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현장

 

팬데믹과 마스크 쓰지 않는 남자들

남성성의 극단적 이기심, 여성의 늘어나는 돌봄 부담

 

 

리베카 솔닛 Rebecca Solnit

예술평론·문화비평 등 다양한 저술로 주목받는 작가, 역사가이자, 환경·반핵·인권운동에 참여하는 현장운동가. 국내에 번역된 책으로 『이것은 이름들의 전쟁이다』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어둠 속의 희망』 『이 폐허를 응시하라』 등이 있음.

 

 

* 이 글은 Literary Hub에 게재된 “Masculinity As Radical Selfishness: Rebecca Solnit on the Maskless Men of the Pandemic —The Burden of Care Falls Ever More to Women”(2020.5.29)을 번역한 것이다. ⓒ Rebecca Solnit, 2020, originally published in Literary Hub / 한국어판 ⓒ (주)창비 2020.

 

 

“내 팔을 휘두를 권리는 네 코 앞에서 끝난다”라는 옛 격언을 들으며 나는 자랐다. 이 격언은 개인의 자유와 타인의 권리 사이의 균형, 그리고 타인의 권리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개인의 의무를 뜻한다. 최근 몇년간 전미총기협회(NRA), 인셀(incel, 비자발적 독신주의자들의 줄임말로, 연애나 성관계 대상을 찾지 못하는 원망과 분노의 심리를 여성혐오·인간혐오 등 파괴적 인터넷 포럼으로 해소하는 남성 집단—옮긴이)과 픽업 아티스트(pick-up artist, 여성을 유혹하여 성관계를 갖는 것을 목표로 삼는 남성들의 인터넷 커뮤니티—옮긴이) 하위문화, 트럼프주의(Trumpism), 혹은 여타의 많은 이들이 여성과 남성을 가르는 악의적인 수사(rhetoric)를 통해 그들이 팔을 휘두를 권리는 사실상 끝나지 않을 것이며, 내 코든 네 코든 그건 상관할 바가 아니라거나 단지 방해가 될 뿐이므로 치워버려야 할 것이라고 암시해왔다. 남자다움의 정의가 남에 대한 배려를 조금도 할 필요가 없는 것일 때, 마스크를 쓰는 것은 남자답지 못한 일이 되어버린다.

이밖에도 남자답지 못한 일이 되어버린 것이 아주 많은데, 기후변화와 환경 문제를 염려하는 것, 심지어 어떤 연구에 따르면 재활용(다른 연구에서는 손 씻기)조차 그에 포함된다. 만사를 돌보는 것은 남자답지 못한 일이다. 이번 팬데믹에서 가장 심한 타격을 받은 나라 중 네곳이, 사내다움의 조건을 충족시키는 데 열중한 나머지 코로나19 위기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적절히 대응하는 일과 충돌을 빚은 국가수반—자이르 보우소나루, 블라지미르 뿌찐, 보리스 존슨, 도널드 트럼프—때문에도 고통받고 있다.

극단적 이기심으로서의 남성성이란 바로 이런 뜻이다. 이 남성성은 반자동 무기를 비롯한 여타의 대량 살상 수단에 대한 접근 규제 철폐를 요구하고 이용함으로써 미국인의 생명에 큰 피해를 주었듯이, 이번에는 ‘우리’가 팬데믹에 대응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함으로써 엄청난 숫자의 희생자를 낳았다. 팬데믹에 대응하지 않는 이때의 ‘우리’는 자신들이 불사신이고, 무제한으로 팔을 휘두를 권리가 충만하다고 생각한다. 이기적 남성성은 세금(내 팔을 휘두를 권리에 대한 제한)과 사회복지 사업과 안전 규제(너의 코)를 줄이는 데 전념하는 보수주의 철학으로서, 수십년에 걸쳐 자신의 길을 닦아왔다.

미국에서 무제한의 팔 휘두르기는 백인성과 남성성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절정을 이루는데, 백인 남성의 팔 휘두르기를 보호해주는 것이(자신의 코 문제는 종종 이타심을 발휘하여 접어두고) 자신의 임무라고 믿고 있는 듯한 꽤 많은 백인 여성이 이에 동조한다. 이 모든 행태가 몇주 전, 미시간주 의회에서 총을 들고 서 있던 백인 남성들과 함께 최고조에 달했는데, 이때 총, 마스크의 부재, 의학적으로 중요한 규제에 맞서는 호전적 태도 등을 통해 온갖 형태의 주먹질이 마침내 하나로 뭉쳤다.(지난 4월 30일, 수백명의 무장 시위대가 미시간주의 코로나 규제 연장 및 이동제한 명령 발의에 반대해서 주지사 집무실 앞을 점거한 사건을 가리킨다.—옮긴이)

남성성은 아니지만 백인성의 극단을 보여준 또다른 예로, 이번주 초 센트럴파크의 유명한 조류 서식지로 개의 경우 반드시 목줄을 해야만 들어갈 수 있는 램블(Ramble) 구역에서, 한 백인 여성 기업간부가 흑인 탐조객으로부터 코커스패니얼의 목줄을 해달라는 요청을 듣고 정신을 잃을 만큼 격분한 사건을 들 수 있다. (그 탐조객은 개가 조류 서식지의 일부인 덤불숲을 뚫고 질주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고했다. 무엇보다 이 사건을 보면서 나는 목줄이 풀린 사나운 개와 마주쳤던, 때로는 비참하고 때로는 공포스러웠던 수십년간의 내 경험에서 개 주인이 모두 백인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백인 여성 간부는 911에 전화해서 분노를 공포인 척 연기했고, 흑인 남자인 상대방이 먼저 공격한 것처럼 위장하여 개를 이용한 자신의 공격을 경찰을 매개로 한 격상된 공격으로 전환하고자 했다. 즉 그가 팔이고 그녀는 코라는 식이었다. 일찍이 다이앤 디 프리마(Diane di Prima)가 표현한 대로, “베어진 네 목을 내 칼에서 치우라”는 식의 적반하장이었다.

이처럼 우리는 자신들의 권리가 무한하다고 주장하는 무리들을 보게 되는데, 트럼프 행정부가 한 짓은 온통 이런 것들뿐이며, 그중에서도 특히 벳시 디보스(Betsy DeVos, 미국 교육부 장관)는 강간범의 자유와 권리를 증진하고 강간 피해자들의 자유와 권리는 축소하기 위해 타이틀 나인(Title IX, 1972년 미국 개정교육법의 일부로 통과된 교육기관 내 성차별 금지법—옮긴이)을 고치려 하고 있다. 이 모든 행태를 떠받치는 논리는 고립된 개인이—이상적으로 백인, 이상적으로 남성이며, 그들이 주먹이고 나머지는 성가신 코다—최고의 주권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수 로잔느 캐시Rosanne Cash의 마스크를 쓴 딸에게 “좌파 계집”liberal pussy이라고 고함친 내슈빌의 한 남자는 최소한 표본으로서는 완벽하다.) 물론 아무도 고립되어 있지 않으며, 바로 이 점이 팬데믹과 기후변화와 그밖의 모든 생태계 교란의 증거가 우리에게 계속 일깨우려 하는 사실이다.

예전에 마틴 루서 킹 주니어가 말했듯이 “실질적 의미에서 모든 생명은 서로 연관되어 있다. 모든 인간은 운명이라는 단 한벌의 옷으로 연결되어 상호관계의 빠져나갈 수 없는 그물망 속에 얽혀 있다. 무엇이건 한 사람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은 모두에게 간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자유지상주의 성향의 보수주의자들과 과도한 남성성의 소유자들이 ‘모든 사람이 나를 위해 존재’하는 사회 분위기를 정당화하기 위해 부정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드러나듯이, 팬데믹으로 인해 사회로부터 물러나 있는 것이 사실상 타인에 대한 일종의 배려가 되기 시작한 상황에서 극단적 자립정신은 종말을 고한다. 그래서 세상이 망해도 자신은 억센 특공대원처럼 숲에서 사냥감을 맨손으로 때려잡으며 혼자 자급자족할 수 있다고 우리에게 줄곧 말하던 백인 남자들이 당장 머리를 잘라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갑자기 요청해오는 것이다.

이 스펙트럼의 반대편 끝에는 취약 인구와 일선 노동자들이 바이러스 위기에서 살아남을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마스크를 만드는 여성들이 있다. 돌봄이 여성의 몫으로 성 구분되어왔듯이, 재봉도 그렇다. 남자들이 마스크를 만드는 것을 본 적이 있긴 하지만, 여자들이 만드는 걸 훨씬 더 많이 보았는데, 내가 지켜본 많은 여성들이 날마다 꾸준히 재봉틀을 돌려, 수백개의 천 마스크를 손으로 만들고 있었다. 이달 초, 대개 유색 인종 여성으로 구성된 ‘아줌마 재봉팀’(숨김없이 털어놓으면, 나는 재봉일을 하지 않는 성원이다)이 원주민에게 보급할 마스크 5천개를 1주일 만에 만들었다. 이러한 현상은 “남자라면 마스크를 쓸 수 없지” 따위의 행동양식과 극단적인 대조를 이룬다. 이는 실상 별일도 아닌 마스크 쓰기를 통해 남을 배려하는 차원이 아니다. 모두가 마스크를 쓸 수 있도록 조처하려는 엄청난 일을 할 만큼 남을 배려하는 것이며, 그리하여 미국 전역에서 (대개는) 여성들이—혼자서, 목표를 바꾼 퀼트 그룹에서, 새로 조직된 단체에서—낯선 사람들을 위해 재봉틀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양육하는 일이며 보호하는 일이다. 극대화된 남성성은 찰스 브론슨(Charles Bronson)이나 클린트 이스트우드(Clint Eastwood)식의, 무언가 보호하기 위해 다른 무언가를 날려버리는 보호 관념만을 좋아한다. 마스크 쓰기가 일상화된 세계의 일부 지역—아시아—에서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보호하기 위해, 즉 다른 모든 사람의 코를 존중하는 마음으로 마스크를 쓴다는 사실은 주목할 가치가 있다. 아시아 문제를 다룬 2013년의 한 연구는 미국의 남자 어린이와 여자 어린이는 사회화 방식이 다른데, 그 차이가 내재적이라는 어떤 주장도 아시아의 어린이를 보면 설득력을 잃는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미국에서는 여자아이들이 남자아이들보다 더 높은 자기제어 능력을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자기제어란 어린이가 자신의 행동과 충동을 통제하고 지시를 따르며 과제를 끈기 있게 수행할 수 있는 능력으로 정의된다. 과거 오리건 주립대학 연구자들이 수행한 연구에서는, 자기제어 능력이 학과 수행 능력이나 대학 졸업과 결부되어 있었다. 연구자들이 세살에서 여섯살에 이르는 아이들의 자기제어 능력을 직접 평가했을 때, 미국에서 보이는 여아와 남아의 차이가 아시아의 세 나라에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즉 이 나라 미국에서는 부모와 문화가 코를 배려하지 않고 팔을 휘두를 재량을 주기도 하고 앗아가기도 한다는 것이다.

인도의 한 간행물에 실린 기사가 그곳의 팬데믹 상황에 주목한 이후, 가장 큰 대륙(아시아)과 그곳에 사는 모든 사람들을 이상화하기는 어렵게 되었다. “집에 사람들이 더 많다는 사실은 음식을 더 많이 만들어야 하고, 옷을 더 많이 빨아야 하고, 이와 유사한 집안일을 더 많이 해야 한다는 뜻이다. 동등하게 참여할 책임이 있는 남자들이 집에 있어도 여자들이 (…) 그 모든 일을 하도록 기대된다.” 마찬가지로, 미국에서도 재가(stay-at-home)명령이란 가장 보편적인 두명의 부모가 있는 이성애 가정에서도 대부분의 일은 여성이 하고 있다는 의미라는 이야기가 들린다.

『뉴욕타임즈』는 남성들이 이런 불평등을 인식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기사를 게재했는데, “절반에 가까운 남성이 홈스쿨링을 거의 전담한다고 말한다. 3퍼센트의 여성이 동의한다”가 전말을 말해주는 표제이다. 팬데믹 기간에 학술지에 제출된 논문의 수로 평가할 때 여성의 학문적 생산성이 떨어진 반면 남성의 생산성은 꾸준히 유지되거나 상승했다는 사실에 다수의 학술 매체가 주목한다. 이는 『네이처』(Nature)가 진술하듯이, “여성 학자들이 집 안에 갇혀 있을 때 가사 책임이 증폭되는 현실에 직면할 가능성, 그로 인해 학문적 생산의 감소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 문장을 학교 폐쇄나 자가 격리를 해도 “남성 학자들은 집안일에 대한 책임을 덜 느끼고, 그 결과 직업적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덜하다”로 고쳐 써도 무방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이야기들을 언제나 여성에 관한 이야기, 즉 어쨌든 여성에게 일어나는 일이며 여성이 다루어야 할 문제라고 말한다. 이렇게 생각하게 만드는 한가지 방식은 이같은 주제를 다루는 기사를 간행물의 여성란에 따로 분리하여 싣는 것이다. 신문과 잡지의 여성란은 늘 나를 짜증나게 만드는데, 이 여성란들이 만인의 염려가 되어야 마땅할 문제를 여성의 염려로, 여성이 해결해야 할 일로 만드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워싱턴포스트』에는 여성을 끌어들이고 남성은 걸러내도록 의도된 것이 분명한 명칭인 ‘백합’(The Lily)이라는 섹션이 있는데, 최근에 실린 한 기사가 다수의 강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그 기사의 제목은 “‘나는 엄마이기를 선택해야 했다’: 보육기관 및 여름 캠프의 중단으로 노동인구에서 밀려나는 여성”이다. 부제는 “부모가 다 감당할 수 없을 때, 먼저 사라지는 건 대체로 여성의 유급 노동”이었다. 기사의 배치 자체가 “이런 일이 여성에게 일어난다. 이것은 여성의 문제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들에 대해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들었다. 다시 말해, 남자들의 행동이 어떤 식으로 여자들에게 더 많은 부담이 되는가, 그리고 강간당하지 않고, 구타당하지 않고, 살해당하지 않기 위해 여자들은 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따위의 이야기 말이다. 전에 나는 이 지면에서 가해자의 존재를 지우기 위해 수동태와 모호한 언어를 사용하는 관행에 대해 쓴 적이 있다. 문법을 바꾸면 어떤 문제에 대해 뭔가를 하거나 멈추는 것이 누구의 책임인지를 바꾸게 되고, 결국 이야기의 주체가 누구인지가 달라지게 된다.

나는 ‘백합’에 실린 이 기사를 보고서, 제목을 바꾸어 남성들이 볼 만한 곳에 배치하고 싶었다. 아니면 누군가 남성들이 내리는 결정과 그 결정으로부터 그들이 어떤 혜택을 받고 있는지 인터뷰를 해서 남성들을 위한, 남성들에 관한 이야기를 써서 싣는 것을 보고 싶었다. “나는 공평한 양육 분담을 거부했고, 내 아내가 노동인구에서 밀려나도록 일조했다”라든가 “이기적인 놈팡이가 되어 자기도 모르게 결혼과 직업을 동시에 망치는 길” 따위의 표제를 달고 말이다. 어쩌면 씩씩한 여성란의 기사 풍으로, “선택적 망각이 가부장제를 영속하는 내 전략, 당신도 분명 그럴 것!”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남성란에 실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도 『뉴욕타임즈』의 기사가 그런 종류의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절반 가까운 남성이 홈스쿨링을 거의 전담한다고 말한다. 3퍼센트의 여성이 동의한다.”

‘백합’에 실린 특집기사는 보육 서비스가 여성에게 필요하다고 보는 오류에 빠지는데, 그 전제는 양쪽 부모 모두가 자식을 돌보는 것이 당연하다가 아니라, 자식을 보살피는 것은 여성의 책임이고, 남성이 여성에게 부여한 책임이라는 식이다. 그 기사는 남편은 집에 있고 자신은 업무가 과중한 직장에 다니던 한 여성이 일을 그만둬야 했던 사연에 초점을 맞추는데, 그 이유는 남편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으려 하면서, 종종 ‘학습된 무기력’이라 불리지만 사실상 ‘전략적 무기력’에 가까운 것을 이용하여 자신은 아무것도 못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남편에게 아무 도움도, 휴식 시간도, 확실한 종료 시간도 없는 12시간의 육아노동을 감당해달라고 요청할 수 있었을까? 그녀는 자기 가족이 그렇게 살아갈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없었다. 남편에게 요청한다 해도, 남편이 해낼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왜 (일하는) 한쪽 부모가 (일하지 않는) 다른 부모에게 육아를 요청해야 하는가? 말 그대로 수십억명의 여성이 날이면 날마다 하는 일인데, 어째서 무슨 혹독한 시련이라도 되는 것처럼 비춰지는가? “우리 지역의 남성, 제 아이 못 돌봐”라는 헤드라인은 어디에 있는가?

하와이주 여성 지위 향상 위원회가 최근 발표한 ‘코로나19에 즈음한 여성주의 경기 회복 계획안’은 이 문제를 훌륭하게 대변한다. “여성과 결부되고 여성에게 기대되는 돌봄활동이 경제 생산 수행에 필수적임에도 불구하고, 경제 생산과 분리되어 있음으로 인해 여성을 사회 구조적으로 종속시킨다. 이 때문에 여성은 같은 인종 및 원주민 집단, 그리고 여러 경제 집단 내에서 가장 주변적인 위치에 내몰린다. 그 예로 하와이 원주민 여성은 하와이 원주민 남성보다 경제적으로 취약하여, 일반 남성이 1달러를 벌 때마다 70센트를, 하와이 원주민 남성이 1달러를 벌 때마다 79센트를 번다. 사회적 돌봄시설 없이는, 또 돌봄활동을 분담하도록 남성을 후원하고 장려하지 않는다면, 여성들은 하와이의 경제활동에 결코 동등하게 참여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지금 우리가 팬데믹을 겪고 있다는 것과, 그 팬데믹의 경험이 인종과 계급의 구분선에 따라 다르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가부장제 팬데믹이라고 불릴 법한 것과도 서로 교차한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가부장제라는 이름의 팬데믹은 질병의 확산과 영향력을 증폭시키는 행동을 하거나 혹은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팬데믹을 훨씬 더 악화시켰고, 가부장제가 여성에게 늘 하는 방식대로 폭력을 휘두르고 돌봄의 책임을 전가함으로써 여성을 응징해왔다.

여기 미국에서, 인구 비례와 불균형하게 흑인과 갈색 인종이 많이 죽고 있는 팬데믹의 와중에 무제한의 자유를 험악하게 요구하는 사람들이 백인이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가부장제 팬데믹은 악의에 찬 백인성과도 상통한다. 좋은 소식은 코로나19의 경우와 달리, 젠더 문제에 대해서는 치료약이 무엇인지 우리가 안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페미니즘이다. 지금 남성용 초대형 사이즈의 페미니즘이 필요하다. 그리고 덧붙이자면, 페미니즘은 인권의 부분집합일 뿐이며, 코로나바이러스와 여타의 거의 모든 문제에 대해 무엇을 할 것인가의 질문에는 보편적 인권과 절대적 평등이 응답할 것이다.

번역: 이종임(李鍾姙)/영문학 박사, 네브라스카대학 영문과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