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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5>논단

 

 

지방이 지방을 죽인다

수도권 집중과 지방소멸

 

 

강준만 康俊晩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저서 『부동산 약탈 국가』 『한류의 역사』 『쇼핑은 투표보다 중요하다』 『감정 독재』 『바벨탑 공화국』 『개천에서 용 나면 안 된다』 『한국 근대사 산책』(전10권) 등이 있음.

kjm@jbnu.ac.kr

 

 

이것은 모두의 문제다

 

2020년은 한국 인구가 정점을 찍고 이후 감소하는 분기점이라는 점에서 역사적인 해이다. 2019년 한국의 합계출산율(한 사람이 평생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평균 출생아 수)은 인구를 현상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2 .1명에 한참 못 미치는 0.92명을 기록했으니 당연한 일이다. 또한 2020년은 최초로 수도권 인구가 비수도권 인구를 넘어섰다는 점에서도 역사적이다. 물론 좋은 의미는 아니다. 인구 감소 추세와 무관하게 수도권 인구는 계속 늘고 있으며, 이른바 ‘지방소멸’은 가속화되고 있으니 말이다.

지방소멸은 원래 일본에서 나온 개념이다. 2014년 5월, 기존 인구감소 추세를 전제로 일본의 절반에 해당하는 896개 지방자치단체가 소멸할 것이라 예측한 이른바 ‘마스다 보고서’는 일본 전역을 충격에 빠뜨리며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 보고서를 쓴 마스다 히로야(增田寬也) 전 총무장관은 토오꾜오가 지방의 인구를 빨아들이면서도 재생산은 못하는 인구의 블랙홀이 되면서 “일본은 파멸”할 것이라고 경고했다.1

한국에선 2015년 이상호가 한국의 ‘지방소멸’을 예측했으며, 이듬해 국민일보는 마스다와 이상호의 분석방법을 참고해 2015년 기준 전국 지자체의 30퍼센트가량을 ‘소멸 위험 지역’으로 분류했다.2 마강래도 2017년 비슷한 예측을 내놓았고,3 한국고용정보원의 2018년 보고서는 전국 시·군·구의 40퍼센트가량을 ‘소멸 위험 지역’이라고 전망했다.4

전국토의 11.8퍼센트를 차지하는 수도권에 인구의 절반 이상이 몰려 사는 데다 이런 추세는 계속 강화되고 있으니, ‘도시국가’로 가보겠다는 것일까? 실제로 수도권 인구집중을 다룬 기사에 달린 댓글에선 ‘도시국가’ 긍정론이나 예찬론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하지만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말씀이다. ‘도시국가’ 자체가 문제될 건 없지만, 한국은 ‘도시국가’로 가기엔 땅이 너무 넓기 때문이다.

어느 지방도시 인구가 20만명에서 10만명으로 줄었다고 해도 그 도시의 도로, 수도, 전선, 통신망까지 절반으로 줄일 수는 없는 일이다. 어느 도시에나 기본적으로 들어가는 인프라 비용이 있기 마련이며, 게다가 똑같은 면적에 절반의 인구만 살게 되면 재정 효율성은 급격히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런 문제를 지적한 마강래는 “파산 상태에 가까운 30%의 도시들로 인해 온 나라가 휘청거릴 것”5이라고 우려한다.

파산은 지방의 문제일 뿐인데 왜 온 나라가 휘청거린단 말인가? 지방소멸을 국가의 문제가 아닌 지방의 문제로만 보는 사람들은 그렇게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아니, 수도권 주민들 다수가 그렇게 생각한다고 보는 게 진실에 가깝지 않을까? 이게 참 묘하거니와 신기한 일이다. 더할 나위 없이 똑똑하고 현명한 사람들조차 지방 문제가 곧 자신들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외면하려고 하니 말이다.

한 국가체제 내에서 특정 지역이 파산해 그 지역 주민들이 비참한 상황으로 내몰리는데, 그걸 외면하고서 국가의 존립이 가능할까? 마강래는 지방소멸로 인해 “천문학적 액수의 연명치료 비용이 들어갈 것”이며, 이 비용은 “우리 국민 모두가 짊어지게 될 부담”이라고 말한다. 즉 지방소멸은 ‘국가예산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6

지방 문제는 지방이 피해자이고 수도권이 수혜자인, 그런 이분법의 문제가 아니다. 수도권도 피해자가 되는 국가와 우리 모두의 문제다. 그럼에도 중앙정부는 별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다. 포털에서 ‘지방소멸’을 검색해보라. 대부분 지방언론 기사들이다. 이런 기사에서 거론되는 대안은 ‘지방 초광역경제권 형성’과 ‘고향사랑 기부금제’ 수준에 머물러 있다. 좋은 일이긴 하지만 지방소멸은 그 정도의 대처로 막아낼 수 있는 게 아니다. 문재인정권이 지난 7월에 ‘행정수도 이전’ 방안을 제시하지 않았느냐고 반문할 사람도 없진 않겠지만, 그건 믿지 않는 게 낫다. 여당 일각에서 ‘서울대 지방 이전’과 ‘서울대 폐지론’까지 거론한 것에 대해선 “장난치느냐?”라며 분노해야 할 일이다. 어떤 문제를 내내 모른 척 외면하다가 그 문제가 악화돼 자신의 발등에 떨어진 불이 되었을 때에야 갑자기 과격한 방안을 들고나오는 사람을 믿을 수 있겠는가? 문정권은 출범 이후 지역균형발전을 외면해왔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수도권 3기 신도시 정책처럼 역행하는 방향으로 치달음으로써 지방소멸을 가속화했다.7 그러다가 서울 부동산 가격 폭등으로 인한 민심 이반이라는 정치적 악재가 터지자 허겁지겁 아무 방안이나 내놓고 보는 건 진정성이 없을 뿐 아니라 역효과만 내기 십상인 ‘홍보정책’에 불과하다.

 

 

지방소멸의 책임, 누구에게 물어야 하나?

 

부동산 가격 폭등은 ‘합법적 약탈’이다. ‘내 집 마련’ 해보겠다고 뼈 빠지게 일해 저축한 사람들, 전세·월세 값이 뛰어 살던 곳에서 쫓겨나게 된 사람들의 처지에서 보면 폭력으로 뺏어가는 약탈보다 더 나쁜 약탈이다. 폭력적 약탈을 저지른 악한은 그 정체가 분명하고 처벌할 수 있지만, 합법적 약탈엔 지목할 수 있는 행위 주체마저 없어 ‘피해자 탓하기’라는 해괴한 일이 벌어진다. 더욱 해괴한 건 서울 부동산 가격 폭등에 대한 원인 진단이다. 일부 진보언론은 보수언론이 부동산 가격 상승을 과장한다고 비판하면서 세계적인 과잉 유동성을 들어 문정권을 옹호하기까지 하는데, 명색이 진보라면서 ‘합법적 약탈’에 대한 문제의식이 이렇게까지 박약해도 괜찮은 건가?

진보와 보수를 막론한 언론에 물어보자. 서울에 일자리와 더불어 한국형 계급투쟁의 최고 관문인 ‘명문대학’을 집중시키는 정부의 정책에 대해 문제제기를 제대로 한 적이 있던가? 아니면 이런 일련의 정책과 서울 부동산 가격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보는 건가? 서울 부동산 가격 폭등이 일시적으론 주춤할 수 있어도, 앞으로도 계속될 수밖에 없는 구조적 요인을 외면하는 반쪽짜리 분석과 비판을 언제까지 지속할 것인가? 정부와 언론이 이런 부동산 약탈 체제를 계속 고수한다 하더라도, 누구건 진실을 알고 살아야 할 권리는 있는 게 아닌가?8

진실은 불편하다. 지방도 면책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인구의 절반에 해당하는 지방 주민만이라도 균형발전을 강하게 요구해왔다면, 서울 부동산 가격이 이렇게까지 폭등하진 않았을 것이고, 역대 정권들이 지방을 이렇게까지 소멸의 위기로 몰아가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강한 요구는 없었다. 김만흠의 말대로, “지방인은 잠재적인 중앙인”9이기 때문이다. 이게 바로 지방소멸의 결정적 이유다. 거칠게 말하자면, 지방소멸의 주범은 중앙권력이라기보다는 지방의 보통 사람들이라는 이야기다.

전형적인 ‘피해자 탓하기’가 아니냐는 반론이 가능하겠지만, 문제 해결을 위해서 이젠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1960년대 미국의 흑인 민권운동은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던가? 흑인들이 침묵을 지키거나 무관심했는데 백인들이 스스로 흑인의 민권을 보장했던가? 페미니즘 운동은 어떤가? 여성들이 침묵을 지키거나 무관심했는데 남성들이 알아서 여권 보장에 앞장섰던가? 둘 다 피해자들의 장기간에 걸친 피눈물 나는 투쟁이 있었기에 괄목할 만한 변화가 이뤄져온 게 아닌가? 그리고 그런 평등을 향한 투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지 않은가?

반면 한국은 ‘서울공화국’이 되었고 지방은 ‘내부 식민지’로 전락한 지 오래다. 그럼에도 지방에서 이렇다 할 반식민지 투쟁이 단 한번이라도 있었던가? 균형발전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산발적으로 나오기는 하지만, 너무도 온건하고 너무도 미약한 게 현실이다. 지방의 힘은 선거에서 나오건만 지방민들이 역대 모든 대선·총선·지방선거에서 식민지의 위상에서 독립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적 있었던가? 후보들에게 균형발전 의제를 요구한 적이 있었느냐는 것이다. 단언컨대 없었다! 이렇다 할 집단적 요구를 강하게 한 적은 없었다.

지방에서 아무런 ‘수요’가 없는데 중앙권력이 스스로 알아서 균형발전을 ‘공급’하기 위해 애쓸 리는 만무하다. 무엇보다도 경로의존(path dependency)의 변경 비용이 너무 높기 때문이다.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전분야에 걸쳐 70년 넘게 고착된 기존 ‘서울공화국’ 체제를 바꾸는 건 5년 임기의 정권엔 속된 말로 ‘남는 장사’가 아니다. 2002년 대선 때 노무현 후보가 ‘행정수도 이전’이라는 대담한 공약을 내건 예외가 있긴 하지만, 충청권의 표를 얻는 ‘재미’를 보는 데 그쳤을 뿐 다른 주요 정책들은 여전히 ‘서울공화국’이라는 경로에 충실한 것이었다.10

정권은 때로 균형발전을 위한 시늉을 내긴 하지만, 그런 시늉의 효과를 압도할 정도로 균형발전에 역행하는 큰일을 저지르곤 했다. 대표적인 게 바로 교육정책이다. 수도권 인구집중의 가장 큰 이유가 일자리와 더불어 자녀교육이건만, 국가 재정 지원을 이른바 ‘인서울 대학’에 집중함으로써 ‘지방대 소멸’을 부추기는 정책을 천연덕스럽게 저질러왔다.11 조영태는 계속 그런 식으로 가면 “교육자원의 서울 편중은 더욱 심화되어, 조금 과장해서 2030년경에는 전국의 모든 20대가 서울에서만 살게 될 것”12이라고 말한다. 더욱 희한한 건 그런 교육정책에 대해 지방에선 아무런 말이 없으며 심지어는 반기는 사람마저 있다는 사실이다. 이게 바로 ‘내부 식민지’ 체제가 빚어내는 희한한 풍경이다.

 

 

소멸을 부르는 ‘내부 식민지’ 체제

 

‘내부 식민지’는 1970년대 남미에서 종속이론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개념이다. 식민지는 국가들 사이에서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한 국가 내에서도 극심한 지역 간 불평등의 형식으로 존재한다는 게 주요 내용이다. 그 개념의 기원은 레닌(V. Lenin)과 그람시(A. Gramsci)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이후 지역갈등이 있는 모든 나라에서 왕성하게 제기되었다. 즉 한 국가 내 중심부의 주변부에 대한 착취는 남미뿐만 아니라 영국, 일본, 이딸리아, 미국 등 세계 도처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내부 식민지 이론에 대한 연구가 조금이나마 이루어지긴 했지만, 학술적으로 사망한 것처럼 보이는 종속이론의 아류라는 멍에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그간 제기된 비판의 핵심은 국가 간 수준에서 나타나는 중심-주변부 관계를 무리하게 한 국가 내의 지역 간 수준에 적용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부 식민지 개념이 종속이론의 한계와 문제를 모두 떠안을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간 지방 문제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이 국가 간의 문제를 살피는 종속이론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 종속이론의 가장 큰 문제는 두말할 필요 없이 한 국가 내부의 계급 문제를 무시했다는 데 있다. 우리가 지방 문제를 보는 시각은 어떠했던가? 그간 우리는 지방을 단일한 이해관계를 가진 하나의 통일체로 보는 과오를 범해온 건 아닐까?

한국인에게 주민등록 주소는 별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지방에선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사는 사람일지라도 그의 아버지나 할아버지 고향에 따라 그 지역 사람으로 인정해주는 반면, 그곳에서 수십년을 살았더라도 고향이 딴 곳이면 ‘외지인’ 취급을 하는 게 현실이다. 사정이 이와 같은바, 내부 식민지 개념은 기존 공간적 서울-지방 구분에 ‘계급’에 대한 이해를 추가할 필요가 있다. 가령 수도권의 빈민층은 일자리가 없는 지방에서 뿌리 뽑혀 쫓겨난 사람들이지 수도권이 좋아서 간 게 아니므로 이들은 내부 식민지의 피해자로 간주되어야 한다.

내부 식민지론의 목표는 점령자 추방이나 분리독립이 아니다. 헌법정신과 원칙(헌법 제11, 119, 122조)에 충실하자는 국민으로서의 합법적 요구가 필요하다는 여론을 환기하는 동시에 지방의 종속적 지위가 지방민에 의해서도 관철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성찰을 촉구하는 것이다. 지방을 내부 식민지로 볼 수 있는 근거나 조건으로 여덟가지를 들 수 있다. 논의의 편의상 내부 식민지 상태에 처해 있는 지역을 A, 그런 상태를 유발하고 지속시키는 패권 지역을 B라고 부르자.

첫째, 경제적 종속이다. A와 B의 경제적 격차가 큰 것은 물론이고 구조적으로 A가 B에 종속돼 있는 상태를 말한다. 한국은 수도권에 대략 전체 경제력의 3분의 2, 국세 수입의 4분의 3, 기업의 70퍼센트, 중소·벤처 기업 투자의 77퍼센트, 100대 기업 본사의 95퍼센트, 예금의 70퍼센트 등이 집중돼 있다. 지방의 빈곤율은 수도권의 빈곤율보다 두배 정도 높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수도권의 빈곤층은 대부분 지방에서 뿌리 뽑힌 채 생계유지를 위해 수도권에 진입한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처지인지라 이익단체 조직은커녕 최소한의 결사도 할 수 없는 이들은 그 어떤 목소리조차 낼 수 없는 상태에 처해 있다.

둘째, 불평등 상태의 지속성이다. A와 B의 지역 간 불평등이 감소하기보다는 오히려 악화되어간다. 한국의 수도권 집중은 반세기 넘게 계속 심화돼왔음에도, 5년 임기의 정권은 단기적 성과를 내기 위해 기존 경로를 수정하기보다는 경로의존의 원리에 충실한 노선과 정책을 택해왔다. 예컨대 국토교통부의 ‘광역교통 2030 사업’의 총사업비 약 127조원 중 76.5퍼센트가 수도권에 집중돼 있다는 건 무엇을 말하는가? 불평등 상태의 악화는 지금도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지방 인구 감소 추세, 지방 보건의료 위기, 지방대의 위상 하향화 등에서도 단적으로 드러난다.

셋째, 정치적 종속이다. 모든 주요 정치적 행위와 결정이 B에서 이루어지며, A는 B의 주도권에 굴종할 수밖에 없는 상태를 말한다. 한국에서 ‘지방=중앙정치의 식민지’라는 도식은 상식이다. 지방선거는 ‘직전 대선의 연장전 또는 차기 대선의 전초전’으로만 간주되며, 지방의원이 국회의원의 ‘몸종’으로 전락했다는 것 또한 상식으로 통용되고 있다. 총선 기간에 지방의원들은 선거운동원으로 뛰어야 하며, 지방의회에서 회의를 하다가도 국회의원 보좌관이 전화하면 달려가야 한다. 지역구 국회의원이 탈당하면 지방의원들도 무더기로 탈당한다. 이런 한심한 짓을 끝장내기 위해 ‘지방선거 정당 공천 폐지’가 거론되었지만, 식민지를 잃고 싶지 않은 중앙권력의 탐욕 때문에 좌절되곤 했다.13

넷째, 국가 엘리트의 독점이다. B는 국가 엘리트를 독점함으로써 권력 행사는 물론 국가의 운영방식과 관련된 결정에서 절대적 발언권 우위를 점하고 있는 상태다. 한국에서 각 분야의 최고 엘리트는 지방 출신이라 하더라도 대부분 ‘인서울’ 대학 출신으로서 기존 ‘서울공화국’ 체제에 동화되거나 포섭되어야만 그 지위를 유지·발전시킬 수 있다. 역대 대통령들과 정치지도자들의 대부분이 지방 출신이었지만, ‘지방 죽이기’의 선봉에 서온 주체는 바로 이들이었다.

다섯째, 소통 채널의 독점이다. 모든 전국 매체를 B에 집중시킴으로써 국가적 ‘의제설정’(agenda-setting)은 물론 의제별 논의에 있어서도 B 중심적인 의식과 사고를 유포하는 상태를 말한다. 한국의 서울 매체 집중도는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극심하다. 이는 지역균형발전 의제를 상시적인 국민적 관심사가 아니라 ‘사건 보도’의 좁은 틀에 갇히게 만드는 동시에 지방민들의 주요 관심사를 지역이 아닌 서울 이슈에 집중하게 만드는 효과를 낳고 있다. ‘상경 시위’라는 관용어가 말해주듯이, 집회·시위도 서울에 가서 해야만 여론의 주목을 받을 수 있는 게 현실이다.

여섯째, 문화적 종속이다. 대부분의 주요 문화적 인프라·자본·행사들이 B에 집중된 가운데, A의 주민들은 문화적 갈증을 느끼며 B를 선망·동경하게 된다. 한국에서 지방의 지자체들은 앞다투어 자기 지역이 ‘예향’임을 부르짖지만 그건 전통문화 위주이며 대부분의 대중이 갈증을 느끼는 현대적 문화 향유의 기회는 서울에 집중돼 있다. 중앙권력 차원의 서울 몰아주기 정책도 문제지만 기업과 개인의 문화예술 기부금마저 수도권 집중도가 84.7퍼센트(30대 대기업은 97.1퍼센트)나 되며,14 이는 어느 정도 지명도가 있는 문화예술인들이 거의 대부분 수도권에서 살고 있는, 아니 살아야만 하는 데서도 잘 드러난다.

일곱째, 문화적 모멸이다. B의 주민은 A의 주민을 타자화·열등화하는 의식과 행태를 보이며, A의 주민 역시 그런 문화적 모멸을 수용하거나 저항을 포기한 상태다. ‘지방충’ ‘지균충’ ‘지잡대’ 등과 같은 모멸적 단어들이 시사하듯이, 일부 서울시민들의 지방 모멸은 매우 심하다. 지방민들은 그런 모멸에 정면 대응하기보다는 자녀를 서울에 진출시켜 성공케 하는, 즉 ‘개천에서 용 나는’ 모델을 지향하고 있다. 지방 출신 학생들이 많이 있음에도 인서울 대학의 학생 온라인 커뮤니티 게시판에 차마 입에 담기도 어려운 지방 모멸의 표현과 주장이 난무하는 것도 그런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여덟째, 지방 엘리트의 탈영토화(deterritorialization)다. 수도권 상층과 지방의 상층은 계급적 이해관계를 같이하며, 지방의 상층은 사실상 지역 여론을 지배하면서 ‘서울공화국’ 체제에 저항을 하지 않는 ‘암묵적 승인’을 하고 있다. 이에 대해 이제 곧 본격적으로 논의하겠지만, 이러한 지역의 가담을 인정한다고 해서 지역 경계를 중시하는 내부 식민지론의 설득력이 훼손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지역과 계급의 문제를 동시에 껴안음으로써 이론적 구성이 탄탄해진다고 볼 수 있다.

정리해보자면, 경제적 토대의 차원에선 ‘경제적 종속’과 ‘불평등 상태의 지속성’, 정치적 상부구조의 차원에선 ‘정치적 종속’ ‘국가 엘리트의 독점’ ‘지방 엘리트의 탈영토화’, 이데올로기 차원에선 ‘소통 채널의 독점’ ‘문화적 종속’ ‘문화적 모멸’이 작동한다고 볼 수 있다.15

 

 

지역 이익과 지역민 이익이 다른 ‘구성의 오류’

 

문제 해결의 관점에서 보자면, 지방 엘리트의 탈영토화가 가장 중요한 문제다. 지방에서 인서울 대학으로의 인재 유출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변수는 부모의 학력과 소득수준이다. 물론 학력과 소득수준이 높을수록 인서울 대학에 많이 진학한다. 지방 엘리트는 대부분 자녀를 인서울 대학에 보내며, 부유층은 서울에 아파트 한채 정도는 갖고 있다. 예컨대 2014년 6·4지방선거 당선자의 경우, 비수도권 광역 시·도지사 9명 중 8명이 서울에, 나머지 1명은 경기 과천에 아파트나 오피스텔 등을 자가나 전세로 보유하고 있었다. 지방 국회의원들도 비슷하다. 2015년 자신의 지역구 자택은 전세로 얻은 대신 서울 강남 3구에 집을 갖고 있는 의원만 31명이나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방에서 기관장을 지낸 사람들은 퇴임 후 거의 서울에서 산다. 2006년 6월 기준 생존 중인 역대 전북 도지사 12명 중 전북에서 살고 있는 사람은 단 1명뿐인 것으로 나타났다. 즉 지방 엘리트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서울시민이 될 수 있는 탈영토화의 경제적 능력을 갖고 있는바, 이들에게 내부 식민지 체제의 타파는 심혈을 기울여 쟁취해야 할 목표는 아니며 그럴 만한 동기부여도 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엘리트 지위를 열망하는 지방민들은 내부 식민지를 고착·영속화하는 ‘구성의 오류’(fallacy of composition)라는 함정에 빠져 있다. 이는 대부분의 지방이 도·시·군 단위로 서울에 학숙을 지어 지역 인재의 서울 유출을 장려하고 있는 데서 잘 드러난다. 가족 단위의 가장 큰 염원이 자식을 서울 명문대에 보내는 것임을 잘 아는 지역 정치인들은 각종 선거 때마다 경쟁적으로 학숙 건립을 공약으로 내걸면서 그걸 ‘인재육성’이요 ‘지역발전전략’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서울로 간 이들은 귀향하지 않는다는 게 충분히 입증되었다는 사실에 비추어 이는 명백한 기만행위다. 사실상 ‘지방대학 몰락’을 지역인재육성전략이자 지역발전전략으로 삼은 셈인데, 그게 어이없다고 웃거나 화를 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모두 다 진지한 표정으로 그런 지원이 더 필요하다고 말할 뿐이다. 왜 그럴까? 우리는 지역의 이익과 지역민의 이익이 같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꼭 그렇진 않다는 데 지방의 비극이 있다. 지방대학이 쇠락하거나 죽는 건 지역의 손실이지만, 자식을 서울 명문대에 보내는 건 지역민의 이익이다. 각 가정이 누리는 이익의 합산이 지역의 이익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손실이 되는 ‘구성의 오류’가 이런 식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서민층 학부모마저도 자식을 서울 명문대에 보내는 꿈을 꾸기에 그런 지역발전전략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지방에서 이런 구성의 오류는 전분야에 걸쳐 광범위하게 일어난다. 이는 가족공동체의 가치가 지역공동체의 가치와 공존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일방적으로 압도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설과 추석 때의 민족대이동이 잘 말해주듯이, 수도권 인구의 다수는 지방 출신이다. 이들의 존재가 시사하는 것처럼 누구건 지방에서 서울로 갈 수 있다는 ‘가능성’이 실제 이상으로 과장되어 인식되고 있으며, 서울을 자식이 살고 있거나 앞으로 살아야 할 곳으로 사고하기에 지방이 식민지로 전락한 지역모순을 사실상 은폐하거나 외면케 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요컨대, 내부 식민지는 중앙은 물론 지방에 의해서도 유지·강화되고 있는 것이다.

 

 

예산 분배권을 통한 ‘분할지배’

 

그런 ‘구성의 오류’에서 탈출할 길은 없는가? 개인과 가족은 생존과 성장에 유리한 길을 찾기 위해 기존 체제가 요구하는 문법에 순응할망정 지자체를 비롯한 공적 기관들은 다른 자세를 취해야 하는 게 아닌가? 그러나 이들은 안타깝게도 강자의 위협에 굴복해 강자를 사랑하기까지 하는 이른바 ‘스톡홀름 신드롬’(Stockholm syndrome)의 포로가 돼 있는 게 현실이다.16 이는 한국형 압축성장의 이데올로기로 기능해온 ‘낙수효과’(trickle down effect) 모델이 역사적 누적과 고착의 과정을 거치면서 나타난 결과다.

낙수효과 모델은 경제 분야에만 작동하는 게 아니다. 정치도 똑같은 원리에 따라 움직이며, 여기엔 보수와 진보의 차이가 없다. 심지어 사회운동 세력마저 개혁 방법론에서 ‘위에서 아래로’라거나 ‘큰 것에서 작은 것으로’라는 ‘낙수효과’의 원칙에 충실하다. 노동운동에 대한 지지와 응원도 대기업 노조 중심이며, 사회 진보를 평생 과업으로 삼겠다는 사람들도 서울이나 서울 근처에서 살아야만 발언권을 가질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

이런 서울지향적 정치에서 지방민의 의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건 중앙이 절대권력을 행사하는 예산 분배권이다. 정부 인사를 둘러싸고 늘 특정 지역이 독식했다 따위의 말이 많지만, 이런 논란이 궁극적으로 귀결되는 지점은 예산의 지역별 분배이다. 즉 예산분배에 힘을 쓸 수 있는 사람을 얼마나 보유하고 있느냐 하는 의미에서 인사가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한국인의 정당 충실도는 대단히 높다. 평소엔 지지하는 정당이 없을 뿐만 아니라 정당들에 침을 뱉다가도 투표를 할 때엔 정당만 보는 게 한국 유권자들의 속성이다. 역설이지만, 정당을 신뢰할 수 없는 집단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더욱 정당에 집착한다. 정당이 공명정대한 집단이라면 굳이 정당에 연연할 이유는 없다. 정당은 불공정과 편파에 능한 집단이기에 지역발전을 위해선 힘이 있는 정당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게 유권자들의 오랜 경험에서 비롯된 통찰이다. 유권자들에겐 정당정치에 대한 신념보다는 정당 중심의 정략적 파워에 대한 기대(또는 공포) 심리가 강하다는 뜻이다. 지역주의적 투표 행위도 ‘우리 정당’이라고 부를 수 있는 정당의 집권을 위해 표를 몰아줘 예산 등과 같은 이익을 제대로 챙기자는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보는 게 옳다.

지금도 전국의 모든 지역이 앞다투어 다 자기 지역이 가장 못 살고, 가장 차별받고, 가장 억울하다고 하소연하고 있다. 이른바 ‘우는 아이 젖 더 주기 신드롬’이다. 바로 여기서 ‘분할지배’(divide and rule)의 메커니즘이 작동한다. 지방의 각 지역은 내부 식민지 체제를 바꾸려 하기보다는 그 체제를 전제로 하여 중앙으로부터 더 많은 것을 얻어내는 데 더 큰 관심을 갖고 있다. 물론 이런 지역 간 경쟁이 바로 지역주의와 지역감정의 온상이기도 하다.

“예산 확보는 전쟁이나 다름없다. 그러기에 모든 공직자들이 중앙을 오가며 치열한 사투를 펼치고 있다”라거나 “독립운동하듯이, 죽을 각오로 한다” 같은 말을 전국의 지자체 주변에서 쉽게 들을 수 있다.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나오는 국회의원 발언 가운데 3분의 1 가까이가 지역구 민원성 요구에 집중되는가 하면, 이른바 ‘실세’들의 자기 지역구 예산 챙기기는 극에 이르렀다. 언론은 이를 ‘막가파 행태’ ‘복마전’ 등으로 비난하곤 하지만, 이는 늘 반복되는 연례행사일 뿐 새삼스러울 게 없다. 현 지방자치의 핵심은 바로 그런 예산 전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총선이나 지방선거에서 유권자들에게 가장 잘 먹히는 선거 전략은 “중앙에 줄 있다”라며 자신의 ‘줄’을 과시하는 것이다. 줄이 튼튼한 사람이 예산을 지역으로 많이 가져올 수 있다는 걸 유권자들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줄은 아무래도 전직이 화려한 사람들에게 유리하다. 역대 정권들은 그 점을 악용해 ‘단기 장관’을 양산해왔다. 총선이나 지방선거에서 여당 후보들을 많이 당선시키기 위해 장관직을 비롯한 고위직 간판을 만들어줌으로써 국정운영을 선거의 졸(卒)로 이용하는 짓을 저질러온 것이다.

아무리 성실하고 청렴하고 유능한 일꾼이라도 줄이 약하면 선택받기 어렵다. 창의적 혁신도 대접받지 못한다. 국회의원과 자치단체장의 유능도는 줄을 이용해 중앙에서 많은 예산을 끌어오는 걸로 결정되기 때문이다. 이미 중앙에 줄을 만든 사람은 자신의 비교우위를 지키기 위해 기존 체제의 유지를 원한다. 이처럼 예산 문제가 한국 정치와 지방자치의 내용을 결정한다. ‘예산결정론’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예산분배 과정이 미치는 영향력은 절대적으로 크다. 자치단체장들과 국회의원들이 유권자들에게 내미는 연말 실적 보고를 보라. 거의 대부분 자신이 무슨 예산을 따 왔다는 자랑 일색이다. 즉 정치가 ‘예산 따 오기’로 환원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중앙정부 예산분배의 투명화·시스템화’가 지역주의 해소는 물론 지방소멸 예방의 강력한 대안 중 하나다. 여기서 ‘예산분배의 투명화·시스템화’를 어떻게 할 수 있느냐고 묻는 건 우문(愚問)이다. 아니, 너무도 사소한 질문이다. 지난 반세기 넘게 지속돼온 ‘예산분배의 정치화·정략화’를 중단시키는 게 거의 불가능한 일처럼 여겨지는 현실이지만 그걸 깨부수면 답은 저절로 나오게 돼 있다. 이 분야의 전문가들이 좀 많은가. 지금 지방에 가장 필요한 건 스스로 혁신을 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절박한 위기의식과 더불어 자율적 능동성을 갖고 자기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그런데 이걸 가로막는 게 바로 예산이라는 채찍과 당근으로 장난치면서 지방을 식민지로 묶어둔 결과로 나타난 ‘스톡홀름 신드롬’인바, 이에 대한 인식과 성찰이 중요하다.

하지만 우리는 다른 분야에선 제법 선진적인 변화를 원하고 시도하면서도 예산 분야만큼은 사실상 계속 최악의 낙후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애쓴다. 예산분배 방식 같은 본질을 바꿈으로써 생겨날 대변화를 기대하는 게 아니라 바꾸는 건 하나도 없이 기존 시스템에서 더 많은 몫을 누리겠다는 식이다. 그런 생각의 연장선상에서 자신들의 반대편이라고 생각하는 정치 세력에 비난을 퍼붓는 걸로 정치 행위를 대체하려는 정서가 일반 유권자들 사이에서도 만연해 있다. 이게 바로 ‘분할지배’의 놀라운 위력인 동시에 ‘내부 식민지’의 기본 작동방식이다.

 

 

‘이성적 비관, 감성적 낙관’의 유혹

 

이렇듯 내부 식민지는 식민지 주민들에 의해 유지·강화되고 있기 때문에 사실상 출구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향후 전망에 대해 매우 비관적이다. 지방소멸은 일어날 수밖에 없으며, 우리는 늘 해온 바대로 발등에 불이 떨어진 다음에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허둥댈 게 분명하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이게 바로 오늘의 한국을 만든 ‘압축성장’의 방식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압축성장의 행동강령은 ‘무조건 돌격’이었기에 안전을 도모하거나 부작용에 미리 대비하는 건 시간과 자원을 낭비하는 사치였다. 그렇게 살아온 반세기 세월의 습속은 우리에게 내면화되었는데, 어찌 다른 경로를 모색할 수 있겠는가.

코로나 19로 인해 서울과 같은 밀집 대도시는 쇠퇴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긴 하지만, 이보다 더 빨리 우리를 덮치는 것은 헨리 키신저(Henry Kissinger)가 예측한 ‘성곽도시(walled city) 시대의 도래’라는 악몽일 수도 있다. 키신저 외에도 많은 전문가들이 코로나 19로 인해 각국이 국경을 강화하고 무역과 시민들의 이동을 제한한 것이 일시적인 조치로 끝나지 않음으로써 ‘세계화 시대’의 쇠퇴, ‘보호무역 시대’의 부활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경고를 하고 있다.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한국처럼 대외의존도가 매우 높은 나라가 가장 큰 타격을 받게 될 것이다. 이미 우리를 괴롭혀온 승자독식, 빈부 양극화, 세습사회, 각자도생의 어두운 그림자가 더욱 짙어질 가능성이 높다.17

볼프 비어만(Wolf Biermann)은 “이 시대에 희망을 말하는 자는 사기꾼이다. 그러나 절망을 설교하는 자는 개자식이다”라고 말했다지만, 사기꾼과 개자식 중 어느 쪽도 선택하기란 쉽지 않다. 동시에 이른바 ‘이성적 비관, 감성적 낙관’의 유혹을 떨쳐버리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나는 실낱같은 희망을 버리지 못한 채 이 글을 쓰게 된 건지도 모르겠다. 지방소멸이 일어난다 해도 지방은 타살당한 게 아니라 스스로 택한 자살이며, 이는 공간의 문제인 동시에 계급의 문제라는 점을 역설하는 게 시대적 소명임을 믿어 의심치 않으면서 말이다.

 

 

  1. 마스다 히로야 『지방소멸』, 김정환 옮김, 와이즈베리 2015, 146면.
  2. 「젊은 여성 급감… 지자체 80개 ‘소멸’ 위기」, 국민일보 2016.3.17.
  3. 마강래 『지방도시 살생부』, 개마고원 2017.
  4. 「“수도권에 인구 60%, 도심 50층 이하 아파트 찾기 힘들 것”」, 중앙일보 2019.3.7.
  5. 마강래, 앞의 책 7면, 90면.
  6. 같은 책 16면, 101면.
  7. 「새도시는 블랙홀… “이대로 가면 2040년 영·호남 소멸”」, 한겨레 2019.1.17.
  8. 졸저 『부동산 약탈 국가』, 인물과사상사 2020.
  9. 김만흠 「한국 지방정치의 특성: 중앙집중의 소용돌이와 지방정치의 빈곤」, 『사회과학연구』 45(2), 2006, 19면.
  10. 행정수도 이전 계획은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으로 결국 실패로 돌아갔지만, 근본적인 실패 원인은 노무현정권의 ‘독선과 오만’이었다. 행정수도 이전은 국가 대사인바, 야당을 이 역사적 과업에 참여시키는 ‘포용’ 방식으로 추진했어야 했다. 야당도 충청 표를 의식해 ‘신행정수도의 건설을 위한 특별조치법’에 찬성했기에 그건 얼마든지 가능했거니와 환영받을 일이었다. 그러나 노정권은 그런 포용보다는 행정수도 이전으로 인한 정치적 이익을 독식하겠다는 오만한 전략을 택함으로써 국론을 분열시키고 이 문제를 헌재 소송으로까지 번지게 해 실패를 자초한 것이다. 『부동산 약탈 국가』, 276~84면 참조.
  11. 「서울대 한 곳에 132개 대학 몫 지원금」, 단비뉴스 2020.5.26. 김현주는 『입시가족』(새물결 2013)에서 “중산층 가족 사이에서 자녀교육의 동의어는 ‘인서울대학’ 진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111면)라고 말한다.
  12. 조영태 「학생수가 줄면 대학 가기 쉬워질까」, 중앙일보 2019.3.28.
  13. 중앙일보 사설 「자치 단체장은 중앙 정치 식민지 벗어나라」, 2014.6.6 ; 이기우 「지방선거 정당 공천 폐지, 공약대로 지켜라」, 조선일보 2017.1.19.
  14. 경향신문 사설 「기업의 문화예술 기부금, 수도권 편중 재고해야」, 2014.10.25.
  15. 내부 식민지에 관한 논의는 상당 부분 다음 논문을 발췌·활용했다. 졸고 「지방의 ‘내부식민지화’를 고착시키는 일상적 기제: ‘대학-매체-예산’의 트라이앵글」, 『사회과학연구』 54(2), 2015.
  16. 졸고 「왜 우리는 정당을 증오하면서도 사랑하는 걸까?: 스톡홀름 신드롬」, 『우리는 왜 이렇게 사는 걸까?』, 인물과사상사 2014.
  17. 이원재·최영준 외 『코로나 0년 초회복의 시작』, 어크로스 2020.