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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최민경 崔珉景

1974년 전북 정읍 출생.

2006년 진주가을문예 신인상과 2009년 세계청소년문학상을 받으며 등단.

장편소설 『나는 할머니와 산다』 『십자매 기르기』 『마리의 사생활』 등이 있음.

storycmk@naver.com

 

 

 

내 첫번째 거위

 

 

종현은 공고를 나왔고 2개월 정도 전공과 무관한 마술을 배웠다. 졸업한 뒤 곧바로 입대했고 제대 후 서너군데 취직을 했지만 오래 버티지 못했다. 한동안 직업을 갖지 못한 채로 지내다 뜬금없이 동물원에 취직했다. 정규직은 아니고 사육 보조 아르바이트였다. 하루 종일 테마파크를 돌면서 짐승 우리에 물과 사료를 채워놓거나 분변을 치우는 잡다한 일을 했다. 가끔은 사육사 대신 비단구렁이를 목에 걸고 아이들과 사진 촬영을 하거나 관람객들이 만져볼 수 있도록 원숭이, 당나귀, 염소 들을 우리 밖으로 끌고 나오기도 한다고 했다. 한동안 괜찮더니 최근에 일이 힘들어 때려치우고 싶다는 말을 자주 하기에 오늘 밤은 6개월 장기근속 축하 파티를 열기로 했다. 실은 파티는 구실이었고 소맥이 마시고 싶었다. 우리는 각자 퇴근길에 맥주와 소주를 사 가지고 오기로 약속했다. 나는 페트병에 든 참이슬과 케이크를, 종현은 테라와 아이스크림을 사 왔다. 돼지족발을 주문한 뒤 상을 펴고 그 위에 케이크를 놓았다. 긴 초를 하나 꽂으니 허전해서 그보다 짧은 초 세개를 빙 둘러 꽂았다. 전등을 끄고 초에 불을 켤지, 초에 불을 붙이고 전등을 나중에 끌지를 진지하게 의논하다가 그냥 아무렇게나 하자고 말해버렸다. 그럴 거면 그냥 하지 말까, 하기에 아니야 특별한 날이니까 촛불은 켜야 해, 하고 일부러 호들갑스럽게 반응해주었다. 결국 종현이 전등 스위치를 내리는 동안 내가 초에 불을 켜기로 했다.

축하해, 종현아. 어둠 속에서 촛불을 사이에 둔 채 내가 말했다. 종현은 쑥스러우면서도 당당한 표정으로 입김을 세게 불어 촛불을 껐다. 열심히 박수를 치고 나서 케이크는 상 한쪽으로 치우고 술병을 올렸다. 소맥을 섞기 전에 테라를 한모금 마셨다. 야, 종현아. 종현은 케이크 위에 장식된 딸기를 한입에 넣고 우물거리고 있었다. 이거 맛있다. 맛있어서 눈물이 나. 설탕 입힌 딸기보다 테라가 백배 천배는 맛있다 종현아. 종현은 딸기를 꿀꺽 삼키고 나서 방긋 웃었다. 아기처럼 웃었다. 고마워, 선미야. 대체 뭐가 고맙다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고맙다니까 됐다는 생각으로 소주를 맥주잔에 부었다. 이렇게 하면 3대 7이 된다? 쇠젓가락으로 컵의 밑바닥을 툭 치니 천천히 거품이 올라왔다.

우리는 가끔씩 서로의 이름을 부르면서 술을 마셨다. 마실 때마다 처음인 것처럼 몸을 떨었다. 주문한 돼지족발도 잊은 채 케이크를 안주 삼아 마셨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족발은 우리를 잊지 않아서 제때 도착했고 마침 술이 떨어져서 종현이 슬리퍼를 신고 밖에 나갔다 왔다. 오는 길에 허니버터칩이랑 바나나랑 김치사발면도 사 왔다. 잘했다. 잘했어. 종현이 똑똑하구나. 나는 정확하게 말했고 종현도 정확히 알아들었다. 족발도 먹고 김치사발면도 먹고 바나나도 하나씩 나눠 먹으니 몹시 배가 불렀지만 소맥은 계속해서 마실 수 있었다. 술이 남아 있어서 우리는 잠들 수가 없었다. 종현이 ‘고객들’ 얘길 해달라고 해서 오늘의 진상은 누구였냐면, 하고 시작되는 이야기를 끝도 없이 했다. 존나 힘들겠네, 우리 누나. 웃자고 한 소리였는데 심각하게 말하니 한없이 시시한 기분이 들었다.

선미야, 내가 마술 보여줄까? 종현이 졸린 눈으로 말했다. 제발 그것만은, 하는 심정이었지만 술김이라 그냥 허락해버렸다. 그 즉시 종현이 침대 밑에 넣어둔 박스를 끌어당겼다. 하얗게 뭉쳐진 먼지와 함께 끌려 나온 상자는 뚜껑이 닫혀 있었다. 그것은 종현의 철 지난 환상 혹은 잡스러움의 무덤 같았다. 그냥 귀신 이야기나 하면서 놀면 좋을 텐데 종현은 굳이 뚜껑을 열어 안을 들여다봤다. 우와, 이게 얼마 만이야. 감동한 얼굴로 마술 도구들을 하나씩 꺼내 들었다. 나는 게슴츠레 뜬 눈으로 종현을 지켜보기만 했다.

상자 안에서 온갖 잡동사니들이 끊임없이 나왔고 그건 그 자체로 마술 같았다. 종현이 애써 내게 뭔가를 보여주지 않아도 나는 충분히 다 본 것 같았다. 그러니 그냥 잘까, 하고 말하진 못하고 웃으면서 앉아 있었다. 종현은 진지하고도 엄숙한 표정으로 원색의 플라스틱 컵, 핑크색 깃털, 보풀이 인 연두색 테니스공, 반투명한 정육면체 안에 든 주사위, 잘린 엄지손가락 모형 같은 것들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아, 이거 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 다 잊어버린 것 같아, 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기어이 내 앞에 검은색 플라스틱 뚜껑을 들이댔다. 잘 봐, 선미야. 그러면서 또다른 검은색 플라스틱 받침대에 뭔가를 올려놓았다. 이건 닭이야. 종현이 눈을 반짝거리며 나를 쳐다봤다. 어, 닭이구나. 쓰다 만 지우개처럼 생겼지만 닭이라고 하니 닭인가보다 했다. 자세히 보면 표면에 닭이 새겨진 것에 불과했지만 닭은 닭이었다. 남은 소주를 맥주잔에 부어 단숨에 들이켠 뒤 돼지뼈에 붙은 살을 뜯으니 닭이건 돼지건 무슨 상관이랴 싶었다. 내가 이걸 달걀로 바꿀 거야. 종현은 들고 있던 검은 플라스틱 뚜껑을 흔들어 보이며 씩 웃었다. 뚜껑은 엄지와 검지로 집어야 할 만큼 작은 사이즈였다. 뚜껑을 닫고, 마술사들이 흔히 하는 현란한 손동작을 선보인 뒤, 다시 뚜껑을 열고, 들여다보니 그 안에 달걀이 있고, 달걀은 지우개똥만큼이나 작고 조잡한 플라스틱이었고, 나는 어머, 어떻게 된 거야, 진짜! 하고 외쳤다. 내 반응에 종현이 크게 웃으면서 이건 초등학생도 할 수 있는 거야, 하고 말했다. 그러고 나서 내 양 손바닥 위에 카드 한장을 내려놓았다. 언젠가 마술쇼를 하게 되면, 하고 중얼거리며 카드가 놓인 내 손바닥을 자신의 손바닥으로 덮었다. 내 마술쇼의 주인공은 네가 될 거야. 나는 어깨를 움츠리며 키득거렸다. 종현이 손을 뗐을 때 카드는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내가 본 것을 믿을 수 없었고 그건 아마도 소맥을 너무도 많이 마신 탓이겠지만, 갑자기 모든 게 귀찮아져서 자리에 눕고 싶어졌다. 아, 더 할 수 있는데. 보여줄 게 많아. 종현이 카드를 촤라락 넘기며 호기롭게 말했다. 나는 종현을 빤히 쳐다봤다. 귀엽네, 우리 종현이. 종현이 얼굴을 붉히며 웃었다. 그러곤 바닥에 널린 것들을 미련 없이 상자에 담기 시작했다.

누나…… 나 사랑하지? 침대에 누운 종현이 은근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그건 한번 하자는 뜻이었고, 두번도 할 수 있고 세번도 할 수 있는데 결정적으로 종현이 너무 못해서 하기가 싫었다. 원래 못하는 애들이 밝히는가 싶을 만큼 서툴렀다. 그런데도 뭘 했다고 땀을 그렇게 흘려대는지 끈적한 땀방울이 내 이마에 떨어질 때마다 내가 얼마나 진저리를 치는지 종현은 모른다. 그런 걸 말하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속으로만 생각했다. 벌써 눈이 감기기 시작했는데 종현이 옆에서 남자의 성욕은 본능이고 그것을 억압하면 어쩌고, 보채듯이 중얼거렸다. 야, 종현아. 졸다 말고 종현을 나직이 불렀다. 어, 누나. 왜, 뭐, 한번…… 다급한 얼굴로 내게 뜨거운 입김을 불어 넣었다. 너 방금 뭐라고 했니. 진지하게 물었다. 아니, 그러니깐…… 남자는 원래 그렇다? 여자랑은 달라, 하고 또 시시한 소리를 해서 나를 웃겼다. 실컷 웃고 난 뒤 남은 케이크는 내일 먹자, 말하고 눈을 감았다.

그런 밤을 보낸 뒤에도 우리는 정시 출근을 하기 위해 이른 아침에 눈을 떴다. 아직 늦지는 않았는데도 늦었네, 늦었어 하며 선 채로 밥을 먹었다. 밥을 먹다 말고 종현은 숙취 때문에 머리가 아프네 어쩌네 하면서 여차하면 사표를 쓸 듯이 말했다. 사표는 정식 직원이나 쓰는 거고 우리는 그냥 문자 한통이면 끝난다고 말했더니 자신은 잘리기 전에 사표를 쓸 거라고 장담했다. 그럴 낌새가 보이면 그냥…… 그냥? 어, 그냥 던지고 나와야지. 나는 김에 싼 밥을 종현의 입 속에 욱여넣었다. 종현은 입을 우물거리며 희미하게 웃었다. 아마도 잘 차려입은 슈트 안에 사직서를 넣고 다니다가 어느날 갑자기 팀장이나 부장의 책상 위에 던져버리고 유유히 사무실을 걸어 나오는 환상이 있는 것 같았다.

 

그날의 인상적인 고객님은 자기가 왜 전화를 했는지 아느냐고 물었다. 나는 잘 모르겠습니다 고객님, 하고 정중히 응대했다. 단지 매뉴얼대로 했을 뿐인데 고객님은 어쩐지 화가 난 것 같았다. 대체 아는 게 뭐야? 아는 게 없으니 거기 앉아 전화통이나 붙잡고 있지, 비아냥거렸다. 나는 웃으면서 네, 고객님 불만 사항이 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하고 또다시 정중히 되물었다. 아니, 내가 빤스를 샀는데 입어보니까 작네. 엄청 낑겨. ……네, 고객님. 빤…… 아니 속옷 구매에 불만이 있으시군요. 불만 접수를 위해 개인정보 확인을 해도 되겠습니까? 아니, 됐고. 그냥 바꿔주면 돼. 고객님, 일단 몇가지 질문에…… 바꿔달라고. 그 전에 개인정보를. 너 뭐야? 결국엔 나도 지지 않겠다는 심정이 되어 개인정보와 됐고의 무한 반복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콜이 길어지자 관리자 채팅창에 밀린 콜을 당기라는 메시지가 끊임없이 올라왔다. 선미씨, 콜 길게 끌지 말라고 했지.

얼마 전에 완경을 맞이한 팀장은 자꾸만 열이 오른다고 했다.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열불이 나서 못살겠다 한 게 엊그제인데 내가 자꾸만 기름을 붓는다고 했다. 나 때문에 우리 팀 고객 응대 점수가 최하위라고 했다. 진짜 나한테 왜 그러냐, 선미씨. 그렇게 말하니까 내가 팀장을 괴롭히는 악당이 된 것 같아 괴로웠다. 근데요, 팀장님. 그 남자가 저한테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입이 근질거렸지만 참아야 했다. 잘해보자, 선미씨. 응? 한참 열변을 토하던 팀장이 누그러진 목소리로 나를 다독였다. 감당 못하겠으면 선임한테 넘기고. 어차피 녹취 다 되니까 응대만 제대로 하면 뭐라고 할 사람 아무도 없잖아. 좋아진 거야, 이만하면.

좋아진 거구나. 이만하면.

헤드셋을 끼고 멍하니 모니터를 쳐다보면서 무엇이 좋아졌을까 생각하다가 백스물세번째 콜을 받았다.

그런 날들이 쌓여 일주일이 되고 한달이 되고 일년이 되다보니 세상은 온통 고객님과 나뿐인 듯했다. 그런 세상을 살다니 참 시시한 일이었지만 가끔 종현과 소맥을 마실 수 있으니 이것이 안빈낙도요 안분지족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이런 것을 나는 안다. 고1 때 배운 것을 여태 기억하고 있다. 이런 것도 아는데 어째서 아는 게 없다고 하는 걸까 고객님은. 나에 대해 뭘 안다고. 콜이 오면 콜을 당기고 콜을 길게 끌지 말고 콜을 최대한 많이. 이런 것을 고객님은 아나? 피차 모르는 쪽에 대해선 말을 말아야지, 하면서 점심시간을 기다렸다.

막상 점심시간이 되어서는 속이 거북해 도시락을 먹지 못하고 컵라면으로 때웠다. 성질 좀 죽여라. 옆자리 정희 언니가 밥을 먹다 말고 말했다. 그래야죠, 하고 웃자니 테라든 참이슬이든 딱 한잔만 마시고 싶어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나는 정희 언니 반찬통에 든 크고 둥글고 노란 계란말이를 쳐다봤다. 정희 언니는 계란말이를 참 잘 만든다. 가끔 반찬으로 마파두부도 해 오고 생선조림도 해 오는데 그중 계란말이가 가장 맛있다. 짜지도 싱겁지도 않고 적당히 푹신한 것이 입안에서 부서질 때…… 적당히 무시할 줄도 알아야지. 네, 언니. 나는 언니가 계란말이를 반으로 자르지 않고 통째로 입안에 넣고 우물거리는 모습이 좋았다. 언니는 뭐든지 잘한다. 지난달에도 우리 팀 고객 만족도 조사에서 1위를 차지했다. 매우 만족-만족-불만족 중에 매우 만족을 가장 많이 받았다. 요리도 잘하고 먹는 것도 잘하고 적당히 무시하는 것도 잘한다. 그런 사람들 틈에서 나는 유유자적 돈을 번다. 그렇게 번 돈으로 참이슬도 사고 족발도 사 먹는다. 오늘은 에코백을 살 것이다. 요일별로 월화수목금토일 영어로 프린트된 에코백을 장바구니에 넣어두었는데 오늘은 월급날이니까 하나쯤 살 수 있다. 오늘은 금요일이니까 프라이데이를 사야지,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져서 가격도 얼마 안 하는데 그냥 다 사버릴까 싶었다. 그러면 월요일엔 월요일을, 화요일엔 화요일을 들고 나갈 수 있겠네…… 하는 식으로 계속 돈 쓸 궁리를 하면서 앉아 있었다.

 

종현이 일하는 동물원은 집에서 멀지 않은 신도시에 있었다. 규모는 작지만 실내와 실외 공간이 나뉘어 있고 주로 가족 단위의 관람객들이 많이 오는 곳이었다. 상시 프로그램으로 동물 직접 만져보기와 먹이 주기 체험이 있어 젊은 부모들이 많이 찾는다고 했다. 우리에 갇힌 짐승을 구경하는 건 싫었지만 모처럼 종현을 놀라게 해주려고 연락도 없이 찾아갔다. 토요일 아침에 새로 산 금요일을 들고 버스를 탔다. 입구에서 전화를 했더니 예상대로 종현은 무척 깜짝 놀랐다. 어, 진짜? 갑자기…… 왜? 하고 자꾸만 되물었다. 애써 태연한 목소리로 그냥 갈까? 물었더니 아니야, 아니야. 내가 너무 놀라서. 누나 주말에 움직이는 거 싫어하잖아, 하고 대답했다. 네 이름 말하고 그냥 들어가도 되지? 했더니 어…… 아니, 그래…… 그게 좋겠네, 하고 마지못한 듯 대답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 매표소 창구로 갔다. 거기 반투명한 구멍에 대고 구종현을 만나러 왔는데요, 하고 말했다. 창구 안에 있던 여직원이 누구요? 하고 되물어서 종현이요, 구종현! 하고 크게 대답했다. 그 여직원 옆에 또다른 누군가가 있었던 것인지 작고 동그란 얼굴이 밖을 내다보려고 고개를 한껏 숙인 게 보였다. 그 얼굴은 밖에 서 있는 나를 한참 동안 훑어보더니 들어가요, 하고 차갑게 쏘아붙였다. 나는 뒤통수에 꽂히는 시선을 느끼며 입구를 향해 빨리 걸었다. 입장료 만팔천원을 아꼈으니 입구에서 파는 먹이는 내 돈으로 사도 될 것 같았다. 세로로 잘라놓은 당근 열개들이 한 팩에 이천원이었다. 새 모이는 천원, 물고기 밥도 천원인데 당근은 이천원. 모두 합해 사천원을 썼다.

종현에게 다시 전화를 했지만 이번에는 받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나무 표지판에 그려진 화살표 방향을 따라 걸었다. 날씨가 좋으면 사람들은 동물원에 오나? 그런 걸 혼자 궁금해하면서 계속 걸었다. 사람들은 즐거워하거나 즐거운 척하고 있었고 각각의 동물들은 각각의 우리 안에 있었다. 나무로 된 화살표를 따라 걷기만 하면 토끼가 보이고 라마가 보이고 줄무늬 다람쥐가 보이고 하는 식이었다. 토끼는 살이 쪘고 라마는 눈이 아름다웠다. 다람쥐는 작은 두 손으로 부지런히 땅콩 껍질을 까서 갉아 먹었다. 투명한 아크릴 상자처럼 생긴 우리 안에 오랑우탄이 있어서 그리로 갔다. 몸집이 큰 오랑우탄은 해가 비치는 창가 쪽에 앉아 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그 앞에 다가가자 몸을 움찔거릴 뿐 도망치거나 하지는 않았다. 긴 팔을 무기력하게 늘어뜨린 채 앉아 있던 오랑우탄이 나를 보았다. 속을 알 수 없는 노인의 눈처럼 깊고 반투명한 눈동자였다. 털이 많은 그 짐승과 나는 서로에 대한 무지와 오해가 뒤섞인 애매한 시선의 건너편에 있었다. 나는 그 심드렁한 무관심에 소외감을 느끼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동물원에는 볼 게 많았고 꼭 안 봐도 되지만 이왕이면 온 김에 보고 싶었고 그래서 종현을 만나기 전에 부지런히 움직여야겠다고 생각했다. 보는 건 쉬웠고 먹이를 주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아프리카 원숭이들은 사납기 때문에 먹이를 줄 때 반드시 집게를 이용해야 한다는 안내판을 읽고 겁이 나서 포기했지만 사막여우와 기니피그에게는 먹이를 줄 수 있었다. 그밖에 분홍 돼지와 조랑말과 날지 못하는 새들을 봤다. 그러다 주황색 티셔츠에 베이지색 면바지를 입은 종현을 보았다. 얼굴을 본 건 아니고 뒤통수를 본 것뿐이었는데 뒤통수에 제비초리가 있고 머리털이 심하게 곱슬거리는 것이 틀림없는 종현이었다. 나는 종현을 부르지는 않고 그냥 보기만 했다. 종현이 끄는 당나귀 주위에 아이들이 몰려들었기 때문에 불러도 듣지 못할 것 같았다. 당나귀는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종현의 주위를 뱅뱅 맴돌았다. 종현은 끈이 꼬이지 않도록 당나귀를 따라 몸을 돌렸다. 사람들도 조금씩 주변을 맴돌면서 당나귀 입에 당근을 대주거나 옆에서 사진을 찍었다. 종현은 지루하게 웃으며 당나귀의 줄을 늘였다 끌어당겼다 했다. 그런 일에 열심인 것을 보자 마음이 놓였다.

종현은 점심시간이 끝나기 직전에야 겨우 시간을 낼 수 있었다. 우리는 잉어가 사는 연못 앞에서 만났다. 온다고 미리 말했으면 좋았잖아. 종현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놀랐구나, 우리 종현이. 나는 종현의 눈앞에 대고 물고기 밥을 흔들며 말했다. 나한테 말하면 공짜로 갖다줄 수 있는데. 나는 이왕 샀으니 물속에 던져보자고 했다. 종현과 내가 반씩 나눠서 던졌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물속이 흔들리더니 검은 잉어 떼가 몰려와서 물 위에 뜬 사료를 먹어치웠다. 나와 종현은 두어번 더 물속에 사료를 집어 던졌다. 물이 흔들리는 걸 보았고 물고기의 조그만 입들이 벌어지는 걸 보았다. 맞은편에 있던 관람객들이 먹이를 던져주자 새까만 잉어 떼가 그리로 몰려가는 게 보였다. 나는 그런 것을 보았고 종현은 내가 와서 좋다고 말했다. 정말이야. 진짜 좋아. 불필요하게 두번이나 강조를 했다. 종현아 너는 내가 왜 좋니, 하고 농담처럼 물었더니 뜻밖에도 진지하게 생각에 잠겼다. 그리곤 이내 누나랑 함께 있으면 든든해. 마치 엄마 같아, 하고 예상치 못한 대답을 했다. 우리는 계속 물고기 밥을 물 위에 던져주면서 시시한 대화를 나누었다. 저녁때 영화나 한편 볼까. 킬링 타임용으로. 그런 하나 마나 한 대화들이었고 종현은 왜 사람들이 시간을 죽인다고 표현하는지 궁금하다고 했다. 듣고 보니 시간은 죽일 수도 있고 남길 수도 있고 미룰 수도 있는 것이어서 그러게, 신기하다, 하고 진지하게 대답해주었다. 어떤 책에서 봤는데 만일 시간이 에너지라면 물질로 환원될 수도 있다고 했어. 그럴듯하다고 생각하는데 종현이 계속해서 빅뱅이니 대폭발이니 하는 이야기를 신나게 떠들어대는 바람에 그 이야기에 흥미를 잃게 되었다. 하지만 결국에는 머지않은 미래 즉 저녁때 영화를 볼래 말래, 하는 이야기로 끝을 맺었다. 뭘 보고 싶은지 물었더니 아무거나 적당한 걸로,라는 싱거운 대답을 했다.

종현과 헤어진 뒤 근처 쌈밥집에서 제육볶음을 시켜 먹었다. 일인분은 안 된다기에 이인분을 주문한 뒤 땀을 뻘뻘 흘리면서 그것을 먹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일행이 있는데 나만 혼자라 후다닥 그릇들을 비우고 일어났다. 식당 출입문 옆 자판기에 백원을 넣고 설탕이 듬뿍 든 커피를 뽑아서 밖으로 나오니 하늘에 구름이 끼어 있는 게 보였다. 하얗고 맑은 구름이 아니라 약간 회색빛을 띤 우중충한 구름이었다. 나는 식당 문 앞에 선 채로 커피를 후후 불어 마신 뒤 종이컵을 버렸다. 그런 다음 걸어서 버스 정류장으로 갔고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를 탔다. 내내 선 채로 저녁때 볼 영화를 휴대폰으로 검색했다. 아무거나 적당한 영화 혹은 시간을 죽일 수 있는 영화를 찾기가 생각보다 어려웠다. 결국 검색창에 킬링 타임 영화라고 쓰고 나서 스크롤을 내렸다. ‘킬러의 보디가드’니 ‘반지의 제왕’이니 하는 목록이 검색되었다. 지루함을 한방에 날릴 수 있는, 시간 가는 줄 모르는 등의 수식어가 붙은 채 리스트에 올라와 있는 영화들을 검색하다보니 종현은 사는 게 지루한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종현이 거위를 데리고 온 건 그로부터 이주 뒤였다. 태어난 지 열흘도 안 된 새끼 거위였다. 털이 하얗고 부리가 노란 중국회색거위는 작은 종이 상자에 담긴 채 병아리처럼 짹짹거렸다. 내가 한번 안아봐도 되냐고 묻자 종현이 난처한 듯 고개를 흔들었다. 아직…… 적응할 시간이 필요해.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어디서 났어? 내가 물으니 동물원에서 부화한 것을 데려왔다고 했다. 태어난 다섯마리 중에서 한마리가 무리에 끼지 못하고 겉돌았다, 처음부터 비실비실 잘 걷지도 못하고 사료도 먹지 않아 각별히 신경을 써주었다, 하는 말을 신나게 떠들었다.

그랬더니 나만 졸졸 따라다니는 거야, 이게.

종현은 기특하다는 듯 거위의 등을 검지손가락으로 한번 쓰다듬었다. 그 순간 박스 안에서 종종종 움직이던 거위가 찍, 하고 물똥을 쌌다.

이거…… 똥 싸는 거니, 종현아?

내 말에 종현이 얼굴을 붉혔다.

똥을 좀…… 많이 싸더라고.

그때부터 내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똥을 싼다. 거위가 똥을, 그것도 물똥을 싼다. 내 집 방바닥에, 화장실에, 현관에 똥을 싸서 묻히면 냄새도 날 텐데. 여기는 내 집이고 종현은 월세도 안 낸 지 꽤 됐잖아? 들어올 땐 월세의 반을 내기로 해놓고 처음 서너달 빼면 거의 공짜로 얹혀살면서 똥을, 그러니까 물똥을 싼다고? 물론 똥을 싸는 건 종현이 아니라 거위지만. 어쨌든 내 집에서 똥을……

종현아.

가라앉은 내 목소리에 종현이 살짝 긴장하는 듯했다.

어, 누나.

아니, 내가 있지. 치사스러워서 말을 안 하려고 했는데……

참, 나 오늘 월급 들어왔다?

어, 그러니……?

나는 살짝 당황했다. 종현이 돈 이야기를 꺼낸 게 처음이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월세 못 낸 거 이번 달부터 다 줄게. 오늘 월급 들어온 것도 누나한테 다 입금하려고 했어.

그, 아버지는 그럼…… 괜찮으신 거야?

혼자서 속 좁은 생각을 한 게 미안해서 그렇게 물었다.

뭐 맨날 똑같지…… 근데 이젠 나부터 살아야겠다 싶더라고. 아버지 때문에 언제까지 누나한테 신세만 질 수도 없고.

나는 안쓰러운 눈길로 종현을 쳐다봤다.

누나.

어, 종현아.

나 어릴 때 우리 엄마 집 나간 거 알지?

알지, 그거야.

그래가지구 내가 진짜 아버지한테 맨날 처맞았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얘를 보니까 내 어릴 적 생각이 나더라구.

어…… 거위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다 했구나.

그렇게 시작된 종현의 이야기는 끝날 것 같지 않았다. 듣다보면 똑같은 이야긴데 어릴 때 성적이나 중학교 때 딱 한번 엄마를 만났던 부분에서는 조금씩 과장이 섞여 들거나 완전히 새로운 장면이 등장하기도 했다. 그런 식으로 종현의 이야기는 매번 새롭게 각색되었다. 나는 그 점이 종현과 나의 다른 점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우리는 거위에게 프라이데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종현이 문고리에 걸린 내 가방을 보고 즉석에서 그렇게 제안했고 나야 프라이데이든 새터데이든 상관없다고 했다. 이해해줘서 고마워. 종현이 말했고 나는 그냥 어깨를 으쓱거렸다.

 

종현은 한동안 거위 돌보는 일에 푹 빠져 지냈다. 퇴근길에는 기저귀와 휴대용 난로, 밥그릇과 물그릇은 물론이고 공기정화에 좋다는 스투키 화분을 사 들고 오기도 했다. 주방 옆 다용도실은 프라이데이를 위한 물건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종현의 말대로 프라이데이는 종현을 엄마처럼 따랐다. 종현만 보면 부리를 옆구리에 비벼대거나 날갯죽지를 펴서 반가움을 표시했다. 나한테는 하지 않는 행동들이었다. 그래도 밥을 주다보니 정이 들었다. 가끔 종현과 함께 유튜브로 거위 영상을 찾아 봤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거위를 키웠다. 거위를 키우며 대장암을 극복한 남자의 이야기에 좋아요가 680개나 달린 것을 보고 감동한 종현은 더 적극적으로 프라이데이를 촬영해서 유튜브에 올렸다. 구독자 수는 언제나 1이었고 그건 물론 나였다. 그러다 어느 순간 영상을 찍어 올리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하루가 이틀이 되고 이틀이 사흘이 되었다. 어느날은 채식주의자인 프라이데이를 위해 사둔 각종 채소들이 냉장고에서 썩어 있는 것을 봤다. 그런 것을 내가 발견했고 종현은 가끔 외박을 했다. 그때마다 종현아 어디니 언제 오니, 메시지를 보냈고 종현은 늘 누나 미안. 오늘 대수 할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어. 나 지금 홍천이야 ㅜ ㅜ 하는 식의 답장을 보냈고 나는 혼자서 프라이데이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곤 했다. 부고는 차고 넘쳤고 각종 돌잔치 결혼식 뒤풀이도 그랬다. 종현에게 그렇게 친구가 많았던가 생각하면 모를 일이었다.

그런 나날이 이어졌고 내 체중은 지난 계절에 이어 기록을 갱신하고 있었다. 이제는 몸을 움직이지 않아도 겨드랑이에 땀이 찼고 호흡도 가팔랐다. 조금만 걸어도 상체의 하중 때문에 발목이 부었다. 그때마다 종현과 함께 본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종현은 보다가 잠이 들었지만 나는 끝까지 본 영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초기 시절이 담겼다고 해서 일부러 찾아본 영화였다. 데이지를 사랑했던 백만장자 개츠비는 시간을 거슬러 가난한 시골 소년 어니가 되어 있었다. 어니에게는 폭식증으로 몸이 거대해진 어머니가 있었다. 남편의 자살에 충격을 받아 집 밖을 나가지 않게 된 후로 초고도 비만이 되어버린 여인. 자신의 몸을 내려다볼 수 없었던 그 여인은 결국 침대 위에서 죽었다. 그녀의 큰아들은 그녀가 죽어 있는 집을 통째로 불태웠다. 시신을 밖으로 꺼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집이 불타는 마지막 장면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한 사람의 기억 한 사람의 흔적 한 사람의 육체가 집과 함께 재가 되다니. 너무 근사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죽으면 이 집에 불을 질러줘.

나는 감상에 빠져 종현에게 그렇게 말했다. 졸다 깬 종현이 뭔 소리야 갑자기, 하고 웅얼거렸던 게 기억난다. 이 집, 누나 거 아니잖아, 했던 것도. 그리고 뭐랬더라? 나는 누나보다 훨씬 더 뚱뚱한 사람도 알고 있어. 그렇게 말했었나? 아무튼 그와 비슷한 말들을 다정히 나누었다. 그랬던 종현은 점점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 되어갔다.

외박을 한 다음 날이면 맥도날드에 들러 허니크림치즈 상하이버거를 사 들고 와서 나를 기쁘게 하는 종현이. 영리한 종현이. 나는 지금 그에 대한 이야기를 새로 쓰려는 걸까? 여전히 알면서도 모르겠고 모르는 사람에 대해 말하는 건 프라이데이 같다고 생각했다. 시끄럽고 멍청한 프라이데이 말이다.

그런 일들을 제외하면 종현도 여느 날과 다름없이 출근을 하고 퇴근을 했다. 가끔 다용도실 문을 빼꼼히 열고 프라이데이의 안부를 확인할 뿐 영상을 새로 찍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고무호스로 다용도실 바닥을 청소하거나 기저귀를 뺀 채 방 안을 돌아다니게 놔두기도 했다. 똥을 싸면 물휴지로 닦고 나서 그 자리에 알코올을 뿌려준다거나 하는 세심함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프라이데이를 돌봤다. 그러고 난 뒤에는 씻고 먹고 곧장 침대에 누웠다. 침대에 누워서도 예전처럼 자기를 사랑하냐고 묻지를 않고 내가 소맥을 마시자고 졸라도 싫다고만 했다. 가끔은 내가 온 줄도 모르고 통화를 하고 있다가 흠칫 놀라기도 했다. 어느날은 갑자기 내게 이렇게 사는 게 좋으냐고 물었다. 웃자고 하는 소린 줄 알고 웃었더니 사람이 어떻게 맨날 똑같냐, 하고 서운한 소리를 했다.

그 무렵 나는 고객님과 싸우지 않고도 매우 만족을 받는 법을 알게 되었고 처음으로 업무 평가에서 1위를 차지했다. 그동안 정희 언니는 선임 상담사가 되어 자리를 옮겼다. 그 자리엔 단기 아르바이트생이 와서 앉게 되었다. 이름은 세나. 부산이 고향인 그녀는 이름 때문에 그럼 니 술도 세나? 하는 농담을 종종 들어왔다고 했다. 언니, 사람들은 생각보다 유치해요. 그렇게 말하던 그녀는 월마다 발표되는 업무 평가에 매우 집착했다. 매우 만족 -만족 -불만족 때문에 살이 3킬로그램이나 빠졌다고 나에게 하소연했다. 나는 적당히 무시할 줄 알아야 된다고 조언하면서 아침에 정성껏 만 계란말이를 그녀의 도시락 위에 얹어주었다. 언니, 이거 너무 짱이에요! 제가 먹어본 계란말이 중에 최고예요! 하고 엄지를 내세웠다. 이후 세나는 틈만 나면 나에게 와서 이런저런 조언을 구했고 그때마다 나는 적당히를 강조했다. 어느정도 가까워지자 우리는 서로 반찬을 나눠 먹으며 팀원들 흉을 봤다. 그렇게 누군가를 함께 미워할 때 우리 우정은 더욱 돈독해졌다. 퇴근길에 우리는 헤어지는 게 아쉬워 딱 한잔만, 하는 식으로 은밀한 뒷담화를 이어갔다.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던 예전과 달리, 나는 자주 취했다. 세나와 헤어질 무렵엔 만취해서 비틀거리다 길바닥에 토했다. 종현의 외박이 길어지고 있었다.

언니, 언니가 너무 순진해서 그래요. 세나가 등을 토닥이며 위로했지만 들리지 않았다. 집에 혼자 있을 프라이데이의 울음소리가 귓가에 웅웅거려서 계속 토했다. 착한 세나는 저도 취했으면서 매번 편의점으로 달려가 여명808과 제주삼다수를 사다줬다. 나는 그녀의 친절에 감동받아 눈물을 찔끔 흘렸다.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가는 길에 종현에게 메시지를 보냈지만 답장이 오지 않았다. 새벽 세시였고 토해서 그런지 정신이 조금 맑아졌다. 다시 술을 마시라고 해도 마실 수 있을 것 같았다. 택시가 텅 빈 자유로를 달리는 동안 나는 생각했다. 이건 세상에서 가장 시시한 마술쇼라고. 그러니까 프라이데이도 종현도, 나에게는 눈속임일 뿐이라고. 그런 생각을 하면서 종현의 카톡 상태메시지에 올라온 프라이데이를 봤다. 전체 샷이 아닌 일부였지만 하얗고 둥근 그것은 틀림없는 프라이데이의 꽁무니였다. 나는 더이상 종현을 기다리지 않기로 했다. 이게 쇼라면 쇼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건 나여야 했다. 시끄럽고 멍청한 프라이데이가 아니라.

결과적으로 그건 나의 착각이었다. 이건 쇼가 아니라 현실이었다. 매우 만족-만족-불만족의 세계였다. 그날 새벽 집에 도착했을 때 나는 무언가 달라진 것을 느꼈다. 깜짝 놀라 다용도실 문을 열었더니 프라이데이가 주둥이를 가슴에 묻은 채 잠들어 있는 게 보였다. 나는 조용히 문을 닫고 집 안을 살폈다. 종현의 물건들이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집 안의 문이란 문은 모두 열어보았다. 종현이 입던 옷과 들고 다니던 가방, 핸드폰 충전기가 보이지 않았다. 아끼느라 신발장에만 넣어두었던 나이키 운동화도 없었다. 한정판으로 나온 것을 내가 큰맘 먹고 생일 선물로 사준 것이었다. 종현은 게임할 때 쓰던 헤드셋과 키보드까지 가져갔다. 나는 적당히 무시하기로 했다. 그것이 내가 터득한 생존의 기술이었다. 다음 날 눈을 떴을 때 내 옆에는 프라이데이가 누워 있었다. 주둥이를 내 옆구리에 파묻고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언니는 진짜 너무 순진한 것 같아요.

내 전화를 받고 달려온 세나는 같은 말을 되풀이하면서 집 안을 살폈다. 그리곤 곧장 냉장고 앞으로 가서 문을 열었다. 집에 맥주 하나가 없네, 하고 혼잣말을 하더니 생수를 꺼내 마셨다.

미안해, 주말에 쉬지도 못하고.

뭐 그렇게 미안한 게 많아요, 언니는. 나한텐 안 그래도 돼요.

아마 그때 문을 잘못 닫았나봐. 그러니까 나왔겠지.

나는 내 옆에서 자다 깬 뒤로 아까부터 집 안을 활보하는 프라이데이를 보며 중얼거렸다.

늦겠어요, 언니.

세나는 프라이데이가 주방 바닥에 물똥을 싸는 걸 심란한 표정으로 지켜봤다. 결국 내가 가서 뒤처리를 한 뒤에 기저귀를 채웠다. 막상 보내려고 하니 그냥 키워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내 생각을 눈치챈 듯 세나가 고개를 흔들었다. 언니, 이거면 되죠? 이미 해지고 때가 타서 안 쓴 지 오래된 에코백이었다. 금요일 속에 프라이데이를 집어넣다니. 세나가 웃으며 말했다. 프라이데이는 꽉꽉 비명을 지르며 저항했지만 막상 가방에 들어가서는 또 조용해졌다. 세나가 운전하는 차는 편하고 조용했다. 우리는 무려 다섯시간을 달려 마당이 있는 세나의 본가에 도착했다. 다행히 세나의 부모님은 프라이데이를 몹시 반겼다. 정작 프라이데이는 뒷마당의 오리들을 보고 겁을 냈다.

맘대로 해라, 잡아묵든지 키우든지. 세나의 말에 세나 어머님은 묵기는 와 묵노, 키워서 새끼 볼 낀데, 하고 대답했다. 세나처럼 호탕하고 시원시원한 목소리였다. 목을 잔뜩 움츠린 채 눈치만 보던 프라이데이는 시간이 지나자 조금씩 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근처 식당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다시 와보니 어느새 마당을 활개 치며 마음껏 돌아다니고 있었다. 나를 보더니 접혔던 두 날개를 활짝 펴고 다리를 재게 움직였다. 마치 그렇게 하면 날 수 있다는 듯이. 세나와 나는 얼굴을 마주 보고 웃었다. 날지 못하는 새는 어느새 내게 다가와 노랗고 긴 주둥이로 내 운동화를 콕콕 찍어댔다. 그건 내 첫번째 거위와의 처음이자 마지막 인사였다.

세나는 다시 긴 시간을 운전해 나를 집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 말하는 대신 월요일 아침에는 도시락 반찬으로 계란말이를 준비해야지, 다짐했다.

집에 돌아와서는 종현과 내 생일을 조합해서 만든 도어록의 비밀번호를 재설정했다. 그러고 나서 다용도실을 청소했다. 프라이데이가 쓰던 철망과 대야를 씻어서 말리고 수도 근처에 쌓여서 굳어 있던 똥도 치웠다. 처음부터 아무도 없었던 것처럼 집 안은 원래대로 돌아왔다. 종현도 프라이데이도 언젠가 내 손바닥 위에 놓여 있던 카드처럼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다. 나는 바닥에 떨어진 희고 가벼운 깃털 하나를 주워 들고 생각했다. 생각해보면 종현의 마술쇼는 언제나 불만족스러웠다고.

 

 

* 제목은 이사크 바벨의 단편에서 따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