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의 목소리
일상을 탐구하는 계기가 된 여름호
▶ 여름호를 받아들고 말 그대로 ‘대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 읽고 싶고 기대되는 글만 해도 한두꼭지가 아니었다. 그중 ‘대화’ 「근대 한국어, 그 파란의 역사와 희망찬 오늘」을 읽으면서는 학자들의 열린 시각을 느꼈다. 정확히는 자신의 학문과 연결된 ‘사람’에 대한 열린 시선이리라 생각한다. 특히 최경봉 교수가 민주사회의 유지와 관련해 국어정책을 고민해야 하며, “낯선 말이 새롭게 들어와 쓰이게 된 이유와 맥락을 파악하”다보면 “그 말을 쓰는 사람의 상황과 마음을 이해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말한 대목이 인상적이었다. 언어가 차별의 도구가 되지 않아야 한다는 바람, 언어의 존재 이유는 결국 소통이라는 인식이 대화 전반에 묻어났다.
김소라의 「디지털 성폭력, 분노를 넘어 분기점으로」는 막연하게 ‘나쁜 일’로만 알기 쉬운 디지털 성폭력이 언제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되었고 법률 개정 및 판결 등이 어떻게 이루어져왔는지를 상세하게 전하는 장점이 있었다. 짧지 않은 성착취의 역사를 ‘팩트’에 기반해 정리해준 것 같아 고맙고 의미있었다. 앞으로 이에 관해 이야기할 기회가 생긴다면 이 글을 인용하는 것이 효과적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여성이 무언가를 하기로 결심했을 때 이를 가로막는 법이나 제도는 이제 거의 사라졌다. 예컨대 최소한 법에서는 여성이 어떤 직업이든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권력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하고 싶지 않은 것을 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라는 누군가의 표현에 기대자면 여성에게는 아직 권력이 없다. 이때 권력은 높은 자리에 올라선다는 일차원적 의미가 아니라, 자기 삶을 스스로 만들어갈 수 있는 생존과 존엄의 힘을 말한다. 김소라의 글을 읽으며 여성이 이 권력을 가지려면 피해와 가해를 만들어낸 사회조건과 그 조건을 방기해온 구조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올 상반기에는 여러 일이 많았다. 특히 ‘일상’이 바뀐 일상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물음이 중요한 시기였는데, 지난호를 읽으며 나의 일상을, 우리의 일상을 탐구해볼 수 있어서 뜻깊었다.
이지안 audskd26@naver.com
시(詩)라는 처방전: 코로나 시대의 문학
▶ 봄은 언제나 짧게 느껴지지만 지난봄은 유독 그랬다. 학교라도 다녔으면 좀 나았을까. 학교를 옮긴 후 첫 학기였는데, 나는 말 그대로 이방인이 된 것 같았다. 내게 필요한 것은 지식이 아니라 위로였는지 여러 글을 찾아 읽으면서도 공허했다. 그렇게 여름호를 펼쳤을 때, 위로가 되는 글이 가득했다. 그중 이희형 시인의 「나는 이제 예전만큼 자주 걷지 않지만 방 안에서도 산책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를 읽고 마음에 열이 올랐다. “나는 이게 꼭/누군가의 빈자리 같은데요”라는 구절에서 잠시 책장을 덮고 핸드폰을 꺼내 연락처를 하나하나 내려다봤다. “만나지 않아도 헤어지는 사람들이” 있다는 구절에서는 울음을 참아야 했다. 우리는 잃어버린 시간 속에서 만나지 않고도 헤어지는 중인 게 아닐까. 하지만 다행히도 “느리게 날아가는 꽃잎들”은 “그의 등 뒤로 따라가 묻”는다. “이게 정말 끝은 아니라는 듯이” 가는 걸음을 붙잡는다. “우리는 약국에 가야 합니다”라고 끝맺는 이 시가 내게는 약국에서 지어주는 처방전인 것만 같았다.
소설란에서는 이름만 보고도 설레는 작가를 발견했다. 「실버들 천만사」는 권여선이 현재적인 감수성으로 ‘지금-여기’에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소설의 제목은 김소월의 시 「실버들」에서 온 것일 텐데, 이 시의 화자는 실버들이 “천만사” 늘어져 있음에도 붙잡을 수 없이 “가는 봄”을 아쉬워하고 있다. 그 아쉬움은 “돌아서는 임”으로, 여위어가는 자신의 몸으로 이어진다. 소설에서 반희는 채운과 “눈에 보이지 않는 닮음의 실”을 끊어내고 싶어한다. “맛있는 거 있을 때 눈치 안 보고 막 먹는 거, 그걸 못해”라고 말하게 되는 삶, 주변의 관심과 간섭이 폭력과 모욕이 되는 삶. 엄마는 그런 삶을 딸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리라. 하지만 반희는 차라리 사랑하자고, “밧줄로 꼬아 서로를 더 단단히 붙들어 매자”고 다짐한다. 이 결말이 뭉클하다. 믿고 볼 수 있는 작가라고 말할 때 ‘신뢰’는 ‘애정’보다 높은 차원의 찬사라고 생각한다. 애정이 좋은 글을 향한다면, 신뢰는 좋은 글을 쓰는 작가에게 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권여선을 신뢰한다.
하혁진 ericablair@naver.com
‘자기돌봄’, 그리고 한반도 평화에 대한 새로운 시각
▶ 특집에서 신샛별의 글은 ‘돌봄 민주주의’라는 개념을 통해 한국문학 속 페미니즘에 대해 분석한다. ‘클럽 창작과비평’의 다른 분들 리뷰를 보니 어떤 이들은 그 의견에 공감하기도, 어떤 이들은 문학의 정치적 효능감 자체에 거부감을 표하기도 했다. 나는 굳이 페미니즘을 꺼내지 않더라도 모든 문학은 정치적 역할을 수행한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디스토피아적 서사일지라도 작품이 공유되는 순간, 저자와 독자는 같거나 다르거나 혹은 완전하게 새로운 어떤 방향성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신샛별의 글로써 나도 새롭게 눈뜬 부분이 있다면, 그건 김유담 소설에서 풀어낸 ‘지방-청년-여성’의 시각이었다. 그 피와 땀, 노력과 한계에 공감할 수 있었다. 한편 “자신의 기분을 살피면서 살고 있”는 듯한 청년들도 ‘자기돌봄’이 박탈되는 순간을 경험하게 될지 모른다. ‘자기돌봄’을 하지 않으면 그대로 ‘자기타락’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한 위계형 성폭력 사건만 보아도 그렇다. 성공주의 신화와 위계질서 속에서 박탈당한 ‘자기돌봄’의 기회를 바로잡고자 하는 이들이 있기에, 우리 문학이 싸워야 할 것이 아직 많다.
임종석 전 대통령 비서실장과의 대담도 흥미롭게 읽었다. 탈북민 친구를 만나게 된 뒤로 그전보다 남북관계 뉴스에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 대담은 관계 부처의 목소리를 거친 해설이 아니라, 나로선 처음으로 들어보는 직통의(?) 목소리였다는 점에서 더욱 흥미롭고 신선했다. 통일 문제에 있어 ‘대체 정부는 뭘 하고 있는 건가’ 식으로 짧은 생각을 해왔던 게 부끄럽기도 했다. 특히 우리의 역할은 북한이 고립되기보다 외부세계와 계속해서 대화할 수 있도록, 그리고 비핵화 의지를 쌓아갈 수 있도록 신뢰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라는 점, 그리고 미국에도 북한 문제에 대해 구체적인 이슈를 통해 관심을 환기해야 한다는 이야기에 동의가 되었다. 임 전 실장이 몸담은 경문협과 같이 민간단체들이 징검다리 역할을 해줄 때 신뢰관계가 만들어질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한반도 평화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게 해준 글이다.
김유나 dbsklife@naver.com
근거 있는 주장의 매력
▶ 여름호를 받아들고 목차만 보았을 때는 ‘논단’의 「“우리는 정상으로 돌아갈 수 없다”」와 「디지털 성폭력, 분노를 넘어 분기점으로」가 눈에 띄었다. 두 글도 좋았지만, 막상 모두 읽고 나니 그보다도 김종엽의 「촛불혁명, 제21대 총선 그리고 87년체제」가 머릿속에 또렷이 맴돈다. 명확한 근거를 지닌 주장의 매력을 느낄 수 있었다. 사실 총선 당시에는 선거에 별 관심이 없었다. 코로나19로 인해 생존이 주된 관심사이다보니 정치는 뒷전이었다. 비례대표제에 대해서도 또 정치권 싸움이구나 정도로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뒤늦게 이 글을 통해 문제의식을 가질 수 있었다. 김종엽은 위성정당 창당으로 꼼수를 부린 통합당과 느슨한 기준으로 정치현장을 보도한 언론매체, 그리고 형식적인 태도로 해석에 임한 선관위를 비판한다. 나아가 스스로 주도한 선거법 개정의 효과를 무산시키는 행동을 한 민주당의 잘못을 꼬집고, 규범적 태도하에 참담한 성적표를 받아든 정의당에도 의문을 제기한다. 특히 잘못된 일을 두고 ‘꼼수’ 정도로 칭하며, 비겁하지만 가능한 일이라고 바라본 언론과 국민에 질타를 던진 대목에서 반성 및 공감을 했다. 그러나 모든 논리에 동의되진 않았다. 특히 국회의원 총수 확대에 관해, 필자는 의원 수가 늘면 특권이 줄어들고 경쟁도 치열해져 사회가 나아질 것이라 말한다. 그런데 이건 너무 긍정적인 생각이 아닌가 싶다. 그만큼 나를 포함한 국민 대다수가 국회의원을 신뢰하지 않는 까닭이 있다는 생각이다.
‘현장’란에서는 콜센터 이야기를 전해준 김관욱의 글이 인상적이었다. 얼마 전 『전태일 평전』을 읽으며, 노동자들의 이야기에 슬펐고 전태일 열사의 분신 이후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던 평화시장 노동환경에 경악했다. 그런데 1960년대 평화시장을 외면한 이들과 내가 크게 다르지 않음을 깨달았다. 구로구 콜센터의 코로나19 집단감염 기사를 접했을 때 나도 경계심과 원망이 먼저 들었던 것이다. 김관욱의 글을 읽으면서, 콜센터 노동자들이 과도한 업무량에 혹사당하고 고객으로 인해 정신적으로 힘들어하며 불안정한 고용환경에 처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런 생각부터 한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문재인정부의 정책 중에 마음에 들지 않는 것도 많지만 노동자의 인권은 향상했다는 생각이 드는 한편, 사각지대의 노동자들이 더는 외면당하지 않았으면 한다. 어려울 때 더 무너지기 쉬운 인권의 자리를 지킬 수 있기를 염원한다.
김민선 fromserena@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