을 때 출세주의의 유혹은 강렬할 수밖에 없다. 최근 몇년간 나는 다른 노동자들의 삶을 보장하는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발언하는 문인 상당수가 왜 비정규직 내지 ‘상시적 해고 상태’에 있는 자신들의 삶을 개선하려는 행동에는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은지 의문을 품어왔다. 내가 응원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삶보다 내 삶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최근 이상문학상 수상 거부라든가 대형출판사 인세 관련 문제제기 등을 보면 움직임이 시작되는 것도 같다. 이제 이 문제에 대해 더 집중적으로 논의해볼 때가 된 것 같다. 우리도 크레인에 올라가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