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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 제23회 창비신인소설상 수상작

 

 

김유나 金裕娜

1992년 출생.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kgn0212@naver.com

 

 

 

이름 없는 마음

 

 

예정대로라면 현권과의 일정은 하루로 끝나야 했다. 오전에 Y시에서 짐을 꾸려 올라온 현권을 터미널에서 픽업해 K시로 넘어간다. 간단히 점심을 먹고 부동산에 가서 미리 봐뒀던 매물들을 확인한 다음 괜찮은 방 하나를 계약하고 당일 입주를 위한 준비를 한다. 셋이서 집을 한바탕 청소하고, 현권이 가져온 박스들을 풀어 물건을 정리하고, 현권이 자잘한 소품들을 세팅할 동안 나와 남편은 마트로 가서 당장 필요한 생필품과 식자재를 사서 넣어주면 할 일은 끝. 누운 채로 계획을 말했을 때 남편은 핸드폰에 시선을 고정한 채 “그래” 하고 간단히 대답했다. 대단한 의견을 바란 건 아니었지만 내 나름 최대한 남편을 귀찮게 하지 않으려 머리를 굴려 정리했는데, 돌아온 대답이 너무 성의 없는 것 같아 서운해졌다.

“혹시 귀찮아?”

남편은 그제야 핸드폰을 내려놓고 눈을 마주쳤다.

“아니…… 애초에 내 의견이 중요한가 싶어서.”

“무슨 말이야 그게. 내가 일방적이라는 거야?”

“그게 아니라” 하고 남편은 몸을 일으켰다.

“거기서 내가 무슨 말을 더 하겠어.”

“내 마음 편하자고 하는 짓이라 이거지?”

남편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곤 네 마음대로 해야 내 마음도 편한 거라고, 오늘 일이 많아서 피곤했던 거고 좋은 계획이니만큼 그냥 따르겠다는 뜻이지 불만을 품은 말이 아니라고 했다. 얼마 전, 우리 부부는 아이를 갖기로 했다. 일반적인 부부들이 하는 노력으로는 임신이 쉽지 않다는 걸 알게 된 건 오래전이었다. 두 사람 몫의 가벼운 삶. ‘탓’이니 ‘책임’이니 하는 것 없이 먹고 마시고 싸우고, 마음만 먹으면 어딘가로 훌쩍 떠났다 돌아올 수도,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는 삶에 우리는 만족하기로 했다. 그래서 지난 몇년간 ‘니들은 조심해— 우린 안전해, 우린 안전해’라는 노랫말에 ‘난임송’이라는 제목을 붙여 부르며 슬픔에 농담으로 저항하다가, 시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부터 차츰 그 문제에 대해 진지해졌다. 병원에서 배란유도주사 맞는 법을 배우던 날, 이제 방학은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고 나는 남편에게 마음의 짐을 하나 덜고 싶다고 말했다.

세살 터울의 남동생 현권은 Y시에 있는 취업전문학교에 등록하고 한 학기를 겨우겨우 다니다가 때려치운 뒤 연고도 없는 그곳에 눌러살며 몇년째 일을 했다. 무슨 일을 하냐고 물으면 어느날엔 프랜차이즈 뷔페였다가, 또 조금 지나면 라이더 일을 한다고 했고, 최근엔 핸드폰 안테나 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어디에서 뭘 하건 현권은 내게 종종 돈을 빌렸다. 월세를 못 내서, 병원을 가야 해서, 내일이 월급인데 교통비가 떨어져서 같은 다양한 이유를 들면서. 나는 그때마다 추궁하지 않고 돈을 보내주었고, 현권의 이름으로 주택청약 통장을 하나 만들어 단돈 5만원이라도 매달 넣어두었다. 그렇게라도 내가 녀석을 챙기고 있다고 스스로를 위로하고 싶었다. 결혼한 뒤로 자주 만나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과 현권을 타지에 버려둔 것 같다는 불편함을 덜어내고 싶었다. 그래서 나 자신과의 타협점이라고 찾은 것이 현권을 20분 거리의 K시로 데리고 와 전셋집을 얻어주는 것이었다. 내일 터미널에서 현권을 만나 K시의 투룸으로 토스한다. 이곳으로 온 현권을 저곳으로 보내는 사이, 남편과는 되도록 오랜 시간 함께하게 두지 않는다. 그리고 준희씨와 헤어졌는지 주시한다. 그것이 내일 하루 나의 계획이었다.

 

*

 

토요일 낮, 출구가 하나뿐인 버스터미널 앞은 사람들로 붐볐지만 인파 속에서 내가 현권을 찾은 건 금방이었다. 현권은 자신이 자신임을 과시하려는 듯 쨍하디쨍한 빨간색 패딩 점퍼를 입고 터미널 앞에 삐딱하게 서 있었다. 머리칼은 와인색으로 물들인 데다 하얀색 면바지를 입어 무시하려야 무시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바로 어제까지 야간 근무를 했다는 현권은 까칠한 얼굴을 한 채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그러곤 차창을 내린 나를 뒤늦게 발견하고 담배를 지져 껐다. 현권은 내게 손을 흔들며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옷에 뿌리기 시작했다. 향수인가? 쟤가 향수를 뿌릴 줄도 아는 인간이었나? 남편이 현권의 짐을 실으라며 트렁크 문을 열어주었고, 차에서 내린 나는 현권에게로 걸어갔다. 막 열린 공항 게이트에서 캐리어를 끌고 나타난 사람이 마중 나온 이에게 하는 그것처럼, 현권은 팔을 넓게 벌려 나를 안아주었다. 퀴퀴한 담배 냄새와 향나무 냄새 비슷한 것이 섞여 났다. 나도 현권의 등을 토닥였다. 키도 껑충하니 큰 녀석이 뼈밖에 남지 않아 꼭 점퍼로 둘러놓은 들판의 허수아비 같았다. 언제 봐도 짠한 모습 그대로였다. 남편이 차에서 보고 있지 않았다면 눈물이 나왔을지도 몰랐다. 아침에 일어나 청소도구를 챙길 때까지만 해도 귀찮아서 괜한 일을 하는 건가 싶었는데, 소매에 때가 낀 옷을 입고 있는 현권을 보니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 이렇게 말랐느냐고 하자 현권은 내 얼굴을 뜯어보며 으레 감정도 고저도 없는 톤으로 말했다.

“누나는 살이 많이 쪘다. 코가 볼에 파묻혔네.”

현권이 저런 식으로 하는 말은 절대로 기분이 나쁘라고 하는 말이나 장난이 아니라 그냥 보고 느낀 그대로를 이야기하는 거였다.

“너, 짐은?”

“내가 들 수 있어.”

현권이 여유로운 표정으로 길쭉한 쇼핑 봉투 하나를 들어 올렸다.

“그 집에서 짐 뺀 거 아냐?”

“맞아.”

“이게 다는 아닐 거 아냐.”

“단데?”

“여름옷이랑 겨울 외투랑 여기 다 들어 있다고? 냄비, 전자레인지, 뭐 그런 것도 없어?”

말이 빨라지자 나를 흘긋 쳐다본 현권의 얼굴이 순간 어두워지더니, 눈을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미간에 주름이 잡힌 것을 인지하고 표정을 온화하게 한 다음 천천히 다시 물었다.

“어쨌든 이게 다라는 거지?”

“아, 어. 미안 미안.”

눈을 깜빡이는 횟수가 잦아지며 말을 더듬기 시작하는 건 당혹스러울 때 심해지는 현권의 습관이었다. 거짓말을 하고 있기 때문에 말을 더듬는 거라고 생각한 아버지는 현권을 자주 벌세웠다. 현권은 미안하다고 말하며 구레나룻을 만졌다.

“아니야. 옷은 새로 사면 되지.”

일단은 그렇게 말하고 현권의 쇼핑백을 들었다.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지만 대신 당부를 했다.

“현권아, 매형 앞에서 쓸데없는 말이나 옛날이야긴 하지 마. 알았지?”

“알았어.”

현권의 대수롭지 않다는 말투에 나는 불안해졌다.

“우리 가족에 대한 이야기나, 내가 돈 보내준 거나, 특히…… 준희씨에 대한 이야긴 우리 둘만 있을 때 하는 거야. 알지?”

“어.”

무슨 말을 해도 알아들은 건지 못 알아들은 건지 알 수 없었던 현권의 표정이, 준희씨 이름이 나오자 티가 나게 찌푸려졌다. 현권은 왜 자꾸 같은 말을 하게 하느냐며 나를 앞서 차 쪽으로 걸어갔다. 현권이 뒷좌석에, 내가 조수석에 오르자 남편이 짐이 저게 다냐고 물어서 내가 대신 대답했다. 택배로 올 거래. 남편은 주소를 어떻게 알고 보낸다는 거냐고 물었지만, 내가 대충 얼버무리자 더 물어보지 않고 출발했다. K시로 가는 동안 현권은 조용했다. 자기가 살게 될 K시에 대해서나, 간만에 만난 누나와 매형의 안부에 대해 아무것도 궁금한 것이 없는지 입을 꾹 닫고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내가 너무 말을 하지 말라고 다그쳤나, 걱정을 하던 차에 “이야……” 하는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현권은 차 내부의 번쩍거리는 파란 조명을 지그시 누른 채 손끝으로 따라가고 있었다.

“매형, 차가 좋네요.”

“응, 다 빚이지 뭐.”

“차가 얼만데요?”

“8천 정도……?”

현권은 남편의 말에 “오올—” 하고 놀리듯이 웃으며 집게손가락과 새끼손가락을 치켜들고 “플렉스!” 하고 외쳤다. 덕분에 좌회전 차로 진입을 놓친 남편이 어…… 하고 말을 끌었고, 현권은 상대방의 당황한 기색을 역시나 살피지 않은 채 자기 말을 이어나갔다.

“근데 차는 좀 튀는 색이 멋있는 것 같은데.”

“그래? 그러고 보니까 점퍼 색도 그렇고.”

“네. 옷 살 때 원픽이 레드예요.”

남편이 나와 흘깃 눈을 마주치곤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상황이 바로 네가 말한 그런 상황’이라는 신호 같았다. 남편에게 언질을 줬었다. 현권과 말을 섞다보면 은근하게 당황하는 때가 있을 수 있으니, 그냥 미리 알고 있으라고.

“아아 레드. 빨강을 좋아한다고?”

“네. 영어로 레드죠. 그걸 생각해야 아세요?”

남편은 당황 다음에 곧바로 더 큰 당황이 찾아올 줄은 몰랐는지 무안해진 얼굴로 정면을 바라보고 운전하기 시작했다.

“현권이가 악의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좀 직설적으로 말하는 편이야.”

현권이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로 얼굴을 살짝 들이밀고 물었다.

“나 뭐 실수했어?”

“아니야. 솔직한 게 좋지. 나는 무조건 솔직한 게 좋아.”

남편이 나를 바라보며 비꼬듯이 말했다. 신혼 때 담배를 피우다 들킨 일을 두고 말하는 거였다. 그는 아직까지도 누군가와 조금만 편해지면 그 이야길 꺼내려 들었다. 끊은 지가 언젠데 티브이에서 공익광고가 나오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도 더불어서. 스물아홉살인 현권을 막 초등학교에 들어간 아이처럼 대하며 대화 아닌 대화가 이어졌다. 남편은 작은 말에도 크게 웃어주었고, 잘 들리지 않는 말은 다시 물어가며 과한 리액션을 덧붙였다. 그걸 지켜보는 내내 기분이 썩 좋진 않았다. 현권을 만난 사람들은 대부분 몇마디 대화를 나눈 뒤부터 현권을 아이처럼 대했다. 그마저도 마음이 넓은 사람의 경우였지만. 다행히 현권은 시트를 조정하는 오토키를 누르면서 편한 자세를 찾느라 대화를 길게 이어가지 않았다. 조용해서 돌아본 뒷좌석에서 현권은 입을 벌린 채 잠들어 있었다.

 

부동산에 전화를 걸었을 때까지만 해도 이 동네 투룸 전세는 대부분 당일 계약이 가능하다고 했다. 문제는 화장실에도 창문이 있어 현권의 마음에 든 집의 주인이 제주도에 여행을 가 있다는 거였다. 부동산 사람은 계약서를 쓰기 전에 미리 지내는 것도, 짐만 들이는 것도 모두 안 된다고 했다. 이틀 뒤 저녁 비행기로 온다고 하니 그때 계약서를 쓰기로 하고 계약금을 이체한 다음 우리는 조금 붕 뜬 상태로 부동산을 나섰다. 이왕 나와서 먹는 김에 맛있는 곳을 찾아가 식사하고 싶었지만 세 사람 다 배가 너무 고파 뭘 고를 정신이 아닌지라, 부동산 사람에게 추천받은 바로 옆 골목의 오리백숙집으로 들어갔다. ‘온가족 세트’를 시킨 다음 밥이 나오길 기다리는 동안 현권이 자리를 비웠고, 나는 남편의 컵에 물을 따라 주며 물었다.

“힘들지?”

“아니? 재밌는데?”

남편은 집들을 둘러보고 계약금을 던지는 순간까지 내가 나설 틈도 주지 않고 제집 고르듯 꼼꼼히 살피고 따져주었다.

“전에 사고 싶다고 했던 바지 뭐였지?”

남편은 눈빛이 밝아지며 경계 어린 목소리로 답했다.

“트라마로사. 왜?”

“그거 사.”

“왜?”

“그냥 사. 사게 해줄게.”

“아유, 됐어.”

손사래를 치며 말하는 남편의 얼굴이 발그레하게 달아올랐다. 조금 전 부동산에서 일정이 어그러졌을 때, 남편이 흔쾌히 현권에게 ‘그럼 이틀은 우리 집에서 지내면 되겠다’고 해준 것이 내심 고마웠다. 집 안의 질서와 청결에 집착하는 남편은 친구들은 물론 시댁 식구들이 하루 머물다 가는 것에도 예민하게 반응했다. 사람들이 빠져나간 집 안을 온종일 들쑤시고 다니며 닦아댔고, 지난번엔 다섯살짜리 조카가 망가뜨리고 간 마블 피규어를 하루 종일 고치다가 폭발하듯 화를 낸 적도 있었다.

“장인어른이 현권이 전세금 보내주셨어?”

“응, 진즉 보내줬지.”

남편에겐 현권의 전세보증금을 아버지가 해주는 거라고 거짓말을 했다. 아버지와는 간간이 안부를 묻는 것 외에는 일절 연락을 하지 않고 있었다. 아버지가 내게 돈을 빌려간 건 2년 전이었다. P시에 새로 짓는 아파트가 있는데 거기 전체 호실 욕실 공사를 맡게 되었다고, 자재 대금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그 돈으로 주식을 샀다는 걸 알게 된 뒤 큰소리를 친 건 아버지였다. 혼자 개고생해가며 널 키웠는데, 결혼까지 시켰는데, 방귀 한번 뀌면 생기는 그 돈을 설마 안 갚을까봐 애비를 추궁하느냐고 했다.

남편은 마침 나온 오리백숙에 불을 올리고 국자로 국물을 떠 야채를 적시기 시작했다. 화장실에서 돌아온 현권이 환해진 얼굴로 “와이파이 비번 필요하신 분?”이라고 물으며 방석 위에 풀썩 주저앉았다. 현권은 내가 수저를 놓고 직원이 날라다 준 반찬을 받아 테이블에 세팅하는 내내 핸드폰만 들여다보았다. 이럴 땐 눈치라는 것도 돈을 주고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도 아니건만, 보살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인지 함께 버려졌다는 생각 때문인지 어려서부터 나는 현권의 행동에 자주 노심초사했다. 현권은 보통 사람들의 시선에선 멀쩡한 구석이 그다지 많지 않은 아이였다. 왼쪽 눈이 약시로 태어나 이십대 초반에 이미 시력이 측정 불가능한 수준이었고, ‘틱’이라는 말을 내가 알기 훨씬 전부터 눈을 빠르게 깜빡이며 말을 더듬는 증상이 있었다. 초등학교 입학 이래로 심각한 학습부진아 판정을 받아왔다. 늦된 아이. 늘 저만치 뒤에 있는 아이. 친구 한명 제대로 사귀지 못하는 아이. 현권의 담임선생이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소아정신과 치료를 권유했지만, 아버지는 버럭 화를 내며 내 아들이 그럴 리 없다는 말로 무시했다. 겨우 세살 위인 내가 새 학기가 시작될 때마다 교무실로 달려가 현권의 담임선생님을 찾았고, 드라마에서 봤던 학부형을 연기하며 어린아이답지 않은 말투로 현권에 대해 설명했다. 눈이 안 좋아서 앞자리에 앉아야 하고요, 자꾸 딴짓을 하는데 너무 혼을 내면 학교에 안 가려고 하니 이해 좀 부탁드려요. 알림장을 잘 쓰는지 살펴주세요. 현권의 초등학교 3학년 담임선생에게 “얘, 너나 잘해”라는 말을 들은 것이 내겐 아직까지도 수치스러운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아버지는 자주 집을 비웠고, 가끔씩 와서는 현권이 똑똑한 아이인데 집중력이 부족한 것이 문제라며 권투를 시켰다. 고리타분하게 느껴져 풀어놓기도 민망한 어린 시절. 현권의 실내화를 빨다가 못된 놈 하나가 하얀 실내화 앞코에 ‘병싱ㅗ’이라고 써놓은 낙서를 보곤 울었던 기억. 현권이 선생에게 억울하게 혼나고 왔을 때도, 거지라고 놀림을 받았을 때도 씩씩하게 굴었던 내가 그 낙서 하나에 와르르 무너져 울어버렸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러거나 말거나 현권은 남편이 접시에 놓아준 오리 다리를 뜯으며 콜라를 주문했다.

 

*

 

작은방에 현권의 이부자리를 펴주었다. 현권은 아파트 입구에서 내게 잠시 할 말이 있다고 하더니 핸드폰 요금 이야기를 꺼냈다. 밀린 요금 250만원은 미리 약속한 부분이었지만, 막상 이체하려고 하니 준희씨 생각에 부아가 났다. 나는 현권의 핸드폰을 빼앗아 준희씨의 번호가 지워졌는지 확인했고, 당장 월요일에 번호를 바꿀 것을 약속받은 뒤 요금을 이체해주었다. 낯빛이 어두워진 현권과 함께 집으로 돌아온 다음에는 쇼핑백에서 현권의 짐을 풀어 수납 박스에 정리해주었다.

“현권아.”

“어.”

“너 준희씨한테 뭐라고 하고 헤어졌어?”

현권이 눈을 여러번 깜빡이더니 뭘 그런 것까지 물어보냐며 짜증을 냈다. 옷을 정리하면서 보니 작년에 따로 만났을 때 사준 옷은 한벌도 없고 마크 없는 오래된 옷들만 있기에 사줬던 옷들은 다 어디에 있냐고 물었더니 준희씨가 내다 팔았다고 말했다. 내다 팔다니 어디에 내다 판 거냐는 물음에 현권은 어, 당근마켓, 하고 심상하게 대꾸했다. 그걸 판 인간이나 그걸 팔게 놔둔 현권이나 탓할 것 없이 똑같은 인간이란 생각이 들어 입을 다물었다. 준희씨는 현권과 2년가량 연애한 일곱살 연상의 여자였다. ‘유튜브 크리에이터’라고 해서 그게 뭐 하는 일이냐고 물으니 인터넷 방송으로 돈을 번다는 말에 한번 놀랐고, 그걸로 버는 월수입이 5만원 정도라는 말에 두번 놀랐다. 일은 전혀 안 하느냐는 질문에 그게 일이야,라고 대답한 현권은 유튜브를 하면서 인스타그램으로 공동구매를 진행해 립스틱을 도매가 1,500원에 떼어와 케이스만 바꿔 35,000원에 팔기도 한다고 덧붙였다. 고정지출비는 어떻게 해결하느냐고 물으니 현권이 벌어오는 이백 조금 안 되는 돈으로 해결한다고 했다. 이런저런 사이트를 검색해 유튜브에서 준희씨가 올려놓은 ‘쥬니튜브’를 알게 됐고, 그렇게 찾아 들어간 준희씨의 방송 채널에서 동영상을 클릭하자 햄버거를 양옆에 족히 스무개씩은 쌓아놓고 말도 없이 꾸역꾸역 먹고 있는 장면이 이어졌다. 저렇게 맛없게 억지로 먹는 먹방은 나로서도 처음이었다. 괴롭다. 그게 준희씨에 대한 나의 첫번째 인상이었다.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지만, 아니 실은 모르지만, 나는 현권에게 준희씨와 헤어지라고 여러번 말했다. 현권도 현재 자신의 삶이 건강치 않으며 두 사람의 만남엔 미래가 없다는 내 말을 인정했지만 준희씨와 헤어지진 않았다. 준희씨와 정리하고 K시로 오라고 했을 때, 현권은 내게 밀린 방세와 핸드폰 요금만 벌어놓고 가겠다고 대답했다. 네가 오지 못하는 이유가 오로지 그것 때문이라면 내가 전부 해결해주겠다고 말했다. 우리 집에서 차로 20분 정도 떨어진 K시로 와서 다시 시작하라고. 전셋집을 얻어줄 테니 너는 공과금만 내면 되고, 파트타임으로 일하면서 생활비를 충당하고, 남은 시간엔 국비 지원으로 학원을 다니거나 운동을 하면서 ‘정말 하고 싶은 일’에 대해 생각해보면 되지 않겠느냐고. 힘줘서 말하자 한발 물러서며 이런저런 핑계를 대던 현권은 전셋집이란 말에 조금 흔들린 것 같았고, 잔업을 하고 집에 돌아가는 길이라며 내게 보이스톡을 걸어서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누나가 매일 집에 찾아오는 건 아니지?” 하고 물었다. 그렇게 현권은 여기 오게 된 거였다.

 

우리는 저녁으로 피자를 시키고 식탁에 둘러앉아 맥주를 꺼냈다. 남편과 현권이 피자를 먹으며 드문드문 대화를 이어가는 가운데 소외되는 건 나였다. 두 사람의 대화는 맛있는 프랜차이즈 피자집에 대한 심심하고 그저 그런 내용으로 이어졌지만 현권의 입에서 실수로라도 어떤 말들이 튀어나올까봐 초조했다. 스스로에게 ‘어떤 말이 나올까봐 이렇게 겁을 먹는 거지?’라는 질문을 해보다가, 그 ‘어떤 말’을 특정할 수 없기 때문에 더욱 두려운 게 아니겠냐고 결론 내렸다. 피자가 오기를 기다리던 중에 현권은 시댁 식구와 찍은 가족사진 속 큰 시누이를 가리키며 ‘완전 내 스타일’이라고 말해 나와 남편을 당황스럽게 했고, 같은 동네에 살던 나의 전 남자친구를 오늘 터미널에서 본 것 같다는 이야기를 꺼내 웃을 수도 울 수도 없게 만들었다. 내가 피곤하다는 말을 반복하면서 자리를 서둘러 끝내려고 하는 게 느껴졌는지, 피자를 다 먹은 현권이 1층에 담배를 피우러 간 사이 남편이 말했다.

“근데 너, 처남을 너무 걱정하는 것 같아.”

“내가?”

“처남이 말할 때마다 설명하려고 하고, 먹는 속도도 체크하고.”

“네가 현권이 말을 혹시라도 오해할까봐 그러지.”

나는 접시에 놓인 땅콩을 집어 먹었다.

“에이 안 그러지”라고 말한 남편이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아까 있잖아” 하고 말을 꺼냈다.

“백숙집 나와서 내가 편의점 갔을 때, 처남이 따라 들어왔잖아. 뭐 먹고 싶은 거 있으면 고르라고 했더니 담배를 세갑이나 샀어.”

나는 이마를 한번 짚었다.

“걔가 그래. 나쁜 의도로 그런 건 아닐 거야.”

“알지 알지. 애는 착한데 사회성이 좀 부족하긴 한 것 같아.”

남편은 고삐라도 풀린 듯 오늘 하루 보고 느낀 현권에 대한 감상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말미에는 걱정이 된다고 했지만 올라간 입꼬리를 보니 가슴이 답답해지면서 슬그머니 짜증이 솟았다. 그때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며 현권이 돌아왔다. 그러고는 피자를 더 시켜야겠다고, 아직 배가 덜 찼다며 환하게 미소 지었다. 먹겠다는 걸 말릴 수는 없어 피자를 한판 더 시켜준 뒤 남편과 나는 먼저 눕겠다고 말했다. 현권은 고개만 까딱하고는 냉장고에서 캔맥주를 꺼내더니 시원하게 마시고 트림을 했다. 준희씨의 모습이 떠올랐다. 괴롭다. 두 사람이 먹는 모습이 왜 이리도 괴로운지 모를 일이었다.

 

*

 

현권과 함께 늦은 점심을 먹고 쇼핑센터로 가 다섯시간 동안 쉬지 않고 돌아다니며 외투와 속옷, 티셔츠와 바지를 샀다. 현권은 부담이 되는지 멀찍이 떨어져서 가격표를 확인하고 다른 곳으로 가자고 말했다. 신발 매장을 마지막으로 들른 다음 쇼핑백을 한가득 들고 차에 오를 때까지 현권은 핸드폰만 만지작댈 뿐 한번을 웃지 않았다. 나도 마찬가지로 말을 하지 않았다. 어제부터 불쑥불쑥 현권을 비난하고 싶은 마음이 솟아서 힘들었다. 현권에겐 무턱대고 화를 내거나 짜증 섞인 투로 말하면 지나치게 주눅 들거나 화를 낼 뿐 달라지는 게 없었기 때문에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어야 했다. 하지만…… 설명을 하기에 나는 너무 지쳐 있었다. 근처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집 앞에 도착하자 벌써 아홉시였다. 아파트 지상 주차장에 차를 대고선 현권에게 전자키를 건네고 먼저 올라가라고 말했다.

“누나.”

현권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줄 거 있는데…… 아니야. 나중에 줄게.”

뭔데 그러느냐고 물어보려는데 현권은 입구에 카드키를 대고 겅중겅중 뛰어 들어가 엘리베이터를 잡았다. 현권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것을 확인한 나는 경비 초소를 따라 테니스장으로 이어지는 샛길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주변을 둘러본 다음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현권과 함께 담배를 피우며 가슴속 이야기를 풀어놓는 장면을 상상해보았다. 불가능할 것이다. 현권은 전부터 말하지 말라는 것은 반드시 말했다. 마치 저주처럼. 말에도 때와 장소가 있다는 걸 전혀 모르는 아이였다. 오늘 옷가게에서 그랬듯이. 의류 매장에서 피팅을 하다가 현권의 팔 안쪽에서 긁힌 상처들을 발견했다. 어쩌다 이런 거냐고 묻자 현권은 그게 다 준희씨와 싸우다 긁힌 상처라고 했다. 내가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당황하자 현권은 더 큰 소리로 말했다. 에휴 걱정하지 마. 나도 맞고만 있진 않았어. 뭐가 잘못되었는지 모르는 채 당당하게 말하는 현권에 나는 그저 주변만 살폈다. 검은색 정장을 입고 서 있던 매장 점원이 탈의실 쪽으로 멀어졌다.

내가 잘못 가르친 걸까. 맞고만 있지 말고 너도 때려줬어야지. 어릴 때 그렇게 혼을 냈던 게 이런 식으로 돌아오는 건가. 그럼 맞고만 있으라고 가르쳤어야 했나. 이런 내가 아이를 갖고 기를 자격이 있나. 오만가지 생각을 하며 집에 들어온 나는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자마자 작은방에 들어가 수납함에 넣어뒀던 현권의 옷들을 전부 쏟아냈다.

“뭐 하게?”

책상 의자에 앉아 핸드폰을 보던 현권이 물었다.

“이 헐어빠진 걸 입고 다니게? 버려야지.”

“그냥 둘래.”

현권의 목소리가 딱딱해졌다.

“너 준희씨랑 정리 안 했지?”

“했어. 했다니까. 도대체 왜?”

현권이 의자에서 하도 당차게 일어나는 바람에 바퀴 달린 의자가 휙 하고 뒤로 밀려났다. 의자가 선반에 부딪히며 로즈마리 화분이 떨어져 산산조각 난 건 순식간이었다. 놀란 현권이 우스꽝스럽게 발을 땅에 디뎠다 들었다 하며 깨진 화분을 피해 깨끗한 바닥 쪽으로 물러섰다. 눈이 마주친 순간 현권이 주눅 들었음을 알 수 있었다. ‘어떡하지, 어떡해’를 반복하며 서 있는 현권에게 거기 가만히 있으라고 하고선 빠르게 깨진 화분을 치우고 청소기로 남은 유리 조각과 흙을 빨아들였다. 현권은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러곤 옷들을 버려도 된다고 말했다. 미안해. 준희씨랑 헤어지고 내 마음이 좀 그래. 괜찮다고 말해도 현권은 서너번은 더 미안하다고 말했다. 나는 엉덩이 부분이 방충망처럼 닳아버린 현권의 속옷과 시커멓게 때에 전 양말, 하얗다 못해 보랏빛이 도는 면바지와 빨간색 솜패딩을 한데 모아 종량제 봉투에 넣었다. 현권은 주춤주춤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나는 종량제 봉투의 끈을 질끈 묶어 현관에 내놓았다. 헌옷 수거함에 넣는다면 그것들이 이 세상을 돌아다닐 텐데, 그마저도 끔찍할 만큼 나는 그 옷들이 싫었다. 그 마귀 같은 년. 나는 속으로 준희씨에게 욕을 퍼부었다. 햄버거를 스무개씩 쌓아놓고 먹어대던 비용을 내가 댔던 거라고 생각하면 정수리까지 후끈 열이 받았다.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너 정신 좀 차리고 살 수 없어?”

이부자리에 앉아 물끄러미 나를 건너보던 현권이 눈을 피했다.

“남이 널 어떻게 볼지 생각 좀 하고 살라고.”

현권은 고개를 숙인 채 눈을 질끈질끈 감았다 뜰 뿐 대답이 없었다.

“준 돈은 다 어디다 썼어? 어디다 쓰고 매형한테 담배를 사달래. 너 거지야?”

“그런 거 아니야 ……”

현권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곤 방금보다 조금 더 큰 소리로 말을 이었다.

“매형이 먼저 살 거 있으면 고르라고 했어. 그래서 고른 거야.”

나는 얼이 빠지고 허탈해졌다. 지겹다 지겨워.

양치를 하고 방으로 들어와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열었다. K시 부동산 중개인이 ‘내일 오전 11시 약속 문제없지요?’라는 문자를 보내놓아서 11시까지 늦지 않고 가겠다고 답장을 보냈다. 곧바로 ‘네’ 하는 답장이 왔다. 혼자서 조용히 한숨 돌리고 싶었고, 그래서 남편이 늦어주는 것이 고마울 지경이었다. 침대 중앙에 누워 베개를 벤 채 눈을 감고 숨을 골랐다. 그러다 깜빡 잠이 들었나, 깨어나보니 안방 욕실 문틈으로 빛이 새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비어 있던 스탠딩 옷걸이에 남편의 점퍼가 걸려 있었다. 안쪽으로 자리를 비켜주곤 모로 누워 다시 잠에 드는데 욕실에서 나온 남편이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화분 왜 깨졌어?”

“그런 일이 있었어.”

“싸웠어?”

나는 바람 빠지듯 웃으며 “어. 열받아서 던졌어” 하고 대꾸했다.

“역시 그랬구나. 근데 처남 어디 가는 거야?”

몸을 일으키고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무슨 소리야?”

“아까 집에 오는 길에 마주쳤어.”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니 새벽 한시였다. 자리에서 일어나 산발이 된 머리를 묶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어디서 봤는데?”

“차 타고 언덕 올라오면서 봤지. 빨간 잠바면 처남 맞지?”

“어디 가냐고 좀 물어보지 그냥 와?”

작은방으로 향하며 슬쩍 바라보니 현관에 내놓았던 쓰레기봉투가 통째로 사라져 있었다. 대리운전이라 세워달라 하기가 애매했다고 남편이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방은 깨끗했다. 이불은 붙박이장 앞에 대충 개켜져 있었고 매일 메고 다니던 현권의 힙색도 보이지 않았다. 그대로 있는 건 오늘 산 옷들뿐이었다. 쇼핑백째 그대로, 심지어 외투까지도 다시 택이 달린 채 책상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편의점이라도 갔겠지. 전화를 해봐.” 남편이 소리쳤다.

텅 빈 방을 둘러보는 와중에도 정말 편의점에 간 걸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안방으로 가서 핸드폰을 챙겨 현권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가기도 전에 곧장 ‘지금은 고객이 전화를 받을 수 없어’로 시작하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카카오톡을 열자 현권의 이름이 탈퇴한 계정으로 떴다. 이미 차단했을 것 같았지만 문자를 보냈다. 화 한번 냈다고 네 맘대로 그렇게 나가버리면 내가 뭐가 되냐고. 그런 식으로 무책임하게 살지 말고 전화를 받으라고. 연이어 화낸 건 미안하다고, 그러니까 마주 앉아서 이야기를 하자고. 쏟아지는 말들을 전부 보내고 있는데 진동과 함께 메시지가 도착했다.

 

누나 나 찾지말고 옷환불해. 어차피내스탈도

아니야 돈은나중에 꼭갚을게 나는 준희랑있

는게좋고편해 행복해 누나도 나를놔주고 매

형이랑잘살아 나도이젠지겨워 미안해 더이상

나 신경쓰지말고 자유롭게살아 누나

 

망가진 배열과 암호 같은 띄어쓰기 때문에 한문장 한문장을 어렵사리 읽는 도중 다음 메시지가 도착했다.

 

서랍에 선물나뒀어 친환경피톤치드

그거뿌리면 담배냄새안나 쓰던거바

께없어서미안

 

거실 쪽에서 남편의 한숨 소리와 함께 먼지 제거 테이프로 바닥을 문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찍 찌익 찌이익 찌익 찌이이이이이익 찌익. 책상 서랍을 열자 무색의 투명한 액체가 담긴 용기가 들어 있었다. 어제 버스터미널에서 만난 현권이 나를 발견하곤 주머니 속에서 꺼내 뿌린 그것이었다. 이미 절반 정도 사용한 피톤치드 액의 용기 앞면엔 쥬니튜브에서 봤던 로고와 함께 ‘made by Junny’라는 문구가 작게 적힌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현권이 개켜놓은 이부자리 위에 쪼그리고 앉아 2통의 문자를 오가며 몇번이고 다시 읽었다. 토독, 토독, 하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들자 가는 빗방울이 발코니 창을 두드리고 있었다. 초등학교 5학년 여름. 방학식인 그날은 하교 후 생일파티를 위해 친구 집에 가기로 한 날이었다. 그날은 2교시부터 장대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우산을 안 챙겼는데. 현권이도 우산이 없을 텐데. 조바심이 나 쉬는 시간이 되자마자 2학년 교실로 가니 다행히 불 꺼진 교실 문이 잠겨 있었다. 친구나 담임선생님이 현권이에게 우산을 빌려줬나보다. 4교시가 끝나고 방학식 때 받은 과자 꾸러미를 가방에 챙긴 나는 친구들과 함께 우산을 쓰고 후문으로 달렸다. 얘, 얘. 흙탕물이 된 운동장을 가로지르며 뛰어와 나를 불러 세운 건 지나가던 선생님이었다. 쟤 네 동생 아니니? 정문 쪽을 돌아보자 마중 나온 엄마들 틈에 현권이 서 있었다. 시커멓고 커다란 우산을 쓰고, 온몸이 비에 젖어 엉엉 울면서. 학교에서 집까지는 아이 걸음으로 20분쯤. 그럼 현권은 비 맞은 채 집에서 우산을 들고 나와 3교시 무렵부터 나를 기다렸을까. 그러다 갑자기 불어난 아이들과, 우산을 들고 서 있는 엄마들 사이에서 나를 찾지 못할까봐 겁이 났을까. 친구들과 헤어지고 집으로 오면서 나는 현권에게 고맙다고 말하지 않았다. 대신 단단히 일렀던 기억이다. 누나는 우산 없어도 되니까 다시는 기다리지 말라고. 나 안 챙겨도 되니까, 너나 잘하라고.

알 수 없는 마음이 일었다. 이 마음에 어떤 이름을 붙여야 할지 알 것도 같았고, 모를 것도 같았다. 빨간색 점퍼를 입고 걸어가다 멈춰서 메시지를 보냈을 현권의 뒷모습이 선명히 떠올랐다. 굽은 어깨로 처마 아래서 비를 피하며 ‘지겨워’와 ‘미안해’ 사이를 오갔을 현권의 마음. 그 마음만은 분명히 내가 알고 있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