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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임현 賃賢

1983년 전남 순천 출생. 2014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소설집 『그 개와 같은 말』, 중편 『당신과 다른 나』 등이 있음.

dasimarvel@naver.com

 

 

 

거의 하나였던 두 세계

 

 

1

 

사실, 그 일에 대해 오명조가 내게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줄 거라고 생각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오히려 나는 멀리서 사태를 관망하는 입장이었고, 대체로 무관했으며, 학교의 입장에서 보자면 나름 난처한 면도 없진 않겠으나 엄연히 피해자가 있는 사안이니만큼 정당한 보상과 그에 따른 책임 있는 사후대책 마련이 더 중요하다고 여겼을 뿐이다. 좀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뭐든 될 대로 되겠지…… 하는 심정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때도 지금도 연재는 나와는 조금 다른 마음인 것 같았다.

여름 계절학기를 얼마 앞두고 예상보다 복잡하게 돌아가는 상황을 대강 설명해주었을 때, 그러니까 결국 피해학생 쪽에서 변호사를 선임하고 엊그제 학과 사무실로 내용증명이 날아왔더라는 소식을 전했을 때, 연재는 동그랗게 뜬 눈으로 나를 가만 쳐다보기만 했었다. 그러고는 이 순간 반드시 해야만 하거나 가장 적당한 말을 찾으려는 사람처럼 조그맣게 입을 움찔거리다가 다시 다물기를 반복했는데, 끝내 거기에 대해 뭐라 하는 말은 없었다. 그 대신 좀더 시급하고 중요한 문제라는 듯이 이번 달에 계획된 경조사비며 자동차 검사비, 각종 공과금과 대출 이자 등에 대해 상세한 지출 목록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나는 죄지은 사람처럼 괜히 어깨를 움츠리고 머리를 조아린 채 연재의 정확한 셈에 따라 한번씩 고개를 끄덕이면서, 혹시라도 무겁게 한숨을 내쉬지는 않을까, 여기에 더 필요한 무언가가 있다거나 거기에 들어갈 만만치 않은 비용을 들먹이는 거 아닐까…… 마음이 조마조마해졌다. 연재도 편치만은 않아 보였다. 더구나 평소와 달리 그때는 왠지 내 눈치를 살피는 것 같았는데, 결국 뭔가를 고백하는 사람처럼 조심스럽게 내게 물어왔다.

“당신은 별일 없는 거지?”

“나야 뭐, 괜찮지.”

그러니까 그때는 그랬다는 것이다. 괜한 걱정과 우려에 내심 당당해지기까지 했었다. 무엇보다 당장 처리해야 될 생활비와 공과금에 비하자면 그 일은 뭐, 나와는 전혀 무관했다. 단순히 그냥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거라고 생각했다.

 

지난 학기 명조가 내 수업을 수강한 적은 있지만 별로 눈에 띄는 학생은 아니었다. 다른 자리에서 건너 듣기로 고창인가 고흥 어디에서 부모님이 복분자 농장을 운영하는데, 학과 행사를 위해 과실주나 건강음료 등을 무료로 제공한 적도 있다고 했다. 그렇다고 그걸로 특별한 대우를 받는다거나 동기들에게 인기가 있는 것은 아닌 듯했는데, 그런 말을 듣던 당시의 나조차도 대단한 의미를 두고 기억한 것은 아니었다. 본래는 타 대학에서 치기공이든가 치위생인가를 전공하다가 작년에 편입을 했더라는 이력을 들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누군가를 떠올리기는 했으나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나중에 엉뚱한 학생에게 굳이 국문과로 편입한 이유를 물었다가 “제가요? 저는 그런 적이 없는데요?” 어쩐지 억울해하는 반응이 돌아와 당황한 적도 있었으니까.

다만 그로부터 얼마 뒤, 써지지 않는 학회 발표 원고를 앞에 두고 끙끙대던 중에 명조를 생각한 적은 있었다. 기력 회복과 집중력 향상에 도움이 되는 보양식을 검색하다가, 언젠가 누가 오디즙 한 팩을 건네기에 받은 적이 있는데 그게 아마 그 학생이었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정도였다.

명조에 대해 그나마 내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은 그 학기가 절반쯤 지났을 무렵의 일이었다. 비전임교원을 대상으로 단과대학별 교육 프로그램이 있던 날이었는데, 법정의무교육이었고 그래서 그런가, 다소 민방위훈련 같은 분위기에서 ‘인권’이나 ‘평등’, ‘차별 없는 우리 대학’ 같은 말들이 흘러나왔다. 온라인상으로 개별 수강도 가능했으나 소강당 안에는 아는 얼굴들이 제법 보였다. 언젠가 재임용 계약을 하는 데 이런 자리에 얼굴 한번씩 비추는 게 도움이 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내 경우엔 꼭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신경이 쓰이기는 했으나 뭐, 그렇게 하지 않을 만한 이유도 딱히 없었을 뿐이었다. 새로 부임했다는 인문대학장이 인사차 단상에 올라 “지금 여러분 표정이 내 수업을 듣는 학생들과 아주 똑같군요” 하고 농담을 했을 때도 일부러 더 크게 반응한 것은 아니었다. 그냥 웃겨서 웃었을 뿐인데 옆에 앉은 누군가가 떨떠름하게 나를 쳐다보았을 땐 그게 뭔가 다른 의도로 보이지는 않았을까, 괜히 마음이 불편해졌다. 더구나 그가 방금 혼자서 중얼거리던 말이 무엇이었는지 되묻고 확인하고 싶었다.

“이런 게 다 폭력이지.”

왠지 그런 소리를 들은 것도 같았기 때문이다.

바쁘지 않다면, 하고 조건이 붙기는 했으나 교육을 마친 뒤 이어진 식사자리에 몇몇 시간강사들과 함께 참석한 것도 다 비슷한 이유에서였다. 평소라면 수업을 마치자마자 배차 시간과 환승 시간을 확인하고, 편도로 두시간이 걸리는 일산까지 어떻게든 서둘러 돌아갈 걱정을 했을 테지만, 그렇다고 딱히 서둘러 해야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물론, 전임 교수들이 먼저 예약된 식당에서 자리를 잡고 기다리고 있더라는 말도 전혀 이유가 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연재에게 전화를 걸었고, 만약 조금이라도 마뜩잖아하거나 당장 출발하라거나 하는 식의 말을 듣게 된다면, 당연히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

“당연히 괜찮지.”

구차하게 사정을 설명한 것도 아닌데, 연재는 흔쾌히 허락해주었다. 그래도 너무 늦으면 안 되니까 막차 시간을 꼭 확인하라는 말도 덧붙였는데, 막차는 무슨…… 그렇게까지 오래 남아 있을 생각이 내게는 전혀 없었다.

 

예상보다 자리가 길어진 것은 말하자면 괜한 오해를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테이블당 하나씩 느타리버섯을 가득 넣은 불고기전골이 올라와 있었고, 그것을 중심으로 둘러앉은 그 자리가 나는 몹시 어색했다. 간단한 인사말과 안부들이 오간 뒤 그것으로 마치 해야 할 일은 이제 다 끝났다는 듯이 몇 사람이 먼저 일어서기도 했다. 그러니까 대부분은 불편해하지만, 그렇다고 아주 없애버리기에는 누군가에게 또 아쉬울 법도 한 자리라, 굳이 애써서 차려 놓은 모양새였다. 맥주 한잔을 받은 채 나는 적당히 빠져나갈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가까운 곳에 행사 진행을 위해 동원된 근로장학생 몇명이 따로 테이블을 잡고 있어서 “너는 네 말을 좀 해. 그렇게 남의 말만 하지 말고” 하는 대화도 좀 엿듣다가, 누군가 내게 말을 걸면 대답하고, 대개는 딱히 누구한테 하는 말이 아닌 말들을 들으면서, 혹시라도 붙잡거나 술을 더 권한다면 그때 댈 만한 핑곗거리를 미리 생각해두고 있었다. 교학처장으로부터 버섯이 콜레스테롤 감소에 좋다거나, 그래서 고기랑 먹으면 궁합이 잘 맞는다는 소리를 들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거기에 다른 생각이 있던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고개만 끄덕이지 좀 말아요.”

그런데도 정확하게 나를 지목하던 그 낮은 목소리가 나는 꽤 당황스러웠다.

“왜 듣지도 않고 마냥 그렇다고만 하냐고요. 사람 참…… 기분 나쁘게.”

그러고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식당 밖으로 나가버렸다. 무안하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이 상황을 해명하고 싶은 것이 먼저였으나 정작 그 순간의 나는 젓가락을 들어 전골 한움큼을 집기만 했을 뿐이었다. 따라두고 오래 마시지 않은 미지근한 맥주도 한모금 들이켜고 질긴 버섯을 우적우적 씹으면서, 그렇지 버섯은 콜레스테롤을 낮추지, 소화기관에도 좋고 비만이나 고혈압에도 효과가 좋아서 성인병 예방에도 좋다던데…… 근데 그게 뭐, 좋은 것을 좋다고 했을 뿐인데 내가 뭘, 뭘 어쨌다고…… 그런 생각만 했을 뿐이었다. 옆에 앉은 또다른 사람이 내 무릎을 툭툭 두드려주었을 땐, 정말이지 내가 뭔가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된 것 같아 억울한 마음도 들었다.

 

그날 연재는 새벽 두시를 넘겨서야 도착한 나를 타박하거나 반드시 그랬어야 할 이유를 따져 묻거나 하지 않았다. 샤워를 다 마칠 때까지도 먼저 잠들지 않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래서 다음 학기는 어떻게 되는 거냐고, 거기서 뭣 좀 들은 게 없느냐고, 묻고 싶은 것들이 많았을 텐데도 그러지 않았다. 실은 나도 그게 가장 궁금했으니까. 식당에서 있었던 난처한 일들에 대해서도 나는 말하지 않았다. 그랬다면 아마 연재는 그로부터 더 많은 고민을 해야만 했을 것이다. 불안해하고 걱정을 하고 좀처럼 해답이 나오지 않는 계산에 빠져들었을 텐데, 대신 우리는 명조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나눴을 뿐이다. 계획보다 너무 늦어버린 사정에 대해 설명하다가, 그 자리에 내 수업을 듣던 학생도 하나 있었다고, 막차 시간은 이미 지난 뒤였고 가는 방향이 비슷해서 함께 택시를 탔으나 생각보다 많이 돌아가는 길이었다고. 그러니까 그 적지 않은 시간 동안 명조와 나는 이것저것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명조는 뭐랄까,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빈 국그릇 같은 아이였다.

“말이 뭐 그래. 국그릇이 뭐야, 사람한테.”

그때는 그냥 그것 외에는 별다른 표현이 떠오르지 않았다. 생긴 것도 뭉툭하고 하는 말도 대체로 진지한 데다가, 딱히 표정이랄 것도 없이 사람을 뚱하게 바라보는 것이 상대방을 괜히 부담스럽게 만들었다. 그렇다고 그게 무례하다거나 불량하다거나 어떤 다른 감정을 품게 만들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명조가 아무한테나 자기 속엣말을 해버리는 부류라는 생각은 했었다. 그런 솔직함이 나는 조금 어색했을 뿐이었다.

예를 들면, 아까 친구들과 제법 심각해 보이던데 무얼 두고 그런 거냐고 내가 물으면, 거기에 대해 명조는 제법 성실하고 지루하게 설명해주었다. 별로 귀담아들을 만한 말은 없었다. 맥락이나 요점이 무엇인지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웠으나, 대신 명조가 어떤 종류의 사람인지는 알 수 있었다. “너는 네 말을 좀 해” 그런 말을 들으면서도 묵묵히 젓가락을 놀리고 입안에 무얼 채워 넣기만 하던 명조를 나는 어쩐지 이해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그런 순간에도 나는 나를 생각했다. 그러니까 그 자리에 명조가 아니라 내가 있었더라면 나도 그랬을 거라고, 물론 내 앞에 명조 같은 사람이 있었더라면 남의 말만 하지 말고, 네 말을 좀 하라며 비슷하게 참견하고 조언하고 싶었을 테지만, 명조가 없고 나만 거기 있었더라면 누군가에게 그런 말을 듣는 사람이 내가 되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이요, 다 나를 싫어하는 것 같아요.”

한적한 도로에서 신호를 받고 대기 중인 택시 안에서 명조가 그렇게 말했을 때도 비슷한 마음이었다. 뭔가 답을 해야만 할 것 같은 부담감도 있었고, 그게 뭐든 명조에게 도움이 되는 쪽이어야 할 것 같았다. 그랬으므로, 특별히 명조씨가 무얼 잘못해서라기보다는 단순히 그 자리에 당신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그러니까 사람들은 다들 비슷비슷하고 아주 다르게 사는 것도 아니면서 누군가로부터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일이 견딜 수 없을 때가 있다고, “나도 그래요. 나랑 너무 닮은 사람들을 보면 불편해. 불편하지, 당연히” 그런 말들을 두서없이 늘어놓았다.

 

 

2

 

무엇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전혀 다른 것을 보게 된다는 것쯤은 이미 상식적인 소리겠지만, 그게 아는 만큼 쉽게 이해되는 일은 아니었다. 단순히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것뿐이니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하고, 그것으로 양질의 토론을 기대하는 일도 사실상 거의 불가능했는데, ‘사고와 표현’을 처음 맡았을 때도 비슷한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낙태나 안락사, 국제난민과 표현의 자유 같은 문제를 두고 주로 토론과 발표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교양 과목이었다. ‘논리적 글쓰기’와 함께 한 학기 동안 내게 배정된 강의였는데, 그러니까 새 학기가 막 시작되고 얼마 뒤, 학과 교수들과의 가벼운 면담자리에서 나는 강의에 대한 몇가지 조언과 당부를 들을 수 있었다.

“너무 개인적인 생각은 드러내지 마세요. 학생들이 서운해합니다. 한쪽 편만 든다고 오해하거든요.”

꼭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더라도, 공평하고 중립적인 태도로 양쪽의 의견을 조율하는 것은 교수자로서의 마땅한 자세라고 생각하는 편이었다. 문제는 그게 안다고 그대로 실천할 수 있는 종류의 일이 아니라는 점에 있었다. 드러내놓고 특정 주장을 지지하거나 응원하지 않더라도 수강생들을 서운하게 만들 만한 사례는 적지 않았는데, 한번은 수업을 마치고 학생 하나가 개별적으로 찾아온 적도 있었다. 임의로 배정된 발표조를 바꾸어줄 수 없겠느냐는 것이었다. 따로 선호하는 조가 있는 것은 아니었고, 납득할 만한 이유를 댄 것도 아닌 데다가, 그게 어딘가 공정하지 않은 것 같아 허락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후로 수업에서 그 학생을 다시 볼 수 없었다. 별거 아닌 일에 내가 괜히 상처를 준 건 아닐까, 어쩌면 설명하기 어려운 나름의 사정이 있었을 텐데 내가 너무 단호하게 굴었나 싶어서 몹시 신경이 쓰였다. 그럼에도 당시에는 다른 부분을 고려하는 것이 더 먼저였다. 무엇보다 나는 그 이유가 아마 명조 때문일 거라고 짐작했는데, 하필 그 학생의 조원 중에 명조가 포함되어 있었고, “다 나를 싫어하는 것 같아요”라고 말하던 담담한 표정이 줄곧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그랬으므로 내 입장에서 보자면, 단순히 한 학생의 조를 바꿔주는 문제라기보다는 누군가를 소외시키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던 것이다.

더욱이 되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그즈음의 주변 분위기도 한몫을 하긴 했다. 사학과 A교수가 수업 중에 발언한 차별적인 표현 때문이었는데 이와 관련된 공문과 일종의 예방 매뉴얼 성격의 메일들이 잔뜩 전달되었다. 대부분은 무언가를 하지 말라는 것이었고, 그렇게 했을 경우 받을 수 있는 불이익과 그 근거가 되는 법조항들이 나열된 서약서에 서명을 받기도 했다. A교수에 대해서라면 이전에도 권위적인 태도에 불만을 품은 학생들이 적지 않았다. 내가 이미 알고 있는 것만 해도 몇가지였는데 출석을 부른 뒤에는 강의실 출입문을 잠가버린다거나, 성적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면 오히려 페널티를 준다거나, 또 언젠가는 요일을 착각했는지 전혀 다른 과목 시간에 들어가 그대로 수업을 진행한 적도 있었다고 했다. 물론, 담당 교수가 도착한 뒤에 이미 강의실은 잠겨 있었고 아무리 두드려도 문을 열어주지 않았더라는 이야기도 들었다. 한여름에도 넥타이와 양복을 갖춰 입은 채, 슬리퍼를 신은 학생들을 지적하던 A교수를 나도 본 적이 있었다. 화단이나 벤치에 버려진 것들을 줍는 것도 보았고, 연구동 화장실에서 단정하게 머리를 빗는 모습도 보았다. 나이에 비해 숱이 많았으나 염색 없이 하얀 뒤통수였다. 그러고는 세면대에 남은 물기를 맨손으로 말끔하게 닦아내던 것도 볼 수 있었다.

한번은 강의동 건물 앞에서 마주쳤다가 몇마디 말을 나눈 일도 있었다. 그의 손에 들린 것들을 차마 모른 척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인데, 그러니까 빈 캔이나 담배꽁초, 본래는 무엇이었는지 알 수조차 없을 만한 자질구레한 것들을 줍고 있는 A교수 곁에서 나도 함께 도왔던 것이다. 주변에 더 주울 것이 보이지 않을 때가 되어서야 나는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주세요, 선생님. 제가 버리고 오겠습니다.”

그때는 다만 유별나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고집스럽고 고지식하고 남의 말은 하나도 듣지 않지만 묘하게 안타깝기도 하고, 적응의 문제겠지…… 그렇게 살아온 사람들은 그렇게 살게 되니까…… 하는 마음이었다. 그런데도 A교수는 나를 빤히 쳐다보기만 할 뿐, 손에 든 무엇도 내게 건네주지 않았다. 대신 이런 말을 하긴 했었다.

“내가 모은 걸 왜 그쪽이 뺏어가나?”

A교수와 나눈 대화는 그것이 전부였다. 듣기에 따라 화를 내는 것도 같고, 억울해하는 것도 같아서 오히려 상대방을 당혹스럽게 만드는 말투였다. 그랬으므로 빠른 걸음으로 멀어지는 그를 나는 멀뚱히 서서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목소리가 작거나 소극적인 학생들에게 A교수는 특히나 모질게 대한 모양인데, 문제가 된 사건도 아마 비슷한 상황에서 벌어진 것 같았다. 교내 커뮤니티 익명 게시판에 올라온 사건의 개요는 대강 이랬다. 그날도 학생 하나가 지목되었고, 강의실 앞으로 불려 나왔으며, 읽어가는 과제물의 문장들을 조목조목 지적받기도 했는데, 그럴수록 더 움츠러드는 목소리를 A교수는 가만 듣고만 있지 않았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 학생이 눈물을 보인 후에야 겨우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해당 게시글이 올라왔을 당시만 하더라도 다른 글에 비해 눈에 띌 정도로 높은 조회수를 기록한 것은 아니었다. 댓글이 많았다거나 A교수의 일화 중 유독 특별한 경우도 아니었는데 사건이 불거지게 된 것은 이튿날, 공개적으로 게시된 외국인 학생들의 성명서 때문이었다. 학내에 만연한 차별적인 정서를 지적하고, 이와 관련된 인종적·문화적 편견과 선입견의 사례들, 그러니까 우물거리고 불분명한 학생의 발음을 지적하던 중에 나온 A교수의 특정 발언, “자네, 혹시 중국인 학생인가?”라는 표현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하며, 이에 대한 유의미한 후속조치와 재발방지책 등을 촉구하고 나섰던 것이다.

그로부터 얼마 뒤, 나는 연재에게도 그간에 올라온 게시물들을 보여주었다. 성명서에 대한 지지 의견을 담은 새로운 글들과 거기에 달린 댓글들을 꼼꼼히 읽어가던 연재는, 그래서 평소의 언행과 처신을 똑바로 해야 한다고 내게 당부했다. 겸손하게 행동하라고도 하고, 너무 가르치려 들지 말라고도 했는데, 내가 하는 일이 그거라고, “그러면 내가 뭘 얼마나 겸손하게 안 가르쳐야 하는데?” 어쩐지 억울한 마음이 들어서 조금 언성을 높이기도 했다. 그런데도 연재는 왜 또 그렇게까지 반응하느냐,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않느냐, “당신이 좀 그래. 그렇게 자기 할 말만 하고 그러지 말라고. 그게 사람을 얼마나 피곤하게 하는데” 그런 말로 나를 골리려고만 들었다.

나라고 뭐, 거기에 딱히 다른 의견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나쁘다고 생각했고,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되는 거라고도 생각했는데, 나쁘지, 나쁘긴 물론 나쁘지, 나쁘긴 나쁜데, 나쁜 말이네…… 다만 생각이 많아졌을 뿐이다. 그사이 추가로 올라온 게시물들을 살피면서 거기에 또다른 말은 없는지, 혹시라도 내가 몰랐던 더 나쁜 경우를 발견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 마음이 초조했었다.

그날 저녁 연재는 줄곧 서재에만 틀어박혀 있던 내게 묻지도 않고 치킨 한마리를 배달시켰다. 언제 나갔다 왔는지 편의점에서 네개에 만원씩 파는 캔맥주도 식탁 위에 올려져 있었는데, 그걸 먹고 마시는 동안 연재는 줄곧 역류성식도염과 각종 성인병 등에 대해 걱정을 늘어놓았다. 그러고는 얼마 전에 종영한 드라마 이야기도 좀 하고, 이름만 알고 만난 적은 없는 자기 친구들의 소식도 전하고, 잠깐 아무 말이 없는 틈에 괜히 빈 캔을 힘들여 구기던 내게 “당신은? 당신은 나한테 뭐 할 말 없어?” 하고 묻기도 했다.

미지근해진 맥주캔 주변으로 벌써 흥건하게 물이 고여 있었다. 나는 마른행주를 들고 와 젖은 곳을 훔치면서, 실은 얼마 전부터 학생 하나가 수업에 나오지 않는다고, 이러저러한 일이 있었고, 나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어서 그랬던 것뿐인데 그게 자꾸 신경이 쓰이네, 하고 말했다.

“근데 있잖아, 자기가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생각하면 어쩌지? 내가 일부러 자기를 차별해서 그런 거라고 오해하는 거면 어떡해?”

간혹, 나는 연재가 나에 대해 나보다 더 잘 알고 있는 것 같을 때가 있는데, 그럼에도 아는 것 모두를 드러내지 않고 대신 내가 아닌 다른 것들에 대해 말하려고 애쓸 때 특히 더 그랬다. 그게 연재 나름의 세심한 배려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더구나 나 역시 연재가 말하지 않은 연재의 진짜 속마음 같은 것을 알아챌 때가 있었다.

“아무래도 그게 공정한 거니까. 원칙대로 한 건데, 뭐.”

그렇게 말하는 연재의 표정이 제법 무심해 보였다. “뭐야, 겨우 그것뿐이야?”라고도 하고, 텔레비전을 틀어 절반쯤 지난 예능 프로그램을 시청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그런 것들로 나를 안심시키려 들었다. 그 밤 연재는 좀처럼 잠들지 못했다. 자주 뒤척이고, 속이 더부룩하다며 소화제를 찾기도 하면서 아무래도 밤에 무얼 먹는 버릇은 좋지 않다고도 했으나, 나로서는 꼭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관점에 따라 같은 것도 다르게 볼 수 있다는 말에는 만약, 아무런 태도나 입장을 취하지 않는다면 무엇도 볼 수 없다는 점이 전제되어 있다. 요컨대 우리는 의미있는 무언가를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보는 무언가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셈이다. 그것을 강의 중에 설명해야 할 때, 나는 오리로 보이기도 하고, 토끼로 보이기도 하는 그림을 예로 들었는데 실은 여기에 숨겨진 진짜 비밀은 따로 있었다. 그러니까 하나의 그림이 다르게 보일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는 일은 별로 어렵지 않지만, 그 둘을 동시에 보는 일은 결코 불가능하다는 것. 우리가 동일한 한장의 그림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오리이거나 토끼일 뿐, 오리인 동시에 토끼인 것을 경험할 수는 없다는 것. 아무리 애를 쓰고 도전한다고 하더라도 매우 짧은 시간 안에 우리의 의식체계가 토끼에서 오리로, 오리에서 토끼로 순식간에 전환되어버리기 때문인데, 마찬가지로 우리가 무언가를 말하려 들 때는 필연적으로 다른 무언가를 부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 그러므로 다른 관점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 위해서 가장 선행되어야 할 자세는 의식적으로 무엇이 부정되었는가를 상상하는 일이라는 것. 예를 들어 우리가 오직 오리만을 보고 있을 때 한때 토끼를 보았던 과거의 경험은 나와 다른 입장을 상상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 등등.

그러니까 나는 지난 학기 ‘사고와 표현’에서도 같은 내용의 강의를 한 적이 있었다. 그럼에도 보통 때와는 나의 마음가짐 같은 것들이 조금 달랐는데 평소처럼 같은 그림을 프로젝터 화면에 띄워놓고, 익숙하게 하던 말을 했을 뿐인데도, 어쩐지 변명을 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여전히 그 학생은 출석하지 않았고, 이후로 내게서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는 고발성 글이나 문제제기가 있던 것도 아니었다. 정작 그걸 들었으면 하는 사람이 눈앞에 없는데도 그것과는 상관없이 누구에게라도 말해두어야만 할 것 같았다. 다만 이전에는 듣지 못한 말을 듣기는 했었다. 학생들이 서둘러 빠져나가는 강의실에서 명조는 뭔가 할 말이 있다는 듯이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다. 그러고는 예의 그 뭉툭하고 뚱한 표정으로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근데요, 이렇게 하면 그게 보이던데요.”

이미 아무것도 없는 빈 칠판이었고, 거기서 무얼 보고 그러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다만, 거의 감길 듯 게슴츠레 뜬 눈으로 “이렇게 하면 둘 다 보여요” 하던 명조가 나는 엉뚱하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진짜는 그게 뭐든 별로 궁금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는데, 무엇보다 그런 명조가 내게 어떤 식으로든 해가 될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3

 

A교수에 대해 내가 이전과 조금 다른 생각을 품게 된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사이 크게 달라진 상황은 없었다. 여전히 게시판에는 항의성 글들이 올라왔고, 사과를 요구하기도 했으며, 몇몇 학생들은 해당 수업의 출석을 거부하기도 했다. 다만 그러거나 말거나 A교수는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는데, 여전히 출석을 부르고 그런 다음에는 문을 걸어 잠갔으며, 평소와 다름없이 수업을 진행했던 것이다. 더구나 익명 글에서 언급된 해당 학생에 대한 적절한 보상이나 후속조치 역시 전혀 없었던 모양인데, 무엇보다 당사자가 직접 나서서 거기에 대해 항의하거나 요구한 일도 없었다. 듣기로 여전히 해당 강의에 빠지지 않고 출석하는 중이라고 했다. 물론, 학생회 측에서 당사자를 직접 찾아가 나름의 도움을 주려고 시도한 적은 있었으나, 기대했던 것과는 아주 다른 말을 들었을 뿐이었다.

“아니요, 저는 교수님이 나쁜 의도로 그런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러고는 본인에 대한 글이 허락도 없이 돌아다니는 것이 불편하다고 했다. 게다가 자신을 자꾸 설득하려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경고성 발언도 남겼다고 하는데, 그게 정확히 무엇에 대한 경고였는지는 다른 자리에서 들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학과장으로부터 예정에 없는 저녁식사를 함께하자는 전화를 받은 날이었다. 그보다 며칠 전에는 다른 곳으로부터 연락을 받기도 했었다. 사학과 강사들을 중심으로 일종의 대응 방안을 모색 중이라는 내용이었는데, 그게 나를 난처하게 만들었다.

나는 학교 측에서 이번 사안을 보다 서둘러 처리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누군가로부터 부당함을 지적받았으니 이에 대한 적절한 조치를 취하고 원만한 합의라든지, 필요한 보상이라든지, 하다못해 관련자에게 책임을 묻거나 제재를 가해줄 거라고 기대했었다. 무엇보다 나와는 상관없다고 여겼던 일들로부터 내가 어떤 식으로든 피해를 받지 않기를 바랐는데, 나만큼 상관없다고 생각했던 다른 학과의 강사들이 그 성명서에 동참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들은 후로는 왠지 조바심마저 들었다.

재임용 계약을 얼마 앞두고 학과장을 만난 자리에서도 나는 이 문제에 대한 나의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았다. 학교 근처의 중화요리 전문점이었고, 회식이나 모임 장소로 자주 이용되는 곳이라, 혹시라도 모르는 누군가가 우리의 대화를 엿듣는 것은 아닌가 불안하기도 했었다. 그럼에도 말을 하면 할수록 어쩐지 억울한 기분이 들었는데 어딘가에 화가 나기도 했으며 좀처럼 말을 멈추기가 어려웠다. 그러는 동안 주문한 요리가 나왔고, 그것을 다 먹기도 전에 식사 메뉴를 추가로 주문받았으며, 그때까지도 학과장은 심각한 표정으로 내가 하는 말들을 모두 듣기만 했었다. 그러다가 아무것도 집지 않은 빈 젓가락으로 식탁 위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그래도 김선생은 괜찮을 거예요. 애들이 김선생은 좋아하잖아. 우리가 문제지, 우리가. 처음부터 제대로 일처리를 했어야 했는데…… 괜히 신경 쓰이게 해서 미안하네, 이거.”

이미 다 불어버린 면을 휘휘 저어가며 나는 학과장의 말을 들었다. 그러나 조금도 마음이 편해지지 않았다. 그 문제라는 게 문제를 겪고 있다는 의미에서 문제인 건지, 문제를 일으켰다는 것의 문제인 건지 애매하기도 했지만 그때는 뭐랄까, 단순히 그냥 그 ‘우리’라는 말 자체가 거슬렸다. 어쩐지 서운했고, 그 우리가 나는 아니라는 건가, 내가 속하지 못한 그 일인칭의 복수형이 아주 멀게만 들렸다.

“사과를 할 생각이었대요.”

내가 알지 못했던 A교수의 사정을 전해 들을 때도 불편한 마음은 여전했다.

“혹시라도 진짜 유학생이면 당신이 배려하지 못한 셈이 되니까, 처음부터 미안하다고 말할 생각으로 물었다더군요.”

그런 다음에는 이후에 있었던 복잡한 상황들로 얘기가 이어졌다. 그러니까 성명서가 올라온 이후 그 학생이 받은 또다른 피해에 대해서, 무엇보다 자꾸 전화를 받는다고, 아마 다른 학생들이 장난을 좀 치는 모양인데 새벽이나 밤늦게 걸어서 그냥 끊어버리기도 하고, 전혀 모르는 사람을 찾기도 하고, 언젠가는 전주라든가, 전라도 어디에 있는 한정식집에서 왜 단체석 예약을 해두고 오지 않느냐며 항의를 받기도 했다던데, “그게 좀 그래요, 요즘 애들이 워낙 자기주장이 강하다보니까” 하는 말들을 들었다.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들 끝에 나는 명조의 이름을 들을 수 있었다. “실은 다른 일 때문에 좀 보자고 했는데……”라고 잠깐 뜸을 들이더니, 얼마 전에 휴학 상담을 하러 학생 하나가 찾아온 적이 있다고 했다. 졸업을 한 학기 앞둔 상태였고 정확한 사유를 댄 것은 아니었지만, 짐작 가는 데가 없진 않았다고도 했다. 그러니까 같은 과 후배에게서 고백을 받았고, 그것을 거절했으며, 이후로 꽤나 서먹하게 지냈는데 그게 주변에 소문이 좀 난 모양이었다. 그걸 학과장도 알고 있었고, 그러지 않아도 되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분위기에서 혹시라도 자기가 모르고 있는 다른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지 신중하게 알아보았다고 했다. 더구나 휴학을 하겠다는 학생으로부터 모멸감이나 수치심 같은 단어를 들었을 땐 분위기가 한층 더 심각해졌을 것이다. 그리고 학과장은 내게서 그 후배에 대해 뭔가 더 알고 있는 것은 없는지 물었다.

“명조가 김선생 수업에서는 좀 어때요? 둘이 함께 그 수업을 들었다던데.”

나는 마땅하게 할 말을 찾지 못한 채, 명조에 대해 이것저것 기억나는 것들을 떠올렸는데, 명조는 뭐랄까…… 어색하지, 어색하긴 한데, 어색하다고 나쁜 건 아니지, 나쁘진 않지, 불편할 뿐이니까, 그건 그냥 적응의 문제니까…… 하는 생각만 들었다. 그럼에도 한편으로는 모멸감을 주거나 수치스럽게 만드는 문제는 다르지 않나, 누군가를 그런 식으로 대하면 안 되지 않나, 안 된다고 나는 생각했다.

“뭐 때문이랍니까?”

그게 무엇이든 나와는 경우가 다르다고 믿었다. 그런 순간에서조차 나는 나만 생각하는 사람이었으니까. 물론, 그 학생이 염려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거기에 내가 무슨 실수를 더한 건 아닐까. 나를 찾아왔을 땐 그만한 이유가 있었고 고작 발표조를 바꿔달라고 부탁했을 뿐인데, 들어주지 않았다. 사정을 들었다면 아마 달랐을 테지만 그러지 못했다. 부끄러웠겠지. 나라면 나 같은 사람 앞에서 민망하고 부끄러웠을 거야.

“무슨 말을 하긴 했나봐요. 뭐라더라, ‘누나, 누나가 나를 싫어하는 이유는요. 우리가 너무 닮아서예요. 누나는 그게 싫은 거예요.’ 그걸 또, 다른 사람들한테도 말하고 다녔나봐요.”

그러고는 뭔가를 떠보려는 사람처럼 학과장은 다시 빈 젓가락으로 식탁을 톡톡 두드리면서 사이를 두었다. 어쩐지 내 눈을 피하는 것도 같고, 마치 여기에 우리 이외의 다른 사람이 더 있다는 듯이 허공에 대고 말했다.

“근데 명조가 그래요, 그 말을 김선생이 했다던데?”

 

교수자로서의 명예와 품위를 갖추고 도덕성과 공정성을 바탕에 둔 올바른 교육과 합리적인 연구 활동 등을 강조한 ‘윤리강령’을 나는 여러번 본 적이 있었다. 관련 교육을 이수하거나 임용을 위한 계약서류들 사이에 자주 첨부되어 있었는데, 다만 그것을 꼼꼼히 읽거나 일부러 외우려고 노력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중요하지만 따분하다고 생각했고, 읽지 않아도 거기에 뭐라 적혀 있을지 충분히 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비전임강사들의 공동성명서에서 그 문구를 발견했을 때는 새삼 다르게 읽혔다. A교수가 지키지 못한 규범과 항목들은 붉은색으로 유독 강조되어 있었고, 교육현장에서 혐오와 차별이 엄격히 금지되어야 할 이유들이 논리 정연하게 나열되어 있었다.

나라고 뭐, 거기에 어떻게 다른 생각을 가질 수 있었겠나. 나쁜 것을 나쁘다고 말했을 뿐인데. 그런데도 자꾸 화가 났다. 침묵하는 것이 동조하는 것과 같다는 문장에는 억울한 마음이 들었고, 사태가 조속히 해결될 때까지 다음 학기에 대한 계약을 거부한다는 선언에는 괘씸한 생각마저 들었다. 그리고 거기에 내 이름이 누락된 이유에 대해 당장 해명하고 싶었고, 그런 의도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그걸 조리 있게 설명할 자신이 없었다. 대체로는 해서는 안 되는 말들만 남을 뿐이었는데, 더구나 그런 규범이나 원칙에 대해 반대하는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A교수라고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명예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으로 그런 거라면 어떻게 되는 건가, 신중하고 품위 있게 선택한 결과값이 그렇다면, 그걸 누가 판단해야 되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다보면 나는 자꾸 사나워졌다. 그런 의도가 아니지 않나, 왜 엉뚱한 사람에게 피해를 주나. 종국에는 명조에게 가장 화가 났다. 물론 그 일로 특별히 내가 무슨 불이익을 받았다거나 책임을 져야 할 상황이 생긴 것은 아니었다. 자초지종을 모두 들은 학과장도 나와 다른 생각을 한 것은 아닌 듯했다. “학생들과 너무 개인적인 이야기는 하지 않는 게 좋아요”라는 말을 들었을 뿐이니까. 다만 그것마저 내게는 일종의 경고처럼 들리긴 했었다.

좀처럼 화가 풀리지 않는 상태가 지속되면서, 나는 연재와도 사소하게 부딪치는 일이 많았다. 그때마다 일부러 멀리 산책을 나가거나, 오래 목욕을 하거나, 시키지도 않았는데 냉동실에 얼려둔 음식물 쓰레기를 버린다는 핑계로 담배를 태우러 나가고는 했다. 그러고는 오직 한가지 생각에만 빠져들었다. 한번은 한참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아서 연재가 나를 찾으러 나온 적도 있었다. 그러고는 아까부터 뭘 그렇게 혼자 중얼거리는 거냐고 물었다. 혹시 평소에도 그러는 거냐고, 그러면 그러지 말라고, “누가 보면 얼마나 무섭겠어. 괜히 애먼 사람 겁주지 말고.” 그 말이 나를 자극했다.

“내가 뭘, 뭘 내가 어쨌는데.”

거칠게 서재의 문을 닫고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나는 진실의 반대말이 주로 거짓이나 가짜라고 배워왔는데, 살면서 오히려 무지에 더 가까운 개념이 아닌가, 생각할 때가 많았다. 무엇보다 나는 종종 진실을 알고 있다고 오해할 때가 많았고, 그것이 잘못이라는 걸 깨닫는 순간은 대체로 무언가를 더 알게 되었을 때였으니까.

그날 나는 커뮤니티 게시판에 올라온 윤리강령을 처음으로 진지하게 살펴보았다. 어떤 것은 소리 내어 읽어보기도 하고, 정확한 사전적 정의를 찾아보기도 하고, 어떤 구절은 여러번 반복해서 천천히 탐독하기도 했으나, 거기서 내가 전혀 몰랐거나 아주 잘못 알고 있던 의미를 발견할 수는 없었다. 다른 게시물이나 댓글들도 마찬가지였다. 하나같이 정당하고 당연한 말들뿐이라 달리 해석하기 어려웠다. 대신, 내가 읽은 ‘윤리’라는 단어들을 ‘논리’로 모두 바꿔 읽는다고 하더라도 전혀 어색할 것이 없었다. 그러니까 그 논리라는 것이 무엇인가. 누군가를 부정하지 않고 나를 긍정하는 논리는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이치에 맞는 말을 생각하는 일과 도리에 맞는 사람을 생각하는 일…… 그 둘의 차이에 대해서 나는 한 글자 한 글자 적어가기 시작했다.

 

 

4

 

A교수의 문제가 일단락된 것은 그 학기가 거의 끝나갈 즈음의 일이었다. 그러니까 명조 쪽에서 법적인 소송 절차에 들어가기에 앞서 학교 측에서 먼저 공식적인 사과와 재발방지책을 내놓은 것인데 복잡했던 그간의 상황을 정리하자면 대략 이랬다. 학사일정상의 보강 기간을 며칠 앞두고 학생회에서는 기습적으로 A교수의 연구실로 항의 방문을 했는데 그 자리에는 다른 동료 교수들도 여럿 있었다. 피켓과 구호로 이루어진 일종의 퍼포먼스성 시위가 결국 몸싸움으로 번진 것은 그중의 누군가 나서서 A교수를 변호하면서부터였다.

사건 당일 현장을 촬영한 영상이 고스란히 게시물로 올라왔을 때, 나는 그것을 여러번 재생해가며 보았다. 소란스러운 주변 상황에도 정작 A교수가 앉은 자세 그대로 무릎만 두드리고 있는 것을 보았고, 피켓에 적힌 문장들도 유심히 보았으며, 무엇보다 그 동료 교수를 나는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A교수의 무고함을 대신 주장하며 양쪽의 의견을 공정하게 들어야 한다고, 대화나 상식으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나름의 이유와 그럴 수밖에 없던 사정이 담긴 장황한 설명에도 거기 있던 누구도 납득하거나 인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빈정거리는 듯한 야유만 쏟아지자 그걸 두고 또 무례하다느니 몰상식하다느니, 언성을 높이기도 했다. 그러고는 특정한 한 학생을 가리키며, “어른을 왜 그렇게 빤히 쳐다보느냐”며 나무라기도 했는데, 그 말에 학생회가 강하게 대응했다. 당장의 사과를 요구하고, 그들이 가진 대표성을 주장했으며, 이렇다 할 대꾸 없이 서둘러 자리를 피하려는 그 동료 교수의 손목을 붙잡기도 했다. 그러니까 보기에 따라 단순히 뿌리치려는 듯한 그의 다음 행동이 결과적으로 열명 남짓한 학생회 학생 중 한명의 얼굴을, 그러니까 오명조를 폭행하게 된 셈이었다.

 

그게 나는 좀처럼 잊히지가 않았다. 일부러 수납장의 물건들을 꺼내 다시 정리하고, 방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줍고, 그런 다음에는 공들여 이곳저곳을 닦아보기도 했으나, 어느 순간에는 걸레를 든 채 멍하니 빈 벽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고는 내가 영상에서 들었던 말들을 곰곰이 다시 떠올렸는데, 제법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다. 그럴듯하지만 간교하고 논리적이지만 자기합리화에 가까웠으며, 더구나 그것 모두 내가 하고 싶었던 말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만약 그 자리에 내가 있었으면 어땠을까, 생각했다. 그때 그 연구실에 내가 있었고 누군가 나를 몰아붙였다면…… 설명하려 했겠지. 앉아서 가만 무릎만 두드리고 있지 않고, 설득하려 했을 거야. 그러고는 그때 했을 만한 말들을 혼자서 중얼거려보기도 했는데 어느 순간이 되면, 진짜 그런 말을 하게 될까봐 나는 내가 조금 무섭기도 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돌아가는 상황들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말들을 공들여 정리한 적이 있었다. 되도록 논리적이면서 솔직한 생각을 담으려고 애썼는데 그것을 커뮤니티 게시판에 올리기 전에 나는 연재에게 먼저 보여주었다. 왠지 미안한 마음도 들었고, 그것으로 받게 될 비난이나 오해도 걱정되었으나 그보다는 누군가를 이해시키고, 잘못을 따지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연재는 A4 두장 분량의 그 글을 나만큼 아주 오래 공들여 읽어주었다. 어떤 문장을 읽을 때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기도 하고, 단어나 맥락이 어색한 부분은 따로 표시를 하기도 했다. 그러고는 밖으로 나가 바람을 좀 쐬고 싶어했다.

벌써 자정이 넘은 시간이라 우리가 자주 걷던 산책로는 꽤 한산한 편이었다. 평소라면 개를 데리고 나온 사람들을 구경하며, 우리가 더 넓은 집에서 살게 될 때 키우거나 갖게 될 것들에 대해 이야기했을 테지만, 그날은 그러지 않았다. 함께 걷지만 우연히 방향이 같은 사람처럼 아무 말이 없었다. 겨우 입을 떼서도 “하고 싶으면 해야지. 사람이 하고 싶은 일은 하고 살아야지” 연재는 조용히 중얼거릴 뿐이었다. 그 뒤로도 한참을 더 걷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연재가 말했다.

“당신은 당신이 뭐라고 생각해?”

여전히 혼잣말처럼 차분하고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그렇다고 감정을 참거나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고, 대신 달래고 타이르는 사람처럼 조심스러운 데가 있었다.

“당신은 당신이 뭐 대단한 일 하는 줄 알지? 당신은 늘 옳고, 당신이 제일 불쌍하지? 근데 남들은 이거 보면 웃어. 웃는다니까. 당신이 뭔데 그래. 뭔데 이런 말을 해.”

드라마나 영화 같은 데서 보면 이런 장면에서 이런 말을 듣는 쪽은 대개 주인공이었고, 그것을 계기로 도리어 각성을 하거나 무언가를 다짐하거나 했을 텐데, 그러나 그때의 나는 가만 듣기만 했었다. 오히려 마음이 왠지 편해지기까지 했다. 무엇보다 상처 줄 것이 거의 분명한 말들인데도 상처 주지 않으려고 나름 애쓰는 연재에게 “그치, 우리 일이 아니지” 대꾸하면서 불쑥 쑥스럽고 민망한 마음도 들었으므로 일부러 더 크게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었다.

 

연재에게 말하지 않았지만, 여름방학이 시작되고 몇주 뒤에 나는 명조의 부모님을 본 적이 있었다. 대화를 나누거나 따로 인사를 한 것은 아니었다. 학과 사무실로 재임용에 필요한 서류들을 전달하러 가던 길에, 화물칸 측면에 ‘행복농장’이라고 적힌 트럭에서 명조와 함께 내리는 그들을 나는 제법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두 손에 들린 과실 엑기스 상자가 꽤나 무거워 보였고, 한여름에도 차려입은 옷차림은 몹시 답답해 보였다. 그리고 나는 그들이 누구를 찾아왔는지 알 것 같았는데, 승강기 없이 5층 건물을 오를 일이 괜히 걱정되었다. 그러니까 그때는 그런 생각만 했을 뿐, 명조에 대해 다른 감정이 생기지는 않았다. 화가 나지도 않았고, 안타깝지도 않았다. 다만, 그 무렵에는 쉽게 피로감을 느꼈고, 잠을 오래 자지 못했고, 조금 무기력했을 뿐이다.

그로부터 한동안 나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중에 익명 게시판에 올라왔던 그 학생을 찾아가는 장면을 상상하는 일이 많았다. 위로를 하기도 하고, 미안해하기도 하고, 아무튼 그 학생에게 필요한 말들을 들려주기도 했는데 간혹 그게 명조가 되기도 하고, 다른 누군가가 될 때도 있었다. 그때도 여전히 다그치거나 따지거나 하지는 않고 오로지 듣기에 좋을 말들만을 골라 했다. 그러고는 그 끝에 나는 늘 내가 이런 말을 듣는 장면도 함께 상상했다.

“그런데 선생님이 왜요? 왜 저한테 그런 말을 하는데요?”

그러면 당장에 하고 싶은 말들을 참을 수 있었다. 그것으로 어딘가 빚을 갚은 기분이 들기도 했고 순간의 부끄러움이 제법 견딜 만해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도 뭐,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익숙해졌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아무렇지 않을 때가 더 많았으니까.

 

최근에 나는 아주 오랜만에 명조를 생각한 일이 있었다. 대단할 것은 없었다. 연재와 함께 사진 파일들을 정리하다가 우리에게 몹시 낯선 장소를 발견했는데, 좀처럼 그곳이 어디였는지 떠오르지 않았다. 산림이 우거지고, 등산로를 따라 가을꽃들이 잔뜩 핀 곳이었다. 아무래도 강원도나 지리산 어디쯤일 거라 생각했으나 확신할 수는 없었다. 결국 연재가 먼저 그곳을 기억해냈는데, 아니라고 강원도도 아니고 지리산도 아니지만, “왜 거기 있잖아, 거기. 칼국수만 팔고 수제비는 없다고 당신이 투덜댔잖아”라고만 할 뿐, 막상 그곳이 어디인지 정확한 지명을 대지는 못했다. 그러고는 또 한참을 골몰하며, 잔뜩 미간을 찌푸린 채 다시 사진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그러니까 나는 그런 연재를 보면서 다른 사람을 생각했던 것이다. 이런 표정을 언젠가 또 본 적이 있었는데, 다만 그게 누구의 것이었는지 바로 떠올리지 못했다. 그랬다가도 다시 연재를 생각했다. 내 눈에는 강원도 같기도 하고 지리산 같기도 한 사진을 함께 들여다보면서, 연재가 보고 있는 전혀 다른 그것이 무엇인지 상상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