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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우애민주주의’라는 용어는 어떨까
남재희 南載熙
전 국회의원, 노동부 장관. 저서 『진보 열전』 『남재희가 만난 통 큰 사람들』 『양파와 연꽃』 『일하는 사람들과 정책』 등이 있음.
정치용어가 정치현실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사회민주주의와 민주사회주의라는 용어가 혼용되고 경우에 따라서는 잘못 사용되는 일에 관한 의견이다. 두 개념은 모두가 서유럽에서 유래한 것으로 그 어원은 영어로 ‘social democracy’이다. 신체의 자유, 언론의 자유, 그리고 의회민주주의를 핵심으로 하는 민주주의(democracy)가 본체이고 사회(social)는 수식어이다. ‘사회적’이란 사회공동체를 조화롭게 발전시키기 위하여 민주주의의 본체에 여러가지 사회적 정책을 가미하여 시행하는 것일 게다. 민주사회주의(democratic socialism)라는 용어는 서유럽에서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간혹 맑시스트들이 공산주의의 전 단계를 말함에 있어서 사회주의를 제시하고 거기에다가 민주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민주적 사회주의’라고 지칭한 경우는 종종 보았다. 이 사회민주주의와 민주사회주의의 무분별한 혼용은 일본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4·19 이후 제 2공화국 때 두 용어의 혼용을 놓고 ‘카레라이스’와 ‘라이스카레’의 혼용과 유사하다고 익살을 떠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견이 있을지 모르지만 나는 ‘사회민주주의’가 정확한 번역이라고 본다.
어느 계간지에 정치에 관한 글을 쓰면서 정치용어에 관해 위와 같이 의견을 덧붙였더니 그것을 읽은 진보정당의 간행물 편집을 주관했던 지인이 자기가 속한 정당에서도 민주사회주의라는 용어를 고집하는 사람이 있다고 말해주었다. 정치 개념의 사용 문제는 매우 까다로운 일 같다.
나는 독일을 몇번 여행한 적이 있으나 거기서 오래 체류하거나 연구한 적은 없다. 하지만 독일 사람들은 영어로 말하면 social이라는 단어를 애용하는 것 같다(아마도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의 영향도 있을 것이다). 시장경제를 말함에 있어서도 거기에 이 단어를 붙여 ‘social market economy’라고 주로 쓴다. 법제를 말함에 있어서도 ‘사회적 법제’라고 쓰는 것을 더러 읽었다. 그러기에 독일에서 사회민주주의(social democracy)라는 개념이 쓰이게 된 것 같다. 독일의 이웃나라 프랑스에서는 이보다는 사회주의(socialism)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
우리나라는 해방 후 좌우익 사이에 치열한 사상투쟁을 겪었고 전쟁이라는 혹독한 경험도 했다. 그러하기에 공산주의는 물론 사회민주주의라는 용어에 대해서도 무언가 이질감을 갖고 있고 그러한 용어 사용을 기피하고 싶은 심리가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좀 엉뚱한 상상을 해보게 되는 것이다. 프랑스혁명의 모토는 자유(liberty) 평등(equality) 우애(fraternity)이다. 우애를 ‘박애’라고 번역하기도 했지만 요즘은 우애라는 번역이 늘고 있는데 이편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된다. 프랑스혁명 모토의 ‘3’이라는 숫자는 무슨 힘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중국에서 청 왕조를 부정하고 민주정의 기치를 올린 쑨 원(孫文)은 민족(民族) 민권(民權) 민생(民生)이라는 삼민주의를 제창했다. 뒤를 이은 장 제스(蔣介石)의 국민당이나 마오 쩌둥(毛澤東)의 공산당도 민생에 대한 해석 방향은 서로 달랐지만 이 삼민주의를 계승한다고 했다. 우리 망명임시정부의 대표적인 이론가인 조소앙은 개인과 개인,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 간의 완전한 정치적·경제적·교육적 균등의 삼균주의를 주창했다. 교육의 균등이 중요하다고 강조한 점은 오늘날 생각해볼 때 매우 선견지명이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요즈음 프랑스혁명의 세가지 모토 가운데 약간 소홀히 여겨져온 것 같은 우애에 주목하여 우애민주주의(fraternal democracy)라는 개념을 생각해보는 것이다. 깊은 함축을 품고 있고 여러 대립정파에도 저항감을 주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헌법 제 4조에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라는 구절이 있다(대한민국은 통일을 지향하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 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한다). 그것을 두고 일부에서는 자유민주주의가 우리의 국시라고 주장하기도 했었다. 그것은 민주사회라고 하면 민주사회주의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농담도 할 수 있는 불합리한 논리일 것이다. 거기에 관해서는 오래전에 박명림 교수의 논문이 있었다. 그의 해석이 아니더라도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는 자유와 민주의 기본질서라고 의당 해석되어야 할 것인데 박교수는 거기에 더하여 헌법의 공식 영문번역본에 자유와 민주의 개념이 붙어 있지 않고 각각 독립된 단어로 되어 있다는 사실도 지적하였다. 헌법조항을 두고 자유민주주의가 우리의 국시라고 운운하는 일은 아마 더이상 없을 것이다. 자유와 민주의 기본질서라는 표현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미국에서는 ‘리버럴’(liberal)이라는 표현을 쓴다. 아주 오래전에 서울대의 저명한 정치학자인 이용희 교수와 그 용어의 번역을 두고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이 교수는 오랫동안 생각하고서도 그 개념을 우리말로 번역할 수가 없다고 말하며 ‘커피의 참맛을 아는 사람’ 정도라고나 할까 하며 비유적으로 얘기하기도 했다.
15년쯤 전 『이코노미스트』(The Economist)에 실린 3분의 2면 분량의 리버럴에 관한 해설을 읽은 기억이 있다. 요약하면 프랭클린 로즈벨트 대통령의 뉴딜정책의 사상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리버럴이라고 지칭한다는 것이다. 서유럽의 사회민주주의와 약간의 유사점이 있는데 미국인들은 그들이 거부하다시피 하고 떠나온 구대륙의 정치용어 사용을 기피하기에 사회민주주의 운운은 거의 쓰지 않는다. 그 대신 그 비슷한 경향을 리버럴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2차대전 후 일본에 진주한 매카서 사령부를 따라온 뉴딜러들은 재벌 해체, 노동운동의 자유화, 농지개혁 등을 적극 추진하였다. 한국에 온 바이마르 공화국의 영향을 받은 뉴딜러들은 헌법과 노동관계법의 제정에 영향을 주었다는 기록은 있으나 구체적인 내용은 밝혀진 게 없다.
한국의 정치를 생각할 때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정권을 통틀어 한가닥의 흐름이 있는 것 같다. 특히 노무현, 문재인 정권에서 그러한 경향이 느껴진다. 그러한 정치 경향을 무어라고 명명할 것인가. 나는 여기서 잠정적으로 우애민주주의라고 명명해보고 싶은 것이다. 구식 표현으로 하면 아주 약한 사회민주주의적인 경향이라고도 할 수 있겠는데 정쟁의 상처가 있는 그러한 표현은 접어두자. 정치에 관심 있는 사람들의 논의가 있기를 기대해본다. 문재인정권은 지금 우애민주주의의 초입에 들어선 것 같다. 아주 시발점인 초입 말이다. 이렇게 말하면 문재인정권에 찬사를 보내는 것으로 해석하는 측도 있겠는데 그런 면도 없지 않겠지만, 나는 정치용어가 정치현실의 산물인 동시에 그 정치용어가 정치현실의 발전에 기여하는 면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기에 새로운 정치용어의 창출에 더 비중을 두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말을 만들지만 역으로 말들이 인간사회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는 것이다. 『말의 힘』(이규호 저, 제일출판사 1998)이라는 책을 낸 우리나라의 철학자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