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대화

 

기후위기와 체제전환

 

 

강경석 姜敬錫

문학평론가. 본지 편집위원.

 

김선철 金善哲

사회학자. 기후위기비상행동 집행위원.

 

채효정 蔡孝姃

정치학자.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 저서 『대학은 누구의 것인가』 등이 있음.

 

정건화 鄭建和

경제학자. 한신대 교수. 공저 『한반도 경제론』 등이 있음.

 

 

강경석(사회) 한해가 가도록 코로나19 사태가 수그러들 기미가 없습니다. 『창작과비평』은 올해 코로나19에 관한 다양한 기획을 선보였는데, 이 재난이 환경파괴로 인한 기후위기 문제와 불가분의 관계라는 사실에는 국내외 전문가나 일반 할 것 없이 공감대가 형성된 듯합니다. 코로나19 사태가 기후위기라는 임박한, 더 거대한 위기의 리허설에 지나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지요. 이제 이러한 위기를 야기한 자본주의 세계체제를 전환하지 않고는 해결이 어렵다는 인식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이번호 ‘대화’에서는 기후위기와 체제전환이라는 문제를 우리의 현실을 중심으로 다뤄볼까 합니다. 최근에 논란이 된 ‘한국형 그린뉴딜’도 따지고 보면 겉포장과는 달리 기후위기 대응이라기보다 기존 질서 내에서의 산업재편 방안 또는 신성장 동력으로 제시된 상황인데, 시장주의가 만들어낸 위기를 시장적 해법으로 풀 수 있는가에 대한 회의가 적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후위기와 체제전환의 문제를 국내에서 치열하게 고민하고 또 행동해온 세분을 모셨습니다. 본격적인 대화에 앞서 독자들께 인사 겸 각자의 최근 관심사나 문제의식에 대해 간단히 소개해주시면 어떨까요?

 

왼쪽부터 정건화 채효정 김선철 강경석 © 김준연

왼쪽부터 정건화 채효정 김선철 강경석 © 김준연

 

정건화 경제학을 연구하는 입장에서 기후위기에 경제학자들의 책임이 크다는 생각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기후위기가 분명한 사실임에도 경제학자들이 발언하지 않으면 비현실적인 것으로 치부된다는 생각도 들고요. 그래서 경제학자로서 기후위기 시대에 걸맞은 대안적 경제를 적극적으로 모색해야겠다는 반성을 하고 있습니다. 원래는 노동경제학을 전공했는데 안산 지역의 산업단지, 시화호 오염 문제, 이주노동자 문제 등 지역사회 연구를 하다보니 지역의 장소성이나 지역경제 활성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로컬이 대안’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열심히 ‘경제학의 생태적 전환’을 고민 중입니다.

 

강경석

강경석

채효정 저는 정치학 중에서도 정치철학을 전공했는데, 생태정치·생명정치를 연구하면서 자연스럽게 기후위기로 관심이 이어졌습니다. 생태 문제에 대한 대안적 전망 없이는 학문적 전망까지 없어지는 상황이기도 하고요. 특히나 몇년 전에 강원도의 농촌으로 삶의 근거지를 옮기면서 이러한 문제를 더욱 긴급하고 절박하게 체감하게 되었어요.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저의 길을 찾아나가며 이에 대한 발언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김선철 미국에서 사회운동을 공부하며 그린뉴딜이 거대한 사회운동으로 성장하는 것을 지켜봤습니다. 2010년대 내내 아래로부터의 운동이 고양되는 걸 보면서 기후 문제가 이후 우리의 운명을 결정할 중요한 사안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죠. 그런데 사회운동을 가르치기만 하니까 한계가 느껴지더라고요. 그래서 ‘데모를 하자’고 생각해서 귀국했고(웃음) 딱 1년이 지났습니다. 지금은 ‘기후위기비상행동’ ‘에너지노동사회네트워크’ 같은 단체에서 일하며 에너지 전환 문제, 그리고 근래에 실종되어버린 공공성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후위기를 어떻게 인식하나

강경석 세분의 공통점과 차이점이 적절하게 배분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어 오늘 대화가 더욱 기대가 됩니다. 코로나19는 인수공통 감염병이고, 무분별한 개발이 생태계 교란으로 이어져 발생했다는 공감대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적지 않음에도 캘리포니아 산불 같은 대형 재해가 없어서인지 국내의 체감 또는 실감 정도는 몹시 낮은 것 같아요. 전문가들도 해외 사례를 더 많이 인용하는 실정이고요.

 

김선철

김선철

김선철 사실 기후위기에 대한 한국인의 인식 수준은 상당히 높습니다. 여론조사를 해보면 80~90퍼센트 이상이 기후변화가 실재한다고 응답하고, 그것이 큰 위협이 될 것이며, 그 문제를 만들어낸 것이 인간이라고 생각하죠. 미국이나 유럽 일부 국가에서는 기후변화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비율이 훨씬 높거든요. 다만 문제는 말씀처럼 체감도가 낮아서인지 한국인들이 행동과 실천에 나서지 않는다는 거예요. 이러한 실천이 돈이 되는 것도 아니고 자식들 좋은 대학 보내주는 것도 아니니까요. 아래로부터의 목소리는 이제야 조금씩 나오는 상황이고, 정부 등 위로부터의 목소리도 그 심각성에 대한 인지가 결여되어 있습니다. 국제적 규범이 있기 때문에 말은 하지만 실제적인 조치가 거의 없죠. 한국에 대형 재해가 없다고 하셨지만, 한국은 이미 기후위기를 심각하게 겪고 있습니다. 이번 여름 역대 최장 54일의 장마가 이어지며 한강이 범람할 위기에 처했고, 산불도 90년대에 비해 발생빈도가 열배 이상 높아졌어요. 전세계 평균 기온이 1800년대 후반보다 1℃가 채 안 되게 상승했음에도 지금 이 난리인데, 한국은 1912년에 비해 1.8℃가 올랐어요. 두배 가까이 올랐음에도 한국이 피해가 적은 건 사계절이 뚜렷한 온대지역이라 연간 기온의 변동폭이 크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한국은 여름보다 겨울의 기온 상승이 크다는 게 특징인데, 지난겨울은 예년보다 평균 3℃가 높았어요. 그랬더니 겨울에 죽었어야 할 곤충과 벌레의 알이 살아남아서 봄에 창궐했죠. 이런 수많은 문제가 있고 앞으로도 이어질 텐데, 문제에 대응하는 수준이 낮아서 큰일입니다.

 

채효정

채효정

채효정 제가 사는 강원도 인제는 겨울에 강이 업니다. 사람이 걸어서 건널 수 있을 만큼 겨우내 꽁꽁 얼어요. 그런데 작년에는 정말 단 하루도 얼지 않더라고요. 아니나 다를까 올해 병충해 피해가 엄청났고요. 저도 블루베리 농사를 완전히 망쳤고 이웃 농가들도 어느 작물 가릴 것 없이 흉작이었어요. 벼농사 수확량도 20퍼센트 정도 감소했다니 이러한 체감도가 도시 지역과는 굉장히 다르죠. 한국인이 기후위기에 대한 인식 수준이 높다고 하셨는데, 그것도 도시와 농촌 지역 사이의 인식과 감각 차이가 무척 크다고 봅니다. 우리를 움직이게 하려면 당장 불편한 게 있어야 하는데 도시에서는 ‘1.5℃ 변화’를 머리로는 알아도 당장의 불편함으로 체감하지는 못하거든요. 그나마 올해 50일 넘게 장마가 이어지면서 도시 지역에서도 기후변화를 느꼈지만, 반대로 50일 넘게 비가 안 올 때 도시 사람들은 이런 변화를 잘 몰라요. 서울에서는 비가 안 오는 날이 야외 활동하기 좋은 날일지 몰라도 농촌에서 비가 50일 안 오면 난리가 납니다. 눈앞에서 작물들이 타들어가는 걸 봐야 하고, 물 대는 일도 여간 힘들지 않고요. 그런데 공론장에서는 이 위기감이 잘 확산되지 않습니다. 이른바 ‘인플루언서’라는 사람들, 신문에 칼럼 쓰는 사람이나 연구자들도 대부분 도시에 살고 있으니까요. 시민사회의 활동이 주로 전문가 중심의 포럼과 토론회 같은 형식에 치우친 것도 문제입니다. 저는 이것이 노동·민중 진영의 실천력이 계속 분쇄되어온 결과라고 보는데, 그래서 싸움의 현장을 만들어내거나 조직해내지 못해요. 미국은 송유관투쟁을 통해 그린뉴딜 같은 거대담론으로 나아간 반면, 한국은 제주 제2공항 반대투쟁 등 지역 차원의 싸움들이 있긴 하지만 이런 저항들이 기후위기라는 의제와 잘 연결되지 않습니다.

 

강경석 도시에서도 야외 노동자들은 기후변화를 좀더 직접적으로 체감할 것 같습니다.

 

채효정 혹한과 혹서에 가장 취약한 이들이 노동자예요. 한해 2400여명이 산업재해로 사망하는데 너무 더운 날, 너무 추운 날 야외에서 일하다 죽는 일이 정말 많습니다. 홍수가 나고 불이 나도 가난한 노동자가 더 큰 피해를 입는 게 사실이죠. 기후위기는 경제위기와도 직결되니까 노동자들에게는 곧바로 해고와 실직의 위기로 다가와요. 그러면 그린뉴딜이 노동자의 안전장치가 되어야 한다는 논의가 나와야 하는데, 한국의 그린뉴딜은 지나치게 에너지정책으로 협소화되어서 ‘적록동맹’ 담론이 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강경석 국내적인 체감도 문제지만 세계적으로 보면 G20 국가의 온실가스 배출량이 전체 80퍼센트를 차지한다는데, 그렇다면 거기에서 한국의 책임도 상당하다고 봐야겠지요?

 

정건화

정건화

정건화 우리가 고도성장을 이룩한 것은 맞지만 그 결과로 기후악당국가가 된 것도 분명합니다. 이는 여러 지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데요, 미세먼지 배출량, 일인당 플라스틱 소비, 매년 살처분하는 동물 수만 봐도 쉽게 알 수 있어요. 문재인정부가 그린뉴딜을 이야기하는 와중에도 한국전력공사는 베트남에 어마어마한 규모의 붕앙 2 석탄화력발전소를 건설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공적 금융기관이나 대기업들이 나라 밖에서 이미 지었거나 건설 중인 석탄화력발전소가 수십곳이에요. 그런데도 기후변화나 환경위기에 대한 인식은 오히려 1970년대에 비해 무뎌진 듯한데 저는 이것을 생태적 문맹(ecological illiteracy)이라고 표현합니다. 우리나라만 그런 건 아니고 전세계적인 현상이죠. 이미 1960년대에 레이철 카슨(Rachel Carson)의 영향으로 DDT 사용이 중단되는 등 ‘상호연관된 생태계’라는 인식이 형성되었는데 2000년대에 들어 기후변화가 한층 심각해졌음에도 오히려 이를 부정하는 흐름이 강화되었습니다. 미국, 영국, 호주 등에서 시행한 여론조사 결과에서 ‘화석연료 사용이 기후변화를 초래한다’는 데 동의하는 비율이 2000년대 들어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고요. 기후변화가 초래할 심각한 재앙을 예방하기란 불가능하다고 보고 시스템이 거의 붕괴한 이후 이 위기에 어떻게 적응할지 대비하는 게 낫다는 주장이 제기되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인 듯합니다. 이를 위해선 단순히 환경교육을 강화하는 수준이 아니라 생태적·문명적 전환이 필요한데 쉽지는 않습니다. 특히 우리 사회는 경제적 성장주의라는 담론이 압도적이기도 하고요.

 

한국형 그린뉴딜, ‘아래로부터’ 평가하자면

강경석 세분 말씀을 들으면서 당장 우리에게 닥쳐온 기후위기 징후들 자체도 문제지만 그 실감을 가로막는 환경적·구조적 요인이 적지 않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기후위기 인식 얘기가 나온 김에 우리 정부의 인식에 대해서도 짚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서두에 언급했던 한국형 그린뉴딜에 대한 세분의 평가를 들어보고 싶은데요, 처음에는 인공지능으로 분석·활용 가능한 온갖 정보들을 교육과 산업을 위한 사회간접자본으로 공유한다는 ‘데이터댐’ 중심의 디지털뉴딜이었던 게 태양광, 풍력 같은 재생에너지나 전기차 산업을 육성해 다량의 일자리를 창출한다는 지금의 그린뉴딜로 확장된 것이지요. 이 논의는 중앙정부 차원에서 ‘위로부터의’ 의제로 던져졌는데 지역이나 대다수 민중의 관점 그러니까 ‘아래로부터의’ 시각에서 평가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채효정 정치학적 관점에서 한국형 그린뉴딜은 이미 실패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노동이 없고 여성이 없고 생태가 없기 때문입니다. 노동정치, 여성정치, 생태정치로 확장되지 못하고 경제정책 차원으로만 접근하면 단순한 에너지 전환계획이나 산업구조 변화에 불과하죠. 결국 과거의 ‘녹색성장’처럼 ‘그린 비즈니스’라는 이름으로 또다시 시장과 기업이 독점하고 주도하는 모델이 되어가는데, 그렇게 되면 불평등이 해소되기는커녕 양극화가 더욱 심화되고 에너지 주권마저 자본에 종속되는 위험을 초래할 겁니다.

 

정건화 정말 큰 문제입니다. 특히나 중앙정부 차원의 인식 개선이 시급해요. 지난 10월 17일에 장기저탄소배출전략 수립을 위한 국민토론회가 있었는데 그때 청년들이 단상을 점거했어요. 그 핵심 이유가 2050년까지 탄소배출을 순배출량 ‘0’으로 만들 중앙정부 차원의 의지와 대책이 없다는 것이었어요. 그런 반면에 지역 차원에서는 그나마 의미있는 노력들이 보입니다. 예를 들어 서울시와 서울시 교육청은 지난해 9월 생태적 전환을 위한 공동노력을 선언한 이후에 그린뉴딜·탄소배출 제로·생태전환교육 5개년 계획을 발표하는 등 꾸준한 행보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밖에도 ‘로컬’ 차원에서는 수원, 전주, 성남 등 많은 지자체들이 자원순환, 재생에너지, 지역순환경제 등 다양한 논의를 펼치고 있어요.

 

김선철 중앙정부와 더불어 지역과 지자체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예를 들어 광명시는 2050년 탈탄소를 목표로 하는 ‘광명형 그린뉴딜’을 내놓았고, 구리시의 경우에는 2030년까지 탄소 배출량을 절반으로 줄이겠다는 좀더 적극적인 계획도 세웠습니다. 다만 이런 계획이 긍정적이고 지역의 역할을 장려해야 하는 것도 맞지만 그런 모습만 부각되며 만들어지는 착시효과는 경계해야 할 것 같습니다. 실제로 ‘산업’과 ‘에너지’에서 배출되는 탄소가 3분의 2 이상인데, 이는 결국 중앙정부 소관이기 때문에 기후위기 대응 차원에서 본다면 지방정부의 재량 영역은 거의 없다시피 합니다. 그런데 자꾸 지역 주도로 무언가 잘되고 있다는 착시효과를 노리는 건지는 몰라도 대통령도 지자체의 역할을 계속 강조하고 있거든요. 동시에 한국의 기후정책 담론이 개개인의 실천 차원으로 떠넘겨진 측면도 많습니다. 서울시의 경우 에너지 절약운동의 일환으로 ‘원전 하나 줄이기’ 정책을 진행해 화제를 모았고 결국 원자력발전소 1기가 생산하는 만큼의 전력량 소비를 줄이기도 했습니다. 에너지 소비를 줄이는 일은 중요하지만 큰 그림을 놓고 보면 대단한 약진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또다른 착시효과의 사례는 제주도에서 찾을 수 있는데, 지금 재생에너지 사용 비율이 가장 높은 곳이 제주지만 탄소 배출 증가율이 가장 높은 곳도 제주입니다. 단순히 전기차를 더 많이 타고 재생에너지를 더 많이 쓴다고 탄소 배출이 적어지는 게 아니라는 뜻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지역이 중요하더라도 지역에서 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를 우선 명확히 한 다음에 그 역할을 이야기해야지 지자체나 협치만 부각하면 기후위기 대응 차원에서는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강경석 채효정 선생님이 한국형 그린뉴딜에 노동, 여성, 생태가 없다고 하셨는데 그와 함께 지역에 대한 고려도 없다는 평가가 되겠네요.

 

채효정 ‘로컬’이라는 개념이 ‘글로벌’에 대항하는 진지로 반세계화, 반신자유주의의 의미를 포괄하는 것인데 지금 로컬 개념은 그런 대항공간으로서의 정치적 상상력을 키우기보다는 단순히 각 행정 단위를 정책실행 단위로 두고 지자체 차원의 계획을 수립하라는 식으로만 흘러가서 우려스럽습니다. 이런 식으로는 오히려 중앙이 져야 할 책임이 회피되기만 하고 정작 실천은 더 어려워지는 경우도 많거든요. 지역에는 지역대로 ‘지방토호’나 기득권 세력이 있으니까요. 결국 노동자 민중이 주도하지 못하는 그린뉴딜이라면 지역에서 시작하든 중앙에서 시작하든 시장에 종속된다는 문제가 비슷하게 나타날 거라고 봐요. 오히려 불투명성과 비계획성은 지역이 더 높다고도 할 수 있죠. ‘그건 그 지역 문제’라는 식으로 타자화될 가능성도 있고요. 그렇기 때문에 계급적 연대의 관점이 지역 연대에서도 반드시 필요하고, 그러한 관점에서 국가 전체의 계획을 수립하는 포괄적인 틀로 이어질 필요도 있겠습니다.

 

정건화 뉴딜은 크게 세가지 내용을 담고 있어야 합니다. 당장의 경제 위기를 직접적으로 해결하는 완화(relief) 정책, 경제를 정상궤도에 올리려는 회복(recovery) 정책, 그리고 근본적인 구조를 바꾸는 개혁(reform)이 들어가야 하죠. 지금 논의되는 그린뉴딜에는 이런 면들이 명확하지 않습니다. 특히 개혁 방향에 대한 내용이 턱없이 부족하고, 사회 전체의 다양한 참여를 위한 제언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의 방향이 당장 만들어질 수 없다면 예컨대 노동계도 정규직과 비정규직 프레카리아트(precariat)의 목소리를 함께 반영해야 할 것이고, 다양한 경제 이해관계자의 목소리를 담아내는 노력을 해야겠지요. 물론 지역에 ‘토호’라고 표현될 만큼 여전히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익집단들이 존재하지만, 최근 십여년 사이에는 이른바 거버넌스(협치)의 성과가 축적되었습니다. 이런 풀뿌리 생활정치 영역에서 성장한 정치인들도 존재하고요. 저는 여기에 희망이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지역 주민도 시민사회도 이제 행정과 협력하려는 시도가 필요하다고 봐요. 운동과 행정이 가진 힘을 결합하자는 뜻인데 전환이라는 것은 각성된 시민 개개인만으로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가령 독일은 태양광발전기에 투자했을 때 일정한 소득이 보장되도록 하는 가격·보조금 정책을 시행했는데 이런 뒷받침이 있었기 때문에 평범한 시민들도 은퇴자금으로 각 가정에 태양광발전기를 설치하게 된 거죠.

 

채효정 그럼에도 지역 차원에서 극복할 수 없는 문제가 많은 것은 사실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체제전환의 주체가 기업과 자본이 아니라 노동자 민중이어야 이 프로젝트가 본래 취지에 맞게 안정적으로 가능해진다는 뜻이에요. 지금처럼 노동자가 전환 과정에서 희생이 불가피한 부수적인 피해자 정도로 취급되어 구제책·피해보상책만 논의되는 식이라면 곤란합니다. 또 미국의 1930년대 뉴딜 프로젝트가 성공적이었다고는 하지만 사실 굉장히 가부장적인 방식이었어요. 여성을 가정으로 돌려보냄으로써 노사가 타협을 이뤄내는 등 여성을 배제하는 방향이었기 때문에 기업 노동자의 권익 증진이 다른 존재에 대한 차별과 불평등을 만들어냈죠. 지금 ‘그린’이라는 이름을 붙여 다시 뉴딜을 하자고 하면 그런 과오를 반복하지 말고, 과거의 뉴딜이 배제했던 이들을 전환의 주체로 소환해야 합니다. 그냥 ‘그린뉴딜 하자’가 아니라 어떤 그린뉴딜로 어떤 전환을 할지 명확히 밝히고 그 방향에 대한 논의도 많아져야 해요. 그러지 않으면 생태를 위해 에너지 전환을 한다면서 오히려 생태를 파괴하는 방식으로 개발이 진행되기도 합니다. 가령 대기업들이 대규모 태양광단지를 유치하면서 벌어지는 환경파괴처럼요.

 

기후위기와 분단체제

강경석 세분 모두 강조해주셨듯 어떤 전환인가,라는 문제를 이야기할 때 항상 쟁점이 되는 것 중 하나가 지역에 대한 논의인 듯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기후위기를 논의할 때 가장 자주 누락되는 지역은 아마도 휴전선 북쪽일 겁니다. 한국형 그린뉴딜도 남한에 한정되는 경향이 있죠. 체제전환을 이야기하는 마당에서는 결국 성장주의나 자본주의 문제를 건드려야 하는데, 그 순간 분단체제가 그러한 토론의 진전을 정치적으로 가로막습니다. 남한의 기후위기 대응은 궁극적으로 체제전환을 요청하는 대다수 사회적·담론적 실천들이 그렇듯 분단체제라는 걸림돌에 언젠가는 직면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어찌 보면 이미 당면과제가 되었다는 생각도 들어요.

 

채효정 말씀하신 것처럼 한국에서는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데도 분단체제가 큰 질곡으로 작동하죠. 기후위기 그리고 노동위기와 전쟁위기의 주범이 사실은 기업과 자본으로 동일범입니다. 큰 틀에서 전환을 이루기 위해서는 분단체제라는 우리의 특수조건을 극복해야 합니다. 전쟁체제 위에서 생태사회를 이루기란 불가능합니다. 급진적 사회운동이 밑에서 일어나지 않는 것도 전쟁의 경험이 정치적 상상력을 계속 봉쇄하기 때문이기도 하고요. 프랑스 빠리의 안 이달고(Anne Hidalgo) 시장의 과감한 녹색도시 정책이 자주 소개되지만 그 사람이 사회주의자라는 이야기는 아무도 안 하잖아요. “제대로 된 자전거도로를 갖고 싶으면 사회주의자를 찍으세요” 같은 이야기를 우리 사회에서는 하기 힘듭니다. 그런 것이 분단체제라고 생각해요. 그런 의미에서 한국형 그린뉴딜을 지금의 한반도 차원으로 확대 적용한다면 일종의 식민화 프로젝트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가령 지금 산지나 농지에 태양광 발전단지가 들어서며 여러 문제가 발생하는데, 만약 남북관계가 개선되면 이런 ‘민원유발형 사업’이 북한에서 진행되리라고 충분히 예상 가능합니다. 북한에 ‘에코시티’를 건설한다는 그럴듯한 명분도 만들 수 있고요. 하지만 선진국의 자본과 기술, 후발국가의 자원과 값싼 노동력이라는 도식을 이제는 전환해야죠. 이런 식민주의적 방식이 끊임없이 지구를 파괴해온 요인이라는 걸 한반도 안에서라도 반성해야겠습니다.

 

김선철 실제로 얼마 전 국회에 ‘비무장지대(DMZ) 그린뉴딜공원 남북경협 패러다임’이라는 모임이 있었어요. 거기서 DMZ에 태양광 신기술을 적용해 북한 4400여개 농장에 전기를 공급해주자는 이야기도 나왔습니다. 좋은 취지이지만 이것이 평화가 목적이 아니라 자본의 북한 진출을 노린 계획이 아닐까 싶어 우려스럽기도 했어요. 북한을 값싼 노동이 풍부한 원료 산지로만 보는 경우가 워낙 많으니까요. 또 이런 논의를 한겹 들춰내면 북한에 매장된 희토류나 코발트 같은 희귀광물을 어떻게 많이 가져올 수 있을지와 연관되어 있을 거고요. 기후위기와 분단체제를 연결해 생각해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지점은 우리나라가 에너지적으로 섬이라는 것입니다. 국경을 맞댄 나라들과 서로 에너지를 주고받을 수가 없잖아요. 유럽의 에너지정책이 유연할 수 있는 이유가 주변국들 간에 에너지를 주고받는 게 가능해서입니다. 에너지의 수요-공급에 문제가 생기면 일국 차원이 아니라 훨씬 큰 에너지망을 이용할 수 있어야 하는데, 지금 우리는 동북아 에너지 네트워크를 이용할 가능성이 봉쇄돼 있죠. 이러한 논의가 전혀 진전되지 못했지만, 언젠가는 피하지 못할 문제라고 봅니다.

 

채효정 꼭 직접 교류가 아니라도 이미 얼마든지 북한에 자본의 우회투자가 가능하다는 것도 문제입니다. 남북관계가 악화된다 해도 자본은 방해받지 않고 중국 등을 경유해서 북한에 투자할 수 있어요. 특히 금융자본이 인프라를 선점하게 된다면 매우 우려스러운 상황이 올 수도 있죠.

 

강경석 우려할 점이 많은 게 사실이지만 기후위기 해결을 위한 공동 노력을 통해 분단체제 극복에 이바지한다든가 아니면 그 반대방향의 아이디어가 도출될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요?

 

정건화 뉴질랜드에서 강(江)의 소유권을 강에 주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자연을 권리주체로 보고 법적 권한을 부여한 것인데, 그 법철학적인 근거가 지구법(Earth Jurisprudence)이에요. 지구법은 법이 지구와 지구공동체 모든 성원의 안녕을 보장해야 한다는 생각에 바탕을 둔, 거버넌스에 관한 새로운 철학입니다. 흥미롭고 중요한 점은 자연에 법적 권한을 부여하는 급진적 시도가 현실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는 겁니다. 실제로 뉴질랜드에서 원주민과 정부가 국립공원 지역의 소유권을 놓고 오랜 다툼을 벌였는데 그걸 해결하는 과정이 ‘강의 소유권을 강에’ 부여한 것이죠. 뉴질랜드의 법학자 클라우스 보셀만(Klaus Bosselman)이 작년에 방한해서 DMZ를 남한의 것도 아니고 북한의 것도 아니라 DMZ 자체의 것으로 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습니다.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한반도의 허리 지역을 지구법적인 관념을 적용해 남도 북도 아닌 평화의 공간, 자연생태계 보존공간으로 두는 것도 좋겠다 싶습니다. 분단체제를 전환해내는 지구법적 사고라고나 할까요. 또한 지금의 남북관계에서 북한에 무언가를 강요하기란 정말 어렵지만 남한이 기후위기에 어떻게 대응하는지, 어떻게 에너지와 산업의 전환을 이뤄내는지가 북한에도 영향을 미치고 장기적으로 한반도의 생태적 전환을 만들어가는 열쇠가 될 것 같습니다.

 

김선철 빠리기후협약 이후 ‘감축’과 ‘적응’이 과제로 부상했습니다. 온실가스를 얼마나 감축할 것인가, 그리고 기후위기라는 재앙에 어떻게 적응할 것인가가 문제가 된 것이죠. 사실 북한은 이미 많은 제재를 받고 있기 때문에 생산력이 낮아 감축은 고민할 게 많지 않아요. 그렇지만 적응에 있어서는 어려움이 클 것 같습니다. 이번 홍수 때 큰 기근을 겪은 것처럼요. 저는 이럴 때의 인도주의적 교류가 남북관계의 고리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다만 남한에서도 적응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면 그러한 교류도 요원하겠죠. 인도주의 교류가 ‘자본의 침탈’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남한 내에서의 개혁이나 체제전환이 함께 이뤄져야 합니다.

 

정건화 적극적인 대안을 찾아내고 확산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가령 브라질의 도시 꾸리찌바의 대중교통체계나 꼬스따리까의 생태보존을 위한 정책 등 남미 국가에 훌륭한 사례가 많습니다. 농업에서도 토양을 훼손하지 않고 생태계의 원리를 반영한 퍼머컬처(permaculture, 다작경영) 같은 대안적인 모델이 있고요. 이러한 대안들이 우리 안에서 성장하며 기존 이윤경제와 공존 또는 경합할수록 남북교류의 가능성 또한 높아질 것 같습니다. 제러미 리프킨(Jeremy Rifkin)이 말하는 협력적 공유경제(collaborative commons)도 바로 그런 것인데, 현대 자본주의의 성과인 커뮤니케이션·에너지·물류·인터넷 등 ‘글로벌 신경네트워크’가 대부분의 재화와 서비스의 한계비용을 ‘0’으로 수렴시켜서 자본주의적 생산이나 배분에서 시장과 이윤경제의 영역을 축소하고 글로벌 공유자원의 영역을 확장시킬 것이라는 낙관적인 전망이에요. 앞으로의 남북관계를 생각할 때도 이렇듯 기술적·경제사회적 조건과 대안을 고려해야겠습니다.

 

강경석 분단체제하의 남한이 그같은 대안들의 자유로운 경합을 충분히 허락하는 공간이 아니라는 게 걸림돌이지만 김선철 선생님께서 소개해주신 동북아 에너지 네트워크 구상이나 정건화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비무장지대 생태보존, 퍼머컬처 등의 아이디어가 거꾸로 돌파구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물론 분단체제를 극복한다고 기후위기가 저절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겠지만 양자가 서로의 실마리가 될 가능성은 충분해 보입니다.

 

채효정 어쩌면 ‘적응’의 대안은 북한에 더 많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우리는 오히려 ‘농업이 발전했기 때문에’ 이제 전기가 없으면 농사도 못 지을 정도가 됐어요. 지금 그린뉴딜 사업으로 추진 중인 ‘스마트팜’이 확대될수록 이런 전기의존형 농업은 더 심화될 거고요. 북한은 비료·농기계·전력 부족으로 어쩔 수 없이 유기농법을 유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한 경험을 들여다보면 배울 것이 있지 않을까요. 꼭 거대기술만이 대안은 아니니까요. 예를 들어 이번 코로나19 사태에서도 의료 물자나 고급 장비는 턱없이 부족한 꾸바가 오히려 서구 국가보다 더 나은 대응을 보여준 것처럼요.

 

정건화 체제의 규정력 속에서 북한 모델을 수용하기 어렵다는 게 분단체제의 비용이지만, 그럴수록 자연 생태계 안에서 철학적·과학적 인식을 결합해낸 답을 북한에서 찾아내고 이것을 새롭게 언어화해서 제시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말씀하신 유기농은 프랭클린 킹(Franklin King)이라는 농학자에 의해 최초로 미국에 소개됐는데 당시 그가 동아시아를 방문하고 쓴 책이 『4천년의 농부들: 중국, 한국 그리고 일본의 영속농업』(Farmers of Forty Centuries, 1911)이에요. 원조이자 모범으로서 동아시아를 소개한 것인데 100년도 넘은 책이 여전히 이목을 끄는 것은 생태적 농업, 지속 가능한 농업에 대한 관심이 계속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북한이 보존하고 있는 지금의 유기농업도 이런 방식으로 새롭게 소개될 수 있겠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탈성장 혹은 적정성장은 어떻게 가능한가

강경석 한국형 그린뉴딜이 정작 ‘그린’은 없는 자본의 새로운 성장 모델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를 한반도 차원에서 적용할 경우 북한에 대한 식민화 프로젝트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라는 채효정 선생님의 지적이 있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이러한 한계들은 앞서 언급되었듯 성장주의적 발상을 벗어나지 못해서 생겨나는 것 같아요. 이같은 문제의식에서 최근 국내에서도 탈성장 논의가 활발해지는 것으로 압니다. 그런데 이를 어떻게 실현하느냐 하는 차원에서 적정성장이라는 개념도 도출되었습니다. 생산력의 증대를 당장에 전면적으로 포기할 경우 탈성장은 고사하고 오히려 ‘약탈적 축적’의 표적이 되는 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르기 때문이지요. 각국의 현실에서 탈성장의 목표를 어떻게 설계하느냐에 따라 그때그때 적정성장의 단계를 배치하는 양상도 달라질 테지요. 물론 탈성장 자체도 자명한 개념은 아니라서 일단의 정리가 필요해 보이긴 합니다.

 

김선철 ‘탈성장’을 생산력의 양적인 증감 관리 문제로 볼지 아니면 질적인 전환의 문제로 볼지에 따라 몇가지 구분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가령 ‘적정성장’ ‘적정발전’이라는 용어는 전자에 해당하겠죠. 이 지구에서 우리가 생존 가능하려면 양적으로 어느 정도를 취하는 것이 적정한지 관리의 차원에서 가늠해보자는 것입니다. 반면에 후자에서는 얼마만큼이 적정한지 자체가 무의미해집니다. 철학적인 차원에서 지금의 과잉생산 과잉소비에 기초한 경제체제를 벗어나자는 뜻이니까요. 탈성장 논의에서 수축(contraction)과 수렴(convergence)이라는 원칙이 제기되는데 생산·소비·탄소배출량이 ‘수축하는 과정’과, 잘사는 나라와 그렇지 못한 나라 간 경제력 수준이 ‘수렴하는 과정’이 함께 진행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탈성장’한다며 “가난한 나라도 발전하지 마”라는 일이 있어선 안 된다는 거죠. 물론 규범적 차원과 구체적인 정책의 차원은 다릅니다. 지금까지의 성장을 유지하면서 탄소를 감축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가령 문재인 대통령의 탄소중립 발언들만 봐도 경제성장 기조에 대한 성찰 없이 2050년 탄소중립만 이야기하기 때문에 이것은 목표가 아니고 선언에 가깝습니다. 탄소중립을 말로는 떠들고 있지만 이것을 지키려는 법적인 제도 마련은커녕 구체적 계획조차 보이지 않고 있어요. 누구도 책임지려 하지 않고요. 국제적 권고사항인 장기 저탄소발전계획(LEDS)을 세부적으로 마련할 필요가 있어요. 이보다 강력한 의무사항으로 유엔 자발적 기여(INDC)가 있습니다. 이것은 당사국 정부가 2030년까지 반드시 줄이겠다고 하는 온실가스 감축 목표이고 법제화 의무도 있습니다.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에 따르면 2050년 탄소중립을 달성하기 위해 한국은 203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량을 45퍼센트 줄여야 하는데 지금 정부 계획은 18.5퍼센트로 권고안의 절반도 안 되죠. 사실 45퍼센트 감축을 가능하게 하는 수준의 성장이 바로 적정성장이겠지만 경제 지표상으로는 마이너스 성장이 되니까 선뜻 선택할 수가 없는 겁니다. 여기에 대해 활동가들은 산업구조와 경제를 핑계로 온실가스 배출 감축을 미루어선 안 된다고 주장해요. 이것은 생존의 문제니까 지금 가장 절실한 목표인 산업과 에너지 구조를 어떻게 바꿀지를 고민해야 한다고 소리 높이는 상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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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석 하지만 말씀하신 마이너스 성장을 현재 상황에서 가정해봤을 때 당연히 즉각적인 충격이 있을 테고 계층적으로는 그 강도가 하부에 집중될 위험이 있지 않나요?

 

채효정 적정성장이나 적정발전은 ‘지속 가능한 발전’ 같은 일종의 타협적 용어라고 봅니다. 생태적으로 이미 지구의 경제는 성장 불가능 상태가 된 지 오래고, 자본주의 경제의 셈법으로도 성장할 수 있는 한계를 지났어요. 무한히 성장할 수 있는 것은 화폐밖에 없는데, 이미 죽은 경제를 돈으로 연명한다고 해서 지금의 금융자본주의를 ‘좀비 자본주의’라고도 합니다. 저는 그렇기 때문에 성장을 멈추고 적극적으로 거기서 벗어나려는 목표를 세워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성장담론의 질적 전환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탈성장이 바로 그런 개념인데 물론 대항담론으로 성장하려면 아직 갈 길이 멀기는 합니다. 지금 탈성장을 주장하면 그건 곧 저성장·역성장이라며 경제하강기의 고통부터 앞세우는데, 사실 그것도 성장주의에서 야기되는 고통이고 거기서 벗어날 때만 해소될 수 있어요. 탈성장을 비판하며 적정성장이나 적정발전으로 유도하는 건 결국 ‘자본주의 말고 대안은 없다’라는 체제 유지의 또다른 레토릭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가 성장이라고 부르는 것을 달리 표현하면 ‘파괴’입니다. ‘적정파괴’ ‘저파괴’는 말이 안 되죠. 탈성장은 성장 중독 사회에서 벗어나는 가치의 전환을 시도해보자는 겁니다. 그간의 성장 방식이 기후위기와 불평등을 야기하고 다수의 사람을 고통으로 몰아넣은 주범이니까 성장을 중심으로 설계된 기존의 지표와 셈법까지 다 바꿔보자는 것입니다. 물론 지금의 글로벌 경제체제하에서는 한 나라의 경제정책으로 바꿀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더 폭넓은 정치적 차원의 고민이 필요하겠죠. 국제 금융자본을 규제하려면 빠리기후협약 같은 국제적 차원의 금융 규제 협약도 마련되어야 할 거고요. 이를 압박하려면 국제적인 반(反)자본운동과 민중연대운동이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지역에서부터 반자본주의 풀뿌리운동이 시작되어야 하고요.

 

강경석 탈성장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으로서의 적정성장이라면 큰 틀에서 자본주의 대안 부재론과는 다를 것 같습니다. 어떻게 탈성장에 이를지의 차이라고도 할 수 있겠어요.

 

정건화 탈성장이 가능하려면 구체적으로 두가지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우선 지표를 새롭게 만들어야 하고, 경제와 발전에 대한 관념을 전환해야 하죠. 지표의 측면에서는 GDP라는 국민계정을 바꾸기 위한 시도가 오래 지속되어왔습니다. 그중 대표적인 게 환경경제통합계정(SEEA)인데, 이미 한국에서도 녹색성장이 화두로 등장한 2007년경부터 논의되었어요. 사실 우리나라는 통계 작성의 주체가 통계청과 한국은행으로 나뉘어 있어 이러한 새로운 지표를 도입하기가 더욱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 게다가 ‘자연자본’(natural capital), 즉 자연이 지닌 경제적・사회적 가치처럼 시장에서 거래되지 않고 잠재적으로 존재하는 부분을 통계에 담아내야 하기 때문에 만만치가 않지요. 하지만 지금의 기업회계도 100년 넘는 기간 동안 지속적으로 보완되어온 것이기 때문에 사회적 가치를 경제적으로 어떻게 측정할지도 지금부터 논의해서 반영하는 게 불가능하지는 않으리라고 봅니다. 가사노동이나 돌봄노동을 경제적으로 측정하거나 기업이 창출하는 사회적 가치를 산출하는 회계 방법이 이미 활발하게 도입되고 있고요. UN이나 OECD가 매년 발표하는 ‘행복보고서’나 ‘삶의 질 지표’도 그런 목적으로 개발된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에도 서울시를 포함해서 몇 지자체가 조례를 만들어 행복에 관한 지표를 개발 중이에요. 그런데 더 어렵고 중요한 일은 경제에 대한 관념을 전환하는 것입니다. 사고방식 자체를 바꿔야 하니까 특히 정책 차원의 전환은 더 난망하죠. 새로운 문제의식과 정책을 연결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행정기구·전문가·시민사회가 함께 과학-인문학-정책을 포괄하는 철학을 바탕으로 통합적 거버넌스와 참여를 실질적으로 구성해내야 합니다. 지금 행정의 칸막이나 일방주의, 대학교육의 분과학문주의가 극복해야 할 시급한 과제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회로 향할 것인가

강경석 현재의 국제규범에 적응하는 차원과, 무엇이 더 진정한 ‘성장’인가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중심으로 새로운 목표나 지표를 설계하는 차원이 병행될 필요가 있겠습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론 사회적 대안에 관한 여러 아이디어에 사람들이 흥미를 가지다가도 실행 차원에 들어서면 ‘그게 되겠어?’라며 시들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코로나19 사태가 벌어지니까 기본소득 논의가 전에 없이 활발해지기도 했죠. 물론 코로나19는 ‘나쁜’ 계기였지만 ‘이대로 살 수는 없다’라는 생각을 많이 공유하게 된 배경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어딘가에서 전혀 새로운 것을 찾기보다는 이미 나와 있었지만 활성화되지 못했던 대안들을 재발굴할 필요성도 커지는 것 같아요. 그와 함께 이전에 수용되지 못했던 아이디어들을 실행한다 할 때 그것을 위한 민주적 의사결정이 어떤 식으로 가능해질지도 더욱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채효정 정치 과정이 선거 때나 의회 안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얼마 전에 한 노조에서 노동자들이 기후위기에 어떻게 대응할지 토론하는 영상을 봤어요. 아니나 다를까 그린뉴딜 하면 노동자는 해고되는 것 아니냐는 걱정부터 나왔죠. 그렇다면 노동자 입장에서는 그린뉴딜에 반대해야 마땅한데, 한 사람이 “그러면 이제 단체협약에도 기후위기를 넣어야겠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리고는 공장의 전기 낭비를 줄이고 어떻게 에너지를 절약할지 논의하더니 탄소 배출을 줄이는 협약안으로 노동시간 단축과 야간노동 금지를 제안했습니다. 저는 그 장면이 아주 인상 깊었습니다. 이들에게는 안전한 노동이 곧 안전한 지구를 만드는 것이고, 해고 금지가 곧 기후정의인 거죠. 이런 논의가 현장의 민주주의이고 노동자 정치의 시작이라고 봐요. 흔한 접근으로 힘 있는 정치인을 통해서 정책이나 법을 만들어서 목표를 달성하자고 하는데, 현장의 동력과 아래로부터의 힘이 없으면 정치를 압박할 수가 없습니다. 시민은 분열되어 있고 노동자들은 먹고살기 힘들고 노조는 약한 반면 자본은 막강한 로비력으로 정치를 압박하고 있으니 정책과 법이 제대로 나오기가 힘들죠. 그래서 저는 민주주의 강화가 기후위기를 막기 위한 최선의 해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지금의 탈정치화된 ‘탈탄소 경제’나 ‘탄소중립’ 패러다임은 우리에게서 그런 정치적 감각을 박탈하고 오히려 정치를 중지시키면서 위기관리체제를 수용하도록 만드는 효과가 있습니다. 탄소중립이라는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어마어마한 기술과 자본이 동원되어야 하는데 그 통제권을 노동자 민중이 가질 수 없는 구조니까요. 북반구의 기업들이 탄소배출권을 얻기 위해 남미에서 기존의 숲과 경작지를 밀어버리고 새롭게 탄소상쇄용 숲을 조성하는데 거주지를 빼앗긴 원주민들은 이를 ‘더러운 녹색’이라고 불러요. ‘플러스마이너스 제로’의 탄소 계산법은 현장에서 일어나는 그런 정치적인 문제를 수학적인 문제로 소거해버리는 거죠.

 

김선철 유럽에서 쓰레기를 태워서 에너지를 만들다보니까 쓰레기가 상품이 되는 역설이 발생했어요. 그러려면 쓰레기를 끊임없이 만들어내야 하는 시스템이 생기죠. 이 또한 성장 패러다임의 역설인데, 여기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지를 고민해봐야 합니다. 이제 성장이냐 생존이냐 같은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하고, 그에 대한 요구가 채효정 선생님 말씀처럼 아래로부터 올라와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지나온 과정을 되돌아보면 아래에서 올라온 담론이 없었던 것은 아닌데, 좋은 담론도 정부가 그걸 흡수해서 뭔가 다른 것으로 바꿔온 게 문제입니다. 또 감축 목표만 부각될 뿐 기후위기나 에너지 전환의 현실이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한 구체적인 내러티브가 부족합니다. 전태일, 김용균, 구의역 김군 등 모두 죽음 이후에야 그들의 스토리를 듣게 되는데, 누군가 죽기 전에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드러낼 수 있는 스토리텔링이 늘어나야 하겠습니다. 가장 중요한 삶의 문제를 어떻게 이야깃거리로 만들어낼지를 더 많이 고민해야 패러다임 전환의 동력도 만들어질 것 같아요. 지금은 관료, 언론, 전문가의 스토리만 들리죠. 이들의 이야기만 유통되면 노동자, 서민, 청년, 사회적 약자의 이야기는 주변화될 뿐 아니라 이야기된다고 해도 시혜의 대상으로 설정됩니다. ‘아래’의 목소리가 만들어져야 관료도 언론도 제대로 방향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런 면에서는 사회적 경제나 협치의 영역도 마찬가지라고 봐요. 실적 위주로 사업이 진행되면서 실질적으로 풀뿌리의 역량이 강화되기는커녕 오히려 정부 의존도만 높이는 결과를 낳고 있는 듯합니다.

 

정건화 하지만 사회적 경제나 다양한 중간 지원조직의 협치는 긍정적으로 평가할 면이 있다고 봅니다. 중간 지원조직의 비대화를 걱정하는 의견도 있지만 다수의 지자체가 꾸준히 지역사회의 공공영역을 창출하고 공익활동을 지원해온 것도 사실이에요. 우리나라 시민사회의 인프라가 취약한 편이기 때문에 공공이 어느 정도 그런 역할을 떠안는 것을 비판할 수만은 없죠. 물론 시민사회가 자립할 수 있는 요건이 형성되는 것이 가장 의미있고 중요하겠지만요. 실제로 우리나라에도 생협이나 신협처럼 시민운동의 정신과 가치를 충실하게 발전시켜온 단체도 있으니까, 그런 점에서 다양한 경로를 존중할 필요도 있을 것 같습니다. 체제전환은 노동자와 풀뿌리 주민을 포함해서 기업과 시장, 공공이 다 함께 참여할 때 가능해진다고 봐요. 그리고 거창하고 심각한 것보다는 쉽고도 작은 행동의 변화를 통해 큰 효과를 내는 것을 행동경제학에서 ‘넛지’(nudge)라고 하는데, 이러한 종류의 혁신과 그에 따른 정책 수립이 필요하겠습니다. 유무형의 인프라와 폭넓은 참여를 통해 책임을 서로 나누는 사회협약의 틀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겠고요.

 

채효정 하지만 협력 내지 협의가 가능하려면 기본적으로 대등한 수준의 힘이 보장되어야 합니다. 한국사회의 권력 구성을 보면 그 차이가 너무 커요. 과거에 미국에서 뉴딜이 가능했던 것은 내부적으로는 노동운동이 있었고, 외부적으로는 전쟁과 냉전이 있어 자본이 어느 정도 양보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죠. 유럽에서도 조합주의(corporatism)가 가능했던 것은 전후의 타협정치 속에서 노동계급이 사회적 발언권을 얻으며 협상력을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인데 한국사회에서는 단 한번도 그랬던 적이 없어요. 87년 민주화도, 심지어 지난 촛불도 그런 걸 이뤄내지는 못했습니다. 항상 억압당하다가, 목숨 걸고 싸워서 겨우 협상테이블에 앉을 기회를 얻는 식이죠. 그러니까 진정한 협력관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힘의 관계부터 재구축하는 게 필요하다고 봅니다. 기울어진 운동장을 좀더 평평하게 바꾸자는 거예요.

 

상상력을 대안으로 바꾸려면

강경석 세분 모두 체제전환으로 나아가는 경로의 다양화가 필요하다는 데는 공감하지만 각각 다른 차원의 접근을 강조하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정건화 선생님께서 지역 기반의 사회적 경제 모델에 대해 일부 언급하시긴 했지만, 말하자면 전환의 ‘청사진’ 같은 것은 충분히 논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가령 미국의 도시사회학자 마이크 데이비스(Mike Davis)는 『인류세 시대의 맑스』(안민석 옮김, 창비 2020)에서 지금 기후위기의 주범은 북반구 대도시들임이 분명하지만 오히려 “도시 생활의 평등주의적 측면이야말로 자원 보존과 탄소 배출 완화에 필요한 최상의 사회적·물리적 지원을 지속적으로 제공해줄 수 있다”라면서 “지구온난화를 통제하려는 노력이 생활수준을 높이고 전세계 빈곤을 퇴치시키려는 싸움과 한데 수렴하지 않는다면” “희망은 없다”(291면)라고까지 말합니다. 간단히 말하면 생산수단의 민주적 통제력을 높이고 공동영역(commons)을 확장해 본래 도시의 잠재적 효율성을 제고하자는 거지요. 물론 “우리가 규격화되어 있는 사적 소비가 아니라 민주적인 공적 공간을 지속 가능한 평등의 원동력으로 기꺼이 삼고자 한다면, 지구적 차원에서 ‘수용능력’이 부족하지는 않을 것”(289면)이라는 저자의 판단이 옳은지 어떤지에 대해서는 비판적 점검이 필요하겠지만 상당히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이밖에도 다양한 청사진이 있을 수 있겠지요. 마무리 삼아 한분씩 말씀 부탁드립니다.

 

정건화 속도를 줄이고, 규모를 줄이고, 욕망의 크기를 지구가 수용 가능한 용량 안으로 줄이는 것 말고 대안은 없습니다. 헬레나 노르베리호지(Helena Norberg-Hodge)가 『로컬의 미래』(최요한 옮김, 남해의봄날 2018)에서 밝혔듯이 글로벌 경제 시스템으로 인한 온갖 보이지 않는 비용을 확인하는 것이 그 출발점이고, 지금의 경제 시스템으로는 기후위기를 막을 수 없다는 사고로 발전하는 것이 그다음이며, 대안적 경제의 가치와 실현 가능성과 경로를 상상하는 노력이 이어져야 할 것입니다. 새로운 경제 시스템은 그 명칭이 무엇이 되든 생태 친화적 문명을 지향해야 해요. 저는 그 모델로 순환경제(circular economy)를 제안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순환’이 주로 재활용 등 자원순환의 맥락으로 이해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닙니다. 지금의 시장경제가 생산-유통-소비-폐기로 이어지는 선형(linear) 모델이라면, 순환경제는 소비의 결과인 폐기물이 물질적·생물적으로 생산 과정에 재투입되도록 생산 시스템을 재구성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캐내고 만들고 쓰고 버리고 다시 캐내는 방식 때문에 자원이 고갈되고 쓰레기가 폭증했으니까 그 근본 고리를 바꾸자는 거죠. 글로벌 순환이 미덕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우선 먹거리, 에너지, 돌봄 등 생활경제의 영역부터라도 순환 규모를 줄여나가야 합니다. 말하자면 지역 순환경제인데, 이를 위해서는 모든 경제주체가 이 과정에 사회적·생태적 책임성을 갖고 임해야겠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지금의 경제 교육을 바꿔야 한다는 당면한 과제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초·중·고등학교 사회교과서는 놀랄 만큼 시장경제만 강조하는데, 이걸 고치려고 하면 바로 ‘사회주의’라는 비판부터 나와요. 하지만 코로나19 팬데믹을 겪으며 ‘뉴노멀’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광범위하게 퍼지는 것을 계기로 지금의 기후변화와 환경파괴가 ‘시장실패’의 대표적인 사례임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순환경제 개념을 교육 시스템에 도입한 핀란드의 시트라(SITRA) 같은 공적 재단의 활동에도 주목해야겠습니다.

 

김선철 체제전환을 위한 밑거름은 이미 형성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과도한 플라스틱 사용에 대한 문제제기가 늘어난 것을 비롯해서 순환경제를 만들어보자는 이야기도 많이 퍼졌잖아요. 그런데 순환경제에서 중요한 것은 우선 생산과 소비를 줄이는 일입니다. 지금은 그게 아니라 버린 것으로 다시 상품을 만들어내는 업싸이클링(upcycling)에 모든 초점이 맞춰진 것 같아요. 아까 쓰레기를 에너지화하는 발전 방식에 대해 말씀드렸지만, 재활용이나 재생만 강조하다보면 기본 문제의식인 생산·소비의 감축은 사라져버리고 맙니다. 가령 애플사가 재생 가능하거나 재활용된 물질만 사용해 제품을 만들겠다고 선언했는데, 더 중요한 것은 지금처럼 이삼년에 한번 스마트폰을 바꿔야 하는 생산과 소비의 싸이클을 바꾸는 거거든요. 기업들은 이윤이 목적이니까 돈을 적게 버는 일을 스스로 할 리가 만무하고, 그렇기 때문에 공공의 힘이 필요합니다. 이를 가능하게 해줄 아래로부터의 동맹과 여론화도 필요하고요. 이를 통해 국가의 권력을 누가 잡더라도 지속될 수 있는 정책원칙과 규제가 마련되어야겠죠. 어떤 대안이나 체제전환을 이야기할 때 시스템이 갖춰지지 않고서는 무엇도 불가능한데, 이는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이달고 시장에 관해 잠깐 언급했지만 지금 빠리가 시도하는 탈성장적인 방향을 주목해볼 필요가 있어요. 시내 주차장을 절반 넘게 줄이는 동시에 시내 주행속도를 시속 30킬로미터로 제한함으로써 자동차 의존도를 낮추고, 대형 디지털 광고판을 없애 에너지 소비와 더불어 조작된 소비 욕구를 줄이고, 에어비앤비로 나온 주택을 구매해 영구임대주택으로 바꾸려는 등의 계획을 세우고 있거든요. 상상력이 구체적인 정책의 모습으로 나온 셈인데 저는 큰 기대감을 갖고 지켜보고 있습니다.

 

채효정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4차선 도로 중 한 차선을 일반 자동차, 한 차선을 트램, 한 차선을 버스, 한 차선을 자전거에 줬어요. 저는 이것이 정치적 힘이 공간에 배분된 것이라고 봤습니다. 승용차 타는 사람에게 25퍼센트, 버스 타는 사람에게 25퍼센트를 골고루 나눠줄 수 있는. 서민 버스의 상징인 ‘6411번 버스’ 타는 사람들이 국회에서 25퍼센트를 차지한다면 한국의 도시도 지금 같지는 않을 거예요. 그런데 한편 저는 유럽 좌파의 상상력이 한계에 다다랐다고, 여전히 사회민주주의 전략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생각해왔습니다. 사회민주주의적 이상은 자연이나 식민지같이 착취를 외주화할 외부조건이 있어서 가능했던 것인데 지금은 그런 게 없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농촌과 농업이 포기할 수 없는 거의 유일한 대안이라고 생각합니다. 도시를 버리고 모두 농촌으로 가자는 뜻이 아니라 도시의 생태적 전환도 농촌과의 관계를 재설정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는 뜻이에요. 말하자면 지금은 ‘경작지’가 우리 모두에게 가장 중요하면서도 위기에 직면한 커먼즈(공동영역)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근대 국가 건설 과정에서 전체 농민의 3분의 1이 죽었다고 해요. 근대로의 이행이라는 것이 그저 ‘도시화’된 것이 아니라 그러한 과정을 거쳐서 이뤄진 겁니다. 지금도 농민에 대한 전쟁은 끝나지 않았어요. FTA, IMF, WTO 같은 이름을 앞세워 계속 진행 중이죠. 이제 그런 관계를 재설정해야 합니다. 사료를 보면 농촌과 도시가 동시에 해체되고 지역들이 국가 질서로 재구성될 때 드물게 농촌 꼬뮌과 도시 꼬뮌 간의 자치공동체 동맹이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지금 도시를 ‘지역적으로’ 다시 구성한다면 커먼즈를 꼬뮌이라는 정치적 단위로 전환해서 사유할 수 있어야겠고, 도농동맹을 통한 자급과 자치의 기술을 함께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랬을 때 거대자본과 싸울 수 있는, 탈성장과 체제전환을 위한 시민 연대가 지역을 기반으로 만들어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게 제가 생각하는 ‘지역으로부터의 체제전환’이에요.

 

강경석 긴 시간 기후위기와 체제전환에 관해 이야기해봤는데 이야기를 나눌수록 기후정의가 사회정의와 불가분의 관련을 맺고 있다는 생각이 들고 더 많은 토론거리가 만들어지는 것 같습니다. 며칠을 이야기해도 모자라겠지만 오늘 해주신 말씀들만으로도 보람 있는 시간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부디 대화를 읽는 독자들께도 그런 시간이 되었길 바랍니다. 기후위기 대응은 더이상 미룰 수 없는 의제가 되었고 과제도 만만찮다는 사실이 오늘 대화에서도 여실히 입증되는 듯합니다만 아직 할 수 있고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다는 것은 다른 한편으론 희망인 것 같습니다. 『창작과비평』도 지속적인 관심을 놓지 않겠다는 약속을 드리면서 대화를 마치겠습니다. 오늘 좋은 말씀 들려주신 세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2020.10.30. 창비서교빌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