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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신한반도체제의 한일관계를 위한 시민연대
남기정 南基正
서울대 일본연구소 교수. 저서 『일본 정치의 구조 변동과 보수화』 『기지국가의 탄생』, 역서 『와다 하루끼의 북한 현대사』 등이 있음.
profnam@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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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은 한국 현대사의 커다란 결절(結節)을 이루는 해다. 1960년의 4·19민주혁명으로부터 60년, 청년 전태일의 분신 항거로부터 50년, 광주민주항쟁으로부터 40년, 최초의 남북총리회담으로부터 30년,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으로부터 20년이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한국전쟁 발발 70년이 되는 해다. 해방 후 한국의 역사는 전쟁과 독재에 항거하여 평화와 민주주의를 갈망해온 역사였다. 코로나19 통제를 통해 K-방역이라는 신조어를 탄생시킨 것은 바로 이러한 역사 속에서 축적된 한국 시민사회의 역량이었다. 국교정상화 이후에도 한일기본조약과 청구권협정의 해석 차이 때문에 한일관계의 토대를 흔들어온 ‘1965년 체제’를 넘어 동북아시아에 평화질서를 구축하는 힘도 한국 시민사회에서 나온다.
시민들은 10년마다 평화와 민주주의의 이정표를 세워왔다. 1960년대 민주화운동은 1970년대 노동운동으로 확대되었고, 1980년대 반전평화운동으로 다시 확대되었다. 1987년 민주혁명과 노동자대투쟁으로부터 남북화해 기운이 움터 나왔다. 이를 배경으로 1990년에는 남북총리회담이 열렸다. 그리고 2000년에 민주화운동의 상징인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했고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되었다.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의 실질적인 기원이다.
평화와 민주주의를 위한 분투의 역사에서 2000년 남북정상회담은 특히 큰 의미를 지닌다. 한국전쟁 발발 반세기 만의 일이었다. 2000년 남북공동선언은 1998년 한일공동선언과 2002년 북일공동선언 사이에서 이 둘을 잇고 있다. 세개의 공동선언은 동북아시아 평화를 위한 세개의 축이다. 이때 한일-남북-북일로 이어지는 동북아시아 평화의 핵심 삼각형이 만들어졌다. 이 과정을 주도한 것은 평화와 민주주의에 대한 한국인들의 열망을 대변한 김대중 대통령이었다. 한일관계를 정상화하여 이를 밑변 삼아 남북화해의 탑을 쌓고, 북일관계를 정상화하는 것이 그의 염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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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노력은 민주화운동의 정통을 이어받은 노무현정부에 계승되었다. 2007년에는 10·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었다. 그러나 이명박·박근혜 정권하에서 남북화해 프로세스는 중단되고 후퇴했다.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전쟁 위기가 고조되었다. 2015년부터는 한반도 상공을 전쟁 직전의 암운이 뒤덮는 ‘4월의 위기’가 연례행사가 되었다. 그해 북한 핵미사일 문제를 둘러싸고 남북, 그리고 북미 간에 긴장이 높아지는 가운데 한미합동훈련이 열렸기 때문이다. 2016년 4월, 위기는 더욱 고조되었다.
2016년 한미합동훈련에서는 B-52 폭격기와 F-22 전투기, 그리고 핵추진 잠수함 등 최첨단의 전략무기가 동원되었고, 북한 점령 및 참수작전 연습도 포함되었다. 이에 북한은 격렬히 반발하며 청와대를 ‘선제적인 정의의 작전 수행’의 1차적 타격 목표로 삼았고, ‘실전 배치한 핵탄두들을 임의의 순간에 쏴버릴 수 있게’ 항시적 준비태세에 들어갔다. 7월 한미가 사드(THAAD) 배치를 결정하자 9월에 북한은 5차 핵실험으로 대응했다. 유엔은 새로운 대북제재를 채택했다. 도발과 제재의 악순환이 구조화된 것이다.
그 속에서 촛불혁명이 일어났다. 박근혜 대통령의 직무정지로 방향전환의 가능성이 생겼지만 황교안 권한대행은 사드 배치를 강행했고, 나아가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을 체결하면서 대결의 수위는 한층 높아졌다. ‘사드 가고 평화 오라’가 촛불혁명의 한 구호가 되었다. 2017년 4월에는 북미 간 치킨게임이 전쟁 전야 상태를 방불케 했다. 이후 2017년을 통틀어 북미 간 응수는 격화되어갔다. 5월 10일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해 만신창이의 내정과 외교를 정상화하면서 7월에 베를린에서 ‘신(新)한반도 평화 비전’을 제창했지만, 북미 간 말폭탄의 응수 속에서 그 목소리는 묻히는 듯했다. 11월 29일 끝내 북한은 대륙간탄도미사일의 시험발사를 단행했고, 미국은 ‘코피(bloody nose) 작전’을 내비치면서 일촉즉발의 상황은 연말까지 이어졌다.
그런데 2018년 김정은 위원장의 신년사와 북한의 평창 동계올림픽·패럴림픽 참가로 사태가 급선회했다. 그 이유와 배경에 대해서는 여러 설명이 가능하지만 우리가 함께 기억하고 역사에 기록해야 할 것이 있다. 전쟁에 반대하고 화해와 평화를 희구하는 시민운동이 촛불혁명에 기름이 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진행형인 촛불혁명을 배경으로 4월에는 극적으로 남북정상회담이 실현되었고, 역사적인 판문점선언이 발표되었다. 1960년 4·19로 민주주의와 평화의 길을 열어젖힌 지 58년 만의, 2000년에 제1차 한반도 평화프로세스가 개시된 지 18년 만의 일이었다. 2018년 한반도 평화프로세스가 시작되었다.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처럼 보였던 평화프로세스는 2019년 2월, 하노이에서 제2차 북미정상회담이 성과 없이 끝나면서 발걸음이 엉키기 시작했다. 그 틈을 일본 아베 정권이 치고 들어왔다. 6월 30일, 판문점에서 남·북·미 정상이 회동하여 가까스로 평화프로세스의 동력을 되살려놓은 바로 다음날이었다. 2019년 7월 1일, 아베 정부는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산업에 불가결한 주요 소재부품의 대(對)한국 수출규제 조치를 취했고, 8월에는 수출심사 우대국 목록(화이트리스트)에서 한국을 삭제했다. 일본의 일방적인 조치로 시작된 ‘한일무역전쟁’에 문재인정부는 총력으로 대응했다. 국민은 ‘보이콧 아베’(일본 상품 불매운동)로 항거했다. 무기만 들지 않았을 뿐 가히 총력전이었다. ‘1965년 체제’ 극복을 위해 일본의 도전에 맞서 싸우지 않을 수 없었다. 2019년은 3·1독립선언과 임시정부 수립 100년의 해였다.
문재인 대통령은 3·1절 100주년 기념연설에서 새로운 100년의 과제로 신한반도체제 구축을 설정했다. 신한반도체제는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와 동북아시아 플러스 책임공동체, 동북아시아 평화플랫폼 등을 종합하는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한반도가 전쟁과 대립의 무대에서 평화와 협력의 무대로 변화할 때 만들어지는 새로운 질서로 이해된다. 이를 위해서는 동북아시아에 전쟁 논리를 강요하는 ‘두개의 전후(戰後)’를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냉전이라는 이름으로 지속된 2차대전의 전후와 정전의 이름으로 지속된 한국전쟁의 전후가 한반도에서 중첩되어 전쟁의 위기를 고조시켜왔다.1 두 ‘전후’를 극복하지 않고서는 동북아시아에 평화는 오지 않는다.
‘두개의 전후’가 해체되기 시작한 것도 2018년이었다. 한반도 평화프로세스가 진행되는 가운데, 냉전체제 위에 성립한 한일 1965년 체제에도 금이 가기 시작했다. 4월의 판문점선언과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의 손해배상청구에 대한 10월의 대법원 판결은 불가분의 일체다. 신한반도체제에 어울리는 한일관계 구축이 과제로 부상했다. 동북아시아 냉전과 한반도 정전을 보증하는 한·미·일 3각 안보협력의 하위동맹이자, 종종 유사동맹(quasi-alliance)으로 지칭되는 한일관계는 더이상 신한반도체제에 어울리지 않는다. 1965년 체제를 관리하는 것으로 한일관계를 개선하려는 길은 선택지가 될 수 없다. 동북아시아 냉전과 한반도 정전을 극복하는 남·북·일 3자 평화협력의 한 변으로 재구축되는 한일관계가 신한반도체제 시대의 한일관계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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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의 전쟁은 동북아시아의 전쟁이었다. 미국과 중국이 개입하고 일본과 소련이 지원해서 전개된 것이 한국전쟁이었다. 그 전쟁이 벌어지는 동안 일본이 이룬 일이 2차대전 전후 처리를 위한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체결이다. 한반도의 두 당사자와 중국, 소련은 거기서 배제되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평화조약이 체결되고 판문점에서 정전협정이 성립했다. 샌프란시스코의 ‘평화’는 전쟁의 씨앗을 품은 평화였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불안정한 평화였으며 미완의 평화였다. 한반도의 정전 또한 마찬가지였다. 한반도의 정전에 샌프란시스코의 평화가 외삽되었던 것이 한일기본조약으로 태어난 1965년 체제다. 샌프란시스코에서 간과된 탈식민의 문제가 1965년 토오꾜오에서 해결될 리 없었다. 한일 청구권협정은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4조에 의거해서 양국과 그 국민의 재산과 권리 및 청구권 문제를 배상도 보상도 청구권의 행사도 아닌, 경제협력이라는 정치적 수법으로 처리한 데 지나지 않았다. 한일관계의 가시는 냉전의 껍질에 가려졌다.
1956년 소련이, 1972년 중국이 일본과 국교를 정상화하면서 샌프란시스코의 평화는 조정되었다. 국가 간의 각축이 배경에 있었지만, 전후 일본에서 성장한 평화주의와 평화운동이 동아시아 평화의 정착과 확대에 기여했다는 점은 특기할 필요가 있다. 특히 베트남전쟁의 와중에 미국의 확전에 제동이 걸린 데는 일본 시민사회 반전운동의 역할도 컸다. 1972년 여름에서 가을에 이르는 100여일 동안 일본 사가미하라(相模原) 종합보급창 주변에서 베트남전쟁에 반대하는 시민들이 항의운동을 전개하여 베트남으로 출동하는 미군 전차부대를 저지했다. 그밖에도 일본 시민들이 전개한 미군 탈주병 지원운동은 일본을 거쳐 들어가는 미군의 사기를 현저히 저하시켜놓았다.2
한반도에서도 1980년 광주를 기폭제로 시민사회의 민주화운동이 평화의 영역을 확대하고 있었다. 1987년의 민주화가 남북 간 교류, 북한의 대미·대일 관계 개선 협조 등의 내용을 담은 1988년 7·7선언(민족자존과 번영을 위한 대통령특별선언)으로 이어져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의 기틀을 마련한 것이다. 그 성과로 한국이 1990년에 소련과, 1992년에 중국과 국교를 정상화했고, 이로써 샌프란시스코의 미완의 평화는 재조정되었다.
그 과정에서 일본의 평화주의와 한국의 민주주의는 공명하고 연대하고 있었다. 식민지배의 역사를 함께 바라볼 진지가 구축되기 시작한 것이다. 냉전의 껍질이 벗겨지자 한일관계의 가시가 드러났다. 민주주의의 성장을 바탕으로 그간 개발독재하에서 가려졌던 과거사 문제가 한국에서 표면에 떠올랐다.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대표적인 사례다. 이에 전후 신헌법하에서 ‘전후 평화주의’를 내면화한 일본이 반응하여 한국 시민사회의 문제제기를 수용했다. 1993년의 코오노 담화와 1995년의 무라야마 담화는 양국에서 성장한 민주주의와 평화주의가 이룬 성과다.
1993년 담화를 주도한 코오노 요헤이(河野洋平)는 1960년대부터 자민당 내에서 ‘아시아 아프리카 문제연구회’를 조직하여 좌파 리버럴 세력을 이끌었던 우쯔노미야 토꾸마(宇都宮徳馬)와 사상적 입지를 공유하고 있었으며, 1970년대에는 김대중 구명운동에도 관여한 인물이다. 무라야마 토미이찌(村山富市)는 일본사회당 위원장으로 자민당-사회당 연립내각의 총리가 되었던 사람이다. 무라야마는 김대중의 오랜 지원자였던 사회민주주의 계열 덴 히데오(田英夫)와도 활동을 같이하고 있었고 덴 히데오와 김대중의 라인을 통해 한반도 문제를 이해하고 있었다.
이들이 마련한 발판을 딛고 1998년 김대중 -오부찌 공동선언(21세기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이 나왔다. 이 선언에는 “일본이 과거 한때 식민지 지배로 인하여 한국국민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안겨주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면서 이에 대하여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한다는 문구가 담겼다. 이어서 오부찌 케이조오(小淵恵三) 총리는 한국 국민들의 노력에 의한 민주화 달성과 성숙한 민주주의 국가로의 성장에 대해 경의를 표했고, 김대중 대통령은 전후 일본이 평화헌법하에서 전수방위(專守防衛)와 비핵 3원칙을 견지하며 국제사회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수행해온 역할을 높이 평가했다. 식민지배 반성은 민주주의와 평화의 기초 위에서 나온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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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민주당으로의 정권교체가 일어나 일본의 전후민주주의가 새로운 단계에 진입하고 있던 2010년에는, 일본의 식민지배가 한국인의 의사에 반한 것이었음을 인정하고 이를 반성·사죄한 칸 나오또(菅直人) 총리 담화가 나왔다. 이는 ‘한국병합’ 조약이 불의부당한 것으로 원래부터 무효였다는 인식을 담은 그해 5월 한일 양국 지식인의 성명으로 촉발된 것이었다. 그런데 같은 시기 한국에서는 평화프로세스가 중단되고 민주주의가 후퇴하기 시작한다. 2009년 5월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8월에는 김대중 대통령이 서거했고 2010년 3월에는 천안함 침몰 사건이 발생하며 5·24조치가 취해졌다.
동아시아공동체를 주장하며 아시아 외교 재건을 내걸고 등장했던 일본 민주당 정부 또한 이 무렵 오끼나와 후뗀마(普天間) 미군기지 이전 문제를 둘러싸고 후퇴하면서 흔들리기 시작한다. 후뗀마 미군기지의 ‘최소한 현외 이전’ 방침을 번복하고 현내 이전을 결정한 배경에 천안함사건이 있었다.3 이때부터 자민당과 미국의 반민주당 전선이 형성되고 있었고 결국 민주당 정권은 2012년을 넘기지 못했으며, 아베 내각의 등장으로 일본 외교에서 ‘아시아’와 ‘평화’는 금기어가 되기 시작했다. 그 대신 ‘적극적 평화주의’라는 해괴한 이름의 개입주의적 안보정책이 ‘보통국가 일본’의 국가노선으로 공식화되었다.
동시에 아베 총리는 공공연히 수정주의적 역사 인식을 내비치고 있었는데, 이를 배경으로 2010년대 중반, 역사수정주의 진영이 ‘역사전(歷史戰)’의 포문을 열었다. 2011년 연말,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법을 둘러싸고 한일 정상이 정면충돌한 것이 계기였다. 공식적으로 역사전의 개시는 산께이신문사가 『역사전(歴史戰)』을 출판한 2014년을 기점으로 잡을 수 있다.4 이후로 일본의 서점에는 혐한류 서적이 범람하기 시작했다. 『역사전』에는 ‘아사히신문이 세계에 퍼뜨린 “위안부”의 거짓을 처단한다’라는 긴 이름의 부제가 붙어 있다. ‘역사전’의 목표는 ‘위안부’ 부정을 통한 식민지배 역사의 총체적 부정이었다. 2019년에는 한국과 일본에서 『반일종족주의』가 출판되어 이를 매개로 한일의 역사수정주의가 결합하고 있다.5
‘역사전’의 공세 앞에서, 아니 ‘역사전’에 편승하여 일본정부는 한국 대법원 판결을 부인하고 부정했다. 2018년 한국 대법원은 강제동원 피해가 불법적 식민지배에 기인했다고 판단해 일본기업인 일본제철(구 신일철주금)에 피해자들에게 각각 1억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에 대해 일본정부는 코오노 타로오(河野太郎) 외상이 담화를 발표하여, 대법원 판결이 1965년 ‘청구권 및 경제협력’ 협정 위반이며, 따라서 ‘국제법 위반’이라고 비난하고 한국정부에 ‘시정’할 것을 요구했다. 이는 병합조약이 무효라는 한국 측 주장을 암묵적으로 용인하여, “의견 차를 인정한 합의(agree to disagree)”를 이루었던 1965년의 역사인식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다. 일본이야말로 1965년 조약과 협정의 정신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국제법에 대한 헌법우위설은 일본에서 오히려 강력히 지지받는 학설이다. 법률보다 간단한 절차로 성립되는 조약이 헌법을 무력화하고, 나아가서는 헌법을 개정하게 하는 근거가 될 수 있기에 국민주권과 경성헌법의 취지에 반하는 일이라는 것이 그 이유다. 국제법 학계에서 유명한 판례로 주목받는 코오까료오(光華寮) 소송6은 일본정부의 이중성을 보여주는 사례다. 일본정부가 조약을 근거로 중화인민공화국을 중국의 유일 합법정부로 승인하고 있음에도, 소송에서 일본 사법부는 중화민국(대만)의 실체성을 인정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일본정부는 삼권분립의 원칙에 입각해 ‘정치는 사법에 개입할 수 없다’고 하여 중화인민공화국 측에 양해를 구하기도 했다. 이 사례를 통해 일본 사법부가 국내법에 대한 조약의 무조건적인 우위를 인정하고 있지 않으며, 일본정부도 이를 존중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반면 지금 일본정부는 법리적으로 확립되지 않은 사안을 일방적으로 외국 정부에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촛불혁명으로 등장한 문재인정부는 헌법정신에 기초한 대법원 판결을 존중할 수밖에 없다. 촛불은 반동의 권력에 의해 중단되었던 헌법의 작동을 정상화했다는 의미에서 혁명이었다.7 이명박에서 박근혜로 이어진 반동의 시기, 남북대립이 격화하는 가운데 반공·반북을 위해 헌법과 법률은 유보될 수 있다는 “일종의 이면(裏面)헌법이 존재”8했다. 2012년 대법원에서 나온 강제동원 배상 판결이 ‘사법농단’으로 서류 속에서 잠자고 있었던 것도 이면헌법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사례다. 촛불혁명은 이면헌법의 작동을 중단시키고 헌법에 의한 지배를 정상화한 것이었다. 이는 대일관계에서는 두가지 의미를 지닌다. 2015년 ‘위안부’ 합의가 이면헌법의 작동 속에서 체결된 것이라는 인식이 생겼다. 그리고 1948년의 정부 수립에 의한 건국설이 헌법정신에 위배된다는 것, 1919년 독립선언에 대한민국의 법률적 정통성이 있다는 생각이 확인되었다. 헌법의 작동이 정상화된 한국사회에서 식민지배 불법성은 부정할 수 없는 원칙이 되었고, 1965년 체제의 한계가 극명하게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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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 판결 이후 한일관계가 냉각되는 가운데 일본의 시민운동 쪽에서 먼저 한일 및 북일 상호이해의 필요성을 호소하는 움직임이 재조직되기 시작했다. 2019년 2월 6일, ‘일본 시민 및 지식인 성명’이 발표되었다. 성명에서는 “무라야마 담화, 칸 총리 담화에 기초하여 식민지 지배를 반성·사죄하는 것이야말로, 한일 및 북일 관계를 지속시키고 발전시키는 열쇠”라며 지난 담화의 의미를 강조했다. 성명은 3·1운동 100주년의 해에, 조선의 독립선언이 “일본으로 하여금 그릇된 길에서 벗어나 동양을 붙들어 지탱하는 자의 중대한 책임을 온전히 이루게 하는 것”임을 명심하고 일본의 시민과 지식인들은 이에 대답할 필요가 있다고 통감했다. 그리고 “조선민족의 이 위대한 설득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동양평화를 위해,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식민지 지배의 반성·사죄에 입각하여 일한, 일북 상호이해와 상호부조의 길을 걸어가야 할 때”라고 매듭지었다.
일본의 시민사회는 평화운동과 역사반성운동이 결합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2019년 ‘전쟁 반대·9조 수호 총동원행동 실행위원회’와 ‘3·1조선독립운동 100주년 캠페인 실행위원회’가 합동하여 ‘한반도와 일본에 비핵·평화를 확립하는 시민연대행동 실행위원회’가 발족했다. 5월 3일 이 조직은 팸플릿을 출판하여 조직의 이념과 방향, 활동 내용을 알렸다. 그 가운데 한국 대법원 판결의 정당성을 확인하고 그 의미를 수용하는 일본 측 움직임도 소개되어 있다.9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 이후 화이트리스트 배제를 앞둔 시점에서는 일본의 지식인 77명이 아베 정부에 “한국은 ‘적’인가”를 묻는 성명을 발표했다. 성명은 1965년 시점에서는 일본정부의 입장이 식민지배 유효·합법론에 머물러 있었지만, 반세기 이상 지나는 가운데 변화해왔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이어서 무라야마 담화, 한일공동선언, 북일공동선언 등에 기초해서 한국병합 100년째인 2010년에 나온 칸 총리 담화의 의미를 강조하고, 한일 양국 정부가 이에 입각해서 마주 본다면 해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베의 고향이자 정한론(征韓論)의 본산인 야마구찌(山口)현에서도 아베의 정책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조직적으로 분출되었다. ‘어떠한 권위에도 굴하지 않는 인민의 언론기관’을 자임하며 야마구찌현 시모노세끼(下關)시에서 발간되는 『초오슈우신문』은 ‘일본에 연고가 있는 시민’의 이름으로 ‘아베 정권에 한국 적대시 정책을 그만둘 것을 요구한다’라는 제목의 성명을 발표하고 서명운동을 전개했다. 성명은 일본정부가 ‘징용공’ 피해자에게 가해사실을 인정하고 진심으로 사죄할 것, ‘징용공’ 피해자가 수용할 수 있는 배상책을 검토해 실시할 것, 화이트리스트 배제를 포함하여 한국 적대시 정책을 그만둘 것 등을 요구했다.10
한국에서도 8월 12일, 동아시아평화회의가 성명을 발표하여 한일 두 나라가 1998년 김대중 -오부찌 공동선언의 정신과 해법으로 돌아가 일본은 보복을 철회하고, 한일은 즉각 대화하라고 요청했다.11 9월 25일에는 홍석현 한반도평화만들기 이사장이 한일비전포럼의 논의를 결산하는 기조연설을 통해, 한일 양국 정부의 자세 전환을 요구했다. 그는 먼저 한국정부가 일본을 상대로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을 요구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여 ‘일본이 곤란해하면 굳이 받지 않겠다’는 쪽으로 정리하고, 그 대신 일본정부는 불법적인 식민지배와 강제징용에 대해 사과하고 반성하는 입장을 분명히 밝히는 것을 해법으로 제시했다.12 10월 10일에는 동아시아평화회의, 대화문화아카데미, 주권자전국회의가 공동명의로 성명을 발표하여, ‘동아시아 평화 진전을 위해 아베 일본정권의 한반도정책 전환이 필요하다’고 호소했다. 106인이 서명한 이 성명은 1910년까지 맺어진 대한제국과 일본 사이의 협약 및 조약이 무효라는 점을 확인하고, 일본이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여 1965년 체제의 한계를 최종적으로 극복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면서 일본이 당장 불법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현실을 고려해 칸 총리 담화를 출발점으로 삼을 수 있다고 조언했다.
한일 시민사회의 성명들이 요구하는 해법들은 1965년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임과 동시에 2010년의 성과를 인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또한 1965년 체제와 그 외삽으로 전제되었던 샌프란시스코체제를 동시에 극복하는 것으로, 냉전의 한계를 극복하고 탈냉전의 성과를 계승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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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평화는 동북아시아의 평화다. 1988년의 7·7선언은 일본과 북한을 마주 보게 하기도 했다. 북일 국교정상화는 북미 국교정상화와 함께 샌프란시스코의 평화가 남긴 마지막 숙제였다. 7·7선언으로부터 30년이 지나 2018년에 재개된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는 미완으로 끝난 샌프란시스코의 평화를 완성하는 동북아시아 평화프로세스이기도 하다. 그런데 작년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 이후 한일관계에서 주조되는 악화들이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에서 주조되었던 양화들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거기에 코로나19가 덮쳤다.
코로나19는 지구화의 정체, 국가의 귀환, 국경의 강화를 초래하여 국제사회가 장기적으로 통합되면서 안정과 번영을 이룰 것이라는 전망이 신화에 불과한 것이었음을 드러냈다. 이는 자유주의 국제질서 또한 신화에 불과했음을 깨닫게 한다.
그 구체적 결과는 미국과 중국과 유엔의 동시 실패다. 코로나19를 계기로 미국과 중국은 국제사회의 지도자 지위에서 동시에 미끄러져 내려오고 있다. 초강대국 지위를 양보한 미국과 그 지위에 오르지 못한 중국이 상대적 강대국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더욱 난폭해질 가능성도 있다. 그런 가운데 유엔과 세계보건기구 등 국제기구들도 효과적으로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하면서 그 위상이 격하되고 있다.
그러나 이는 한국이 지향하는 중견국 외교에는 기회가 될 수 있다. 초강대국을 상대로 중견 규모의 국가들이 모여 어젠다를 책정하고 이를 중심으로 네크워크를 구축하여 제도를 창출해나가는 것이 중견국 외교다. 그렇다면 일본을 배제한 중견국 네트워크 구축은 불가능하지는 않을지라도 어려움이 따른다. 표면적으로 미일동맹에 매달리는 듯 보이는 일본이 실제로는 다자협력의 틀 속에서 중견국 네트워크를 중심으로 한 외교에 유능함을 보여왔기 때문이다. 이를 우리는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의 성립을 이끌어낸 일본 외교에서 확인할 수 있다. 트럼프의 미국이 빠진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이 일본을 비롯해서 멕시코, 싱가포르, 뉴질랜드, 캐나다, 호주 등 대표적 중진국들이 포함되는 CPTPP로 재탄생하는 과정에서 일본은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유엔 대북제재를 넘어 남북경협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서라도 한일관계는 중요하다. 국제사회에서 일본의 외교력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볼턴(J. Bolton)의 회고록에서 확인되었듯이, 미국 워싱턴의 주류를 상대로 한 일본의 외교는 집요하다. 이에 더해 일본은 유럽 주요국 및 호주, 인도 등과 구축해온 협력관계를 동원해 대북 경제제재를 유지하거나 강화해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에 개입하는 훼방꾼으로서 능력을 갖고 있다.
코로나19 이후의 국제질서에서 주도권을 발휘하고,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를 추진하여 동북아시아에 평화질서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일본의 능력과 의지를 견제하고 때로는 지렛대로 삼는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이때 일본의 시민사회가 파트너가 될 수 있다. 따라서 한국이 구상하는 중견국 네트워크에 일본을 포함시키고, 일본 시민사회와 연대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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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로 한일 양국 시민들의 왕래가 단절된 상황이지만 시민사회 간에는 연대가 재건되고 있다. 이러한 노력은 일본제철 국내자산 압류 공시송달의 효력이 발생하는 8월 4일을 전후해서도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7월 25일에는 한국의 동아시아평화회의와 대화문화아카데미, 일본의 ‘일한 온라인회의 추진위원회’가 화상회의로 마련한 자리에, 한국에서는 이홍구 전 총리와 최상용 전 주일대사, 일본에서는 후꾸다 야스오(福田康夫) 전 총리와 토오고오 카즈히꼬(東郷和彦) 전 외교관, 와다 하루끼(和田春樹) 교수 등이 참가해서 한일 사이에서 접점을 찾기 위한 대화를 시도했다.13
한층 광범위한 시민단체의 조직적 연대도 모색되었다. 7월 2일 ‘한일 화해와 평화 플랫폼’이라는 이름으로 양국 시민단체의 연대체가 조직되어 8월 12일에는 기자간담회가 열렸다. 한국 측에서는 종교계와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한국진보연대, 환경운동연합 등의 단체가, 일본 측에서는 ‘전쟁 반대·9조 수호 총동원행동 실행위원회’ 등의 평화운동 단체가 참가했다. 이는 2019년 5월에 논의가 시작된 것으로, ‘한일무역전쟁’ 시기에도 한일 간 시민연대를 위한 교류가 이어져오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플랫폼 참가자들은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와 북일 국교정상화, 그리고 대법원 판결에 따른 배상의 실시가 불가분의 하나인 과제라는 공통의 인식에 서서 ‘평화헌법 9조 수호 운동’과 ‘한반도 종전평화 캠페인’을 함께 전개해나갈 것을 다짐하고 있다.14
코로나19의 팬데믹이 일상의 삶을 위협하고 미중 신냉전의 위기를 심화하는 가운데, 민주주의와 평화를 확대해 이 지역에서 안전하고 여유로운 삶을 공동으로 영위하기 위해 필수적인 요소는 한일 시민사회의 연대를 복원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1993년부터 2010년까지 진행된 역사인식 진전과 평화 확대의 역사를 계승하여 재개하는 것이다. 2010년 칸 총리 담화로부터 10년, 2000년 남북공동성명으로부터 20년째인 2020년, 이 지역에서 역사를 진전시키고 평화를 확대하기 위해 분투해온 양국의 시민사회가 앞장서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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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졸고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와 일본」, 창비주간논평 2019.1.16. ↩
- ただの市民が戰車を止める會(編), 『戰車の前に座り込め : 1972年相模原闘爭, そして』, さがみ新聞勞働組合發行 1979 참조; 關谷滋·坂元良江(編) 『となりに脫走兵がいた時代 : ジャテック, ある市民運動 の記録』, 思想の科學社 1998 참조. ↩
- 「首相 の普天間県内移設決斷, 哨戒艦事件も後押し」, Bloomberg 일본어판 2010.5.24. ↩
- 山﨑雅弘 『歴史戰と思想戰 : 歴史問題の讀み解き方』, 集英社 2019, 7면. ↩
- 졸고 「정치기획으로서 『반일종족주의』: 유령잡기에 도전함」, 『동아문화』 57집, 2019. ↩
- 코오까료오는 쿄오또대학의 중국인 유학생 기숙사로, 그 소유권을 둘러싸고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이 일본의 법정에서 다툰 소송이다. 淺田正彥 『日中戰後賠償と國際法』, 東信堂 2015 참조. ↩
- 백낙청 「‘촛불’의 새세상 만들기와 남북관계」, 『창작과비평』 2017년 봄호 31면. ↩
- 같은 곳. ↩
- 矢野秀喜 「强制動員被害者に謝罪と補償を」, 韓半島と日本に非核·平和の確立を! 市民連帯行動實行委員會(編) 『韓半島と日本に非核·平和の確立を!』 2019.5.3; 『信濃每日新聞』 온라인판 2018.12.4; 『琉球新聞』 2018.11.30. ↩
- 『長周新聞』 2019.8.15. ↩
- 「각계 원로들 “일본은 보복 철회, 한일은 즉각 대화하라”」, 오마이뉴스 2019.8.12. ↩
- 「“한국은 징용 배상 요구 않고 일본은 분명한 사과를”」, 중앙일보 2019.9.26. ↩
- 「“한·일관계 파국 맞기 전에 강제징용 문제 해법 찾아야”」, 중앙일보 2020.7.27. ↩
- 「한 -일 시민단체 연대체 “동아시아 평화 공조” 선언」, 한겨레 2020.8.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