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의 목소리
지구라는 극장, 코로나19라는 리허설
▶ 기후위기 등 치명성과 보편성의 정도가 한층 심각할 다음의 위기를 앞두고 우리는 코로나19라는 ‘리허설’을 치르고 있다. 이 상황에서도 어떤 이들은 자신과 다가올 위기가 무관하다고 여길지 모른다. 미국의 경제학자 로버트 라이시가 말한 새로운 4계급 중 ‘원격근무가 가능한 노동자’(The Remotes)들이 체감하는 코로나19의 영향은 ‘잊힌 노동자’(The Forgotten)나 ‘임금을 받지 못하는 노동자’(The Unpaid)들에 비해 분명 미미할 수밖에 없다. 위기의 영향은 각자의 위치에 따라 상이하게 나타나며, 위기는 그러한 균열과 불평등을 확대 재생산한다. 하지만 작용/반작용이라는 세상의 이치로부터 누구도 완벽히 자유로울 수 없는바, 각자의 좌석 번호만 다를 뿐 우리가 지구라는 그리 크지 않은 극장에 함께 갇혀 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지난호 특집 ‘코로나19가 던진 과제들’이 인상 깊었다. 특히 황정아의 글은 ‘통제냐 자유냐’ 프레임에서 느껴온 어렴풋한 갈증을 탁월하게 해소해주었다. 그간 ‘ K-방역’을 국가의 과도한 개입이나 자유 침해로 해석하는 해외 언론의 지적에 불만이 있었고, 코로나19를 ‘우한폐렴’이라 부른 국내 일부 언론이(이들을 위한 ‘백신’이야말로 시급하다) 그 지적을 활용하는 데서도 갑갑함을 느꼈다. 황정아는 이들 담론에 담긴 “국가 비판의 상투성과 둔탁함”을 짚고 있기에 간지러운 곳을 긁어주는 듯 시원했다. 또한 “민주적이고 대중적인 통제”의 작동을 고려하며 “고양되고 응축된 민주주의의 경험이 방역에 필요한 유대와 책임을 낳”은 것이라는 대안적 설명도 상당한 설득력이 있었다. ‘방역과 민주주의’라는 키워드 속에서 풍성한 사유의 공간을 제공해준 글이다.
세상에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기 때문에 누구도 불편해하지 않을 무해한 글이 많다. 반면 『창작과비평』이 선사하는 다양한 차원의 자극은 매호 특집처럼 또렷한 관점으로부터 비롯된다. 독자들이 읽고 싶어할 만한 글뿐 아니라 읽어봐야 할 글까지 제시해줄 수 있는 이 잡지의 존재가 귀하고 유익하다.
배병진 hworangi@naver.com
다양한 논의가 촉발한 고민들
▶ 코로나19로 인해 포기한 것도 많지만 나 자신에게 깊게 빠져볼 시간이 생기기도 했다. 그 시간을 좋은 글과 함께했으면 하는 바람에서 처음 계간지를 읽게 된 것이 나에겐 뜻깊은 일이다. 특집 중 학교와 농촌 문제를 다룬 글들을 읽으면서는 내가 이러한 ‘장소’들에 느껴온 거리감과 무관심, 어쩌면 그러한 무관심에서 비롯한 현재의 결과를 목도한 듯했다. 다만 정은정의 글에서 농촌의 디지털화가 핵심문제는 아니라고 지적한 대목에선 생각이 달랐다. 50대가 농촌의 ‘젊은이’인 현실을 인정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렇다고 10년, 20년 뒤가 오지 않는 것은 아니다. 도시의 네트워크화는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가속화될 것이고 농업 생산자와 소비자 간의 소통체계에 더 큰 격차가 발생할지 모른다. 미래를 준비할 필요성을 생각한다면 디지털화에 발맞추려는 노력도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리베카 솔닛의 글을 통해서는 성차별적 상황(가사분담 문제)을 인지하더라도 그 속에 내재한 남성 본위의 논리(가사노동에 대한 문제제기는 여성의 몫)에 대해서는 감지하지 못할 수 있음을 깨닫고 아찔해지는 기분이었다. ‘마스크 쓰지 않는 남자들’의 당당한 모습을 보자니 절망스럽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솔닛은 결국 페미니즘이 답이라 하는데, 말처럼 쉬운 문제는 아닐 듯하다. 여러 흑인서사를 예로 들어 ‘체제적 인종주의’를 비판하는 한기욱의 글도 기억에 남는다. BLM 운동에 흑인만 아니라 백인들의 참여가 높다는 점이 인상적이었고, 세심한 논의를 통해 인종주의의 현재적 변모를 알게 되었다. 한편 오늘날 인종주의는 체제 자체의 내부 논리만으로는 설명되기 어려우며 ‘진실은 없고 모든 견해는(혐오와 차별조차도) 존중받아야 마땅하다’는 새로운 조류와 접목되고 있지 않은가 한다. 무수한 교육에도 인종차별이 지속되는 현실의 세목들을 더 살피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다.
김세진 docusim37@naver.com
오래된 것들을 외면하지 못하는 마음
▶ 시골에서 자란 나는 ‘시골틱한’ 소설에 일종의 콤플렉스가 있었다. 요즘 애들답지 않다거나 젊고 활기찬 문학도의 모험심이 안 보인다는 이야기를 간혹 들어서일 것이다. 서울로 대학을 다니지만 나는 여전히 ‘시골’에 사는데, 이렇듯 시골에도 엄연히 사람이 살고 있음에도 어째서 시골 이야기가 시대착오적인 것이 되어버리는지 의문은 접어두고 한동안 ‘도시적인’ 이야기를 쓰려고 노력했었다. 내가 느끼기에 현대소설의 대세는 ‘시니컬함’이었고, 그것은 논두렁이 아니라 아스팔트 위에서, 울창한 숲이 아니라 빌딩숲 안에서 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공간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황정은, 김애란, 최은영에게서 배웠다. 내 안에 깊게 자리한 ‘시골 감성’과 ‘요즘 세대적인’ 생각의 충돌이야말로 지금 내가 쓰고 싶고 잘 쓸 수 있는 이야기라는 것을 깨달았다. 공선옥 소설 「저물녘」의 인물이 더욱 와닿은 까닭도 ‘오래된’ 사람을 외면하지 못하는 나의 이런 마음 때문이리라. 이 소설의 ‘나’는 시종일관 고독하다. 누구도 그녀의 말을 제대로 들어주지 않는다. 잇새에서 나온 주름진 이야기는 갈 곳 없이 떠돌다 사그라진다. 그런 그녀가 소통할 수 있는 상대는 고등학교 동창인 ‘현주’뿐이지만, 코로나로 인해 사회적 거리두기가 한창인 세상에서 그녀들이 마음 편히 울고 노래하고 이야기할 곳은 찾기 힘들다. 홀연히 말을 타고 떠나버린 배롱나무집 ‘둥덩이양반’에게 필요했던 것은 굿이 아니라 함께 술잔을 기울일 친구였을지 모른다. 진부한 말이지만 위로와 공감이었을지 모른다. 언제까지 코로나가 지속될지 모르는 불안한 나날이다. 이제는 마스크 없이 외출하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 모두가 힘들 수밖에 없지만, 적어도 외롭지는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소설을 곱씹는다. 시란에서는 창비신인시인상을 받은 유혜빈의 「오늘 태어나는 말들에게」를 인상 깊이 읽었다. 사람과 사람을, 삶과 기억을 잇는 ‘말’이라는 존재에 대해 감각적으로 사유한 시다. 어떤 형태로든 언어 없이 살아갈 수 없는 우리에 대해, 그리고 내 뜻과 상관없이 흘러가 어떻게 변형되고 살아남을지 알 수 없는 말에 대해 새삼스레 생각해본다. 사람에게서 “태어나는” 말들을 어떻게든 포용하는 문장들에, 물렁물렁한 위로를 받는다.
강승혜 hushtella@naver.com
‘자연 성장 ’이라는 개념은 어떨까
▶ 내가 전혀 알지 못했던 인물의 이야기를, 그의 사후에 전해 듣는 건 묘한 기분을 불러일으킨다. 고 김종철 선생을 추모한 정지창의 글. 『녹색평론』에 대해서는 이름만 들어보았을 뿐 그 역사나 발행인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다. 그럼에도 산문을 읽으면서 고인의 성품과 얼굴이 자연스레 그려지는 듯했다. 필자의 필력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고인의 행적이 그만큼 일관되게 숭고한 가치를 향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사회는 경제에 대해서는 ‘성장’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자연에 대해서는 현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을 최상의 미덕으로 여기는 듯 보이기도 한다. 이제는 적극적으로 다른 언어를, 예컨대 ‘자연 보호’가 아니라 ‘자연 성장’이라는 개념을 도입하면 어떨까. 자연을 풍성하게 되살려나가야 한다는 인식을 가져야만 거대한 물질의 파고에 맞서 삶의 터전과 인간의 존엄을 지킬 수 있을 것 같다. 김종철 선생도 이 무너진 균형을 맞추기 위해 자연의 추에 무게를 더하는 삶을 살다 가셨다. 끊임없이 공부하고 주위 사람을 설득했던 선생의 여정을 읽으며 나는 니체의 『선악을 넘어서』 속 한 구절을 떠올렸다. “자신에게 시련을 주어라. 아무도 모르는. 오직 증인이라고는 자신뿐인 시련을.”
기본소득 논의로 채워진 대화도 흥미롭게 읽었다. 각기 다른 관점의 네 학자들이 서로의 견해를 논리적으로 반박하면서 본인의 입장을 명료하게 나타냈고, 기존 논의를 잘 알지 못하는 독자들도 충분히 따라가고 이해할 만큼 구체적이고 상세한 이야기가 오갔다. 재난지원금 이후 기본소득의 정책화 가능성이 높아지는 듯했지만 아직은 교착상태에 있다. 이는 사안의 이론적 문제와 실증적 문제의 간극이 너무 커서인 것 같다. 이론적 문제가 철학적・사회적・정치적・경제적 프레임에서 논의된다면, 실증적 문제는 정책의 혜택을 받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서로 다른 감각과 행태에 연관된다. 그러한 만큼 기본소득 정책의 도입은 코로나바이러스 상황을 고려해가면서 더 많은 논의가 이뤄져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깊이 있는 주제를 다룬 글들을 통해 그만큼 많은 고민과 의문을 품을 수 있어 유익한 지난호였다.
이주룡 sunul13@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