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의 목소리
깊어진 문학 아래, 나
▶ 파란 표지의 봄호를 처음 받고 기대와 설렘, 긴장감이 몸을 감쌌다. 여러 문예지를 두루 접해보았지만 『창작과비평』을 강력 추천하는 이유는 시대를 잘 담은 그릇이라는 생각 때문인데 지난호 역시 그러했다. 특집의 「플라스틱 중독 시대 탈출하기」는 내가 일상에서 일회용품을 얼마나 무분별하게 쓰고 있었는지 깨닫게 해주었고 비닐봉지 대신 에코백을, 플라스틱컵 대신 텀블러를 즉시 찾게 하는 원동력을 선물했다. 21대 국회의원 선거를 치른 후에 읽은 대화 「20대 국회와 우리 정치의 과제」는 좁은 견문을 확장해주기에 충분했다. 패스트트랙과 공수처, 청년정치 등 많은 주제를 다루었는데, 아쉬운 점은 가장 중요한 민생 관련 논의가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지난 선거의 결과는 시민의 권리의식이 높아졌다는 기쁨으로 다가오지만, 한편으로 정치에 호소할 만큼 곡소리 나는 지금의 민생 환경을 돌아봐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김중미의 산문 「특권과 공정 사이」는 불합리한 사회모순을 날카롭게 꼬집는다. ‘조국 사태’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을 보면 의아했는데, 산문을 읽고 난 후에 깨달았다. 너무 멀어서, 너무 먼 사실이라 분노도 슬픔도 딱히 느낄 수 없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특권을 대물림하는 권력층과 가난 속에서 연대하는 빈곤층 사이에서 ‘공정’, 그 정직하고 올곧은 단어의 뜻을 훼손하지 않으려면 불평등과 억압에 목소리를 내야 할 것이다. 산문의 맛과 영양을 모두 살린 글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언젠가는 산문란에서 ‘꼰대와 인생 선배는 한끗 차이’임을 다루는 글도 만났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꼰대의 모습 이면에 서린 치열한 인생의 흔적, 주름살 밑에 가려진 진짜 생채기를 발견해주는, 노인을 조명하는 소박하고 따스한 글을 만나고 싶다.
지난호를 다 읽고 난 지금 여운이 진하다. 폭넓은 시야의 확장과 그를 통해 발견되고 발현된 나의 정체성이 결코 휘발되지 않을 무언가로 묵직하게 남았다. ‘당신의 문학이 더 깊어집니다’라는 ‘클럽 창작과비평’의 슬로건이 적어도 내겐 거짓이 아니었다. 단지 문학이 아니라 ‘문학과 시대’ ‘시대의 문학’을 다루는 이 계간지의 도움이 크다.
김도희 xixi_09@naver.com
서로의 목소리를 더하는 일
▶ 1990년생인 나는 공교육 과정에서 환경 관련 내용을 늘 배워왔다. 초등학교 때는 환경일기를 썼고, 현장학습이나 운동회 등 행사가 끝나면 마지막에 쓰레기를 정리했다. 다만 학년이 올라가고 입시 공부에 치이면서 환경 관련 이슈는 점차 관심에서 밀려났던 것 같다. 그래도 교육의 효과가 없지는 않았는지 지금 나는 환경운동가나 단체들이 고군분투하며 지키려는 것이 내 평범한 일상과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받는 무엇, 대지와 하늘임을 인식하고 있다. 지난호 특집 ‘생태정치 확장과 체제전환’을 보면서, 비록 읽는 데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지만 충분히 흥미로웠고 뭉클한 기분마저 들었다. ‘인류세’ ‘자본세’ 등의 개념을 이제라도 알게 되어 좋다. 특히 도나 해러웨이의 ‘술루세’ 제안은, 그에 대한 현실적인 반박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럼에도 나를 들뜨게 했다.
더불어 대화란도 재미있게 읽었다. 친구들 중에 철학 전공자가 많은데, 현학적이고 관념적인 이야기만 할 것 같은 이들이 생각보다 정치를 잘 알고 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정치 얘기를 하기도 해서 문학 공부를 하는 나로서는 놀랄 때가 있었는데 이번 기회에 대화를 정독하며 그간 한 귀로 흘려버렸던 이슈들을 돌이켜볼 수 있었다. 정치는 생활과 떨어져 있을 수 없으니 누구도 백번 무지할 수는 없겠지만, 법안이며 제도를 일컫는 용어들이 조금 생소해 몇번씩 들여다보기도 했다. 언론의 정치혐오 양산에 대한 문제제기가 특히 중요하게 와닿았고, 선거운동 기간 연장에 대한 의견은 새롭게 느껴졌다. 그밖에도 읽을거리가 풍성한 지난호를 읽고 내 마음은 좀 안달이 난다. 내가 살아가는 터전에 대한 인식이 ‘어떤 호소’에 부응하고 그것이 또다른 호소로 나아가야 함을, 나의 원동이 타인에게 또다른 원동이 되기를 희망하고 있다. 이처럼 서로의 목소리를 더하고자 노력하는 일은 대화에서 역설된 ‘연합정치의 중요성’과도 방향을 같이할 것이다.
김효선 hyosunkim518@gmail.com
새로운 사회적 기획이 필요하다
▶ 젊은 시절 도서관에 계간지가 들어오면 얼른 먼저 대여해 탐독하고 싶었던 오랜 동경과 애정의 대상인 『창작과비평』. 코로나19로 얼어붙은 상황이 차분히 녹아내리기를 기대하는 마음을 한편에 품은 채 지난호를 읽었다. 광대하고 복잡하고 대단해 보였던 인류 문명이 코로나로 한순간에 흔들리는 것을 목격한 상황. 바이러스와 함께 살아온 것 또한 인류의 역사이건만, 신종바이러스의 출현만으로 전세계에 경제위기가 퍼지고 있다. 산업선진화 정책으로 인해 삼사십년 동안 세계화가 쉼 없이 이루어지다보니 전세계가 공급망으로 단단히 얽혀들었다. 가장 싼 단가를 찾고 세계 곳곳을 돌아 하나의 완제품이 나오도록 만들어진 구조다. 코로나와 직접 연결된 글은 아니지만 코로나 이후 경제구조의 악화와 대량실직이 더 가속화될 것이 분명하기에, 논단의 「자동화와 노동의 미래」를 무거운 마음으로 읽을 수밖에 없었다. 자동화담론을 논하는 이론가들은 인구의 상당수가 임금노동의 일자리를 잃는 대대적인 기술적 실업을 예고하며 이를 보편적 기본소득의 지급으로 관리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사람들이 낮은 노동수요로 인한 실직 상태에 놓인다기보다 정상임금보다 낮은 임금으로, 정상 근로조건보다 열악한 조건으로 일하도록 강요당한다는 점을 짚는다. 극심한 고용 불안정이 삶을 규정하는 특징이 된다는 것인데, SF에서는 이것이 잉여인간들이 거주하는 디스토피아로 재현되기도 하는바 영화 「엘리시움」(2013)이 떠오르기도 했다. 불완전 고용이 증가한다면 불평등도 심화될 것인데, 정치적 행동과 결단이 없다면 뻔한 디스토피아이다. 복지국가의 제도가 가진 힘이 대안이 될 것인가, 아니면 더 새로운 사회적 기획이 필요한가 의문을 남긴다. 세상이 이대로 괜찮은지, 우리의 인간됨과 인간성에 대해 어떤 말을 걸어야 하는지 하는 문제는 얼핏 추상적으로 들리지만 포기할 수 없는 질문이다. 새로운 대안과 비전을 기다리며, 마침내 희망적인 비전이 나타났을 때 한명의 독자일 뿐인 내가 허튼소리 안 하고 잘 알아보고 이해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든다.
김서울 kiyukk@naver.com
오늘 하고 싶은 말
▶ 코로나19로 일상의 자유로운 즐거움이 사라진 요즘에 그래도 무엇인가에 집중하며 진득하게 앉아 계간지를 읽는 일이 위로가 되었다. 소설란을 재미있게 읽었다. 여성 화자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박사랑의 「서울의 바깥」과 은희경의 「우리는 왜 얼마 동안 어디에」를 읽으며 비슷한 상황에서 내가 느꼈던 감정이 이런 것이었구나 정리되는 것 같았다. 어떤 이야기든지 소설이 될 수 있다는 것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그럴 때면 말야. 왜 얼마 동안 어디에를 생각해봐. 거기에 대답만 잘하면 문을 통과할 수 있어”라는 은희경 소설의 문장이 내 마음속에 오랫동안 머물렀고 앞으로도 종종 떠올리게 될 것 같다. 시란에서는 안미옥의 「썬캐처」가 인상 깊었다. 좋은 꿈을 가져다준다는 드림캐처는 알고 있었지만 썬캐처라는 것은 처음 들어보았다. 썬캐처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삶에서 기원하는데, 유리나 구슬, 크리스털 따위로 햇빛을 사방으로 퍼뜨려 잘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장식품이라 한다. 시를 읽으면서 지난날의 나는 드림캐처를 품고 버틴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막다른 벽. 컵 속에서 깨진 물의 파편처럼 놓여 있”던 “어려움이 지속된” 퍽퍽한 현실 속에서 어떻게든 부모와 다르게 살고 싶다는 꿈으로, 누구를 탓하지 않겠다는 의지로 열심히 공부하고 사랑했던 나날이었다. 당시 나는 내 나쁜 꿈, 나쁜 현실이 사라지기를 늘 소망했다. 그러나 “한뼘의 사랑과 한발자국의 위로가” 나를 일으켜 세웠다. 결혼 11년차를 맞은 요즘, 거실 통창으로 들어오는 햇볕이 이렇게 축복으로 느껴질 줄은 몰랐다. 비로소 나는 이 현실에서 이 빛을 잡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내 가족을, 내 사랑을 지키고 싶다는 바람이다. 시 한편을 통해 인생을 이렇게 들여다볼 줄 몰랐다. 이것이 시의 매력인가보다. 내 삶에서 썬캐처가 되어준 당신에게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사랑한다고 오늘은 꼭 말하고 싶다.
김아름 42spell@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